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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풍기의 선물의 文化史(5)] 부채, 단오절의 필수품 

“어진 바람 일으켜 저 백성을 위로하리라” 

김풍기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신분·계층 가리지 않고 주고받은 ‘국민 선물’… 관료에게 전할 땐 선정(善政) 펼치라는 ‘여망’ 담겨

▎여러 종류의 합죽선. 합죽선은 얇게 깎은 겉대를 맞붙여서 살을 만들고 종이 또는 헝겊을 발라서 만든 부채다.
대문 앞에서 여름이 서성거리는 단오 무렵이면 사람들은 땀을 흘릴 ‘준비를’ 한다. 요즘처럼 냉방장치가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여름을 상징하는 것이 더위였고, 더위를 어떻게 잘 견디고 뜨거운 계절을 보내는가 하는 것이 큰 관심사였다.

무더운 여름철을 지나면서 알곡들은 여물어갔고 새까만 몸뚱이에 하얀 이를 드러낸 아이들은 조금씩 어른이 돼갔다. 농부들의 허리는 더욱 휘어졌고 숲은 더욱 무성해졌다. 무더위에 힘겨워하던 것은 어른·아이 할 것 없었고 상놈·양반을 가리지 않았다.

형편에 따라 여름을 준비하는 것에 차이가 있었다. 물론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야 특별히 준비할 것도 없었으리라. 살림살이의 옹색함을 생각하면 더위와 추위가 삶의 형태에 영향을 줄 정도의 여유 있는 물건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

마음의 준비 외에는 딱히 할 것도 없었던 하층민들과는 달리, 양반들은 여러 가지를 준비한다. 그들의 기록을 통해서 확인해보면 준비물로 가장 사랑을 받았던 것은 부채였다.

단오 무렵에 선물로 주고받던 물건 중에 단연 최고 인기는 부채였다. 단오선(端午扇)이라고도 하고 절선(節扇)이라고도 하는 이 부채는, 이제 막 여름으로 첫발을 디딘 사람들끼리 더위를 무사히 견뎌내자고 하는 차원에서 주고받는 것이었다.

중국과 조선에서 널리 유행하던 이 풍습에 대한 기록은 차고도 넘칠 정도다. 임금이 신하에게 주기도 하고 신하가 임금에게 진상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 서울 지역의 풍속을 기록한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서는 단오선과 관련된 풍속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공조(工曹), 호남과 영남의 감영 및 통제영에서는 단오에 즈음해 부채를 만들어 진상했다. 조정에서는 시종신(侍從臣) 이상과 삼영(三營)에 모두 관례에 따라 차등을 둬 선물한다. 부채를 받은 자는 이것을 다시 친척이나 친구·묘지기·소작인 등에게 나눠준다. 그래서 속담에 ‘시골 생색은 여름 부채요 겨울 책력’이라는 말이 있다.”

이런 풍속을 반영이라도 하듯 공조에 소속된 장인들 중에 부채를 만드는 일과 관련된 장인으로는 두 분야를 뒀다. 첩선장(貼扇匠)과 원선장(圓扇匠)이 그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에 수록된 공조 소속 장인들의 목록을 보면 두 분야에 각각 2명씩 총 4명이 있었다. 첩선장은 부챗살에 종이나 비단을 붙이는 장인이고, 원선장은 둥근 부채를 만드는 장인이다.

<열양세시기>에 나오는 시종신이란 홍문관의 옥당(玉堂), 사헌부·사간원의 대간, 예문관의 검열, 승정원의 주서(注書) 등을 일컫는 말이므로 위의 기록을 토대로 국왕이 신하들에게 하사하는 부채의 양을 얼추 계산해보더라도 굉장히 많은 양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장인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들은 아마 1년 내내 부채를 만들어서 단오선으로 쓸 양을 비축했을 것이다.

