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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럴 아츠의 심연을 찾아서] 아테네의 도전정신과 한국의 수호신 

아테네 여신의 지혜가 필요하다 

글·사진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과시하기보다 아끼고, 승리감에 도취하기보다 다음을 준비하는 겸허함 절실… 한국의 결의는 내부단합용 논리일 뿐, 외부 상황변화에 무관심해 문제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의 저녁 무렵. / 사진·중앙포토
1, 나를 선택한다면, 아시아와 유럽 전체를 호령할 수 있도록 하겠다. 세계를 움직이는 최고권력자와 부자가 될 수 있다.

2,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움 여성을 안겨주겠다. 당신만을 위한 부인으로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다.

3,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주겠다. 전쟁에서의 승리와 영광도 당신과 함께할 것이다.


▎트로이전쟁의 원인이 된 왕자 파리스. 유부녀 헬레나를 훔쳐가면서 그리스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위의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선호할 것인가? 욕심 많게 전부를 원하는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각자의 세계관·인생관에 따라 다른 답을 내려놓을 듯하다. 질문의 출처는 3000여 년 전의 그리스 신화다. 그 유명한 ‘파리스의 선택(Judgment of Paris)’이다. 파리스는 도시국가 트로이(Troy)의 왕자다. 아름다운 미소년의 상징으로 질문을 받을 당시는 양치기다. 1의 질문은 제우스의 부인인 헤라(로마:주노), 2는 사랑과 미를 관장하는 여신 아프로디테스(로마:비너스), 3은 지혜와 전쟁의 신 아테네(로마:미네르바)가 던진 제안이다.

너무도 ‘황홀한’ 세 가지 제안은 미에 대한 경쟁에서 시작됐다.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라고 선택할 경우 파리스에게 제공될 ‘뇌물 리스트’인 셈이다. 그리스 신화 속의 신은 결코 완벽하지 않다. 아니, 사악한 인간보다 한 술 더 뜨는 막장에 가까운 존재들이다. 올림포스 12신의 총사령관 제우스는 거짓말쟁이에다 성폭행범의 대명사에 들어갈 듯하다.

여신들도 똑같다. 서로의 미를 다투면서 10대 나이 양치기 미소년을 꼬드긴다. 21세기 10대라면 돈·권력 나아가 지혜의 의미도 잘 알 것이다. 3000년 전 청소년이 그 같은 개념을 이해했을까? 예쁜 여자에게 이끌리는 것이 10대의 본능이다. 양치기 파리스의 최종 선택은 아프로디테스다. 선물로 사과를 준다. 헤라와 아테네는 화를 억누르지 못한 채 사라진다. 이후 파리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아내로 맞이한다. 그리스 문화의 원조 격인 미케네(Mycenae)의 왕 메네라우스(Menelaus) 부인인 헬렌(Helen)이 파리스에게 안겨진 선물이다. 아프로디테스가 남의 부인을 훔쳐서 파리스에게 안겨준 셈이다. 장님 이야기꾼인 호머(Homer)의 대서사시 일리아드(Iliad)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진,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의 발단이 된 ‘황당한’ 러브스토리다.

아테네, 성(聖)의 영역에 모든 것을 걸다


▎아프로디테스는 소년이든 유부남이든, 신이든 인간이든 관계없이 모두에게 자신의 애정행각을 자랑하는 여신이다.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미케네 왕의 부인을 훔쳐가면서 그리스 동맹국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올림포스 신들은 서로의 이해관계를 따지면서 직간접적인 지원에 나선다. 미의 여신으로 선택된 아프로디테스가 트로이 지지에 나선 것은 당연하다. 헤라와 아테네가 그리스를 응원한 것은 물론이다. 트로이 전쟁은 바로 올림포스 신들 사이의 질투심과 이해관계가 넣은 대리전에 해당된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이면에 도사린 강대국 간의 속셈과 비슷하다. 전쟁은 결과적으로 그리스 승리로 끝난다. 트로이는 멸망한다. 그러나 승전국 그리스 역시 이후 파란만장한 시련 속으로 들어간다. 전쟁에 참가했던 그리스 영웅들 대부분은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다. 당시 그리스 동맹국 최고 사령관격 아가멤논(Agamemnon)은 승리자로 돌아온 뒤, 자신의 부인에 의해 살해된다. 아이스킬루스(Aeschylus)가 만든 그리스 비극 오레스테이아(Oresteia)는 당시의 상황을 극적으로 재구성한 인류 최고의 고전에 해당된다.

