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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섬 문명사(6)] 황해 해양문명의 징검다리 저우산(舟山)군도 

 

글·사진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 아시아퍼시픽 해양문화연구원장 asiabada@daum.net
고대 해상교통로의 요지로, 대륙과 한반도의 친선교류 창구 역할…한반도 서해안 어민들과 유사한 조기잡이 풍습과 신앙체계 이어져

해양문명이란 종교문화나 신앙교리처럼 어떤 거창한 것만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어로기술이나 음식문화 등 민중의 삶의 구석구석을 채우는 생활문화 역시 바닷길을 따라 흐른다. 우리 역사의 흔적 가득한 황해 해양문명의 징검다리, 저우산군도를 찾았다


▎불긍거관음원은 ‘신라초’라는 바위 위에 세워진 것으로 보아 신라인들의 공력이 상당부분 작용했으리라 보인다. 불긍거관음원의 관음보살 현신처.
우리는 중국의 바다와 섬에 대해 얼마나 알까? 중국은 대륙의 크기에 비해 섬은 상대적으로 적다. 하이난(海南) 같은 큰 섬이 있고, 대만(臺灣)을 섬에 포함한다면 섬의 크기가 만만한 나라는 아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섬다운 섬은 저우산(舟山)군도다. 약진하는 상하이(上海)·닝보(寧波)를 배후에 둔 저우산군도는 무려 1400여 섬으로 이루어진 다도해다. 저장(浙江)성 북동부 양쯔(揚子)강 이남 항저우(杭州)만과 동해 사이에 위치하며, 중심도시는 딩하이(定海)다. 북단은 성쓰(嵊泗)열도 화냐오산(花鳥山), 남단은 류헝다오(六橫島)다. 저우산다오·푸퉈산다오(普陀山島)·다이산다오(垈山島) 등 1390개의 섬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섬은 저우산다오다.


중국의 섬을 알려면 저우산군도를 모르고서는 불가하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저우산군도는 한반도에서 매우 가깝다. 가까운 만큼 고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역, 표류, 사신, 문화 전파 등 온갖 누적된 역사의 총량이 엄청나다. 한·중 문명 교류의 징검다리라고 부를 만하다. 한반도에서 정말 가깝지만, 의외로 한국인들이 잘 찾지 않는 저우산군도로 떠난다.

중국의 다도해 저우산군도


▎불긍거관음원의 누각. 낙산사의 누각도 이를 복사한 느낌이다.
저우산 해양의 역사를 제대로 알자면 닝보시부터 방문하는 것이 예의다. 예전에는 상하이에서 닝보로 가려면 항저우를 거쳐 돌아가야 했는데 다리가 놓였다. 장장 33㎞의 바다를 횡단하는 항저우만대교로 불과 2시간여면 닝보에 당도한다. 상하이가 외세열강에 의해 열린 개항도시의 대표 격이라면, 닝보는 중국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대표적 전통 무역항이다. 상하이에 와이탄(外滩)이 있듯, 닝보에도 서양인이 처음 출발하던 와이탄이 작은 규모로 존재한다. 양산(洋山)항이 상하이 소속이라지만 닝보의 앞바다이기도 하다. 세계 최대의 양산항과 중국 최고의 무역항이었던 닝보가 항저우만에서 역사적으로 조우하는 중이다.

닝보는 대외적으로는 19세기에 개항한 도시지만, 그 역사가 실로 오래되었다. 바오퉈뤄자쓰(寶陀洛伽寺) 등 관음신앙의 성지이기도 하고, 중국 어업의 본거지인 저우산열도가 앞바다다. 아열대성 기후로 따뜻하고 습한 날씨를 보이고 사계절이 뚜렷하다. 춘추시대에는 월(越)나라였다. 당(唐)나라 때는 명주로 불렸고, 남송(南宋) 때는 경원부, 원(元)에서는 남원부로 불렸다. 명(明)나라 시절에는 다시 명주로 불렸고, 청(淸)나라 때는 영파부로 불렸다. 지금도 영파부라는 이름이 사용된다.

