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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교수의 ‘조선을 만든 사람들’(16)] 이인임(1) ‘고양이’로 불린 권력자 

현실정치의 천재... 역사의 악역을 맡다 

김영수 영남대 정외과 교수
고려말 20여 년간 최정상에서 권력을 휘두른 이인임. 속내를 알 수 없었던 그는 몰락해가는 구체제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그가 정계에서 두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공민왕 때다. 반원 정책의 후폭풍으로 모반과 내란의 위기가 닥치자 민심과 군심을 꿰뚫고 있던 이인임의 기재가 발휘되는데….

▎2014년 인기리에 방영된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 배우 박영규 씨가 고려말 권신 이인임 역을 맡았다. 이인임은 그 속을 쉽게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 사진제공·KBS
정치적으로 굉장히 중요하지만 역사적 의미는 초라한 인물이 있다. 이인임(?~1388)은 그런 유형의 인물이다. 그는 고려말의 정치에서 문제적 인물이었다. 이인임은 우왕 재위기 14년간 전권을 휘두른 무소불위의 권력자이다. 그는 이미 공민왕 대 중반인 1365년(공민왕 14)에 최고위직인 좌시중에 올랐다. 이 기간까지 합하면, 그는 거의 24년간 고려정치의 최정상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역사에서 유의미한 자취를 남기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이처럼 중요한 대변동기에 변화에 민감하지 못하고, 변화를 역사에 실현하는 데 아무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천재였지만, 그의 천재성은 기존의 것을 지키는 데 발휘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신념이 아니라 욕망에 따른 결과였다. 최영도 같은 길을 걸었으나, 그것은 신념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최영은 그 차이를 깨닫지 못했는데, 그게 그의 삶이 비극으로 끝난 이유였다.

이인임의 역사적 의미는 네거티브한 것이다. 그의 헤게모니 아래 주조된 우왕대의 정치상과 국가상은 고려가 극복해야 할 핵심적 대상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인임이 당대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고자 했던 정몽주, 정도전 등 신진 유신들과 대립했던 것은 필연적이었다. 이처럼 역사의 신은 이인임에게도 우왕처럼 악역을 맡겼다. 그의 역할은 고려왕조의 정치가 얼마나 나빠질 수 있는지 보여주고, 고려 안으로부터의 개혁이 난망하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그런 현실을 정치뿐 아니라 가정사와 개인사에서 절절히 겪은 정도전은 마침내 혁명을 결심하고 이성계를 찾아갔다. 이 때문에 이인임은 한 개인이라기보다 말기 고려의 심벌이자 앙시앙레짐(ancien re′gime) 그 자체였다.

역사학에서는 악인을 잘 다루지 않는다. 의미가 빈약하기 때문이다. 정치가 이인임에 대한 연구도 매우 희소하다. 하지만 정치학은 이를 피해갈 수 없다. 정치에서 악은 상수일 뿐 아니라, 이인임을 이해하지 않고는 조선건국의 정치적 아젠다를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인임 집권기를 통해 고려는 자신이 극복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분명해졌다. 그것은 역사의 대안이 이 시기에 큰 시련에 직면했다는 것을 뜻한다.

고려말을 풍미한 정치가 중 이인임만큼 이해하기 힘든 인물은 드물다. 단순한 간신이나 악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복잡한 개성의 소유자였다. 그의 별명은 ‘고양이’(李猫)다. 동양 전통사회에서 고양이는 안팎이 다르고, 속을 알 수 없고, 변신이 무상한 존재라는 이미지가 있다. 이인임은 실제로 다중 인격자일 뿐 아니라 자신을 여러 겹으로 포장하여 진정한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다면체 거울처럼 보는 방향에 따라 모습이 달랐다. 그로 인해 삶이 달라진 대표적 인물이 최영이다. 마지막 순간 그는 이인임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상황을 반전시켰지만, 실은 끝까지 이인임의 진정한 모습을 파악하지는 못했다. 이 때문에 최영은 역사의 행로를 오인하고 삶의 방향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꺼져가는 고려의 마지막 명운을 악화시켰다. 이야말로 최영이 가장 바라지 않던 일이었다.

