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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교수의 ‘조선을 만든 사람들’(17)] 이인임(2) ‘앙시앙 레짐’의 대표자 

부패한 현실에 안주해 이익과 갈등을 조정하다 

김영수 영남대 정외과 교수
공민왕의 유명을 받들어 우왕을 세운 이인임. 원명 교체기의 혼란 속에서 최영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현실 정치를 장악하고 최고의 권력자로 떠오른 그는 자신을 반대하는 신진 유신들을 하나 둘 제거해나가는데….

▎지난 2014년 방영된 KBS 주말드라마 <정도전>에서 이인임(박영규 분)이 유배를 떠나는 장면. 임견미, 염흥방 등 이인임 세력의 폐해가 극에 달하자 최영과 이성계가 군대를 동원해 이들을 제거하고 이인임은 최영의 배려로 목숨을 부지한 채 유배를 떠난다. 사대부들은 “최영이 결국 늙은 도적을 살려주었다”라고 비난했지만 이미 병이 깊어진 이인임은 유배지에서 사망한다. / 사진·KBS
지난 호에서는 이인임이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덕흥군의 난에서 어떤 기량을 발휘했는지를 살펴보았다. 두 번의 전쟁에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 이인임은 신돈 집권기에 최고위직에 오르며, 정치적으로 순조로운 성장을 계속했다. 하지만 신돈에 완전히 몰입하지 않고 적절한 거리를 유지했다.

1365년 집권 직후 신돈은 정부와 궁중 업무를 이원화시켰다. 건전한 왕정은 모두 이 원칙을 따른다. 왕의 사적인 권력 행사를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돈의 의도는 왕을 정치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정치에 지치고 좌절한 공민왕의 뜻이기도 했다. 신돈은 집권 초 유탁, 이인임에게 정부를, 김란·임군보·목인길에게 궁중을 맡겼다. 앞서 살펴 본 바 있지만, 당시 고려왕조의 주류 세력은 모두 신돈에 반대했다. 이인임도 그 일원이지만 신돈과 대립하지 않았고, 신돈 집권기를 안전하고 평온하게 보냈다.

1368년(공민왕 17) 12월, 이인임은 도첨의 좌시중에 임명되었다. 우시중은 이춘부로서, 두 사람이야말로 신돈 집권기 정부의 핵심 인물이었다. 하지만 정부에서 신돈을 대리한 것은 기본적으로 무신 출신 이춘부였다. 이인임은 신돈의 적극적 지지자는 아니었다. 신돈 집권기에 이인임의 가장 두드러진 역할은 전제개혁을 담당한 것이었다. 신돈이 밝힌 집권 목적은 “세상을 복되고 이롭게 하겠다(福利世間)”는 것이었다. 그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 전제개혁일 것이다. 공민왕 원년 이색의 복중상서가 지적한 대로, 전제 문란은 고려왕조 400년 말류(末流)의 폐단으로서 고려 말 최대의 정치적 문제였다. 그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첫째는 토지 소유권의 불안정, 둘째는 과다한 지세였다. 상당한 유력자들조차 힘에서 밀리면 권세가들에게 토지를 강탈당하는 형편이었다. 또한 토지 소유권이 불분명해 하나의 토지에 주인이 3~4인, 혹은 7~8인인 경우도 있었다. 그 부담은 고스란히 힘없는 농민이 졌다. 양민의 강제 노비화도 심각했다.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가 강탈당하고 착취당하는 체제가 유지될 수는 없다.

