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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5)] 메이지 천황의 외교관들, 초량왜관을 난출(闌出)하다 

천황 권위 높이려는 승부수에 ‘속수무책’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미국·영국·러시아 등과 맺은 불평등 조약의 개정 착수… 조선은 국가 간 계해약조 어긴 일본인 처형 못해 후환 남겨

▎메이지 헌법 발포식(發布式). 이 의식으로 천황은 허수아비에 불과하던 국가 제사장에서 명실상부한 국가원수로 발돋움했다.
1867년 12월 9일에 왕정복고가 공포됨으로써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는 쇼군(將軍) 지위를 상실했다. 요시노부는 대정봉환(大政奉還)과 쇼군 상실의 대가로 섭정(攝政) 자리를 요구했다. 메이지 천황이 아직 16세의 미성년일 뿐만 아니라 정치경험도 거의 없기에 노련한 섭정이 필요하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하지만 이와쿠라 도모미(巖倉具視) 등 천황 측근의 반대로 요시노부의 요구는 묵살됐다. 그러자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을 취소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결과 교토(京都)의 천황파와 에도(江戶)의 막부파 사이에 갈등이 고조됐고 마침내 1868년 1월 3일 양측 사이에 전쟁이 터졌다. 그해가 무진년이라 이 전쟁은 무진전쟁이라 불렸다. 막부파는 초반부터 천황파에 밀렸고 4월 11일에는 에도 성까지 함락당했다. 이로써 도쿠가와 막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4개월 후인 8월 4일에 메이지 천황의 에도 행차가 공포됐다. 왕정복고를 통해 세속 권력을 장악한 메이지 천황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또 무진전쟁에서 패배한 에도 시민을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행차가 공포되던 날 에도는 도쿄(東京)로 개명됐다. 에도는 더 이상 막부 쇼군의 도시가 아니라 이제부터는 천황의 도시가 됐음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도쿄 행차를 떠나기 전인 9월 8일에는 연호가 메이지(明治)로 바뀌었다. 연호를 바꾸는 개원은 천황이 자신의 시대를 새롭게 열었음을 선포하는 의식이었다. 메이지는 ‘성인(聖人)이 남면(南面)해 천하의 소리를 듣고 밝음을 향해 다스린다’는 글에서 따왔다.

9월 20일 진시(오전 7~9시), 메이지 천황은 교토 어소(御所)의 자신전(紫宸殿)에 모습을 드러냈다. 도쿄로 행차하기 위해서였다. 봉연(鳳輦)에 오른 메이지 천황은 어소의 정문인 건례문(建禮門)을 나섰다. 천황을 상징하는 3종의 신기(神器)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신기인 모조품 거울을 모신 가마가 앞장서고 그 뒤를 메이지 천황의 봉연이 따랐다. 3종 신기 중 모조품 칼과 진품 곡옥은 메이지 천황의 봉연에 함께 모셔졌다. 봉연 뒤로는 3300여 명의 수행원들과 호위병들이 따랐다. 청련원에서 점심을 든 후 메이지 천황은 판여(板輿)로 갈아탔다.

9월 26일 해시(오후 9~11시)에 메이지 천황은 아쓰다(熱田)에 도착했다. 천황의 숙소는 나고야(名古屋) 번주의 집에 마련됐다. 반면 모조품 거울을 모신 가마는 아쓰다 신궁의 별궁에 모셔졌다. 다음날 진시(오전 7~9시), 메이지 천황은 아쓰다 신궁에 참배했다.

막부시대가 지속된 800여 년 동안 천황이 아쓰다 신궁에 참배한 적이 없었다. 그동안 천황은 명색이 천황이지 사실상 교토 어소에 유폐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유신 이후 메이지 천황이 최초로 어소를 나와 아쓰다 신궁에 참배한 것이었다. 이는 천황이 더 이상 어소에 유폐된 존재가 아님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게다가 메이지 천황은 아쓰다 신궁에 모셔진 진품 칼 즉 쿠사나기(草薙) 신검을 참배함으로써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다. 상징적인 면에서 보면 메이지 천황은 쿠나사기 신검을 모시던 고대 천황들에게 버금가는 존재가 됐다. 그것은 곧 메이지 천황의 정치적·종교적 권위가 크게 신장됐음을 선포한 것과 같았다.