이인임의 실체를 끝내 몰랐던 최영


▎이조년의 부친인 이장경의 영정. 이조년은 이인임의 조부다. 이조년을 비롯해 이장경의 다섯 아들 모두가 과거에 급제해 벼슬에 나가는 등 성주 이씨가 굴지의 가문으로 자리를 잡게 됐다. / 사진제공·김영수
이인임이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가문 때문이다. 그는 가문의 전통이나 가풍, 즉 이상과 상반되는 인물이었다. 이인임의 본관은 성주(星州)로, 옛 이름은 경산(京山)이다. 그의 조부는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이고 형은 이인복(李仁復, 1308~1374)이다. 모두 뛰어난 학인이자 충신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성주 이씨의 시조는 신라말 경순왕대의 이부상서 이순유(李純由)로 알려져 있다. 신라가 망하자 성주에 은거하여 살았다고 한다. 그의 후손은 대대로 경산부(京山府) 호장(戶長)을 세습했다. 이조년의 아버지 이장경(李長庚)도 호장이었다. 그런데 이장경의 아들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했다. 장남 백년(李百年)은 밀직사사, 천년(李千年)은 참지정사, 만년(李萬年)은 낭장, 억년(李億年)은 참찬, 조년(兆年)은 정당문학을 지내며 현달(賢達)했다. 뿐만 아니라 이장경부터 8세대 안에 문형(文衡:대제학) 18명, 상신(相臣:정승) 15명, 문과 급제자 75명을 배출하여 여말선초 최고의 가문 중 하나로 부상했다. 고려말의 신진 유신이자 대문장가 이숭인도 그 일원이다. 이숭인의 조부는 이조년의 형 이백년이니, 그는 이인임의 당조카다.

원 지배기인 고려말에는 지방의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과거를 통해 입신하여 명문거족의 토대를 쌓은 사람이 많았다. 안동 출신 권근의 증조부 권보(權溥), 경주 출신 이제현의 부친 이진(李瑱), 한산 출신 이색의 부친 이곡(李穀)이 그렇다. 성주 출신 이조년도 그중 한 사람이다. 안정된 사회에서는 이런 경우가 드물다. 더욱이 고려는 신분제에 기초한 귀족사회였다. 원 지배기는 정치사회적인 변동이 큰 변혁기였던 것이다. 이들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학문인 성리학을 일찍 수용했고, 고려말 변혁운동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이 역사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신흥사대부들이다. 이색·정도전·권근·이숭인 등은 모두 그 후예다.

이조년은 이장경의 제5남이며, 충렬왕·충숙왕·충혜왕대의 문신이다. 그는 최초의 한글 시조 ‘다정가’의 작자로 잘 알려져 있다.

“梨花에 月白ㅎ、고 銀漢이 三更인 제 / 一枝春心을 子規l야 아라마ㄴ、ㄴ/ 多情도 病인 냥ㅈ、ㅁ여 ㅎ、못드러 ㅎ、노라.”(휘영청 밝은 달이 하얀 배꽃 위에 내려앉는 봄 밤. 배꽃 한 가지를 어루만지며 떠난 님을 생각한다. 두견새야, 그립고 아픈 내 마음을 아느냐. 그리운 이 마음이 병이 되어 불면의 밤을 지새운다.)

낭만적이면서도 서정적이다. 감성이 넘칠 듯 흐른다. 작자는 다감하고 유약한 예인이 틀림없다. 그의 호도 매운당(梅雲堂)·백화헌(百花軒)이다. 그러나 이조년에 대한 <고려사> 사관의 평가는 다르다. 그는 “체구가 작았으나 날래고 굳세었으며 의지가 굳어 거리낌없이 직언했다. 그 엄격한 성격이 남에게 두려움을 주었기 때문에 대궐에 들어가서 알현할 때마다 왕이 그의 신발 소리를 들으면 ‘이조년이 온다’고 하면서 주변 사람들을 물리치고 몸가짐을 단정히 한 채 기다렸다”고 한다. 예인보다 무인에 가까운 강골이었던 것이다.

