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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가 현장기록]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의 가슴에 응어리진 야만의 그림자 

“선체 조사 미루고 아이들부터 찾아달라” 

이승욱 심리정신분석가
고통과 상실의 3년 세월, 야만을 견딘 가족들… 특별법에 왜 세월호 인양을 명시하지 않았나

미수습자 가족들이 애타게 원하는 것은 자신들이 ‘유가족’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다. 자식이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완성되는 그 소망을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하지만 또 만약 자식을 마지막으로나마 볼 수 없다면 그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아이를 보고 싶다는 그 비통스러운 소망을 품고 그렇게 3년의 삶을 버티고 있다.


▎지난 1월 7일 미수습자 가족이 머물고 있는 팽목항 뒤로 붉은 노을이 내려앉고 있다. 단원고 희생자 학생의 한 유족이 낙조를 바라보고 있다.
정신분석가로 일한 지 23년째다. 그중 절반 이상을 150여 인종이 넘는 이민자들이 사는 뉴질랜드에서 일했다. 출신 국가와 문화권에 따른 다양한 습속과 전통이 인간을 어떻게 다른 모양으로 조각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 고통 앞에서는 평등했다. ‘법 앞에 모든 국민은 평등하다’는 거짓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너무나 고루하고 진부하지만, 고통은 재산과 지식의 다소, 지위와 권력과 강약을 막론하고 인간에게 평등하게 기능했다.

하지만 가족과 친구들이 눈앞에서 참혹히 도륙당하는 광경을 지켜본 난민들의 고통은 좀 달랐다. 사고나 질병에 의한 죽음보다 야만에 의해 입은 정신적 충격은 인간 전체에 대한 증오로까지 번진다.

이름도 생소한 아프리카 중부내륙의 어느 국가에서 도망쳐온 한 청년은 술이 없으면 잠을 잘 수 없다고 했다. 반군을 찾는다며 무장한 정부군이 한밤중에 쳐들어와 청년의 형제와 친구들을 칼로 찌르고 성기를 자르며 조롱하고 모욕을 주던 광경을 도무지 지울 수 없다고 했다. 천우신조로 목숨을 구해 도망친 그는 난민이라는 이름으로 고향에서 1만㎞도 더 떨어진 나라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날로 피폐해져 갔다.

폭력은 인간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야만은 인간의 정신을 해체시켜버린다. ‘야만’이란 특별한 이유도 없이 유무형의 도구를 사용해 타인에게 모욕을 주며 신체를 훼손하거나 생명을 끊는 행위다. 특히 공권력과 제도의 폭력은 그 자체로 야만이다. 그렇게 보면 세상 곳곳에서는 너무 흔히 야만적인 일들이 일어난다.

세월호도 야만에 의한 비극이다. 제도와 공권력의 태만, 직무유기, 무능, 무사안일, 방관과 무책임에 의해 벌어진 참사이며, 그래서 야만이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진 이를 구할 수 있음에도 구하지 않고 웃으며 지나쳐 갔다면 법적으로는 잘못이 없다 하더라도 야만스러운 인간이라 할 수 있다. 개인도 이럴진대 제도와 공권력을 가진 정부라면 조직적 야만이라 불러야 한다.

우리 마음속으로 사라진 세월호


▎작년 4월 15일 세월호 미수습자 귀환을 위한 기도회가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서 열렸다. 유가족 앞에 미수습자 사진들이 보인다.
아이들이 숨을 거두는 그 시간에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던 대통령, 위험이 코밑까지 닥쳤는데도 아이들을 버려두고 빠져나간 선원들, 아이들이 살려달라고 창문을 두드리며 배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구조하지 않은 해경들, 그 외에도 아이들을 구할 수 있었던 수많은 기회를 팽개쳐버린 사람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자신들이 가진 유무형의 수단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304명의 생명을 끊어버린 야만이 3년 전 우리 눈앞에서 생중계되었다.

