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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미루의 어드벤처(1)] 사하라의 신기루, 팀북투로의 여로 

이 세상 가장 먼 곳에 황금빛 문명 있었네 

글·사진 김미루 예술작가
사막의 황폐함이 지닌 강렬한 포스에 매혹돼…다양한 문화적 전승이 빛나는 도시 팀북투로의 잠입기

6월호부터 사진작가 김미루의 예술적 자전 에세이 ‘미루의 어드벤처’를 연재한다. 김미루는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사진작업을 통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작가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삶과 예술세계를 하나의 자장(磁場) 안에서 인식하는 매우 드문 작가다. <뉴욕타임스>가 2011년 전면을 할애해 그를 인터뷰 한 이유는 그가 인간과 자연환경과 문명에 관한 매우 광범위하고도 충격적인 영상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현 시점에서 김미루의 예술이 어떤 경지까지 도약할 수 있을지 가늠하기 쉽지 않다. 팽창을 계속하는 그의 광활한 예술세계, 글과 사진이 교호하는 아주 특별한 인문학의 광장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한다.


▎인도의 타르사막에서 찍은 예술작품으로 김미루가 낙타 대열의 선두에 서 있다. 사진의 구성과 내용을 보면 사진작업의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내가 2012년 정월에 시작하여 전 세계의 사막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 사연은 그리 희한한 내막이 숨어 있는 이야기는 아닐 것 같다. 사랑에 실패한 쓰라림도 있었을 것이고 도피하고 싶은 심정도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다. 가슴이 쓰리기에 모든 것을 의식의 뒤켠으로 내던져버리고 싶은 욕구는 꽤나 흔한 감정일 것 같다. 청춘의 여로에서 만나고 또 만나는 흔해빠진 이야기!


▎사진·피터 도모락
나의 경우, 그러한 욕구는 삶의 고해의 물결 위에 강렬한 파문을 일으켰다. 너무도 강렬하고, 흔하지 않은 이야기, 3년에 걸친 고독한 모험의 발자취! 나는 말리, 이집트, 모로코의 사하라 사막, 요르단의 아라비아 사막, 인도의 타르(Thar) 사막, 몽골리아의 고비 사막을 헤매고 또 헤매었다.

이 방황의 이야기를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 제19대 대통령선거를 치르고 새로운 역사의 장을 맞이한 이 시점에서 할 수 있게 되어 너무 기쁘다. 미국이나 유럽사회는 불건강한 보수의 징표를 드러내고 있는데 반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정당한 길을 선택했다. 우리 역사는 옛 사고방식을 다 떨쳐버리고 새로운 모험을 감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험은 단순히 어려움을 헤쳐나간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모험의 과정에서 ‘새로움’이 생겨나야 하는 것이다. 내가 새로워지고, 내가 인식하는 세계가 새로워지는 것이다. 한국 역사가 이제부터 참으로 새로워지기를 우리 모두가 빌고 있는 것이다.

사막, 낙타, 유목민족의 삶에 관하여 내가 강렬한 매혹을 체험하게 된 것은 2011년 늦은 여름, 한국의 SBS채널의 한 프로그램으로, 사진작가로서 나의 삶의 단면을 다큐멘터리로 만드는 방송용 작품을 찍기 위해 요르단에 한 달간 머물게 된 것이 그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 사건은 내가 중동지역에 발을 디디게 된 첫 경험이었다. 나는 초라한 행색에 먼지 굴러가듯 하는 질소(質素: 꾸밈이 없고 수수함)한 여행스타일에 전혀 경험이 없었다. 그리고 한국의 TV 방송사들이 아주 빈약한 예산과 충분한 정보가 없이 다큐멘터리를 찍어댄다는 것도 전혀 예상치 못했다. 제작팀은 암만(Amman)의 교외에 아주 검약한 시설을 예약해놓았다. 첫날 밤, 나는 내 방 샤워실 물 빠져나가는 하수관 막이에 온갖 인간들의 털이 엉켜 수북이 쌓여있는 것을 보고 질겁했다. 나는 팀에게 당장 시내에 있는 최고급 호텔로 방을 바꾸어달라고 졸랐다. 그런데 놀랍게도 팀은 나의 청을 실현시켜 주었다. 그러나 다음날, 베두인족이 운영하는 사막 캠프에서 하룻밤을 지낼 수밖에 없었는데, 나는 모든 것이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예를 들면, 내가 덮는 담요는 때가 얼마나 덕지덕지 끼었는지 그 담요가 이 세상에 나온 후로 한 번도 물세례를 받은 적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내가 마실 수 있는 물은 모두 오염된 것처럼 보였다.