당나라 시절에는 일본·신라·동남아시아의 배가 닝보를 자주 왕래했다. 송·원 때는 일본 승려가 이곳으로 유학했다. 신안해저유물선도 이곳 닝보에서 일본으로 가던 무역선이 목포 근해에서 좌초된 결과물이다. 중국·일본 간 교류가 활발했다는 증거들이다. 당나라 때는 시박사가 설치되었다. 명나라 때도 일본과 무역을 했지만 1523년 ‘닝보의 난’ 이후 일본 배의 입항이 불허됐다. 왜구나 해적이 이곳을 약탈하는 횟수도 늘어났다. 16세기에는 명나라로부터 교역을 거절당한 포르투갈 선박이 닝보와 저우산을 거점으로 밀수를 시작했다. 1842년 난징조약으로 개항하기에 이른다.

닝보와 저우산은 우리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고려의 바다는 언제나 열려 있었다. 오대(五代) 시기에는 고려의 해상이 중국으로 갔고, 중국 강남의 해상이 후삼국 여러 나라를 다녔다. 송상은 가까운 고려를 선호해 자주 왕래했다. 송상을 통해 선진 중국문명이 고려로 유입됐다.

닝보 시내에 위치한 고려사관을 찾아갔다. 1000년을 뛰어넘는 전통과 역사의 숨결이 그대로 이어져온다. 사신들이 드나들던 고려관을 아담하게 복원해 전시관으로 꾸몄다. 고려사관을 찾아가자면 당나라탑과 성벽을 보게 된다. 닝보가 고대 이래의 오랜 무역항이었음을 알게 된다. 고려사관이라는 명칭에서 반가운 마음이 든다. 사관에는 고려청·명주청·귀빈청 등이 있는데, 아래와 같은 문구가 입간판에 적혀 있다.

“중국과 한반도의 친선교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북송 시기에는 고려왕조와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어 쌍방은 공식 사절을 빈번하게 파견했을 뿐 아니라 민간 무역거래도 매우 활발했다. 정화 7년(1117) 송나라 조정은 명주에 고려사관을 건설해 사절들에게 왕래의 편의를 제공했다. 동해안에 자리 잡은 명주는 양국 사절 사이의 유일한 항구가 되었다. 고려사관은 우리나라 고대 대외교수사의 꽃이다. 또한 닝보 해상실크로드의 중요한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닝보는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닝보를 출발해 개경까지 다녀온 이후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남긴 한·중 교류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서긍은 1091년 태어나 32세에 고려를 방문했다. 1124년 송의 황제 휘종은 고려 예종이 죽자 전례에 따라 조의사절을 파견했다. 서긍도 사신의 일원이 되었다. 개봉에서 출발해 명주를 거쳐 저우산군도를 관통하여 황해로 해로를 타고 고려로 돛을 올렸다. 일행은 6월에 고려 해역으로 들어서 군산도에서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쓴 김부식의 영접을 받았다. 예성항에 당도하고 그 다음날 드디어 왕도 개성으로 들어갔다. 명주에서 개경까지 모두 합해 28일이 소요됐다.

서긍의 행로는 12세기 전반기에 고려와 송의 가장 안전한 공식 해로였다. 송 왕조는 사절을 파견할 때마다 이 해로를 이용했다. 당시 황해를 건너는 큰 배를 건조할 수 있는 기술이 명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서긍은 개성에 도착해 7월에 떠날까지 정확히 1개월간 고려의 역사·지리·궁전·제도·기명·풍속·민속·종교 등을 전 40권에 걸쳐 간결한 문체의 책으로 기술했다. 바로 이것이 <고려도경>이다. 당대 닝보와 고려의 항로에서 저우산군도가 두루 활용됐기에, 저우산군도는 한·중 교류의 징검다리였던 셈이다.

푸퉈다오 앞바다에는 ‘신라초’가


▎한반도 동해안과 저우산군도는 불연속적인 강렬한 끈을 지니고 있었다. 낙산사 홍련암의 스토리텔링이 그대로 옮겨간 듯한 저우산군도 바오퉈뤄자쓰(寶陀洛伽寺).
그렇다면 닝보와 저우산군도는 고려 이전에는 어떻게 이용됐을까? 저우산군도는 해양불교의 중요 거점이었다. 달마가 인도에서 바닷길을 따라 왔다면 여기서부터 다시 해로를 따라 북상해 난징(南京)으로 올라갔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연해의 주요 해항인 광둥(廣東)의 차오저우(潮州)나 푸젠(福建)의 장저우(漳州)·취안저우(泉州)·푸저우(福州)를 경유하고 다시 원저우(溫州)·밍저우(明州)·양저우(楊洲)를 거쳐 난징으로 들어가게 된다.