그 고통은 아직도 우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필자는 세월호 참사를 맞닥뜨린 이후 한동안 밥을 먹다가도 눈물이 나고, 현관문을 열다가도 울음이 터지고, 자다가도 가슴이 너무 아파 꿈결에서도 눈물을 흘렀다. 시도 때도 없이 울음이 나고, 슬픈 감각이 느껴지기도 전에 눈물이 났다. 사라진 아이들이 내 마음속에서, 세월호에서 자꾸 살아나서였다.

1000일이 넘는 시간 동안 차디찬 바닷속에 누워 있던 세월호가 우리 눈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야만의 증거가 다시 우리 눈앞에 떠오른 것이다. 잔혹한 고통을 견디며 이 순간을 가장 기다렸던 사람들은 미수습자 가족들이었다. 엄중하게 돌이켜 생각해보면, 미수습자 가족분들의 삶과 기다림은 지난 3년간 우리 마음에서 미수습된 채 대체로 기억에서 누락되었다. 잊지 않겠다고 그리도 광장에서 거리에서 외쳤지만, 우리는 잊지 않겠다는 그 말만 잊지 않고 되뇌었다. 정작 가장 아픈 사람들을, 그 말을 외치던 횟수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세월호의 인양과 함께 미수습자 가족들도 이제야 우리 눈앞에 인양된 듯하다. 그래서 그분들이 견딘 지난 3년의 시간을 단편적으로나마 기록하려 한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1년 정도가 지나면서부터 이상한 일들을 겪었다. 세월호 아이들이 나타나는 꿈을 꾸거나 배가 가라앉아 죽어가는 악몽을 꾼다는 내담자(정신분석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종종 생겼다. 참사 이후에는 없었던 현상인데, 오히려 1년 정도가 지난 시점부터 이런 보고를 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세월호로 인해 심리적 평안이 자주 흐트러지는 고통을 호소하며 찾아오는 새로운 내담자도 있었다. 어떤 이는 옷을 사고 가구를 바꾸고 사람들을 만나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하는 일상적 행위들조차 죄책감과 부질없음 때문에 삶의 흥미로 느끼지 못했다. 사는 것 자체가 시들해졌다는 내담자도 있었다. 어떤 이는 한 번도 의심하지 못했던 자본주의적 삶, 소비생활에 회의를 느낀다고도 했다.

이들은 모두 세월호 희생자와 어떤 직접적 인연도 없었다. 모두 대부분의 다른 사람처럼 TV를 통해 참사를 지켜봤고, 유가족조차 만난 적이 없다고 했다. 이런 내담자뿐 아니라 필자 주변의 지인들도 세월호 참사를 지켜본 고통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많은 사람이 왜 이 사건을 망각의 저장소로 이동시키지 못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 자신에게도 나는 왜 이 슬픔을 심리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아직도 영향을 받고 있는지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우리는 아직 세월호에 대해 진정 애도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대규모 참사를 생중계로 지켜보면서 아이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손 놓고 바라만 봐야 했던 사건은 지금껏 없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트라우마였다.

