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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교수의 ‘조선을 만든 사람들’(18)] ‘고려말의 자베르’ 최영 

새 시대에 대한 비전 없이 ‘허망한 변혁’에 안주하다 

김영수 영남대 정외과 교수
변란 때마다 군대를 이끌고 승리를 거뒀던 전쟁영웅 최영. 고려시대 대표적 무인이자 ‘충’의 상징적 인물이었지만 변화하는 시대를 내다보는 통찰력이 부족했던 그는 부패한 권신 이인임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정치의 중심에 서면서 그의 운명은 점차 비극적 최후로 내몰렸다.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 최영(서인석 분) 장군이 요동정벌에 나서는 장면. 당시 이성계는 우왕과 최영이 요동을 정벌하기로 결정하자, 4가지 근거(四不可)로 정벌을 반대 이들과 대립했다. / 사진제공·KBS
옳은 길에 온 삶을 바쳤는데, 생의 마지막에 무언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역설적이고 비극적인 삶이다. '레 미제라블'의 자베르 경감이 그렇다. 그는 범죄자의 아들로 감옥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법은 밤하늘의 별 같은 것”이란 신념을 가지고 법의 수호신이 되었다. “밤하늘의 별은 조용하지만 흔들리지 않는다. 그 별을 보고 사람들은 좌표를 삼는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가면 별은 항상 정해진 그 자리에 서 있다.”

확실히 그런 사람이 없으면 사회는 정글일 것이다. 법은 인간다움의 조건이다. 그런데 법은 무엇인가? 자베르는 이 질문을 한 적이 없었다. 장발장 때문에 자베르는 이 질문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발밑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고, 다리에서 몸을 던졌다. 역설이란 하나의 가치를 다른 가치로부터 보는 것이고, 그로부터 생겨나는 깊은 심연이다. 그 깊이가 비극의 깊이다. 최영(1316~1388)은 어떤 의미에서 고려말의 자베르이다.

최영의 가문은 고려왕조와 운명의 궤적을 같이한 가문이다. 그 탄생과 멸망을 함께했기 때문이다. 최영은 동주(東州) 최씨이다. 동주는 강원도 철원(鐵原)의 옛 이름이다. 동주 최 씨의 시조는 최준옹(崔俊邕)이다. 그는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세운 건국공신이다. 삼한공신(三韓功臣)에 책봉되었고, 정1품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올랐다. 그의 5세손 최석(崔奭)은 과거에 장원급제에 문종, 선종, 순종 세 왕을 섬겼다. 그의 아들은 최유청(崔惟淸, 1093~1174)이다. 그는 소시에 아버지를 잃었지만, 공부에 매진하여 예종 때 과거에 합격했다. 그는 고려 중기의 저명한 문인이자 강직한 관인으로 성장했다. 뛰어난 외교관이자 선량한 지방관이었다. 최유청의 4세손이자 최영의 부친인 최원직(崔元直)은 종6품 사헌규정(司憲糾正)이었다. 최영이 16세 때 그는 세상을 하직하며 “너는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최영은 평생 그 유언을 지켰다.

동주 최씨는 저명한 문신 가문이었다. 최영은 최유청의 5세손이나, 무신으로서의 그의 존재는 돌연변이에 가깝다. 다만 어머니가 황해도 봉산 지씨(鳳山 智氏)로 무장 가문이다. 현종대의 지채문(智蔡文, ?~1026)은 그 가문을 빛낸 무장이다. 그는 1010년 제2차 거란 침입 때 피난하는 현종을 끝까지 지킨 충신이다.(<지채문전>)

최영은 소시부터 “용모가 장대하며 완력도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다(風姿魁偉 膂力過人)”고 한다. 무장으로서의 신체적 조건을 타고난 것이다. 최영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공민왕 원년(1352) 조일신의 난 때다. 이때 공민왕은 이인복과 모의해 조일신을 유인, 처형시켰다. 그때 별동대로 나서 조일신 일당을 처형한 게 안우, 최영 등이다. 그 공로로 최영은 호군(護軍)에 발탁되고, 공민왕 3년(1354) 대호군(大護軍)으로 승진했다. 호군은 정4품 무관으로, 원래 명칭은 장군이다. 처음부터 고위급 무관으로 채용된 것이다. 대호군은 종3품관으로서, 고려의 중앙군인 2군(二軍)·6위(六衛)의 부지휘관이다.

