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종.심층취재

Home>월간중앙>특종.심층취재

[심층 리포트] 러시아가 보는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 

북한 핵은 다국적 기술의 결정체 

박종수 전(前) 러시아 공사
러시아-중동-중국-우크라이나 약한 고리를 뚫고 첨단기술 획득… 핵 야망 접은 적 없는 북한, 5~7년 후엔 고체연료 ICBM 보유 전망

▎북한은 2013년 2월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제3차 핵실험 성공을 축하하는 대규모 행사를 열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에 대해 선제타격 등 단호히 대처하겠다고 공언했다. 북한 김정은은 신년 초 미국에 도달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 성공을 호언장담했다. 지난 2월 14일 북극성2호 중거리미사일을 발사하고 다음날 말레이시아공항에서 이복형 김정남을 독살시켰다. 그리고 3월 6일 4발의 탄도미사일을 또 발사했다. 북한의 지속된 도발과 미국의 유례없는 초강경 대북정책으로 한반도 정세는 더욱 불안정해지고 있다. 그 중심에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문제가 있다.

과연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능력은 어느 수준인지, 미국의 북핵시설 선제타격과 북한의 맞대응이라는 극한 시나리오는 현실화될 것인지 한국 정부로서는 예의주시해야 할 대목이다. 이에 북한의 핵·미사일 기초를 제공한 러시아의 평가는 오늘날 북핵 상황을 진단하고 그 해법을 찾는 데 보다 객관적인 잣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945년 8월 일본 본토에 투하된 핵폭탄의 위력은 빨치산 대장 김일성의 뇌리 속에 강하게 각인됐다. 단 두 발로 일왕을 무릎 꿇게 한 신예무기의 정체는 무엇일까? 전율과 함께 호기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비단 김일성만이 아니었다. 스탈린조차도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에서 신형무기를 개발했다는 트루먼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북한 정권사는 단적으로 핵개발의 역사였다. 김일성의 비핵화 유훈은 위장전술에 불과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핵·미사일 개발에 적지 않은 심혈을 기울였다. 아들 김정일은 물론이요, 손자 김정은도 핵개발에 대한 집념을 잠시도 멈추지 않고 있다. 말할 나위 없이 핵개발의 원천은 바로 종주국 소련이었다. 소련이 북한을 위성국으로 세우면서 핵 시설과 기술도 함께 전수했다. 물론 ‘평화적 이용’이라는 전제가 뒤따랐다. 그러나 북한은 소련의 감시망을 피하면서 지속적이고, 단계적이며, 우회적인 방법으로 핵기술을 습득해왔다.

김일성의 비핵화 유훈은 위장전술


▎북한 김일성 전 주석 생일 105주년인 4월 15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경축 열병식에 등장한 북극성2형 미사일.
그렇다면 북한은 왜 그토록 핵개발에 올인해야 했을까. 첫째로 제2차 세계대전 말 일본 본토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15년간 빨치산부대에서 항일전투를 했던 김일성에게는 신비의 무기였다. 둘째, 미국 지도부가 한국전 개전 초기에 북한군을 신속히 퇴각시키기 위해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검토했다는 사실이다. 셋째, 김일성은 1962년 10월의 쿠바사태를 지켜보면서 사회주의 동맹국들이 미국과의 핵갈등 상황에 처할 때 종주국 소련으로부터 직접적인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넷째, 1970년대 남한은 비밀리에 핵개발을 추진하다가 미국의 압력 때문에 접었지만, 그 대신 미국은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했다. 다섯째로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사회주의권이 해체되고 중동의 독재국가들이 미국에 굴복하는 것을 목도하면서 의지할 것은 핵무기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1946년에 설립된 김일성대에는 핵개발의 이론적 기초를 다지는 물리수학부가 개설됐다. 대학 설립위원인 도상록 교수가 초대 학부장을 맡았고, 서울대 리승기 교수와 연세대 한인석 교수가 나중에 합류했다. 이들이 소위 북한 핵연구 1세대의 3인방이다. 그리고 정근·최학근·서상국 등 소련 유학파 3인방이 2세대로 이어갔다.

김일성은 한국전쟁 직후 1954년 인민군을 개편해 핵무기 방위부문을 설치하고 이듬해에 핵물리연구소를 창설했다. 1956년에는 소련과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협력협정’ 2건을 체결했다. 북한이 모스크바 북방 110㎞ 지점에 위치한 두브나연구소에 연수생을 본격적으로 파견한 시기도 바로 이때였다. 북·러간 과학 협력이 중단된 1990년까지 30여 년간 북한 과학자 250여 명이 이 연구소를 거쳐갔다.

