중앙멤버십

사람과 사람

Home>월간중앙>사람과 사람

[단독 인터뷰] 안병호 전 수방사령관 4시간 격정토로 

“전두환 지시로 박근혜 만나 거액의 비자금 회수했다” 

김준범 전 중앙일보 정치부장(대우), 전 국방홍보원장
1980년 가을부터 성북동 자택에서 3개월간 박근혜 설득… 3공 시절 ‘박정희기념사업회’가 조성한 주식과 채권 회수해 당시 전두환 청와대에 전달… 전두환이 박근혜에게 전달한 6억원의 생활비와는 별도의 자금

안병호 전 수방사령관이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1980년 가을부터 약 3개월간 30차례 이상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나 대화했던 사실을 털어놨다. 만남의 동기와 목적이 더 충격적이다. 안 전 사령관은 당시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보안사령관의 지시로 박근혜가 보유하고 있던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 비자금 회수를 성사시켰다고 증언했다. 안 전 수방사령관이 가슴에만 묻어뒀던 전두환-박근혜 관계의 전말, 전두환의 하나회 청산작업 등 당시 비사를 전격 공개한다.


▎안병호 전 수방사령관은 “1980년 가을 성북동 안가에 머물던 박근혜를 설득해 1t 타이탄 트럭 절반 분량의 증권과 채권을 회수했다”고 증언했다. / 사진·김준범
안병호 전 수방사령관(75·예비역 육군 중장)과는 참으로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1993년 이른 봄 하나회 숙정 케이스로 군복을 벗고 낙향한 지 24년 만의 해후였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1942년생인 그의 외모나 건강상태는 옛날과 다름없었다. 특유의 부리부리한 두 눈빛은 여전히 살아 있었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금오산 정기를 받았음인지 더 힘이 실려 있었다.

기자는 지금껏 광양·하동 일대의 매화꽃 축제를 보지 못해 이번에 큰 맘 먹고 먼 길을 나섰다. 지난 3월 중순 카메라를 메고 상춘곡을 써볼 양으로 남도행 KTX에 몸을 실었다. 광양 매화축제를 본 다음 ‘떡 본 김에 제사’라고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안병호 전 수방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울에서 미리 기차 도착 시간을 알려줬으므로 약속된 장소에 그가 직접 차를 몰고 나왔다. 불과 15분 정도 달려 어느 산기슭으로 올라가니 안 장군 부부의 보금자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겉보기에 양옥처럼 생겼으나 자세히 보니 목재로 지은 펜션 같은 집이었다. 나무 계단을 따라 2층 거실로 오르니 창밖으로 멀리 크고 작은 산들이 보였다.

자리에 앉아 차를 한 잔 마시면서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조용하기 그지없는 산사(山寺) 같은 그의 집 2층 소파에서 단 둘만이 나눈 대화는 종횡무진 이어가다 보니 4시간이 금방 채워졌다.

노태우, “박근혜 큰 영애 만나 기금 받아오도록 추진해보라”


▎2004년 8월 9일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연희동 전두환 전 대통령을 예방, 국정 현안 등에 관한 조언을 구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그와 나눈 이야기는 크게 서너 가지로, 옛날 군 출입기자 시절에는 듣지 못했던 내용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박근혜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안 장군은 1980년 9월 전두환 대통령 취임 직후 노태우 보안사령관의 특별지시를 받고 성북동 안가에 있던 박근혜를 몇 달간 만났다. 박근혜와의 오랜 만남을 통해 ‘박정희기념사업회’가 조성해 그에게 전달했던 기금을 받아온 이야기는 지금까지 일절 공개되지 않았던 비화였다.

둘째는 1993년 3월 김영삼 정부 출범과 함께 단행된 것으로 알려진 하나회 숙정이 사실 그보다 훨씬 전인 1981년 전두환 대통령 취임 직후 먼저 이뤄졌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YS는 당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육군의 사조직 하나회에 철퇴를 가함으로써 군의 기강을 다잡으려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 점 새롭게 밝혀져야 할 대목이다.

또 하나는 안병호 장군이 2015년 봄 전두환 대통령에게 직격탄을 날린 사실을 공개한 것이었다. 과거 하나회 핵심 장군들과 함께한 오찬석상에서 그는 전 대통령이 3가지 죄를 지었다며 조목조목 따졌다고 한다. 이와 함께 안 장군은 현역시절 군의 구조를 통합군제로 가지 못하고 합동군제로 가게 만든 데 대해 천추의 한이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국군의 작전권은 우리가 가져야 비로소 온전한 주권국이 된다는 것이 자신의 철학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와 나눴던 긴 대화의 내용을 풀어보자.

안 장군은 그때를 1980년 가을 어느 날로 기억했다. 1979년 10·26과 12·12, 5·18을 거쳐 그해 9월 1일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장이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난 다음이었으니 그해 10월 이후였을 것이라고 안 장군은 말한다. 청와대 뒷산에 조금씩 단풍이 물들기 시작할 즈음이었다고 말한 것으로 봐도 그렇다.