무뢰배 충혜왕 곁을 지킨 조부 이조년


▎이인임의 조부 이조년 영정. 성주 이씨 가문의 정신적 전통을 확립한 인물이다. 그는 최초의 한글 시조 ‘다정가’의 작자로 유명하다. 영정의 왼손이 어색하게 들려져 있는 것은 원래 염주가 들려 있는 것을 삭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 사진제공·김영수
그의 시호(諡號)가 문열(文烈)이다. 시호는 사후 그 공덕을 기리는 이름으로, 한 사람의 일생을 간결하게 표현한다. 문(文)의 뜻은 천지를 다스리는 것(經緯天地曰文), 도덕이 높고 견문이 넓은 것(道德博聞曰文), 성품이 따뜻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慈惠爱民曰文), 학문에 부지런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勤學好問曰文) 등이다. 학문과 인격, 경륜을 겸비한 이상적인 군자의 덕목이다. 열(烈)은 공이 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有功安民曰烈), 전공이 빛나는 것(戎業有光曰烈), 성품이 굳세고 바른 것(剛正曰烈), 백성을 엄숙히 대하는 것(莊以臨下曰烈)이다. 김부식과 의병장 조헌(1544~1592)의 시호도 문열이다. 모두 학문과 인품이 뛰어나고, 큰 전공을 세웠으며, 엄숙 장중한 인물들이다. 다정다감과는 거리가 멀다.

이조년은 충렬왕과 충혜왕의 충신이다. 그러나 충혜왕과의 인연이 더욱 깊어, 공민왕 때 충혜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충혜왕은 앞서 본 바처럼, 고려가 낳은 최악의 왕 중 하나로서, 왕이라기보다 무뢰배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조년은 충성을 다했으며, 목숨을 걸고 왕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충혜왕은 1330년 부왕 충숙왕의 양위로 왕위에 올랐다. 원 조정에서 충혜왕의 강력한 후원자는 승상 엘테무르(燕帖木兒)였다. 그는 막강한 실력자였는데, 충혜왕을 자식같이 사랑했다. 세자 시절 충혜왕을 따라온 이조년을 보고도 역시 “자식을 만난 듯이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그런데 1332년 엘테무르가 사망하고, 라이벌인 바얀(伯顔)이 권력을 장악했다. 바얀은 충혜왕을 미워했다. 그래서 충숙왕이 복위하고 충혜왕은 폐위당해 원나라 황궁에서 숙위를 해야 했다.

1399년 충숙왕이 죽고 다시 복위했지만, 충혜왕은 원의 승인도 받기 전에 부왕의 셋째 왕비 바얀후투그(伯顔忽都, 경화공주)를 강제로 능욕했다. 이 때문에 그는 다시 원에 끌려가 일생일대 최대의 위기에 직면했다. 이때 71세의 이조년은 왕을 배행해 원나라에 갔다. 53세의 이제현도 함께 갔다. 이조년은 이제현의 부친 이진과 함께 안향의 문인이었다. 당시 원 승상은 여전히 바얀이었다.

그는 충선왕의 조카이자 충혜왕의 당숙뻘인 심왕(瀋王) 왕고(王暠, ?~1345)를 고려왕으로 밀고 있었다. 한편 충혜왕은 원 조정 형부에 갇혀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바얀을 만나 호소할 방도가 없었던 이조년은 죽을 결심을 하고 이제현에게 탄원문을 지으라고 말했다.

“내가 승상 앞에서 얼굴을 맞대고 호소하면 그 마음을 되돌릴 수 있겠으나, 창 든 병사가 줄지어 문을 지키고 있으니 문 앞에서 부르짖을 수도 없네. 다행히 그가 성 남쪽으로 사냥을 나가면 내가 길가에서 글을 올리고 말발굽 아래 머리를 깨뜨리고 죽어 우리 임금의 일을 밝힐 것이니, 그대는 붓을 잡고 내가 올릴 글을 써주게.”(<李兆年傳>)