메이지 천황의 아쓰다 신궁 참배를 기념해 전 나고야 번주는 “황공한 쿠사나기 신검도, 얼어붙은 길을 지켜 주시네”라고 읊은 와카(和歌)를 올렸다. 800여 년 지속된 막부시대를 종식시키기 위해 도쿄로 행차하는 메이지 천황의 앞길을 쿠사나기 신검이 보호할 것이라는 의미였다.

10월 13일 도쿄에 도착한 메이지 천황은 그곳에서 두 달 가까이 머물렀다. 12월 8일에 도쿄를 출발한 메이지 천황은 12월 23일에 교토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3개월 후인 1869년 3월 7일에 메이지 천황은 다시 도쿄로 행차했다. 공식화하지는 않았지만 도쿄로 천도하기 위해서였다. 행차의 모습은 지난해 9월 20일과 비슷했다. 노정 역시도 유사했다. 다만 큰 차이점은 이번 행차에서 메이지 천황이 이세(伊勢) 신궁을 참배했다는 사실이었다.

이세 신궁은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가 니니기에게 줬다는 거울을 모신 황대신궁(皇大神宮)과 식물신을 모신 풍수대신궁(豊受大神宮)으로 구분됐다. 황대신궁은 안쪽에 있어서 내궁(內宮)이라 불렸고 풍수대신궁은 바깥쪽에 있어서 외궁(外宮)이라 불렸다. 이세 신궁에는 이 두 궁 이외에도 수많은 신사가 소속돼 있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내궁 즉 황대신궁은 제10대 숭신천황(BC 148~BC 69)과 제11대 수인천황(BC 69~AD 70) 때 건설됐다고 한다. 숭신천황 때 농민 반란이 빈발할 뿐만 아니라 역병까지 유행했다. 그 이유를 신에게 물었는데 어소에 모신 아마테라스의 분신 즉 진품 거울을 어소 밖으로 옮기면 해결되리라는 신탁이 나왔다. 그래서 어소 밖으로 옮겨 모셨다가 수인천황 때 다시 이세에 옮겨 모신 것이 이세 신궁의 기원이었다.

불평등 조약 개정 요구 목소리 높아지고


▎1783년 부산 동래부 소속 화원이었던 변박이 그린 부산 초량의 <왜관도>. 오늘날 용두산 공원에 있는 부산타워의 자리에 있었다.
외궁 즉 풍수대신궁은 제22대 웅략천황(418~479) 때 천황의 꿈에 아마테라스가 나타나 식물신인 풍수대신을 어찬신(御饌神)으로 삼아 이세로 옮기라고 해서 세워졌다고 한다. 어찬신은 신의 음식을 준비하는 신이었다. 아마테라스는 자신의 음식을 준비하게 하려고 풍수대신을 이세로 옮기게 했던 것이다. 이세로 옮겨온 식물신을 모신 곳이 바로 풍수대신궁이었다.

이세 신궁의 내궁을 조선왕실에 비교하면 종묘와 같았다. 왜냐하면 내궁에는 천황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가 모셔졌고 종묘에는 조선왕실의 조상신인 태조 이성계가 모셔졌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식물신이 모셔진 이세 신궁의 외궁은 토지신이 모셔진 조선의 사직과 같았다. 따라서 이세 신궁의 내궁과 외궁은 천황가의 종묘와 사직에 해당했다. 이런 점에서 이세 신궁은 천왕가는 물론 일본인들에게 마음의 고향 또는 정신적 지주라 할 만했다.

1869년(고종 6) 3월 11일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 메이지 천황은 풍수대신궁 주변에 도착했다, 모조 거울을 모신 가마는 풍수대신궁의 별전에 모셔졌다. 다음날 아침 메이지 천황은 풍수대신궁에 참배했다. 신궁의 정전에 도착한 메이지 천황은 다마구시(大玉串)를 예물로 올리고 직접 절한 후 박수를 쳤다. 이것이 풍수대신궁 참배의식이었다. 뒤이어 점심 후에 메이지 천황은 황대신궁을 참배했다. 참배 직전 메이지 천황은 목욕을 했다. 나머지 참배의식은 풍수대신궁과 같았다.

