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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살롱] 노혜원 릴 컬쳐 앤 소사이어티 대표 

절망을 희망으로 편곡하다 

글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사진 장진영 기자 artjang@joongang.co.kr
갑자기 찾아온 망막색소변성증, 자신의 병을 받아들이자 새로운 세상에 눈 떠… 하우스 콘서트 기획자로서 “엄마와 아이들에게 삶의 희망 나눠주고 싶어”

눈이 조금씩 멀어가는데 어찌할 도리는 없는 병. 망막색소변성증이다. 노혜원(39) 릴 컬쳐 앤 소사이어티 대표가 이 병을 진단받은 건 지난 2000년이다. 명문 예원예고에서 피아노를, 미국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그의 인생은 갑자기 잿빛으로 변했다. ‘자살하는 법’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병원에도 여러 번 실려갔고, 깨어날 때마다 살아있음을 저주했다.

“이 세상에 나보다 불행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 누구도 내 앞에서 ‘힘들어’라는 말을 해선 안 된다고 여겼습니다.”

노 대표는 월간중앙과 최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런 절망의 과거를 털어놓는 그의 눈동자는 희망으로 빛나는 듯했다. 시력을 되찾아서가 아니다. 이제 그의 왼쪽 눈은 완전히 시력을 잃었고 오른쪽 눈으로 희미하게 빛과 그림자를 감지한다. 하지만 그는 말했다. “이전엔 볼 수 없던 게 지금은 보여요. 시력은 잃었을지 몰라도, 새로운 시선을 얻었습니다.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과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고요, 사회와 제 인생을 이해하는 시선도 새로워졌습니다. 병 덕분에 저 스스로가 많이 성장했어요.”

목소리는 또랑또랑 밝았다. 열쇠는 노 대표 자신이 찾았다. 장애를 극복하고자 발버둥을 치는 대신, 병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일을 다시 찾았다. 삶의 활력도 되찾았다. 그를 부활시킨 일의 첫 결실이 지난달 15일 서울 서소문에서 열린 하우스 콘서트(house concert)다. 앞으로 계속해서 꾸려갈 하우스 콘서트의 첫 막이었다.

‘내 병도 자연 현상의 하나’라는 깨달음


▎노혜원 대표의 든든한 조력자는 남편과 아버지다. 4월15일 첫 하우스 콘서트에서도 남편은 항상 그의 곁에 머물며 모든 걸 세심히 배려해줬다.
서울 중구 서소문로에서 열린 이날 공연은 약 100명에 가까운 관객을 모았다. 주로 가족 단위로, 아이들이 반 이상이었다. 이들을 관객을 위해 곽윤찬 재즈 트리오는 흥겨운, 때로는 우아한 선율을 선사했다. 하우스 콘서트란 본래 음악에 조예가 깊거나 음악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자택에서 여는 미니 공연이다. 한국에서도 음악감독 박창수 씨가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하우스 콘서트를 열면서 알려졌다. 노 대표가 꿈꾸는 하우스 콘서트는 그러나 좀 다르다. “저희 집은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엔 작아요. 제가 기획한 공연은 W스테이지라는 곳에서 여는 소규모 콘서트입니다. 하지만 마치 제 집에 손님들을 초대해서 제가 좋아하는 음악을 함께 나누는 것과 같은 분위기를 꿈꿨어요. 그래서 ‘하우스 콘서트’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한마디로, ‘저희 집에 놀러 오세요’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죠.” W스테이지는 월드컬처오픈(WCO)에서 문화예술 관련 행사를 위해 무료로 대여해주는 공간이다.

이날 노 대표의 공연은 음악으로만 채워지지 않았다. 콘서트가 시작하기 전, 관객들은 편하게 앉아 다과를 나누어먹고 마셨다. 노 대표도 공연의 취지를 설명하며 관객과 이야기를 나눴다. 공연 뒤에도 소통은 이어졌다. 관객과 관객이, 관객과 연주자들이, 또 관객과 노 대표가 소통하는 장이었다. 노 대표는 부연했다. “같이 좋은 음악을 들으며 감성을 촉촉히하고, 맛난 음식으로 배를 따뜻하게 하면서 마음도 열어보자는 취지입니다.”

노 대표가 이렇게 일을 진행시킬 수 있기까지 그에겐 두 명의 든든한 조력자가 있었다. 아버지 노익상 한국리서치 대표와 남편이다. 노 대표가 절망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 그의 모습을 받아들여주고 손을 내밀어주었던 존재다. 이날 공연장에서도 그의 남편은 노 대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계단이 있으면 노 대표에게 달려가 “계단 두 개 내려가야 해”라고 속삭였다. 노 대표가 한 손엔 마이크를, 다른 손엔 태블릿 PC를 들고 힘겨워하자 그의 곁으로 슬쩍 다가가 아이패드를 잡아주는 세심함을 보였다. 노 대표의 자살 시도가 다행히 실패로 돌아간 것도 그를 곁에서 지켜본 남편이 재빨리 그를 병원으로 데려간 덕분이었다.