공민왕의 유명을 받들다


▎<고려사> ‘이춘부전’. 이춘부는 신돈 집권기에 이인임과 함께 정부를 담당했다. 홍건적의 난 때 공을 세워 일등공신에 책봉되고, 신돈에 협력하여 찬성사, 시중의 지위에 올랐다. 신돈이 역모죄로 유배되자 이춘부는 스스로 궁궐에 나가 대죄하였다가 뒤에 처형되었다. / 사진제공·김영수
전제개혁 포고문은 “이것이 백성을 병들게 하고 나라를 여위게 하여, 하늘이 그 원통함에 감응하여 물난리와 가뭄이 초래되고 질병이 쉬지 않는다”고 개탄하고 있다. 고려 말 수차례 전제개혁이 시도되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신돈은 스스로 전민변정도감의 책임을 지고, 이틀마다 도감을 방문했다. 토지 분쟁 재판관은 이인임과 이춘부였다. 정권의 최고 실력자들이 그야말로 총동원되어 총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효과도 대단했다. 점탈당한 토지를 돌려주자 “온 나라가 기뻐하였다”고 한다. 양민 신분을 주장하는 노비를 모두 풀어주자, “성인이 나왔다”는 칭송이 쏟아졌다. 신돈의 정치 중 가장 빛나는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 개혁은 그 효과가 부분적이고 오래 유지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인임이 전제개혁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는 기록이 없다. 신돈의 개혁에 내포된 딜레마는 바로 그 점에 있었다. 특별히 개혁의 이상이나 열정도 없는 사람들이 개혁의 중심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신돈 집권 말기부터 공민왕은 이인임에게 각별한 신임을 보여주었다. 1370년(공민왕 19) 공민왕은 신돈, 이춘부, 이인임에게 비단을 선물로 하사했다. 신돈과 같은 수준으로 대우한 것이다. 또 1372년(공민왕 21)에는 손수 이인임의 아버지 이포(李褒)의 초상을 그려 선물했다. 공민왕의 그림 솜씨는 유명하여, 그 화격(畵格)이 기절(奇絶)하고 ‘天人의 필치’라는 절찬을 받았다. 더욱이 왕이 직접 아버지의 초상을 그려줬으니, 인신(人臣)의 명예가 극에 달한 것이다.

공민왕은 이인임에게 뒤에 우왕이 된 모니노를 부탁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돈 제거 직후 왕은 근신들에게 모니노의 존재를 공개하고, 명덕태후의 궁에서 기르게 했다. 그리고 이인임에게 “원자(元子)가 있으니 나는 아무 걱정이 없다”고 말했다.(<禑王 總書>) 처음으로 모니노를 ‘원자’, 즉 후계자로 인정하고, 간접적으로 모니노의 장래를 부탁했던 것이다. 당시 공민왕은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견하고 있었다. 명덕태후가 모니노의 공식화에 반대하자, 공민왕은 “신이 이제 명수가 다 되어 죽게 되었으니, 지금 후사를 세우지 않으면 사직을 누구에게 부탁하리오”라고 말했다. 이인임은 왕의 부탁을 잊지 않았다.

우왕대는 이인임의 인생이 절정에 달한 시대다. 그는 모니노를 왕위에 올리고, 그를 대신해 왕과 같은 권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정치노선은 전통 지배세력들의 정치적 연합과 이익 분배 위에 기초하고 있었다. 즉, 카리스마적 권력자라기보다 앙시앙 레짐의 대표자였을 뿐이다. 최영이 이해한 바처럼, 그는 권력 변동기에 뛰어난 중재능력을 발휘해 국가가 공민왕 말기의 불안에서 벗어나 안정과 균형을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 문제는 그의 노선이 시대정신에 반했다는 점이다. 고려 말의 시대정신은 이색과 그 제자들인 신진 성리학자들이 대표하고 있었다. 양자의 대립은 우왕의 즉위 직후 발생하여 신진 성리학자들의 처절한 패배로 끝났다. 이후 14년간 이인임은 생애 최고의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역사적 무덤이었다. 공민왕대에 발휘한 그의 뛰어난 기량과 국가에 대한 기여에도 불구하고, 그의 역사적 의미는 영원히 앙시앙 레짐과 반동의 프레임 속에 갇혔기 때문이다.