사막 그 자체의 광막함이 정열 일깨워


▎사하라 복판 팀북투 가까운 사막을 낙타를 타고 건너는 필자 김미루 씨.(오른쪽) 김씨를 인도하는 사람이 그의 조수 아바(Aba)다.
그때만 해도 나는 거대한 사막재벌 추장의 아들과 약혼하여 생각할 수 있는 온갖 사치 속의 안락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오만한 프리마돈나의 멘탈리티에 사로잡혀 있는 그런 철없는 소녀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의 곤경에도 불구하고, 사막 그 자체의 광막함은 나의 모든 정열을 불사르기에 충분했다. 제일 먼저, 사막의 황폐함이 지니고 있는 이국적이고도 로맨틱한 관념이 불러일으키는 포스(force)가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 포스는 손상된 인간관계의 현실태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나의 욕망을 부추겨댔다.

나를 부추긴 그것이 진실로 무엇이었든지 간에, 나는 그 여행에서 뉴욕의 내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세계의 다양한 사막과 낙타에 의존하는 유목민족 문화에 관한 서적과 정보를 광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는 구글 페이지에서 ‘사하라 사막의 푸른 인종들(The Blue Men of The Sahara)’이라고 표기되고 있는 뚜아렉 민족(Tuaregs)에 시선이 끌리게 되었다.

그들이 휘감고 있는 옷이나 얼굴의 문식이 모두 옥청색의 인디고 염료로 물들여져 있기 때문에 서 있는 모습 그 자체가 푸른 생명체처럼 보인다. 나는 이 사막의 종족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실상 나는 다른 사막종족에 관해서도 아무 정보가 없었다. 이 신비스럽게 옅은 쪽빛 천으로 휘감긴 사람들의 이미지가 너무도 강렬해서 나를 도취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직접 사막에 가서 이들과 해후하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 뚜아렉 종족은 더 큰 개념의 베르베르 에스닉 그룹(Berber ethnic group)에 속해 있다. 베르베르족은 남서 리비아, 알제리아 남부, 니제르(Niger), 말리, 버키나 파소(Burkina Faso) 북부의 넓은 지역에 걸쳐 살고 있다. 이들이 사는 지역이야말로 현재의 국경과 관계없이 사하라 사막 중심부의 광대한 영역을 포섭한다.


▎뚜아렉 사람들과 광활한 사막의 복판에 앉아 포즈를 취했다. 맨 왼쪽이 필자.
이들이야말로 구약의 옛 이야기에서나 만날 수 있는 전통적 유목문화를 고수하고 있는 유목민들의 정통 후예들이다. 획일화되어가고 있는 인류문명사의 거센 물결을 거슬러, 신비로운 태고의 쪽빛 문화를 지키고 있는 고독한, 그러면서 자족한 이들에 대한 나의 향심(向心)은 열렬했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그곳으로 갈 수 있겠으며,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개발되지 않은 거대한 사막 속에 외롭게 살고 있는 이들과 함께 소굴을 틀 수 있겠는가?

이것은 처음에는 나의 단순한 판타지로만 끝나 버릴 공상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몇 달 후에 나는 여행가방 짐을 꾸리고 있었다. 뚜아렉 문화를 과시하는, ‘사막의 제전(Festival au Desert )’이라 불리는 뮤직 페스티벌이 매년 정월이면 팀북투(Timbuktu)에서 가까운 모래언덕 위에서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해, 그러니까 내가 참석한 2012년에 열린 이 뮤직 페스티벌이야말로 이후의 정치상황으로 그 평화로운 페스티벌 역사의 마지막 장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새카맣게 모르고 있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영어 관용구에 ‘여기서 팀북투까지(from here to Timbuktu)’라고 하면, 그것은 보통 우리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는 아주 먼 곳, 전설적 미지의 땅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런 말을 쓰는 사람들도 대부분 팀북투라는 곳이 그들이 실제로 방문할 수 있는 현실적 도시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

