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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섬 문명사(5)] 인류 역사를 바꾼 ‘향료의 섬’ 말루쿠제도 암본(Ambon) 

대항해시대를 연 서구문명 욕망의 종착지… 일확천금 따라 들어온 종교는 ‘문명 충돌’ 불러 

글·사진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 아시아퍼시픽 해양문화연구원장 asiabada@daum.net
동서양 문명 충돌의 시작이기도 한 대항해 시대를 있게 한 원인은 향료였다. 향료는 일확천금을 가져다주는 욕망의 결정체였다. 향료는 상인을 부르고, 상인을 따라 선교사와 군대가 들어왔다. 향료 중의 향료, 육두구의 고향이자 종교와 향료의 흑역사의 진원지인 말루쿠제도 암본섬으로 떠난다.

▎암본섬 북쪽에는 모스크들이 마을마다 널려 있는 데 반해, 암본 시내의 라야 알-화타 모스크는 적막강산처럼 고립돼 있다. 주정부가 의도를 가지고 세운 초대형 모스크지만, 정작 암본 시내를 점령한 것은 교회들이다.
잠시 세계지도를 놓고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해양세계의 대부분은 ‘만들어진 작품’이다. 유럽인이 카리브해를 서인도제도로 작명한 이래 아메리카 원주민은 ‘인디언’이 되었다. 유럽은 전혀 상관없는 인종과 언어로 구성된 흩어진 섬을 임의로 구조조정해 국민국가의 우산 아래 모이게 했다.


인도네시아, 즉 인니(印尼)의 탄생도 그러했다. 작은 섬들이 모여 있어 ‘미크로네시아’, 섬들이 외롭게 떨어져 있어 ‘폴리네시아’, 검은 빛 사람들이 살고 있어 ‘멜라네시아’, 그리고 인도 동쪽에 섬들이 모여 있어 ‘인도네시아’, 인도 동쪽의 중국과 붙어 있어 ‘인도차이나’ 식의 작명법이 그것이다.

‘만들어진 국가’이다 보니 섬과 섬의 문명충돌, 심지어 같은 섬 안에서도 문명충돌이 빚어진다. 어쩌면 지구상에서 하나의 섬 안에서 가장 극명하게 문명충돌이 빚어지는 곳을 하나 꼽으라면 인도네시아 말루쿠제도의 암본섬을 내세우고 싶어진다. 그래서 이번 호의 섬 문명사는 사실상 ‘섬의 문명 충돌사’가 될 듯싶다.

자카르타에서 비행기를 타고 술라웨시의 마카사르에 내려 잠시 대기하다 다시 이른 새벽 암본에 당도했다. 암본은 말루쿠제도의 나름 ‘허브 공항’이다. 마카사르를 경유해 자카르타, 자바섬 북쪽의 수라바야, 술라웨시의 마나도 등으로 매일 항공편이 오간다. 말루쿠제도에는 북쪽에 세람해, 남쪽에 반다해가 펼쳐지고, 세람·코타암본·반다·케이 등 크고 작은 섬이 적도 남쪽바다에 점점이 흩어져 있다. 반다해 남쪽에는 동티모르, 동쪽으로는 파푸아뉴기니가 위치한다. 아무튼 한국인의 지리적 세계 안에서는 ‘머나먼 섬’이다. 큰 면적의 세람섬 아래 자그마한 암본섬이 혹 달린 듯 붙어 있다.

암본섬은 이상할 정도로 북부와 남부가 확연히 갈린다. 위에 본섬인 레이투가 큰 크기로 자리 잡고 있다면, 남쪽으로 잘록한 연결점을 지나면 레이투모르가 자그맣게 달려 있는 형국이다. 파티무라 공항에서 말루쿠의 주도인 코타암본 시내로 가다 보면 곳곳에 교회가 보인다. 여기가 무슬림의 나라 인도네시아 맞나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로 ‘한 집 건너 교회’다. 반면 공항에서 북쪽으로 달려가다 보면 교회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무슬림의 모스크만 객을 맞이한다. 이렇게 하나의 섬이면서도 남북이 종교로 확연히 갈리게 된 데는 역사적 이유가 있다.

