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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정신의 미학(16)] 중도를 지킨 철학자 백담(栢潭) 구봉령 

“당인(黨人)들아 촉(蜀) 땅의 개를 돌아보라” 

글 송의호 객원기자 yeeho1219@naver.com / 사진 공정식 프리랜서
동서 당쟁에 초연하면서도 사헌부 시절 목숨 건 상소문 올려... 관직 많아 위패 글씨만 98자에 달하지만 집 한 칸 없이 마감한 청빈한 삶

▎구봉령이 21세에 와룡산 아버지 묘소 아래에 지은 동강서당. 13대손 구운회 씨가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집권으로 9년 만에 다시 여야가 바뀌었다. 정치의 격변기다. 6월 10일로 출범 한 달을 맞은 문재인 정부는 국무총리·장관 등 여전히 내각을 짜는 중이다.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많은 후보자가 위장전입 등 문 대통령의 공직 배제 5원칙에 걸려 곤욕을 치렀다. 야당은 청문회에서 후보자의 부도덕함을 질타했다. 특정인을 낙마시킬 기세로 극단의 주장도 쏟아냈다. 또 여당 지지자들은 그런 야당 의원을 무력화하기 위해 인신을 공격하는 ‘문자 폭탄’을 날렸다.

조선시대에는 정치의 격변으로 선비들이 수난을 당했다. 이른바 사화(士禍)이다. 네 차례 사화로 세조를 도운 훈구 세력은 몰락하고 사림파가 지배세력으로 등장한다. 사림은 선조 시기 다시 동서(東西)로 분당(分黨)된다. 동인·서인의 당쟁이다.

이런 당쟁 속에서 벼슬에 있으면서도 사림의 도(道)를 구현하려는 집단이 있었다. 퇴계 이황의 제자들이다. 이들 중요직을 거치면서도 중도(中道)를 지킨 이가 있었다. 동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것이다.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1526∼86) 선생이다. 그는 극단의 주장이 고개를 들던 시대에 어떻게 중도에 설 수 있었을까. 어느 쪽으로도 휩쓸리지 않을 만큼 내공이 깊었던 것일까.

5월 31일 경북 안동시 와룡면 가구2리를 찾아갔다. 안동시내에서 북쪽으로 도산서원을 향해 가다 와룡면사무소 앞에서 동쪽으로 난 길이다. 2㎞쯤을 올라가자 도로 옆 산기슭에 솟을대문 한옥 한 채가 보였다.

자동차 소리를 듣고 어르신이 나왔다. 백담의 13대 후손으로 고향을 지키는 구운회(77) 씨였다. 그가 문을 열자 한옥 한가운데 처마에 ‘東岡書堂(동강서당)’이라는 편액이 보였다. 1546년 21세 구봉령이 직접 지은 서당이다. 건물 한 채지만 선생의 정신을 이해하는 핵심 유적이다.

부모 묘소 아래 서당을 지은 뜻


서당을 건립한 동기가 예사롭지 않다. “백담 선조께서 사마시에 합격한 뒤 어린 시절 여읜 부모님을 추모하고 글을 읽기위해 지었답니다.”

구봉령이 성균관에 입학하는 사마시에 합격한 건 그해 9월. 시험을 감독한 시관(試官)은 답안지를 보고 “훗날 문장을 주장할 이는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그는 작은 성취에 안주하지 않고 서당을 지었다. 그것도 아버지의 묘소 바로 아래였다. 그리고는 ‘동강’이라 이름 붙이고 좌우에 책을 쌓은 뒤 옷깃을 여민 채 단정히 앉아 종일 책을 읽었다.

동강서당은 본래 1㎞쯤 떨어진 부모 묘소가 있는 주계리 와룡산 아래에 있었다. 구봉령의 어머니 권씨는 선생이 7세 때 돌아가셨다. 이어 5년 뒤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난다. 그때부터 할머니 아래서 자라며 외종조부인 권팽로의 가르침을 받았다.