자살까지 시도했던 이유는 뭘까요?

“2000년, 첫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 후 1년 동안은 ‘나에게 장애가 온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서 무기력하게만 살았습니다. 좀비 같았지요. 하지만 그래도 주변 사람들의 응원 덕분에 다시 세상으로 나올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땐 몰랐어요. 제가 느끼는 무기력함이 사실은 우울증이었다는 걸요. 당시엔 무조건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비장애인보다 훌륭하게 살아서, 비장애인과 같은 대우를 받는 사람이 되자’라고 다짐했죠. 샌드위치 가게도 열었고요, 파티 플래너로도 활동했어요. 그런데 생각처럼 이윤이 나질 않았죠. 저도 남에게 ‘제 눈이 잘 안 보이니 도와주세요’라는 말을 하기가 어려웠고요. 자존심 때문에요. 그래서 결국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동굴 안에서, 노 대표는 스스로를 미워했다. 왜 자신에게 이런 불행이 닥쳤어야 했는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스스로 “나는 행복해지고 싶지 않아”라고 행복을 거부했다.

그러다 어떻게 극복을 하게 됐나요?

“저를 계속 기다려준 사람이 한 명 있었어요. 남편입니다. 남편은 저를 불쌍해하지 않았어요. 저를 ‘장애인’으로 대하지 않고 그저 ‘사람’으로 대해줬죠. 그 덕분에 다시 동굴 밖으로 나왔고, 번역 일을 시작했습니다.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고 e메일로 작업을 할 수 있으니 한결 수월했죠. 그러면서 상태도 많이 호전됐어요. ‘눈이 잘 안 보이면 다른 감각이 발달해’라고 말하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마음 열 수 있는 공연을 만들자는 꿈’


▎아버지 노익상 한국리서치 대표는 노 대표에게 항상 큰 힘이 되어 주는 지원군이다.
그러다 공황장애를 앓았다고요?

“그날도 여느 때처럼 커피와 초콜릿을 잔뜩 쌓아놓고 번역 일을 하고 있었어요. 다음날 아침 9시까지 넘겨야 하는 문서였는데, 그땐 새벽 3시였죠. 당시엔 모니터까지는 보였거든요. 그렇게 일을 한참 하고 있는데, 갑자기 숨을 쉬는 게 너무 힘든 거에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너무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조금 쉬자. 숨을 얕게 여러 번 쉬니 조금 낫는 것 같아 그날은 넘겼습니다. 그런데 이 증상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거에요. 급기야 응급실에 가야 할 정도로 호흡곤란 증세가 심해졌습니다. 응급실에 간 뒤 심장외과와 폐질환외과 등에 가서 별별 검사를 했는데 다 정상이었습니다. 그러자 의사가 저를 정신과로 보내더군요. 거기에서야 알았습니다. 제가 약 석 달간 심각한 공황장애를 겪었다는 걸요.”

남편과 아버지의 보살핌이 있는데도 왜 공황장애가 찾아왔을까요?

“두려웠던 것 같아요. 결국 어둠 속에서 평생을 보내게 될 것이라는 점이요. 스스로에게 ‘넌 강해져야 해’라며 윽박을 지르기도 했는데, 그게 역효과가 났나 봐요. 아픈데 아프다고 말을 못하게 된 거죠. 저는 제 자신이 강하고 단단한 사람이라고 믿었거든요. 그런데 아니었던 거죠.”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공황장애 진단을 받고 집에 돌아와서, 저 스스로를 버리기로 작심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니, 이렇게 나약한 모습으론 살 수가 없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약국으로 가서 항우울제와 신경안정제, 수면제 등등을 처방 받아왔어요. 그리고는 구글로 검색을 하기 시작했죠. 제 검색어는 ‘자살하는 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저는 서재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술병에 갖고 있던 약을 모두 털어넣고 마셨습니다. 다행히 남편이 바로 알아채고 경찰에 연락했고 저는 병원으로 옮겨져 무사했습니다.”

다행이네요.

“아뇨. 지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때는 아니었어요. 살아났다는 사실에 절망했습니다.”

그런 시간이 얼마나 계속됐나요?

“3년 정도였어요. 지난 2015년 7월까지 저는 자살을 두 번 더 시도했고, 응급실에 실려갔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병원에 입원하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어떻게 극복을 했나요?

“극복하지 못했어요. 지금도 매일 항우울제와 신경안정제·수면제를 복용합니다. 2주에 한 번씩 정신과의사를 만나서 진료를 받고 상담을 하지요. 하지만 달라진 건 있어요. 저는 이제 죽으려고는 하지 않아요. 돈은 많이 못 벌어도, 육체적으로 자립하지 못해도,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일상생활을 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그 계기가 뭔가요?