인간의 발걸음이 미칠 수 없는 이상향의 심볼


▎팀북투에 남아있는 황토벽돌 이슬람사원 징게레베르 모스크(The Dinguerebr Mosque). 1327년에 완공된 사원으로 장엄한 실내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고 한다.
팀북투는 아직도 서아프리카의 육지로 둘러싸인 말리(Mali)라는 나라(면적은 남한의 12배 크기, 인구는 1500만 정도다)의 한복판에 존재하는 고대도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하라 사막의 남쪽 변경에 있는 니제르강 북쪽으로 약 20㎞ 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 도시는 1988년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될 정도로 특별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지금 가보면 흙벽돌로 지은 집들이 얼기설기 배치되어 있는 뿌연 먼지 길만 황량하게 보이는 빈곤한 도시다(인구는 5만4000명 정도다). 그러나 14세기 말리제국 시대에 거슬러 올라가보면, 팀북투는 북아프리카의 문화 중심지였다. 이슬람스칼라십과 아프리카무역의 환상적 센터였다. 이곳은 북부아프리카의 카라반 루트의 교차지로서 부가 축적되었으며, 산코레 마드라사(Sankore Madrasah)라는 권위 있는 이슬람 대학이 있었다.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이 도시의 영화는 꾸준히 하락했지만, 중동과 유럽에는 이 도시에 관한 환상적 이야기들이 계속 나돌았다. 팀북투의 길거리들은 모두 금 벽돌로 포장되어 있으며, 소금과 금이 동일한 무게로 교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과장된 이야기이지만, 후자의 이야기는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소금이 그토록 귀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하여튼 이런 이야기들이 날이 갈수록 더욱 맹랑하고 화려하게 포장되었고 모험가들의 환상을 자극시켰다. 19세기 초부터 서구의 탐험가들은 잃어버린 도시, 팀북투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탐험이야말로 그들에게는 불행의 연속일 뿐이었다. 온갖 질병이 그들을 괴롭히면서 대원이 저승으로 사라졌고, 추락, 익사, 적대적인 토착민들의 공격 등등으로 그 어느 누구도 성공적인 탐험을 수행해내지 못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팀북투’라는 단어는 인간의 발걸음이 미칠 수 없는 모호한 먼 이상향의 심볼이 되어갔다. 독자들이 영한사전을 펼쳐보아도, ‘Timbuktu’는 “멀리 떨어진 곳”의 뜻으로 해설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드디어 1828년에, 르네 까예(René Caillié, 1799~1838)라는 프랑스의 탐험가가 팀북투를 단신으로 탐험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까예는 16살 때 이미 프랑스 해군 선박의 선원으로서 서아프리카 세네갈 해변에 수개월을 머무른 경험이 있었으며, 평생 팀북투를 가보고자 하는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자금을 모았고, 이전의 실패담의 원인을 치밀하게 조사했다. 그는 아랍어를 배웠고 이슬람의 문화를 습득했다. 그는 무슬림으로 변장하여 여행을 계속했으며, 목적지에 도달했고, 프랑스의 자기 고향으로 안전하게 돌아왔다. 팀북투의 실상을 체득하고 돌아온 첫 유럽인이 된 것이다. 이 사건 이후로 황금과 눈부신 부의 이상향의 꿈은 사라졌다. 까예는 이 도시를 아주 작고 초라한 볼품없는 한 마을로 묘사했다. 까예는 프랑스 지리학회의 도움을 받아 보고서를 썼다. 그러나 그는 빈궁하게 살았고 38세의 젊은 나이에 폐병으로 죽는다.

하여튼 팀북투는 그 모습대로 초라하게 유지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북부 말리 분리 내전(2012년부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복잡한 내전)이 발생하기 이전까지, 팀북투는 전혀 다른 종류의 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고대 이슬람 학자들이 남겨놓은 수천, 수만 권의 책과 원고가 보존되어 있었고, 황토 흙벽돌로 지은 매우 유니크한 건축스타일의 모스크들, 그리고 다양한 문화적 전승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팀북투 주민들이 사막의 제전에 참가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그러한 풍요로운 역사유산 때문에 팀북투는 근세에 규모는 크지 않지만 관광산업을 유지할 수 있었다. 팀북투에 여행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는 완벽히 불가능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지금은 관광이 허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정치적 정황에 관해서는 내가 나중에 좀 설명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특별히 나에게 있어서, 수 주 안에 급히 이 여행을 계획하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깊게 사귀던 남성으로부터 2011년 12월 중순, “그만두자”라는 말을 들은 후, 나는 비장한 느낌으로 곧바로 뉴욕에서 바마코(Bamako: 니제르강변에 위치한 말리의 수도. 말리의 남서부에 있다)로 가는 싼 비행기 표를 왕복으로 끊었다. 티켓은 내가 2012년 1월 10일에 말리에 도착하고 같은 달 18일에 그곳을 떠나는 일정만을 허락했다.