구봉령은 16세에 <논어>를 읽다가 크게 깨닫는다. “먹음에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거처에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다(食無求飽居無求安)”는 구절이다. 관직보다는 성경(誠敬)과 의리를 실천하는 성현의 길을 따르기로 뜻을 세운 것이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느라 시묘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제삿날이 되면 초상을 당한 것처럼 애통해 하고 소식(小食)하며 베옷을 입고 그 달을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뒤늦게나마 시묘의 심정으로 묘소 아래에 서당을 지은 것이다. 효심(孝心)의 발로다.

서당 이름 ‘동강(東岡)’에도 뜻이 있다. 동강은 동쪽 산비탈을 가리킨다. 여기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물러나 자연을 즐기며 지내겠다는 깊은 뜻이 숨어 있다. 후한(後漢)의 주섭(周燮)이 벼슬에 나아가지 않자 친지들이 “그대만 어찌 유독 동쪽 산비탈을 지키는가”라고 물은 데서 유래한다.

구봉령은 서당에서 책을 읽고 시를 읊으며 지칠 줄을 몰랐다. 이를 본 사람들이 자제들을 맡겼다.

서당 안으로 들어섰다. 양쪽에 방이 하나씩이고 가운데는 마루인 구조다. 오른쪽 방은 잠겨 있었다. 문단공(文端公)이란 시호가 내려져 불천위(不遷位)가 된 백담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다. 구운회 후손은 “서당을 중창한 뒤 여기서 불천위 제사를 모신다”며 “그때부터 지내리 사당의 위패를 옮겨왔다”고 설명했다.

동강서당은 1612년(광해군4) 용산서원(龍山書院)이 되고 1633년(인조11)에는 사액서원인 주계서원(周溪書院)으로 승격한다. 하지만 주계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됐다. 그러면서 서원은 허물어지고 축대와 주춧돌은 수십 년 전까지 뒹굴다가 농토가 되면서 흔적마저 사라졌다.

후손 모임인 송백회(松栢會)는 2009년 십시일반 정성을 모아 안동 입향조인 백담의 고조(구익명) 묘소에 딸린 땅에 동강서당을 중창한 것이다.

구봉령은 일찍이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열다섯 살이 넘으면서 이미 문장을 잘한다는 말을 들었다. 20세에는 책 상자를 짊어지고 청량산으로 들어가 학문에 몰두했다. 밤낮으로 의대(衣帶)를 벗지 않고 말 위에서도 경전 암송을 그치지 않았다.

당시 퇴계 선생이 가까운 계상(溪上)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구봉령은 제자의 예로 정중하게 배움을 청했다. 퇴계의 첫 반응은 뜻밖이다. ‘백담연보’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퇴계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공의 박학함을 들은 지 오래되었는데 내 어찌 감히 가르치겠는가’라며 사양했다.” 더 가르칠 게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제자가 된 뒤 핵심을 터득한다.

구봉령의 할머니는 현실론자였다. 손자에게 입신양명(立身揚名)만이 박복한 집안을 일으키는 길임을 강조했다. 그 바람을 외면할 수 없어 백담은 1560년(명종15) 35세 되던 해 가을 별시에 나가 전시(殿試, 임금 앞에서 보는 과거) 2등으로 급제한다. 당시 출제된 문제는 ‘군자를 나오게 하고 소인을 물리치다(進君子退小人)’라는 것. 그는 사악함과 바름을 철저히 구분하는 논지를 펼쳤다. 채점관이 무릎을 칠 정도로 답안은 출중했다. 그러나 결과는 2등이었다. 구봉령이 일찍이 경대부 집을 찾아간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이튿날 사람들은 관례에 따라 장원급제한 민덕봉 앞으로 몰려갔다. 그러자 민덕봉은 “저 사람이 장원이 돼야 하는데 지금 내가 그릇되게 인사를 받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은가” 하고 말했다. 그때부터 구봉령의 명성이 자자해졌다.