1374년 공민왕이 갑자기 암살되자, 왕위 결정을 둘러싼 정쟁이 발생했다. 모니노의 태생이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우왕에 대한 앞서 글들에서 상술했다. 명덕태후는 종친의 옹립을 주장했지만, 결국 이인임이 승리했다. 이인임이 명덕태후에 대항한 것은 왕조체제에서 이례적이다. 왕가의 통치권은 일종의 재산권처럼 이해되었고, 명덕태후는 관습상 왕위결정권을 가진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공민왕의 유명이었다. 이인임은 공민왕의 유명이 왕위 계승에서 우선권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왕의 유명에 따랐으므로, 이 정쟁은 표면상으로는 왕가의 전통을 준수한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왕가로부터 왕권을 탈취한 것이다. 명덕태후의 영향력이 배제되고, 우왕은 14년간 허수아비였기 때문이다. 실질적 권력은 이인임을 대표로 한 고려의 전통 귀족세력에게 이양되었다. 공민왕대에 위축된 고려의 전통 귀족세력은 다시 부활했다. 만약 고려 초기나 중기였다면 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는 관습적 지배방식으로는 국가적 현안을 해결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앞서 살펴본 바처럼 토지 소유권의 불안정으로 절대 다수의 백성들이 빈곤의 위협에 직면했다. 또한 대륙의 왕조 교체에 따른 대규모 전쟁에서 고려는 국가 안보를 지탱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백성들은 폭력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다. 보통 사람들에게 재산과 생명은 삶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국가는 존재 의미가 없다. 우왕대는 그런 질병이 더욱 심화한 시기이다. 이인임을 비롯한 권문세족들이 국가를 그런 상황에 빠트렸다.

이인임에 대한 첫 번째 장애물은 명덕태후였다. 그녀는 일찍부터 이인임의 야심을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모니노의 승계를 반대한 이유 중 하나도 이인임에 대한 견제로 생각된다. 하지만 첫 권력투쟁에서 이인임에게 패배했다. 양자의 대립은 기본적으로 왕과 귀족의 투쟁이었다. 이 투쟁은 고금의 모든 왕정체제에서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이인임에 대한 근본적 장애물은 이색을 필두로 한 정몽주, 정도전 등 신진 성리학자들이었다. 양자의 대립은 단순한 권력 문제를 넘어 14세기 말 고려의 역사적 대안을 둘러싼 투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명덕태후와 신진 성리학자들 사이에 잠재적인 정치적 연대가 형성되었다.

후계 인정을 둘러싸고 원과 갈등


▎이인임의 아버지 이포의 초상. 이포는 선량하고 착실한 인품의 소유자였으나 부친 이조년이나 아들들만큼 고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인복, 이인임 등 여섯 명의 아들이 모두 현달하여, 가문의 최전성기를 이뤘다. 그가 쓴 모자는 몽고식 발립(鉢笠)이다. / 사진제공·김영수
1374년 우왕 즉위 직후 대외정책의 변동을 둘러싸고 이인임은 신진 성리학자들의 거센 반격에 직면했다. 이인임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투쟁에서 승리했으나, 그 승리가 초래할 정치적 책임은 예기치 못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공민왕의 피살을 명나라에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누군가가 “옛날부터 임금이 시역(弑逆)을 당하면 재상된 자가 먼저 그 죄를 받는 것이다. 황제가 만약 선왕의 변고를 듣고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물으면 공은 반드시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원과 화친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고려 역사에서 이런 사례는 많았다. 마지막 무신 집권자 임연도 원종을 폐위시켰다가 몽골의 문책과 개입을 받는 과정에서 죽었다. 강조(康兆, ?~1010)가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세우자 거란은 이를 명분으로 고려를 침략했고, 강조도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이인임도 충분히 그런 상황에 빠질 가능성이 있었다. 지정학적으로 주변에 강대국을 둔 나라에서 이런 상황은 일반적이다.