1964년 북한은 소련의 지원 하에 영변에 핵연구소를 건설했다. 이때부터 북한의 핵연구는 일정한 규모를 갖추게 된다. 이듬해 8월에 소련은 0.1MW 임계실험장비와 2MW 연구용 핵반응로(IRT-2000) 및 광선연료 가공설비를 북한에 제공했다. 1970년대 말 북한은 핵시설을 급속히 확대하면서 핵무기 제조를 포함한 핵개발 임무를 북한 과학원, 인민군 및 보위부에 부여했다. ‘평화적 이용’이 목적이었다면 왜 군기관에 전담시켰겠는가?

북한은 1979년 자체 기술로 실험용 핵반응로 건설에 착수해서 1986년 정식 운전을 시작했다. 이에 앞서 1985년 영변 핵시설에 이용된 핵연료봉을 사용해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실험실도 건설했다. 그해 12월에는 강성산 내각수상이 모스크바를 방문, 북한의 핵발전소 건설협정을 체결하고 아울러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으로 양국 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분야에서 협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이로써 소련 측이 그간 거부해온 발전소 건설문제도 탄력을 받았다.

1986년 1월에 북한은 영변 핵물리연구소에 5MW 실험용 흑연 원자로를 도입했고, 1987년 영변에 연구센터 역할을 할 화학방사실험실 건설에 착수했으며, 나중에 ‘사용후 핵연료’ 가공공장으로 활용했다. 이것은 ‘사용후 핵연료’를 연간 약 200t 가공할 능력을 갖춘 세계에서 둘째로 큰 시설이다.


▎미사일 발사 기지로 추정되는 북한 평안북도 금창리 시설(왼쪽)과 이란 타브리즈 미사일 기지의 지하 격납시설.
1980년대 영변에 핵개발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시설들이 100여 개 이상 건설됐다. 대표적인 것으로 동해안 신포의 핵발전소용 전기원자로 4개(각각 440MW), 군사분계선 북서쪽 48㎞ 지점의 평산 우라늄광 채취·가공공장 및 박천의 저농축 우라늄공장 등이 대표적이다.

영변은 소련의 지하 핵개발 단지인 크라스노야르스크-26과 매우 흡사하다고 한다. 지하 약 180m에 건설된 크라스노 야르스크-26은 플루토늄 원자로 3기와 폐연료봉에서 플루토늄을 분리하는 방사화학시설뿐만 아니라 탄도미사일 공장 등을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수의 북한 전문가가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러시아, 1990년대 초 북한의 핵개발 능력 인정


▎북한 김일성종합대학 내에 설치된 조형물 앞으로 북한 대학생들이 지나고 있다.
소련은 핵무기 응용 전술과 전략을 북한군 장교들에게 전수했지만 핵탄두 개발에 대한 직접적인 기술지원을 차단했다. 북한이 무기급 핵물질을 획득하기 위해 이중 용도의 흑연원자로를 이용함으로써 핵프로그램을 군사용으로 전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1990년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KGB) 크루치코프 의장은 공산당중앙위 정치국보고서(No.363-K)에서 “영변에서 최초의 기폭장치 개발이 완료됐다. 그러나 북한은 핵무기 제조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현재로서는 그의 실험을 계획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3년 후 러시아 해외정보부(SVR, KGB후신)는 <냉전후 새로운 도전: 대량살상무기확산> 제하의 백서에서 “현재 북한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고 있다. 다만 상당 기간이 지나면 핵분야에서 군사용 프로그램을 발전시킬 것” 임을 경고했다. 사실 북한은 1989~90년 사이 3차에 걸쳐 영변의 5MW 흑연원자로를 폐쇄했다. 1992년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제출한 보고서에 의하면, 북한은 기술적 이유 때문에 원자로를 폐쇄했다고만 밝혔다. 아마도 이때 일정량의 플루토늄을 추출했거나 가공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영변의 5MW 원자로가 1일 5g(연간 1.8kg)의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다. 50MW 원자로는 연간 20kg까지 생산할 수 있고 이는 3~4개의 폭탄을 제조할 수 있다.

러시아 SVR 백서의 따르면, 일련의 경제·기술적 어려움으로 인해 북한의 군사용 핵개발은 수차례 동결과 재개를 반복해왔다. 1980년대 말 북한이 국제사회로부터 정치·경제적으로 고립돼감에 따라 핵분야에서의 설비공급 및 연구·개발의 지속성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에 봉착했다. 특히 북한은 1992년 5월 IAEA 사찰단의 최초 방북 전에 핵개발의 군사 부문을 이미 중단했고, NPT조항에 위배되는 기존 활동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단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했다.

