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김풍기의 선물의 文化史(6)] “달력은 일상을 돕고, 청어는 아침식사를 돕네” 

한반도 모든 해안에서 잡히던 ‘전천후’ 식재료… 밥상, 술상, 제사상 등에 올랐던 ‘국민 생선’ 

김풍기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여장(汝章)이 죽은 뒤로는 하늘에 맹세컨대 시를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비록 좋은 글귀를 얻는다 해도 어찌 하늘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허균(許筠, 1569~1618)은 어느 날 금산부사(錦山府使)에게 편지 한 통을 보낸다. 금산의 원님이 허균에게 시를 한 수 지어달라 부탁했는데 그것을 넌지시 거절하는 내용으로 보인다. 여기서 ‘여장’은 허균의 절친한 벗 석주(石洲) 권필(權韠, 1569~1612)의 자(字)이다.

그는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꼽혔으나 변변한 벼슬 하나 한 적 없이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궁류시(宮柳詩)를 지었다가 그것이 시대를 비판한다는 혐의를 받아 해남으로 귀양을 가게 됐다. 그런데 동문 밖에서 첫날밤을 묵던 중 폭음(暴飮)을 하고 죽었다.

이 사건은 허균에게 굉장한 충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이첨(李爾瞻)·유희분(柳希奮) 등 권력자들은 광해군을 옆에 끼고 국정을 농단하고 있었고, 지식인들의 언로(言路)는 완전히 막혀 있었다.

권필이 필화(筆禍)사건에 연루돼 울분에 차서 통음을 하다가 죽었다는 소식은 누구에게나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터인데 평생을 친한 벗으로 살아왔던 허균에게는 말할 것도 없이 엄청난 일이었던 것이다. 허균 자신도 전라도 함열(咸悅)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겨우 풀려난 뒤끝이었으니 더더욱 그러했으리라.

역모로 사형을 당한 탓인지 허균의 친필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 편지는 <근묵>에 수록된 것인데 글씨체를 보면 허균의 사람됨이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얇고 날렵하면서도 유려한 느낌의 글씨에서 나는 세련되고 재기 넘치는 허균을 봤다.

허균의 편지, 특히 자신이 ‘척독(尺牘)’으로 분류해놓은 짧은 편지는 아름다운 감성과 빼어난 문장으로 그 예술적 성취가 높다. <근묵>에 수록된 편지는 허균의 문집에는 없는 것인데 아마도 누군가의 가문에 전해오다가 살아남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편지에는 또 하나 흥미로운 구절이 들어 있다. 편지의 원문을 마치고 자신의 이름을 쓴 뒤 무심한 듯 혹은 깜빡 잊었다는 듯 추가해놓은 글귀다. ‘이편청어 심하궤세(二編靑魚 深荷饋歲)’라는 말, 즉 청어 두 두름은 연말 선물로 잘 받았다는 뜻이다.

이로 보건대 이 편지는 권필이 죽은 1612년 이후 어느 해 겨울 금산부사가 허균에게 시 한 편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하면서 청어 두 두름을 함께 보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이듬해 정월 허균이 넌지시 거절하면서 이 편지를 보냈는데 보내온 청어에 대해 아주 무심한 어투로 말미에 덧붙인 것이다.

회로, 구이로, 말려서, 쪄서


▎지난 1월 경북 영덕군 영덕읍 창포리 해안에서 어민들이 과메기의 원조격인 청어 과메기를 말리고 있다. 과메기는 청어의 눈을 꼬챙이에 꿰어 말렸다는 뜻의 ‘관목(貫目)’에서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 사진·공정식
청어는 우리나라 모든 해안에서 잡히는 어종이었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각 지역의 토산물을 수록하고 있는데 청어를 기재한 지역이 많다. 황해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함경도 등 강원도를 제외한 모든 해안에서 청어가 잡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강원도가 빠진 것은 아마도 이 지역이 어업보다는 농업을 주력 분야로 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정된다.