1374년 4월, 제주 말을 가지러 명 사신 임밀과 채빈이 고려에 왔다가 9월 초 귀환했다. 21일 뒤 공민왕이 갑자기 암살당했다. 이인임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그는 찬성사 안사기를 보내 호송관 김의(金義)에게 임밀 등을 처치하라고 지시했다. 원래 몽골인인 김의는 즉시 사신을 죽이고 요동의 몽골 장군 나하추에게 도주했다. 이인임은 순간적 두려움에 빠지자 헤어나기 힘든 수렁에 자신을 빠뜨리고 말았다. 박상충의 지적대로, “무릇 우환을 피할 수 있는 것이라면 못할 짓이 없는 것이므로, 마음에 가린 바가 있으면 비록 뛰어난 지혜가 있다 해도 도리어 어리석은 자가 보는 것보다 못하다.”(<朴尙衷傳>) 위기에 처한 정치가는 살 수만 있다면 나라도 판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페리클레스의 조카이며 아테네의 저명한 정치가였던 알키비아데스(BC 450?~404)가 대표적 사례이다. 그는 기소될 상황에 직면하자 적국인 스파르타로 망명해 아테네를 패배로 몰아넣었다. 박상충은 “한두 사람의 신하가 마음에 불충을 품고, 나라를 팔아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고, 그 죄악에 의해 나라에 화를 전가시켜, 반드시 종사가 멸망하고 생민이 타서 죽은 뒤에 그만두려고 하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라고 비난했다. 이 단순한 두려움으로 인해 문제는 난마같이 얽혔고, 종내는 고려와 명의 전쟁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런데 원이 이 기회를 이용해 우왕 대신 충선왕의 조카 심왕(瀋王) 왕고(王暠)의 손자 톡토부카(脫脫不花)를 고려 국왕에 임명하고자 했기 때문에, 다시 문제가 심각해졌다. 이인임은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 잘못될 경우 그의 친원정책은 곧 반역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인임은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로서 그 유언에 따라 즉위했으므로, 톡토부카의 왕위 계승은 부당하다는 백관의 연명서를 원에 보냈다. 이는 우왕에 대한 충성을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이로 인해 원과의 사대관계가 공식화되었다는 점이었다. 대외정책에 대한 공개적 논의를 피하면서, 이를 통해 원과의 관계회복을 기정사실로 하려고 했던 것이다. 누구도 반대의견을 표명하지 못하는 가운데, 박상충과 정도전이 서명을 거부했다. 연명서의 의미가 우왕에 대한 지지라기보다 대원관계의 정상화라는 사실을 폭로한 것이다. 연명서는 중지되었다.

그러나 북원의 사신 영접을 둘러싸고 갈등이 재연되었다. 1375년(우왕 원년) 5월, 북원은 사신을 파견해 공민왕이 원을 배반하고 명과 외교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그의 시해를 인정한다고 공표했다. 그것이야말로 이인임이 절실히 원하던 것이었다. 이인임은 사신을 영접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공민왕이 시해가 정당하며 명과의 군사적 대결을 감수하겠다는 것을 뜻했다. 그리하여 파상적이었던 그동안의 대립은 전면적인 충돌로 비화되었다. 신진 유신의 선두에 선 김구용(金九容), 이숭인(李崇仁), 권근(權近), 정도전이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경복흥과 이인임은 오히려 정도전에게 사신 영접을 명했다. 그러자 정도전은 자신이 사신을 죽이든지 명에 압송하겠다고 선언했고, 결국 유배되었다. 그러자 마침내 성균관 대사성 정몽주 등이 나섰다. 그들의 반대가 성공하여, 원의 사신은 강계에서 귀환 당했다. 이인임으로서는 처음 당하는 패배였다.

원명 교체기에 혼선 보인 대외정책


▎알키비아데스 흉상. BC 4세기경 작으로 추정된다. 명문가 출신으로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어린 연인이었으며, 걸출한 웅변가이자 장군, 정치가였다. 그러나 시칠리아 원정 중 정적들에 의해 신성모독으로 기소되자 스파르타로 망명했다. 그는 스파르타를 도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를 패배로 이끌었다. / 사진제공·김영수
위기의 순간이 지난 뒤 신진 유신들은 드디어 이인임에게 포문을 열었다. 한 달 뒤인 6월, 간관 이첨(李詹)과 전백영(全伯英)은 이 사태의 모든 책임이 이인임과 지윤에게 있음을 폭로하고 처형을 주장했다. 이 사태와 관련되어 이인임의 이름이 거론되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인임은 이들을 가볍게 처리하여 지방으로 전직시켰다. 그러나 7월 들어 갑자기 사건이 재개되었다. 우인렬과 한리가 이첨과 전백영을 탄핵했다. 우인렬과 한리는 모두 무장이었다. 고려정치에서 무장의 상소는 낯선 것이며,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했다. 이인임의 의도가 분명했다. 이인임은 신진 유신들을 방치하고서는 자신의 정치적 안전이 위태롭다고 최종 판단했던 듯하다. 역사를 보면 그의 판단이 옳았다. 이첨과 전백영은 가혹한 심문을 받았다. 개혁적 정치가인 전녹생과 박상충이 연루되었다. 최영과 지윤이 이들을 심문했다. 심문은 매우 참혹했다. 오히려 이인임이 “이 무리들을 죽일 것은 없다”고 하여 귀양 보냈는데, 두 사람은 모두 중도에 죽었다.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최영의 태도이다. 그는 신진 유신들을 죽을 정도로 고문했다. 그는 애국적이었지만 신진 유신들의 비전을 이해할 지성이나 시대감각을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신진 유신들은 이 시대의 역사 속에서 가장 근본적인 대안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들의 첫 정치적 데뷔는 참혹한 실패로 끝났다. 이인임의 대외정책에 반대한 모든 신진 유신들이 유배되었다. 이첨, 전백영 등이 장류되고, 정몽주, 김구용, 이숭인, 염정수, 염흥방, 정사도 등은 이인임을 모해한 죄로 유배되었다. 요컨대 이 시대는 고려말의 역사적 비전이 첫 시련을 통해 자신을 입증해야 하는 시기였다. 염흥방, 염정수는 그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삶의 방향을 바꾸어 이인임의 협력자가 되었다. 명덕태후는 정치적 압력에 굴복했다.