당시 신군부의 2인자로 알려진 노태우 장군은 전두환의 뒤를 이어 1980년 8월 21일 국군보안사령관에 취임했다. 육사 20기 출신의 안병호 중령도 노태우 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 보직을 받게 되었다. 그러니까 노태우가 8월 하순에, 전두환이 9월 초에 각각 보안사령관과 대통령에 취임한 뒤 문제의 극비명령이 하달된 것이었다. 안 장군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어느 날 사령관이 찾기에 달려갔더니 ‘박근혜 큰 영애를 만나 기금을 받아오도록 추진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어리둥절했지요. 큰 영애가 10·26 직후 청와대를 떠나 어느 안가에 있다는 것만 알았지 구체적으로 어디에 살고 있는 지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기금을 받아오라니 무슨 말인지 얼른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령관으로부터 보충설명을 듣고서야 전후 맥락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안병호 비서실장에게 부여된 극비임무는 박근혜를 만나 ‘박정희기념사업회’가 조성해 놓은 거액의 기금을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또한 두 번 만나 될 일도 아닐 성 싶었다. 평생 일면식도 없는 큰 영애를 만나는 것도 어렵거니와 만나서 그런 엄청난 이야기를 어떻게 꺼낼 것이며, 그쪽에서는 나의 설득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고 한다.

안 실장은 그 자리에서 “제가 왜 가야 합니까?” 하고 난색을 표했다. 그러자 사령관은 “네가 내 비서실장 아니냐? 그러니 잔소리 말고 내 대신 갔다 와!” 하며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것은 직속상관의 명령 하달이 분명했다. 그렇게 해서 안병호 실장은 꼼짝없이 극비임무를 수행하는 실무자로 낙점됐다.

그러나 그 임무 수행에 동원된 사람은 안병호가 처음은 아니었다. 안 장군은 노태우 당시 사령관으로부터 들었다는 전후 과정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전두환 대통령은 취임 직후 어느 날 노태우 보안사령관을 불러 문제의 박정희기념사업회가 조성한 거액의 기금을 박근혜 큰 영애가 갖고 있으니 그걸 받아오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전 대통령은 “처음에 H에게 임무를 줬는데 박근혜가 ‘이 사람은 만나지 않겠다’고 거절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보안사령관에게 부탁하니 꼭 좀 맡아달라”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당시 박근혜가 왜 그(H)를 만나기 싫다고 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그 역시 군 출신이므로 현역장교 시절 청와대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으니 박근혜와 일면식 정도는 있었을 것이지만 왜 그를 기피했는지는 알 수 없다.

전두환이 박근혜에게 전했다는 9억5000만원과는 별개 자금


▎1979년 광복절 저녁 박정희 대통령과 영애 박근혜가 동작동 국립묘지 고 육영수 여사의 묘소에 분향을 마친 뒤 무덤을 둘러보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전두환 대통령의 최측근인 H 보좌관에게 주어졌던 임무가 노태우 보안사령관에게 옮겨졌고, 그것이 다시 안병호 비서실장에게 최종적으로 넘겨진 것이었다.

노태우 사령관도 처음 전 대통령의 이야기를 듣고는 “H 보좌관도 못한 일을 제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하며 난색을 표하고는 “그럼 제 대신 보낼 사람을 물색해 보겠습니다”하고 청와대를 나오자마자 비서실장을 불러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임무를 준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청와대 ‘H 보좌관’은 당시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5공의 최고 실세였다. 안 장군은 그를 익명으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전두환은 10·26 당시 안개정국 속에서 국군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한 것은 물론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통할하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상임위원장이라는 핵심 요직을 장악함으로써 국내 모든 정보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당시 ‘박정희기념사업회’라는 위장단체의 존재, 그 단체가 거액의 기금을 조성했다는 사실, 그것을 박근혜가 갖고 있다는 정보 등은 모두 국가 기밀 중의 기밀이었을 텐데 그는 이런 특급정보를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기념사업회가 조성했다는 그 기금은 10·26 당시 전두환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이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의 집무실에서 발견, 박근혜에게 돌려줬다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통치자금 중 일부인 9억5000만원과는 별개의 존재다. 전두환은 최근 자신의 회고록에서 “박근혜가 이 중 3억5000만원을 10·26 수사 비용에 보태 쓰라며 합수부로 보내왔었다”고 밝힌 바 있다.

여기서 궁금한 건 ‘박정희기념사업회’라는 조직이다. 안 장군에 따르면 이 조직은 박정희 대통령 생존 당시 만들어진 위장단체였다. 당시 공화당의 핵심 원로인사들인 윤치영 내무장관, 서울시장·백남억 공화당 의장·김진만 국회부의장·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길재호 공화당 사무총장 등이 주축이 돼 박정희 대통령 퇴임 이후를 대비해 만든 위장단체라는 것이다.

기금을 조성하는 데는 쌍용그룹의 김성곤이 핵심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들 5인은 당시 정·재계를 주름잡던 최고 실세들로, 여러 기업들로부터 주식과 채권 등의 형태로 기증 또는 헌납 받아 적립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령관으로부터 전혀 뜻밖의 임무를 부여받은 안병호 비서실장은 우선 박근혜가 살고 있는 성북동 안가의 위치를 확인해 보았다. 당시 그 집은 2층 양옥으로, 경남기업의 신기수 회장이 매입한 다음 자신이 들어가 살지 않고 비워 둔 채로 박근혜에게 기증했다고 한다. 신 회장은 그 무렵 박근혜와 혼인하고 싶다는 뜻을 몇 번 비쳤으나 성사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때 박근혜에게 신 회장의 혼인 의사를 전달한 사람은 5공 실세였던 허삼수·허화평(육사 17기, 예비역 준장) 씨였던 것으로 안 장군은 기억했다.

“그것 가지고 있으면 뭐 합니까?”