사정이야 어떻든 겨울에 주로 잡히는 청어는 회로도 먹고, 구이로도 먹고, 과매기처럼 말려서도 먹고, 탕으로도 먹는 그야말로 ‘전천후’ 식재료였다. 청어가 많이 잡힐 때면 알곡과 바꿔서 식량을 마련할 정도였다. 이순신이 청어 7000마리를 가지고 양식으로 바꾸려 했던 기록을 보건대 근대 이전 청어의 쓰임새는 다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근대 이후 청어 관련 기록을 보면 어획량의 기복이 상당히 크다. 1930년대 후반에는 7만t 전후로 잡히다가 1990년대에는 1만t 정도로 줄었으며, 근래 다시 어획량이 조금씩 늘고 있다. 이런 사정은 조선시대라고 해서 다를 바 없었다.

<경상감영계록(慶尙監營啓錄)> 고종 9년(1872) 12월 12일 조의 기록에 의하면 날씨가 따뜻해지는 바람에 청어가 잡히지 않아서 진상하려는 물량을 맞추지 못한 죄를 받겠다는 문서에 대해 왕이 그를 처벌하지 말도록 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허균도 자신의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 명종 이전까지만 해도 많이 잡히던 청어가 요즘은 잡히지 않는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만큼 청어는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어획량에 커다란 차이를 보였다.

이 청어가 도대체 왜 이렇게 선물로 오갔던 것일까?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인데다 지금처럼 바다생선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연근해 해역에서 잡히는 물고기가 아니면 먹을 수 없었다.

겨울이라는 혹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청어는 상당히 많이 잡혔으므로 겨울 음식으로는 좋은 재료였다. 가는 뼈를 발라내기 불편하지만 그래도 두툼한 살집과 담백한 맛 때문에 누구나 좋아하는 생선이었다.

시기에 따라 생산되는 물건은 늘 제례에 사용됐다. 그러한 제사를 천신(薦新)이라고 했다. 종묘에서도 천신을 하는데 매월 제상에 올리는 물건이 달랐다.

<경모궁의궤>(권2) ‘사전(祀典)’조에 보면 어떤 물건을 어디서 준비했는지 기록돼 있다. 1월에는 조곽(早藿) 2근(斤)을 올리는데 강원도와 경상도가 물건 준비를 담당하고, 5월에는 앵도와 살구 각각 1되 5홉씩 준비하는데 장원서(掌苑署)가 담당한다. 11월에는 청어 8마리와 소금 1홉을 올리는데 경상도와 함경도가 준비하도록 돼 있다.

종묘의 제사상에 올라갈 정도로 청어는 각광을 받았고, 겨울을 대표하는 음식재료로 인식돼 있었다. 어쩌면 금산부사가 허균에게 선물로 보낸 것도 그 집안에서 천신을 할 때 사용하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조선 사대부 가문의 경제생활에서 선물 문화는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한다. 자본의 유통이 활발하지 않았던 시절에 경제를 꾸려가기 위한 다양한 물건은 당연히 집안 내에서 자체적으로 마련하거나 물물교환을 통해서 이뤄져야 했다.

그러나 이 역시 마뜩지 않을 때는 누구에게서든 필요한 물건을 얻어야만 했다. 그럴 때 주변 사람들이 전해주는 선물은 집안 경제에 요긴한 것들이었다.

지금도 우리나라에 상부상조 문화가 상당히 널리 퍼져 있다. 결혼식이든 장례식이든 크고 작은 행사에 가면 어떤 방식으로든 내 성의를 표시하기 위한 선물을 한다. 자칫하면 뇌물로 오해 받거나 뇌물성 선물로 주고받는 관행이 사회적 부패도를 높인다는 생각 때문에 오죽하면 부정청탁금지법을 만들었겠는가. 그만큼 우리 문화에서 선물의 의미는 유래도 깊고 복잡한 메커니즘으로 구성됐다.

동지(冬至) 전후 ‘몸값’ 치솟아


▎굵은 소금을 뿌려 구워낸 청어구이.
청어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나오는 것을 보면 오랫동안 한반도 백성들의 식탁을 풍요롭게 해왔다. 특히 고려 말 뛰어난 관료이자 학자였던 이색(李穡)은 청어에 대한 몇 가지 흥미로운 기록을 남겼다.