말라리아와 모기가 가장 두려운 존재


▎뉴욕 브롱스의 구 크로톤 수로(Old Croton Aqueduct)는 뉴욕시에 담수를 공급하기 위해 1842년 건설된 최초의 수로였다. 도심의 급성장에 대응하기 위하여 1890년 신 크로톤 수로가 개통돼 구 수로는 폐쇄됐다. 이 옛 수로를 뚫고 들어가 옛 시간과 그곳에 얽힌 삶을 체감한 아우라의 순간이다.
자아! 걱정이 태산같이 쌓이기 시작했다. 바마코에서 팀북투는 어떻게 갈 것이며(부산에서 북한의 신의주로 가는 것보다도 훨씬 더 멀다), 또 어떻게 돌아올 것이며, 어디서 묵고, 무슨 장비와 양식을 준비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신속하게 비자를 획득하고, 방역조건들을 만족시킬 것인가?

말리를 들어가려면 황열병 백신주사는 필수다. 이런 생각을 하자니, 다양한 질병의 공포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나는 우선 악명 높은 말라리아가 두려웠다. 말라리아는 모기 내에 기생하는 벌레가 그 주둥이 주사를 통하여 인간의 혈관 내로 주입되어 인간의 간에 정착하여 증식하는 매우 구체적인 전염질환이다. 말라리아에 대해서는 현대의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백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말라리아를 예방하기 위하여 처방되고 있는 다양한 약이 대체적으로 심각한 부작용을 유발하며 건강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나는 예방약은 먹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 결심은 내가 말라리아 모기에 물리지 않기 위하여 광범한 대책을 수립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지난한 과업이다. 내 피부는 태생적으로 ‘모기 자석(mosquito magnet)’이라고 불릴 정도로 모기와 친화력이 강하다. 내 친구들은 나를 자기들의 ‘모기방충제’라고 부르곤 했는데, 내 옆에 앉으면 모기가 다 나에게로 오고 자기들에게는 안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구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모기방충제를 주문했다. 그리고 애매한 약이지만 비타민B 반창고까지 주문했다. 이것은 한국 사람들이 잘 쓰는 파스같이 생긴 것인데 아무데나 붙이면 온몸에서 비타민B가 땀으로 분비되게 만든다. 실제로 붙여보면 비타민B 냄새가 온몸에서 난다. 모기가 이 냄새를 몹시 싫어한다는 것이다. 이 약을 만든 사람들의 주장에는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다급했던 나는 그 약을 샀고 또 사용했다. 나는 모기와 다른 벌레들을 못 오게 만드는 다섯 종류의 방충약을 더 샀다.


▎맨해튼 다리는 뉴욕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다. 터부를 깨고 알몸으로 그 꼭대기에 올라가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필자는 “청춘의 환상이 구체적 현실이 되는 그 순간의 세계는 너무도 아름다웠다”고 회상했다.
내가 살 것은 방충제만이 아니었다. 나는 물정화제(water purification tablet: 알약인데 물에 집어넣으면 더러운 물도 마실 수 있다. 투입하고 4~5시간 기다린 후에 마신다. 옥도정기 같은 냄새가 난다), 설사약·진통제·항염증제·항생제도 사야 했다. 커피·초콜릿·시리얼·파스타 캔 같은 음식, 그리고 슬리핑백·모기장·배낭 같은 캠핑도구를 다 장만해야 했다. 사람들은 나의 예술작품의 성격상 내가 이런 일들에 매우 익숙할 것 같이 생각하는데, 나는 실제로 야외활동가가 아니었다. 나는 캠핑도 해본 적이 없고, 텐트를 어떻게 치는지도 알지 못했다.

허구한 날을 나는 맨해튼에 있는 나의 콘도아파트에서 인체공학적으로 만든 그물의자에 앉아 사유를 향유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그런 소극적 삶을 즐겼다. 나는 대부분 외식을 하지 않지만 나가 먹으면 반드시 미슐랭에서 별표를 받은 고급 레스토랑만을 순회한다. 여행을 할 때도 호텔급의 숙소를 선택했다. 나는 여행을 무척 많이 다니는 편이지만 그래도 문명화된 나라들만 다녔다. 백신주사를 요구하는 그런 지역은 가본 적이 없었다. 내가 틴에이저로서 유럽 배낭여행을 할 때에도 3성급 이상의 호텔에서만 묵었지, 호스텔급에서 묵은 적은 없었다.

