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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획] 새 대통령이 조선시대 경연(經筵)에서 배워야 할 것 

공부하고 소통해야 ‘공론의 정치’ 이룬다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조선시대 경연은 나라의 성쇠를 보여주는 지표로 작동…통치자의 학습은 윤리 아닌 실천 차원에서 추구돼야

경연이 아무리 좋은 제도였다 해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소통-학습-공론의 중심축이었던 경연은 그 시대 사람들의 안목과 식견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모습으로 재현될 수 있다. 그 장치를 작동시키지 못하면, 새 정부는 결코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다.


▎ 사진제공·일러스트·이지희
2015년 1월 12일, JTBC 저녁뉴스에 다음과 같은 보도가 있었다.

앵커= 박 대통령은 국정운영의 걸림돌로 지적돼온 ‘불통 논란’에 대해서도 사실이 아니라며 ‘소통에 큰 문제는 없다’는 취지로 말했습니다. 장관들의 대면보고가 적은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서는 오히려 “대면보고가 필요하냐”고 되물어, 현격한 인식의 차이를 드러냈습니다. 이OO 기자입니다.

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이나 장관들로부터 좀처럼 대면보고를 받지 않는다는 건 대표적 불통 사례로 꼽힙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전화나 문서보고 방식으로도 충분하다고 반박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옛날에는) 전화도 없고 이메일도 없었지만 지금은 여러 가지 그런 게 있어서 어떤 때는 대면보고보다는 전화 한 통으로 빨리빨리 해야 될 때가 더 편리할 때가 있습니다. 대면보고를 좀 더 늘려가는 방향으로 하겠습니다만 (배석한 장관과 수석들을 돌아보며)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흐흐흐.(앉아있던 장관과 비서관들도 해맑게 같이 ‘흐흐흐…’ 웃었다)

역사를 통해 고찰한 바에 따르면, 이렇게 군주가 동의를 구할 때 ‘흐흐흐…’ 하고 맞장구치는 신하는 대부분 간신(奸臣)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현실 속의 대한민국 장관과 비서관들 중 상당수가 간신이었음이 드러났고, 이렇게 ‘대면보고가 필요하지 않았던’ 정권이 어떻게 끝났는지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다.

내가 이 장면을 기억하는 이유는 마침 경연(經筵)에 대한 책을 쓰고 있어서였다. 이런 국정인식과 시스템은 지금부터 살펴보려는 바람직한 국정운영의 역사적 경험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그것은 국정의 소통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갖는가, 그 소통의 깊이와 안목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이는가의 문제와 관련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국정 담당자들의 의지로 개혁할 수도 있고, 제도와 문화라는 조건을 혁신해 나아질 수 있는 폐습(弊習)이지, 고치지 못할 유전자도 아니고 민족성 따위도 전혀 아니다.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에 있어야 ‘국태민안’


▎5월 10일 오전 국회에서 취임식을 마친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국회대로를 지나며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 사진제공·청와대사진기자단
‘소통’이 한 사회의 주요 키워드로 떠오른다는 것 자체가 그 사회가 ‘불통’이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경연의 소통은 옛 고전(古典)에 근거한다. 소통의 논리는 <주역>의 ‘태괘(泰卦)’에 있다. <태괘>는 상하 소통의 표상이며, 경연의 상징이었다. 지천(地天 ) 태(泰)다. ‘지천(地天)’이란, 땅을 나타나는 곤(坤)괘와 하늘을 나타내는 건(乾)괘로 이루어졌다는 말이고, 땅이 위에, 하늘이 아래 있다는 뜻이다. 땅과 하늘로 이루어진 괘가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천지(天地 ) 비(否)괘로, 하늘이 위에, 땅이 아래에 있다. 어떤 괘가 안정되고 편안하게 느껴지는가?

예상과는 달리,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에 있는 지천의 괘가 태(泰), 즉 편안하다, 번영한다는 뜻이 된다. ‘나라는 번영하고 인민은 편안하다(國泰民安)’고 할 때의 그 ‘태’ 자다. 언뜻 보면, 땅이 아래에 있고 하늘이 위에 있어야 태(泰)일 듯한데, 옛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에 있어야 운동(運動)이 시작된다고 보았고, 편안함은 그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비(否) 괘는 비(非)-소통의 괘인데, 여기서 비(否) 자는 ‘부’로 읽지 않고 ‘막혔다’는 뜻의 ‘비’ 자로 읽는다. ‘남북관계가 비색(否塞)되었다’고 할 때의 그 비다. 땅은 아래에서 땅대로 놀면서 하늘은 상관하지 않고, 하늘은 위에서 하늘대로 놀면서 땅은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운동이나 변화가 있을 리 없다.