“집안과 나라를 패망시킬 자”로 평한 친형


▎이조년의 한글시 ‘다정가’ 시비.
이조년은 밤에 일어나 목욕을 했다. 이제 닭이 울면 가려고 했는데, 바얀이 마침 그날 실각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자는 모두 “담이 몸보다 큰 사람은 이공뿐이다”라고 숙연해 했다. 그러나 복위한 충혜왕이 실정을 거듭하자, “이미 늙었고 도울 것도 없는 내가 지금 떠나지 않으면 반드시 화가 미칠 것이다. 또한 수차 간해도 받아들이지 않으니 책임이 결국 나에게 돌아올 것이다. 지금 내가 그 장점을 북돋을 수 없고 그 악행만 늘리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 이는 신하가 임금을 아끼는 도리가 아니다. 차라리 떠나는 것만 못하다”라고 말하고, 이튿날 한 필 말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 세상일에 관계하지 않았다. 그의 출처관은 오늘날도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조년의 아들이자 이인임의 아버지는 이포(李褒, ?~1373)이다. 그는 1323년(충숙왕 10) 문과에 급제하여 검교시중(檢校侍中)에 이르렀다. 시중은 최고위직 종1품이나 검교는 실제 사무는 보지 않는 명예직으로서, 녹과는 종4품과 같았다. 성품이 순박하고 예의 바른 사람(性淳厚, 循循蹈禮)이었다고 한다.

이인임의 바로 위의 형 이인복은 고명한 인물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행동거지가 노숙하고 열심히 공부했다. 이 때문에 이조년은 항상 손자의 등을 어루만지며 “우리 가문을 크게 일으킬 사람은 바로 너다”라고 격려했다 한다. 그는 1326년(충숙왕 13) 19세로 과거에 급제하고, 1342년 35세 때 원나라 과거시험 제과에도 합격했다. 고려인 중 제과 합격자는 열 명에 불과하다. 충목왕 대에 그는 서연(書筵)에서 왕에게 강의를 했는데, 용모가 엄숙하고 말투가 간략 신중하므로 왕은 늘 주변 사람들에게 “이공을 보면 나도 모르게 두려운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공민왕은 그를 중용했는데, 1374년 같은 해 세상을 떠났다. 임종에 임해 그는 동생 이인임에게 “재상이 죽으면 관청에서 장례를 치러주는 것은 나라의 두터운 은혜다. 그러나 나는 평소에 티끌만한 보답도 못했으므로 죽어도 부끄러움이 남아 있을 것이니 나를 위해 사양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신돈을 반대해 공민왕에게 “신돈은 올바른 사람이 아니므로 뒷날 반드시 변이 생길 것이니 그를 멀리 하소서”라고 진언했다. 또한 동생 이인임과 이인민(李仁敏)의 사람됨을 싫어하여, “나라와 집안을 패망시킬 자는 필시 두 동생일 게다(敗國亡宗者 必二弟也)”라고 했다 한다.(<李仁復傳>)

이인임 형제는 모두 6인이다. 이인복 외에 인미(仁美), 인립(李仁立), 인달(李仁達), 인민(李仁敏)이다. 이중 인복·인미·인립 3인이 문과에 급제하고, 인임·인민은 음서이다. 그런데 족보에는 이인임이 “일찍이 문과에 오르시고”라고 되어 있어, <고려사> 열전의 기록과 다르다. 인달은 족보에 정6품-종8품 관직인 ‘주부’(注簿) 단 두 자만 적혀 있다.(<성주이씨대동보>) 5인이 현달했다. 인미는 정3품 예의판서(禮儀判書), 인립은 종2품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인민은 종2품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올랐다. 이장경부터 흥기한 가문이 극성에 이르렀다고 하겠다. 이인립의 아들 이제(李濟, ?~1398)는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 사이의 소생인 경순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다.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나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인민의 아들 이직(李稷, 1362~1431)은 조선 개국공신 3등이자 이방원의 측근으로 세종대에 영의정에 올랐다. 조선 초기의 명신이자 태종대의 영의정 하윤(河崙)은 이인미의 사위다. 그는 19세인 1365년(공민왕 14) 과거에 급제했는데, 시관이 이인복이었다. 이인복은 그를 한번 보고 그릇으로 여겨(一見器之) 조카딸을 출가시켰다고 한다.(<국조인물고>)