파리스에게 던져진 제안 가운데 특별한 의미로 와 닿는 것은 세 번째 항목이다. 지혜·승리·영광에 관한 것이다. 스토이시즘에 기초한 사고라면 당연히 선택할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이상적이고도 교과서적으로 살아갈 수만은 없다. 세상의 정의와 가치는 돈·권력·아름다움으로 집약된다. 하버드 대학 출신, 5개 외국어가 가능한 천재가 가수나 배우로 몰리는 판이다. 어느 정도 ‘뜨면’ 뭔가 예술적인 정치가로 변신한다. 아테네 여신의 제안은 광야의 유혹을 뿌리친 예수나, 마왕(魔王)과 그의 세 딸의 감언이설에서 벗어난 부처에게나 어울리는 스토리다.

그 같은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제안을 주저없이 통째로 받아들인 곳이 있다. 나라이름 자체를 아테네 여신을 본떠 만든,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아테네다. 아테네 여신을 수호신으로 받들면서 나라의 최고 중심에 신전을 세운 도시국가 아테네가 바로 주인공이다. 속(俗)의 상징으로서의 미(美)와 권력 그리고 돈을 거부하고, 지혜·승리·영광과 같은 성(聖)의 영역에 모든 것을 건 나라가 도시국가 아테네다.


▎황금으로 만든 아테네 여신이 신전 한가운데에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신전 속에 있던 아테네 여신의 상상도.
아테네 여신과 도시국가 아테네와의 연은 올리브나무에서 시작된다. 계기는 수호신을 둘러싼 경쟁이다. 그리스인들은 자신의 수호신으로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과 아테네를 염두에 뒀다. 포세이돈과 아테네는 자신의 특별한 선물을 보낸 뒤, 그리스인 스스로가 결정하라고 말한다. 포세이돈은 자신의 창으로 섬을 가르면서 하늘로 치솟는 소금물 분수를 선보인다. 아테네는 올리브나무를 선물로 보낸다. 소금물 분수는 풍부한 식수와 해상무역을 의미한다. 많은 섬을 통해 쾌적하고도 풍요로운 삶을 약속한 셈이다.

아테네가 보낸 선물은 연료로서의 나무, 생활을 윤택하게 만드는 올리브기름,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서의 올리브를 의미한다. 논의 끝에 그리스인은 아테네의 올리브나무를 선택한다. 도시국가 아테네의 수호신으로 아테네 여신이 결정된 것이다. 탈락한 포세이돈은 이후 사사건건과 아테네 여신, 나아가 도시국가 아테네를 공격한다. 그리스인의 발전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의 투쟁사이기도 하다. 승리의 여신 아테네는 포세이돈으로부터의 공격을 피하면서, 자신을 선택한 도시국가 아테네를 끝까지 보호한다. 트로이와의 전쟁 중 아테네 여신이 그리스를 응원한 이유는 파리스의 사과만이 아닌, 올리브나무를 둘러싼 오래된 연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올리브나무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세계관과 삶의 기준을 하나로 압축한 증거이자 상징이다. 올리브나무를 제공한 아테네 여신을 수호신으로 결정한 시점에서부터 그들의 미래사를 예측할 수 있다. 포세이돈의 소금물 분수는 하드(Hard)에 기초한 중후장대(重厚長大) 스타일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국가를 통치하고 뭔가를 크게 하나로 압축해서 나아가는, 아시아형 전제국가가 선호하는 구도다.