인도로부터의 불교 전파는 당연히 대륙과 해양을 두루 관통했다. 특히 남방으로부터 배를 타고 올라온 해양불교는 무역상인의 배를 타고 거침없이 섬과 항구를 공략하며 중국 연안은 물론 한반도까지 스며들었다. 어느 날 배가 당도했는데 그 안에 불경이나 불상이 실려 있어 그로부터 절이 시작됐다는 식의 연기설화는 한반도 해안가의 사찰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다. 국제정치와 외교, 종교와 장사는 어느 것이 먼저랄 것 없이 융·복합적으로 뒤섞여 고대·중세를 풍미했다. 불교도 예외가 아니다.

9세기 중엽, 관음도량이 세워질 때 이미 저우산군도 푸퉈다오 앞바다에는 신라 상인들이 드나들면서 이름 붙여진 ‘신라초’가 존재했다. 또한 푸퉈다오에서 고려도두(高麗道頭)가 새로 발견됨으로서 이 지역은 신라에서 고려시대로 교체되면서도 계속 한반도로 내왕하거나 혹은 재당 신라인 후예의 발길이 계속 이어졌던 사실을 알려준다. 푸퉈다오가 소속된 명주지역과 천태산 부근은 신라와 일찍부터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로 인해 이들 지역에는 신라와 관계 있는 지명이나 산명 등이 산재한다.

푸퉈다오는 신라의 의상대사가 머물다 관음신앙을 한반도로 모셔온 성지다. 낙산사 홍련암은 1400년 전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한 이래 낙산사를 관음보살의 상주처이자 제1의 관음성지로 자리매김하게 한 모태다.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이곳에 온 의상대사는 홍련암 부근에서 파랑새를 만나는데, 새가 석굴 안으로 들어가므로 이상히 여겨 굴 앞에서 밤낮 7일기도를 했다. 7일 후 바다 위에 홍련이 떠오르더니 관음보살이 나타났다. 홍련암이 그 위에 세워졌고, 낙산사 1400년 역사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 후 강화 보문사, 상주 보리암 등 바닷가 해수관음신앙의 씨앗이 되었다.


▎푸퉈현의 선자먼(沈家門)은 중국 최대의 어시장이다. 우리가 익숙하게 먹어온 어종이 대부분 이곳에서 잡힌다. 한·중 양국은 황해를 사이에 두고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수산물을 섭취해온 것이다.
관음은 뱃사람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해주는 생명의 손길이다. 관음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관음이 법화경을 소의 경전으로 하는 까닭은 재난 구제 때문이다. ‘큰바다로 들어갔을 때 흑풍이 불어 배가 표류해 멀리 나찰귀의 나라에 떨어지게 되었을지라도 모든 상인이 함께 소리 내어 나무관세음보살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면…’이라 하여 관음의 손길이 천 개 만 개로 뻗어 도움을 청하는 이들에 화답했다.

낙산사 홍련암과 쌍둥이 ‘불긍거관음원’


▎저우산 어민들은 해마다 조기잡이 철에 마조축제를 벌여 만선과 안전을 기원했다. 한국의 영광 법성포에서 단오 때마다 법성단오제를 지내는 것과 비슷한 문화현상이다. 마조묘에 모신 어선 모형.
홍련암 관음의 스토리텔링은 그대로 저우산군도 바오퉈뤄자산(寶陀洛伽山) 불긍거관음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양양 낙산사와 오늘의 항저우만 저우산이 불연속적인 강렬한 끈을 지니고 있었다는 뜻이고, 이는 관음신앙의 열렬한 전파력이 황해를 넘어 한반도 동해안까지 소통했음을 증거한다.