▎안병호 장군은 동서양 역사와 인문학에 해박한 군인으로 잘 알려졌다. 2002년에는 경남대학교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정책 연구’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 사진·송봉근 기자
안병호는 일주일에 2~3회씩 성북동 안가를 찾아가 박근혜를 만났다. 갈 때마다 두 시간 정도씩 머물렀다. 당시 그 집에는 가정부 한 사람만 있었다고 한다. 둘째 영애인 근영은 그 집에 처음부터 들어가지도 않고 일찍이 다른 곳으로 따로 나가 살고 있었고, 지만 군은 육사(37기) 4학년 생도로 태릉 육군사관학교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지붕에는 기와를 얹어 한옥처럼 보였으나 실내는 양옥 구조로 생활하기에 편리한 집이었다.

보안사 비서실장인 현역장교의 방문에 박근혜는 앞의 H와 달리 호의적 태도를 보였다고 안 장군은 기억했다. 안 실장은 정해진 주제 없이 그날그날 박근혜와 다양한 대화를 이어갔다. 안 실장은 생도시절부터 군사분야 외에 역사·철학·경제 같은 인문·사회과학분야에도 관심이 많아 책을 많이 읽었다. 어떤 때는 프랑스·독일의 명시(名詩)를 암송해 주는가 하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호칭은 서로 ‘큰영애님’ ‘안 실장님’으로 불렀다.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 안 실장은 자신이 찾아온 목적을 꺼내볼까 하다 ‘아니다’ 싶어 다음 기회로 미루며 지구전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섣불리 본색을 드러냈다 아니함만 못할 수도 있으리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두 사람의 만남은 지루하지 않았고, 박근혜도 좀 더 있다 가기를 바라는 눈치를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안 실장도 박근혜가 감기 기운이라도 보일라치면 서울지구병원 군의관에게 진료를 부탁하는 제스처를 보이기도 했고, 그에 대해 박근혜는 매우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18년을 내집처럼 살았던 청와대를 떠나 난데없이 성북동 안가에 혼자 살고 있던 박근혜는 당시 매우 외롭고 쓸쓸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고 그는 말했다.

몇 달이 지난 뒤 분위기가 어느 정도 익을 무렵 안 실장은 “그것 가지고 있으면 뭐 합니까? 어차피 몇 년 후면 내놓아야 할 텐데요. 제가 온 이유가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라며 설득을 시도했다. 하지만 박근혜는 처음에 완강히 거절했다고 한다. “아버지를 위해 공화당 원로 분들이 극비리에 조성한 기금을 내가 이어받아 갖고 있는데 그것을 무슨 명분으로 넘겨줘야 하느냐”며 강하게 이의를 제기했다는 것이다.

안되겠다고 판단한 안 실장은 다시 장기전으로 들어갔다. 당분간 그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자고 맘먹고 다른 화제로 돌려 실컷 떠들었다. 그는 박근혜에게 주로 역사 이야기를 많이 해주고, 특히 사회과학 분야 책들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독서 지도법도 안내해 주었다고 한다.

박근혜는 성북동 안가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경남기업 신 회장과의 혼담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몇 번인가 결혼 제의가 왔을 때 박근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총에 맞아 돌아가셨고, 내가 밤마다 그 꿈을 꾸는데 거기서 태어난 아이가 어떻게 정상적인 아이가 될 수 있겠느냐. 그래서 저는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안 장군에게 설명했다.

10·26 이전부터 박근혜는 이미 사이비 목사 행세를 하던 최태민과 깊은 관계에 빠져 있었다.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도 둘의 관계를 낱낱이 추적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면서 특단의 조치를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중정(中情)의 보고서를 믿지 않고 박근혜의 주장만 감싸고도는 바람에 마침내 10·26이라는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안 장군에 따르면 1975년 무렵 보안사령부도 최태민을 506 서울지구 보안부대 지하실에 붙잡아놓고 강도 높은 조사를 벌였다고 한다. 이때도 보안사는 조사 결과를 청와대에 보고했는데 박 대통령이 그 보고서를 바로 읽어보지 않고 “놓고 가라”고 했다. 나중에 조사보고서를 읽고 난 박 대통령은 근혜 양을 불러놓고 ‘이런 조사 결과가 올라왔는데 그게 사실이냐?’고 묻자 딸이 “어디서 만든 건지 모르지만 최태민 목사 절대 그런 사람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입니다” 하며 울음을 터뜨렸고, 그때마다 대통령은 엄마 잃은 딸을 그저 불쌍하다며 끼고 돌면서 몇 차례나 없던 일로 덮어버리곤 했다고 한다.

조성된 비자금의 규모는 얼마일까?


▎1980년대 초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청혼했던 신기수 경남기업 사장(맨 왼쪽). 1983년 일본 도쿄에서 건설차관 도입협정에 서명하고 있는 모습이다.
1981년 1월 어느 날, 마침내 박근혜가 입을 열었다. 안 장군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3개월쯤 다닐 때였어요. 박근혜가 ‘그동안 안 실장님이 말씀하신 것 이제 전해드릴게요’ 하는 겁니다. ‘박정희기념사업회’가 조성한 비자금을 마침내 내놓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몇 달 전 사령관으로부터 부여받은 최대 과업이 해결되는 순간이었죠. 그 즉시 나는 김은호 당시 문공부 차관에게 전화를 걸어 ‘각하께서 하명하신 그것을 박근혜가 내놓겠다고 하니 올라가서 받아가시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박근혜가 비로소 나의 오랜 설득 끝에 마음을 움직여 기금을 내놓게 된 것이었습니다.”