전쟁영웅, 신돈과 대립하다


▎최영의 영정. / 사진제공·김영수
공민왕 3년(1354) 6월 최영은 중국의 농민반란군 진압에 참가했다. 당시 중국 대륙은 홍건적의 봉기로 들끓었다. 몽골제국은 아직 쓰러지지 않았지만, 잇단 가뭄과 홍수, 전염병, 그리고 황실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원은 고려에서 병력을 징발했다. 이때 중국 출정군 중에는 뒷날 고려의 여러 전쟁에서 활약한 장군이 많다. 최영을 비롯하여 인당, 정세운, 황상, 이방실, 안우 등이다. 6월에 고려에서 출발한 2000명의 군대는 8월 10일 연경에 모여 강남으로 내려갔다. 목표는 장사성이 이끄는 홍건적이었다.

장사성은 1321년 장쑤(江蘇)성 타이저우(泰州) 출신의 염전 노동자 출신으로, 당시 33세였다. 그는 소금밀매 무리를 이끌다가 1353년(공민왕 2) 봉기해 장쑤성 고우부(高郵府)를 점령했다. 연경에 모인 100만의 정부군은 원 승상 톡토 테무르(脫脫帖木兒, 1314~1356)의 지휘 하에 전투를 개시해 28회의 공격 끝에 성을 거의 함락했다. 그러나 톡토가 갑자기 체포되어 죽임을 당했다. 정적 카아마(哈麻, ?~1356)의 음모였다. 카아마는 톡토가 기황후의 소생 황태자 아유시리다라의 책봉에 회의적이라고 참언했다. 톡토는 명장이자 명재상이었다. 그의 치정은 ‘지정신정(至正新政)’으로 불린다. 유능한 지휘자를 잃은 몽골군은 궤멸적 패배를 당했고,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고우성 전투 뒤 고려군은 인근 회안로(淮安路: 지금의 江蘇省 淮安市)로 이동하여 수차 전투를 벌였다. 8000여 척의 배를 타고 온 홍건적이 회안성(淮安城)을 포위하자 주야로 역전하여 지켜냈다. 최영은 여러 차례 창에 맞았지만 분전해 적을 대부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최영이 1388년 요동을 두고 중국과 일전을 벌일 결심을 한 것은 아마도 이때의 경험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도 족히 상대할 만한 적으로 여겼다.

이후 최영은 두 차례의 홍건적의 난에서 싸우고, 김용의 반란을 제압해 공민왕의 생명을 구했다. 또한 공민왕 13년(1364) 덕흥군이 원나라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을 때, 무너진 군대를 삼엄한 군율로 수습해 겨우 물리쳤다. 국가의 위기가 있는 곳에 최영이 있었다.

최영이 처음 정치적 곤경에 처한 것은 신돈 집권기였다. 공민왕 14년(1365) 5월, 신돈이 집권했다. 그는 즉시 대대적 숙청에 나섰는데, 그 첫 대상이 바로 최영이었다. 당시 최영은 동서 강도지휘사로서 강화도에서 왜구를 방어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때 병력을 동원해 사냥에 나섰다. 사냥은 군대의 일상적인 전쟁 연습이다. 하지만 신돈의 입장에서는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집권 초기에 강력한 장군이 수도 근처에서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움직인다는 것은 정치적 위협이다. 더욱이 왜구가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원래 최영과 신돈의 사이도 좋지 않았다. 최영은 일찍이 밀직사(密直使) 김란이 두 딸을 신돈에게 바친 일을 비난한 바 있었다.

