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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셀프테라피(5)] 의존과 구속이라는 중독증 

‘매혹’에서 ‘파탄’의 늪으로 

정여울 문학평론가
알코올·게임·스마트폰 뿐 아니라 일·종교·관계 중독 등 결핍과 공허감 견디지 못해 생겨나기도… 그룹활동 하며 유대감 갖는 게 중요

▎알코올, 도박, 약물, 쇼핑, 온라인게임 등 현대인에게 중독의 범주는 점점 확대된다. 이들 중독의 패턴은 현실세계와 유리돼 있다는 점에서 똑같이 치명적이다. / 사진제공·아이클릭아트
알코올, 도박, 약물, 마약, 카페인, 니코틴, 쇼핑, 온라인게임 등등.

현대인에게 중독의 대상은 날이 갈수록 다양해지고 강력해지고 있다.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은 오래전부터 심각한 치료 대상이었지만 게임 중독이나 쇼핑 중독 등은 비교적 최근에 심각한 문제로 부상한 것들이다. 게임 중독으로 스스로의 건강을 돌보지 못해 사망하거나 어린 아이를 방치하여 죽게 하는 사고가 생길 정도로 중독은 치명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중독의 패턴은 알코올이나 마약이나 게임이나 상관없이 동일하다. 처음에는 ‘흥미로운 자극’이나 ‘기분전환용’으로 시작된 것이 나중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를 바꿔버리기도 한다. 원래는 하나였던 세계가 ‘지긋지긋하고 답답한 이 현실세계’와 ‘흥분과 자극이 넘치는 짜릿한 가상세계’로 분리되는 것이다.


가상의 딸 키우다 진짜 딸 방치해 죽게 하기도


▎사람들은 결핍감과 공허함을 견디지 못해 중독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 사진·중앙포토
인터넷 채팅방에서 만나 인연을 맺은 남녀가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 프리우스에 함께 빠져든 뒤, 태어난 지 석 달밖에 되지 않은 딸을 방치해둔 채 무려 12시간 동안 게임을 하고 돌아와보니 딸은 이미 죽은 뒤였다. 2009년 9월에 일어난 이 충격적인 사건은 온라인게임 중독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경고음이 됐다. 놀라운 것은 이들이 현실세계에서 부부이고 딸을 두었던 것처럼, 가상세계에서도 부부였고 역시 딸도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현실세계의 딸보다 가상세계의 딸에게 더 커다란 관심을 쏟아부은 나머지, 결국 진짜 딸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 부부가 게임을 하고 돌아왔을 때 어린 딸아이는 수분 부족과 영양실조로 사망한 상태였다. 아이는 태어나서 3개월간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났다.

알코올이나 도박, 스마트폰이나 니코틴 같은 ‘눈에 보이는 물질’이 중독의 자극이 되는 경우도 많지만, 일 중독, 종교 중독, 걱정 중독, 관계 중독, 스트레스 중독 등 그것이 ‘질병’의 개념에는 포함되지 않을지라도 실제로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커다란 해악을 끼치는 심리적 성향도 커다란 문제가 된다. 미디어는 더 많이 가진 사람들, 더 많이 즐기는 사람들, 더 많이 주목받는 사람들을 24시간 전시함으로써 대중에게 끊임없이 ‘내 안의 결핍’을 자극하고 있다.

사람들은 정말 알코올이나 도박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기 안의 결핍감과 공허감’을 견디지 못해 무언가에 중독되어 간다. 현대인은 조금이라도 부족한 것, 없어 보이는 것, 아쉬워 보이는 것에 대한 참을성을 잃어가고 있다. 무한미디어 시대의 현대인은 ‘결핍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