중국은 물론 한국·일본인이 두루 내왕하던 바닷길이었기에 관음신앙도 국제적으로 공유되고 유포되던 것은 분명하나, 신라초라는 암초 명칭이 남아있고 바로 거기에 관음원이 조성된 것은 신라인의 성과물로 간주해도 될 듯하다. 바닷가 절벽 위에 세운 불긍거관음원의 형세가 낙산사 홍련암과 거의 100% 일치하기 때문이다.

스토리뿐 아니라 공간 구성 자체도 일치한다. 절벽 위의 해수가 들이치는 계곡은 두 곳 모두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거친 파도가 단애의 계곡을 들이치는 험난한 공간 위에 암자를 세우고 관음의 현신을 기렸다. 관음원 바위에는 현신처라는 명명백백한 증거를 각인해 두었다. 낙산사 홍련암의 스토리텔링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일본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많은 구법승이 신라 상인의 배를 이용하던 당대의 해양력을 판단해본다면, 당시 저우산에 밀집했던 신라인 해양집단에 의해 불긍거관음원이 대대적으로 키워졌을 것이다. 일본 승려 옌닌이 장보고 선단을 이용해 중국으로 들어간 사실은 기록으로 잘 입증되고 있다. 저우산군도에서도 장보고 선단이 활동했을 것이다.


▎저우산의 마조묘에서 풍어를 기원하는 축제 중의 하나인 ‘월극’. 경극·곤극·천극과 더불어 중국 4대 전통극 중 하나다.
보타낙가산은 관음보살이 거주하는 산으로 포탈라카(potalaka)를 음역한 것이다. 화엄경 ‘입법계품’에 선재동자가 구도를 위해 세상을 돌아다니던 중 보타낙가산에 도착하는 구절이 나오는데, 바다에 접한 아름다운 곳이라 했다. 현장법사도 인도에 다녀와 스리랑카로 가는 바닷길 가까이에 이 산이 있다고 기록했다. 당대의 영향력이 대단하여 관세음보살 거주지는 곳곳에 등장한다. 바오퉈뤄자쓰 불긍거관음원은 인도로부터 북상한 관음신앙이 뿌리를 내린 메카가 된다.

바오퉈뤄자산 산록에 양 무제(502~549)가 세운 바오퉈위안(寶陀院)이 있고 영감이 가득한 관음상이 모셔져 있다. 관음거 앞에는 ‘신라초’라 부르는 조그마한 암초가 있다. 안내판에는 일본 화상 에카쿠이(惠萼)가 오대산에서 관음보살상을 얻어 이곳을 거쳐 귀국하다 신라초에 좌초됐다는 전설이 기술돼 있다. 서긍의 <고려도경>에는 이렇게 적어두었다.

“석교 위의 산록에는 숙량(肅梁)이 세운 보타원이 있고 전각에는 신령스런 관음이 있다. 옛날 신라의 상인이 오대산에 갔다 그 상을 조각해 싣고 본국으로 돌아가려 바다로 나갔으나 좌초해 배가 걸려 나아가지 않으므로 관음상을 바위 위에 내려놓았다. 승려 종악(宗岳)이 전각 안으로 모셔 들였더니 이후로 해상으로 왕래하는 이들은 반드시 나아가 기도함에 감응하지 않음이 없었다.”

저우산은 고대 해상교통로의 요지다. 한반도와 중국대륙을 오가는 사람들의 발자취를 두루 찾아볼 수 있는 항로의 요지다. 한국인은 물론 일본인도 두루 찾은 곳이다. 뱃사람의 안전을 구가하는 관음신앙이 대항해를 해야 하는 한국인·일본인 할 것 없이 수용된 것은 당연지사. 국제항로의 안전을 위한 국제적 연대에 의거해 만국 공통의 관음신앙 기도처가 저우산군도에 만들어진 것이다.

선자먼에서는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


▎저우산 사람들이 다황위(大黃魚)라고 부르며 가장 중시하는 조기. 건조 방식이 우리의 통굴비와 조금 다르다. 한·중 두 나라의 남획으로 황해에서는 해양생태계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저우산군도의 본섬은 비교적 큰 면적의 저우산다오다. 섬이 배처럼 생겼다고 해서 저우산이라 불렀으며, 중국은 저우산군도개발특구로 지정해 해양경제의 중심지로 부각시키는 중이다. 저우산다오(해안선 길이 85㎞)는 딩하이·다이산·푸퉈의 3개 현(縣)으로 이루어지며, 최북단 성쓰열도와 함께 저우산전구(專區)를 형성한다.