신돈은 이 문제를 즉각 공민왕과 협의했다. 그러자 공민왕은 사자를 보내 최영을 파면하고 김속명으로 대체했다. 만약 최영이 반발한다면 상황이 위험했다. 그래서 병권을 박탈하고, 믿을만한 인물에게 군대를 장악하게 한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군대와 정보기관의 장은 불시에 교체한다. 그만큼 위험한 존재기 때문이다. 최영은 고민했겠지만 왕명에 복종하고 새 임지인 경주로 떠났다. 하지만 최영을 반드시 죽이려는 신돈은 무장 이득분을 경주로 파견해 심문했다. 당시 합포(合浦, 현 마산)를 지키던 경상도순문사 정사도(鄭思道)가 극력 반대하지 않았으면, 최영은 그때 죽었을 것이다.

최영은 신돈에게 큰 위협이었다. 하지만 신돈 독단으로 죽이려고 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최영의 명망과 군사적 업적, 정치적 중요성은 확고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은 국가의 큰 손실이었다. 그렇다면 최영의 제거는 공민왕이 바란 것이다. 왜 최영 같은 충신을 죽이려고 했는가? 공민왕은 충신이라는 존재를 믿지 않았다. 조일신은 어떤가? 심지어 김용조차 배신하지 않았는가? 한비자, 마키아벨리 모두 왕은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명예로운 자, 고결한 자, 용기 있는 자는 더 위험하다. 모주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불명예보다 죽음을 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영이 그런 사람이다.

충신 최영을 경계한 공민왕


▎원말의 권신 카아마(哈麻). 1354년 홍건적을 초멸하기 위해 남정한 원 승상 톡토를 탄핵해 제거했고 이 사건으로 원나라는 멸망의 길에 들어섰다. / 사진제공·김영수
최영은 일찍이 왕에게 항명한 적이 있었다. 덕흥군의 난이 끝난 어느 때 공민왕은 풍저창사 정득년에게 지시해 환관들에게 쌀을 주도록 했다. 풍저창은 중앙정부의 제반 경비를 주관하는 부서다. 이곳의 재물 출납은 도첨 의부와 밀직사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왕이나 중앙관서들이 임의로 재정을 유용하는 것을 막는 제도다. 정득년은 왕명을 거부했다. 공민왕이 노하여 처벌하려고 하자, 최영은 “책임은 저희에게 있지 그는 죄가 없다”고 변호했다. 정득년은 석방되었다. 이것은 최영이 왕명보다 국법을 우선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공민왕은 이런 일은 결코 잊지 않는다. 노국공주의 영전공사에 반대한 유탁의 경우가 그렇다.

무력은 일정한 크기를 넘어서면 정치적으로 바뀐다. 왕이나 국가에 무력이란 이중적이고 역설적 존재이다. 왕과 국가를 지키는 최후의 방패지만, 그 반대로 자신을 찌르는 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모든 무장은 언젠가 제거될 운명에 처한다. 생존을 위해서는 그때가 오기 전에 물러나거나 아니면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 공민왕 11년, 제2차 홍건적의 난을 승리로 이끈 정세운, 안우, 김득배, 이방실은 모두 처형되었다. 그들의 잘못은 왕이 너무 취약해진 때에 너무 큰 전공을 세웠고, 대군의 지휘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현명한 장군은 위업의 절정에 올랐을 때 전장에서 죽는 것이다. 그러면 명예의 전당에서 영원히 산다. 신돈 집권 뒤 최영은 이런 문제를 절실히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최영은 그런 문제에 별로 개의치 않은 인물이다. 그래서 그의 삶은 비극으로 끝난 것이다.