지천 태 괘는 바로 소통의 논리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의 말을 듣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듣기 싫은 충언을 그치지 않는 것이 그 근본이었다. 이와 달리, 막힌 조직이나 사회의 특징은 윗사람만 말하고 아랫사람은 듣기만 한다. 이제 짐작했겠지만, 태 괘가 보여주는 우주적 원리가 정치사상이자 제도로 표현된 것이 경연이다.

태 괘의 우주론적 원리를 제도화한 데는 하나의 차원이 더 있다. 그 차원을 이해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화가 있다. 중국 진(秦)나라의 혼란에 이은 한(漢)-초(楚)의 쟁패 결과, 유방이 천하를 얻었다. 바로 그 뒤의 장면이다.

육가(陸賈)가 말했다.

“이제 학문을 익히셔야 합니다.”

한(漢) 고조(高祖)는 그 말대로 책을 읽었는데, 전쟁터를 달리던 그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달쯤 따라가던 한 고조는 책을 탁 덮었다.

“나는 글을 모르고도 세 척 칼을 들고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는데 이까짓 학문이 무슨 소용인가?”

육가가 맞받았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으나, 말 위에서 천하는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可馬上取天下, 不可馬上治天下)”

순간 싸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역린(逆鱗)을 건드리는 발언이었다. 짧은 순간이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고조의 차분한 음성이 들렸다.

“경의 말이 옳소. 내 생각이 짧았소. 다시 시작하리다.”(<사기> 권97 ‘육가열전(陸賈列傳)’)

여기에는 두 가지 메시지가 있다. 첫째, 육가의 말대로, 전쟁이나 혁명으로 천하를 얻는 것과, 그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다르다는 점이다. 둘째, 이 일화가 군주는 공부해야 한다는 전통의 기점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한 고조에게 요구한 학습, 이것이 나중에 경연으로 발전한다.

경연을 초역사적 존재로 인식해선 안 돼


▎국민에게 거듭 사과했지만 불통 대통령의 오명을 쓰고 결국 구속된 박근혜 전 대통령.
전쟁과 달리 ‘다스림’은 일상의 회복이다. 리듬이 있고 예측돼야 한다. 그러려면 천하를 ‘이해해야 한다’. 그렇기에 나라를 얻는 것과, 나라를 다스리는 문제는 다르다고 한 것이다. 우선 백성의 일상생활이 유지돼야 한다. 일상의 안정 속에서 경제적·생물학적 생산·문화활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경제활동이란 먹고 사는 일이다. 내년, 후년에도 농사를 지으며 살 수 있다는 예측이다. 생물학적 활동이란 자식을 낳고 길러 종족이 유지되도록 하는 일이다.

그래서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한 기획, 계획, 조정, 분담, 협력 등이 필요해진다. 이 일상의 유지를 한마디로 하면 ‘제도’다. 이를 육가의 표현대로라면, 말 위에서는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당연히 무(武)에서 문(文)으로 중심이 옮겨가는 것이다. 문치(文治)는 바람직한 어떤 것이기 이전에 나라가 유지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그러므로 이를 위한 학습=경연은 어떤 고매한 정치이상이나 정치윤리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이런 구체적 필요성, 그 필요성을 해결해가는 실천의 하나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경연을 윤리 차원의 문제로만 접근하면 자칫 초역사적 해석,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하는 식의 허전한 자기만족에 그칠 위험이 크다.

육가가 말한 ‘말 위’가 혁명이나 전쟁이고, ‘말 아래’가 교육이다. ‘혁명’과 ‘교육’은 근대 유럽의 언어, 그러니까 ‘레볼루션(revolution)과 에듀케이션(education)’의 번역어이고, 동아시아 전통의 표현으로는 ‘역성(易姓)’과 ‘공부(工夫)’다. 경연의 공부에 대한 다음 서술을 보자.

“스스로 현인(賢人)에게서 공부하고 몸 가까이의 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저 멀리에 있는 일까지 사정을 잘 알고 주도면밀하게 정치할 수 있다면 그는 민중의 마음을 얻어 다투어 자재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지만, 진정 민중의 마음을 감화시키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할 것이다.

