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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섬 문명사(7)] 잃어버린 파라다이스의 흑역사 하와이(Hawaii) 

독립왕국 화산섬에서 태평양전쟁 이후 서구의 전초기지로 식민화… 향유고래 노닐던 태초(太初)의 바다는 슬픈 전설로 남아 있고 

글·사진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 아시아퍼시픽 해양문화연구원장 asiabada@daum.net
대체로 우리는 하와이를 대표적인 세계 휴양지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훌라춤의 고혹적인 매력엔 참담한 조락(凋落)의 눈물이 깃들어 있다. 풍요와 아름다움의 배면(背面)에는 서구자본의 폭력과 침탈로 인한 ‘욕망과 환락의 애사(哀史)’가 자리하고 있다. 세계해양제국을 건설하겠다던 서양문명의 야심은 이 작은 섬에 피와 역병(疫病)을 부르고, 전쟁의 물결을 일으켰으며, 매춘의 그늘을 드리웠다.

▎하와이군도 호노룰루 부두의 전경. 하와이는 1851년 미국의 보호령이 됐다. 하와이 제도의 문명사적 궤적은 어떻게 오지의 화산섬에 인간이 들어와 살고, 어떻게 나라를 만들고, 어떻게 열강의 세계체제에 편입되어 가는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관광객을 원하지 않는다’


시인이자 원주민 저항운동가이며 여권운동가인 하우나니 카이 트라스크의 목소리. ‘카 라우이 하와이(Ka La’hui Hawai’i)’, 즉 ‘자치정부를 위한 하와이원주민운동’의 멤버인 그녀는 위스콘신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원주민의 자결권을 요구하는 많은 책과 글을 썼으며 시집도 발간했다. 하와이왕국 전복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감독하고 대본도 직접 썼다. 하와이대학에서 하와이 원주민 학생들에게 자신의 문화를 가르쳤으며, 하와이왕국 전복의 부당성, 반역사적 원주민의 처지와 자결권 요구, 백인의 인종주의적 차별 등을 주제로 평생 집회·강연·수업 등을 도맡았다. 최근에는 그녀의 명저 <하와이 원주민의 딸>이 한국어 번역본으로 나오기까지 했다.

거의 한 세기를 넘어서는 원주민의 반미적 발언은 대부분의 미국인을 경악시킨다. 대부분의 미국인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제국의 행로를 따라 기꺼이 ‘파라다이스’로 여행가서 태양이 비치는 감미로운 야자수 나무 아래 ‘훌라걸’을 취하려 할 것이라는 말들. 그러나 그녀는 매우 부드럽게, 그러나 때로는 단호하면서도 격정적으로 원주민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이런 ‘단도직입적’인 목소리를 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와이는 엄연히 국내법적으로 또한 국제법적으로도 미국령이며 미국의 주정부이기 때문이다.

원주민 하우나니가 원주민 자치권을 요구하는 역동적인 모습이야말로 하와이문화연구의 새로운 맥락, 아니 가장 진실한 영역일지도 모른다. 서구 중심의 민족지 작성에서 원주민의 ‘역동성과 저항성, 주체성과 객관성’은 무시되고, 가능한 한 ‘유별남과 특이함, 괴기스러움, 나태함과 패배의식’ 등이 강조되고 있음을 주목한다.

