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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論의 역사(5)] 명(明) 황제는 왜 ‘조선류(流)’에 빠졌나 

영락제의 공헌현비(恭獻賢妃) 권씨(權氏)에 대한 지극한 사랑 이야기… 당시 명의 황궁은 문지기부터 침실 수발까지 조선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전원철 미국변호사, 법학박사
영락제 당시 명나라 황궁은 대략 400여 명으로 추정되는 조선 출신 환관이 궁궐 대문 문지기부터 침실, 황후 비빈이 거처하는 후궁, 궁정 주방 등 곳곳을 메웠다. 황궁은 시끌벅적한 조선말로 가득했다. 영락제는 왜 이런 조치를 취했을까? 당시 궁정 풍경은 영락제의 출생에 얽힌 비밀의 열쇠다.

▎중국 북경 북쪽으로 약 40km 지점에 위치한 명(明) 13릉 가운데 제일 큰 장릉. 주인공인 영락제는 죽기 직전까지도 조선의 평범한 음식을 즐겨 찾았다. 작은 사진은 명 왕조의 실질적 창시자로 여겨지는 성조 영락제.
지난호에서 필자는 지나인(支那人)들이 자신들의 역사에서 ‘한족(漢族) 왕조’라며 한(漢)·당(唐)과 함께 특히 자부심을 갖는 왕조인 명(明) 태조 주원장이 <황금보강(黃金寶綱)>이라는 책에 따르면 지금의 북한사람에 해당하는 ‘조션인(女眞人, 주르첸)’이라는 사실을 보였다. 또 그의 아들로 알려진 명 3대 황제 성조 영락제(永樂帝) 역시 조선민족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사실도 보았다. 특히 <황금보강>은 영락제가 주원장의 아들이 아니라, 사실은 주원장이 북으로 쫓아낸 원(元)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 우한투 칸과 ‘콩그라트(弘吉剌, 홍길랄) 카탄’의 아들이라고 기록했다.

몽골어로 ‘콩그라트 카탄’을 한자로 바꿔 쓰면 ‘고려(高麗) 공비(碩妃)’가 된다. 우리말로는 ‘큰고려씨(高句麗氏) 비(妃, 카탄)로 불릴 수 있다. 콩그라트 카탄이 자신을 ‘고려(高麗)’라고 부른 이유는 자신이 발해 왕가의 후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발해의 제2왕가 시조인 대야발(大野勃)의 4대손 금행(金幸)의 세 아들 중 첫째 아들인 아고래(阿古廼)가 콩그라트 카탄의 선조다. 고려(高麗) 공비(碩妃)의 ‘고려(高麗)’는 바로 ‘발해’라는 말이다.

칭기즈칸의 5대손 원순제 우한투 칸과 콩그라트 카탄(고려 공비)의 아들인 영락제는 명 왕조의 실질적 창시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명은 결국 지나인들이 믿는 바대로 ‘한족 왕조’가 아닌 우리 핏줄이 지은 왕조다. 여기까지는 지난호에서 살펴 본 바와 같다.

이번 호에서는 우선 ‘공녀’라는 말에 대해 살펴보자. 지나인들은 주원장, 특히 영락제 이후 정례화된 ‘조선 공녀’와 ‘조선 환관’을 조선이 보낸 공물로 본다. 자신들의 힘이 커서 속국인 조선이 사람까지 세금으로 보냈다는 투로 비꼬아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역사적 진실은 이와 정반대다. 생각해보라. 그 큰 지나 땅에 황제를 만족시킬 여자가 하나도 없어 하필이면 수천 리 떨어진 조선에서 여인을 데려다 황후·비빈으로 삼았을까?

그 진짜 이유는 전혀 다른 곳에 있다. 바로 명나라 황제들의 뿌리 때문이다. 조선의 공녀는 사실은 명 황제들이 자기네 황가의 혈통을 잇고,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조선의 공경대부, 귀족 자제 중에서 가려 뽑아 데려온 아름답고 덕성 있는 여성들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학자인 황경원(黃景源, 1709∼1787)은 자신의 시문집 <강한집(江漢集)>에서 공녀를 “조선에서 가려 뽑아 데려온 여자들(選朝鮮女子)”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처럼 조선 공녀는 속국이 종주국에 바친다는 뜻이 담긴 ‘공녀’가 아니다. 이 여인들이 공녀라면 고려시대에 몽골 황제가 고려의 왕자나 왕족에게 보낸 ‘황녀’와 여러명의 공주 역시 모두 몽골제국의 황제가 고려 국왕에게 바친 ‘공녀’라는 말이 된다.