저우산군도는 중국 제일의 어장의 하나다. 조기·갈치·오징어·게·해파리·상어·병어 등의 수산자원이 풍부하다. 우리가 익숙하게 먹어온 어종이 대부분 이곳에서 잡혀 한·중 양국은 황해를 사이에 두고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수산물을 섭취해온 것이다. 딩하이에는 어업생산지휘부가 있고 푸퉈현의 선자먼(沈家門)은 중국 최대의 어시장이다. 만선의 깃발을 휘날리며 배가 들어오면 선자먼은 돈이 흔하게 돌아 ‘지나가는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다. 아무리 큰 어항이라고는 하나 시골의 도시인데 해외 명품가게까지 들어서 어민의 아내들이 비싼 가방을 사들이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그만큼 고기가 많이 잡히고 돈이 돈다는 뜻이다.

예전에 저우산에서 ‘돈 되는 고기’는 조기였다. 지금도 조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씨알이 작아졌고 어획량이 격감했다. 한국 어장에서 조기가 사라진 것과 같은 이치다. 법성포 앞바다 칠산 어장에서 본격 시작된 조기잡이는 충청도 방우리 어장을 거쳐 연평 어장에서 최다 어획을 자랑했다. 조기는 북상을 거듭해 압록강 하구의 대화도 어장에서 그해 어업을 종료했다. 일찍이 <세종실록지리지>에서 ‘토산은 석수어(조기)가 남쪽 연평평(延平坪)에서 나고, 봄과 여름에 여러 곳의 고깃배가 모두 이곳에 모여 그물로 잡는데, 관에서 그 세금을 거두어 나라 비용에 쓴다’고 했다. 조선 전기부터 조기떼가 대규모로 잡혔음을 말해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영광의 파시평(波市坪)과 더불어 황해도 연평평의 조기잡이가 등장한다. 그 많던 조기가 20세기 후반에 일제히 사라졌다.

저우산군도의 조기잡이 역시 한반도의 조기잡이 궤멸과 비슷한 경로를 밟았다. 조기떼 우는 소리가 사라진 지금, 그네들은 한국으로 먼 해외 출장을 나선다. 백령도나 흑산도 등 서해안에서 한국 어민과 마찰을 일으키고 해경이 출동하게 만드는 중국 어민이 바로 이들 저우산군도에서 출진한 어민들이다. 어장이 고갈되면서도 수산물 수요의 급증과 가격 상승은 저우산 어민들로 하여금 한국으로 ‘약탈어업’을 감행하게 만드는 중이다.

지극히 빠른 속도로 산업화·도시화가 촉진되는 저우산다오에서 그나마 전통적인 삶을 유지하는 탕다사리(塘大沙里) 어촌을 제주학센터 연구진과 함께 지난 4월 찾았다. 600~700 가구의 큰 마을. 마을은 200년 정도의 역사를 자랑한다는데, 어촌의 입지가 뛰어난 것으로 보아서는 실제로 더 오래전부터 살아왔을 것이다. 저우산군도에서 적어도 6000년 전부터 신석기 유적이 다수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해양생활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탕다사리 마을에서는 마침 ‘마조’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천후’라고도 불리는 마조는 중국 연안에 널리 퍼져 있는 최대의 품격을 갖춘 여신. 어민에게는 마조가 절대적 신으로 군림해 선박의 안전을 도모해주고 어업의 풍요를 보장한다. 저우산 어민들은 해마다 조기잡이 철에 마조축제를 벌여 신에게 경배하고 만선과 안전을 기원했다. 비록 조기잡이는 사라졌어도 그 풍습은 그대로 유전된다. 한국의 영광 법성포에서 단오 때마다 법성단오제를 지내면서 조기잡이의 한때를 즐기는 것과 같다. 비록 조기잡이는 사라졌어도 법성단오제가 열리듯 탕다사리 어촌사람들도 옛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웡쑹다오(翁松道·67)·스번중(史本忠·61) 두 어민의 증언을 통해 조기잡이 내력을 들어보았다.