“작품은 사막과 낙타와 내 누드로 구성된다”


▎서울 모래내 철거지역에서 찍은 사진. 필자는 “자연스러운 가옥을 헐어버리고 고층아파트를 삶의 터전으로 삼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라고 묻는다.
그러나 이제 나는 토착적 삶의 방식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거칠고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나를 내던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래서 우선 온라인상으로 팀북투에서 묵을 수 있는 곳을 찾아보았다. 결국 팀북투의 북쪽 가장자리에 있는, 호텔 사하라패션(Hotel Sahara Passion)이란 이름의 아주 싼 숙박시설을 하나 발견했다. 그 업소는 신둑(Shindouk)이라 부르는 뚜아렉 남자가 경영하는 곳이었다. 신둑은 나이가 한 쉰 살은 되어 보이는데, 실제로는 나이보다 훨씬 더 늙어 보인다. 사막의 강렬한 태양이 사람들의 얼굴을 그을리기 때문이다. 그의 부인은 미란다(Miranda)라는 이름의, 블론드 머리에 매우 매력적인 캐나다 여인이었다. 이 30대의 젊은 서양여자는 봉사활동가로서 팀북투에 왔다가 말뚝을 박고 토착민과 결혼해버린 것이다.

정말 재미있는 부부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결합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흔치 않은 충격적 사건으로 나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나는 리뷰를 읽고 그들과 이메일을 주고받은 후에 그들이야말로 나의 말리여행을 안전하게 가이드 해줄 수 있는 이상적 커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우선 그들에게 바마코에서 팀북투로 가는 여행길을 조직해 달라고 도움을 요청했다.

특히 그즈음 이슬람 마그레브(Islamic Maghreb) 지역의 알카에다 조직에 의한 유괴, 납치의 뉴스가 잦았기 때문에 나는 말리 내에서 스스로 여정을 계획한다는 것이 매우 어리석은 짓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신둑에게 “사진작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 작품은 사막과 낙타와 내 누드로 구성된다”는 것을 설명했다. 신둑은 나의 사진작품 계획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전체지역이 무슬림 관할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젊은 여성의 나체를 포함하는 작품 활동이 얼마나 황당하고 또 실제적으로 어려운 요청인지를 나 자신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내 의식 속에서 어떠한 것을 기획하고 있었는지조차 잘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당시 엄청나게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과감하게 모든 여행일정을 확정지었던 것이다. 2011년 11월, 그러니까 바로 전 달에 세 명의 유럽인 관광객이 알카에다 조직에 의하여 유괴되었다. 그리고 한 독일 관광객은 트럭에 올라타라는 명령에 저항했다가, 팀북투 시내 한복판의 레스토랑 밖에서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머리에 총상을 입고 즉사했다.


▎말리 바마코의 거리에서 만난 원주민. 바마코는 투어가이드 고렐이 사는 곳으로 습기와 먼지로 뒤범벅이 된 장소다.
나는 축적된 비행기 마일리지를 활용하여 바마코로 가는 비즈니스 좌석을 획득했다. 파리 경유였다. 나는 파리 샤를 드골 공항의 안락한 VIP라운지에서 뚜아렉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위키리스크 등의 기사를 읽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불안감에 비닐포장 된 소독물수건을 부지런히 감춰두고 있었다. 비행기에서는 내 옆에 건장한 모리타니아(대서양 쪽으로 있는 말리의 옆 나라) 비지니스맨이 앉아 있었는데, 그는 나에게 말리에서 별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계속 안심시켜주었다.

그러나 그의 조언도 나에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비행시간 내내 불안에 떨었다. 비즈니스 칸의 훌륭한 침대좌석도, 맛있는 샴페인도 나를 잠들게 하지 못했다.

2012년 1월 10일 오후 늦게 바마코 세누 국제공항(the Bamako-Sénou International Airport)에 도착했다. 부친 짐을 찾고, 졸라대는 호객상들을 뿌리치면서, 나는 아주 점잖은 훌라니(Fulani)족의 남성과 해후할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고렐(Gorel)이었는데, 바마코에서 활약하는 신둑의 투어가이드 파트너였다. 그의 4륜 구동차에 올라타 우선 시내 한복판에 있는 환전소로 갔다. 모든 길 주변으로 덮여 있는 붉은 먼지 속에서 나는 찌는 듯이 후끈한, 습기와 먼지로 뒤범벅이 된 공기를 헤쳐 나가며 가냘프게 숨을 쉬었다.