홍문관에서 적폐 청산을 진언


▎안동시 와룡면 지내리에 남아 있는 백담의 사당. 위패는 현재 동강서당으로 옮겨졌다.
백담은 그해 12월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승문원의 권지부정자로 첫 보직을 받는다. 엘리트 코스로 들어선 것이다. 이듬해 6월에는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에, 1562년에는 홍문관 정자 겸 경연전경에 임명된다. 바른 말을 하는 언관(言官)의 자리다. 그해 11월 구봉령은 쌓인 폐단을 듣고 개선책을 제시하는 장문의 상소문을 쓴다. ‘홍문관에서 폐단을 진술한 의소’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강조한 ‘적폐 청산’과 같은 맥락이다. 당시 윤원형(문정왕후의 동생)이 왕대비를 등에 업고 국정을 농단했지만 누구도 감히 직언하지 않았다. 상소의 골자는 이렇다.

기강을 세워 명령을 행할 것. 염치를 권장하여 뇌물을 막을 것. 착취를 물리쳐 약탈을 금지할 것. 사치를 억제하여 화려한 집을 헐 것. 관작을 중히 여겨 인재의 등용과 버림을 살필 것. 안팎을 엄하게 할 것. 사기(士氣)를 배양할 것. 군정(軍政)을 정비할 것. 형벌 남용을 막을 것. 학교를 부흥시킬 것. 나라의 근본을 탄탄하게 할 것 등이었다.

동료들은 공감하면서도 서로를 돌아보며 난감해 했다. 윤원형은 그냥 있지 않았다. 사간원 관원을 사주해 백담의 탄핵을 추진한다. 그러나 명종 임금은 구봉령의 강직함을 알고 있었다. 2년 뒤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이 도리어 탄핵을 받고 관작을 삭탈당한다. 사필귀정이었다.

백담은 이후 호조 좌랑, 이조 좌랑, 집의, 사간 등을 거쳐 직제학, 동부승지, 대사성, 전라도 관찰사, 충청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이어 대사간·대사성·대사헌에 오르고 병조 참판, 형조 참판 등을 역임한다. 그는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도 청빈했다. 이준은 생애를 기록한 ‘행장’에 “지위가 아경(亞卿)에 이르도록 벼슬했지만 집 한 채도 마련하지 않고 빌려 살았다”고 적었다. <백담집>을 국역한 한국국학진흥원 장재호(54) 전임연구원은 “청백함은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중도의 바탕이 된 것 같다”고 평했다.

동강서당을 나와 서당 옆 구운회 후손의 집에 들렀다. 백담이 거쳐 간 관직 이야기가 나오자 후손은 불천위 제사 때 지방(紙榜)을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설명했다. 신주를 서당으로 옮기기 전이다. 써 둔 게 있었다. “신주(神主) 전체가 모두 98자입니다. 이보다 글자 수가 더 많은 신주는 듣지 못했습니다.” 교지(敎旨)를 받은 관직이 그만큼 많다. 신주는 세로 한 줄로 쓰는 게 관례이지만 너무 길어 끝 부분은 두 줄로 처리돼 있다. 글자가 작아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는 불천위 제사를 지낼 때 축문을 도맡아 읽는다고 한다. 그때마다 긴 관직명을 읽다 보니 축문을 잘 읽는다는 말을 듣는다고 우스갯소리를 곁들였다.

1584년(선조17) 이조 참판 시절이다. 동서 분당이 시작되며 사람들은 한 쪽을 표방하며 반목하기 일쑤였다. 백담은 아는 게 없는 듯 태연히 처신했다. 주장은 사심이 없었다. 사람을 쓸 때는 동인과 서인을 묻지 않고 오직 적임자를 등용할 뿐이었다. 간혹 시끄러워지면 “나랏일은 한 집안의 일이 아닌데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탄식하며 답하지 않았다. 또 자신이 당인(黨人)으로 지목되면 관직에 임명돼도 부임하지 않았다. 불편부당, 중도의 자세였다.

“하늘은 백성을 통해 본다”


▎<백담선생문집>은 1670년(현종11) 풍기군수 김계광의 주선으로 10권4책이 첫 간행됐다.
그에게 기준은 당파 아닌 오직 백성이었다. 1572년 구봉령은 사헌부에서 목숨을 건 상소문을 올린다. 선조 5년이다. 임금이 민가를 헐어 원성이 커지고 가을이 돼도 우레 소리가 그치지 않을 때였다. 그래도 직언하는 신하는 없었다. 그는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하늘이 보는 것은 우리 백성을 통해 보고 하늘이 듣는 것은 우리 백성을 통해 듣는다(天視自我民視 天聽自我民聽)”를 인용하며 즉위 때의 초심을 지키시라고 간청한다. 용기 있는 직언이었다.