이 정쟁은 단기적으로는 원·명 교체기에 나타난 대외정책의 혼선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왕대 전체의 정치를 근본적으로 제약했다. 무엇보다도 고려는 내부로부터 자신을 개혁할 기회를 상실했다. 또한 현실과 괴리된 대외 정책으로 인해 부단히 전쟁의 위협에 직면했다. 이로 인해 우왕 14년 이인임 그룹의 대숙청과 제2차 요동공벌로 발전되었다. 그 결과 위화도회군에 의해 이성계 그룹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고려왕조의 종언을 고했던 것이다. 이 정쟁의 영향은 그만큼 심원하고 근본적인 것이었다.

다른 한편 이인임은 두 차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했으나, 그 승리의 이면에는 더욱 커다란 함정이 숨어있었다. 그는 정치적 정통성에 근본적인 손상을 입었으며, 그것은 결국 그의 정치적 운명이 되었다. 대외정책을 둘러싼 정쟁이 끝난 뒤, 이인임은 자신과 대립하는 모든 정치가와 세력을 철저히 제거했다. 첫째가 명덕태후였고, 둘째가 우왕이었으며, 셋째가 지윤, 양백연 등 신흥 권문세족이었다. 이인임은 5년에 걸쳐 착실하게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확고하게 권력을 장악했다. 5대에 걸쳐 고려정치를 바라본 명덕태후는 1380년(우왕 6) 정월 83세로 세상을 하직했다. 죽기 전날 밤 그녀는 우왕의 손을 잡고 다음의 유언을 남겼다.

권신들의 부패와 폭정의 시대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사천 목씨 재실. 신돈 집권기에 궁중을 담당한 목인길은 사천 목씨로 공민왕의 측근이다. 공민왕이 어린 시절 원나라 수도 연경에 볼모로 있을 때 중랑장으로 시종했다. 그 공으로 공민왕 즉위 후 일등공신에 봉해졌다. / 사진제공·김영수
“우리나라가 세대를 전한지 오래되어 장차 500년인데, 대개 인군이 거의 다 신료의 말을 듣지 않았다. 원컨대 왕은 중대한 문제를 상고하고 대사를 결정할 때는 반드시 시중 경복흥, 이인임, 판삼사 최영 및 여러 재상에게 자문하여 삼가 자기 마음대로 행하지 마시오.”(<明德太后傳>)

명덕태후조차 최후의 일언으로 이인임을 인정한 것이다.