정치를 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민중을 감화시키고 훌륭하고 아름다운 풍속을 만들어가려면 반드시 배움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옥도 갈아서 광택이 나게 하지 않으면 보석으로 쓰일 수 없는 것처럼, 사람도 배워서 사물의 도리를 습득하지 않으면 재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옛 성인이 나라를 세우고 백성에 임하면서 먼저 교육과 배움에 의지했던 것이다.”(<예기(禮記)> ‘학기(學記)’>

이 인용문 중 “진정으로 민중=백성을 감화=변화시키고 훌륭하고 아름다운 풍속=문화를 만들어가려면 반드시 배움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선언이 중요하다.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문명을 이루어 나가려면 배워야 한다는 강력한 선언이기 때문이다.

경연이 제도화된 데는 이런 일반론 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다. 조선시대 왕정(王政)을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것이, 국왕만 세습이고 나머지는 다 시험에 합격해 공무원이 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문과나 무과에 붙은 양반뿐 아니라, 의과(醫科)나 역과(譯科) 같은 잡과도 마찬가지다. 일부 공신 자손 등 지금으로 치면 국가유공자의 특채인 음서(蔭敍)도 있었지만 이미 관료제가 자리 잡았으므로 시험이 우선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왕과 신하의 세미나 마당인 경연은 ‘실력이 검증된 신하’들과 국왕의 지적 수준을 맞추는 장치이기도 했다.

선조의 실언에 침묵하지 않았던 율곡


▎경복궁 근정전의 위용. 조선은 국왕의 공부의 장인 경연을 제도와 문화 속에 확고히 구현하였던 나라였다.
평화로운 나라를 이끌어나가기 위한 학습=공부인 경연을 제도와 문화 속에 확고히 구현했던 나라가 조선이다. 다음은 그 진면모를 보여주는 사례다. 북방 대비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국왕 선조의 실언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조선 정치가들의 기상과 논리, 그들이 도달한 격조를 가늠할 수 있다.


▎강릉 오죽헌 입구에 있는 율곡 이이의 동상. 율곡은 신하들과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선조에게 시정을 간언, 그 뜻을 관철시켰다.
1575년 선조가 즉위한 지 8년째 되던 해 9월 어느 날, 집의 신점(申點)이 말했다.

“북방이 텅 비어 오랑캐 기병이 쳐들어온다면 막아낼 계책이 없으니 미리 장수를 선택해 기르십시오.”

선조(宣祖)가 말했다.

“조정에 큰소리치는 사람이 많으니 오랑캐 기병이 오거든 큰소리치는 사람을 시켜 막을 것이다.”

문정왕후에 기생했던 구 기득권 세력이 남아 있던 때, 아직 사림(士林)들이 경륜과 전망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을 때, 대안이 부족한 사림들의 주장에 다소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선조는 말실수를 했다. 이 말을 들은 이이(李珥)가 말했다.

“주상께서 말씀하신 ‘큰소리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을 지목하신 것입니까? 큰소리만 치고 실속이 없는 자를 지목하시는 겁니까? 그런 사람을 쓰면 반드시 일을 그르칠 것인데, 어찌 그 사람을 시켜 적을 막게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만일 역사의 경험을 존중하고 배우려는 사람을 큰소리치는 사람이라고 하셨다면 주상의 말씀이 극히 온당치 못합니다. 맹자(孟子)는 자질이 부족한 양혜왕이나 제선왕을 만나서도 오히려 요순(堯舜)의 정치를 목표로 삼으라고 했는데, 이것도 큰 소리를 좋아하는 것입니까?”(이이, <경연일기(經筵日記)>)

율곡은 선조의 실언에 침묵하지 않았다. 그는 두 방향에서 비판했다. 첫째, 선조의 발언은 북방 대처라는 실제 목적에 적합하지 않은 견해라는 점. 둘째, 바람직한 이상을 추구하는 일을 큰소리친다고 비아냥거렸다는 점. 율곡은 선조의 실언에 담긴 위험성을 실무 차원-태도 차원에서 비판했는데, 이렇게 치고 들어오면 반론이 어렵다. 율곡은 거기에 우려를 더한다.