왜 독립왕국(獨立王國)에 ‘보호’가 필요했던가


▎대항해용 대형 카누와 고래뼈. 하와이 해양박물관을 들어서면 중앙 천장에 거대한 고래뼈가 걸려 있다. 향유고래의 유해(遺骸)는 한때 태평양을 주름잡던 태평양생태계의 가장 윗선이 멸종됐음을 확인시켜준다.
캘리포니아 법대교수인 스튜어트 배너가 10여 년 전에 하버드대학교 출판부에서 펴낸 <태평양 획득(Possessing the Pacific)>이란 책에는 하와이·호주·뉴질랜드·피지와 통가·알래스카 등 세계적 규모에서 벌어진 백인의 신대륙 획득과정이 잘 나와 있다. 원주민에게서 땅을 영원히 빼앗기 위해 군대를 동원한 협박에서부터, 자본가의 선동과 법률을 통한 합법화와 제도화 등 다양한 방식이 구사되었다. 하와이 역시 식민화 과정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인에게 하와이는 하와이 이민, 독립운동, 진주만 공습, 신혼여행지, 유학과 이민, 그리고 야자수와 와이키키, 평화로운 섬과 화산과 해변과 선남선녀의 벌거벗은 사진, 훌라춤의 매력 등으로 대충 각인되어 있다. 그런데 하와이가 미국의 식민지? 뭔 그런 소리를, 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하와이는 1851년 미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잘 살아가고 있는 독립왕국에게 왜 ‘보호’가 필요했던가. 하와이 제도의 문명사적 궤적은 어떻게 머나먼 오지의 화산섬에 인간이 들어와 살고, 어떻게 나라를 만들고, 어떻게 열강의 세계체제에 편입되어 가는지를 잘 보여주는 시금석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은 하와이를 매우 친숙하게 생각하면서도 정작 하와이를 잘 모른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하와이는 19세기 말까지 독립왕국이 분명했다. 하와이가 병합 이후에도 ‘준주’로 존재하다가 미국 공식적인 50번째 ‘주’로 편입된 것은 1959년. 불과 60년 전 일이니 하와이 원주민에게는 ‘어제 같은 옛날’의 일일 뿐이다.

미국의 해양제국건설은 서부개척시대보다 빨랐다. 카리브에서 시작되었고 동시다발적으로 필리핀과 괌으로 확장되었다. 서부개척의 최대치가 하와이까지 뻗어나갔다면,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도약이 ‘미국령’ 괌에서 성취된 것이다. 전선은 괌을 넘어 오키나와, 그리고 한반도까지 미친다. 우리는 그동안 미국의 서부개척만 배워왔지 미국의 바다 개척사에 관해서는 둔감하거나 무지하다.

미국의 해양제국 건설사를 복습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첫 번째 프론티어는 서부가 아니라 바다였기 때문이다. 카리브해에서 첫 단서가 풀린다. 스페인의 유일한 카리브해 식민제국인 쿠바에서 1895년 독립전쟁이 폭발한다. 그 결과, 1898년 12월 10일에 체결된 강화조약을 통해 쿠바가 완전히 독립할 때까지 미국이 임시로 점령한다. 실제로는 식민화였다. 태평양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필리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미국-스페인 전쟁이 일어나던 1898년에는 또한 하와이와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다.

19세기 말에 단순 식민지가 아니라 미국령으로 병합된 하와이는 미국의 태평양제국 건설에서 전초기지가 된다. 미 해군과 공군기지가 하와이제도에 들어서며 와이키키는 그들 군인을 위한 휴양소로 발돋움한다. 하와이가 더 급격하게 변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였다.

광의의 역사적인 시각에서 보면, 태평양전쟁은 권력과 부에 비해 세계적인 위상이 낮았던 일본과 미국으로 대표되는 신흥제국이 국제적인 위상을 확보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한 것은 태평양을 둘러싼 미국과의 해묵은 패권 다툼의 발화였을 뿐, 새삼스럽지 않았다.

호놀룰루에 가면 가장 먼저 비숍박물관(Bishop Museum)을 찾아간다. 관광코스에서 빠지지 않는 폴리네시아 문화센터가 ‘가짜 민속’의 대표 격이라면, 비숍박물관은 하와이의 정체성, 진정성 등의 품격을 갖춘 박물관이다.

카메하메하왕의 손녀로서 마지막 공주였던 비숍이 은행가였던 미국인 비숍과 결혼하여 세운 비숍박물관의 폴리네시안 홀에는 폴리네시안은 물론이고 미크로네시아, 멜라네시아 등 태평양 일원의 다양한 유물이 집결되어 있어 가히 태평양박물관이라 부를 만하다. 물질자료만 보유한 것이 아니라 각종 도서와 다큐멘터리 사진·필름·그림을 비롯한 방대한 아카이브가 있고 과학센터도 포괄하고 있다. 비숍재단은 카메하메하왕으로부터 비숍공주가 물려받은 방대한 토지와 자금을 보유하고 있어, 하와이와 폴리네시아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문화적 업적에 늘 함께한다.