▎원말의 명재상 톡토 테무르(脫脫帖木兒). 기울어져가는 원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진력했으나, 탄핵당해 유배에 처해졌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가 죽은 뒤 원 제국은 해체의 길로 들어섰다. / 사진제공·김영수
최영은 공민왕 20년(1371) 신돈이 제거된 뒤 소환되어 찬성사에 임명되었다. 공민왕 23년 최영은 탐라 정벌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원 지배기에 제주도는 원제국의 직할지였다. 원은 제주도를 말 목장으로 만들었다. 공민왕 23년 주원장은 제주 말 2000필을 요구했으나, 탐라의 몽골 목부들은 이를 거부했다. 그리하여 최영은 전함 314척, 군사 2만5600명을 통솔하여 탐라 정벌에 나섰다. 1389년 박위의 쓰시마정벌 규모는 전함 100척, 군사 1만 명에 불과했다. 탐라 정벌의 규모는 국가간 전쟁 수준이다. 공민왕이 이처럼 만전을 기한 것은 탐라의 영토 소유권에 대한 위험을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공민왕은 국제정치와 영토에 관해 동물적 감각이 있었다. 1365년 반원정책 때도 동북면의 쌍성총관부와 압록강 일대 영토를 회복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뒤에 명나라가 반드시 소유권을 주장했을 것이다. 1388년의 요동공벌도 이 때문이었다. 탐라도 그렇다. 마침 명이 탐라의 말을 직접 가져가지 않고 고려에 요구했기 때문에, 고려는 이를 기화로 탐라의 소유권을 명백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최영은 성공적으로 작전을 완료했지만, 그 사이 공민왕은 불귀의 객이 되었다.

공민왕대까지 최영의 의미는 주로 군사적인 것이었다. 그는 국가 운영에서 단순한 무장 이상의 의미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우왕대에는 국가를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이인임의 보조적 의미로 제한시켰다. 명료한 국가 운영의 비전과 좌표가 없었기 때문이다.

1374년 우왕의 즉위를 둘러싼 권력투쟁은 앞서 살펴보았다. 결과적으로 최영은 이인임을 지지하여, 이인임 정권의 무력적 기반을 제공했다.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인임과 신진 유신과의 대결에서 이인임을 지지했다는 것이다. 이 대립은 이때는 단지 외교정책 문제였지만, 결과적으로 고려왕조의 운명을 결정지은 사건이었다. 처음 이인임은 이 사건을 조용히 마무리 지었다. 친원정책에 대한 정당성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7월 들어 이첨과 전백영에게 가혹한 심문을 가했다. 정당문학 전녹생과 박상충이 연루되었다. 이들은 모두 성리학자들이자 개혁적 인물들이었다. 특히 전녹생은 충목왕대와 공민왕대의 개혁과정을 통해 성장한 대표적인 정치가이자 우왕의 사부였다. 공민왕 16년 성균관을 중심으로 집결한 신진 유신들 중 일원인 박상충은 이제현의 문생이자 이색의 처남이었다. 최영은 이들을 매우 참혹하게 심문하였다. 이인임이 오히려 “이 무리들을 죽일 것은 없다”고 하여 귀양 보냈다. 전녹생과 박상충은 중도에 죽었다.

권신 이인임을 지지하다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 최영 장군의 최후를 그린 장면. 최영은 “내가 평생에 만약 탐욕의 마음이 있었으면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 사진·KBS
이 사건에서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최영의 정치적 입장이다. 최영은 신진 유신들을 죽을 정도로 고문했다. 즉, 최영은 사실상 이인임 정권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다. 최영의 모든 덕목에도 불구하고, 이는 그의 근본적인 정치적 한계였다. 공민왕대에도 그는 유신집단과 대립했다. 외형상 양자는 똑같이 개혁적이었지만 놀랍게도 이들과 아무런 정치적 연관도 없었다. 최영은 신진 유신들의 정치적·문명적 비전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최영은 사실 고려말의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드문 정치적 대안이었다. 애국적이고 또 강력한 무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그가 역사적 대안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단순한 애국자에 그친 것은 바로 이런 한계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야말로 이성계와 최영의 차이였으며, 양자의 운명을 가르는 요소였다. 또한 14년 뒤 이인임 그룹을 모두 축출하고 마침내 제 2차 요동정벌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이 사건이 뿌리였다. 그런 점에서 최영은 자신의 의도와 달리 국가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쳤다.