조선시대 들어 선물로 보편화돼


▎부산 경성대에서 열린 전통 성년식에 참가한 한문학과 남학생들이 도포를 입고 갓을 쓴 채 부채질을 하며 더위를 식히고 있다.
국왕이 신하들에게 부채를 하사한 것처럼 각 고을의 관아에서는 그들 나름대로 아랫사람들에게 단오선을 선물로 줬다. 글의 내용을 봐 한두 개 정도의 부채를 준 것이 아니라 꽤 많은 양을 사람들에게 선물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채를 받은 사람은 그것을 혼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아랫사람들에게 선물했다. 심지어 친구뿐만 아니라 가문의 선산을 지키는 묘지기나 땅을 부쳐먹는 소작인들에게까지 선물을 할 정도였으니 조선 땅 안에서 한 해 동안 소용되는 부채의 양은 엄청났을 것이다.

부채의 종류는 상당히 많다. 그만큼 부채의 역사가 오래됐고 일상생활에서의 쓰임새가 높았다는 의미기도 하다. 한치윤(韓致奫, 1765~1814)의 <해동역사(海東繹史)>에 보면 부채에 대한 동아시아의 여러 기록을 모아놓은 대목이 있다. <계림지(鷄林志)> <고려도경(高麗圖經)> <화계(畵繼)> <현혁편(賢奕編)> 등 많은 서책에서 뽑은 기록을 모아놓았는데 그것을 바탕으로 어떤 부채가 있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우선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이름난 부채로 송선(松扇)을 들었다. 송선은 부드러운 소나무 껍질(혹은 물버들 껍질)을 이용해서 만드는 것인데 무늬도 아름다웠을 뿐 아니라 붉은색으로 물을 들이기도 했다. 껍질을 얇고 가늘게 깎아서 줄처럼 만든 다음 그것을 두드려 부드럽게 해서 실처럼 만든 것으로 부채로 짜는 방식으로 송선을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절판(節板)이라고 해서 얇고 넓적하게 소나무를 깎아서 그것을 활용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앞의 방식으로 만들었던 것 같다. 송선의 명성은 중국까지 퍼져서, 송나라 문인 소동파(蘇東坡)는 고려 백송(白松)으로 만든 송선에 대한 기록을 남긴 바 있다. 고려 선종 1년(1084)에 전목보(錢穆父)가 고려에 사신으로 갔다가 받아온 송선을 황산곡(黃山谷)에게 선물로 준 기록도 있다.

명나라 때의 명필이자 문인 관료였던 육심(陸深)은 중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접첩선(摺疊扇)이 고려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했다. 물론 어떤 사람은 당나라 때부터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고려에서 널리 사용되다가 중국에 이름을 떨치게 된 내력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떻든 육심은 그 접첩선이 바로 소동파가 말하던 백송선(白松扇)이라고 함으로써 이 부채가 접부채 즉 합죽선과 같은 형태였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접부채는 접선(摺扇)·살선(撒扇) 등으로 불리었다. 아마도 고려시대에 널리 사용되다가 조선에 와서는 하층민들에게까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건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부채의 또 다른 이름은 취두선(聚頭扇)이다. 한치연이 <천록지여(天祿識餘)>에서 인용해놓은 글을 보면 취두선은 원래 하인들이 사용하던 부채였다고 한다. 그들이 존귀한 사람을 만나면 자신의 얼굴을 가려서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부채가 그런 용도로는 편리해서 널리 사용했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접어서 소매 속에 넣어뒀다가 존귀한 분을 만날 일이 있으면 얼른 꺼내서 사용하니 참으로 편리했을 것이다.

이 역시 고려에서 송나라에 공물로 보내서 널리 퍼졌다고 한다. 이런 자료를 모아 놓고 보면 고려에서 전해진 접부채가 중국에 영향을 주었던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인 것 같다.

송선처럼 소나무나 물버들 껍질을 잘게 다져서 실처럼 만든 뒤 그것을 꼬거나 엮어서 부채를 만드는 방법도 쓰였지만 고려 이후 종이로 만든 부채도 사용됐다. 그러다 보니 종이로만 돼 있으면 밋밋해 보여서 그 위에 은으로 장식을 하거나 그림을 그려서 모양을 냈다.