상담실에서 감당하기엔 너무도 거대한 사건


▎지난 3월 25일 세월호 인양을 확인한 미수습자 가족들이 진도 팽목항에서 “함께해준 국민에게 감사한다”며 인사를 하고 있다.
심리학은 내적·외적 충격이 인간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많은 연구를 축적해왔다. 재난심리학이나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관한 연구 등 국내외의 논문이나 저술들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래서 웬만한 참사나 사건으로 인한 심리적 장해에 대해서는 치료적 접근법이 다양하게 만들어져 있다. 그 규모에서 비견하기 어려운 대지진이나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로 인해 겪는 정신적 고통에서부터 강도·교통사고 등과 같은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돕는 심리적 응급처치법도 잘 개발돼 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는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외상에 대처할 기제가 어디에도 없었다. 참사가 일어났을 때 정신의학자·심리치료사들이 대거 투입됐지만 그들조차 이 사건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치료는 큰 효과를 내지 못했다. 상담실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사건이었고,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고, 새로운 고통에는 새로운 방식의 접근이 필요할 것 같았다. 사람들은 애도하고 싶으나 그 첫걸음도 떼지 못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지금 한국사회의 집단적 무의식은 어떤 상태에 머물러 있는지 알아야 했다. 그리고 애도에 대해 말하자고 권유해야 할 듯싶었다. 우리 마음 속으로 사라진 세월호, 304개의 우주를 다시 우리 마음속에서 찾아야 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글이나 말과 같은 단면적 감각에 의존한 접근보다 입체적이고 생생한 형식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했고,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어보기로 결심했다. 결국 그제야 팽목항의 미수습자 가족들에게 눈길이 갔다. 자식의 유해나마 찾아 장례를 치른 부모들에 비해 그들의 미수습된 감정과 고통을 가늠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그러나 애도의 문턱조차 밟지 못하는 그분들이야말로 기록의 필요성이 가장 절실한 분들로 생각했다. 영화를 같이 만들기로 마음을 모은 우리 팀이 팽목항의 미수습자 가족을 찾아뵙기 시작한 것은 그런 연유였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그분들에게 한 번도 카메라를 들이대지 못했다. 방송국 기자들의 인터뷰와 달리 우리는 그분들의 마음을 담아야 했다. 찾아뵐수록 이분들을 촬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미수습자 가족의 마음은 아직 수습되지 않은 슬픔이 너무 커 어디에 카메라를 비추고,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러 차례 그분들을 찾아갔다. 우리에게는 결국 한 인간으로서 예의를 지키고 아픔을 함께 나누어야겠다는 생각만 남았다.

지난 2월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2년 반째 팽목항을 지키는 은화 부모님과 다윤이 부모님을 다시 만났다. 점심때가 되어 그분들을 모시고 중국음식점으로 갔다. 새벽길 떠나 눈길을 헤치고 간 우리 일행은 그릇에 코를 박고 세수하듯 뜨거운 국물을 들이키는 동안, 네 분 부모님은 혼자 한 그릇을 감당하지 못하고 부부가 나눠 드시거나 남기거나 했다. 잘 먹고 힘내서 아이를 만날 때까지 버텨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마음에 슬픔이 꽉 들어차 짬뽕 한 그릇 다 먹기에도 버거운 듯했다. 어쩌면 그리움과 기다림에 지쳐 슬픔도 쉽게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세월호에 남아, 돌아오지 못한 9명과 함께 그 가족들은 팽목항을 떠나지 못하고 견뎌왔다. 이 사회는 그분들을 미수습자 가족으로 명명했지만, 그들은 스스로 ‘고립된 볼모’로 이름한다. 경기도의 한 중소도시에서 그야말로 작은 시민의 삶을 살아온 분들의 삶은 3년 전 참사 이후 세상의 거대한 짐을 진 채 그곳에 붙박여 있었다. 박근혜 정부에 의해 고립된 채 많은 사람들의 부채감과 슬픔을 투사하는 대상으로 전락해 시대의 고통을 받아내는 볼모로 견뎌왔다. 작은 컨테이너에서 그분들은 말도 안 되는 일을 흔히 겪어야 했다.

예를 들면 이런 일이다. 미수습자 가족분들의 컨테이너에 자신을 목사라고 밝힌 사람이 찾아왔다. 자신이 기도해줄 테니 숙소를 내달라는 것이었다. 가족분들이 여기는 그런 공간이 없고 기도는 교회에 가서 해주시면 좋겠다고 권유했지만 그 목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기도해 주겠다는데 왜 내치느냐”며 오히려 핏대를 세웠다. 참다못한 우리 일행이 싸울 기세로 달려들어 그를 내몰았다.