김공립(金恭立)이 달력과 함께 청어를 보내준 것에 고마움을 표하면서 지은 시가 있는데 그 앞부분에서 이렇게 읊었다. “달력은 일상을 도와주는 물건이고, 청어는 아침식사를 돕는 것이라. 달력으로 길흉을 눈앞에 있는 것처럼 분명해지고, 청어의 맛은 간을 보충해 준다오.”(黃曆資日用, 靑魚助晨飡. 吉凶判在目, 氣味充於肝: ‘金恭立以曆日相送, 且饋靑魚’, <목은시고> 권31)


▎싱싱한 채소와 함께 새콤달콤한 초장을 곁들여 먹는 청어물회.
내용을 보면 세밑이라 김공립이 달력과 청어를 선물로 보내온 것에 대한 감사의 내용을 담았다. 일상생활에서 달력은 반드시 있어야 하고 그것을 통해 길흉을 판단해서 나날의 생활에 보조 자료로 삼는다.(달력과 관련해서는 <월간중앙> 2017년 1월호 참조)

함께 보내온 청어는 아침상에 올려서 입맛을 돋울 뿐 아니라 영양 보충을 통해 건강을 유지하게 만들어준다. 이색은 또 다른 작품에서 청어를 노래했다. “쌀 한 말에 청어 스무 마리 남짓, 끓여오니 흰 주발이 쟁반의 채소를 비춘다. 세상에 맛 좋은 것 응당 많으리니, 산 같은 흰 물결이 하늘을 때리는 곳에.”(斗米靑魚二十餘, 烹來雪盌照盤蔬. 人間雋永應多物, 白浪如山擊大虛: ‘賦靑魚’, <목은시고> 권14)

이색은 하늘을 때리는 듯한 산더미 같은 흰 파도 속에 많은 별미가 들어 있기는 하지만 청어가 바로 대표적인 진미(珍味)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이 작품은 후대에도 널리 읽혔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했던 허균의 <도문대작>을 보면 “옛날에는 매우 흔했으나 고려 말에는 쌀 한 되에 40마리밖에 주지 않았으므로 목은 이색이 시를 지어 그를 한탄했으니, 이는 난리가 나고 나라가 황폐해져서 모든 물건이 부족하기 때문에 청어도 귀해진 것을 탄식한 것”이라는 부분이 나온다. 바로 이색의 이 작품을 인용한 내용이다.

물론 20마리라는 것을 40마리로 쓴 것은 허균의 착오로 보이지만, 이색이 청어를 노래하면서 시세가 어느 정도인지를 쓴 구절은 후대 지식인들에게 꽤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이 때문인지 허균은 명종 이전에는 쌀 한 말에 50마리를 줬는데 이제는 잡히지 않으니 괴이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많이 잡힌다고는 하지만 청어가 싼값에 거래되는 생선은 아니었다. 바다로 나가 생선을 잡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동지(冬至) 전에 구매되는 청어는 특히 값이 높았다.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도 “청어는 북도(北道)에서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해 강원도의 동해변을 따라 내려와서 11월에 이곳[울산·장기(포항의 옛 이름)]에서 잡히는데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점점 작아진다. 어상(魚商)들이 멀리 서울로 수송하는데 반드시 동지 전에 서울에 도착시켜야 비싼 값을 받는다”고 했다.

이는 천신 때문에 제사상에 청어를 올리려는 수요가 많았다는 의미이다. 동지 전에 보내야 동지 제사와 연말연시 각종 제사에 청어를 올릴 수 있었고, 이를 반영한 값이 올라갔을 것이다.

제사상에 올리면 청어는 당연히 제사를 지낸 사람들의 몫이다. 밥상에 올라와 사람들의 입맛을 돋워주고 식사의 풍미(風味)를 한층 깊게 만들었다. 자식들 입장에서는 부모에게 겨울 별미로 청어를 준비하는 것이 큰일이었다. 전남 구례에서 강학(講學)을 했던 조선 후기 유학자 박광기(朴光夔, 1708~1761)의 행장(行狀)을 같은 지역 출신의 한말 유학자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이 썼는데 거기에 박광기의 효성을 증언하는 일화가 기록돼 있다.