“임금의 말이 한번 나오면 사방으로 전파되어, 옳지 못한 일이라면 천 리 밖에서도 왕명을 거역하는 법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학자를 큰소리나 치는 사람이라고 지목해 북쪽 변방으로 보내려고 하시면, 훌륭한 사람은 기운이 꺾이고 못난 자는 자기에게 관직이 돌아올까 봐 갓을 털며 좋아할 것입니다. 임금의 발언이 선한 사람을 좌절시키고 악행을 저지르는 자를 기쁘게 한다면 어찌 그릇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임금의 잘못된 말이 가져올 결과에 대한 충언이다. 천 리 떨어진 곳에 사는 백성도 잘못된 임금에게는 등을 돌리는 법이라는 것, 나아지려는 노력을 그만둘 때 결국 조정은 사리사욕에 찬 자들로 가득하리라는 것. 율곡의 충언에 선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후 선조는 한결 신중해지고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 선조 역시 만만한 왕재(王才)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경연을 담당했던 관청은 집현전·홍문관이다. <경국대전>에는 이들이 하는 일을 ‘경서와 역사서를 공부하면서 국왕의 고문에 대비한다(講論經史, 以備顧問)’고 했다. 집현은 모을 집(集), 어질 현(賢), 훌륭한 사람들을 모아놓은 관청이라는 뜻이다. 집현전을 이은 홍문관도 넓을 홍(弘), 글월 문(文), 문치를 넓히는 관청이라는 뜻이다.

정치문서를 근(斤)으로 달아 처리했던 진시황


▎조선시대 경연을 담당했던 관청은 집현전, 홍문관이었다. <경국대전>에는 이들이 하는 일을 “경서와 역사서를 공부하면서 국왕의 고문에 대비한다”고 규정했다.
연구와 고문을 담당하는 집현전과 홍문관에서 주관하는 세미나 자리가 ‘경연’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국무회의에서 대통령과 비서·장관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공부하는 것이다. 정책 회의만이 아니라 말 그대로 공부, 예를 들어 <논어> <맹자> <시경> <서경>을 읽었다. 경제로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나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었던 것이다. 교육정책에 대한 토론만이 아니라 루소의 <에밀>을 읽은 셈이고, 종교정책에 대한 논의만이 아니라 <성경>을 읽은 것이다.


▎ 사진제공·일러스트·이지희
수양대군(세조)은 단종을 내쫓고 경연 관청인 집현전을 폐지했다. 집현전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운동이 전개됐기 때문이다. 예종은 예전 집현전과 같은 관청을 두려고 했고, 성종 9년에 홍문관이 설치됐다. 왜 집현전이라고 하지 않고 홍문관이라고 했을까? 세조가 성종의 할아버지인데, 그대로 집현전이라고 하면 할아버지의 ‘행적’, 집현전 폐지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홍문관도 연원이 오래된 이름이다. 당나라 태종이 진왕(秦王)으로 있을 때 주변에 능력 있는 사람들을 모아 공부를 했는데, 그곳을 홍문관이라고 불렀다. 홍문관은 태종의 싱크탱크였다.

하나 더. 집현전과 홍문관은 국왕의 사적(私的) 영역이 국정에 개입하는 것을 제한하는 제도였다. 조선의 건국자들은 국왕의 친척인 종실(宗室)이나, 사사로운 권력으로 흐르기 쉬운 환관(宦官)이 조정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했다. ‘환관과 첩’을 가까이하면 정무에 게을러지게 마련이라는 역사적 경험 때문이었다.

국왕은 갖가지 일, 만기(萬機)에 최종적 책임을 졌다. 살피고 고민할 일이 많다. 그 많은 정무를 보고 경연도 해야 하고? 그게 아니다. 혼자 처리하려면 어렵지만, 여럿이 의논해 처리하면 쉽다. 혼자 국정을 처리하려던 진시황(秦始皇)은 정치 문서를 근(斤)으로 달아 처리해버렸다. 결과는? 20년 만에 망했다.

경연에 대리출석을 명했던 연산군


▎경북 안동 한국국학진흥원에 보관된 조선시대 목판 유교책판. 2014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지정됐다.
경연처럼 군신(君臣)이 만나는 정례 세미나가 있으면 거기서 서로 논의해 처리하면 된다. 어차피 영의정을 비롯한 관료들이 참석하게 마련이기 때문에 국무회의를 따로 열 필요가 없다. 학술 세미나도 하고 국정도 논의하고. 세종 이후 단종(端宗)이 즉위한 뒤 경연 횟수, 시간 등에 대한 규정이 다음과 같이 마련되었다.