임상심리학자 앤 윌슨 섀프는 중독을 더 이상 ‘개인’의 문제로 남겨둬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자신의 저서 <중독사회>에서 앤 윌슨 섀프는 이 사회가 바로 각종 자극과 쾌락에 중독된 사회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보일 수 있음을 지적한다. 알코올 중독의 시작이 술 권하는 사회라면, 그 끝은 자신의 인생과 인간관계 전체의 파탄이다. 중독에 빠지다 보면 좋았던 인간관계까지 결국 부서지게 된다. 중독은 처음에는 ‘기분 좋은 매혹’으로 시작됐다가 나중에는 ‘삶과 인간관계의 총체적 파탄’으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중독에는 어떤 ‘달콤한 향유’가 있기 때문이다. 중독 안에는 확실히 뭔가 매혹적인 쾌락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켜줄 무엇, 자신을 보호해줄 도피처를 찾는다. 아기를 유산한 뒤 남편과 갈등을 빚다가 급기야 이혼하게 된 한 여성이 게임 중독에 빠진 이야기는 ‘중독 안의 향유’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잃고 퇴거 소송을 당해 거리에 나앉게 돼서야 비로소 도움을 요청했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를 병원에 입원시켰고, 그녀는 심리치료병동에서 지내며 간신히 중독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게임 중독에 빠진 자신을 묘사하는 그녀의 글 속에는 중독의 핵심 메커니즘이 담겨 있다. 그녀는 아이가 유산된 뒤 남편마저 자신을 떠나자 ‘이 세상에 혼자 남았다’는 고립감을 견디지 못해 게임을 찾았다. 게임은 자신을 보호해줄 공간이었으며, 네모난 모니터 속에서 그녀는 비로소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나를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절망감이 그녀를 가망 없는 중독의 세계로 내몰았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나는 인터넷을 알게 되었고, 나를 보호해줄 공간을 만들었다. 네모난 모니터 속에서 나는 다시 의미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가면을 쓰고 새로운 세상으로 뛰어들었다. 그곳에서 롤플레잉 게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아무리 게임을 해도 일상에서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기에, 어느 순간부터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나 자신과도, 다른 누구와도 원만히 지낼 수 없었으므로 잠을 자지도, 먹지도 못했다. 내가 숨쉬고 있었던 것은 단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 위해서였다. 나를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_베르트 테 빌트, <디지털 중독자들>, 율리시즈, 2017

치유는 혼자 아닌 ‘함께’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한 장면.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아내가 나를 떠나서 알코올 중독이 된 건지, 내가 알코올 중독이어서 아내가 떠난 건지 알 수 없다’는 고백을 남겼다. / 사진·중앙포토
중독의 치유 과정의 첫 번째 주안점은 그 치유의 대상이 단지 ‘개인’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중독의 치유는 개인에서 시작되어 가족, 나아가 사회로 확장되어야 한다. 달콤한 유혹이 가득 담긴 광고를 통해 ‘술 마시는 즐거움’을 예찬하는 미디어는 또한 ‘단 한 번의 음주운전으로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공익광고 또한 함께 내보낸다. 미디어는 ‘유혹’과 ‘금기’의 이중적 메시지로 대중을 교란시킨다.

모든 중독의 배후에는 미디어와 기업, 광고와 상품의 네트워크가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다. 이런 사회 속에서는 사실상 중독의 유혹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 <중독사회>의 저자 앤 윌슨 섀프는 지난 수년 동안 중독 치유의 무게 중심이 ‘개인’에서 ‘가족’으로 이동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알코올이나 마약에 중독된 한 사람을 치료하는 것만으로는 별다른 효과가 없으며 온 가족 시스템, 즉 중독 시스템을 치유해야 비로소 그 개인도 제대로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이다. 치유의 무게중심을 ‘개인’에서 ‘시스템’으로 이동할 때 비로소 중독으로부터의 해방이 가능해진다. 가족 중에 알코올 중독환자가 있으면 가족 중 또 다른 일원이 중독에 노출될 위험이 커진다. 이것이 바로 ‘동반중독증’이다.

중독 치유의 두 번째 주안점은 ‘투명성’과 ‘정직성’이다. 상황이 나아지는 것처럼 보이는 데 집중해서는 안 된다. 상황이 나쁘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죽을 만큼 수치스럽더라도, 그 나쁜 현실을 인정해야 치유가 시작된다. 이 경우에 선의의 거짓말이나 하얀 거짓말 따위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환자를 위한 가족의 거짓말도, 중독자 자신이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위한 어떤 거짓말도, 치료에는 독이 된다. 중독 자체가 어떤 자기기만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 술을 한 병 마시면 괜찮아지겠지’, ‘한 병쯤이면 괜찮을 거야’, ‘한 번만 해보자. 다시는 그러지 않으면 되잖아’, ‘이 정도 마시는 건 결코 병이 아니야’, ‘내가 술 좀 마신다고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니잖아?’ 이 모든 것이 자기합리화의 거짓말이라는 것을 중독자는 사태가 최악의 상황에 다다라서야 깨닫게 된다.


▎중독 안에는 매혹적인 쾌락이 숨어져 있다. / 사진·중앙포토
각종 중독 때문에 직장을 잃고, 가족관계를 파탄에 빠뜨리고, 통장 잔고가 바닥나고, 심각한 사고가 일어나 몸과 마음의 건강을 다 잃고 나서야 중독자는 자신이 망쳐놓은 현실을 깨닫는다. 그런 극단적인 상황으로 가게 만든 최고의 주범이 바로 거짓말이다. 자신을 향한 거짓말, 가족을 향한 거짓말,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인간관계를 향한 거짓말이 중독자의 주변환경을 황폐화시킨다. 스스로를 거짓말로 단단히 무장했기에 주변 사람이 돕고 싶어도 도울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정직함은 치유의 가장 빠른 지름길이며 진정한 자기 자신과 만나는 최고의 길이기도 하다.