오렌지 나무= 페르시아 제국의 흔적


▎파르테논 신전은 그리스 문명의 정신세계를 상징한다.
이에 비해 아테네의 올리브나무는 소프트(Soft)에 기초한 경박단소(輕薄短小)형 인생관을 반영한다. 큰 제국을 꿈꾸는 왕의 입장이 아니라, 매일 구체적으로 생존해야만 하는 생활 속 필수품으로서의 선물이다.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형 구도가 아닌, 개개인이 책임을 지는 도시국가형 민주주의 체제로 나아간 것은 그리스인의 선택이자 숙명에 해당된다. 왕의 입장에서 볼 때 올리브나무 유무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지중해와 에게해를 따라가면 어디에서도 쉽게 올리브나무를 만날 수 있다. ‘올리브기름=이탈리아’라 말할지 모르지만 원조는 그리스다. 올리브기름의 진짜 맛을 이해한다면 이탈리아가 아닌 그리스산을 선택할 것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볼 때 올리브기름을 가장 먼저 만들어 사용한 곳은 기원전 2500년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다. 그러나 왕이나 특정인만을 위한 고급 사치품에 머물렀다. 개개인 모두가 일상용품으로 사용한 곳은 바로 도시국가 그리스다.

지중해와 에게해 주변은 매년 겨울 찾아가는 필자의 여행지다. 이탈리아 베니스, 에게해를 사이에 둔 그리스와 터키의 해변도시가 주된 여행 경로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체감한 것은, 올리브와 오렌지가 갖는 독특한 배경과 상이점에 관한 부분이다. 올리브가 그리스문화와 문명의 상징에 해당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성적 본능은 원래 그리스 신화에서 장려되고 자랑스럽게 여겨지던 부분이다.
이른바 캘리포니아 선키스트를 연상케 하는, 주먹 크기의 오렌지는 어떨까? 의외로, 이슬람문화·문명의 산물이다. 이란·이라크·시리아 나아가 현재의 터키를 포함한 이슬람권의 상징이 바로 오렌지다. 고대 그리스 당시로 돌이키자면, 페르시아의 상징이 오렌지다. 올리브의 적이 오렌지인 셈이다.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남부를 여행한 사람이라면 오렌지 나무를 곳곳에서 접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이 보면 부럽고도 아깝지만, 풍성한 오렌지를 따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는 곳이 현지 풍습이자 풍경이다. 아주 간단하지만, 오렌지 나무가 있다는 것은 이슬람 나아가 페르시아 제국의 흔적이 배인 곳이라 보면 된다. 스페인의 세르비아·코르도바, 이탈리아의 나폴리·시칠리아는 15세기까지만 해도 페르시아와 이슬람 영향권에 있던 곳이다. 올리브도 찾아볼 수 있지만, 도시의 중심부는 오렌지다.

그리스의 올리브와 이슬람의 오렌지는 묘한 부분에서 상극관계에 놓여있다. 먼저 올리브를 보자. 올리브나무는 비가 드문, 아주 척박한 땅에서 자란다. 암반에 가까운 곳에 뿌리를 박고 자라는 드센 나무다. 오렌지는 어떨까? 물이 많고, 푸른 풀밭이 깔린 곳이 주된 무대다. 페르시아나 이슬람권이라고 하면 아마도 사막을 먼저 떠올릴 듯하다. 로마의 수로 시설은 페르시아 수리 기술의 복사판이다. 사막에 사는 페르시아 이슬람권이기에 물에 대한 운영이나 관리가 철저하다. 오렌지는 만년설(萬年雪)을 배경으로 한, 물이 풍부한 지역에서 자라는 유실수다. 따라서 오렌지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도시가 존재한다. 노란색의 오렌지는 과일로서만이 아닌, 에덴의 동쪽과 같은 파라다이스의 또 다른 상징물에 해당된다. 천국 에덴동산의 원조는 구약성경이 아니라, 페르시아 전설에서 시작됐다. 현재의 터키 남부 지중해를 따라가면 끝없는 오렌지 나무 행렬을 만날 수 있다. 겨울이라도 해변도로 주변 노상가게에서 손쉽게 구입할 수 있다. 보통 ㎏당 1달러 정도다. 상품 유무는 껍질 두께와 당도에 있다. 설산에서 내려온 물을 통해 자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과일이 페르시아와 이슬람권의 오렌지다.