이인임은 과거가 아니라 음서(蔭敍)로 관직에 진출했다. 음서란 5품 이상 고관과 공신의 후손에 대한 특별채용이다. 조선과 달리 고려대는 음서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출신을 중시하는 문벌제 사회였던 것이다. 서긍은 1123년(인종 1) 고려에 사신으로 와서 한 달간 머물다 귀국한 뒤, 고려 풍속기인 <고려도경>을 썼다. 거기에 “나라에서 벼슬하는 자는 오직 귀신(貴臣)들로서 족망(族望)으로 서로 높인다. 나머지는 과거를 통해서 벼슬을 하거나 재물을 주어 관리가 되기도 한다”라고 썼다. 음서가 오히려 대세였던 것이다. 실제로 음서 출신자의 50~60%가 재상직에 올랐다. 하지만 역시 영예스러운 길은 과거였다. 그런데 이인임같이 천재적 인물이 왜 과거를 택하지 않았을까? 가문의 빛나는 전통과도 어긋난다. 아마도 이인임은 생래의 현실주의자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가장 뛰어난 자질 중 하나는 현실에 대한 명료하고도 날카로운 통찰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일생 동안 한 번도 이상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거나 추구한 적이 없었다. 그의 첫 관직은 종6품 전객시승(典客寺丞)이었다. 전객시는 빈객 접대를 위한 잔치를 관장했다. 공적인 향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전이며, 의전은 오랜 관례와 개인의 심리에 정통해야 한다. 의례에 정통해야 할 뿐 아니라, 속된 말로 눈치가 빠르고 융통성이 풍부해야 하는 것이다. 이인임은 이런 일에 적임자였을 것이다.

쌍성총관부 수복의 숨은 공로자


▎경북 고령군 운수면 대평리에 있는 이조년의 사당 매국정(梅菊亭). 1782년 후손들이 이조년의 삶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재실. 1982년 중수하면서 매국재에서 매국정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 사진제공·김영수
이인임이 역사에서 의미 있는 인물로 등장한 것은 공민왕 5년(1356) 반원정책 때가 처음이었다. 그해 5월, 공민왕은 소수 측근을 동원한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기철 일가를 비롯한 친원파 핵심세력을 제거했다. 그 다음 즉시 압록강 일대의 국경 수비를 강화하고, 원의 역참을 공격하게 했다. 또한 밀직부사 유인우(柳仁雨, ?~1364)를 동북면병마사로 임명해 쌍성(雙城) 지역을 수복하게 했다. 쌍성은 화주(和州, 함경남도 영흥군) 이북 지역이다. 1258년 이래 몽고 영토로 편입되고, 통치기관으로 쌍성총관부가 세워졌다. 그런데 유인우는 쌍성에서 200리 정도 떨어진 등주(登州, 현재의 강원도 安邊)에서 10여 일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왜 지체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유인우는 아마 사태를 관망했을 것이다. 원에 대한 정면 도전은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1351년부터 홍건적의 난이 시작되었으나, 원나라가 결정적으로 기운 것은 아니었다. 유인우의 동향은 즉각 왕에게 알려졌다. 그러자 공민왕은 병마판관(兵馬判官) 정신계(丁臣桂)를 파견하여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李子春)에게 내응을 촉구했다.

이성계의 5대조 이안사는 전주에서 함경도 덕원(현재의 文川)으로 이주했다가, 1254년 몽고에 항복해 다루가치에 임명되었다.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는 영흥 지역에 정착했고, 이씨 가문은 이 지역의 친원파 조씨와 결혼해 토착세력으로 성장했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이성계 가문의 진정한 창설자다. 왜냐하면 앞을 알 수 없는 원명 교체기의 격변기에 몽골이 아니라 공민왕과의 연대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1356년 3월, 이자춘은 공민왕을 알현하기 위해 처음 개성에 왔다. 이 회동은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비밀 작업의 일환이었다. 왕은 그에게 “혹 변란이 있거든 마땅히 내가 명한 것과 같이하라”고 지시했다. 유인우가 주저하자 공민왕은 이 비선조직을 가동했다.