중독 치유의 세 번째 주안점, 그것은 중독의 목표가 단지 술이나 마약 같은 중독의 ‘대상’과 작별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다. 즉 중독의 목표는 중독대상과의 단절이 아니라, ‘진정한 내 삶을 되찾는 것’이라는, 보다 큰 그림으로 확장돼야 한다. 예컨대 죽을힘을 다해 술을 끊은 지 1000일이 지나서도 안타깝게도 순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딱 하루 술을 마셨다면, 그것은 과연 말짱 도루묵일까.

‘알코올 중독’을 끊는다는 점에서는 실패일지도 모른다. 그 힘겨운 1000일의 기록을 다시 제로로 돌려야 하니까. 하지만 ‘내 삶을 되찾아가는 보다 크고 깊은 내면의 여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1000일 동안 금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 번의 유혹을 참지 못한 나 자신의 나약함을 절절한 심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결코 ‘실패’는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으로 가는 더 깊은 내면의 길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치료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1000일의 금주를 깬 사건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중독의 목표를 ‘외부’에서 구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서 보다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 때, 환자는 난관 속에서도 더 빨리 아픔을 극복할 수 있는 회복탄력성을 갖게 될 것이다.

중독과 폭력은 동전의 양면 같아


중독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결국 중독의 대상 ‘이외의 것들’에 더 민감해지는 것이다. 술이나 담배, 마약이나 진통제 같은 것들이 아니라 자기 삶의 소소한 자극들에 더욱 예민한 감각의 촉수를 드리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중독의 치명적인 증상 중 하나는 ‘그 밖의 모든 것’에 둔감해진다는 것이다. 중독의 부정적인 결과 중 하나는 그것이 폭력과 연결되기 쉽다는 것이다. 알코올 중독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아내나 아이들을 심하게 구타하고도 늘 몽롱하게 취해 있기 때문에 죄책감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중독과 폭력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바짝 붙어 있다. 예컨대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과 아이들에 대한 폭행이 합쳐지면, 그 가족은 이중의 고통으로 고생하게 된다. 가족들은 점점 중독 환자로부터 멀어지며, 폭력에 대한 저항의 용기까지 잃어버리게 되면 결국 삶에 대한 의욕, 구원에 대한 희망까지 잃어버리게 된다. 행복하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단지 불행의 원인을 제거한다고 해서 곧바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알코올 중독자가 오늘은 잠깐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해서, 오늘은 잠깐 아이들을 때리지 않았다고 해서, 뭔가 상태가 호전되거나 증상으로부터 회복된 것은 아니다. 중독의 성향은 언제 어디서 튀어나와 발현될지 알 수 없다.

“내게 상담을 받으러 오는 많은 고객은 자신이 ‘좋은’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그들에게 그것이 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보면, 그들의 대답은 대체로 이런 식이다. ‘남편은 나를 때리지 않아요. 그이는 나를 속이지도 않죠. 그리고 돈도 잘 줘요.’ 여기서 알 수 있듯, 그들이 ‘좋다’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끔찍한 일이 없다는 말에 불과하다! 요컨대 중독 시스템 안에 살다 보면, 우리는 우리 삶에서 진짜 ‘좋은’ 것이 무엇인지 개념을 명확하게 갖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_앤 쉴슨 섀프, <중독사회>, 이상북스, 2016

중독 환자와 함께 살아온 가족들은 ‘불행’의 확실한 징후를 피하는 데 급급하기 때문에 ‘행복’이란 ‘불행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 착각하기 쉽다. 남편이 아내를 때리지 않는다고 해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해서, 생활비를 잘 준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다. 중독 환자 본인의 고통 못지않게 함께 사는 가족의 고충도 크기 때문에, 그들은 일상에 대한 모든 예민한 감각을 되도록 ‘마비’시킴으로써 고통에 대한 방어기제를 쌓아 올린다.

고통에 대한 방어에 급급하다 보니,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예민한 감각 또한 무뎌지게 된다. 중독 치료의 더욱 장기적인 목표는 삶에 대한 원초적인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다. 행복을 느낄 권리, 다시 사랑을 시작할 권리, 삶에 대한 애정을 회복할 권리를 되찾는 것이야말로 중독의 치료를 넘어 향해야 할 마음의 이정표다.

어느 정도 중독의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할지라도, 진정한 회복의 길은 멀고 험할 수밖에 없다. 간신히 중독의 사슬을 끊어냈는데도, ‘생각보다 기분이 좋지 않다’고 고백하며 우울감에 시달리는 사람도 많다. 바로 그때가 제2의 고비다. <중독자의 내면 심리 들여다보기>의 저자 아놀드 루드비히는 이렇게 말한다. “힘든 해독 과정을 견디더라도 회복의 길은 멀기만 하다. 해독의 시련을 통과한 중독자가 회복의 길목에서 만나는 다음 장애물은 막연한 불안감(generalized unease)이다.”