비숍박물관: 마지막 황제의 서글픈 초상(肖像)


▎진주만의 풍경.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한 것은 태평양을 둘러싼 미국과의 해묵은 패권 다툼이 발화점이었다.
미국풍 화가들이 그렸음직한 왕들의 초상화는 미국에 포로가 되어 있는 왕조의 슬픈 역사를 말해주는 듯싶다. 서양옷을 차려입은 엉클 톰의 어색한 차림새, 검정 양복 입고 링컨을 빼어 닮은 초상화, 비스마르크 복장을 한 왕도 있다. 훈장을 단채 위엄 있게 부동자세를 취한 왕의 초상에서는 나라 망하기 직전 고종황제와 순종황제의 모습이 그대로 겹쳐진다.

비숍박물관의 전시물은 진귀하고 고급스러운 유물과 하와이왕국의 역사를 담은 왕조사, 그리고 미크로네시아·멜라네시아·폴리네시아의 태평양 전체에 걸친 방대한 컬렉션에 기초하고 있다. 반면 9번 부두의 ‘하와이 해양박물관’은 그야말로 해양을 중심으로 한 하와이 해양세계와 해양의 역사 및 생활사에 집중하고 있다.

1층 전시실에 들어서면 2중 카누를 타고 태평양을 항해하는 원주민 선조의 영웅적 활약이 장대하게 묘사된 그림을 만난다. 마그마가 분출하는 화산을 향해 폴리네시안이 전진하고 있다. 이런 그림은 상상이 아니라 선조들이 겪었던 화산 폭발의 목격담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긴 항해 끝에 이름 모를 섬에 닿고, 그 섬의 엄청난 화산폭발을 목격한 원주민의 경험은 신화를 통하여 구술역사로 정착하면서 이어져 왔다. 하와이언의 기원과 그네들의 전개과정은 신비롭기도 하고 시적이기도 하다.

하와이에는 태초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 태초에 오로지 바다였으나 화산 폭발로 말미암아 하와이군도가 탄생했으며, 인간이 없는 조건에서 온갖 동식물이 자라나는 태평양의 낙원 그 자체였다. 하와이 군도의 인간 출현은 인류사에 비하면 지극히 최근의 일이다. 이를테면 ‘불과 수분 전’ 인간이 하와이군도에 첫발을 내디딘 셈이다.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폴리네시안의 위대한 대항해는 기원전 1500여 년 전에 시작된 동남아시아의 라피타(Lapita) 문화를 향유하던 이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인도네시아를 출발하여 뉴기니의 동쪽해안을 따라 최초의 여행을 나선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유추한다. 이어 그네들은 멜라네시아의 섬들을 점령한 다음, 동쪽으로 진출한다. 적어도 400~600㎞를 건너 통가와 사모아제도에 정착했다. 사모아군도와 통가는 ‘폴리네시아의 요람’ 같은 곳이며, 아마도 몇 척의 후기 폴리네시아인이 당도했을 것이다. 사모아, 통가 등에서 다시 소시에테 제도까지 1800㎞를 가로지른다. 이로부터 타이티, 마르퀘사스를 거쳐 하와이에 이르는 고단한 행로가 대를 이어 계속되었다.

이상한 바람을 타고서, 침묵의 바다인 적도의 무풍대를 거치면서, 거친 바다와 폭풍우를 용감하게 헤쳐 나가며 새로운 땅에 대한 의문을 지속시켜 나갔다. 별, 구름과 바람, 새들의 움직임, 이 모든 것이 항해의 기초가 되었을 것이다. 폴리네시안의 대항해는 인류 문명사에서 가장 위대한 분산과 전파의 하나다. 그 뒤로 이어진 역사는 그 자체로 위대한 서사시였다. 태평양 곳곳을 뻗어나가 결과적으로 생존이 가능한 모든 섬에 사람들이 정착하게 된다. 해양세계이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서쪽에서 불어온 피와 역병의 노도(怒濤)