올리브가 갖는 가장 큰 장점 밤문화 창조


▎1 아테네의 이미지는 창과 방패를 든 완전무장 차림의 입상이다. 아테네는 친구도, 남자도, 가족도 없다. / 2 나폴리 고고학박물관에 소장된 아테네 입상. 원작을 모방한 것이지만 영혼을 느낄 수 있다.
척박한 토지의 산물인 올리브는 도시국가 그리스의 나아갈 바를 제시한 나침반에 해당된다. 올리브는 도시와 무관하다. 물이 없는 곳에 자라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택한 평지가 아닌 돌산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다. 곡물 하나 제대로 심기 어려운 곳이 바다를 낀 도시국가 그리스의 환경이다. 따라서 무역을 통한 생존만이 유일한 길이다. 고대 그리스가 지중해·에게해 무역을 통해 활로를 개척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올리브오일은 도자기와 더불어, 도시국가 그리스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다. 올리브는 피클처럼 만들어 바로 먹을 수도 있지만, 기름으로 짜서 장시간 보관할 수도 있다. 올리브오일은 샐러드용 기름에 한하지 않는다. 생선이나 고기를 보관하는 방부제로서의 기름, 얼굴이나 몸에 바르는 크림비누로도 사용된다. 죽은 사람들의 몸을 닦고, 사체의 부식을 방지할 수 있는 성스러운 재료로도 사용된다. 고대 그리스 전사들은 나체다. 긴 창과 투구 차림이 전부다. 추워서 어떻게 견딜까 싶지만, 올리브오일이나 돼지기름을 온몸에 발라 체온을 유지했다.

올리브가 해상무역의 원동력이 된 반면, 오렌지는 국내 소비용으로서의 제한된 역할에 그친다. 오렌지는 오래 보관하기가 어렵다. 배에 실어 어딘가로 수출하려 해도 금방 상하게 된다. 수출품이 되기 어렵고, 용도도 껍질을 까서 먹는 것 외에는 극히 제한적이다. 멀리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생산 즉시 산지에서 곧바로 소비되는 국지적인 상품이 오렌지다. 페르시아, 나아가 이슬람 문화권이 내부지향적인 문화가 된 것은 오렌지를 통해서도 풀이해낼 수 있다.

필자의 판단이지만, 올리브가 갖는 가장 큰 장점은 바로 밤문화 창조에 있을 듯하다. 밤을 밝히는 기름이다. 도시국가 그리스는 올리브기름을 통해 밤문화를 창조해낸다. 그리스 비극으로 대표되는 고대 그리스 극장문화는 대략 태양이 넘어가는 순간에 시작해 한밤중에 끝났다. 반원(半圓)극장에서 이뤄진 당시의 공연은 웃고 즐기는 21세기판 엔터테인먼트와 구별된다. 디오니소스를 비롯한 신들을 모신, 성스러운 의식으로서의 공연이다.

그리스 비극의 대표격인 아이스킬루스의 오이디푸스(Oidipus)는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인륜을 도시국가 내 시민 모두에게 보여주는 도덕 교과서에 해당된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법·상식·도덕·윤리에 관한 공통분모가 정비된 것은 불과 100여 년 전이다. 2500여 년 전 그리스 시대의 법·상식·도덕·윤리는 반원극장을 통해 시민 모두에게 전파됐다. 그 같은 밤의 문화를 만들어낸 촉매제가 바로 올리브오일이다. 가정마다 올리브오일을 통해 심야의 어두움을 이겨냈다. 고대 그리스 전시박물관에 가면 밤을 밝히는 크고 작은 램프들이 반드시 등장한다.

그리스와 로마 조각을 구별하는 요소는 영혼


▎승리의 여신 나이키. 아테네의 시녀와 같은 존재로 원래 제우스의 전령사 역할을 하기도 한 신이다.
페르시아는 다르다. 있다 해도 큰 청동제 고급 램프만이 존재한다. 왕이나 특권층을 위한 장식물이다. 왕이 없이 시민 개개인이 주권을 행사한 그리스와 달리, 페르시아인의 99%는 왕을 위한 노예에 불과했다. 노예가 법과 윤리를 공부하고, 밤문화를 즐긴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페르시아 이슬람의 밤은 어둠과 정적 그 자체다. 그 같은 상황은 21세기에 접어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유럽과 맞닿은 지중해 아프리카권의 화려한 밤문화를 거론할지 모르겠지만, 페르시아나 이슬람과 무관한 로마의 영향에 불과하다. 로마가 그리스 문화를 숭배하고 흉내 낸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리스의 밤문화를 본떠 한층 더 많은 기름램프를 양산해낸 곳이 로마다. 북아프리카나 중동의 불야성 문화는 그 같은 흔적의 결과물이다. 탈레반이나 이슬람국가(IS)가 오락이나 밤문화를 금지한 것은 이슬람 교리에 따른 것만이 아니다. 기원전 7세기부터 시작된 페르시아 문화의 유산이라 볼 수도 있다. 올리브기름과 램프는 바로 밤을 지배한 자유시민의 전리품에 해당된다. 오렌지는 그 같은 기능이나 상징과 무관하다.