▎3공화국 시절 고흥문 신민당 사무총장과 밀담을 나누고 있는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왼쪽). 안병호 전 사령관은 김성곤 씨가 ‘박정희 기념사업’ 자금을 모으는 데 핵심 역할을 맡았다고 증언했다. / 사진·중앙포토
당시 안 실장은 박근혜로부터 그 비자금을 받게 되면 즉시 김은호 문공차관에게 연락하고, 김 차관은 그것을 받아다 청와대에 갖다 주도록 사전에 각본이 짜여 있었다. 그러나 왜 당시 문공차관이 그 역할을 담당했는지는 안 장군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당시 문공부 장관은 이진희 전 서울신문 사장으로, 전두환·노태우 등과 육사 11기 동기였다.

박정희기념사업회가 조성했다는 그 비자금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 안 장군에 따르면 주식과 채권 등으로 된 뭉치가 1t짜리 트럭 절반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김은호 차관이 받아다가 청와대에 전달한 그 기금의 액수와 행방에 대해서는 안 장군도 전혀 알지 못한다고 했다. 수백억 원이 될지, 그 이상이 될지 확인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안 장군도 그저 “카운트리스(셀 수 없다)”라고만 말했다.

안병호 장군과 인터뷰 도중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JP)의 발언이 화제에 올랐다. 김 전 총리는 최근 박근혜를 가리켜 “어머니·아버지의 나쁜 점만 빼 닮았다”고 말해 주목을 끌었다.

이에 대해 안 장군도 한마디 덧붙였다. 석 달 가량 성북동 집을 방문해 대화를 나눠본 경험에 비춰볼 때 박근혜는 결코 정상적인 사고체계를 가진 사람으로는 볼 수 없더라는 것이었다. 대화라는 것은 주고받는 것인데 일방적으로 듣거나, 자기 말만 하고 연결이 안 되니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독백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안 장군은 김 전 총리와 고 육영수 여사, 딸 박근혜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숨겨진 이야기를 소개했다. 잘 알려진 대로 김종필의 부인 고 박영옥 여사는 박정희 대통령 셋째 형의 딸로 박정희의 친조카이고, 김종필은 조카사위가 된다. 그런데 육영수와 김종필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JP가 박 대통령의 첫 부인 김호남(1920년생)이 낳은 딸 박재옥(1937년생)을 육 여사 몰래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을 안 뒤부터 관계가 소원해졌다고 한다. 박재옥은 열 세 살 때 어머니와 헤어지는 바람에 그 후 친가·외가·사촌언니 박영옥(JP의 부인)의 집 등으로 전전하다 한 때는 계모인 육영수의 집에 들어가 생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 박정희의 부관으로 있던 한병기(85, 전 유엔·캐나다 대사)와 결혼하게 됐는데, JP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10·26 이후 전두환-박근혜 관계는 절연


▎JP와 육영수 관계는 애증이 점철됐다. 1971년 4월 15일 7대 대통령 선거 유세장에서 JP가 따가운 봄 햇살을 가리기 위해 고깔모자를 만들어 육영수 여사에게 씌워주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안 장군에 따르면 사춘기의 박재옥은 아버지 박정희에게 몹시 나쁜 감정을 갖고 있었고, 이를 눈치 챈 JP가 그녀를 수시로 찾아가 달래고 챙겨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육 여사는 JP를 결코 가까이할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엄밀히 말해 김호남이 박정희의 본처라면 육영수는 그의 후처가 되고, 박재옥이 큰 영애라면 박근혜는 둘째 영애가 되어야 맞는 것 아닌가?

그런데 육영수 여사와 박근혜는 둘 다 똑같이 김호남과 박재옥의 존재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사람들의 존재가 알려지면 자신들은 졸지에 박정희의 후처와 둘째 딸이 돼버리므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안 장군은 박근혜와 전두환·노태우 등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물론 이들 두 사람은 젊은 장교시절부터 청와대에서 근무한 적이 있어 박근혜를 잘 알았다. 특히 전두환은 박 대통령의 총애를 한몸에 받아 ‘양아들’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특별한 관계였다. 그러나 박근혜-전두환의 관계는 10·26을 계기로 완전히 갈라졌다고 볼 수 있다.

박근혜가 볼 때는 전두환이 먼저 ‘돌아섰기 때문’에 관계가 악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의 총애를 받은 수많은 사람 가운데 보은(報恩)의 정을 잊지 않은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다는 게 평소 박근혜의 말이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으로 박근혜는 전두환을 꼽은 것 같다. 박근혜가 대통령 취임 후 전두환에 대해 강도 높은 세무조사와 재산 환수를 결행한 것이 해묵은 정치보복으로 비친 것도 그런 배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에 비해 노태우와 관계는 비교적 원만한 것으로 안 장군은 말했다. 노태우도 경호실 작전차장보 등을 하면서 박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모셨지만, 전두환과는 차원이 달랐다. 노태우-박근혜 관계는 안병호의 중재역할도 한몫했던 것으로 보인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 명절 때면 박근혜에게 선물도 전하는 등 나름대로 소원하지 않을 만큼의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박지만이 육사를 졸업하던 날(1981년 3월), 안 장군은 박근혜 3남매와 노태우 대통령 가족 4명을 서울 롯데호텔로 초청, 졸업기념 축하연을 베풀기도 했다.

김영삼 정부 출범 초기인 1993년 3월 8일 육군 사조직 하나회가 된서리를 맞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하나회 핵심 멤버인 육참총장 김진영(17기), 기무사령관 서완수(19기), 수방사령관 안병호(20기) 등이 이날의 주인공이었다. 안 장군은 “그동안 우리 군대가 두세 번 망했는데, 하나회는 YS에 앞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먼저 없애버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나회는 1960년대 초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강력한 권유와 지시에 의해 태동했다는 사실도 밝혔다.