▎1. 하와이 독립왕국의 마지막 왕을 형상화한 동상. 19세기 말까지 독립왕국이었던 하와이는 미국 병합 이후에도 한동안 ‘준주’로 존재하다가 1959년 미국의 50번째 ‘주’로 편입됐다. / 2. 알로하 시내의 거리. 지금은 현대화된 최신 건물이 즐비하지만 태초의 하와이엔 사람이 살지 않았다. 하와이 군도에서의 인간 출현은 장구한 인류사에 비하면 지극히 최근의 일이다. 애당초 섬의 원주인은 평화로운 바다와 동식물들이었던 것이다.
거친 파도를 헤치며 하와이에 닿은 폴리네시안은 대단히 실용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네들은 바다와 땅을 두루 이용할 줄 알았다. 수동적이지 않았으며 주어진 에코시스템을 상호 이용하는 사람들이었다. 마르퀘사스와 타이티에서 출발했을 때, 생존에 필요한 돼지와 얌·타로·바나나·빵나무 등 24종의 곡식과 동물들을 가지고 왔다. 해안에 정착해 숲을 태워 화전을 일구었으며, 물줄기를 조절해 관개시설을 만들고 거대한 고기잡이 못을 조성했다.

1200년경까지 바람이 부는 해안가에 영구적인 정착지가 마련된다. 뱃길 운항에서 바람은 절대적이었기에 바람 부는 해안가가 중요했다. 1400년경에 이르면 해안가가 거대한 타로 농경지와 감자밭으로 변한다. 하와이안은 언어, 예술, 수공업 등의 다양한 문화를 발전시킨다. 인구는 거의 40만 명에 이르렀으며, 사회 자체가 복잡하게 진화한다. 언제나 평화로운 상태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작은 규모의 족장들이 번성했으며 주도권을 잡기위한 무자비한 전쟁이 잇따랐다. 그러한 전쟁과 경쟁관계를 끝낸 족장이 나타났으니 1795년 카메하메아(Kamehameha, 1758~1819) 왕이다.

그러나 이 머나먼 태평양의 하와이 제도에도 낯선 이방인이 나타났다. 역사적이고 극적인 첫 방문은 제임스 쿡 선장이었다. 쿡의 항해는 세 번에 걸쳐 이루어진다. 1878년 1월에 오하우에 당도했으며, 다음날 카우아이와 니하우에 당도한다. 그는 섬의 원주민으로부터 따스한 환대를 받았으며, 섬들을 ‘샌드위치섬’으로 명명한다. 2주 뒤에 북서항로를 찾을 목적으로 아메리카로 떠난다. 그러나 이 같은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다시 2주 뒤에 그는 리졸류션호와 디스커버리호로 돌아와 하와이섬의 남쪽인 케아라케쿠아만에 정박한다. 1799년 2월 14일, 쿡 선장과 네 명의 선원이 도둑맞은 돌칼 문제로 하와이안과 다툼을 벌인 끝에 현지에서 죽임을 당한다. 쿡 선장과 그의 선원들은 오늘날의 하와이군도 전체를 샅샅이 관찰하면서 항해했다. 쿡은 일단 문을 열었다.

서구인이 하와이안과 처음 만났을 때, 총은 현저한 물건이었다. 비록 원주민들이 유럽인을 그 전에 몰랐었지만 그들은 쇠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쇠를 요청했고, 선물로 받아들였다. 쇠로 쇠봉을 만들었으며, 이는 쿡에게 재앙으로 다가왔다. 쿡 선장의 부하인 다비드가 기록하길, ‘다른 원주민이 쇠막대로 쿡의 뒤에서 목을 찔렀다’고 기술했다.

호놀룰루 시내의 주정부청사 정면에 청동으로 빚은 동상이 있다. 지팡이를 손에 쥐고 모자를 쓴 단구의 사내, 다미안(Damien, 1840~1889) 신부다. 다미안 신부는 하와이 한센병의 아버지였다. 다미안이 1873년에 당도할 때까지 어느 성직자도 수용소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으며, 탈법과 극심한 처우 속에 살아가야만 했다. 성자 후보에 오른 다미안 신부는 벨기에 사람으로, 추방당한 환자를 위해 일생을 바쳤다. 지금 그는 호놀룰루 시내의 동상으로 남아 있다.