저우산에서는 조기를 다황위(大黃魚)라고 부른다. 지금이야 선단을 몰고 멀리 원해까지 나가야 고기를 구경할 수 있지만, 워낙 고기가 흔하던 시절에는 그냥 앞바다에서 낚았다. 조기를 낚는 시기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봄인 4월이 중요하다. 꽃피는 봄날에 조기떼 울음소리가 저우산열도를 시끄럽게 채웠던 것. 8월에도 한 차례 더 조기를 잡았다. 출항하기 전에는 배에서 제를 지내고 마조신묘에 와서 아낙들 중심으로 마조여신을 모셨다. 음력 3월 23일~4월 4일(2017년 4월 19~29일) 축제를 벌인다. 마침 그 마을을 찾아갔을 때가 축제 기간이었다. 저장지역의 ‘월극(越劇)’은 마조에게 바쳐 그날을 경축하기 위한 제의의 하나다. 음력 3월 23일(첫 날) 제사를 크게 하고, 월극 행사를 진행했다.

옛 월나라 땅에서 벌어지는 월극은 중국 강남지방에서 유행하는 지방극이다. 저장성 농촌에서 기원했다. 월극은 경극·곤극·천극과 더불어 중국 4대 전통극 중 하나다. 그 전통이 가장 짧아 2006년에야 100주년 행사를 벌였다. 여성 배우들을 출연시켜 섬세한 감정 처리에서도 두각을 보였다. 탕다사리 마을에 초청된 월극의 여주인공은 ‘런민화’를 뽑아 들고 연신 재복을 구하여 복을 나누어주었다. 주로 노인층으로 이루어진 관중은 돈을 갖다 바치며 배우로부터 축복을 받았다.

마조묘 제사에서는 9명의 제관이 대표로 주관하고, 승려를 초청해 불경을 읽는 등 무속과 불교가 융합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바치는 음식은 수십 가지에 달하는데, 과일·곡물·돼지머리를 올린다. 돼지는 통으로(10근) 올리고, 거위 등을 올리기도 한다. 이러한 상차림을 팔선탁(八仙桌)이라고 부르는데, 마조 제의나 결혼 등 큰 행사가 있을 때 차린다.

한·중 양국의 조기잡이는 닮은꼴


▎세계 어디서나 수산물 처리는 여성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듯하다. 선자먼 어시장에서 꽃게를 분류하는 아낙들.
조기잡이 전통이 단절된 지금에도 이러한 오랜 풍습은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이런 것을 보면 한반도의 서해안 어민이나 저우산 어민이나 나라가 다를 뿐 조기를 매개로 거의 유사한 생활풍습을 이어온 셈이다. 이런 어민들의 풍습은 유사무서(有史無書)의 역사인지라 정확한 맥락이 남아있지 않지만, 적어도 양국의 바닷가 사람들이 살아온 이래의 오래된 풍습일 것이다.

저우산에서는 중선배를 이용하는 한국과는 조금 다르게 조기를 잡는다. 보통 출항할 때 배 3척이 팀을 이룬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배 1척, 작은 배 2척, 총 12명의 어부가 승선한다. 고기는 어망을 실은 작은 배 2척이 그물을 끌면서 조업하며, 어획한 고기는 큰 배인 모선에 싣는다. 조기 잡을 때는 멀리 나가지 않고 가까운 해안에서 작업했는데 배가 가득 차면 돌아오는 식이다. 아무리 길어도 조업기간은 한 달을 넘기지 않았다. 기계배가 등장하기 이전인 풍선배 조업방식이다. 60여 년 전, 1960년대 초반까지 이런 식으로 조업하다 공식적으로는 1967년 기계배가 보급되면서 멀리 나가게 되었다. 그 시기 이후 조기가 남획으로 소멸되기 시작해 40여 년 전인 1980년대부터 사라졌다.