이들 여인이 명 황궁으로 들어간 이후 그의 부친이나 오라비들은 명나라 황제가 내린 ‘황친(皇親)’, 곧 ‘황후(皇后)의 친족(親族)[皇后之親]’ 혹은 ‘황제의 어버이, 친척’이라는 엄청난 칭호로 불렸다. 나아가 이들을 차관급 벼슬인 경(卿)에 명하여 명의 일반 관리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도록 했다. 이들이 북경으로 갈 때는 조선의 임금이 직접 편전에서 잔치를 베풀어 대접하는 고위관료들이었다.

특히 영락제 당시 명나라는 조선민족의 뿌리를 가진 황제와, 황제의 총애를 받던 조선인 권비(權妃) 등 6명의 조선 비빈, 400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조선인 환관이 궁정을 가득 메운 제2의 조선(朝鮮)이나 다름없었다. 황제와 황후·비빈, 또 이들의 부모·형제로 고위직을 맡은 황친·환관들까지 모두 조선민족계였다는 점에서 명나라는 조선민족이 다스리는 나라였던 셈이다. 결국 오늘날 ‘한족(漢族)’의 선조들은 외국인 출신 군주와 통치계층 아래 다스려진 백성이었던 것이다.

<명사(明史)>에 따르면 영락제에게는 아버지 주원장의 동료인 중산왕(中山王) 서달(徐達)의 장녀인 서씨황후(徐氏皇后)와 소헌귀비(昭獻貴妃) 왕씨(王氏), 공헌현비(恭獻賢妃) 권씨(權氏) 등 두 명의 비(妃)가 있었다.

그런데 이 권씨(權氏)는 ‘조선에서 가려 뽑아 데려온 여자들(選朝鮮女子)’ 중 한 명인 조선 여인이었다. 조선인 여자가 어떻게 영락제의 현비(賢妃)가 되었을까? 그녀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권씨(權氏)에 관해 <명사 후비전>은 짤막하게 기록했다.

영락의 총애를 독차지한 권비(權妃)


▎명·청대의 황궁인 자금성(紫禁成)의 건청궁 좌우로 배치돼 있는 동서 6궁은 비빈들의 처소로 쓰였다. 영락제는 정비인 서황후가 죽자 조선 출신 현비(賢妃) 권씨(權氏)에게 이 6궁의 일을 맡아보게 했다. 빨간 사각형 부분이 서6궁이다.
“공헌현비(恭獻賢妃) 권씨(權氏)는 조선인(朝鮮人)이다. 영락(永樂) 때 조선 공녀로 액정(掖庭: 비빈·궁녀들이 거처하는 궁전)을 채웠는데, 비(妃)는 이들 중 하나였다. 아리땁기가 그지없고, 깨끗하고, 옥피리(玉簫)를 잘 불었다. 황제(帝)는 그녀를 사랑하고 연민했다. 7년에 현비(賢妃)로 봉하고 곁에 두고 애지중지했다(朵憐之). 현비(賢妃)로 봉하고는 그 아버지(父) 영균(永均)을 광록경(光祿卿)으로 명했다. 이듬해[영락 8년] 10월 황제를 모시고 북으로 [달달(韃靼)을] 치러 갔다. 이겨 돌아온 후 역현(嶧縣)의 임성(臨城)에 장례 지냈다.”