천주교 전파의 진원지가 된 ‘향료의 섬’


▎육두구는 열매와 열매를 감싼 껍질인 매스(Mace)를 모두 포함해 지칭하는 말이다. 육두구의 꽃껍질인 매스.
토착신앙이 지배하던 인도네시아 도서지방에 가장 먼저 힌두문명이 영향력을 미친다. 힌두문명은 오늘의 인도네시아는 물론이고 말레이반도와 베트남, 심지어 중국 남부에까지 전파됐다. 불교가 시작되면서 어느 날 불법이 인도에서 수마트라에 제일 먼저 당도한다. 불교는 선진문명으로 왕권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오늘날의 수마트라 팔렘방에 수도를 두었던 해상강국 스리위자야에 의해 옹호·발전된다. 스리위자야는 말라카반도로부터 인도네시아 자바 서쪽까지 다스리면서 한때 인도양으로부터 남중국해에 이르는 거대한 무역시장을 장악했다. 산스크리트어 법령이나 말레이 고어로 된 비문은 스리위자야가 역사상 가장 강력한 해상왕국의 하나였음을 증언한다.

그러나 불교와 힌두교는 먼 말루쿠제도까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무슬림은 자바를 석권한 이후 동쪽으로 술라웨시와 말루쿠제도까지 서서히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말루쿠제도 건너편 술라웨시 남부의 고와왕국이 이슬람을 받아들인 것은 1605년. 이슬람 포교사에서 매우 늦은 편이다. 무슬림이 번져가던 시기에 기독교가 동시에 들어온다. 강고한 무슬림의 땅으로 변한 수마트라·자바와 달리 서양의 입김이 쉽게 먹혀들 토양이 마련돼 있었던 것.

말루쿠제도는 일명 ‘향료의 섬’이다. 그런데 이 섬이야말로 천주교가 동방에 전파된 가장 강력한 진원지 중 하나였음은 의외로 한국인에게는 덜 알려져 있다. 그 동방 전파의 중심인물은 사비에르 (Francisco de Xavier). 암본 시내에는 사비에르 헌정성당, 사비에르고등학교, 사비에르 동상 등 개척자의 족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동상이 자못 도전적이다. 성경과 십자가를 들고 앞으로 전진하는 공격적 자세다. 인도 고아를 거쳐 믈라카, 그리고 그 먼 말루쿠제도, 다시 일본 가고시마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사비에르 행로의 해양 베이스캠프가 암본 시내에 차려진 것이다.

역사는 1494년으로 올라간다. 유럽 이베리아반도의 강력한 맹주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토르데시아스 협약을 체결한다. 단적으로 말해, 싸우지들 말게끔 대서양에 해상 분할선을 긋고 세계를 양분해 나눠 먹자는 협약이 그것이다. 아메리카대륙은 스페인, 동쪽 동인도 및 아시아 해상권은 포르투갈이 독점 권한을 행사하게 된다. 때문에 스페인 예수회 선교사들이 아시아에서 포교하려면 반드시 포르투갈의 승인과 보호를 받아야 했다. 스페인 출신들이 포르투갈의 동방경영 시스템을 이용해 예수회선교사로 동방에 오게 된 사연은 이와 같은 세계분할정책에 힘입은 것이다.

예수회를 만든 두 명의 독특한 인물인 사비에르와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de Loyola)는 이베리아반도의 독특하고도 굴절 많은 땅 바스크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은 서원을 통해 예수회를 태동시킨다. 예수회는 반종교개혁 분위기 속에 선교 열망이 충만해 있었다. 유라시아대륙의 서쪽에서 동쪽 끝인 일본에 선교사가 도착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바스코 다 가마가 떠났던 리스본의 벨렘성을 떠난 사비에르는 ‘아시아의 예루살렘’ 고아로 간다. 사비에르는 인도 남부 진주해변에서 선교활동을 벌이다 몰루카로 간다. 정향·육두구(肉荳蔲, nutmeg) 같은 향료 본산지인 몰루카암본에서 선교를 시작한다. 사비에르의 구교도시대가 거하자 개신교의 시대가 도래했다.