유명한 유럽 내 뮤지엄이라면 아테네 여신 조각상을 반드시 만날 수 있다. 이탈리아 나폴리 고고학박물관은 필자가 가장 아끼는 아테네 여신상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입상(立像)이다. 아테네 여신상은 항상 서 있는 자세로 제작된다. 제우스·아폴로·아프로디테스·포세이돈·헤라를 비롯한 대부분의 신은 입상만이 아닌 좌상으로도 선보인다. 아테네 여신은 항상 서 있다.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비슷한 표정과 장식물도 등장한다. 한 손에는 메두사가 그려진 방패를, 다른 한 손에는 긴 창을 들고 서 있다. 몸이나 주변 어딘가에는 뱀 문양의 장식물이 붙어 있다. 머리는 투구를 쓴 자세다. 투구를 뒤집어 쓴 전투 태세의 아테네 여신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필자가 나폴리 아테네 여신상에 빠진 이유는 대리석 돌에서 묻어나는 독특한 분위기 때문이다. 얼굴 표정과 몸 전체를 통해 확연히 감지된다. 대부분의 그리스 조각이 그러하듯, 나폴리 아테네 입상은 서기 2세기 만들어진 로마의 작품이다. 그리스 원형을 본떠 만든 짝퉁으로, 진짜의 행방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필자는 나폴리 입상이야말로 그 어떤 아테네 조각보다도 훌륭하다고 단언한다.

로마인이 만든 짝퉁이라도 두 가지가 존재한다. 이탈리아 거주 로마인이 흉내 내 만든 작품과, 당시 로마의 식민지에 해당되는 그리스 장인을 불러들여 만들어진 그리스인에 의한 모작(模作)이다. 제작자가 누구인지에 관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필자는 나폴리 아테네 입상이 그리스인의 작품이라고 확신한다. 아무리 대단한 프랑스 요리사라도 한국 할머니가 대충 만드는 김치맛을 따라갈 수가 없다. 그리스와 로마 조각을 구별하는 가장 큰 요소는 영혼의 유무다. 그리스 조각에는 영혼이 배어 있다. 로마인이 만든 조각은 세련되기는 하지만 영혼에서 동떨어져 있다. 그리스인의 조각은 신을 염두에 둔, 신전에 바치는 선물로서의 영혼이 배어 있다. 로마는 다르다. 황제를 위한 선물,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예(藝)와 술(術)로서의 장식물에 불과하다. 어떻게 구별하느냐고 물을지 모르겠지만, 자주 그리고 깊이 보면 영혼의 울림을 찾아낼 수 있다. 비록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모작 입상이지만, 영혼의 흔적을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것이 나폴리 아테네 입상이다.

아테네 여신은 기존질서의 파괴범


▎수많은 젖가슴을 가진 아르테미스와 같은 여신이 터키 동부지역 도시국가의 수호신으로 등장한다.
나폴리 아테네 입상은 창과 방패가 아예 없는 부서진 작품이다. 왼팔만 존재할 뿐 오른팔은 아예 없다. 그러나 그 같은 ‘장애자’ 조각이지만, 아테네 여신만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이미지는 너무도 확연히 느껴진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지혜·승리·영광이 아닌, 고독·슬픔·고통으로 새겨져 있다.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성모 마리아가 어린 예수를 안고 있으면서 자식을 응시할 때의 어두운 표정이나 쓸쓸한 분위기로 느껴진다고 할까? 십자가에 못 박힐 운명인 미래 예수의 모습을 예견하는, 어머니의 고통과 슬픔이다.