“구워보니 옛 맛 그대로구나”


▎추사 김정희는 안동김씨 세력에 밀려 1840년 9월 제주 대정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됐다. 위리안치란 유배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울타리를 치고 생활해야 하는 형벌이다.
박광기의 모친이 병으로 위독할 때 마침 청어가 많이 나는 철이었지만 어머니의 밥상에 한 번도 청어를 올리지 못했다. 이 때문에 평생 청어를 먹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자손들에게도 자신의 제사상에 청어를 올리지 말도록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는 박광기의 효심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가난한 선비의 가슴 아픈 심정을 드러내는 일화라 하겠다.

또한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권27)에는 청어를 좋아했던 한 재상의 일화가 수록돼 있다. 한용구(韓用龜, 1747~1828)는 청어를 좋아해 끼니마다 반드시 밥상에 올리게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권두(權頭, 하인들 중 우두머리)가 음식을 준비하는 종을 꾸짖었다. 재상의 밥상에 청어만 올리는 것은 볼기를 맞아야 할 죄라는 것이었다. 한용구가 이 사실을 전해 듣고 “권두가 청어를 먹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며 웃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에 청어 한 두름 값이 3~4문(文) 정도로 아주 싸서 천한 사람들이 먹는 생선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청어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밥상의 귀물로 대접받았다.

이런 사정은 한용구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시에서도 보인다. 그는 ‘청어’라는 제목의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바닷배의 청어가 온 성에 가득한데 살구꽃 봄비 속에 생선 파는 사내의 소리. 구워보니 예년의 맛 그대로인데, 시절 따라 눈이 끌려 각별한 정 생긴다.”(海舶靑魚滿一城, 杏花春雨販夫聲. 炙來不過常年味, 眼逐時新別有情: <완당집> 권10)

이 작품을 읽으면 섬세한 미식가였던 김정희의 입맛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제주도에 귀양살이를 할 때도 본가에서 보내온 음식을 받아먹는 일이 많을 정도로 미각에 특별한 애착이 있었다.

언제부터 청어를 즐겼는지는 모르지만, 살구꽃 피는 봄날 청어를 사라고 외치며 다니는 생선장수의 호객소리에 얼른 청어를 사서 구이를 해먹는 김정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때로는 돈 있는 사람들의 밥상에, 때로는 가난한 이들의 밥반찬으로, 혹은 술상에 안주로, 혹은 제사상의 정성 어린 제물로 쓰였던 청어였다. 기후의 변화나 기타 여러 환경적 요인으로 많이 잡힐 때도 있었고 전혀 잡히지 않을 때도 있었다.

청어는 한반도 전 해역에서 잡히는 생선이었으므로 오랜 옛날부터 밥상의 친근한 벗이었다. 겨울철에 많이 잡혔기 때문에 청어 선물은 주로 연말연시에 주고받았지만, 단순히 반찬용으로 몇 마리 선물하는 차원은 아니었다. 제사상에 시절 음식을 올리라는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게다가 끼니마다 먹어도 물리지 않을 정도로 풍미가 깊은 생선이었다.

허균의 친필 간찰(簡札) 한구석에 무심히 쓰여 있는 구절에서 우연히 발견한 청어는 내게 선물의 의미를 새삼 일깨워줬다. 그 맥락으로 봐 제사용인지 찬거리용인지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시 한 편 부탁하는 편지와 함께 하인의 손에 들려보냈을 청어 두름은 금산부사의 정성 어린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그 마음을 차마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친구의 일을 빌미로 넌지시 거절하는 허균의 마음도 아름다워 보인다. 청어를 사이에 두고 일어난 두 사람의 아름다운 사연이 몇 백 년 세월을 넘어 지금도 내 마음에 울림을 준다.

김풍기 -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책과 노니는 것을 인생 최대의 즐거움으로 삼는 고전문학자. 매년 전국 대학교수들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올해의 사자성어’[2011년 엄이도종(掩耳盜鐘)]에 선정되는 등 현실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는다. 저서로 <옛 시에 매혹되다> <조선 지식인의 서가를 탐하다> <삼라만상을 열치다> 등이 있다.

201706호 (2017.05.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