어민 웡쑹다오는 제주 어장까지 가서 고기를 잡던 추억을 증언했다. 제주 근해에서 조업하다 바람을 피해 제주도로 피항한 추억도 전한다. 오늘날 제주도 남녘 이어도 어장에 중국 배들이 몰려오는데 그 조업 전통이 저우산 지역의 문서기록으로는 1985년부터로 기록돼 있다. 잡아들인 조기는 개방화되기 전에는 국가가 전매하는 형식이었다. 조업해온 조기를 바로 국가에서 2~3일 내에 가져갔다. 가공법은 우리의 굴비 만들기와 다르게 배를 갈라 소금을 뿌리고 햇볕에 말리는 단순 염장 건조다. 한국의 굴비 가공법이 훨씬 선진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말린 조기는 비싼 기격에 팔린다. 조기는 황금빛을 띠기 때문에 황금을 선호하는 중국인들에게 고가로 팔린다. 조기를 사랑하는 오랜 식생활을 한·중 양국이 공유하는 셈이다. 한국에서는 조기가 ‘제사상에 올라 절 받는 생선’으로 여전히 사랑받는다.

해양문명이란 어떤 거창한 것만으로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관음신앙 같은 종교문화가 거대한 사찰과 불상, 신앙교리 등으로 무장하고 황해의 해양문명으로 전파되어갔다면, 어로기술이나 음식문화 등은 일상의 생활문화로 하부 단위에 뿌리를 내렸다. 조기가 황해에서 잡힌 역사는 인류의 역사로부터 함께 시작되었을 것이고, 송나라 이래의 마조신앙이 남쪽으로부터 저우산군도까지 확산되면서 축제문화와 연결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중이다. 한·중이 언어는 달라도 조기라는 생선을 매개로 공통의 문명을 이어온 것이다.

저우산다오를 떠나기 전에 선자먼 어시장에 들렀다. 어판장에서는 아낙들이 엄청난 양의 새우와 꽃게 등을 분류하고 있었다. 세계 곳곳에서 수산물 처리는 여성의 힘으로 이루어진다. 중국의 어장이 고갈됐다고 하지만 막상 어시장을 살펴보면 우리보다 상태가 나쁜 것도 아니다. 분명한 것은 남획이 이루어지는 중이라는 점. 한·중 두 나라의 남획으로 황해에서는 해양생태계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다만 중국은 엄청난 양과 질 높은 양식기술로 이를 대체하고 있다.

저우산군도는 해양관광의 메카로 부각되는 중이다. 한국의 도서도 많은 관광객을 끌기 위해 여러 해양문화 인프라를 들여오는 등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는데, 그러한 점에서는 다이산다오를 주목한다. 저우산 본섬에서 불과 30여 분 거리의 다이산다오는 주된 소금 생산지로 일찍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다이산다오를 둘러보면 왜 중국이 저우산군도를 해양경제, 해양문화의 메카로 만들고 있는지 적실하게 볼 수 있다. 작은 섬에 무려 다섯 개의 박물관이 포진한 독특한 모습을 만나게 된다. 이들 박물관은 다이산다오와 저우산군도의 해양방어의 역사, 어업의 역사, 소금의 역사, 등대의 역사, 태풍의 역사라는 각각 다른 주제로 섬의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궤적을 전시한다. 이들 현대적 박물관을 통해 저우산군도의 해양문명사적 궤적과 위상을 읽어낼 수 있다.

작은 섬에 무려 5개의 해양 관련 박물관


▎중국의 유명한 소금 생산지로 일찍이 알려져 있는 다이산다오의 염업박물관. 이곳의 염전은 한국의 염전과 거의 비슷한 형식을 갖추었는데, 중국 산둥반도의 선진 기술이 도입돼 한국의 천일염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소금상인의 창고건물을 개조한 중국어업박물관을 먼저 들렀다. 어민의 풍어를 기원하는 종이 오리기 공예가 특이하다. 박물관은 전통가옥을 개조한 수준으로 어로도구를 모아놓고 근해에서 잡히는 수산물을 전시했다. 어선을 육지로 끌어올릴 때 쓰는 장비인 다오주(捣臼), 석회와 기름을 섞어 어선의 틈새를 메우는 용도로 쓰는 푸디후(扶地虎)가 마당에 놓여 있어 눈길을 끈다.