서구문명이 신세계에 안겨준 최대 선물은 전염병이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발을 디딘 지 불과 40년 만에 탐험가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대부분을 밟고 다닌다. 유럽인의 강제노동제도, 그리고 유럽에서 이입된 새로운 질병과 접촉하면서 원주민은 멸절된다. 흑사병으로 알려진 새로운 역병이 14세기에 아시아로부터 수입되어 이미 기근으로 쇠잔해진 유럽인을 공격했을 때, 전사한 인구수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신대륙에서 죽어갔다. 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이와 똑같은 일이 태평양에서도 벌어졌다. 하와이 같은 청결한 대양에는 병원체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서구인이 옮겨온 온갖 병균에 아메리카의 원주민이 당했던 것처럼 섬의 주민들을 치명적인 재앙 속으로 밀어 넣었다.

고래의 꿈과 달콤한 독배(毒盃)


▎태평양의 섬에서 흘러들어온 난민들. 19세기 말에 단순 식민지가 아닌 미국령으로 병합된 하와이는 미국의 태평양제국 건설에서 전초기지가 된다. 미 해군과 공군기지가 하와이제도에 들어서면서 와이키키는 그들 군인을 위한 휴양소로 변모하게 된다.
20세기 접어들어 하와이 원주민 사이에 이상한 병이 돌기 시작했다. 막연하게 ‘중국병’이라 부른, 한센병이었다. 1940년대에 약이 발명되기 전까지 이 병에 걸리면 심하게 앓다가 결국은 죽음에 이르고 만다. 몰로카이섬의 칼라우파파에 격리수용지구가 만들어지고 환자들은 강제수용된다. 나병환자촌은 1865년에 ‘나병 전염금지법’을 선포하고 지형적으로 고립된 몰로카이섬의 구석에 수용소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1959년, 격리정책이 종료될 때까지 오랜 세월동안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무려 7000여 명이나 강제수용되었다. 하와이의 집단촌에는 한국인도 수용되고 있었다. 1959년에 이르러서야 하와이 주정부는 나병환자 강제입소를 중단한다. 그 대신에 요양원이나 아니면 집에서 통원치료를 받도록 조치한다.

그런데 그 어떤 질병보다 무서운 것은 ‘자본’이란 ‘신비로운 마약’이었다. 자본주의 개념조차 몰랐던 원주민사회에 자본이란 이름의 마약이 퍼졌다. 신분제사회이기에 생산품으로 일정한 공납을 바쳐야 했지만 화폐의 개념이 없던 사회에 돈의 출현은 사회적 유대감을 일시에 무너뜨렸다. 돈이 최고의 가치를 발휘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돈 없는 원주민사회는 절망했다. 그러나 절망 끝에 돈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땅의 소유를 생각지도 못했던 이들에게는 땅을 사고 판다는 개념 자체가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자신의 땅 대부분을 외래인에게 빼앗기고 난 다음, 땅에서 추방당한 원주민은 또 한번 절망했다. 문제는 그 절망이 한 세대에 그치거나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쇠붙이를 몰랐던 이들에게 쇠붙이는 문명의 이기가 아니라 전쟁의 도구로만 도입되었다. 총과 대포가 들어오고, 화약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고래잡이배의 날카로운 쇠작살이 내뿜는 살기를 알았을 때, 원주민사회도 이러한 항구적 폭력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카바 같은 신경쇠약성 음료를 먹는 의례를 집행하기는 해도, 술은 마시지 않던 이들에게 양주가 흘러 들어왔다. 독한 양주는 배꾼을 통하여 지천으로 퍼졌다. 술은 여자를 필요로 했으니 매춘이 성황을 이뤘고, 원주민 여자는 몸을 팔아야 했다. 술과 매춘산업은 하와이에서도 완벽하게 승리를 거두었다.

하와이 해양박물관을 들어서면 중앙 천장에 거대한 고래 뼈가 걸려 있다. 공룡자연사박물관의 멸종된 공룡처럼 흰 뼈를 앙상하게 드러내고 관람객을 굽어본다. 향유고래의 유해(遺骸)는 한때 태평양을 주름잡던 태평양생태계의 가장 윗선이 멸종되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쿡 선장이 도착한 지 50년이 채 지나지 않아 다른 낯선 사람이 섬으로 들어왔다. 그네들은 섬을 떠나지 않았다. 선장으로서, 무역업자로, 포경선원과 선교사, 모험가와 떠돌이로서 들어왔다. 새로운 생각과 사고방식, 또한 새로우면서도 어쩌면 당혹스러운 행동들도 가지고 들어왔다.