바로 마리아와 어린 예수로 구성된 성화(聖畵)의 핵심이자 주제다. 승리의 여신 나이키(Nike)는 아테네 여신을 따르는, 일종의 시녀와 같은 존재다. 아테네가 행한 전쟁에서의 승리 결과는 아테네 스스로가 아닌, 나이키를 통해 전달된다. 도시국가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속에는 높이 36m 아테네 여신 입상이 들어서 있었다. 나이키는 당시 아테네 여신의 손 위에 실린 작은 마스코트에 불과하다. 아테네 여신의 고독·슬픔·고통은 승리를 기뻐하는 승자의 모습과 무관하다. 기쁨과 영광은 나이키에게 돌리고, 승리에 이르기까지 뿌린 피와 땀에 관한 회한(悔恨)이 얼굴과 몸 전체를 통해 확연히 드러나 있다.

아테네는 여신이다. 게다가 남자관계가 한 번도 없고, 따라서 자식도 없는 처녀신이기도 하다. 아테네 신전이 들어선 파르테논은 처녀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같은 시기 지중해와 에게해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처녀 여신이 도시국가 그리스의 수호신으로 등장했다는 것은 아주 특이하다. 수많은 젖가슴을 가진 아르테미스(Artemis)와 같은 여신이 터키 동부지역 도시국가의 수호신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후손 번성을 통한 노동력 제공이란 관점에서 환영받았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수호신은 올림포스 사령관 제우스나 태양의 신 아폴로로 채워지던 시기다. 아테네 여신은 아버지 제우스의 머리를 뚫고 탄생한, 부모조차 무시할 수 있는 기존질서의 파괴범이자 문제아라는 성격이 강하다. 기존의 강력한 힘을 지키는 것이 아닌, 새로운 영역으로 도전하는 신의 이미지로 통한다. 외모도 남성처럼 느껴질 뿐, 아프로디테스와 같은 여린 이미지와 무관하다. 여신으로, 항상 완전무장을 한 상태로 서 있다. 도시국가 아테네는 그 같은 ‘도전하는 신’을 자신의 운명을 가늠할 나침반으로 받아들인다. 크고 강하고 분명한 신이 아닌, 고민하고 고독한 반항아를 수호신으로 숭배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전쟁의 신은 두 명이다. 아테네 여신과 더불어 아프로디테스의 애인이기도 한 아레스(로마:Mars)도 전쟁의 신이다. 그러나 아테네와 아레스는 같은 전쟁의 신이지만 성격이 전혀 다르다. 아레스는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적을 섬멸하면서 승리를 쟁취하려는, 피를 통한 신이다. 정면 공격형이다. 아테네는 가능하면 살육전 없이, 평화롭게 승리를 쟁취하려는 측면 공격형 신이다. 피가 아니라, 지혜를 통한 전쟁이다. 전투에 지더라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도시국가 아테네의 중흥기는 바로 지혜에 기초한 아테네 여신의 세계관이 맹위를 떨친 시기이기도 하다. 도시국가 그리스가 전 세계 민주주의 모델이자, 예술·문학·철학·과학 심지어 스포츠의 원조로 통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테네 여신이 만든 특별한 세계관과 캐릭터가 그리스 시민 모두에게 투영된 결과라 볼 수 있다. 힘을 과시하기보다 아끼고, 이기기 보다 지지 않으려 노력하고, 승리감에 도취하기보다 다음 상황을 준비하는 겸허한 여신 아테네야 말로 도시국가 아테네 시민 모두의 롤모델이었다고 볼 수 있다.

2017년 봄, 필자가 보는 한국의 대세는 두 개의 키워드로 집약된다. ‘천동설’과 ‘한민족의 한족화(漢族化)’다. 먼저 천동설을 보자. 세상이, 아니 우주가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내가 던지는 말과 행동만이 전부 옳다. 내가 주도하는 만물의 인력(引力)에 반할 경우 우주로부터의 퇴출만이 기다리고 있다. 나의 심기를 건드릴 경우, 문자폭탄, 명예훼손 민·형사 고소·고발장으로 박멸될 뿐이다. 아날로그의 향수를 자아냈던 광장은 천동설 확신범들간의 세 늘리기 디지털 경쟁무대로 변한지 오래다. 공공의 적으로, 100년 전의 매국노, 60년 전의 친일파, 30년 전의 빨갱이, 현재의 부역자들이 천동설 신자 주도하의 광장에서 단죄된다. 양시론·양비론은 애초부터 대화에 끼어질 수 없는, 자격미달이다. 지혜에 기초한 아테네 여신식의 세계관은 필요없다. 피를 통한 아레스 스타일의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만이 정답이다. 천동설은 남에 대한 정당성으로서만이 아닌, 스스로의 결의와 전의(戰意)를 다지는 내부단합용 논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밖의 상황변화는 애초부터 관심 밖이다.