다이산다오에서는 곳곳에서 염전을 볼 수 있다. 이 섬 역시 산업화의 물결 속에 염전이 아파트나 공장 등의 부지로 바뀌는 중이지만, 여전히 염전은 많이 남아 있다. 염전박물관과 다이산베이옌창(岱山北鹽場)을 찾았다. 한국의 염전과 거의 비슷한 형식으로 갖추어져 있다. 한국의 천일염이 중국 산둥반도의 선진 기술이 도입돼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천일염전을 일본의 영향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천일염전은 중국이 훨씬 선진 기술을 갖추고 있었다.

천일염, 즉 볕소금을 만드는 노동자는 옌궁(鹽工), 책임자는 창창(場長)이라 부른다. 한국과 달리 별도의 소금창고 없이 그대로 포대기로 덮은 상태로 보관한다. 염전에서 생산된 소금은 정부가 수매한다. 중국에서는 여전히 소금전매제를 시행 중이다. 옌궁의 생활수준은 1년에 3만 위안 미만(한 달에 2000~3000위안) 정도다. 사회주의 개혁개방 이후 생활 수준은 조금 나아진 정도다.

다이산다오에는 독특하게 태풍박물관도 있다. 저우산군도는 태풍의 길목이다. 태풍의 원리, 태풍의 길, 태풍 예측 시스템 등 태풍 관련 과학기술 위주의 박물관이다. 늘 태풍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섬의 생존 조건을 근간으로 이런 박물관을 꾸렸다는 것 자체가 인상적이다. 물론 디스플레이 수준이야 그야말로 ‘중국적’이라서 성에 차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이 같은 박물관을 구상하고 건립한 것만으로도 태풍이 심한데도 그러한 시설조차 없는 제주도와 비교된다. 기후변화와 태풍 등은 해양의 미래 전망과 직결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등대를 주제로 한 유일한 박물관


▎저우산 본섬에서 불과 30여 분 거리의 작은 섬 다이산다오에는 무려 5개의 박물관이 들어서있다. 이들 박물관을 통해 저우산군도의 해양문명사적 궤적과 위상을 읽어낼 수 있다. 다이산다오의 등대박물관.
다이산다오에는 해방박물관도 있다. 해양의 방어는 고대 이래, 특히 왜구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매우 중요한 국가전략적 목표였다. 옛 군부대 막사와 벙커를 개조한 듯한 느낌의 박물관은 개항 이래 외국과의 접촉과 전쟁에 따른 중국해방사를 전체적으로 개괄한다. 저우산군도를 거쳐 상하이로 들어갔던 외국 해양세력의 역사를 통해 저우산군도의 전략적 가치를 설명한다. 실제로 저우산군도에는 저장해양대학이 있어 해양수산학의 거점으로, 그리고 강력한 해군기지가 존재해 전략적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다이산다오의 다섯 번째 박물관은 중국에서 등대를 주제로 한 유일한 박물관이다. 서양식 등대 건축물을 그대로 복사해 실물 크기로 박물관을 만들었다. 강변에 6개의 실물 크기 등대 모형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워 해양경관을 연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세계등대총회를 기점으로 2005년 7월부터 준비해 개관했다. IALA(국제항로표지협회)와 직결된 국제적 등대 명소로 부각되어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IALA는 비영리를 추구하는 국제적 기술 연합체다. 전 세계의 항해행정기구나 단체 등을 결집시키고 있으며, 그들의 경험과 성과물을 공유하게끔 한다. IALA의 등대 보존 매뉴얼은 공식 위원회의 오랜 만남과 토의의 결과물다.

다이산다오는 상하이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등대의 국제적 역할을 감당하기에 적당한 위치다. 이곳에 등대박물관을 만들어 국제 등대 명소로 부각시켜 놓았다. 2018년, 저우산군도 건너편 인천항에서 IALA세계대회가 열린다. 전혀 무관한 인천과 저우산군도가 황해를 사이에 두고 등대를 매개로 연결되는 중이다.


주강현 - 제주대학교 석좌교수, 아시아퍼시픽 해양문화연구원장. 해양사·문화사·생활사·생태학·민속학·고고학 등 전방위로 연구해온 우리 시대의 대표적 ‘지식 노마드’이자 비교해양문명사 연구에 몰두하는 해양문명사가. 아시아 바다는 물론 대양의 섬으로 시야를 넓혀가며 비교해양문명사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적도의 침묵><독도강치 멸종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asiabada@daum.net

201706호 (2017.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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