불쑥 찾아와 하루 종일 버티고 앉아 자기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고, 자기보다 더 큰 고통을 겪은 사람은 별로 없을 거라며, 미수습자 가족들이 털고 일어나야 한다고 훈계하는 사람들도 있다. 미수습자 가족들 대기실 문을 열면서부터 눈물을 흘리며 “얼마나 힘드시냐? 자식 잃은 슬픔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도 못하겠다”며 지레 자기 슬픔에 겨워 울며불며 떠들다 가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유가족이 되는 것이 소원인 사람들


▎4월 1일 3년 만에 인양된 세월호가 반잠수선에 실린 채 전남 목포 신항만에 입항했다. 아직 9명의 미수습자가 남아 있다.
막무가내로 잠자리를 내놓으라는 이상한 자칭 목사, 자신의 힘든 삶을 하소연하러 오는 사람들, 어설프고 유치한 위로를 늘어놓는 사람들을 팽목항에 갈 때마다 보았다. 남쪽 어디에서 숙박업을 한다는 한 초로의 남자는 이 일이 남의 일 같지 않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자기가 보기에 3년간 바닷속에 잠겨 있는 세월호에서 아이를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미수습자 가족 앞에서 못할 말을 한참 늘어놓았다. 그게 아이를 기다리는 부모 앞에서 할 말이냐며 은화엄마가 항의하자 그 남자는 멋쩍어하며 자리를 떴다.

어떤 중년 아주머니가 찾아와 도란도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몇 년 전 배사고로 잃은 자기 딸 이야기를 하며 다윤엄마를 꼭 안아주고 간 적이 있다고 했다. 그나마 그런 위로는 도움이 된다고 한다.

위협적인 바람이 밤낮 없이 불었다. 거센 파도가 일렁이는 부두 위 작은 공간에 가족들을 몰아넣고 사람들은 자기 슬픔을 해소하러 찾아온다. 미수습자 가족들은 그렇게 3년을 견뎠다.

하지만 또 한쪽에서는 아름답다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는 연대의 손길도 있다. 팽목항 가족 숙소의 화장실은 너무도 깨끗하게 반짝인다. 심지어 화장실 바닥에 앉아 쉬어도 불결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잘 관리돼 있다. 이 깨끗한 화장실의 비결은 매주 안산에서 자원봉사자 여러 분이 정기적으로 내려와 쓸고 닦고 관리해준 덕분이다. 아무 말 없이, 3년간 미수습자 가족들을 지켜주신 이런 분들은 얼굴도 알리지 않고, 생색도 내지 않는다.

이제는 목포로 옮겨갔지만 고립된 볼모, 미수습자 가족의 일상이란 어땠을까? 해가 뜨면, 가건물과 컨테이너에서 밤을 지낸 가족들이 일어난다. 거센 바닷바람이 불고 굉음에 가까운 파도 치는 소리가 들리며 공기 가득 짠 내음이 가득하다. 입구 정면에 있는 컨테이너 식당에서 주로 은화 부모님과 다윤 부모님 등 가족분들이 모여 아침을 먹으며 다시 하루를 견딜 준비를 한다. 그날 해야 할 일은 함께 또는 각자가 알아서 처리하고, 서로서로 지나치며 눈빛과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러다 드문드문 외부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고, 그 사람들과 앉아 음식과 차를 마시며 담소하고, 시간이 지나 방문자들이 자신들의 일상으로 돌아가면 하루가 마감된다. 다시 수평선에 해가 사라질 때쯤 가족분들은 저녁을 준비하고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잠들기 전 누군가는 술을 한잔하고, 다른 누군가는 가건물로 된 작은 집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다 잠든다.

밤이 되면 바람과 파도소리는 더 선명하다. 그리고 또다시 해가 뜨면 가족 분들은 어제와 똑같은 식사준비와 그날 해야 할 일을 한다. 사람이 살지 않았던 바닷가 옆 작은 땅에서 미수습자 가족 분들은 지독한 기다림과 고통 속에 그리움과 미안함을 견디며 살았다. 우리의 일상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팽목항이라는 낯설고 두려운 공간에서 세월호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가족을 기다리는 것이 어떤 일인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그 기다림과 안타까움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가늠하는 일 자체가 무례하게 느껴졌다.