백담은 관직에 있는 동안 태평성대를 이루려는 이상과 반대로 흘러가는 현실에 환멸을 느끼며 병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한다. 스승을 닮았다. 벼슬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정한 것은 1570년 퇴계가 돌아가신 해였다. 그때부터 조정에 있는 날보다 휴가 등으로 고향에 머무는 날이 더 많았다. 그는 초야에서 제자들에게 <통감>을 가르치고 치세와 난세를 토론했다. 권력욕이 없는 중도였다.

동강서당 왼쪽에는 백담종택이 있다. 전통 한옥이 아닌 일반 주택이다. 종택은 본래 사당이 남아 있는 건너편 지내리에 200년 전까지 있었다고 한다. 지내리 입구에는 구봉령이 심었다는 수령 500년 느티나무가 서 있었다. 백담의 16대 종손인 구성모(66) 씨는 직장을 따라 경기도 수원에 살고 있다. 종택 뒤가 구운회 씨 집이다. 안동시 와룡면 능성 구씨의 600년 세거지는 안타깝게도 지금은 이 두 집만 남았다.

구봉령은 1100수가 넘는 시를 남겼다. 고향의 벗과 자연은 시의 소재였다. ‘김언우 등 여러 사람이 구선대(九仙臺)에 왔기에 나의 시에 차운하라고 재촉하다’란 시도 그중 하나다. 아홉 선비가 놀았다는 구선대는 지금은 주변으로 도로와 다리가 놓이면서 운치가 사라졌다. 일대에 백담구곡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긴 문적은 방대했다고 한다.

“전쟁 직후에 물에 잠겨 말리느라 펼쳐 놓은 백담 할배 서책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지게로 50짐이 넘는답디다. 6·25가 터지자 독에 묻고 피란했는데 돌아오니 물이 들어 대부분 버렸어요.” 구운회 씨가 원주에 살던 집안 어른 집에 들렀을 때의 목격담이다. 그는 “서책이 종가가 아닌 그 가치를 아는 3대 선비 집으로 가 있더라”고 말했다.

그리고 20년 전쯤 TV <진품명품> 프로그램에 구봉령의 일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원주 그 집이 나주로 옮긴 뒤 손자가 따로 보관한 일기를 들고 나온 것이다. 감정가는 그날 세 권에 2500만원을 기록했다고 한다. 종손은 직후 일기를 찾아 나섰지만 실패했다. 보상할 여력이 없어서였다. 2002년 종가는 목판 265점과 주계서원 편액 등 사당 안에 보관해 온 백담 자료를 국학진흥원에 기탁했다. 이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된 목판의 1호 기탁이었다.

군자의 도는 밝은 해와 같다


▎구봉령이 심었다는 와룡면 지내2리의 수령 500년 느티나무.
구봉령은 당쟁의 시대에 ‘촉견폐일설(蜀犬吠日說, 촉 땅의 개가 해를 보고 짖은 설)’이란 글을 남겼다.

“촉(蜀) 땅은 옛날에 이른바 ‘하늘이 샌다’는 곳이다. 늘 비가 내리고 갠 날이 적어 사람들이 해를 볼 수 없었다. 개는 해가 한 번 나오면 바로 짖어댄다. 환한 빛은 해만한 게 없는데 무슨 까닭인가? 이는 늘 보던 것에 친하고 보지 않던 것에 친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에게 곤욕을 치르는 것은 촉의 해 하나뿐이 아니다. 군자의 도는 밝은 해와 같다. 주공(周公)은 천하의 해였기에 여러 아우가 짖어댔고, 공자는 만세의 해였기에 숙손(叔孫)이 짖어댔다. 성현도 곤욕을 면치 못했는데 다른 사람이야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개가 해를 보고 짖는 것은 울부짖고 그칠 뿐이다. 그러나 소인이 군자를 보고 짖어댐은 반드시 물고 뜯고서야 끝이 나니 나라에 참혹한 화를 미친다.”