이는 사실 금단증상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겪는 불안감인데, 확실한 고통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막연히 ‘우울증’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괜스레 짜증이 심해지고 이유 없이 화를 내는 것도 아직 금단증상이 미세하게 지속되고 있기 때문인데, 본인이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불안함은 우울증 아니라 ‘금단증상'


▎중독에서 벗어나도 막연한 불안을 느끼다 다시 중독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다. 제2의 고비를 넘겨내야 근원적 치료가 가능하다. / 사진·중앙포토
몇 개월에서 1년까지 이런 비자각적인 금단 증상이 계속되다 보면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되어버렸나’ 하고 자책하다가 결국 중독에 다시 빠져들 위험이 있다. 신체적인 요인이 아니라 심리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막연한 불안을 계속 겪다가 다시 술이나 마약, 담배나 게임에 손을 대는 사람이 많다. 이 제2의 고비를 넘어섰을 때 중독의 근원적 치료는 가능해진다.

이렇게 치료가 멀고 험한 길처럼 느껴질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유대감’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사람들, 과거에 심각한 중독으로부터 치유된 사람들과 함께 그룹 활동을 하는 것이 이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확실한 중독은 아니지만 ‘중독의 위험지수’가 높은 사람들에게도 바로 이런 유대감이 필요하다. 최악의 순간을 경험한 뒤에서야 중독을 치료해야겠다고 결심하면 치료기간은 훨씬 길어질 수밖에 없다. 예컨대 술 때문에 심각한 질병에 걸리거나, 술 때문에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거나, 심각한 채무에 시달리거나, 직장을 잃은 다음에 중독 치료를 시작하는 것은 ‘중독치유’뿐 아니라 ‘망가진 삶 전체’를 수리해야 하는 이중의 부담을 떠안는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시작해야 한다. 나를 걱정하는 사람을 귀찮아해서는 안 된다. 나를 안쓰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을 증오해서는 안 된다. 바로 그 사람이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첫 번째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중독치유의 가장 중요한 또 하나의 키워드는 바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용기’다.

“중독은 나에게 아픔을 주는 대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하려는 욕구에서 생긴다. 하지만 아픔을 차단하면 현재 순간에 대한 단순한 경험으로부터도 단절되고 만다. 아침의 신선함이나 손님을 반기는 개의 소리, 자신이 좋아하는 의자에서 느끼는 안락함 같은 것 말이다. 마음챙김은 현재 순간이 선사하는 단순한 기쁨과 다시 접촉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약물을 비롯한 해로운 물질로 삶의 공허함을 메우지 않아도 좋게 한다.” _토마스 비엔·비버리 비엔, <중독이 나를 힘들게 할 때>, 불광출판사, 2016


▎일반인(왼쪽)과 알코올에 중독된 여성의 뇌를 비교한 사진. / 사진·중앙포토
<중독이 나를 힘들게 할 때>의 저자들은 지긋지긋한 중독에서 탈출하는 최고의 비결로 마음챙김 명상을 꼽았다. 마음챙김이란 ‘현재 순간에 대한 자각(알아차림)’과 ‘수용(받아들임)’을 실천하는 열린 마음이다. 마음챙김이란 바로 이 시간이 지나가버리면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지금 이 순간을 한올 한 올 예민하게 경험하는 것이다. 중독의 본질이 마음의 피난처를 만들어 삶의 고통을 회피하는 것이라면, 마음챙김은 아무리 힘들고 아플지라도 깨어있는 상태로 삶과 맞닥뜨리는 것이다. 때로는 중독에 빠져드는 것이 이 지루한 일상으로부터 탈출하는 비상구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일상의 작은 기쁨 속에서 진정한 자신을 찾는 모험의 소중함을 알게 될 때, 그 찬란한 희열은 어떤 중독의 쾌락과도 비견될 수 없을 것이다. 일상의 진정한 기쁨을 되찾을 때, 중독은 스스로 설 자리를 잃을 것이므로. 삶에 대한 꾸밈없는 사랑을 회복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중독이라는 피난처로 숨을 필요가 없어질 것이므로.

정여울 - 작가, 문학평론가. 1976년생. 서울대 독문과 졸업 후 같은 대학에서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2004년 <문학동네>를 통해 등단했다. 저서로 <공부할 권리> <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마음의 서재> <헤세로 가는 길> 등이 있다. 제3회 ‘전숙희문학상’을 수상했다.

201705호 (2017.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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