메이지 천황의 이세 신궁 참배는 창건 이래 천황으로서는 처음이었다. 천황의 참배 전례가 없었기에 신관들이 참배 의식을 새로 마련해야만 했다. 실로 메이지 천황의 이세 신궁 참배는 역사적인 의미를 가졌다. 아쓰다 신궁에 뒤이어 이세 신궁까지 참배함으로써 메이지 천황은 진품 칼에 뒤이어 진품 거울까지 참배했다. 진품 곡옥(崑玉)은 침실에 모셨기에 메이지 천황은 진품의 3종 신기를 모두 참배한 셈이 됐다.

이로써 메이지 천황은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와의 관계를 더욱 밀접하게 만든 것은 물론 진품의 3종 신기를 어소에 모셨던 고대 천황과의 관계도 더욱 밀접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곧 이세신궁 참배로 메이지 천황의 종교적, 정치적 권위가 크게 고양됐음을 의미했다.

메이지 천황의 이세신궁 참배의식을 마련했던 신관들은 참배 의미를 “이제 폐하께서 신무천황(神武天皇, 제1대 천황, BC 711~589)의 신무(神武)를 계승하시어 천하를 유신(維新)하시고, 경행천황(景行天皇, 제12대 천황, BC 13~AD 130)의 경행(景行)을 우러러 사해를 순수(巡狩)하시며 그 성공을 태묘(太廟)에 고하셨습니다”라고 해 신무천황과 경행천황의 업적에 비견하는 것으로 칭송했다.

이처럼 유신 이후 메이지 천황의 정치적·종교적 권위가 고양되면서 외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에도 막부는 1854년과 1858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과 가나가와(神奈川) 조약을 맺었는데 이 조약은 영사재판권과 관세자주권을 포기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 조약에 뒤이어 에도 막부는 영국·러시아·네덜란드 등 유럽 각국과도 유사한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주역들은 천황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또 일본 정부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우선적으로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고자 했다.

계해약조, 첫 개정 대상으로 지목


그런데 당시 일본이 외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에는 조선과 맺은 조약도 포함돼 있었다. 조선과 일본은 임진왜란 중에 국교가 단절 상태였지만 임진왜란이 끝나자 곧바로 국교 재개 회담을 열었고, 수 차례의 회담 끝에 1683년(숙종 9) 8월 동래부사와 대마 도주가 조선왕조와 에도 막부를 대표해 계해약조를 맺게 됐다. 이 약조는 1872년(고종 9, 메이지 5)에 초량 왜관이 폐쇄될 때까지 190년간 조선 왕조와 에도 막부의 외교관계를 규정했다.

계해약조의 내용은 비석에 새겨져 초량 왜관 앞에 세워지기까지 했다. 그 비석을 ‘약조제찰비’라고 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내용은 ‘출입이 허가된 이외의 지역으로,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난출(闌出)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첫 번째 약조였다.

이는 허락받지 않고 왜관 밖으로 나가면 사형시킨다는 의미로서 여기에는 조선의 마음과 일본의 마음이 뒤섞여 있었다. 난출을 감행하려는 쪽은 일본이었고 막으려는 쪽은 조선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의 본심은 왜관 안에 일본인들을 봉인하려는 데 있었다. 반면 왜관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 일본의 본심이었다.

이렇게 충돌하는 두 본심을 타협시키기 위한 장치가 ‘약조제찰’이었다. 조선은 허가된 벗어남을 인정함으로써 완전한 봉인을 양보했고, 일본 역시 허가된 벗어남을 수용함으로써 완전한 봉인에서 벗어났다. 약조제찰비가 세워진 이래, 허락받지 않은 일본인들은 초량 왜관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만약 그랬다가는 사형이기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은 초량 왜관에 봉인됐고, 그런 상태로 조선 왕조와 에도 막부 사이에 평화가 유지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약조제찰비는 일본인들을 초량 왜관에 봉인하는 부적이자 조선왕조와 에도 막부 사이에 평화를 지켜주는 부적과도 같았다. 그런 약조제찰비를 지키는 조선 측 책임자는 동래 부사와 부산 첨사 그리고 동래 훈도(訓導)였다.

반면 일본 측 책임자는 막부 쇼군과 대마 도주 그리고 왜관의 일본 책임자인 관수왜(館守倭)였다. 조선 측과 일본 측의 책임자들은 약조제찰비를 지키는 책임자일 뿐만 아니라 양국간의 평화를 지키는 책임자이기도 했다.