이러한 전통이 중국에서는 15세기에 널리 형성된 문화라고는 하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것이었다. 우리나라 역시 고려시대 이후 이러한 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지만, 아무래도 부채 선물이 널리 이뤄졌던 조선시대에 와서 한층 번성했다. 조선의 선비들은 부채를 보내면서 선면(扇面)에 시를 지어서 쓰기도 하고 가볍게 문인화를 그리기도 했다. 평범한 부채를 보내는 것보다 훨씬 성의가 있고 보내는 사람의 후의가 담겨 있어서 선물로 인기가 있었다.

부챗살에 감춰진 ‘명암


▎탄허 스님이 부채에 초서로 쓴 ‘지풍(知風)’.
이직(李稷, 1362~1431)은 고려 말 관직에 진출했다가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의 공신이 된 인물이다. 그는 법림사의 월창회장(月窓會長)과 깊은 교유를 맺었다. 월창회장은 이직에게 여러 가지 선물을 보내줬는데 그중에 부채도 있었다. 그는 부채를 선물하면서 시를 써줬고, 이직은 그 시에 차운해 보냄으로써 월창회장의 후의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지난해 10월 부산에서 열린 ‘2016 전국 외국인주민 화합한마당’ 행사에서 인천의 다국적 결혼 이민자로 구성된 어울림 무용단이 부채춤을 선보이고 있다.
“송죽(松竹) 그늘 속에 계곡물 소리 들려오니, 맑디맑은 선방을 그 얼마나 생각했던가. 스님께서 홀연히 보내주신 시원한 바람 감격하나니, 시골 노인 작은 집에도 바람 불어주기를.”(松竹陰中澗水聲, 幾思禪榻十分淸. 感師幻出涼風便, 分及村翁拂小楹)

두 수의 연작으로 이뤄진 작품 중 첫 번째 수다. 이직의 생애야 널리 알려졌지만, 월창회장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스님이었을 월창회장이 이직에게 부채를 선물하면서 시를 한 편 보냈다. 고마운 마음에 이직은 그 시에 차운(次韻)해서 보낸 것이다. 그 작품에는 부채 선물이 그저 여름나기를 위한 작은 물건이 아니라 스님이 지내는 산속의 서늘한 바람과 계곡물소리를 함께 넣어서 보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부채의 바람에는 스님의 서늘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서, 부채질을 할 때마다 이직은 스님이 거처하는 선방을 떠올리고 그 주변의 경관을 떠올린다.

조선 중기가 되면 사대부들 사이에 부채 선물이 성행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부채 선물을 통해서 단오 명절을 기념하기도 하고 작은 물건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안부를 전하는 목적으로 행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작은 선물이라 해도 하나의 관행이 되면 늘 번거로워지는 법이다. 처음에는 부채 선물을 주변의 몇몇 분에게만 하다가 해가 거듭될수록 보내야 하는 범위가 늘어난다. 작년에 보냈는데 올해 보내지 않거나 누구에게는 보냈는데 그 옆 사람에게는 보내지 않으면 오히려 선물 때문에 잡음이 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선물의 범위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조선 중기의 유학자 권상하(權尙夏, 1641~1721)가 자신의 중제(仲弟)인 권상명(權尙明)의 아들 권섭(權燮)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이곳에는 금년에 부채가 매우 적게 와서 겨우 한 집에만 나눠 쓰기에도 부족해 삼대같이 밀려드는 고을 사람들의 요구에 응할 수가 없었다. 또 생각건대 나의 소싯적에는 사대부의 집에 부채를 사들이는 풍습이 없었다.”(<한수재집> 권20)

이는 자신의 조카 권섭이 아마 선물을 가지고 고관의 집에 가보는 일이 있었고, 그 일 때문에 민망해하자 충고를 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우리는 이 편지글에서 권상하도 여러 자루의 부채를 받아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처지라는 점, 그럼에도 부채를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 수요를 충족할 수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이러한 유구에 응하기 위해서 요즘 사람들은 부채를 대량으로 사들이는 풍습이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자기가 어렸을 때는 없던 풍습인데 요즘 생긴 새로운 풍습이라는 표현에서 그런 점을 엿볼 수 있다.

바람과 함께 사기(邪氣)도 날려보내


▎전통문화 체험 행사에 참가한 엄마와 어린이들이 부채를 만들고 있다.
이렇게 많은 양의 부채가 필요하다 보니 품질 역시 천차만별이었다. 좋은 종이로 만든 것도 있고 아주 부실하게 만든 것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 부채는 대부분 한 해 여름을 나면 해져서 못쓰게 됐다.