본격적으로 하와이에서 펼쳐진 고래잡이도 그 중의 하나였다. 고래잡이는 기본적으로 ‘떠돌이’ 사냥이다. 온갖 인종들이 몰려들 수 밖에 없는 요인을 지닌 바다에서 아주 특수한 직업이기도 하다. 그러한 고래잡이와 고래잡이배의 건조가 하와이의 주요산업이 되었으며, 특히 마우이는 태평양 고래잡이의 메카가 된다.

포경이 하와이안에게 미친 영향은 심대했고 어떤 면에서는 곤혹스러웠다. 하와이안은 값진 재화가 항구를 통하여 쏟아지는 것을 목격했다. 고래가 돈이 된다는 것을 안 것이다. 해안가는 고래잡이배로 그득 찼으며, 해안에 모여 살던 원주민은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다. 1823년 무렵, 인구가 40만 명에서 13만5000명으로 급감한다. 원주민의 삶을 지탱하던 섬 공동체적 카푸제도를 상실하자 원주민은 당황하기 시작했으며 정상적 삶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

하와이안은 그네들의 믿음과 영혼을 안착시키지 못한 채 문란하고 포악하기까지 한 포경인과 선교사 사이에서 고통받았다. 포경선원은 원주민 여성을 탐했고 성매매를 강력 요구했다. 이 같은 현상은 고래가 멸종될 때까지 무려 수십 년간 지속되었다.

사탕수수: 설탕정치의 시대


▎미국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원주민들의 훌라춤이 통제되는 그림. 미국 정부와 경찰, 선교사들은 끊임없이 훌라를 제어했으며 어떤 특별한 모임에서도 훌라를 금했다. 1930년대 중반에 와서는 훌라의 춤과 노래에서 일부 흔적만 남는다.
18세기, 유럽에는 새로운 기호품이 등장했다. 설탕, 커피, 담배 같이 식민지에서 수입된 열대작물이 그것이다. 그럴 뿐 아니라 카카오, 인디고와 같은 염료용 식물, 목화와 쌀 따위 작물도 각광받았다. 하와이에도 설탕의 시대가 왔다.1870년대 포경의 시대가 끝났는데도 하와이의 불안감은 해소되지 않았다. 이제 19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는 설탕산업으로 대체된다. 하와이원주민도 설탕을 본디부터 먹었다. 그러나 그 설탕은 토착식물인 사탕수수를 원시적으로 가공하여 만든 설탕이었다. 이제 카리브해에서 불던 설탕산업의 열풍이 하와이로 뒤늦게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인류학자 시드니 민츠(Sydney Mintz)의 표현대로, 설탕은 권력과 깊숙이 연계되어 있었다. 하와이에서 설탕농장이 시작되기 직전, 원주민을 땅에서 쫓아내는 일들이 벌어졌으니, 이는 양털에서 옷감을 짜기 위해 목장을 만들면서 농민을 땅에서 쫓아낸 인클로저운동에 비견된다. 미국자본은 하와이에서 사탕수수농장을 시작했으며, 이제 남은 문제는 노동력만 공급되면 만사 오케이. 중국인, 일본인 그리고 한국인도 이러한 필요에 의해 하와이에 당도하게 된다.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은 전혀 새로운 세상과의 만남이었다. 그 이전의 유민으로 만주, 러시아 등으로 떠난 이민의 역사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하와이 이민은 1902년 12월 22일 121명이 제물포항에서 출발한 것을 시작으로, 1905년 후반에 이민이 금지될 때까지 7226명이 건너갔다. 이민국 최초의 한국인 공식기록은 1901년 1월 9일 환향한 선편으로 도착한 ‘류두표’였다. 그러나 공식적인 하와이 이민은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허락을 득하고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으로 취업이민을 떠난 한인이 호놀룰루항에 당도한 1903년이다. 그래서 미주 한인들은 2003년 1월 13일을 이민 100주년 기념일로 정했다.