그런데 당시 강릉도존무사(江陵道存撫使)가 바로 이인임이었다. 존무사는 고려 후기 재난이나 병란이 일어날 경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지방에 파견한 임시 관직이다. 이인임의 임무는 유인우를 돕는 것이었다. 이인임은 탁월한 전략을 수립했다. 그는 유인우에게 쌍성총관부의 내분을 이용하자고 건의했다. 당시 쌍성총관은 조소생(趙小生)이었다. 그는 고종 45년(1258) 이 지역을 원에 바치고 항복한 조휘(趙暉)의 증손이었다. 그의 숙부는 조돈(趙暾)이다. 조돈은 충숙왕 때 고려 조정에 입조하여 좌우위호군(左右衛護軍)에 제배되었다. 왕의 사후 귀향하여 쌍성 지역에 살고 있었다. 이인임의 계획은 고려 왕조에 빚을 지고 있는 조돈을 설득해 조소생에 대항시키는 것이었다.

“조돈이 조소생의 숙부이긴 하나 마음은 조정에 있으니 필시 역적들과 어울려 반역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왕명을 보내 그를 회유하면 반드시 우리에게로 올 것이다. 조돈이 오기만 하면 격문만 전해도 쌍성은 평정될 것이니 역적의 머리는 벨 필요도 없다.”(<趙暾傳>)

이인임은 조돈의 입장과 영향력을 정확히 평가하고 있다. 치밀한 사전 정보수집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위험을 미리 알아차린 조소생은 조돈을 구금했다. 하지만 이인임의 계획은 훌륭하게 성공했다. 조돈이 조소생의 핵심 참모인 조도치(趙都赤)를 설득하여 이반토록 했기 때문이다. 이에 힘입어 유인우는 조돈, 이자춘과 더불어 마침내 쌍성총관부 수복에 성공했다. 원에 함몰된 지 99년 만이었다. 이것은 국가적 차원에서 공민왕의 정치적 승리다. 하지만 동북면 일대의 전투에 국한하면 이인임의 완벽한 승리였다. 그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단 한 사람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를 움직였을 뿐이다. 이인임은 참으로 빼어난 기량의 소유자였다.

이인임이 그 기량 을 두 번째 발휘한 사건은 덕흥군(1314~1367)의 난이었다. 1363년(공민왕 12) 5월, 원은 공민왕 교체를 알리는 사신을 파견했다. 신왕은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이니, 공민왕의 아버지 항렬이었다. 궁인 소생인 그는 어려서 승려가 되었다. 그것은 왕이 될 수 없는 왕자가 가는 길로서, 목숨을 부지하는 방책이다. 1351년 공민왕이 왕에 임명되자 그는 원나라로 도망했다. 공민왕이 잠재적 왕위 경쟁자를 그냥 둘 리 없었기 때문이다. 공민왕은 실제로 그랬다. 1356년 공민왕이 기철 가문을 도륙하자 기황후는 원한이 골수에 맺혔다. 그러나 홍건적의 난으로 대륙의 정세가 급박하여 복수하지 못했다. 1361년 10월, 몽골군의 공세에 밀린 홍건적이 두 번째 고려를 침략해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은 안동까지 피신했다. 그러나 이듬해 정월 고려군은 홍건적을 격멸했다. 하지만 개성은 초토화되고 국력은 바닥이 났다. 기황후는 이 틈을 노렸다.

기황후의 분노로 위기에 처한 공민왕


▎성주 이씨 가문의 대동보 중 이인임 부분. 이인임이 문과에 등과한 것으로 적혀 있다. 이인복, 이인임 등 이포의 여섯 명의 아들이 모두 현달하여 가문의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 사진제공·김영수
원 조정의 이상 징후는 공민왕 12년 3월에는 이미 알려진 듯하다. 공민왕은 이때 찬성사 이공수(李公遂)를 원에 보내 홍건적을 격퇴한 사실을 알리고 충성을 다짐하는 진정표를 올리게 했다. 이공수는 기황후의 외사촌 오빠였다. 기황후를 달래고 원 조정을 설득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윤 3월 1일, 공민왕의 최측근 김용이 반란을 일으켜 개성 근교 흥왕사에 묶고 있던 공민왕을 살해하고자 했다. 그는 덕흥군과 연결되어 있었다. 기황후가 누구도 예상 못한 허를 찌른 것이다. 공민왕이 목숨을 건진 것은 노국공주의 목숨을 걸고 왕의 은신처를 지킨 덕분이었다.