▎영락제의 정비인 황후 서씨.
이처럼 영락제는 현비 권씨를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원나라의 잔존세력이었던 북방의 달달(韃靼)을 치러 갈 때도 데려고 갔다는 것이다. 그녀가 영락제의 궁으로 오게 된 경위를 살펴보자. <태종실록>은 태종 8년(1408) 11월 12일 기사에서, 그해 4월경 영락제가 태감(太監) 황엄(黃儼)에게 “네가 조선국(朝鮮國)에 가서 국왕(國王)에게 말하여 잘생긴 여자가 있거든 몇 명 선택해 데리고 오라”고 선유(宣諭)했다고 기록했다. 황제의 명에 따라 4월 16일 조선에 도착한 황엄 일행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의 여러 기사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훗날 대명외교에서 활약한 어숙권(魚叔權)은 1554년(명종 9년) <제왕역년기(帝王曆年記)>와 <요집(要集)>의 내용이 소략하고 상세하지 않은 점을 보고 이들 기사와 실록 등 기사를 참조하여 그 사실을 <고사촬요(攷事撮要)>에 기록했다. 이덕무는 또 이를 인용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앙엽기(盎葉記) 공비(碽妃) 편에 실었다. 이 말을 빌려보면 현비 권씨가 영락제에게 시집간 경과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영락 6년 황제가 태감 황엄을 보내 여자를 가려 뽑아(揀選) 바치게 하므로 공조전서(工曹典書) 권집중(權執中)의 딸, 인녕부 좌사윤(仁寧府左司尹) 임첨년(任添年)의 딸, 공안부판관(恭安府判官) 이문명(李文命)의 딸, 시위사 중령호군(侍衛司中領護軍) 여귀진(呂貴眞)의 딸, 중군 부사정(中軍副司正) 최득비(崔得霏)의 딸이 뽑혔다. 또 7년(1409) 황엄을 다시 보내 어여쁜 여자를 바치게 하므로, 지의주사(知宜州事) 정윤후(鄭允厚)의 딸을 간선해 보냈다. 광록경 권영균이 명나라에 갔다 황제의 유시를 받아 돌아올 때 위험한 수로(水路)를 버리고 평탄한 육로로만 왔는데, 영균은 권비(權妃)의 오라비(兄)다.”

이에 따르면 처음 5명의 조선인(朝鮮人) 규수가 뽑혀 명(明) 나라로 갔으며, 이듬해에 다시 정윤후의 딸이 뽑혀 갔다. 이들 여인의 아버지들의 관직인 ‘공조 전서(工曹典書)’ ‘인녕부좌사윤(仁寧府左司尹)’ ‘공안부 판관(恭安府判官)’ ‘시위사중령호군(侍衛司中領護軍)’ ‘중군 부사정(中軍副司正)’ ‘지의주사(知宜州事)’ 등은 대략 국장·부시장·사령관·부사령관·시장 등에 비견되는 고급 관료다. 이들 중 권비의 오빠 권영균(權永均)은 광록경(光祿卿), 임첨년은 홍려경(鴻臚卿), 최득비는 소경(小卿) 등 명나라의 종삼품(從三品)에 해당하는 높은 직책을 각각 부여받았다고 <태종실록>은 전한다.

처음 명나라로 간 5명의 처녀 중 권씨(權氏)는 대번에 영락제의 눈에 들어 한 해 만에 현비(賢妃)가 됐다. 이덕무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명말청초(明末清初)의 경학자인 모기령(毛奇齡, 1623~1713)이 지은 <동사습유(彤史拾遺)>를 인용해 이렇게 말한다.

“권비는 조선 사람으로, 영락 7년 5월 조선에서 들여보낸 여인인데, 액정을 채울 때 권비도 여러 여자를 따라 들어왔다. 임금이 권비의 하얀 얼굴에 체질이 순미(純美)함을 보고 무슨 재주가 있느냐고 묻자, 권비가 가지고 있던 옥피리를 꺼내 불었다. 그 소리가 요묘(窈渺)하여 멀리까지 메아리치므로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바로 다른 여자들보다 높이 선발했다가 한 달쯤 지나 현비(賢妃)로 책봉하고 권비의 아버지[사실은 오빠] 영균을 광록경으로 삼았다.”

현비 권씨가 매우 아리따운 매력에 퉁소까지 잘 불어 황제의 총애를 얻자 궁중의 모든 여인이 퉁소를 따라 불었다고 모기령은 기록했다.

“권비는 고려 광록경(光祿卿) 권영균(權永均)의 딸로 퉁소를 잘 불었으므로 궁중에서 앞다투어 서로 배웠다.”

모기령은 또

“영헌왕(寧獻王)의 시에 ‘궁중의 새는 빗물은 점차 멎어가건만(宮漏已沈參差到) 미인은 아직도 퉁소만 배우고 있네(美人猶自學吹簫)’ 하였다”고도 기록해두었다.