최영이 부패한 이인임 정권의 군사적 기반이 된 사실은 이후 우왕 5년 9월, 우왕의 유모 장씨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사건은 앞서 살펴본 바 있는데, 사실상 우왕과 이인임의 대결이었다. 친왕파의 핵심 계획은 최영을 이인임에게 분리해 왕당파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최영을 왕명으로 불렀다. 그러자 이인임은 정부 관리들을 모두 흥국사에 집결케 했다. 정권의 향배는 결국 최영이 어디로 가느냐에 달려 있었다.

우왕은 거듭 최영의 입궐을 재촉했다. 왕명을 거역하는 것은 반역이었다. 그러나 최영은 “온 나라의 바람과 어긋난 일이 있으니, 임금이 만약 뭇 사람의 뜻을 좇으려 하시면 신이 장차 들어가 뵙겠다”고 말했다. 다시 한 번 최영의 입궐을 명령하자, 그는 왕명에 복종하고자 했다. 그의 삶에서 ‘충성’은 근본적 가치를 지닌 부동의 원칙이었다. 그는 이 가치의 훼손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입궐은 이미 단지 개인의 가치관 문제가 아니었다. 국가 전체의 방향이 그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즉, 그의 충성 대상이 왕과 국가, 둘로 나뉜 것이다. 최영은 고뇌에 빠졌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는 최영 장군의 묘. 묘는 대자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단분으로 부인 문화 유씨와 합장하였다. 이성계는 새 왕조를 세우고 나서 6년 만에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넋을 위로했다. / 사진제공·김영수
이인임은 최영의 입궐을 적극 만류했다. 최영은 마침내 입궐을 포기했다. 그러자 우왕은 최영의 충성이 상대적임을 비난했다. “그대가 어떤 적을 막고자 하여 군사를 옹위하고, 오지 않느냐. 그대가 일찍이 스스로 누대의 충신이라 하더니 충성한 마음이 어디 있느냐?” 최영의 답은 이러했다. “신이 만약 부르는 데 나아가면 군사가 반드시 좇을 것이니, 군사를 끌고 대궐에 나아가면 신의 죄가 마땅히 죽음에 처할 것입니다. 또 신이 어찌 나아가 대궐 아래서 죽고자 하지 않으리오. 다만 임금의 뜻이 아닐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감히 나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신은 몸이 비록 보잘것없사오나, 관계된 일이 심히 크니 만약 간악한 사람의 손에 죽으면 국가가 위태할 것입니다.”(<최영전>) 최영은 크게 세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첫째, 자신이 입궐하면 군사가 따를 것이며, 궁궐에 군사를 대동하는 것은 반역이다. 둘째, 임금의 뜻을 알 수 없었다. 셋째, 자신이 음모로 죽으면 국가가 위태로울 것이다.