흥왕사의 변이 끝나고 모반자를 심문해보니 사태가 명백해졌다. 공민왕은 대책 회의를 열었으나 결론은 모호했다.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지 전망이 불투명했기 때문에, 신하들도 상황의 추이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감히 어쩌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공민왕의 위신은 바닥까지 떨어지고 민심이 떠나고 있었다. 수도를 지키지 못해 수많은 사람이 살육당한 데다 장군 안우, 김득배, 이방실 같은 전쟁 영웅들을 무고하게 죽여 민심을 크게 잃었다. 더욱이 신하들에게 덕흥군은 적이 아니었다. 그 역시 고려 국왕에 오를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이 때문에 공민왕은 신하들의 충성을 확신하지 못했으며, 그들의 마음을 붙들기 위해 노력했다. 흥왕사의 난이 진압된 직후 347명(실인원 280명)의 엄청난 수의 공신이 책봉되고, 2만 7000결의 토지가 하사되었다. 위화도회군 뒤 전제개혁 때 전국 토지가 60만 결 정도니, 전체의 4.5%에 해당한다. 그 대상은 주로 무장들로, 문신은 6명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5월, 공민왕은 거듭된 내우외환에 대해 “깊이 그 허물을 생각해보면 실로 나에게 있다”라고 자신을 자책하고, 신하들의 협력을 부탁하는 교서를 발표했다.(<고려사>) 최고 권력자는 누구나 공식적으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더욱이 공민왕이 자존심이 극히 강한 인물이었다.

왕은 또한 북방에 파견된 군대의 반란을 염려하여, 용병하는 방략을 모두 중앙에서 지휘했다. 그 결과 책임 추궁을 두려워한 지휘관들은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고 적절한 군사적 대응에 실패했다. 이것은 전쟁에서 가장 피해야 할 일이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한 공민왕은 사고의 균형을 잃었던 것이다.

공민왕 13년 7월, 원 사신 이가노가 입국해 국왕의 인장을 회수했고, 12월에 덕흥군의 군대가 압록강에 이르렀다. 공민왕에게는 대위기였다. 첫째는 자신감의 결여였다. 공민왕은 이가노의 입국 소식을 듣자 즉시 피난준비를 했다. 고려군의 상황도 절망적이었다. 군량 부족으로 아사자가 잇달았으며 도망병이 길에 가득했다. 그런 가운데 몽골군이 나타나자 “조야가 떨면서 두려워했다”고 한다. 위기의 두 번째 원인은 전쟁의 성격이었다. 피난 논의에 대해 판밀직사사 오인택은 전혀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덕흥군은 홍건적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가 지나는 곳은 다 그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임금의 행차가 일단 남행하면, 도성 이북은 누가 전하를 따르겠습니까?”(<吳仁澤傳>)

이 전쟁은 국가 간 전쟁이 아니라 덕흥군과 공민왕 개인의 다툼이니, 신하나 백성들은 어느 한 편을 지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위기의 세 번째 원인은 민심 이반이었다. 공민왕 12년 6월, 개경 동쪽 교외에 주둔하고 있던 평택군(平澤軍)이 반란을 일으켰다. 사관은 그 원인이 조세와 군역 때문이었다고 기록했다. 특별한 주모자도 없는 백성들 스스로 봉기한 반란이었다.

공민왕의 도강 명령을 저지하다


▎1872년(高宗9) 제작된 영흥 고지도. 지도에 ‘태조탄생구리 (太祖誕生舊里)’라고 적혀 있다. 전주에서 영흥 지역으로 이주해 정착한 이성계 집안은 1254년 몽고에 항복한 후 친원파 가문이 됐다. 공민왕의 반원 정책 때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원을 배반하고 공민왕을 지지했다. / 사진제공·김영수
이런 현실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은 이 당시 서북면도순문사 겸 평양윤(西北面都巡問使 兼平壤尹)으로 군량 조달을 책임졌던 이인임이었다. 공민왕은 이미 5월부터 도원수 경천흥(慶千興, 개명 慶復興)을 서북면 도원수에 임명해 그 지역의 모든 군대를 통솔하게 했다. 경복흥의 외할머니는 공민왕의 모후 명덕태후의 친언니이니, 공민왕은 경복흥의 외당숙이다. 그는 청렴결백한 인물이었으나 군사적 재능은 없었다. 제1차 홍건적의 난 때 홍언박은 “경복흥은 공평하고 청렴하며 조심스럽고 성실하지만 전략에는 익숙하지 못하다”라고 평했다. 그런 경복흥을 총사령관에 임명한 것은 믿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2월 덕흥군의 군대가 도착하자 공민왕은 압록강을 건너 공격하게 했다.