반복되는 일상의 기다림만큼 미수습자 가족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희생자의 무리 중에서 소외되었다는 느낌의 고통이다. 다윤·은화 부모님은 유가족협의회로부터 받은 소외감은 제 얼굴에 침 뱉기이며, 자칫 희생자들끼리 내분을 드러내는 일이라 누구에게 하소연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아홉 명의 미수습자 가족이 유가족협의회 측과 겪은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을 들려주었지만, 그 이야기는 다 옮기지 않기로 한다.

미수습자 가족들의 가장 큰 분노는 세월호특별법에 세월호 인양을 명문화해 넣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월호의 인양과 미수습자 탐색에 대해 유가족협의회와 미수습자 가족들 간의 의견 차이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수적으로 소수이며 아직 아이들 장례도 치르지 못한 미수습자 가족의 바람이 관철되기엔 그 힘이 너무도 미약했다.

2014년 11월 11일, 정부는 겨울 날씨와 여러 제반 조건의 어려움을 빌미삼아 세월호 수색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미수습자 가족들은 계속적인 수색을 원했음에도 당시의 분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색 중단을 발표했다고 한다. 이때 이미 미수습자 가족들은 철저하게 희생자 중의 소수자, 약자들 중에서도 배제된 자로 몰려나 있었다. 억지로 수색 중단을 받아들이면서 선체 인양을 무엇보다 우선해서 요구했고, 그것이 특별법에 명기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미수습자 가족들의 요구는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수습자 가족들은 세월호 가족대책위원회의 명칭도 올바르게 표기해달라고 했다. ‘희생자·실종자·생존자’가 아니라 ‘미수습자’라는 명칭을 써주길 요구했지만 이것도 오랜 기간 묵살되었다. 아이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면 실종이 맞지만 세월호 어느 객실이나 짐칸에서 부모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분명히 있고, 그 아이들을 아직 찾지 못했으니 실종이 아니라 미수습인 상태라는 것이다. 이런 상식이 왜 받아들여지지 않는지 가족들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같은 고통을 나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로부터 내쳐졌다는 느낌은 미수습자 가족의 고통을 배가시켰다.

“박근혜 앞에 무릎이라도 꿇겠다”


▎지난 1월 7일 광주 금남로에서 열린 촛불집회 참가 시민들이 세월호 참사 1000일을 앞두고 노란 풍선을 띄우며 미수습자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길 기원하고 있다.
최근 은화 어머님이 페이스북을 통해 미수습자 가족 후원금을 부탁하는 글을 올렸다. 유가족협의회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채 그동안 버텨왔다는 것이다. 미수습자 가족은 유가족협의회와 현격히 다른 길을 걸어오면서 마음에 쌓인 섭섭함이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인양 시기가 임박한 지난 2월에 찾아뵈었을 때 은화·다윤이 부모님도 자신들의 입장이 유가족협의회와 다르다는 것이 알려지는 것에 대해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이런 내용의 글을 월간중앙에 싣는 것에 대해서도 동의하셨다)

지금도 가족들은 진상규명을 위한 선체조사에 앞서 먼저 아이들을 찾아달라고 울부짖는다. 선체를 절단하든 구멍을 뚫든 다 좋은데, 그 어떤 조치라도 미수습자 수색에는 우선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미수습자 가족들의 가장 큰 고통은 자신들의 간절한 소망이 너무나 처절한 결과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미수습자 가족들이 애타게 원하는 것은 자신들이 ‘유가족’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식이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완성되는 그 소망을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하지만 또 만약 자식을 마지막으로나마 볼 수 없다면 그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아이를 보고 싶다는 그 비통스러운 소망을 품고 그렇게 3년의 삶을 버티고 있다.

그래서 미수습자 가족들은 선체가 인양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드디어 선체가 올라왔고, 그럼에도 가족들은 아이들을 찾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공포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이분들의 그 아픔을 가늠하거나 감히 위로할 수 있겠는가?