말루쿠제도 역시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의 식민지배를 차례로 겪은 것은 다 알려진 역사적 사실. 포르투갈이 손을 뗀 다음 네덜란드와 영국에 의해 개신교가 들어온다. 무슬림이 강고하게 자리 잡은 북쪽은 선교의 어려움이 있었기에 남쪽을 선택한다. 그 결과 암본에서 남쪽을 한 바퀴 돌다 보면 곳곳에서 교회를 만나게 된다.

변방의 섬에서 일어난 ‘문명충돌’


▎암본 시내에는 천주교 동방 전파의 중심인물인 사비에르의 이름을 딴 성당과 학교 등이 남아 있다. 사비에르의 동상은 성경과 십자가를 들고 전진하는 공격적 자세여서 자못 도전적이다.
무슬림과 크리스천이 하나의 섬에서 만나서 그러한가? 공존 공생이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의 이슬람과 개신교는 도전적이고 호전적이기까지 하다. 암본 시내에서 에리 촌락을 지나 라투알라트 해안길로 접어드는데, 길가에 십자가 수십 개를 일렬로 시위를 하듯 세워두었다. 도전적이다. 새뮤얼 P. 헌팅턴(Samuel Phillips Huntington)은 <문명의 충돌>에서 ‘이데올로기 충돌에서 문명충돌의 섬으로, 이제 세계질서 재편의 핵심 변수는 문명이다!’라고 단언했다. 그의 주장은 세계 각국의 지식인과 정치인 사이에 커다란 논쟁을 불러 일으켰으며, 특히 무슬림 문화를 잠재적 적대세력으로 간주하는 바람에 무슬림권 지식인들로부터 강력한 반발을 사기도 했다. 나 역시 이 책자의 작위성에 일정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편인데, 암본의 해안가를 달리면서 그 문명의 충돌이 일상에서 관철되고 있음을 보며 적잖이 놀랐다.

암본섬 북쪽에 평화롭게 무슬림 모스크들이 마을마다 널려 있는 데 반해, 암본 시내의 라야 알-화타 모스크는 적막강산처럼 고립돼 있다. 인도네시아 주정부가 일정한 의도를 가지고 크게 키운 초대형 신생 모스크지만, 정작 암본 시내를 점령한 것은 다양한 교회다. 마라나타 교회는 웅장하고 단아한 건축술로 관광명소로 손꼽힌다. 흡사 유럽식 교회건축이 적도에 변용돼 적응된 결과물인데, 한국의 어느 교회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인도네시아의 정치문화적 헤게모니는 당연히 무슬림이다. 그러나 암본 시내에서는 정치문화적 헤게모니가 외려 개신교에 있다. 식민경영자들의 오랜 수도였던 암본이 기득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북부 무슬림의 반발과 견제도 심하다. 1999년부터 2002년 중반까지 암본에서는 기독교도와 무슬림의 폭력적 대치전선이 펼쳐졌다. 베이루트와 비슷한 양상이었다. 잠시 잠복기를 거쳐 2011년과 2012년 초반에 다시 폭력적 갈등이 휩쓸었다.

암본에서 대대적으로 발생한 크리스천과 무슬림의 분쟁이 좋은 실례다. 극적인 유혈사태가 최악의 상태로 번져갔다. 무장 무슬림은 대검을 들고 크리스천 저격병에 피의 복수를 결의했으며, 사소한 분쟁에서 시작된 싸움이 순식간에 암본 시내 전체로 퍼져나갔다. 교회가 불탔다. 문명의 충돌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문명의 전파’에 의해 이슬람과 기독교가 이 변방의 섬까지 전파됐고, ‘문명의 충돌’에 의해 변방에서 극한적 대립과 모순이 만난 경우다.