하루는 박정희 대통령이 차 안에서 전두환에게 “지금 군에는 알래스카(함경도 출신)가 대부분이다. 그 다음에는 너희 경상도 출신들이 군을 맡아야 할 텐데, 육사에 친한 친구들끼리 모임 같은 거 뭐 없나?”라고 묻기에 “없다”고 했더니 “한번 생각해 봐!” 하더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알래스카’란 6·25 이후 군 지휘부를 형성하고 있던 이북, 특히 함경도 출신 장군들을 말한다. 정일권 육참총장, 한신 합참의장, 김동하 해병 중장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 무렵 군의 상층부는 확실히 이북 출신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박정희는 일찍부터 경상도 중심의 군내 대체세력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안병호 장군은 현역 시절 전두환 장군으로부터 직접 들은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출신 육사 11기생들로 하나회를 구성했다. 하나회는 그 후 1979년 10·26과 12·12를 거치면서 군 사조직으로서의 존재가치를 십분 발휘했다. 결정적으로 두 사건을 성공시킴으로써 그들의 목표를 달성한 셈이다.

국가권력의 정점에 올라선 전두환의 입장에서는 이제 사조직 하나회가 오히려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음을 간파했던 듯하다. 자기가 만든 조직을 자기 손으로 해체시키는, 이른바 토사구팽이나 같은 것이었다. 이어지는 안 장군의 말.

“나는 99인맥이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결혼 후 어느 명절날 신당동 집에서 육영수 여사의 친정 식구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이 안고 있는 아이는 서영 씨, 박재옥 씨, 육영수 여사의 친정어머니, 뒤의 학생은 육 여사의 조카, 한병기 씨, 육영수 여사, 그 앞의 아이는 근혜 씨, 육 여사의 여동생. / 사진·중앙포토
“전두환이 대통령 되자마자 ‘내 등에 비수를 꽂을 수 있는 조직이나 집단은 하나회 밖에 없다. 바로 해체시켜라.’ 그래서 보안사와 안기부를 시켜 하나회를 제일 먼저 없앴습니다. 그렇게 없어진 유령 같은 하나회를 YS가 끄집어 내 국민의 공분을 사도록 이용했어요. 그 군대는 망해버렸습니다. A, B급 장교들 다 옷 벗고 나갔잖아요. C, D급에 의해 장악되고 양육된 게 지금의 군 수뇌부입니다.”

바로 그런 이야기를 속 시원히 밝히고 싶어 국회의원 출마를 시도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 당시 언론은 전부 김영삼 편으로, 반기를 드는 언론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면책특권 있는 국회에 가서 말 좀 해야겠다, 해서 국회의원 출마를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내 뜻대로 안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회가 해체된 얼마 후 하나회의 참모장 격인 이 모 장군(육사 14기)이 전 대통령에게 이렇게 건의했다고 한다. “하나회 없앤 뒤로 사기가 많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니 이거는 고마 모른 척 하십시오. 제가 애들 보직 좀 풀어주고 관리해 보겠습니다.” 공식적으로는 해체됐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중간 보스가 음으로 양으로 챙겨준 덕택에 하나회는 그런대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나회 해체와 관련해 하나회 핵심 멤버 중 한 사람인 민병돈 전 육사 교장(82, 육사15기)도 “전두환 대통령 취임 직후 하나회가 공식적으로 해체된 건 사실”이라고 확인해주었다. 다만 안기부와 보안사를 통해 강제적으로 해체한 것은 아니었다고 밝혔다.

민 장군에 따르면 당시 육사 12~19기의 하나회 핵심 5~6명 정도가 경복궁 30단에 모여 간단한 의식을 갖고 자발적으로 해체를 결의했다고 말했다. 이제 대통령도 배출했으니 하나회의 존재가 대통령에게 부담이 되어선 안 된다는 점에 공감하고 이처럼 자발적 해체를 단행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내가 왜 하나회를 좋아하겠습니까? 전두환 7년 동안 군 수뇌부는 하나회 출신들이 장악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두환 대통령과 근무 인연이나 친소관계가 있는 사람들만 발탁된 것입니다. 난 하나회보다 하나회 아닌 후배들을 발탁하고 도와줬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 후 1981년 해체된 하나회 대신 자신의 직계라고 볼 수 있는 이른바 ‘99인맥’(공수 9여단, 보병 9사단)을 적극 밀어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안 장군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99인맥이라는 것은 우선 말이 안 됩니다. 내가 9사단 작전참모로 간 것은 이광로 사단장 때로, 후임 노태우 장군보다 1년 6개월이나 앞서서 간 것이었고, 이필섭(16기)·이문석(17기)·구창회(18기) 장군도 나보다 뒤에 왔죠.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9사단에 제일 먼저 갔으니 99인맥의 원조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또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하나회 척결’이라는 것이 YS가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하고 기획한 결과 이뤄진 것이 아니라 취임(1993.2.25) 전후 청와대 참모 가운데 한 사람의 아이디어에 따라 단행된 일종의 군내 숙청이었다고 회고했다.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바로 문민정부 초기 청와대 수석 비서관을 지낸 K씨였다.

“경기고 출신의 서울신문 기자로 있던 K씨가 당시 나한테 귀띔하더라고요. ‘야, 네가 1번으로 날아갈 것 같다. K수석이 YS에게 그렇게 보고했다고 한다. 이번에 군의 기강을 확실하게 잡으려면 이런 구실(하나회 숙정)이 필요하다고 해서 그런 건의를 했다’고 말하더군요.”