‘충’의 상징, 왕명을 거부하다


▎고려말, 조선 초의 문신 맹사성의 영정. 맹사성과 최영 장군은 한마을에 살았다. 후일 맹사성은 최영 장군의 손녀사위가 되었다. / 사진제공·김영수
그러나 최영의 제1, 2의 답은 궁색한 것이다. 군사의 대동 여부는 그의 의지에 달렸고, 입궐 명령이 누구 것인지 명백했기 때문이다. 셋째 답은 자신의 선택이 국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스스로 자각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왕을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으나, 그 경우 국가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왕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충성을 택했다고 답한 것이다. 군주제에서 충성이 두 개로 분열될 때, 후자를 선택하는 것이 공적인 정신이다. 그러나 이 경우 국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결국 이인임을 선택한 것이다. 최영도 그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이 대답 전체는 사실 진실을 숨기고 있다. 즉, 최영은 우왕의 정치노선에 반대한 것이다. 이 사건은 우왕대 전반기의 권력투쟁을 마무리짓는 극적인 정쟁이었다. 이 정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우왕은 정치적 폐인이 되고, 모든 권력이 이인임에게 넘어갔다. 이 사건은 우왕대의 정치에서 분수령을 이루는 사건이었다. 고려말 10년 향방을 결정한 이 중대한 사건에서 최영의 선택은 옳았는가?

우왕대 이인임의 정치에서 최대 성공작은 최영이다. 두 사람의 정치 성향만 보면, 최영은 이인임을 처형해야 했다. 그런데 이인임은 완전히 반대 유형의 인물을 최고의 정치적 자산으로 만들었다. 최영의 가치는 지윤과 양백연, 유모 장씨와의 권력투쟁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런데 최영은 왜 이인임과 동거할 수밖에 없었는가? 고려정치에서 새로운 대안이 명료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런 와중에 개인적 카리스마에 의해 무너지는 고려사회를 가까스로 지탱하던 공민왕이 죽자 일종의 진공 상태에 빠진 것이다. 이인임은 고려 후기의 관습적 대안을 대표하고 있었다.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에 익숙한 것이 자연스럽게 공백을 채운 것이다. 공민왕과 똑같이 새로운 정치적 비전을 발견하지 못한 최영으로서는 이인임 외에 다른 대안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새롭게 성장하고 있던 신진 유신들은 이러한 역사의 역류에 반발했으나 그들의 이념과 힘은 아직 미숙했다.

그러나 최영은 이인임의 대안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이인임에게 “나라에 어려운 일이 많은데 공께서는 수상(首相)의 몸으로 국정을 걱정하지 않고 단지 집안의 재산만 생각하는 거요?”라고 항의했다. 또 “집권자가 이익만 밝히고 악생을 거듭해 패망을 스스로 속히 불러들이고 있으니 이 늙은이가 장차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탄식했다. 최영은 권신정치의 부패상에 괴로워하며,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저항했다. 그는 끝없이 국가의 위기를 호소하고 간청했지만, 메아리 없는 외침에 그쳤다. “늘 도당에 나가면 정색하고 직언하여 조금도 숨기는 것이 없었는데, 좌우에서 호응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홀로 한숨을 쉬며 탄식할 뿐이었다. 일찍이 어떤 사람에게, ‘내가 밤중에 나라 일을 생각했다가 이튿날 아침에 동료들에게 말하곤 하지만, 여러 재상들 가운데 나와 마음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없으니 차라리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롭게 지내는 것이 낫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최영전>)

그는 자주 왕에게도 항의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의 인격을 이루는 두 요소, 즉 왕에 대한 충성과 국가에 대한 우려는 서로 대립하였고, 그 해결책을 알 수 없었다. 그는 오직 왕이 깨우쳐서 그의 불행이 끝나기를 바랐다. 우왕 10년, 4년에 걸친 수창궁 재건공사가 끝나자 우왕은 감독관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최영은 오히려 이를 공박했다. 이는 그의 심정을 잘 보여준다. “지금 왜구가 침범하여 오고 전제(田制)가 날로 문란해져 백성의 생활이 곤궁하여 언제 나라를 잃을지 알 수 없는데, 대신과 더불어 국정을 의논하지 않고 불량배들과 친근하여 놀고 사냥에 법도가 없으니, 신이 장차 누구를 우러러보고 신의 직분을 다하겠습니까?”