모기령의 기록에 등장하는 영헌왕(寧獻王)은 이름이 주권(朱權, 1378년~1448)으로 명 태조 주원장의 17째 아들로 족보상 영락제의 아우다. 그의 봉지는 원래 영국(寧國), 오늘날의 남몽골(內蒙古) 영성(寧城)이었다. 그는 형인 연왕(燕王) 주제(朱棣, 영락제)가 조카인 2대 황제 건문제(建文帝)를 황제 자리에서 끌어내린 ‘정난의 역(靖難之役)’ 때 연왕 편에 가담했다. 그 공으로 처음에는 남창(南昌)에 봉해졌으나 후에 그 번(藩)이 깎여 도교·희극·문학에 의지해 우울하게 삶을 마쳤다. 그러한 영헌왕(寧獻王)은 1408~10년 영락제의 곁에서 총애를 받던 권비를 보고 그 미모에 감탄해 몰래 사모의 시를 쓴 것이다.

권씨의 미모와 재주는 심지어 같은 여자들에게도 동경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락제가 권비와 ‘동련이행(同辇而行: 같이 가마를 타고 다님)’하도록 명하여 권비와 매우 가까웠던 왕사채(王司彩), 곧 ‘비단을 관리하는 궁중여관(女官) 왕씨’도 궁중 사가(詞歌)를 써서 권비의 모습을 전한다. 이덕무가 언급한 왕사채의 시는 <사고전서본(四庫全書本)> 189권 ‘어정패문재영물시선(御定佩文齋詠物詩選)’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옥꽃이 씨앗을 옮겨 깊은 궁궐 안으로 들어와 그 그윽한 향기 짙어 늦은 바람과 운을 맞추니 군왕의 가마와 걸음을 멈추게 하누나. 옥퉁소 소리가 맑게 울리니 밝은 달 속에 퍼지네(瓊花移種入深宫, 旖旎濃香韻晩風, 贏得君王留歩輦, 玉簫嘹喨月明中)”

<태종실록> 영락(永樂) 12년 조의 기사에 따르면, 영락제는 “황후(皇后)[서씨]가 죽은 뒤 권비에게 명하여 육궁(六宮)의 일을 맡아 보게 하였다.” ‘육궁(六宮)’은 ‘황후의 궁중(宮中)’을 말한다. 그러므로 영락제는 자신이 총애하는 권비에게 사실상 황후 자리를 주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미녀박명이라 했던가? 아름다운 권비는 불행히도 영락의 궁으로 들어온 지 2년이라는 짧은 세월을 지낸 후 “병(病)으로 인하여” 급작스레 죽음을 맞았다고 <태종실록>은 전한다. 영락제가 영락 10년 권비를 데리고 색북(塞北)의 몽골을 치고 돌아오는 길에 권비가 산동(山東) 임성(臨城)에서 죽은 것이다. 그러자 영락은 상심하여 역현(峄县)에 장례 지내고 그곳 백성으로 하여금 문토(坟茔, 무덤)를 돌보게 명하고 그녀를 장차 서황후능(徐皇后陵)으로 이장하려 했다. 비빈의 장례를 황후에 준하는 예의로 치르려 한 것이다.

서황후가 죽은 뒤 다른 여인을 황후로 봉했을 수 있다. 그러나 <명사>에는 영락제가 서황후를 대신해 권비에게 육궁의 일을 맏기려 했고, 권비마저 졸지에 죽자 새로이 황후를 봉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태종 당시 명이 보내온 칙서에는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를 ‘황친(皇親)’으로 부르는 기록이 나온다. 동맹가첩목아에 대해서는 ‘이론의 역사’ 첫 편에서 자세히 소개한 바 있다.

“맹가첩목아는 황후(皇后)의 어버이(親)다. 사람을 보내 불러오게 하는 것도 황후께서 원하는 것이다. 골육(骨肉)이 서로 만나보는 것은 사람의 대륜(大倫)이다. 짐(朕)이 너의 토지(土地)를 빼앗았다면 청하는 것이 가하지만, 황친(皇親) 첩목아(帖木兒)가 너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태종실록> 5년 9월 17일 기사)

‘황친(皇親)’은 ‘황후의 아버지’를 뜻하는 말이므로 ‘동맹가첩목아’의 딸이 ‘서씨황후’와 함께 ‘황후’가 되었으나 <명사>의 기록에는 빠진 것으로 보인다.

공비가 죽었다는 사실은 오래지 않아 조선에도 알려졌다.