▎인도네시아의 정치문화적 헤게모니는 당연히 무슬림이다. 그러나 암본 시내에서는 그것이 외려 개신교에 있다. 무슬림 여인.
오랜 전통적·지역적 해양질서를 무시한 서구 유럽의 개입은 전 세계 차원에서 섬의 무력투쟁과 내분을 촉발했다. 티모르를 둘러싼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의 분점이 이후 동티모르 유혈사태로 발전하는 식이다. 국가 통치를 위해 수백 개 종족언어의 다양성이 사라지고 단일 언어로 통일됐다. 이슬람은 불교나 힌두교에 비해 뒤늦게 들어왔으나 강력한 힘을 형성하고 정치적 결속체를 만들어냈다. 그런 와중에 제국의 힘을 입고 기독교가 들어왔다.

암본 시내의 풍경은 겉으로는 지극히 평화롭기만 하다. 적도권 식민지풍 건축이 강렬한 햇빛 아래 익어가는 열대과일과 함께 의연하게 서있고, 사람들은 일상의 낮잠을 즐기며 태평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이 일상의 평화 속에는 언젠가 폭발할 날만을 기다리는 침묵이 응축돼 있다. 하필 암본이 기독교세력의 전진기지가 되었을까? 이는 향료라는 인류문명사의 거대한 광맥이 말루쿠제도에서 비롯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몰랐던 ‘스파이스 루트’의 비밀


▎암본 섬은 북부의 무슬림 지역과 남부의 기독교 지역으로 뚜렷하게 나뉜다. 암본섬 북부해안의 거친 파도와 낡은 선박이 문명충돌을 방증하는 듯하다.
유럽에서 약 200년에 걸친 십자군전쟁(1096~1291)의 결과, 유럽인들은 아랍의 이슬람권과 교류가 많아지면서 아시아의 향료를 알게 된다. 그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후 전쟁의 종결은 향료에 대한 갈망을 더욱 강하게 부추겼다. 아시아의 향료는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그리고 인도 상인의 손을 거쳐 유럽으로 흘러 들어왔다. 동방상인이 향료무역으로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 있음을 유럽인은 배 아파했다. 포르투갈은 향료무역로의 비밀을 알고자 했으며, 마침내 1510년 인도 서부의 고아를 점령하며 아시아 진출의 발판을 마련한다.

리스본을 출발할 때는 모든 것을 인도에서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인도 상인들이 무역권을 쥐고 있는 처지에 향료무역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인도 너머까지 진출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내 깨달았다. 그 목표가 된 곳이 믈라카였다. 아랍의 배후인 아시아로 진출해 향료를 확보한다면 일확천금이 보장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교도’들로부터 향료무역권을 빼앗는 것은 종교적 승리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후발주자 네덜란드는 포르투갈 배에 ‘위장취업’까지 해가면서 ‘스파이스 루트’의 비밀을 알아내고자 절치부심했다. 최후의 승리는 후발주자인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VOC,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에 돌아갔다. 네덜란드는 향료무역의 현지 거점으로 암본섬을 주목했다. 섬의 크기가 적당해 집중적 식민경영이 가능하고, 오목한 만이 형성돼 있어 선박의 안전한 정박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1512년까지 암본은 인근 테르나테섬의 지배를 받았다. 암본의 술탄은 북쪽 히투라마를 향료무역 기지로 삼았다. 포르투갈은 테르나테 대신 암본을 지배하게 되며, 무슬림이 점거해 무슬림왕국이 있는 북쪽보다 남쪽의 취약한, 오늘날의 암본 시내에 식민거점을 마련한다. 1599년 네덜란드는 암본을 빅토리아성으로 개명하고 이후 동인도회사의 무역거점으로 삼는다. 북쪽이 이슬람, 남쪽이 기독교 권역으로 정확하게 반분되는 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역사란 참으로 묘하다. 어떤 계기에 의해 촉발된 현상이 장기 지속적으로 이어져 마침내 ‘문명의 충돌’까지 촉발하는 것이다.