말이 끄는 전통적 수레들, 그리고 쓰레기라는 개념조차 인지되지 않는 문명의 찌꺼기, 비닐 백이 사방에 흩어져 반짝이는 들판이 나에게는 매우 새로운 광경이었다. 시내에 도착할 즈음, 작열하는 태양이 지평선에 걸리자 모기떼들이 공격을 개시했다. 나는 물리는 것이 너무도 두려웠다. 계속 빙빙 돌면서 안달했다. 나의 그러한 모습이 환전소에 있는 사람들을 즐겁게 만든 모양이다. 창가에 앉아 있던 한 남성이,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웰컴 투 말리!” 나는 다시 차로 돌아가자마자 몸을 커버하는 디트(DEET)라는 모기약 스프레이를 뿌려댔다. 우리는 고렐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

바마코의 대부분의 좁은 길은 포장되지 않았고 울퉁불퉁했다. 거리의 가로등은 가끔이나 한둘 있을까 말까, 그래서 어두웠다. 고렐이 살고 있는 동네는 거의 등불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주택가였는데, 마치 벽돌과 시멘트 블럭이 쌓여있는 공사현장 같이 보였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가옥이 완성되기도 전에 입주하여 대강 거적으로 처리하여 삶의 공간을 꾸렸기 때문이다. 내가 고렐의 집에 도착했을 때, 어린아이들이 아버지를 마중하기 위해 조르르 달려 나왔다. 나의 방은 꽤 얌전한 곳이었고 욕실에는 더운 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고렐 가족의 친밀감은 나를 안심시켰다. 그 집의 분위기는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의 아기자기한 단편을 회상시켰다. 나도 어렸을 땐 서울 서대문구 봉원동 산 언덕받이 아주 작은 집에서 살았고, 길쭉한 작은 마당은 시멘트 바닥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오빠와 맨발로 소꿉장난을 했다. 얼마 안 있어, 마당에서 저녁이 제공되었다. 식탁에는 상당히 많은 양의 쇠고기 꼬치· 열대 바나나 튀김· 감자 튀김· 올리브 양파· 콩, 그리고 쌀밥이 놓여 있었다.

기이한 물건을 파는 행상의 파노라마


▎팀북투 공항에서 만난 사람들. 팀북투까지의 항공편은 예상과 달리 쾌적했다.
잠시 나는 인도에서 어느 가정집에서 주는 음식을 먹고 장티푸스에 걸려 고생을 한 나의 친구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곧 그런 불길한 생각을 접어두고 그들이 제공한 음식을 맛있게 다 먹어치웠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나는 동네로 마실 나갔는데 이웃사람들이 구멍가게 앞에 설치된 뒤가 쑥 나온 옛날 텔레비전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실상 우리의 멀지 않은 과거였다. 나는 그들이 얘기하는 것을 듣다가 집으로 돌아왔는데, 오는 길에 미네랄워터 한 병을 샀다. 그 병에는 “보건부에 의하여 검증되고 시인됨”이라는 라벨이 붙어 있었다. 나는 그 물로 이빨을 닦고 남은 물에 비타민 가루를 타서 홀짝 다 마셨다.

나에게 주어진 방은 생활용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보아하니 고렐이 자신의 방을 나에게 내준 것 같았다. 나는 시트가 깨끗한지 어떤지 확인할 여력도 없었다. 죽도록 피곤했지만, 매트 구석구석에 빈대가 숨어 있는지 만큼은 확인해 보아야 했다. 침대에 빈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나는 비로소 모기장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사실 내 인생에서 모기장에 들어가 본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 다음날 나는 고렐이 심부름하느라고 여기저기 다니는 것을 졸졸 따라다녔다. 이날 밤, 고렐은 출국을 한다고 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좀 있다고 했다. 그는 그가 볼일을 보는 사이에도 여기저기 관광할 것이 있으면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 하루가 꿈결처럼 지나갔다. 나는 내가 이 지구상 어디에 있는지도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카메라에 들이닥치는 먼지를 막아보려고 헛된 수고를 계속하는 가운데, 나는 길거리에서 보이는 광경을 해탈한 고승처럼 조용히 바라보았다. 길 가장자리로 염소떼를 몰고 가는 사람, 황토길을 어지럽게 달리는 오토바이 군상, 등에는 아기를 업고 머리에는 산더미 같은 바나나 수확물을 이고 가는 삶의 전선의 여인, 나무로 만든 지게 위에 도살된 동물을 잔뜩 지고 가는 사람, 죽은 새, 부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건조된 원숭이 머리 등등 기이한 물건을 파는 행상이 파노라마처럼 의식을 스쳐 지나갔다.