“광록경(光祿卿) 권영균(權永均)이 경사(京師)에서 [조선으로] 돌아와 아뢰었다. ‘지난 경인년 10월 24일 현인비(顯仁妃) 권씨가 병(病)으로 인하여 제남로(濟南路)에서 돌아가시매, 그곳에 빈장(殯葬)하고 제남(濟南) 백성들로 하여금 역사(役事)를 면제시켜 수호(守護)하게 했습니다. 장차 이를 옮겨 노황후(老皇后, 곧 서씨)와 함께 합장(合葬)하려 합니다.”(<태종실록> 영락(永樂) 9년 기사)

이 기록은 권비가 죽자 영락제가 매우 애석해했음을 보여준다. 영락은 그녀가 죽은 뒤 그녀의 오빠 광록경 권영균을 예전에 비하여 갑절이나 더욱 두텁게 대우했다. 그리고 고명(誥命)을 수여할 때는 눈물을 머금고 가슴 아파하며 탄식하여 비통함 때문에 말을 잇지 못했다.

권비(權妃) 죽음의 비사


▎영락제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음식과 술, 식재료에 푹 빠져 있었다. 당시 진상 품목에는 밴댕이와 새우젓·된장· 영덕대게 등 조선의 여염집에서 먹던 온갖 음식까지 포함돼 있었다. 영락제가 구체적으로 지목하여 진상하라고 명한 음식 중 소어(蘇魚), 즉 밴댕이회.
그로부터 2년 후인 영락 12년의 일이다. 황제의 사신 원민생(元閔生)이 조선에 이르러 영락제의 목소리를 전했다. 그런데 황제의 말에 따르면 권비가 죽은 배경에는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후궁 내부의 엄청난 음모와 권세 다툼이 있었다.


▎명말 청초(明末清初)의 경학자 모기령(毛奇齡)은 자신의 <동사습유 (彤史拾遺)>에서 조선 출신 현비(賢妃) 권씨(權氏)가 옥피리를 잘 불었다며, 영락제의 동생인 영헌왕(寧獻王)이 피리를 부는 권씨를 묘사한 시를 함께 소개한다.
<태종실록> 영락 12년 기사에 따르면 영락제는 우선 “권비가 육궁의 일을 맡아 보던” 중 “마침 저[조선 출신 후궁] 여가(呂家)[즉 여미인(呂美人)]가 권씨(權氏)에게 대면(對面)하여 말하기를, ‘자손(子孫)이 있는 황후가 죽었으니 네가 맡아 보는 것이 몇 개월이나 가겠느냐’ 하며 무례하게 대했다”고 한 말을 전한다.

나아가 영락제는 “우리 내관(內官) 두 놈이 고려(高麗)의 내관 김득(金得)·김양(金良) 등 저들 네 놈과 실형제(實兄弟)와 같았는데, 한 놈이 은장(銀匠) 집 안에서 비상(砒礵)을 빌어다 즉 여가(呂家)에게 주자” 여미인(呂美人)이 영락 8년간에 남경(南京)으로 돌아갈 때 양향(良鄕)에 이르러 그 비상(砒礵)을 갈아 가루를 만들어 호도차[胡桃茶] 안에 넣어 권 씨에게 주어 먹여 죽였다”며 역시 조선 공녀 출신인 여비(呂妃)가 권씨를 독살했다고 밝힌다.

영락제는 이어 “당초에는 내가 이러한 연고를 알지 못했는데, 지난해 양가(兩家)의 노비가 욕하고 싸울 때 권비의 노비가 즉 여가(呂家)의 노비에게 ‘너희 사장(使長)이 약을 먹여 우리 비자(妃子)를 죽였다’고 하므로, 이때에야 겨우 알았다. 사건의 경위를 묻고 꾸짖으니 과연 그러했으므로 저 몇 놈의 내관과 은장을 모두 죽였고, 여가는 곧 낙형(烙刑, 인두로 지지는 형벌)에 처했는데, 낙형한 지 1개월 만에 죽었다”고 알렸다.

그러나 이때로부터 10년이 지난 1424년 새로운 사실이 밝혀진다. 조선 출신 후궁 여비가 권비를 독살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영락 22년, 곧 세종 6년 10월 17일의 <세종실록>은 그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 기록은 영락제가 죽자 조선으로 온 사신이 다음과 같이 밝혔음을 전한다.