부패한 권력을 지탱한 최영의 아이러니


▎최영 장군은 무당들이 가장 선호하는 인물로 민간 무속의 신으로 추앙받기도 한다.
이처럼 최영은 상황에 영합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보다 주어진 것을 잘 지키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이는 우유부단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가치를 수호하는 데 매우 과감한 인물이었다. 다만 그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보다 주어진 가치를 의심하지 않았으며, 그 가치들이 대립할 때 그것을 다른 방식에서 이해할 수 있는 상상력이 빈곤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인내하면서 괴로워했다.

그의 대처 방법은 첫째, 왕과 권신들에 대한 호소였다. 다소 희극적인 사건도 있었다. 한 번은 도당에 나가 재상들이 백성들의 토지를 겸병하는 폐해를 극렬히 성토한 후, 겸병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만들어 다 함께 서명하게 했다. 그러고는 “이후 다시 과거처럼 겸병할 자가 있겠소?”라고 다짐했다. 재상들은 최영의 돌발행동에 따르는 시늉을 했지만, 내심 최영을 돈키호테 같은 인물로 여겼을 것이다. 둘째, 엄격한 법 집행이었다. 신정군(新定君) 마경수(馬坰秀)가 사전을 겸병하고 양민을 숨긴 것이 발각되자, 그는 재상들의 은밀한 반대 공작에도 불구하고 그를 죽였다. 흉년에 시장 상인이 가격을 높이자 큰 갈고리를 시장에 걸어두고 엄포를 놓았다. 군율을 어긴 자는 반드시 죽였고, 왜구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가 느슨한 법 적용에 있다고 개탄했다. 셋째, 솔선수범이었다. 그는 왕이 하사하는 토지와 노비를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의 재산을 군량으로 내놓았다.

하지만 그의 정성과 근심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이 어두운 시대에 그의 신념과 가치는 고립되었으며, 부조리한 상황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어했다. 최영의 판단이 틀린 것도 아니다. 그는 위기를 철저히 자각하고 있었고, 국방과 전제의 실패가 근본 원인이라는 점도 확실히 이해했다. 그에게 결여된 것은 넓은 의미의 정치적 판단력과 시대에 대한 통찰력이었다. 자신이 누구를 지지하고 누구를 반대해야 하는지 잘 판단하지 못한 것을 보면 그 점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그처럼 부패한 권력을 지탱했던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최영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의 자각은 너무 늦었다. 우왕 14년 대정변을 일으켰을 때, 고려는 이미 너무 심각한 상태였다.

최영에게는 ‘직분을 다할’ 매개자가 필요했다. 왕이 그런 존재라면 최상이다. 공민왕은 어느 정도 그 점을 만족시켰다. 하지만 공민왕은 제시할 비전도 없고 최영도 믿지 않았다. 그것이 가능한 인물은 이색이었다. 이색은 최영보다 12년 어렸지만, 동시대를 살았다. 하지만 이색은 그 책임을 방기했다. 최영에게는 정신적이고 지적인 이니셔티브를 취할 비전이 결여되어 있었고, 이색에게는 정치적인 이니셔티브를 취할 열정이 결여되어 있었다. 공민왕이 양자의 매개자가 되었으면 역사가 행복했을 것이다.

우왕 14년 무진정변을 보면, 최영은 마지막 순간까지 ‘변혁’을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칙만 있을 뿐 비전이 결여되었다. 이색이 아니라 이인임과 결합한 이유이다. 이인임의 역사적 의미에도 무지했다. 1388년 무진정변 뒤 그는 우왕에게 “이인임이 정책을 올바르게 세워 대국을 섬김으로써 국가를 안정시켰으니 허물보다는 공이 크다”고 건의해 이인임과 그 일족을 보존했다. 최영은 정변의 의미를 국가의 노선이 아니라 단순한 부패 문제로 이해한 것이다.