결국 북한은 2006년 10월 제1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이바노프 러시아 국방장관은 북한이 10월 9일 오전 5시35분 26초(모스크바 시간)에 핵실험을 실시했다고 푸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어 이바노프 장관은 각료회의에서 “북한이 폭발규모 5~15㏏의 대규모 핵실험을 성공시켜 9번째 핵보유국이 됐다”고 발표했다. 그 후 북한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2009년 5월 25일 2차, 2013년 2월 12일 3차, 2016년 1월 6일 4차, 2016년 9월 9일 5차의 핵실험을 연속 단행했다.

러시아의 핵전문가들은 북한의 핵개발을 두 가지 관점에서 평가했다. 즉 ‘정치적 핵’과 ‘물리적 핵’이다. ‘정치적 핵’은 문자 그대로 핵개발을 빙자한 외부용 협상카드다. 주로 6자회담 출범 직후에 구사했던 대미 협상전략이다. 북한은 ‘핵의 모호성’을 유지하면서 핵 포기 단계를 최대한 잘게 자르고, 각 단계마다 최대한의 보상을 요구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두 번째는 ‘물리적 핵’ 개발이다. ‘물리적 핵’ 개발은 ‘정치적 핵’의 효력이 극대화되는 순간에 포기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물리적 핵’ 능력이 가시화됨에 따라 ‘정치적 핵’ 비중이 상대적으로 줄고 있다.

‘물리적 핵’과 ‘정치적 핵’


▎북한은 3월 8일 평안북도 철산군 동창리에서 스커드 ER 미사일 4발을 발사했다.
북한은 운반체인 미사일 개발에 핵무기보다 더 늦게 착수했지만 조기에 큰 성과를 거둔 것은 1차적으로 소련의 도움이 컸다. 첫 번째 가시적인 횡보는 소련이 1960년 말 북한의 군사장비 현대화를 위해 장기협정을 체결하고 이를 근거로 1962년에 지대공 미사일 SA-2(러시아명 V-75, 사정거리 45㎞)를 공여했다. 이것이 북한 미사일 잠재력의 기초가 됐다. 북한은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이 아닌 국가로서 자국의 영토에 대공미사일 SA-2를 설치하는 세 번째 국가(중국과 쿠바 다음)가 되었다.

1960년 말~1963년 초에 평양 인근에 최초의 미사일 부대가 설치됐고 소련은 미사일 시스템의 조립, 유지 및 테스트에 대한 책임을 전담했다. 1965년 5월과 1967년 3월에 서명된 협정서에 따라 군사원조가 재개되면서 소련은 북한에 자동조종장치를 갖춘 지상 설치용 미사일 S-2 Sopka, 잠대잠함 미사일 P-20, 그리고 재래장비의 탄도미사일 LUNA-2 등을 공여했다. LUNA-2는 최소 27대에서 최대 63대였다. 이동발사체 9대와 보조장비도 제공했고, 1968년에는 무개화차의 지대지 미사일 2K6 LUNA(NATO명 FROG-3/5, 사거리 50㎞) 6대도 함께 공여했다. FROG는 ‘Free Rocket Over Ground’의 약자로 NATO가 붙인 이름이다.

1960년대 말 소련과 북한 관계가 다시 소원해지면서 중국의 도움으로 소련 공여의 미사일(SA-2, S-2, P-20) 재건 및 현대화를 이루었다. 마침내 북한은 1975년부터 미사일의 자체 개발에 착수했다. 즉, 북한의 탄도미사일 개발프로그램은 소련의 루나급 미사일과 중국 미사일(HQ-2, Dong Feng-61)의 현대화였다. 당시 ‘둥펑(DongFeng)-61’의 현대화는 북한으로 하여금 보다 장기적 관점에서 첨단기술 수준의 탄도미사일 개발을 가능케 했다.

나아가 북한은 전투용 미사일 루나(LUNA)-M(NATO 명: FROG-7)을 획득하고 루나-2를 개조해 독극물을 장착한 탄도탄 개발에 착수했다. 그러나 당시 소련과의 관계 악화로 북한은 이집트와 미사일 협력협정을 체결하고 이집트 보유의 소련제 스커드급 미사일을 재도입해 개량화하는 우회전략을 구사했다. 1984년 초까지 시험을 거쳐 1985년 제조에 들어간 중거리 대공미사일 화성-5(S-125 Neva/Pechora, 사정거리 35㎞)는 이집트 P-17E 미사일의 정확한 복제판이었다.