“전후로 [중국에] 뽑혀 들어간 [우리나라 여자] 한씨(韓氏) 등이 모두 대행황제(大行皇帝)에게 순사(殉死)했다. 이보다 앞서 상인(商人)의 딸 여씨(呂氏)가 황제의 궁중에 들어와 본국의 여씨(呂氏)와 동성이라 하여 좋게 지내려 했다. 그러나 여씨가 들어주지 아니했다. 이에 상인의 딸 여씨가 감정을 품었다 권비가 졸(卒)하자 [조선인] 여씨가 독약을 차에 타 주었다고 무고했다. [이 말을 그대로 믿은] 영락제가 성을 내어 [조선 비] 여씨와 궁인 환관 수백 명을 죽였다.”

조선 출신 여씨가 현비 권씨를 독살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영락제는 뒤늦게 이 명나라 상인 여씨의 조선 출신 여씨에 대한 무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비를 무고한 여인인 ‘상인 여씨의 딸’은 ‘조선 상인 여씨의 딸’이라는 설도 있으나, 조선 측의 기사로 보아 명나라 여씨 성 상인의 딸로 보인다.

영락제는 처음에는 상인의 딸 여씨의 무고를 눈감아주려고 했다. 그런데 상인의 딸 여씨가 간통사건을 일으키고 자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황제가 성이 나서 사건이 상인의 딸 여씨에게서 났다 하고, 여씨의 시비(侍婢)를 국문했다. 그러자 [시비들이]다 무복(誣服)하여 시역(弑逆, 임금을 죽이는 일)을 행하고자 하였다 하므로, 그 일에 연좌(連坐)된 자가 2800인인데, 모두 친히 나서서 죽였다.”

상인의 딸 여씨 뒤에는 무려 2800명이 연루된 도당이 있었다. 그들은 영락제의 피의 숙청에 모두 목숨을 잃었다. 이 일이 일어나기 10년 전, 곧 권비가 죽은 지 2년 후인 영락 12년에도 영락제는 명나라 상인의 딸 여씨의 무고를 잘못 파악하고 조선비 여씨와 그 무리 수백 명을 처형한 바 있다. 권비의 죽음 이후 15년이 지났지만 상인 여씨의 딸과 그 배후의 도당들에 대한 영락제의 무자비한 처단한 것을 보면 여전히 자신이 총애하던 권비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아닐까?

죽을 때까지 권비를 사랑한 영락제


▎영락제는 조선 출신 공비를 총애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안남부터 데리고 온 환관들을 물리치고 400여 명에 이르는 조선 출신 환관으로 대신케 했다. 명의 황궁인 자금성의 중심 건물 태화전(太和澱).
영락제는 권비와 겨우 2년을 함께 지냈다. 그러나 그녀가 죽고 15년이 지나 자신도 죽음을 눈앞에 두었던 영락 22년(1424)까지도 영락제는 권비에 대한 애틋한 기억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이 해에 기록된 <세종실록> 세종 6년 7월 8일 기사가 그 사실을 전한다.

“주문사(奏聞使) 원민생(元閔生)과 통사(通事) 박숙양(朴淑陽)이 먼저 와서 [세종에게] 계하였다. ‘황제가 원민생에게 이르기를, ‘노왕(老王/조선 태종)은 지성으로 나를 섬겨 건어(乾魚)에 이르기까지 진헌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소왕(小王/세종)은 지성으로 나를 섬기지 아니하여 전날 노왕이 부리던 화자(火者/환관, 내시)를 달라 했음에도 다른 내시를 구해 보냈다. 짐은 늙었다. 입맛이 없으니 소어(蘇魚, 밴댕이)와 붉은 새우젓과 문어 같은 것을 가져다 올리게 하라. 권비가 살았을 적에는 진상하는 식품이 모두 마음에 들더니, 죽은 뒤로는 무릇 음식을 올린다든가 술을 양조한다든가 옷을 세탁하는 등의 일이 모두 마음에 맞지 않는다’ 하였다.”

이처럼 영락제는 자신이 죽는 해에까지 권비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권비가 죽은 후에도 조선이 명나라로 보내는 이른바 ‘진상품’ 품목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영락제는 입맛에 들지 않는다며 “권비가 살아있을 적”의 맛과 비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영락제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음식과 술, 식재료에 푹 빠져 있었다. 당시 진상 품목에는 밴댕이와 새우젓·된장·영덕대게 등 조선의 여염집에서 먹던 온갖 음식까지 포함돼 있었다. 오늘날 지나와 전 세계를 강타한 ‘한류’처럼 명나라 당시의 ‘조선류’라고나 할까?