자바섬 서북부의 반텐, 술라웨시섬 남부의 마카사르 등은 차례로 이슬람 상인들의 교역 중심지로 등장했으며, 거대한 항로가 페르시아와 아라비아로 연결됐다. 지중해의 알렉산드리아·이스탄불·베네치아 등으로 유통된 향료는 북부유럽까지 전파됐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말루쿠제도 침략은 이 같은 황금무역 노선을 장악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돌이켜보면 1630년대는 네덜란드에 매우 독특한 출발을 약속한 시대였다. 자바섬 바타비아(오늘의 자카르타)에 무역 본부 겸 군사령부를 설치하고, 향료군도 암본에도 기지를 세웠다. 1641년에는 향료 집산처인 포르투갈령 믈라카가 동인도회사에 넘어갔다. 네덜란드인에게 향료는 세계경제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유력한 수단이었기에 이에 방해가 되는 세력은 철저하게 제거해야 했다. 인도네시아 토착세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암본 건너편의 마카사르 고와왕국과 부기스왕국의 저항이 특히 격렬했다. 네덜란드는 네덜란드령 인도로 알려진 ‘네더르란트 오우스트 인디’를 건설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에 따라 말루쿠제도의 크고 작은 왕국의 저항도 가열찼다. 술라웨시 남부의 고와왕국과 테르나테왕국, 용맹성이 널리 알려진 암본섬 북부의 히투왕국의 무슬림이 연합해 네덜란드에 저항하기도 했다.

암본섬 북쪽 해안길에 히투라마라는 유서 깊은 촌락이 있다. 암본섬의 히투왕국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남쪽으로 야트막한 산을 넘어 코타암본으로 이어지고, 북쪽으로는 세람섬이 굽어보이는 전략 요충지다. 선착장이 있어 세람과 연결되는 페리가 연일 떠난다. 촌락 규모는 지금도 상당히 큰 편이다. 이곳에서 왕자 까끼알리는 반동인도회사 저항운동을 주도했다. 네덜란드 제국주의 세력과 원주민의 억압과 투쟁, 회유와 마찰이 끝없이 이어졌다. 까끼알리는 동인도회사가 독점하고 금지한 정향무역을 밀무역으로 처분해 돈을 벌어들였다. 독점자본 동인도회사로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1646년에 이르러서야 저항이 봉쇄됐다. 저항군을 암본에서 처형함으로써 반네덜란드 전선은 일단 와해됐다.

암본섬 건너편 마카사르의 원주민 요새는 동인도회사에 인도돼 로테르담으로 명명됐다. 본디 고와왕국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네덜란드 본토 유수의 항구인 로테르담이 술라웨시 마카사르에 만들어진 것이다. 암본섬 북쪽 중앙에 히투라마 촌락이 있고, 거기서 5㎞ 정도 떨어진 힐라 촌락에 암스테르담 요새가 우뚝 서있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의 자카르타인 바타비아 역시 로마에 저항했던 옛 네덜란드의 자랑스러운 명칭에서 비롯된 것이다. 네덜란드의 주요 도시들이 모두 인도네시아에 자기 이름을 얻고 있는 셈이다.

남태평양에 세워진 네덜란드의 도시들


▎오지 중의 오지, 남태평양 변방의 섬에서 벌어진 ‘문명충돌’의 증거. 암본섬 길거리에는 십자가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1649년에 세워진 암스테르담성은 매우 인상적이다. 성벽은 오늘날 콘크리트로 다시 축조되었을지라도 내부의 벽돌로 쌓아 올린 탑은 예전 그대로다. 성에 올라서면 망망대해가 눈앞에 곧바로 펼쳐지고, 멀리 ‘박하의 섬’인 세람섬이 보인다. 암스테르담성은 향료를 집산하고 수출하는 전략적 방어시설이다. 힐라 촌락에는 포르투갈인들이 세운 게라자 투아 힐라 성당이 아담한 크기로 남아 있다.

포르투갈이 일찍이 점령한 촌락을 네덜란드가 후발주자로 접수한 것이다. 1414년에 세워진 메스지드 와파우에 모스크도 전해온다. 암본섬 북부에는 이처럼 왕국의 흔적은 거의 사라지고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의 궤적이 남아 있다.