이인임은 이 조치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를 중단시키기 위해 총사령관의 최고 막료인 도원수도진무(都元帥都鎭撫) 하을지를 찾아가 말했다. “우리 군사는 굶주리고 추워서 밤낮으로 돌아갈 것만 생각하니 어찌 딴 마음이 없겠습니까. 다만 법이 두려워서 감히 가지 못할 뿐입니다. 강을 건너는 처사는 가히 한심스러우나, 도원수는 성품이 의심이 많아 반드시 결단치 못할 것입니다. 내가 다른 일을 가탁하여 원수에게 청하여, 그대를 보내어 왕에게 일을 품달코자하니, 그대는 이를 도모하십시오.”(<李仁任傳>)


▎이인임 세력을 몰아낸 우왕과 최영은 위화도 정벌을 추진한다. 하지만 이성계 등은 이에 반발해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진격하게 된다. 드라마 <정도전>에서 개경전투를 위해 진군하는 이성계의 군사들. / 사진제공·KBS
생사의 갈림길에 선 군사들이 강을 건너면 바로 반란군으로 바뀔 것으로 본 것이다. 하을지가 이를 품달하자, 공민왕은 크게 놀라 구두로 도강 중단 명령을 내리고 신속히 돌아가게 했다. 그래서 국경에 도착한 하을지에게는 문첩이 없었다. 그런데 어떤 군사작전도 왕명 없이 시행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으므로, 문빙 없이 공격을 중단하면 모반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그러자 이인임은 경천흥을 찾아가 말했다.

“‘공이 일찍이 상주목사가 되어 처음 부임할 때와 퇴관할 때 민심이 어떠합디까’ 하니, 경복흥이 ‘퇴관할 때 민심은 처음과 같지 않았다’ 하였다. 이인임이 말하기를, ‘오늘의 일이 자못 그와 유사합니다. 주상은 옛 임금이요 덕흥은 새 임금이라. 우민은 다만 편안하고 배부른 것이 즐거운 줄만 알지 어찌 사정(邪正)이 있는 바를 알리오. 하물며 우리 군사는 풍우를 무릅쓴 지 이미 오래며 모두 돌아가기를 생각하는데, 일조에 강을 건너면 그 변을 알기 어려우니, 군사를 거두어 군영에 돌아와 압록강을 고수하여 적의 도강을 막는 것보다 상책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李仁任傳>)

공격은 중단됐다. 이인임은 군사와 백성들이 공민왕보다 덕흥군을 지지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게 군심이자 민심의 속성이었다. 그러나 다른 지휘관들은 왕명이 두려워 군심과 민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인임은 또한 경복흥과 공민왕의 성격을 정확히 이해했다. 메시지를 전달할 적임자가 하을지라는 점도 알았다. 아울러 도강 문제가 이 전쟁의 중대한 고비라는 점을 인식했다. 이 모든 것은 답이 결정되어 있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하나가 판단을 필요로 하는 문제였다. 상황을 판단하는 센스와 독창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사태를 해결해가는 이인임의 인식과 판단은 참으로 명료하고 정확하며, 그 조치는 자로 잰 듯 정밀하여 덜거나 더할 것이 전혀 없다. 이 때문에 그 속에 있는 인물은 사태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의식조차 못했다. 그가 얼마나 천재적인 센스와 독창성을 지닌 기재(奇才)인지 알 수 있다.

이듬해 1364년(공민왕 13) 1월, 덕흥군의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 고려군을 패퇴시켰다. 불리한 사태를 역전시킨 것은 최영이었다. 도순위사(都巡慰使)로 급파된 최영은 도망병은 모두 참수하는 엄격한 군법을 세워 무너지는 군대를 가까스로 수습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전쟁을 통해 고려는 1270년부터 계속된 원의 영향력에서 최종적으로 벗어났다.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경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705호 (2017.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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