“저 스스로 제가 아프다는 걸 인정을 했어요. 스스로에게 솔직해지자고 마음먹고, 마음을 열었죠. 그랬더니 다른 사람들이 ‘사실은 나도 아파’라고 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하더군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알게 됐어요. 누구나 힘들고, 누구나 아플 때가 있구나. 내 병이, 내 약점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자기들의 아픔을 더 쉽게 이야기할 수 있구나. 내 인생이 남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구나. 이렇게 느꼈죠. 그러면서 꿈이 생겼습니다. 제가 열정을 갖고 있는 음악 공연을 통해 모두가 마음을 열 수 있는 공연을 만들자는 꿈입니다.”

노 대표 본인의 우울증은 현재진행형이다. 그 역시 본인이 여는 하우스 콘서트의 치유 대상자인 셈이다. 그는 “공연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관객이 제게 건네주는 칭찬하는 말 한마디가 우울증 치료제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무엇이든 어떤 일을 자신의 힘으로 해낸다는 것에서 그는 삶의 희망을 찾았다. 그가 “일하는 여성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이유다.

일하면서 삶의 희망도 생겨… 일하는 여성 많아져야

일하는 여성이 많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사실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만약 약 5년 전에 똑같은 질문을 받았더라면 망설임 없이 답했을 겁니다. 직업이 있어야 인생이 있고, 돈을 벌어야 독립된 어른으로 살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요. 평등하지 않다고 불평만 늘어놓을 게 아니라, 여성들이 달라져야 한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이젠 다릅니다. 아이를 낳아서 기른다는 것이 얼마나 복잡한 일인지, 주변을 보면서 깨달았거든요. 심지어 육아 지원제도가 잘 마련되어 있고 미혼모에 대한 시선도 따갑지 않은 유럽에서도 육아는 큰 문제이잖아요. 한국은 제도도 미흡하고,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편견도 매우 강하지요. 그래서 많은 엄마가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합니다. 하지만 아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엄마들은 생각하지요. ‘내 인생은 어디로 갔나.’ 전 그 엄마들을 탓하고 싶지 않아요. 대신, 돕고 싶습니다.”

사례가 있나요?

“저희 릴 컬쳐 앤 소사이어티가 먼저 앞장을 서보려고 합니다. 매번 하우스 콘서트를 열먼서, ‘엄마’를 공연의 일부로 참여시키는 거죠. 지난 4월15일 첫 공연에 작곡가 최지은 씨가 함께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최지은 씨는 클래식 음악 관련 사업을 해오다 결혼과 출산 후 일을 그만뒀죠. 그러면서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고민을 했고요. 그러다 조금씩 용기를 냈고, 자신이 소원하던 작곡도 다시 하면서 앨범까지 냈습니다. 인디 뮤지션으로 첫발을 내디딘 거죠. 그런 분이 지금은 음악 관련 박사과정 마지막 학기라고 하더군요. 지은 씨의 아이들도 엄마를 응원한다고 합니다. 저는 지원 씨 같은 분들을 지원하고 싶습니다. 힐러리 클린턴도 지난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뒤 연설을 하면서 말했잖아요. ‘이 연설을 듣고 있는 모든 소녀들이여, 자신들의 힘과 가치를 믿고 세상에서 기회를 잡으라’고요. 저도 그렇게 힘을 주는 존재이고 싶습니다.”

그런데, 왜 음악일까? 눈이 보이지 않는 대신 귀가 더 예민해져서는 아닐까. 아일랜드 극작가 브라이언 프리웰이 쓴 <몰리 스위니>의 여주인공도 눈이 멀었지만 청각과 미각 등 다른 감각이 더 예민하고, 큰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무리해서 시력을 되찾으려 하자 불행이 시작됐다.

노 대표도 몰리 스위니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했다. “저는 의도치 않은 변화가 저를 엄습한다는 점이 가장 두려웠어요. 일상생활이 자꾸 제 의도와는 달리 변해가니까요. 그런데 이상한 건 시력을 다시 찾게 된다고 해도 그것도 두렵다는 점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힘들여 적응을 해왔던 모든 것이 또다시 날아가버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젊음은 이미 다 갔는데 그제서야 시력이 돌아온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그게 두려워요. 하지만 이젠 조금 달리 생각하려고 해요. 지금 내 손안에 있는 것을 즐기자고 생각합니다. 갖지 못한 단 한 가지인 시력을 아쉬워하느라 이미 20년을 잃어버렸거든요. 지금은 들을 수도 있고, 맛볼 수도 있고 냄새도 맡을 수 있고 말도 할 수 있잖아요. 이 사감(四感)을 최대한 만끽하려고요.”

그러기 위해선 음악이 큰 힘이 된다고 했다. “소리는 사람의 감성을 자극해요. 그렇기 때문에 음악교육이 중요한 거죠. 어릴 때 손을 많이 쓸수록 두뇌가 발달한다고 합니다. 어린아이에게 악기를 가르치는 게 유익한 이유이죠. 저는 하우스 콘서트를 통해서 아이들에게도 음악의 소중함을 나눠주고 싶습니다.”

- 글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사진 장진영 기자 artjang@joongang.co.kr

201705호 (2017.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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