1. 매일 아침 강의에 대간(臺諫)·사관(史官) 각 1명, 낮 강의와 저녁 강의에는 사관 1명이 참석한다.

1. 영경연관(領經筵官)을 접견하는 날은 익선관(翼善冠)·백의(白衣)·오서대(烏犀帶)를 갖추고 나아가고, 평상시에는 편복(便服)을 입고 나아간다.

1. 아침 정무보고가 있는 날에는 낮 강의는 없애고, 매일 저녁 강의에는 예전 배운 것을 익힌다.

짧은 규정이지만 하나씩 보면 재미있다. 첫째, 아침·점심·저녁 하루 세 번 공부하는 삼강(三講) 제도가 마련되었다. 대간과 사관이 참석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관리 감찰과 언론을 맡은 대간, 경연 장면을 기록으로 남기는 사관이 꼭 배석하게 한 것이다. 대간은 경연 석상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관리를 탄핵한다. 사관은 기록한다.

요즘 직장에도 휴가가 있고, 학교에는 잠시 쉴 수 있는 방학도 있는 것처럼, 경연에도 방학이 있었다. 상중(喪中)이거나 공부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국왕의 건강이 좋지 않을 때는 경연을 쉬었다. 또 한여름 삼복더위 때는 공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성군(聖君)이 되기 위해 경연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었다.

이런 제도에 익숙해지려면 어렸을 때부터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세자도 공부했다. 서연(書筵)은 세자, 즉 장차 국왕이 될 왕자를 교육하는 제도다. 청소가 모든 공부의 기본이고, 아침에 일어나 이불 개고 세수하는 것부터 배웠다. 서연을 담당하는 관서를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이라고 했다. 시강원의 사(師)는 영의정이 맡고, 부(傅)는 좌·우의정이 나누어 맡았다. 흔히 우리가 ‘싸부님’ 할 때의 사부가 바로 여기서 보는 ‘사’와 ‘부’를 합한 말이다.

이러한 경연의 성격 때문에 경연은 곧 나라의 성쇠를 보여주는 지표 역할을 했다. 그 사례를 살펴보겠다. 먼저 ‘폭군(暴君)’으로 역사에 남은 연산군. 홍문관에서 경연을 열자고 하자 연산군은 아파서 침을 맞아야 한다고 미루었다. 다음 기사를 한 번 보자.

“연산군=홍문관으로 하여금 내시 김순손(金舜孫)에게 <강목>을 가르치게 하라.

부제학 박처륜(朴處綸), 응교 홍한(洪瀚), 교리 권오복(權五福), 박사 이관(李寬), 저작 송흠(宋欽)=김순손이 가지고 온 <강목>은 첫 권이 아니고 곧 전하께서 전일 서연에서 강의 받으시던 권인데 지금 그것을 배우게 하시니, 신들은 전하의 하시는 일을 모르겠습니다. 또 신들이 모두 경연의 직임을 맡고 있거니와, 환관을 가르치는 일이 어찌 저희의 직책이겠습니까? <강목>은 정치하는 데 관계되는 중요한 책이오니, 빨리 경연에 납시옵소서.

연산군=나도 빨리 경연에 나가려 하나 발병이 아직 낫지 않았을 뿐이다. 김순손에게는 <강목>을 가르치지 말라.”(<연산군일기> 1년 5월 14일)

<강목>, 그러니까 <자치통감강목>은 앞서 홍문관에서 경연 교재로 삼자고 했던 것인데, 첫 권이 아니라 세자 때 배우던 권을 가져갔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경연에 내관 김순손을 대신 보냈다. 대리출석. 당시에도 대리출석이란 게 있었는지 모르지만, 조선 경연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국왕인 연산군이 아니라 내시 김순손이 <강목>을 들고 경연청에 들어오던 장면을 생각해보자. 경연관들이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재위 16년간 경연을 연 것이 10일에 불과”


▎광해군의 기록되지 않은 15일을 토대로 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이병헌이 분한 광해군. 광해군은 재위 16년 동안 경연을 연 것이 10일에 불과했던 왕으로 기록돼 있다.
연산군이 실제로 발병했는지는 모른다. 흥미로운 것은 예나 지금이나 공부하기 싫으면 아프다고 한다는 사실이다. 연산군은 아프다며 경연에는 나오지 않으면서도 잔치에는 꼭 참석했다는 사실도 함께 알아두면 좋다. 연산군이 남긴 시도 함께.