깊은 인상을 남긴 별종의 행상이 있었는데, 그것은 담배상과 약종상이었다. 담배상의 경우는 목에 맨 넓은 나무상자를 열면 온갖 고급 유럽 브랜드의 담배곽이 진열되어 있는 것이다. 약종상의 경우, 매우 재미있는 광경이 내 눈앞에 전개되었다. 온갖 다른 종류의 조제약이 똑같이 생긴 흰 상자 속에 들어있는데, 그 상자를 큰 양동이에 수북이 쌓아놓고 그 뒤에는 인상 깊게 생긴 늙은 여인이 의젓하게 앉아계신 것이다. 사람들이 찾아와 어디가 아프다고 호소하면 그 호소하는 바에 따라 그 흰 곽을 하나씩 골라준다. 귀 아프다고 하면 귀약을 주고, 목 아프다고 하면 목약을 주고, 눈 아프다고 하면 눈약을 준다. 하여튼 그 여인은 만병통치의 의사와도 같았다. 한 양동이 안에 종합병원을 차려놓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기나긴 지혜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이 양동이 하나가 거대자본의 현대식 종합병원보다 더 유용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우선 고렐에게 그 담배가 진짜인지를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고렐은 단순하게 대답했다. 사서 피워보고 그 맛이 나면 진짜가 아니겠느냐고 했다. 할머니 약은 어떠냐고 물었더니, 그는 “마찬가지죠. 먹어봐야 약효가 있는지를 알죠”라고 대답했다. 그는 쿨한 프래그머티스트(pragmatist, 실용 주의자)였다.

드디어 팀북투 공항에 내리다


▎공항에 내려 짐을 찾는 모습이다. 필자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렁찬 목소리를 지닌 안내인 신둑을 만났다.
이날, 고렐이 한 중요한 일이란 팀북투에 사는 신둑을 위하여 대형트럭인지 트랙터인지, 그 한 부품을 구매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비행기에 싣고 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오케이”라고 말했지만, 실로 그는 나에게 아무런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부품상의 한 소년이 지저분하고 낡아빠진 굵은 마대 자루에 담긴 엄청나게 무겁고 녹슨 쇳덩어리 부품을 질질 끌고 나오는 것이었다. 아니! 이렇게 무거운 물체를 비행기에 실으라니! 내 짐은 아무것도 못 가지고 가겠네. 내가 그들의 수고비는 다 지불했건만, 어찌하여 나에게 이런 구질구질한 수고를 하게 만든단 말인가! 약속이 다르잖아! 이런 류의 욕지거리가 막 내 입에서 쏟아져 나올 판이었지만, 나는 정중하게 혼자 중얼거리듯, 속삭이는 듯이 말했다. “이 보이소. 포장이라도 다시 해야 하지 않겠소? 비행기 회사가 이렇게 무거운 쇠뭉치를 짐칸에 넣어줄 리 있겠소?” 그들은 나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왔을 땐, 완벽하게 에너지가 고갈되어 있었다. 고렐은 방을 들락거리며 이날 밤 출국을 위하여 그의 물건을 포장하고 있었지만 나는 침대에 쓰러져 있었다. 온몸이 먼지로 덮이고 피곤의 극을 달리고 있었지만 샤워를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물이 얼음처럼 싸늘했다.

팀북투로 가는, 페스티발 주최측에 의하여 조직된 전세기가, 1월 12일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다. 모든 사람이 동시에 체크인 하기 위해 심하게 북적거렸고 나는 그 놈의 쇳덩어리 때문에 마음을 졸였다. 그런데 공항직원들이 내 짐과 마대에 담긴 쇳덩어리를 군말도 하지 않고 싹 가져가버렸다. 군중 속에 멋진 뮤지션들과 서양인들이 있는 것을 보자 나는 좀 안심이 되었지만, 나는 긴 소매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몸에 디트 모기약을 뿌려댔다. 공항 내에 모기가 꽤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팀북투까지의 항공편은 예상과는 달리 쾌적했고 금방 지나갔다. 비행시간 내내 나는 깊은 호기심으로 커다란 키에 짙은 피부색을 지닌 말리인 스튜어드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골격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비행기가 팀북투에 착륙하자마자 우렁찬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신둑이었다. 건장한 사나이! 널찍한 코에는 마마자국이 가득했고, 몸은 산뜻한 쪽빛 뚜아렉 의상으로 휘감겨 있었다. 배기지 클레임이 전동으로 돌아가는 회전대가 아니라 거대한 카트에 짐을 담아놓은 채 가져가라는 것이다. 아귀처럼 달려드는 여행객들을 헤치고 내 짐을 꺼내야만 했다. 신둑은 그 속에서 가뿐하게 그 육중한 시커먼 마대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그의 어깨 위에 마치 가벼운 오리털 베개인 것처럼 얹고 곧바로 그의 미니밴으로 갔다. 끝없이 펼쳐지는 지푸라기 색깔의 모랫길, 같은 색깔의 작은 4각의 판잣집을 스치며 지나갔다. 가끔 시야에 들어오는 당나귀를 볼 때마다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살아 있는 실물로서의 당나귀를 처음 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나의 팀북투 모험은 시작되었다.