명덕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고려정치는 공민왕 이전의 상태로 복귀되었다. 분출되는 ‘사욕’을 억제할 견제장치가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정치는 소수 특권집단을 위해 국가의 모든 공권력이 악용되는 과두정(oligarchy)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소수의 권신들과 인척들, 그리고 전통적인 가문들은 연합하여 국가를 사유물로 만들었다. 이 지배연합에는 미천한 신분에서 부상한 새로운 출세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임견미와 지윤, 이성계 등 신흥무장들이 바로 그들이다. 즉, 우왕대의 지배자들은 전통과 신흥, 부와 무력을 결합시켰던 것이다. 우왕 초년부터 이들은 궁중사무와 인사권을 장악하고 관직을 팔았다. “봉익대부(奉翊大夫, 종2품 문관 품계)부터 7~8품에 이르기까지 수가 없었으니, 이때에 수레로 싣고 말로 헤아린다(車載斗量)는 비방이 있었다”고 한다.(<고려사절요>) 군정도 뇌물에 좌우되었다. “패장도 뇌물만 바치면 묻지 않고, 적을 격파한 장수라도 뇌물을 주지 않으면 상주지 않았다. 이로 인해 경내의 장정이 모두 흉당에 의탁하여 병역을 면했다. 이 때문에 수비군은 여위고 약하여 왜노가 횡행하되 출전하여 결초보은함이 없어 팔도가 텅 빈 것은 이인임이 군정(軍政)을 파괴했기 때문이다.”(<李仁任傳>)

재판도 뇌물에 좌우되었다. “모든 쟁송하는 자는 반드시 토지와 재물로 이인임에게 먼저 연줄이 닿은 뒤에라야 해결할 수 있었다”. 이들은 또한 전국에 종들을 보내 떼를 지어 백성의 밭과 집을 빼앗아 끝이 없었다. 1388년(우왕 14년) 무진정변 때 전국에서 처형된 이들의 가노는 1000명에 이르렀다.(<林堅味傳>) 이인임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자였던 윤소종은 이인임의 죄가 단순한 부정부패를 넘어 사람들의 가치관 자체를 붕괴시켰다고 주장했다.

“이인임이 나라를 담당하자 사정에 따라 공의를 해치고 인욕을 다하여 천리를 멸했으며, 유죄는 살리고 무고는 죽였으며, 무공자를 상주고 유공자를 죽였으며, 탐욕한 자를 귀하게 여기고 청백한 자를 천히 여겼으며, 간사한 자를 좋아하고 정직한 자를 미워하여, 소인을 천거하고 군자를 물리쳐 인심을 더러운 곳에 빠뜨리니, 삼한 사람들이 예의염치를 빈천과 화패(禍敗)에 빠지는 함정으로 알아, 오직 혹 그 가운데 빠질까 두려워했다.”(<李仁任傳>)

1383년(우왕 9), 좌사의대부 권근은 “밤이 되어도 자지 못하고, 밥을 대해도 탄식하여 가슴을 치며 슬픔을 금하지 못하는 바”라며 상소를 올렸다.

“지금 우리나라는 물난리와 가뭄이 잇달아 일어나고 기근과 유행병이 겹쳐, 나라에는 수개월 간의 저축이 없고, 백성은 하루 저녁거리의 마련이 없어, 늙고 약한 자는 (죽어서) 개천과 구렁에 뒹굴고, 굶어죽은 시체가 길거리에 널려 있습니다. 게다가 이웃나라가 국경 가까이 군사를 주둔하여 우리의 영토를 침범하고 우리의 인민을 꾀어가며, 또 왜적이 내륙 깊숙이 들어와 약탈하니 각 고을이 소요하여 버려져 적의 소굴이 되었어도, 수령이 능히 막지 못하고 장수가 제어하지 못하니, 자고로 지금보다 위란이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섶을 쌓아두고 불을 지르는 것도 현재의 다급함을 충분히 비유할 수 없고, 침대가 부서져 사람의 몸에까지 화가 미친다는 것도 현재의 절박함을 충분히 비유할 수 없습니다. 위태한 줄 알면서 정치를 개선하지 않으면, 이것은 망함을 재촉하는 것입니다.”(<고려사절요>)

이 시기는 고려 역사상 유례없는 폭정과 혼란의 시대였다. 좌절한 우왕은 정치로부터 완전히 퇴장하여 무절제한 향락에 빠져들었다. 정부 관리들이 무슨 일을 하든, 국가가 어떠한 위험에 직면하든 그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았다. 그것은 권신들과 암묵적으로 맺은 일종의 신사협정이었다. 권신들은 어떠한 공적인 제약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개인의 탐욕을 추구했다. 왕과 권신들은 서로의 입장을 용인하고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평화를 유지했다. 그것은 국가와 백성들에게는 재앙이었다.