전두환에게 직격탄을 날리다


▎1981년 7월 16일 전두환 대통령이 육군대장으로 예편한 노태우 전 국군보안사령관에게 정무 제2장관 임명장을 주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2015년 3월 하순 어느 날 K장군이 안병호가 살고 있는 하동군 자택을 방문했다. 육사 15기 출신으로 야전군사령관을 지낸 하나회 핵심 멤버였다. 평소에는 왕래가 없던 그였기에 “웬일이십니까, 이런 시골에까지?” 했더니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각하께서 점심에 초대하셨다”며 올라가자고 적극 권했다.

안 장군은 1986년 준장 진급 신고 때 이후 처음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만났다고 한다.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오찬을 함께한 것은 4월 4일이었다. 오찬 참석자는 K장군 외에 육사 17기 출신 H장군까지 4명으로, 모두 하나회 핵심 멤버들이었다. 그날의 모임이 어떤 배경에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안 장군도 “말하기 곤란하다”며 끝내 밝히지 않았다. 그 자신도 연희동엔 가고 싶지 않았지만 뭔가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던 건 분명해 보였다.


▎전두환(뒷줄 오른쪽 두 번째)이 육사생도 시절 11기 동기들과 함께 찍은 사진. 이들 중 상당수가 뒷날 하나회 멤버가 되어 육군의 핵심 자원으로 급성장했다.
햇볕 좋은 봄날 하나회 4인의 특별한 오찬장에서 식사를 마치고 술이 몇 잔 오갈 때쯤 안병호 장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것은 전두환 대통령을 향한 직격탄이었다. 그 자리에서 육사 20기 출신인 안 장군은 서열상 가장 후배였다. “제가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만 각하께서는 3가지 큰 죄를 지으셨습니다.” 순간 좌중에 긴장감이 흘렀다. “하나는 대한민국 육군에, 또 하나는 육군사관학교에, 세 번째는 하나회에 죄를 지은 것입니다.”

이 말이 끝나자 전두환 전 대통령이 “뭐야, 임마?” 하며 자신을 쳐다보더라고 안 장군은 전했다. 함께 있던 나머지 두 사람도 그의 말을 제지하거나 말리지 않고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이들은 지금도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여전히 ‘각하’라는 호칭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지는 그의 말.

“어떻게 전 대통령 같은 분이 육군에 들어오게 됐느냐고 젊은 장교들이 묻습니다. 둘째, 전 대통령께서 어떻게 육사를 나오셨느냐면서 의문을 제기합니다. 셋째, 제12대 대통령 취임(1981.3.3) 후 각하께서 하나회를 제일 먼저 없애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1993년 3월 YS(김영삼)가 이미 존재하지도 않는 하나회를 척결한다며 유능한 군인들을 대거 몰아냈습니다. 그때 각하께서는 ‘진작에 없어진 하나회를 왜 치느냐’고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지켜보고만 계셨습니다.”

이날의 소동은 전두환에게 일생일대의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비록 권력을 내려놓은 지 수십 년이 지났다고 하지만, 하나회의 창업자이고 전직 대통령인 그가 육사 10년 후배 장군으로부터 그런 직격탄을 맞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내용을 들어보면 전두환의 명예와 자존심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했다. 옛날 왕조시대라면 역린(逆鱗)을 건드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대놓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묻자 안 장군은 “현역 때 같으면 사형감 아니겠소?”이라며 웃었다.

전두환, “안병호를 동해안으로 보내라” 특별지시


▎박정희 전 대통령 10주기를 맞은 1989년 10월 26일 국립묘지 고인 묘소에서 추도 행사가 이뤄졌다. 사진은 장녀 박근혜가 연설하는 모습. / 사진·중앙포토
연희동 오찬은 두 시간 남짓 이어졌다. 안병호 장군이 예고 없이 돌직구를 날리는 바람에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이순자 여사가 잠깐 얼굴을 비치더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보고는 조용히 자리를 피하더라고 안 장군은 전했다. 그는 “내가 눈을 딱 부라리고 이야기하면 눈에서 악마의 빛이 난다”고 말했다.

그의 이글거리는 두 눈은 현역시절부터 트레이드마크였다. ‘전 대통령이 왜 가만히 듣고만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안 장군은 “뭐라고 말했다가는 반론이 들어와 시끄러워질 것 같으니 그런 것 아니겠느냐?”고 대답했다. 같이 앉아 있던 두 명의 육사 선배도 안 장군의 말에 가타부타 말을 보태지 않았다고 한다.

안 장군은 영관장교 시절부터 하나회의 총수 격인 전두환으로부터 인정받기보다 어느 정도 경계의 대상인물 가운데 하나였던 듯하다. 일례로 그가 육군본부 인사통제실장 때는 그 자리가 장군 진급 0순위임에도 탈락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그의 이름을 콕 찍어 “안병호를 사람 많이 모이는 곳에 보내지 말고 동해안 쪽으로 보내라”고 특별히 지시해 강원도 고성군 최북단에 있는 22사단(율곡부대, 당시는 뇌종부대) 부사단장으로 가게 됐다. 그는 ‘군 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일개 육군 대령의 보직을 이래라저래라 관여하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라며 “제가 바로 그 당사자”라고 말하며 웃었다.

안 장군은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평가 부분에서는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북한이 가장 많은 비난을 퍼부었던 것도 뒤집어 보면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무서워 한 지도자였기 때문 아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대령 때 부(副)사단장, 소장 때는 6군단에서 부군단장, 중장 때 2군사령부에서 부사령관 등 부(副) 지휘관을 세 번이나 역임했다. 그중에서도 2군 부사령관은 원래 소장급 보직인데 수방사령관을 지낸 중장 출신의 안병호가 그 직책을 맡는 이변도 발생했다. 준장 때 편제에도 없는 합참 작전국 차장 보직을 1년이나 맡았던 것까지 포함하면 네 번이나 부 지휘관을 했던 셈이다.