저항과 싸움은 같은 유럽인들 간에도 벌어졌다. 포르투갈은 향료무역의 거점이던 믈라카에서 밀려났으며, 향료제도의 복판으로 들어와 있던 영국인들은 암본에서 학살된다. 일명 ‘암보이나 학살’에서 당시 네덜란드의 암보이나 식민정부는 일본인 10명, 영국인 10명, 포르투갈인 1명을 처형했다. 오늘날 암본 시내에 자리 잡아 인도네시아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빅토리아요새가 그 역사적 장소다.


▎암본 시내에서 가장 유서 깊은 마라나타 교회는 웅장하고 단아한 건축술을 자랑하는 관광명소다. 유럽식 교회건축이 적도 지역에 변용돼 적응된 결과물이다.
이 사건으로 이 지역에서 영국과 네덜란드 정부가 수년 동안 추구해온 목표인 양국 간 협력에 대한 희망이 완전히 무너졌다. 이는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세력의 부상이 시작됐음을 상징한다. 1601~25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스파이스 군도’인 말루쿠의 암본에 기반을 닦았다. 네덜란드 수비대가 빅토리아요새에 주둔했으며, 네덜란드인 지방총독이 임명되었다. 영국 동인도회사와 손잡고 있던 영국 상인들 역시 이 섬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결국 네덜란드와 분쟁을 야기했다. 눈에 훤히 들여다보이는 이득을 눈앞에 두고 타협과 양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623년 초 네덜란드인 지방총독 헤르만 반 스포일트는 영국 상인들이 일본인 용병의 도움으로 자신을 죽이고 이들을 지원할 영국 함선이 도착하면 네덜란드 수비대를 무장해제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는 혐의자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이들은 고문을 받고 자신의 유죄를 인정했으며 암보이나 법정에서도 혐의가 인정되어 1623년 2월 사형에 처해졌다. 영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수세기 동안 동남아시아를 포기한 채 인도 경영에만 매달리게 된다.

이 사건을 통해 당시 암본에 일본인들이 와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네덜란드는 암본과 바타비아, 오늘의 대만 타이난의 포르모사, 그리고 일본 나가사키에 동인도회사의 무역거점을 두고 있었다. 말루쿠제도와 나가사키를 잇는 거대한 항로에 일본인과 네덜란드인의 교섭이 존재했다. 그 전 포르투갈의 시대에는 암본과 규슈 히라도를 잇는 거대한 항로가 존재했고, 그 항로를 이용해 사비에르가 일본 규슈에 천주교를 전파시킨 것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이처럼 무역·군대·선박·향료·기독교 등은 하나의 몸뚱이로 움직이며 바닷길을 개척해나갔다.

네덜란드는 향료를 철저하게 통제했다. 향료 통제는 단순히 향료 거래의 독점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포르투갈 군대를 따라 말레이반도에 상륙한 선교사들은 인도네시아군도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해 향료제도에 이르고, 다시 필리핀을 우회해 일본까지 갔다. 앞에서 언급한 사비에르가 암본을 거점으로 삼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네덜란드인들은 더 높은 가격 형성을 위해 향료 생산량을 한정하거나 축소하기도 했다. 세계적 독점과 가격경쟁력 확보를 위해 유통과 물류를 통제한 동인도회사의 자본주의적 패권은 비단 유럽만을 향하지 않았다. 그들은 향료무역을 독점한 후 동남아시아 각국을 다니면서 교역하기 시작했고, 더욱 많은 이윤 획득을 위해 바타비아 주변부터 시작해 점차 내륙으로 눈길을 돌렸다.

모든 욕심은 ‘육두구’로 향한다


▎정향꽃을 말리면 짙은 갈색의 정향(丁香, cleve)이 완성된다. 모스크 마당에서 정향을 말리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암본섬의 남부를 돌아다녀도 향료나무를 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남과 북이 연결되는 잘룩한 파소를 지나 나니아를 거쳐 산길로 북쪽으로 향하자 사정이 달라졌다. 옛 히투왕국이 있던 히투까지 가는 내륙의 촌락 곳곳에서는 정향과 육두구 말리는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북쪽 해변가 히투라마에서는 집집마다 마당에 정향과 육두구를 말리고 있었다. 무슬림 거주지역에서 전통 향료가 이어지는 중이다.