위기에 빠진 조·일 평화관계


▎정한론(征韓論)을 둘러싼 메이지 정부의 논쟁을 그린 일본 그림.
초량 왜관이 처음 세워졌을 때는 주변에 나무 목책만 세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무 목책은 토벽으로 바뀌었고 끝내는 석벽으로 바뀌었다. 초량 왜관을 둘러싼 벽이 단단해질수록 또 높아질수록 봉인 효과는 강화됐다. 1709년(숙종 35)에 동래부사 권이진은 초량 왜관의 출입문인 수문(守門)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설문(設門)을 또 설치했다. 이 결과 초량 왜관은 설문과 수문에 의해 이중으로 봉쇄됐다.

그뿐이 아니었다. 조선은 초량 왜관으로 들어오는 바다 길목을 따라 경상 좌수영·부산진·개운포진·두모포진 같은 수군을 배치했다. 또한 초량 왜관의 좌우에 위치한 황령산과 구봉산 정상에는 봉수대를 설치했다. 이렇게 해서 초량 왜관은 설문과 수문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수군진과 봉수대에 의해 삼중·사중으로 봉쇄됐다.

이와 같은 왜관 그리고 그 같은 왜관을 규정한 계해약조는 메이지 유신 주역들에게 불평등할 뿐만 아니라 불합리한 조약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우선 일본을 대표해 쇼군과 대마도 도주가 외교권을 행사한다는 사실 자체가 메이지 시대의 일본에는 전혀 맞지 않았다. 게다가 일본 외교관이 왜관에 봉인된다는 사실도 천황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일로 간주됐다. 이에 따라 메이지 정부에서는 우선 조선과의 계해약조부터 개정하고자 했다.

1868년(고종 5, 메이지 1) 연말에 메이지 천황은 대마도를 통해 조선에 국서를 보냈다. 이제 일본의 최고 권력자는 막부 쇼군이 아니라 메이지 천황임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일본 국서를 소지한 대마도 사람들이 초량 왜관에 도착한 때는 1868년 12월 19일이었다. 그들은 예전의 관행대로 초량 왜관에서 훈도 안동준에게 국서를 전달했는데 그중에 ‘황조(皇祚)’, ‘황상(皇上)’ 같은 용어가 들어 있었고, 이런 용어는 예전에는 없던 것이었다.

훈도 안동준은 예전 관행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국서를 접수하지 않았다. 대마도 사람들은 1년이 넘도록 초량 왜관에 머물며 국서를 접수시키려 노력했지만 훈도 안동준은 물론 부산 첨사도 동래 부사도 요지부동이었다. 물론 그들 스스로의 판단이 아니라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부응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1870년(고종 7, 메이지 3)에 메이지 천황은 또다시 조선에 국서를 보냈다. 이번에는 외무성의 외교관 3명까지 함께 파견됐다. 일본 외교관들이 초량 왜관에 도착한 시점은 1870년 11월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일본 외교관들은 국서를 접수시킬 수 없었다. 그들은 초량 왜관에 1년 가까이 머물며 안동준, 부산 첨사 그리고 동래 부사와 줄다리기를 벌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1871년(고종 8, 메이지 4) 연말에 메이지 천황은 외무성의 외교관들을 추가로 파견해 또다시 국서를 보냈다. 외무성의 외교관들이 초량 왜관에 도착한 시점은 1872년(고종 9, 메이지 5) 1월이었다. 그들 역시 훈도 안동준에게 막혔다.

5월까지 기다린 그들이 안동준으로부터 들은 말이라고는 “반드시 나라 안에서 널리 의논을 들어본 다음에야 답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조정의 명령인데 다만 그 기한은 예약할 수 없습니다”였다. 메이지 정부는 세 차례 국서를 보냈지만 모두 거절당한 셈이었다.