권상하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유학자 윤증(尹拯, 1629~1714) 역시 1698년 자신의 아들 윤행교(尹行敎, 1661~1725)에게 보낸 편지에서 부채를 선물로 보낸 것을 언급하고 있다. 아들이 서울로 부채 선물을 올린 것은 문제가 없지만 예의를 제대로 갖춰야 했다고 말한다.

“부채가 비록 하찮은 물건이기는 하지만 예모(禮貌)와 인사를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예의가 예물을 따라가지 못하면 그 양이 아무리 많더라도 진헌(進獻)하지 않은 것이 되니, 예물의 다소가 문제가 아니다. 편지가 이렇게 짧고 종이 품질이 낮은 것은 한집안끼리 안부를 묻는 편지에나 쓰는 것이지 어찌 예물을 봉해 보내는 데 쓰겠느냐.”(<명재유고> 권28)라고 하면서 윤행교가 선물을 보내는 정성과 예의 문제를 말했다.

아무리 물건을 많이 보내도 그것이 예의에 어긋난다면 보내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17세기에는 부채 선물이 일반화되면서 많은 양이 유통됐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중국도 마찬가지지만 조선에서 부채는 여러 가지 역할을 한다. 단오 무렵에 부채를 선물로 주고받는 것은 나쁜 기운을 물리치라는 의미를 가진다. 더위에 밀려서 생기를 잃기 쉬운 여름이므로, 부채를 통해서 더운 기운이 가져올 병과 쇠약함을 물리치고 생명력을 보존하려는 의도를 생각하면 부채에서 사기(邪氣)를 물리치는 역할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부채, 특히 우리의 합죽선은 대나무를 쪼개서 만든다. 그래서 부채는 늘 두 가지 의미를 떠올리게 한다. 우선 대나무에서 고죽국(孤竹國)을 생각하고, 나아가 고죽국의 이름난 현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연상한다. 주나라 무왕이 군대를 일으키자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가 굶어 죽었다는 만고의 충신이 백이와 숙제 형제 아니던가.

그러므로 부채에서 꼿꼿한 절의를 생각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맑은 바람에서 유추된 의미다. 조선 사대부들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부채 이미지가 ‘원풍(袁風)’이다. 이는 진(晉)나라 원굉(袁宏)의 바람이라는 뜻이다. 원굉이 동양군수(東陽郡守)로 부임할 적에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명사인 사안(謝安)이 부채 하나를 선물로 줬다. 그러자 원굉이 “어진 바람을 일으켜 저 백성들을 위로하겠다(當奉揚仁風, 慰彼黎庶)”라고 대답했다.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나오는 고사다.

이 때문에 원풍은 어진 정치를 상징하는 말이 됐다. 부채를 선물로 받은 관료들의 마음에는 그 바람이 선정에 대한 소망 혹은 요구로 읽혀졌던 것이다.

어떤 의미로 읽든 선물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의 한 과정이다. 옛 사람들은 부채를 통해서 한여름의 나쁜 기운을 떨쳐내고 더위를 이겨내어 한여름을 잘 보내라는 뜻을 담았다. 어쩌면 상대방의 절의에 대한 존경을 담았을 수도 있고, 선정을 펼치라는 소망을 담았을 수도 있다.

작은 선물일망정 안부를 묻고 자신의 정성을 담아 부채를 보냈다. 거기에 시 한 수 그림 한 편이 소박하게 담겨 있었으니, 받는 사람의 고마움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리 보면 부채 선물이 새삼 풍류적이고 뜻이 깊어 보인다.

김풍기 -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책과 노니는 것을 인생 최대의 즐거움으로 삼는 고전문학자. 매년 전국 대학교수들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올해의 사자성어’[2011년 엄이도종(掩耳盜鐘)]에 선정되는 등 현실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는다. 저서로 <옛 시에 매혹되다> <조선 지식인의 서가를 탐하다> <삼라만상을 열치다> 등이 있다.

201705호 (2017.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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