이처럼 북한에서 조립된 최초의 전투용 미사일인 화성-5(스커드B)는 소련의 스커드-A를 약간 변형한 것이었다. 소련은 1987년도에는 대공미사일 SA-5(S-200 Angara/ Vega/Dubna, 사정거리 300㎞)를 공여했다. 소련의 스커드 C급과 동일한 화성-6은 북한의 미사일 프로그램을 재편하는 기초가 됐다. 화성-6은 무수단 기지에서 1990년 6월에 최초 시험 발사된 후 1999년까지 5회 실시됐고 모두 성공했다.

그 후 노동미사일 개발은 1988년에 착수해 1993~1994년 사이에 집중 생산됐다. 러시아는 1994년 1월 18일 북한에 골프-2급 잠함 미사일 10대를 공여했다. 1990년대 초부터 추진된 장거리 미사일 대포동-1, 대포동-2 개발은 화성-6과 노동 미사일의 개발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시작됐다.

특히 1998년 8월 31일 무수단에서 최초로 발사된 대포동(광명성1호)은 북한이 다단계 미사일과 연료·조준 시스템 등을 갖추었음을 입증했다. 2006년 7월 5일 대포동2호, 2009년 4월 5일 은하2호(광명성2호)에 이어 2009년 10월 12일 함북 화대군 무수단리에서 동해안을 향해 발사한 KN-02 지대지 미사일(사거리 120㎞) 5발은 소련의 이동식 미사일 SS-21을 개량한 것이었다.

소련 붕괴와 우크라이나 내전이 가져다준 기회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에서 러시아 지지 시위에 참가한 시민을 경찰이 연행하고 있다.
지난 2월 12일의 북극성2호 중거리 고체연료 미사일과 3월 6일의 탄도미사일 4발 발사는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수준에 대해 시사한 바가 적지 않다. 러시아 군사전문가 블라디미르 흐루시탈로프는 북극성2호가 적의 선제공격을 회피하는 데 용이하다는 점을 들어 1966~70년대의 소련처럼 비약적인 발전이라고 평가했다. 그 이유는 첫째, 콜드론치식 시스템은 발사 후 공중에서 점화되기 때문에 임의의 장소에서도 쉽게 발사할 수 있다. 둘째, 고체연료 시스템은 발사 준비 시간을 대폭 단축해 줌으로써 적의 발견-확인-명중할 시간적 여유를 최소화한다. 셋째, 고체연료 시스템은 지원 차량 수를 줄일 수 있어 기밀성을 유지할 수 있다. 넷째, 발사체가 크지 않아 현지에 맞게 위장하거나 지하 방공호에 은닉시킬 수 있다.

콘스탄틴 시프코프 러시아 지정학아카데미 원장은 북한의 시험미사일 비행거리가 5000㎞까지 가능하다고 평가했다. 러시아 군사지 <아르세날 오쩨체스트바>의 빅토르 무라호브스키 편집국장은 “북한은 사거리 1000~1500㎞ 미사일을 이미 보유했고, 발전 속도를 볼 때 가까운 장래에 ICBM 개발에 성공할 것이다”고 평가했다. ‘Military Russia’ 포털사이트 설립자 드미트리 코르네프도 “북한이 ICBM 개발을 위한 과학기술 인프라를 확보했다”고 언급했다.

2016년 2월 8일 발사된 은하3호에 대해 드미트리 로고 진 러시아 부총리는 주요 부품을 러시아에서 도입했을 것이라는 이병호 국정원장의 비공개 정보위 브리핑을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반박했다. 2016년 10월 실시된 탄도미사일(SLBM)에 대해서도 러시아 군사전문가 바실리 카신은 북한·이란간 장거리 미사일 개발협력에 기인한 것으로 책임을 전가했다. 즉, 북한의 노동미사일 기술과 부품들이 이란의 샤하브 3호를 완성시켰고 샤하브 3호의 기술이 북한의 대포동 1호를 개발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대포동 1호 기술은 이란의 세질(Sejjil) 2호를 완성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러시아가 직접적으로 지원을 안 했더라도 북한의 기본적인 군사체계는 소련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오히려 북한은 소련 붕괴 후 혼란기를 틈타 불법적으로 다양한 무기를 반입해 갔고 다수의 전문가들도 은밀히 데려갔다. 1992년 12월에는 첼랴빈스크의 마케예프 설계국 소속 미사일 전문가 20명을 북한으로 불법 초청하려다가 러시아 국내보안부(FSB)에 의해 공항에서 제지당했다. 1998년 10월 북·러 국경인 핫산역에서 러제 군사용 헬기(MI-8T) 5대를 북한으로 반입하려다가 실패했다. 1999년 3월 아제르바이잔 바쿠 공항에서 미그-21기 6대를 해체해 선적한 평양행 AN-124 수송기가 저지당했으나, 북한으로 이미 반입된 중고 미그-21기는 총 40대에 이르렀다.