세월호가 인양되기 전, 한 번은 은화 엄마가 이런 말씀도 하셨다. 아이들을 찾을 수 있다면 박근혜 대통령 앞에 무릎이라도 꿇겠다고 말이다. 실제로 가족들은 해경이며 해수부를 수도 없이 방문했다. 심지어 선체 인양을 촉구하기 위해 해경의 고위 간부를 자주 만나다 보니 이제는 (농담조로) ‘오빠’라고 부를 정도가 됐다고 했다.

하지만 미수습자 가족의 큰 외로움은 시민단체도, 변호사들도, 유가족협의회도 자신들을 고립시켰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물론 이것은 미수습자 가족들의 주관적 느낌일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을 찾기 위해 무엇보다 선체 인양이 최우선 급선무임에도 그 말을 제대로 들어준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부모에게는 천추의 한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세월호가 인양되기 한 달 전쯤, 다윤 어머님은 4월이면 인양될 것 같으니 그때 날씨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들을 찾을 수만 있다면 박근혜 대통령 앞에 무릎이라도 꿇겠다고 하셨던 분들의 부탁이었다. 다행히도 어렵고도 어렵게 세월호가 인양되고, 목포 신항에 거치됐다.

하지만 미수습자 가족들은 또 한 번 좌절한다. 새로 꾸려진 선체조사위원회에 미수습자 가족들이 추천하는 1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유실품들이 수십 점씩 배수와 함께 흘러나오는데 해양수산부는 대책 없이 우왕좌왕이다. 돼지뼈 해프닝은 미수습자 가족들에게 또 얼마나 상처가 되었을까? 선체를 절단해서라도 하루 빨리 가족을 찾고 싶은데, 진상규명을 위해 선체 절단은 안 된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낯설고 생경한 목포항 구석에서 다시 컨테이너 생활을 하며 아이들을 찾기 위해 싸우는 가족들은 매 순간 피가 마르고 뼈를 깎는 절박함을 느끼고 있다.

“억압된 것은 회귀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다시 생각해보면 미로의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왜 250명의 아이들을 포함한 304명의 희생자와 9명의 미수습자가 생겨야 했는지 아직 아무도 답하지 못한다. 서울구치소 503번 그녀는 답을 알고 있을까?

“억압된 것은 회귀한다.”

이 말은 정신분석학 창시자인 프로이트의 유명한 명제다. 우리의 인식세계 안에 한 번 들어온 경험은 어디론가 휘발되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정신세계 어딘가에 저장된다. 그리고 이를 자극하는 인출부호가 주어지면 여지없이 논리적 사고 체계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온다. 권위적인 어른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분석하다 보면 어린 시절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나 할아버지로부터 정서적 또는 신체적 고통을 받은 경우가 많다.

세월호는 가라앉았다. 우리의 무의식으로 잠들어갔다. 하지만 애도하지 못한 그 비극은 때때로 자각하지 못한 자극에 의해 고통스럽게 깨어나 삶의 한 부분을 장악한다. 무기력·우울·분노·두려움 같은 감정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1년이 지난 다음에야 정신분석가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심리적 기제가 그런 것이었다. 애써 외면하고 잊으려 했지만, 억압된 그 고통은 우리 마음속에서 잠자다 다른 얼굴을 하고 나타나는 것이다.

애도란 부재의 현장을 확인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있어야 했던 그 현장에서 이제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마주쳐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들이 왜 그 현장에 없을 수밖에 없는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무엇보다 아직도 수습하지 못한 생명이 9명이나 세월호에 남아 있다. 그러니 무엇을 애도하고 놓아주고 받아들이고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다.

조은화·허다윤·남현철·박영인(이상 단원고 학생)·고창석·양승진(이상 단원고 선생님)·권재근·권혁규·이영숙(이상 일반인). 아직 세월호에 남아 있는 미수습자 9명이 먼저 가족 품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승욱 - 뉴질랜드에서 정신분석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다시 실존적 현상학 전공으로 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뉴질랜드 국립 정신병원에서 심리치료실장으로 10년 가까이 일하며 심리치료(정신분석)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마쳤다. 지금은 서울에서 닛부타의숲(회복의 숲) 상담클리닉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사랑에 서툰 아빠들에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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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호 (2017.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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