백담은 촉 땅의 개를 통해 치우침의 맹목성을 경계했다. 가짜뉴스로 상대를 공격해 인격살인을 서슴지 않는 야만적인 요즘의 행태에도 일침이 될 듯하다.

여야가 정권을 교체하면서 상식을 벗어난 극단의 주장이 고개를 들고 있다. 여든 야든 한쪽으로 치우치면 국익은 밀려나고 진영 논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십상이다. 당쟁의 시대, 중도를 지킨 구봉령을 지금 돌아본 이유다.

- 글 송의호 객원기자 yeeho1219@naver.com / 사진 공정식 프리랜서

[박스기사] 예학에 조예가 깊어 임금의 삼년상 만류를 읍소 - “말단의 예절은 지키고 책임을 돌아보지 않는가”


▎한국국학진흥원에 1호로 기탁된 <백담문집> 목판.
백담 구봉령은 예학(禮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사례(四禮) 중에서 가장 까다롭다는 상례(喪禮)에 관한 글이 전한다. ‘의정부에서 백관을 거느리고 권제를 따르도록 청한 계사(議政府率百官請從權制啓)’가 대표적이다. 1575년(선조8) 백담이 글을 짓고 의정부 이하 대소 신하들이 모여 임금에게 올린 건의문이다.

당시 선조의 부모가 돌아가셨다. 선조는 임금이면서도 자식 된 도리로 부모의 삼년상을 치르느라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졌다.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신하들이 대궐에 모여 절박한 심정으로 삼년상을 만류했으나 임금은 단호히 거절했다. 마침내 백담이 경전과 고사를 들어 읍소하는 글을 올린 것이다.

“삼년상은 천자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똑같습니다. 그러나 <예기(禮記)>에 몸 을 손 상하여 목 숨을 잃 는 것은 불효에 견주었습니다. 부모가 남긴 몸을 잇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고 사소한 예절을 따르는 것은 가볍기 때문입니다. 필부도 그러한데 종묘를 잇고 신민이 의탁하는 군주는 어떠해야 합니까. 그런데도 다만 말단의 예절을 지키고 막대한 책임을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백담은 그러면서 삼년상을 예법대로 마치지 않은 등나라 문공(文公), 위나라 효문(孝文), 송나라 효종(孝宗)의 사례를 들었다. 이들이 책임 때문이지 불효해서 그랬겠느냐는 것이다.

‘상례문답(喪禮問答)’이라는 글도 남아 있다. 제자인 권춘란의 질문에 답한 내용이다. 첫 질문은 적자(嫡子: 본처가 낳은 자식)’와 얼자(孼子: 양반과 종 사이에 태어난 자식)의 상복 차이였다. 백담은 이렇게 적었다. “예(禮)를 고찰해보면 같고 낮음을 분별한 문구가 없다. 예는 인정에 따라 바로 이와 같이 해야 한다. 지금 또한 따라서 시행해야 하고 버리는 것은 세속의 견해이다.”

스승을 위한 심상(心喪) 3년

권춘란은 스승에 대한 상복도 물었다. 답은 이렇다.

“모든 사람은 스승을 위해 상복을 입어야 한다. 은혜의 경중과 대소를 헤아려 시행하고 일률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예에 심상(心喪: 상복을 입지는 않으나 상중(喪中)과 같이 처신하는 행위) 3년이라 했다. 자공(子貢)은 스승 공자를 위해 돌아와 마당에 집을 짓고 또 3년을 지냈다. 어떤 상복을 입었는지는 모르겠다. 망령된 내 생각은 흰 상복에 흰 띠를 두르고 공무를 보러 나갈 때는 평상복을 입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백담은 실제로 스승 퇴계가 돌아가시자 애통해 하며 소복을 입고 기일에는 반드시 재계(齋戒,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함)했다고 전해진다.

201707호 (2017.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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