- 글·사진 김미루 예술작가

[박스기사] 필자 인터뷰 | 사진작가 김미루 - “사막 다녀온 후 삶의 근본으로 회귀했다”


▎사진·임진권
예술엔 완성 없어, 단지 과정을 보여주는 것…정치보다 시적 통찰이 세상 바꾼다고 믿어

연재 첫 회의 글이 자못 유장하게 시작되었다. ‘예술적 자전’의 긴 호흡이 느껴졌다. 독자에게 전달할 메시지는?

“사람들은 너무 자기만의 좁은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나의 모험은 나의 편견을 깨부수는 과정이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해도 인간은 어김없이 평범한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스스로 미국 유학을 결단했다고 들었다. 이후 불문학과 의학, 미술과 사진에까지 예술적 관심 영역이 확대됐다. 궁극적으로 자신의 삶과 예술이 어떤 지평에 도달할 것으로 보나?

“누구나 그렇지만 나도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주목을 받는 예술가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막을 다녀오고 나서 나는 변했다. 사막은 단절이다. 나의 과거로부터 단절되고 집착이 사라졌다. 결국 내가 뭔가 기발한 예술을 해도, 그것은 결국 모든 사람이 경험하고 있는 일상적 체험의 한 방울일 뿐이다. 삶의 근본으로 회귀하게 되었다.”

현대 인간의 가장 비극적 요소는 ‘배고픈 것’

예술적 성취의 과정에서 부친인 도올 선생님께 어떤 영감과 가르침을 받았나?

“아버지가 내 이름을 미루(彌陋)라고 지었는데 ‘더욱 누추해져라’라는 뜻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도가적 사유의 영향인 것 같은데, 나는 노자의 ‘물’의 이미지를 좋아한다. 높은 데 있지 않고 항상 낮은 데로 흐르며, 더러운 것을 씻어내어 자신 속에 간직한다.”

예술이 역사의 궤도에서 이탈해 왜소화되었고, 구체적인 인간의 삶과 유리되었다는 비관론이 존재한다. 당신의 예술에는 인간과 역사가 어떤 방식으로 포섭되어 전개되는가?

“나는 인간의 느낌, 즉 기본적 본능에 호소한다. 현대미술의 대체적 방향은 너무 장난스럽다. 엘리트의 향유를 위한 것이다. 현대미술은 미술사를 통달한 인간들에게나 의미 있는 관념적 장난이다. 나의 작품은 누구나 보면, 보는 순간에 직감할 수 있다. 예술가의 체험, 행위, 관점이 그대로 관중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예술은 완성일 수 없으며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대 인간이 처해 있는 가장 비극적인 상황은 무엇인가? 김미루의 예술은 그 상황을 어떻게 포착하여 극복하는가?

“현대 인간의 가장 비극적 요소는 ‘배고픈 것’이다. 많은 문명국의 사람이 배부르다고 착각한다. 한국 땅에도 청년실업문제, 농촌문제, 북한문제, 배고픔의 문제는 항존한다. 나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벌레먹기’ 작품을 시작했다. 사람들이 보통 구역질이나 공포를 느끼는 벌레를 먹고 있다. 2013년, 유엔 산하의 식량농업기구(FAO)도 벌레 단백질(insect protein)이야말로 앞으로 가장 지속가능한 음식임을 천명했다.

그러나 나는 정치적 해결을 도모하지 않는다. 나는 시인이다. 시적 통찰이 정치적 힘보다 더 근원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한국도 한류의 힘이 없다면 어떻게 중국을 다룰 수 있겠는가?”

- 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glutton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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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호 (2017.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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