전 대통령에 대해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그분이 몇 천억 원을 먹었든 말든 나한테는 중요하지 않아요. 민정당이라는 가공의 정당을 만들어 뿌리내리려고 하다 보니 몇 천억 원은 들었겠죠. 그 당시 정치가 다 그랬으니까. 그런데 아들에게 준 600억 원은 무슨 돈입니까? 나는 아들·딸 결혼시킬 때 집 한 채 못해줬습니다. 교육시키느라 그럴 수밖에 없었지요. 어떻게 600억~700억 원을 줍니까? 국가에 무슨 기여를 했다고. 공직자는 청렴이 생명입니다.”

안 장군은 군 재직시절 가장 안타까운 것이 우리 군의 기본구조를 통합군제로 만들지 못하고 지금의 합동군제로 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영관장교 시절부터 통합군제를 깊이 연구해 이를 전두환·노태우 두 대통령에게 보고했지만 끝내 성사시키지 못해 천추의 한이 된다고 털어놓았다.

통합군제 실현 못한 818 군 구조개혁


▎1992년 가을 무렵의 안병호 수도방위사령관.(앞줄 가운데 군복 입은 이) 안 사령관이 당시 국방부 출입기자단을 수방사에 초청해 행사를 치른 뒤 찍은 기념사진이다. 안 사령관 오른쪽 바로 옆에 선 이가 이번에 인터뷰를 진행한 김준범 당시 중앙일보 기자다. / 사진·중앙포토
국방대학교 김종휘 교수(후에 청와대 안보수석)와 함께한 연구결과는 우리 군을 통합군제로 개혁하는 것이었다. 암호명 ‘818사업’으로 추진했던 이 프로젝트는 그러나 중간에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정보가 유출돼 없던 일이 돼버렸다고 안 장군은 밝혔다.

“내가 육본 작전차장 할 때도 ‘작전통제권 문제를 언제까지 미군한테 맡겨놓을 것이냐? 왜 찾을 준비를 하지 않느냐? 그걸 하려면 우리 군의 구조를 통합군으로 바꿔야 한다’며 김 교수와 내가 대략적인 구조개혁 방안을 완성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했더니 ‘이거 놔두고 가라’고 해서 나왔습니다. 그 사이 J 국방장관이 한미연합사(CFC) 사령관에게 이 사실을 흘렸어요. 얼마 후 다시 갔더니 ‘야, 그거 내 캐비닛에 들어갔는데 지금 할 형편이 안 된다. 민심도 그렇고…. 다음 대통령에 넘겨주기로 하고 없던 걸로 하라!’고 말하더군요. 존 위컴 사령관이 먼저 알고 선수를 쳐버리는 바람에 통합군으로 못 가고 합동군제로 가게 된 겁니다.”


▎경남 하동군 자택에 걸린 수방사령관 시절의 안병호 장군 사진. 노태우 전 대통령은 9사단장 시절 참모들에게 “안병호에게 말 잘 못하면 죽는다. 나도 기합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 사진·송봉근 기자
그는 방만한 군 구조를 과감하게 줄이고 육군의 사단 편제도 대폭 경량화해 전투력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가 주장했던 건 우리 사단 편제가 너무 무거우니 여단으로 가볍게 편성해 비용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또 장군 자리 대령이 맡으면 어떻습니까? 부대를 경량화하고 심플하게 해서 언제든지 싸울 수 있게 만들어야 하는데, 사단장 T/O 줄어드는 게 뭐 그리 중요합니까?”

그는 작전통제권을 미국에 맡긴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군사주권을 말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우리는 국토도 반쪽인 데다 군사주권마저 6·25 이후 계속 미군에 의존하고 있으니 그런 군대, 그런 국가가 지구상에 어디 있느냐며 통탄했다.

“작전통제권을 가져오면 처음 몇 년은 힘들겠지만 그것이 자주국방으로 가는 지름길 아닙니까? 작전통제권을 가져야 비로소 온건한 주권국가가 된다는 것이 나의 철학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원자탄을 갖든 말든 미국이 경제제재를 할지라도 직접 작전지휘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도 북한에 할 말이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 군의 99%가 작전통제권을 미군에 맡기자고 하는 것 아닙니까?”

- 김준범 전 중앙일보 정치부장(대우), 전 국방홍보원장

[박스기사] 안병호 장관 무엇을 증언했나

● 윤치영·백남억·김진만·김성곤·길재호 등이 주축이 돼 박정희 대통령 퇴임 이후 대비 ‘박정희기념사업회’ 설립
● 기금 조성 과정에는 공화당 재정위원장을 지낸 쌍용그룹 김성곤 회장이 핵심 역할
● 회수한 자금은 1t 트럭 절반 분량의 주식과 채권, 김은호 당시 문공차관이 받아가 청와대에 전달
● 국군보안사령부, 1975년 최태민을 506 서울지구 보안부대 지하실에 붙잡아 놓고 강도 높은 조사 벌였다
● 육영수-박근혜가 JP 미워한 결정적 이유는 JP가 박정희의 본처 김호남 소생의 딸 박재옥을 챙겼기 때문
● 박근혜,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 청혼 거절한 이유 “돌아가신 부모 밤마다 만나는데 어떻게 아이 낳아 키우나” 심경 토로
● 하나회는 1981년 위협 느낀 전두환 지시로 사실상 해체… YS의 공적 아니다
● 재작년 4월 전두환에게 “대한민국 육군과 육군사관학교, 하나회에 큰 죄 지었다”고 직격탄
● 전시작전권 찾는 것이 자주군 육성의 출발점, 지금의 합동군제 대신 통합군제 도입 절실