영락제는 “입맛이 없으니 소어(蘇魚)와 붉은 새우젓과 문어 같은 것을 가져다 올리게 하라”고 명했다. 각종 산해진미를 제쳐두고 오늘날에도 대수롭지 않은 음식을 계속 찾고 있는 것이다. 황제가 이렇게 말하자 옆에 있던 “내관 해수(海壽)가 원민생에게 ‘좋은 처녀 2명을 [조선에서] 진헌하라’ 했다. 그러자 황제가 기쁘게 크게 웃으면서 명하기를, ‘20세 이상 30세 이하의 음식 만들고 술 빚는 데 능숙한 시비(侍婢) 5~6인도 아울러 뽑아 오라’”고 하였다. 영락제는 아리따운 ‘선조 선녀’ 권비에 대한 기억과 조선 여인과 조선의 음식과 술이 없으면 사는 기쁨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권비가 명나라로 들어갈 즈음 영락제는 아버지 주원장과 조카 건문제 시대의 지나계 환관들을 모두 내쫓았다. 그리고는 이들을 대신해 우선 자신이 안남(安南)에서 데려온 화자 3000명을 썼다. 그러나 그는 이들도 모두 “쓸모가 없다”고 하고 대신 조선에서 데려온 환관을 자신의 수족으로 삼기로 했다.

조선에서 권비 등을 데려온 1407년 영락제는 “국왕(朝鮮國王)에게 알려 화자(火者)를 데려 오게 하고, 여기서 한첩목아를 사신으로 보내 성지(聖旨)를 구두(口頭)로 선포(宣布)하게” 했다.

“짐(朕)이 안남(安南)에서 화자 3000을 데려왔으나 모두 우매해 쓸 데가 없다. 오직 조선의 화자가 명민(明敏)하니 일을 맡겨 부릴 만하다. 이리하여 구한다”고 하였다.”(<태종실록> 7년 8월 6일 기사)

이때 영락제는 그 수를 조선 국왕이 알아서 채워주도록 하면서 “다만 자문(咨文) 내(內)에 그 수를 제한하지 말 것인 즉, 만일 짐이 숫자를 정하는데 국왕이 그 액수(額數)를 채우지 못하면 국왕이 지성으로 짐을 섬기는 뜻을 상하게 할까 두렵다”고 하였다. 조선 왕과 사이가 나빠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 뜻을 전해들은 조선의 “임금이 사적(私的)으로 황제의 사신인 한첩목아에게 ‘황제의 뜻은 어떠합니까’ 하고 물었다. 한첩목아가 ‘300~400명 선에서 내려가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임금이 ‘이것들은 종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많이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고 한다. (<태종실록> 7년 8월 6일 기사) 영락제는 적어도 400명 이상은 보내라는 주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조선이 보낸 환관들은 영락제의 궁궐 대문 문지기부터 침실, 황후 비빈이 거처하는 후궁, 궁정 주방 등 곳곳을 메웠다. 이리하여 황궁은 곳곳마다 시끌벅적한 조선말로 가득했다. 영락제는 왜 이런 조치를 취했을까?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의 출생의 비밀 때문이었다.

영락제는 환관 정화(鄭和)를 서쪽 바다로 보내 동남 여러 나라(東南諸國)는 말할 것도 없고, 아프리카 대륙까지 원정하게 했다. 이 때문에 심지어 일부 사람은 영락을 콜럼버스보다 앞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게 한 위대한 황제라고 본다. 뿐만 아니라, 이처럼 조선인 권비를 사랑했던 영락제는 그 선조가 조선인(朝鮮人)으로 보이는 김유자(金幼孜)를 달달 원정 때 향도로 데려가는 등 많은 조선인(朝鮮人)과 함께 국정을 돌봤다.

이 때문에 청(清) 초기 사신행(查慎行)이 쓴<입해기(入海記)>는 “영락 때의 태감 정화는 조선인”이라고 적었다. 명대와 청 초 사람들 눈에는 영락제가 중용한 정화마저 조선인으로 보일 정도로 영락제는 조선인 팬이었던 것이다.

무슬림 환관 정화(鄭和)가 ‘조선인’?