러시아는 2006년 12월과 2007년 6월 두 차례에 걸쳐 러시아 주재 북한 무관을 무기 밀구입 혐의로 추방했다. 2008년 6월에는 북한이 러시아제 폐함정을 구입해 반입하려다가 중단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통해 유치해 볼 수 있는 것은 북·러 관계의 부침과는 무관하게 북한이 합법·불법적 방법으로 러시아제 무기를 지속적으로 획득했다는 사실이다.

한편, 북한은 핵·미사일 기술 획득을 위해 우크라이나 내전의 혼돈상황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러시아 군사전문가 블라디미르 예브세예프가 지적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러시아의 대북 지지를 비난하면서도 북한과의 무역에 적극성을 보이는 데 주목했다.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러시아 상임대표 알렉산드르 루카세비치는 2015년 12월 25일부터 2016년 1월 24일까지 우크라이나 공군 무기고에서 180대의 장비들이 도난당했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2014년에는 터키가 우크라이나로부터 ‘보예보드’ 대륙간탄도미사일 생산기술 문서를 입수하려는 정황이 포착됐고 미국에 의해 저지당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전략문제연구소 블라디미르 노비코프는 “북한이 5~7년 후 고체연료 ICBM 핵보유국이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북극성-2호 발사가 미국 본토를 위협할 수 있는 ICBM 제조의 중간단계로서 ‘가슴 조일’ 정도로 첨예한 상황이 전개될 것으로도 확신한다. 그는 “왜냐하면 미국은 한·일과 군사 훈련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고, 북한은 자국의 안보위협을 들어 핵·미사일 잠재력을 발전시키려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러시아 통제권을 벗어난 북한의 핵 의지


▎2002년 러시아를 방문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하바로프스크 군사박물관에 세워진 레닌의 흉상 앞을 지나가고 있다.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게오르기 톨로라야 박사는 ‘북극성-2 발사는 외형적으로는 김정일의 생일 축하였지만, 내면적으로는 트럼프 대통령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으로 분석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한반도 분쟁을 부추길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미국이 북한의 핵시설을 파괴할 경우에 북한은 한국의 원전을 공격하는 시나리오를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이 일정한 조건 하에서 미국과 대화할 준비를 하고 있어 군사적 충돌이 현실화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톨로라야 박사는 전망했다.

결론적으로 러시아는 북한 정권 초기부터 핵개발을 위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전제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자국의 의지와 무관하게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했다. 북한은 핵개발의 기초를 다진 후에 소련 붕괴의 혼란기를 틈타 핵·미사일 장비와 기술을 불법적으로 반입해갔다. 북·러 관계가 최악인 상황에서는 중동의 구사회주의권 또는 중국을 이용하는 우회전략을 구사했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 내전사태를 역이용하는 정황도 포착됐다.

북핵 실태를 면밀히 관찰해온 러시아 정보기관은 이미 1990년대 초에 북한의 핵개발 수준을 평가하면서 장기적으로 핵·미사일 보유 가능성을 경고했다. 2003년 6자회담 출범을 앞두고 ‘일괄타결안’이라는 해법도 제시했다. 그러나 서방의 미온적 대처는 사실상 북한의 핵보유를 허용하고 말았고 이젠 ICBM 핵탄두 개발도 가능하다는 것이 러시아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앞으로 북한은 미국의 본토를 직접 위협하지 않으면서도 한국 등 동맹국들을 직접 타격하는 중단거리 미사일을 실전 배치해 미국과 동맹국들간 갈등을 유발하는 전략을 구사할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ICBM 개발과 핵탄두 경량화도 추진할 것임은 자명하다. 소련이 1950년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국들을 인질로 삼아 미국의 선제공격을 막고 시간을 벌면서 ICBM 전략핵무기를 개발했던 사례를 답습하는 것이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우리의 선택카드는 제한될 것이다.

박종수 - 서강대 정외과 졸업 후 러시아 국립상트페테르부르크대 대학원 석·박사(경제학) 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교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주러시아 한국대사관 공사를 거쳐 (사)동북아공동체연구재단 정책위원, (사)박종수경제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러시아와 한국: 잃어버린 백 년의 기억을 찾아> <북한과 러시아: 신화, 비화 그리고 진화> 등의 저서가 있다.

201705호 (2017.04.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