방대한 사탕수수농장을 경영하는 데 필요한 많은 노동력을 하와이 자체에서 해결할 수 없었다. 지나치게 중국인 숫자가 늘어나자 농장주협회는 주한 미국공사 알렌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휴가차 귀국해 미국에 체류 중이던 알렌은 1902년 3월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사탕수수 농장 측과 한국인 노동자 이민문제를 협의한 뒤 서울로 돌아간다. 한국정부로서는 그 당시 혹심한 가뭄에 시달리고 있던 경제적 이유, 그리고 하와이 이민을 개국진취운동의 하나로 간주하였던 사정 등에 준거하여 허락한다.

그리하여 1882년 미국은 당시까지 닫혀있던 조선과 사업 계약을 한 첫 번째 나라가 된다. 1903년 1월 13일, 100여 명의 한국인이 하와이에 당도하며, 플랜테이션을 뛰어넘어 다양한 직업으로 진출하게 된다. 다시 3년 이내에 4500여 명의 한국인이 당도하며, 높은 문자해독력과 근면성으로 쉽게 뿌리를 내린다.

호놀룰루에 두고 온 ‘소녀(少女)’


▎알로하탑의 주변 풍경. 호놀룰루의 파라다이스 같던 목가적 풍경은 와이키키 개발 등으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군사기지가 생기면서 해군이 몰려들고, 기지촌이 들어선다.
하와이에는 인종학상 재미있는 사람들이 많다. 처음 이민 온 증조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한국인이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일본 이민자 2세와 결혼한다. 그 일본 이민자 2세의 경우, 할머니의 부친은 미국인이고 모친은 일본인이다. 그 미국인이라는 것도 이탈리아인이 미국으로 건너와 그리스인과 결혼해 하와이로 이주한 경우였다. 이들에게 태어난 아버지가 폴리네시안 원주민 후예와 결혼했다.

그런데 그 폴리네시안도 혼혈이어서 부친이 필리핀인이었다. 여기서 태어난 딸과 아들은 한국인일까, 일본인일까, 미국인일까. 아니면 이탈리아 피와 그리스 피, 폴리네시안 피는 어느 정도일까. 미국 국적의 하와이 시민으로서 하와이원주민 자치운동에도 열심인 그에게 인종이란 애초부터 의미 없을 것이다.

신(新) 하와이인이란 인종학적 개념이 있다. 북서유럽인·남부유럽인·폴리네시안·중국인·일본인·한국인·필리핀인, 그리고 미크로네시안과 멜라네시안 같은 여러 인종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인종을 뜻한다. 신하와이인종은 아직도 변화하고 있다.

호놀룰루의 그야말로 파라다이스 같던 목가적 풍경은 와이키키 개발 등으로 본격적으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에 할리우드와 최고의 도박도시 라스베이거스가 건설되었다면, 서부에서 태평양으로 행진한 뒤로 하와이에 와이키키가 건설된 것이다. 군사기지로 변하면서 해군이 몰려들고, 기지촌 냄새를 풍기기 시작한다.

다음 그림엽서를 보자. ‘왜 배가 난파했을까(Why the Ship was Wrecked, 1910년)’. 답변은 그림에서 보듯 명료하다. 와이키키를 상징하는 코코넛 야자수 아래에서 훌라춤을 추다 말고 원주민 여성이 미 해군병사에게 기댄다. 해군병사와 여성의 표정이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배가 난파한 것은 ‘참으로 잘 된 짓’이다.

‘호놀룰루에 두고 온 소녀(The girl I left behind in honolulu, 1907년)’. 원주민 소녀가 부두에서 하염없이 부채를 흔들고 있는데 군함은 말없이 떠난다. 권력으로서의 남성이 대상으로서의 여성을 버려두고 떠나지만 소녀는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는, 우리 유행가의 ‘동백아가씨’ 형이다.