2017년 한국 키워드, ‘천동설’과 ‘한족화(漢族化)’


▎아프로디테스는 인간이 신에서 벗어나던 르네상스부터 새롭게 각광을 받은 아이돌이기도 하다.
한민족의 한족화는 연봉, 재산, 아파트 시세로 날밤을 새는 신문·방송 기사를 통해 확인해볼 수 있다. 어제의 인기와 영광을 증명하는 스토리로 ‘2억원 잠자리 유혹도 거부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판이다. 본인이야 거부했다는 말에 방점을 실었겠지만, 사람들은 2억이란 숫자에 눈이 간다. 100만원짜리 유혹은커녕, 아예 문의조차 받아보지 못한 것이 억울하고 수치스럽게 느껴질 듯하다. 천동설 신자 간의 숫자 경쟁이 그러하듯, 세상에 대한 정당성과 정통성은 디지털 수치로 증명된다. 돈의 규모가 정의다. 잠자리 수표든, 일당독재 공산주의 국가로부터의 굴욕이든 아무런 상관없다. 돈만 벌면 된다. 바로 한족의 상식·가치·윤리다. 공산주의 이념조차 ‘특색 있는 사회주의’란 표현으로 바꿔 돈에 혼인하는 한족의 세계관이 2017년 한국을 지배하고 있다. 국가·종교·역사·국가 심지어 스포츠조차 중국으로 들어가는 순간 금전만능으로 변신한다. 모든 종착점은 결국 돈이다. 의리를 외치던 선글라스 차림의 탤런트는 자선기금 모집 격투기에 나선 뒤 어디론가 사라진 상태다. 사드 보복에 대해 한마디도 못하는 것은 한민족의 한족화를 증명하는 것이다. 원칙 가치·자존·명예가 아니라, 돈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이 한족화의 기본이다. 이미 사드 보복 이전에 금전만능 한족의 세계관이 대세로 자리 잡은 상태다. 광장에 몰린 천동설 주장은 한족화를 끝낸 한민족의 민낯일지 모르겠다.

탄핵 정국, 대통령 수감, 천안함, 세월호, 대통령 선거로 박진감이 넘치게 흘러가는 한국이다. 슬픈 공화국의 자화상을 보면서 착하고 순수하던 어제의 한국, 과거의 한국인을 떠올려본다. 천동설과 한족화와 무관하던 시대다. 하늘을 존경하고 천벌을 두려워하던 우주관, 비난보다 서로의 지혜와 충고에 귀를 기울이던 세계관, 난 사람이 아니라 든 사람이 모델로 자리 잡았던 딸깍발이 사고가 통하던 시대다. 큰 얼굴이 박힌 셀피를 통한 나의 페이스북에 매달리기보다 신, 자연, 주변사람들을 염두에 두면서 타인을 배려하면서 살아가던 시대다. 바로 아테네 여신을 수호신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갔던 고대 그리스와 같은 환경이다. 천동설과 한족화 분위기가 확산될수록, 아테네 여신과 함께하면서 인류의 문화와 문명 개척에 나섰던 고대 그리스의 모습이 떠오른다.

2017년 한국에서 과연 그리스 신화 속의 누가 미래를 위한 수호신으로 등장할 수 있을까? 피를 통한 전쟁의 신 아레스, 번개를 통해 세상을 한순간에 불사르는 전지전능 제우스, 환락과 속의 즐거움으로 인생을 즐길 아프로디테스, 전 세상 재산을 수중에 안고 있는 지하의 신 프루토…. 천동설과 한족화 시대에 맞는 캐릭터는 네 명의 신 가운데 어디쯤에 서 있을 듯하다. 잠시 2500년 전으로 되돌아가, 고대 그리스인의 눈으로 한국을 바라보자. 아테네 여신의 지혜를 통해, 한국의 오늘과 내일을 살펴보는 것도 결코 나쁘지는 않을 듯하다.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705호 (2017.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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