일찍이 인도네시아를 거쳐간 이븐 바투타는 <이븐 바투타 여행기>에서 정향을 이렇게 말했다.

“정향나무는 대체로 굉장히 큰 나무로 무슬림지역보다 이교도지역에 더 많다. 너무 흔하다 보니 주인이 따로 없다. 정향나무의 줄기는 모로코까지 수출된다. 모로코 사람들이 정향꽃이라고 하는 것은 이 정향나무에서 떨어진 꽃인데, 귤꽃과 비슷하다. 정향 열매를 우리나라에서는 향호두라고 하며, 꽃은 비싸다고 한다. 이상 모든 것은 내가 직접 본 것이다.”

이교도지역이라는 뜻은 아직 무슬림이 전파되지 않은 변방 오지의 섬에서 정향이 자라고 있음을 의미한다. 마르코 폴로도 <동방견문록>에서 이곳의 향료를 언급했다.

“후추·육두구·감송·방동사니·쿠베브·정향 등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각종 진귀한 향료가 있다. 매우 많은 선박과 상인이 이 섬에 와서 물건을 사고 많은 수입을 올린다. 이 섬에는 얼마나 재화가 많은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것을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향료는 유럽인은 물론 동방사람들에게도 고가로 팔리는 진귀한 명품이었던 것이다.

정향꽃을 말리면 짙은 갈색의 정향(丁香, clove)이 완성된다. 씹어 먹어보면 강한 향이 입안으로 전달된다. 암본섬 북쪽에서 많이 마주친 육두구는 유럽에서 한때 금값으로 쳤던 향료다. 페스트가 유행해 많은 이가 죽어가던 시절에는 약효가 있다고 하여 천정부지로 가격이 올랐다. 육두구는 열매와 열매를 감싼 껍질인 매스(Mace)를 모두 포함해 지칭하는 말이다. 이들이 산출되는 장소는 인도네시아 동쪽과 필리핀 사이에 있는 말루쿠제도의 몇몇 섬으로, 이곳이 향료의 산지였기 때문에 말루쿠제도를 ‘향료제도’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진한 향내가 멀리 유럽까지 퍼져 수많은 군대와 무역상인, 모험가와 투기자, 선교사와 식민관료들을 끌어들인 것일까?

그런데 ‘향료의 섬’ 중에서도 손꼽는 향료의 섬은 막상 암본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의 반다제도다. 반다는 3개의 섬으로 구성되는데, 가운데 섬 반다네이라가 중심이다. 반다는 워낙 오지의 변방 섬인지라 여기서 생산된 향료가 암본에 집결돼 세계 무역망으로 연결됐기에 암본이 더 중요할 뿐이다. 암본 공항에서는 반다네이라까지 작은 비행기가 연결돼 쉽게 당도할 수 있으나, 뱃길로는 아득하게 먼 섬이다.

중세유럽에서 가장 비싼 가격에 거래됐던 육두구가 독점적으로 반다제도에서 생산됐다. 아랍·중국·자바·부기스의 상인들이 향료를 가지고 가고 대신 식량과 의복 등을 섬에 주었다. 이들 향료가 유럽으로 어찌어찌 흘러 들어가 비싼 가격에 팔렸을 것이다. 유럽인들은 육두구가 독점적으로 산출되던 반다제도의 정체를 알기 위해 수세기 동안 노력했다. 결국 외국 상인들을 통해 물어물어 섬의 존재를 알게 된다. 유럽에서 반다제도까지는 정말 머나먼 곳이다. 오늘날을 기준으로 삼아도 반다제도는 웬만해서는 근접하기 힘든 변방의 섬이다.

육두구의 진짜 고향은 반다제도


▎암본섬의 밑바탕에는 저항과 독립이라는 보이지 않는 강물이 도도하게 흐른다. 과거의 역사를 알 리 없는 암본섬의 어린 소꿉친구들.
그 먼 곳까지 유럽인이 마침내 출현했다. 1512년 포르투갈, 1599년에는 네덜란드가 나타난다. 유럽인들은 반다제도에 자생하는 육두구나무를 보고 거의 까무러칠 정도로 놀라고 기뻐했다. 황금과도 맞바꾸는 향료의 본고장에 당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인이 처음 나타나 의복이나 식량도 아닌, 오로지 칼 같은 쇠붙이나 주면서 거래하고자 했을 때 원주민들로서는 난센스 그 자체였다.