▎명(明)대와 청(淸) 초의 사람들 눈에는 영락제가 중용한 무슬림 태감 정화(鄭和)마저 조선인으로 보일 정도로 영락제는 조선 출신 환관들을 중용했다. 환관 정화가 해상 원정 때 이용했던 선박의 모습.
영락 조에는 모두 22명, 그 손자 선덕(宣德) 조에는 16명의 조선 여인이 후궁으로 들어갔다. 영락제의 손자인 4대 선종(宣宗)은 조선인 출신 오황후(吳皇后)로부터 7대 황제인 경제(景帝), 곧 경태제(景泰帝)를 얻었다. 그러나 <명사>는 이 사실을 밝히지 않고 “오태후는 경제의 어머니인데 도단인(吳太后,景帝母也,丹徒人)”이라고 적고, 이어 “선종이 태자 때 뽑혀 궁에 들어갔다. 선덕 3년에 현비로 봉해졌다. 경제가 즉위하자 높여 황태후라 했다(宣宗為太子時,選入宮。宣德三年封賢妃。景帝即位,尊為皇太后)”고만 적었다.

이에 관해 이덕무는 <청장관전서> 앙엽기 공비 편에서 “오 씨는 처음 후궁이 되어 ‘경태(景泰)’를 낳았는데, 뒤에 경태가 태후(太后)로 높였다. 태후는 본국을 그리다 못해 자신의 화상을 그려 본국에 보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처리할 수 없어 절에 갖다 두었으므로 초동 목수(樵童牧叟)들도 마음대로 구경했는데, 그 화상이 지금도 보존돼 있다. <속통고(續通考)>에는 ‘그 모친은 단도(丹徒) 사람인데, 도독(都督) 오언명(吳彦名)의 딸이다’ 했으나 화상을 우리나라로 보낸 것이 사실이라면 이 어찌 속일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는 아마 명나라 사관이 우리나라를 외국이라 해서 휘(諱, 꺼려서 숨긴다는 뜻)해 버린 듯하다. 어떤 이는 ‘황후의 아버지는 벼슬이 참판(參判)에 이르렀다’고 한다. 덕무가 상고해 보건대, 만약 이씨의 말과 같다면 경태가 선종 3년(세종 10년, 1428)에 태어났다는 말이 <명사>에 보이니, 오척의 딸이 선종 2년(1427)에 선종의 후궁으로 들어가 이듬해 ‘경태’를 낳은 것이다. 그렇다면 인종(仁宗)의 상(喪)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선종은 아직 복중(服中)에 있었던 것이다” 하고 진실을 밝혀두었다.

영락제는 여러 황비 가운데 자신과 뿌리가 같은 조선 여인 현비(賢妃) 권씨(權氏)를 가장 총애했다. 또 그의 손자 등은 ‘조선에서 뽑아 들인 뛰어난 여인(選朝鮮女)’들을 황비로 삼았다.

조선 공녀, 아니 ‘선조선녀(選朝鮮女)’의 피를 받은 영락제의 증손자 경태제(景泰帝) 이후 명 황제 11명은 모두 조선의 피를 받은 경제(景帝)의 후손이다. 경제부터는 고구려-발해-말갈(몽골)의 부계 혈통과 조선 여인이라는 모계 혈통을 이어받은 황제들이 마지막까지 옥좌를 지킨 셈이다.

한편 지난호에서 밝혔듯, 주원장에게 쫓겨난 원 순제와 기황후는 여전히 몽골을 통치했다. 그 뒤 이 두 사람의 장남인 원 소종(昭宗) 보르지긴 아유시리다르(1338~78, 재위 1370~1378)가 북원(北元)의 2대 칸이 되었다. 원의 12대 황제이자 몽골제국의 17대 대칸이다. 소종 역시 고려인 권겸(權謙)의 딸 권씨(權氏)와 김윤장(金允藏)의 딸 김씨(金氏)를 황후로 삼았다.

결국 당시 조선·명·북원 등 동양 3국의 토지와 인민은 모두 조선민족(朝鮮民族)의 뿌리와 혈통을 가진 사람들이 통치한 셈이다.

전원철 - 법학박사이자 중앙아시아 및 북방민족 사학가.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변호사로 활동했으며, 체첸전쟁 때 전장에서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현장주재관으로 일했다. 우리 역사 복원에 매력을 느껴 세계정복자 칭기즈칸의 뿌리가 한민족에 있음을 밝힌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몽골제국의 기원> 1, 2권을 출간했고, 고구려발해학회·한국몽골학회 회원으로 활약하며 다수의 역사분야 저서와 글을 썼다.

201705호 (2017.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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