20세기 초반부터 와이키키는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환락가로 둔갑한다. 할리우드 스타면 으레 와이키키에서 한 번쯤 염문을 퍼뜨리거나 파도타기 앞에서 수영복사진을 찍는다. 마지막 남은 일은 쇼핑뿐이다. 하와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특히나 쇼핑의 본고장이 된다. 오늘날 소비의 열광을 찬양하기 위한 아메리카의 새로운 사원인 쇼핑몰에는 밤낮으로 수많은 신자가 몰려든다. 전지구적인 이들 쇼핑센터의 열기는 로고와 스타·노래·우상·마크·상표·휘장·포스터·축제행사 등을 통해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똑같이 만든다. 자본의 힘이다. 와이키키 목전의 알라모아나센터가 상징적 징표다. 이곳에서는 자본의 욕망이 실현되고 기쁨으로 충만케 된다.

그늘진 매혹이여, 영락(零落)한 춤사위여


▎‘왜 배가 난파했을까(Why the Ship was Wrecked, 1910년)’라는 문구가 적힌 하와이 그림엽서. 와이키키를 상징하는 코코넛 야자수 아래서 훌라춤을 추다 말고, 원주민 여성이 미 해군병사에게 기댄다. 배가 난파한 것은 하와이에 행운인가, 불행인가?
‘훌라춤’ 없는 하와이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유람선에도, 관광버스에도, 온갖 팸플릿에도 훌라춤 일색이다. 하와이 최대 상징물은 당연히 훌라춤. 우리에게 훌라춤은 한갓 벌거벗고 무조건 이국인만 만나면 꽃이나 걸어주는 여인의 상투적인 몸짓일 뿐이다. 그러나 서구와 첫 접촉을 시작하던 당시의 훌라는 구전문학이자 구전역사였다. 하와이안의 언어와 정치제도, 문화와 종교전통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훌라춤을 이해하고 감상하기가 불가하다.

하와이에서의 춤이 선교사에 의하여 금지되기에 이른다. 섬에 팽배한 ‘방종’을 뿌리뽑기 위해서였다. 미국 정부와 경찰, 선교사들은 끊임없이 훌라를 제어했으며 어떤 특별한 모임에서도 훌라를 금했다. 1930년대 중반에 이르면, 훌라의 춤과 노래에서 일부 흔적만 남는다. 그토록 금지시켰던 훌라가 왜 하와이의 대명사로 되살아난 것일까. 와이키키의 관광지화가 촉진되면서 훌라는 관광상품의 반열에 오른다. 남성의 훌라는 의미를 잃게 되고, 오로지 벌거벗은 여성의 훌라춤만 남았다. 신성성이 소멸된 상업적 훌라, 매춘적 훌라에 관해, 굳이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놈 촘스키 반열의 세계적 지성으로 언급되곤 하는 하우나니 카이 트라스크는 ‘우리에게 관광은 필요없다’고 선언한다. 어쩌면 하와이의 어제와 미래는 제주도의 것일 수도 있다. ‘섬의 문명사’란 무엇인가. 섬의 ‘흑역사’는 본의 아니게 세계 여러 섬의 현실을 옭아매는 족쇄다.

섬은 규모의 경제라는 측면에서 대륙에 비하여 언제나 취약하다. 따라서 섬으로 얼마든지 언제든지 외부의 힘이 밀어닥칠 수 있다. 시칠리아가 그랬고, 아일랜드가 그러했다. 심지어 타이완, 홋카이도, 오키나와 등 동아시아 섬들의 역사가 동일하다.

제주도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미국의 어엿한 주정부를 구성하는 하와이의 문명사적 궤적 또한 흑역사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그 운명의 족쇄를 적절하게 풀어내고 미래를 위한 비전으로 바꾸어내는 일, 지금 세계 곳곳의 섬에서 처지와 여건이 다른데도 비슷하게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섬의 문명사’는 복고주의적 과거에만 머물지 않고, 이러한 현실 문제와 과제를 함께 들여다보는 중이다.


주강현 - 제주대학교 석좌교수, 아시아퍼시픽 해양문화연구원장. 해양사·문화사·생활사·생태학·민속학·고고학 등 전방위로 연구해온 우리 시대의 대표적 ‘지식 노마드’이자 비교해양문명사 연구에 몰두하는 해양문명사가. 아시아 바다는 물론 대양의 섬으로 시야를 넓혀가며 비교해양문명사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적도의 침묵><독도강치 멸종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707호 (2017.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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