유럽인은 무장하고 이 자그마한 변방의 섬에서 무소불위의 무력을 행사했다. 네덜란드는 70여 개의 플랜테이션을 반다제도에서 운영했고, 이들 플랜테이션은 무려 200여 년간 이어진다. 향료 독점을 위한 농장 운영은 그다지 효과적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원주민은 끊임없이 저항했고 내적으로 불복했다.

향료를 찾아 유럽인들은 머나먼 섬까지 찾아왔다. 무역상인을 앞세워 군대와 선교사들이 왔다. 유럽인에 앞서서 아라비아 상인과 중국 상인, 그리고 자바와 부기스인 등 원주민 상인이 왔다. 유럽인은 이들 원주민 상인들로부터 경제적 이권을 빼앗아 장악하고자 했다. 더 나아가 원주민을 향료플랜테이션에 종사하게 하여 안정적으로 향료를 공급받고 물량을 조정하고 통제해 세계 향료시장의 가격을 독점했다. 유럽에서 먼 뉴기니 근접한 거리까지 길게 향료무역의 물류 노선이 이어졌던 것. 그에 부수해 자신의 길을 개척한 구교도와 신교도의 족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먼저 들어온 이슬람과 충돌은 필연이다.


▎암본섬 북부 해안의 거대한 맹글로브 나무. 울퉁불퉁한 줄기가 암본섬의 굴곡 많은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반다제도에서 원주민의 ‘유럽적인 것’에 대한 저항은 20세기 마지막까지도 이어졌다. 1998~99년 반다네이라에서 소요가 일어나 교회가 불타고 적어도 다섯 명이 살해당한 것은 어떤 상징성을 내포한다. 소수 기독교도들은 암본섬이나 세람섬으로 피신해야 했다. 다시금 적도의 침묵으로 접어들었으나 어떤 문명의 갈등은 여전히 잠복상태다. 이와 같이 문명의 충돌은 향료의 시대가 끝난 현재까지도 장기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중이다.

오늘날 암본 시내에는 식민지시대의 화려했던 건물이 지극히 일부만 남아있을 뿐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암본 시내에 일본군 사령부가 위치했기에 집중적인 항공폭격을 받았다. 우아하게 지어졌던 수많은 식민지건축물이 파괴되었고, 아담한 건물들 몇 개가 이어질 뿐이다.


▎암본의 한 농가 마당에서 정향·육두구 등 향료들이 말라가고 있다. 이들 소소하게 보이는 열매는 욕망의 결정체로 대항해 시대를 열고 끝내는 문명의 충돌까지 야기했다.
1950년 암본은 짧게나마 남부 말루쿠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된다. 독립운동은 불과 몇 달 만에 인도네시아 군부에 진압된다. 이 같은 지역사는 이곳 암본섬의 밑바탕에 저항과 독립이라는 보이지 않는 강물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음을 말해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도네시아의 지식총량은 얼마나 될까? 변방에 이루어진 문명의 충돌을 이해함이 없이 얼마나 인도네시아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섬의 문명사는 어쩌면 ‘변방의 문명사’일지도 모른다. 그 변방은 멀리 떨어진 오지가 아니라 중심부를 변화시키는 역동적인 힘이기도 했다. 암본섬은 향료와 기독교를 매개로 세계사를 변화시킨 변방 중의 변방이었기에.


주강현 - 제주대학교 석좌교수, 아시아퍼시픽 해양문화연구원장. 해양사·문화사·생활사·생태학·민속학·고고학 등 전방위로 연구해온 우리 시대의 대표적 ‘지식 노마드’이자 비교해양문명사 연구에 몰두하는 해양문명사가. 아시아 바다는 물론 대양의 섬으로 시야를 넓혀가며 비교해양문명사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적도의 침묵> <독도강치 멸종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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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호 (2017.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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