이인임이 천재적 인물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는 역사에서 이념을 추구하는 부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공민왕 말년 재상의 지위에 올랐지만, 한 번도 왕의 실정을 충고하지 않았다. 그의 천재성은 사람을 움직이는 요소에 대한 예리하고 정확한 이해력에 있었다. 우왕대의 이인임은 모든 정치적 부패의 중심에 서 있었다. 다른 환경이 주어졌다면, 그가 과연 우왕대처럼 극단적으로 행동했을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신념에 따라 죽는 인물이 아니라, 환경의 요구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최영 끌어들여 현실정치 장악하다


▎KBS 주말드라마 <정도전>의 한 장면. 공민왕 말년 재상의 지위에 오른 이인임(오른쪽, 박영규 분)은 한 번도 왕의 실정을 충고하지 않았다. / 사진·KBS
이인임이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은 대단히 좋지 않았다. 그는 신돈의 몰락 이후 권력 공백을 자연스럽게 채웠다. 또한 공민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초래된 혼란상태에서 고려의 전통 귀족세력을 대표해 확고하게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대외정치에서의 곤란은 실로 예기치 않은 것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집권기간 내내 국내정치에서 운신의 폭을 가질 수 없었다. 명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벽이었다. 만약 그가 약했다면, 명덕태후나 신진 유신들, 그리고 지윤에 의해 즉시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국내정치에서 반대파를 전혀 수용하지 않고, 우왕과 권신들의 타락을 방조하면서 지지를 확보하고자 했던 것은 순전히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상황이 좋았다면, 자신의 내심이야 어쨌든 이인임은 가장 훌륭한 도덕가도 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가면을 만드는 데 익숙하여 상황과 타인이 원하는 것에 탄력적으로 적응할 줄 알았다. 이인임은 “권세를 잡은 지 오래되었고 부드럽게 아첨하여 남의 비위를 맞추니, 문객들이 뜰에 가득하여 각자가 이인임이 자기를 더 후하게 대접”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여러 정쟁에서 그가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의 최대의 성공작은 최영이었다. 그가 최영의 지지를 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최영은 완전히 반대 유형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인임은 최영이 청렴 강직하며 신념의 인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기록을 살펴보면 이인임은 최영의 주장을 가능한 반대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지지하기도 했다. 예컨대 천도문제가 그러하다. 최영과의 연합은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가치 있는 것이었다. 그로 인한 직접적 이익은 누구도 자신의 권력에 무력으로 도전할 수 없으리라는 점이었다. 지윤과 양백연, 유모 장씨와의 권력투쟁에서 최영의 가치는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이 때문에 이인임은 최영을 여러모로 보호하고자 했다. 1388년 최영이 무진정변을 일으켰을 때, 임견미는 “광평군(廣平君, 이인임)이 나를 그르쳤다”고 탄식했다. 임견미와 염흥방은 최영의 성격과 병권을 두려워하여 수차 최영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이인임은 거듭 이를 저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만약 최영의 지지가 없었다면 이인임 정권은 외면조차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반란은 내적인 부패만이 아니라 외적인 형식조차 파괴될 때 시작된다. 이인임은 그 점을 우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왕대의 정치적 악을 모두 이인임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은 순진한 견해일 것이다. 우왕대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공민왕대의 개혁이 실패함으로써 나타난 부정적 결과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공민왕은 무신집권기 이래 지속된 귀족 연합 정치의 전통을 부정하고 왕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적틀을 만들고자 했다. 고려 정치는 건국 초부터 귀족들과의 정치적 연합에 의해 유지되었다. 태조 왕건이 귀족 연합에 의해 후삼국을 통일하고, 국가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12세기 초 외척 이자겸(李資謙, ? ~1126)의 시대는 그 정점이었다. 무신집권기(1170~1270)에는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 왕은 단지 인형이었을 따름이다. 고려 왕가가 권력을 되찾은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몽골 지배기였다. 몽골은 고려를 정복하고 무신 집권자로부터 권력을 회수해 왕에게 돌려주었다. 최후의 무신 집권자 임연도 몽골에 의해 제거되었다. 하지만 몽골 지배기에도 왕권은 여전히 취약했다. 고려 귀족세력이 모두 몽골 조정과 직접 관계를 맺고 권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기황후의 일족이 대표적 사례이다.