메이지 정부가 수립된 후 1868년 연말에 보낸 최초의 국서가 거절됨으로써 메이지 천황의 체면은 크게 손상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일본 국서를 가져온 대마도 사람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초량 왜관에 머물며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했다. 훈도 안동준이 끝내 국서를 접수하지 않았지만 초량 왜관 밖으로 나가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대마도 사람들은 훈도 안동준을 제치고 동래부사나 경상 감사 또는 한양 궁궐로 가서 국서를 접수시키려는 노력을 해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초량 왜관 안에만 머물다가 그냥 귀국했다. 한편으로는 대마도 사람들이 과거의 외교관행을 존중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대마도 사람들이 그때까지도 계해약조를 지키기 위해 왜관 밖으로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두 번째와 세 번째 국서를 가지고 온 일본 외무성의 외교관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메이지 천황에 의해 파견됐고, 그래서 과거의 외교 관행을 존중하지도 않았고, 계해약조를 준수하려는 의지도 없었다. 오히려 계해약조를 개정하거나 파기하려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세 번째 국서를 가지고 온 외무성의 외교관들 역시 처음에는 초량 왜관에 머물며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당시 초량 왜관에는 두 번째 국서를 가지고 왔던 외교관들이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그들은 국서 접수를 놓고 서로 협조했는데 훈도 안동준이 계속해서 접수를 거부하자 함께 논의한 후 초량 왜관을 박차고 나갔다. 난출을 감행한 것이었다. 이 난출로 계해약조는 사실상 파기됐고, 수백 년간 지속되던 조·일간의 평화관계도 위기에 빠졌다.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나가려 합니다”


▎구한말 신식군대인 별기군.
일본 외무성의 외교관들이 난출을 감행한 때는 1872년(고종 9, 메이지 5) 5월이었다. 안동준으로부터 “반드시 나라 안에서 널리 의논을 들어본 다음에야 답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조정의 명령인데 다만 그 기한은 예약할 수 없습니다”라는 답을 들은 직후였다. 그들은 직접 동래 부사를 만나 담판을 벌이기 위해 난출을 감행했다. 당시의 난출 상황을 <동래부계록(東萊府啓錄)>에 근거해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1872년 5월 27일 새벽, 훈도 안동준은 초량 왜관의 일본 대표인 관수왜로부터 급히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안동준은 별차(別差) 고재건을 대동하고 초량 왜관으로 들어갔다. 그때가 미시(오전 5~7시)였다.

“일본 외무성의 외교관이 동래 부사와 면담하기 위해 외교 문서를 가지고 온 지 이미 오래됐지만 아직 접수시키지 못했습니다. 부득이 관련자들과 함께 동래부로 가서 직접 부사에게 접수시키고자 합니다.” 관수왜는 난출하겠다는 뜻을 통고식으로 말했다.

“교린(交隣)에는 자고로 규범이 있습니다. 외무성의 외교관이 동래 부사와 면담하는 것은 전례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난출하지 못한다는 것은 약조에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갑자기 난출하겠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성신(誠信)의 도리란 말입니까?” 훈도 안동준은 난출할 경우 약조대로 하겠다고 했다. 난출하면 사형시키겠다는 뜻을 에둘러 표현한 위협이었다.

“우리도 법금(法禁)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관백(關白)이 혁파된 이후, 외무성을 설치해 외무성으로 하여금 새로 조선과 수호하게 했습니다. 이에 외무성의 외교관이 이곳에 와서 그 뜻을 직접 동래 부사에게 전하려 했지만 아직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분명 실무자가 잘 주선하지 못해서 나타난 결과일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한 목소리로 간절히 요청하고자 외교문서를 가지고 죽음을 무릅쓰고 나가려 합니다.”

관수왜가 정말로 난출할 기세를 보이자 안동준은 어쩔 줄 몰라 했다. 혼자 힘으로는 달리 방법이 없자 안동준은 부산 첨사 김철균에게 상황을 보고하면서 대책을 물었다. 부산 첨사라고 특별한 대책이 있을 수 없었다. 진시(오전 7~9시)에 보고를 받은 부산 첨사는 “약조를 들어 잘 설득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말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초량 왜관에 머물던 일본인들 중에서 수십 명이 출입문인 수문(守門)으로 몰려갔다. 수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하지만 문과 자물쇠만으로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자물쇠와 문을 부순 그들은 초량 왜관 밖으로 나갔다. 난출한 것이었다. 때는 아직도 묘시(오전 5~7시)였다. 문 밖에서는 조선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이 일본인들을 말로 타일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무력으로 제압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본인들의 수도 수였지만 나중이 문제였다.