“기침 번열이 잦고 피곤한 기분 계속되어(咳深煩多困氣緜)
이리저리 뒤치며 밤새껏 잠 못 이루네(耿耿終夜未能眠)
간관들 종묘사직 중함은 생각하지 않고(諫官不念宗社重)
소장을 올릴 때마다 경연에만 나오라네(每上疏章勸經筵)”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폐위됐다. 광해군대는 경제개혁인 대동법 실패, 국가 재정을 바닥낸 궁궐 토목공사, 민심이 반으로 총체적 국정난맥상을 노출했던 시대다. 그 결과 대명, 대후금 외교도 그때그때 미봉책으로 대응했다. 식민지시대 이후 일부 학자가 주장하듯 중립외교가 아니라 기회주의 외교였다.

즉위 초 경연 관청인 홍문관은 광해군에게 경연을 열어 정무를 보자고 건의했다. 광해군은 “내가 슬프고 괴로운 나머지 기력이 편치 않고 더위가 한창 극심하니 묻지 말라”고 대답했다. 훗날 사관은 이날 <광해군일기>에 “이것이 정무를 보지 않는 시초가 되어 재위 16년 동안 경연을 연 것이 10일에 불과했다”고 적어놓았다. 뭔가 좀 불길하지 않은가?

홍문관에서는 추울 때는 경연에 나오지 않아도 좋으니 따뜻한 날만이라도 나와서 공부하자고도 건의했다. 그럼 따뜻할 때는 경연에 나왔을까? 불행히도 아니었다. 사관은 또 이렇게 말했다.

“상이 즉위한 이래 한 번도 정사를 보지 않았으므로 양사와 옥당이 번갈아 상소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되, 매양 몸조리를 한다고 전교했다. 1년이 넘는 조섭 기간에 어찌 하루도 병이 나은 날이 없었겠는가.”

어떻게 내내 아플 수가 있느냐, 하루라도 나은 날에는 경연에 나와야 하는 거 아니냐, 이런 말이다. 광해군 2년 11월 이후 거의 경연을 열지 않았다. 1년 뒤인 광해군 3년 10월의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한다.

“광해군=너는 어떻게 그렇게 뚱뚱하냐?

이봉정(李鳳禎)=소신이 선조(先朝) 때는 선왕이 장시간 집무실에 납시어 온갖 일을 열심히 재결하셨기 때문에 항상 옆에서 모시느라 낮에는 밥 먹을 겨를이 없고 밤에도 편히 잠을 못 잤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하께서 집무실에 납시는 때가 없으므로 소신은 종일 태평하게 쉬고 밤에도 편안하게 잠을 자기 때문에 고달픈 일이 없으니 어찌 살이 찌지 않겠습니까?”(<광해군일기> 3년 10월 14일)

연산군이 아파서 경연에 나오지 못한다면서도 잔치에는 참석하였듯, 광해군은 아파서 경연에 나오지 못한다면서도 국문(鞫問)에는 참석했다. 김직재(金直哉)의 옥사가 일어났던 광해군 4년, 사간원에서 옥사가 일어난 지 일곱 달 동안 경연을 열지 못했다면서 경연을 열라고 했더니 광해군은 더위가 물러가고 옥사가 끝난 뒤 시행하겠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임진왜란 이후 민생을 추스르고 변동하는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할 시기에, 정작 조정 신하들과 국정을 논하기는커녕 굿이나 하고 상궁들과 어울리며 궁궐이나 지으면서 15년의 세월을 보냈다.

경연이 아무리 좋은 제도였다 해도 21세기 대한민국에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소통-학습-공론의 중심축이었던 경연은 그 시대 사람들의 안목과 식견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모습으로 재현될 수 있다. 그 장치를 작동시키지 못하면 ‘그저 그런 정부’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수준의 정부에 수습을 기대하기에는 이 땅의 현실이 너무 무겁다.

오항녕 - 전주대학교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고려대 한국사학과를 졸업했고, 지곡서당(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한국사상사연구소·국가기록원에 재직한 바 있고, 현재는 인권연대 운영위원, 동아시아기록위원회 이사로도 일한다. 저서는 역사학 개론서 <기록한다는 것> <호모 히스토리쿠스>, 조선시대 연구서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등을 썼다.

201706호 (2017.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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