공민왕의 첫 번째 정치적 목표는 바로 이런 장애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공민왕은 ‘개혁’을 표방하고 귀족집단의 전통적 특권과 이익을 부정하고, 수차의 정변을 통해 반대하는 귀족집단을 모두 제거했다. 하지만 그는 국가를 획기적으로 개선시키지는 못했다. 신돈의 섭정을 통해 알 수 있는 바처럼 공민왕은 끝내 개혁의 비전과 개혁 추진세력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고려 정치는 막다른 골목에 직면했던 것이다. 좌절에 빠져 방탕해진 공민왕이 갑자기 죽자, 그의 개인적인 카리스마에 의해 최소한도로 지탱되고 있었던 고려 정치의 공공성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대안이 부재했던 고려 정치로서는 옛날 모습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인임 사후에도 유지된 노선


▎심왕(瀋王)의 통치 지역 심양로(瀋陽路). 1266년 원 세조가 설치하여 고려의 항복민들을 거류하게 했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한 뒤, 심왕은 왕고의 손자인 톡토부카(脫脫不花)가 계승했다. 그는 기황후와 협력하여 반원정책을 추진한 공민왕을 공격하여 덕흥군을 고려왕에 추대하고자 했다. 심왕은 1376년 톡토부카 사후 폐지되었다. / 사진제공·김영수
공민왕은 이인임이 자신의 유명에 따라 모니노를 옹립하고, 왕권의 충실한 수호자가 되기를 원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손안에 들어온 권력을 스스로 양보하는 자는 없다. 만약 이인임만은 그렇지 않다고 공민왕이 믿었다면 순진한 것이다. 하지만 공민왕은 최영도 믿지 않았던 사람이다. 따라서 공민왕이 그렇게 믿도록 만든 것은 이인임이었을 것이다. 최영조차 이인임에게 설득되었다. 이인임은 그런 기량을 갖춘 인물이었다. 결과적으로 공민왕은 천신만고 끝에 되찾은 왕권을 이인임에게 고스란히 맡긴 꼴이 되었다.

어쨌든 이인임은 왕권을 중심으로 한 공민왕의 개혁이 실패한 뒤, 그 반사작용으로 나타난 정치적 대안의 대표자였을 뿐이다. 최영이 이인임과 동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공민왕과 똑같이 새로운 정치적 비전을 이해할 수 없었던 그로서는 이인임 외에 다른 대안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새롭게 성장하고 있었던 신진 유신들만 이러한 역사의 역류에 반발했으나 그들의 이념과 힘은 아직 미숙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인임은 단순히 교활한 정치가라기보다 ‘현실’ 속의 정치가였다. 그의 정치적 자질은 특히 관습적인 고려 정치의 세계에 가장 적합했다. 그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현실 내에서 이익과 갈등을 조정하고자 했다. 그는 고려 말의 정치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정치적 거래자였으며, 그 결과 기존의 모든 정치세력으로부터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를 시작하고자 했던 신진 유신들에게는 이인임이야말로 현실의 가장 높은 벽이었다.

이인임은 1388년 무진정변 뒤 실의 속에서 죽었다. 정변이 일어나자 이인임은 최영의 집을 찾아갔으나 거절당했다. 그의 일생에서 처음 당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영은 이인임 일족을 보존시켰다. 그는 우왕에게 “이인임이 정책을 올바르게 세워 대국을 섬김으로써 국가를 안정시켰으니 허물보다는 공이 크다”고 건의해 그 자제까지 모두 용서를 받았다. 최영은 정변의 의미를 국가의 노선이 아니라 단순한 부패 문제로 이해한 것이다. 이 때문에 윤소종은 최영이 “춘추의 역적을 치는 대법을 알지 못하여 위로는 천심을 어기고 아래로 인망을 어겼다”고 비판했다. 이인임 노선은 그의 사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회군을 단행한 조민수가 그 대표자였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노선은 결과적으로 전제개혁과 조선건국에 반대한 이색, 정몽주에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정치는 단기적으로 권력투쟁으로 나타나지만, 길게 보면 역사의 진로를 둘러싼 투쟁이다. 이인임을 단순히 마키아벨리스트로만 볼 수 없는 이유이다.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경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706호 (2017.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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