난출한 일본인들의 수는 모두 56명이었다. 그들 중에는 왜관 대표인 관수왜를 비롯해 일본 외무성에서 파견된 외교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 전부를 무력으로 체포해 약조대로 사형에 처하려면 전쟁을 각오해야 했다. 난출한 56명의 일본인이 동래부 방향으로 가는 것을 보면서 조선 병사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초량 왜관에서 동래부로 가려면 두모포와 개운포를 지나야 했다. 일본인들이 난출했다는 보고를 받은 부산 첨사 김철균은 일단 병사들을 징발했다. 여차하면 무력으로 제압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두모포 만호와 개운포 만호에게 명령해 일본인들을 막도록 했다.

하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다. 죽음을 각오한 56명의 일본인을 무력으로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부산 첨사, 두모포 만호, 개운포 만호 역시 전쟁의 위험을 감수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시간을 끌 수는 있었다. 부산 첨사 그리고 두모포 만호와 개운포 만호는 무력충돌을 피하는 대신 길을 막고 말로 설득하고자 했다. 초량 왜관에서 동래부까지 대략 30리 거리였다. 짧다면 짧은 30리 길 곳곳에서 조선 병사와 난출한 일본인들 사이에 지루한 논쟁이 반복됐다. 조선 측에서는 일본인들이 제풀에 지쳐 왜관으로 되돌아가기를 기대했다.

일단락됐지만 유명무실해진 계해약조


▎구한말 호위대에 둘러싸인 고종황제의 모습이 실린 프랑스 일간지 <프티 파리지앵> 1894년 8월12일자. 이 신문은 한국고미술협회 감정위원 신희철 씨가 프랑스 고문서 취급서점 등에서 구입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조금씩이기는 하지만 계속해서 동래부를 향해 나갔다. 6월 1일 술시(오후 7~9시)에 56명의 일본인들은 드디어 동래부에 도착했다. 5월 27일 미시(오전 5~7시)에 난출한 후 나흘 만이었다. 초량 왜관에서 동래부까지 30리 길을 나흘에 걸쳐 온 셈이었다. 당시 동래 부사는 정현덕이었다. 그는 난출한 일본인 56명을 동래부 안의 별무사청에 머물게 했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접견하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제풀에 지쳐 되돌아가기를 기다리자는 심산이었다.

그 사이 훈도 안동준과 별차 고재건은 난출 책임으로 일단 면직됐다. 그 대신으로 현풍서와 한인진이 임시 훈도와 임시 별차에 임명되었다. 6월 1일 동래부에 도착했던 56명의 일본인은 6월 6일이 돼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임시 훈도 현풍서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진시(오전 7~9시)쯤에 현풍서와 한인진이 일본인들을 면담했다.

“우리들이 법을 무릅쓰고 난출한 이유는 오로지 외무성의 외교문서를 전달하고 사정을 직접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런 부득이한 일이 있었습니다.”

일본인들의 어투는 이전에 비해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보고를 받은 동래 부사 정현덕은 잘 설득하면 그냥 돌려보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동래 부사의 지시를 받은 현풍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일본인들을 설득하고자 했다.

“교린의 약조가 밝게 갖춰져 있으니 약조 이외에 무슨 면담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난출했으니 몹시 놀랍습니다. 또한 면담할 일이 있다고 해도 연향(宴饗) 때 서로 접촉하는 것 이외에는 사사로이 면담하지 못하는 것이 예로부터의 관행입니다. 당신들이 사정을 잘 알면서도 이런 일을 했으니, 천만번 하소연해도 들어줄 도리가 없습니다.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고 속히 돌아가십시오.”

더 있어 봐야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일본인들은 곧 동래부를 떠났다. 그때가 진시(오전 7~9시)였다. 4시간쯤 후인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에 일본인들이 초량 왜관에 들어감으로써 난출 사건은 발생 9일 만에 무사히 일단락됐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만 그랬을 뿐 난출 사건은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왔다.

기왕의 조·일 평화관계를 유지하려면 난출에 가담했던 일본인 56명 전원을 체포해 사형시켜야 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그럴 힘도 배짱도 없었다. 그 결과 계해약조의 규정은 유명무실해졌고, 그것에 근거했던 조·일 평화관계는 와해됐다. 이제 조선은 더 이상 일본인들을 왜관 안에 봉인해둘 수 없게 됐다. (계속)

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705호 (2017.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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