[박스기사] 안병호 장군은 누구인가? - 대통령의 진급 청탁 거부한 ‘천하의 안병호’


안병호 전 수방사령관(75·예비역 육군 중장)은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지 불과 일주일 남짓 만에 현직에서 보직해임됐다. 그에게는 현역시절 ‘천하의 안병호’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사리에 맞지 않으면 직언을 서슴지 않는 곧은 성격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노태우 장군이 사단장 시절 참모들에게 “안병호에게는 말조심해야 한다. 잘못 했다가는 죽는다. 나도 그 친구한테 기합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는 육본 인사참모부장 시절 단심제(單審制)였던 진급심사제도를 삼심제로 바꿨다. 그해 청와대에서 아무개를 진급시켜주라는 쪽지가 내려왔다. 그런 것은 진급철마다 있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안 장군은 그러나 그 명단 속의 인물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심사 과정에 올렸다. 결과는 탈락이었다.

정보계통으로 보고를 받은 대통령이 당장 청와대로 호출명령을 내렸다. 안병호 인사참모부장은 노태우 대통령 앞에서 이런저런 사유로 심사에서 탈락됐다고 소상히 경위를 설명했다. 그러자 대통령도 “그렇다면 무리해서 시킬 수 없겠지!” 하며 충분히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고 그는 말했다.

다른 동기생들보다 늦은, 소령 때 하나회에 편입된 그는 생도 시절부터 다방면에 걸친 독서를 통해 인문·사회과학 분야에도 폭넓은 지식과 경륜을 쌓았다. 보안사 비서실장 시절 박근혜를 만나 장기간 설득 끝에 소기의 성과를 올린 배경에도 그가 쌓아둔 그만의 내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율곡비리 때 엮어넣으려 했지만 나한테 나올 게 어딨어!

안병호는 잘나가는 하나회 출신들과 달리 걸어온 길이 결코 순탄치 않았다. 하나회의 일원이 된 것도 동기생보다 늦은 소령 때였다. 하나회원이니 승승장구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맞지 않는 것 같다. 주특기도 사단 작전참모까지 마친 이후 대령 때 인사 쪽으로 전환했다. 그는 하나회라고 무조건 인사에 특혜를 주지 않았고, 비(非)하나회 장교들도 평소 유심히 봐뒀다 적당한 때 요직에 발탁하곤 했다. 그중 3명은 국방장관까지 올라갔다고도 밝혔다.

그는 1993년 7월 고향인 경남 진주로 낙향한 이후 지금까지 24년을 줄곧 그곳에서 집을 짓고 살고 있다. 두 살 위인 부인 김효정(金孝貞) 여사가 이화여대 기독교학과를 나온 덕에 현재 살고 있는 하동군 진교면 금오산 기슭에 조그만 교회를 지어 목회 활동도 겸한다. 그리 높지 않는 산중턱 조금 못 미치는 위치에 집터를 잡고 17년 전 환갑기념으로 손수 2층짜리 집을 지은 뒤, 이곳에서 자연과 벗하며 마음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다. 전망이 좋아 어느 스님이 찾아와 절터로 쓰려고 하니 팔지 않겠느냐고 묻더라는 이야기도 전해주었다.

그는 “육사 생도시절 왕릉을 찾아다니며 능지기한테서 배운 풍월로 산수(山水)를 좀 볼 줄 안다”며 “이 자리도 그렇게 찾은 것”이라고 말했다.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를 흐르는 섬진강에서 15분 거리, 충무공 이순신의 노량 앞바다까지 8분 거리에 그의 집 터가 자리 잡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명당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주말에 손자들 기다리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말한다. 슬하에 남매를 두었는데, 아들(안성훈)은 서울공대 기계공학과 교수, 딸(안혜리)은 국민대 미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미국 MIT를 나온 며느리는 한양대, 사위는 카이스트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4명 모두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재원이다. 특히 아들은 미국 스탠퍼드대를 졸업하고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 근무하기도 했던 항공우주공학 전문가다.

안 장군은 아들과 딸을 둘 다 유학 보내 박사까지 만드느라 살림은 쪼그라들었지만 마음은 늘 부자처럼 살고 있다고 자랑한다. 1993년 전역 당시 YS 정부가 그를 율곡(栗谷)사업 비리로 엮어보려고 계좌추적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털어봤지만, “나온 것이라곤 현금 300만원뿐이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그때서야 안 장군에게 최종 전역명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집안에 박사를 넷이나 거느린 탓일까? 안 장군은 낙향 후 뒤늦게 공부를 시작, 마산에 있는 경남대학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정책 연구’에 관한 논문으로 2002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예비역 육군 중장이 회갑을 전후한 나이에 박사과정에 들어가자 주위에서 과연 끝까지 완주할까 반신반의했다고 그는 전했다. 논문도 어떤 사람들처럼 학위 가진 부하장교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썼다.

집 주변에 가축도 기르고 각종 채소와 나무들을 가꾸며 살고 있는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쉽게 배신하지만 내가 기른 짐승은 절대 배신하지 않습니다. 정을 준만큼 나를 좋아하고 따를 뿐 결코 배신하지 않거든요.”

세상과 떨어져 금오산 자락에서만 24년을 살다 보니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천하의 안병호’가 어느덧 도인이 된 듯 보였다.

/images/sph164x220.jpg
201705호 (2017.04.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