1388년 최영은 우왕의 제의를 받아들여 이성계와 함께 무진정변을 일으켰다. 임견미, 염흥방 등 권신들이 모두 제거되었다. 전국에 흩어져 전민을 점탈하던 권신들의 노비들 수천 명이 처형되었다. 무진정변의 규모는 고려말의 정변 중 가장 큰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의미는 대단히 제약적이었다. 최영의 사후 조치를 볼 때, 그는 이 사건을 조반의 옥사와 관계된 임견미와 염흥방 일족의 위법·월권행위에 국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인임 일파까지 철저하게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국가적 위기의 진정한 원인인 권신정치의 철저한 척결을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이성계는 더 소극적이었다. 운도 따르지 않았다. 개혁은 짧은 시간에 중단되었다. 대명관계가 결정적으로 악화하였기 때문이다. 군사적 충돌로 더 이상의 개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결과적이지만 무진정변은 고려가 스스로를 개혁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되었다.

정치에는 실패한 전쟁영웅


▎북한에서 2008년 발행된 최영 장군 우표. 북한 정권은 이성계를 배신자로, 최영 장군은 애국명장 칭호를 붙여 대우했다. / 사진제공·김영수
1388년 고려의 북방영토를 둘러싸고 고려와 명이 군사적 대결로 치달았다. 최영은 요동공벌을 결정했다. 이에 반대한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렸다. 모든 정치적 책임은 최영에게 전가되었다. 죽음에 임해 최영은 “내가 평생에 만약 탐욕의 마음이 있었으면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국가를 위한 그의 헌신과 공로는 위대한 것이었다. 공민왕대 이래 국가의 군사적 위기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가 있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추앙하고 존경했다.

우왕 14년 12월, 그가 처형되던 날 서울 사람들은 철시하였다. 원근 사람들은 어린아이들과 부녀자들까지 모두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 시신이 길 곁에 있었는데 길가는 자는 말에서 내렸다. 정부도 장례비용을 보조했다. 처형을 주장한 사람들도 최영의 훌륭함에는 이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절세의 충신이자 용맹무비한 장군은 반역죄로 몰려 시신이 길거리에 버려졌다. 그의 사례는 정치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의 역설과 비극을 잘 보여주는 전형이다. 그것은 동기가 아니라 책임과 결과의 세계인 것이다. 고려 말, 조선 초 문신 변계량의 시를 보자.

“나라를 빛내기에 평생 바치니/ 어린 아이까지도 그 이름 알고 / 한 조각 장한 마음 죽지 않아서 / 천년토록 태산과 함께 남으리.”(<東史綱目>)

고려말의 숱한 전란을 통해 수많은 전쟁 영웅이 탄생했다. 마지막으로 그 시대를 움켜쥔 것은 이성계이다. 최영이 이성계와 달랐던 점은 그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야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어떠한 권력도 사적 목적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전공조차 다투지 않았다. 그는 부하 이름조차 잘 기억하지 못했다. 병사들을 사인화(私人化)시키려는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목숨을 대가로 지위와 명예를 얻고자 했던 그의 평범한 부하들에게 최영은 몰인정하고 매력 없는 지휘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정치공동체를 위한 최선의 인간이자, 고려왕조가 배출한 최고의 공적 정신이었다. 이성계는 그와 달랐다. 이성계는 추종자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지급했으며, 또는 보상을 통해 추종자들을 자신의 주위에 결집시켰던 것이다. 태종 이방원은 정도전 역시 이성계의 “은혜에 감격하여 힘을 다하였다”고 회고하고 있다.(<태종실록>) 이성계는 이처럼 세심한 배려를 베푸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지만, 왕조의 안전에는 위험한 인물이다.

최영과 이순신은 어떻게 다른가? 이순신도 위기가 있었지만, 상처를 입지 않고 불멸의 영웅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정치의 세계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역사의 방향을 고민하거나 책임질 필요가 없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했고, 전쟁의 끝에 전사했다. 전쟁이 끝나면 정치가 시작된다. 불행히도 최영은 정치적 지위에 올랐고, 그것에 책임을 져야 했다.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 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경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707호 (2017.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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