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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7)] 동래부사의 문서로 촉발된 정한론(征韓論) 

“지금이 적기” vs “아직 때가 아니다”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조선에 본때 보여줘야” 여론 비등해져… 정벌 야욕은 한마음, 시기 놓고는 의견차

▎1873년 일본 외무성은 초량 왜관에 파견된 외교관으로부터 동래부사가 메이지 정부를 모욕하는 문서를 왜관에 게시했다는 내용을 보고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내에서는 조선 파병 여론, 즉 정한론이 비등해졌다.
1873년(고종 10, 메이지 6) 5월, 일본 외무성은 초량 왜관에 파견된 외교관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동래부사가 메이지 정부를 모욕하는 문서를 왜관에 게시했다는 내용이었다.

동래부사가 게시한 문서 중에 “요사이 저들이 하는 짓을 보니 가히 무법지국이라 할 만하다”는 표현이 있었는데 이는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을 ‘무법지국’이라 단정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일본 사람들에게 이런 표현은 일본에 대한 모욕이자 메이지 천황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됐다.

이런 내용이 알려지자 일본 조야(朝野)에는 조선 파병 여론이 비등했다. 오만하고 무례한 조선에 본때를 보여주고 일본의 국위를 선양하기 위해서는 파병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일본 사람들은 조선 파병 주장을 정한론(征韓論)이라고 했다.

파병 여론이 거세지자 메이지 천황은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에게 칙명을 내렸다. 조선에 먼저 파병하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파병에 앞서 사절을 파견해 협상하는 것이 좋은지, 내각에서 논의해 보고하라는 칙명이었다.

산조는 내각회의를 소집해 여러 참의(參議)들로부터 의견을 들었다. 참의들의 의견은 둘로 갈렸다. 조선에 먼저 파병하는 것이 좋다는 측과 파병에 앞서 사절을 파견해 협상해야 한다는 측으로 갈린 것이었다. 둘로 갈린 의견은 타협점을 찾지 못한 채 팽팽하게 대립했다.

1868년(고종 5, 메이지 1) 유신이 추진될 당시 메이지 천황은 17세에 불과했다. 그동안의 17년 인생이라는 것도 궁중 안에 한정됐기에 정치경험도 거의 없었다. 그런 메이지 천황이 유신 직후의 혼란한 정국을 주도적으로 풀어가리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유신 주역들은 자신들이 중심이 돼 혼란한 정국을 풀어가고자 했다. 이런 배경에서 태정관 제도가 등장했다. 태정관 제도의 핵심은 태정대신, 좌대신과 우대신, 참의로 구성되는 삼직(三職)이었다. 태정관 제도는 몇 차례 바뀌었지만 골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당장’ 전쟁은 바라지 않았던 메이지 천황


▎조선에 사절 파견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
1873년(고종 10, 메이지 6) 5월 2일에 개정된 태정관 정원(正院) 직제에 의하면 태정대신의 직무는 ‘천황 폐하를 보필하고 만기를 통리하며 모든 상서를 주문(奏聞)하고 재가의 인장을 찍는’ 것이었다. 좌대신과 우대신은 ‘태정대신에 버금가며 태정대신이 결석했을 때 대리할 수 있는’ 자리였고, 참의는 ‘내각의 의관으로서 각 사무를 의판(議判)하는 일을 담당하는’ 자리였다.

이런 사실로 보면 메이지 시대의 태정관 정원은 조선시대의 의정부와 유사했다. 즉 태정대신은 영의정, 좌대신과 우대신은 좌의정과 우의정 그리고 참의는 참찬에 비견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태정관 정원과 의정부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참의의 역할이 그것이었다.

메이지 시대의 참의는 ‘내각의 의관으로서 각 사무를 의판한다’고 했는데, 이는 중요 국정을 참의들이 합의해 결정한다는 뜻이었다. 참의들이 합의한 사항은 태정대신을 통해 메이지 천황에게 보고됐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메이지 천황은 참의들의 합의 사항을 그대로 결재했다. 따라서 형식적으로는 메이지 천황과 태정대신이 참의의 상관이지만 실제적인 권한은 참의들에게 있었다. 당연히 참의는 유신 주역들이 차지했다.


▎내치에 주력하며 천황제 확립에 앞장섰던 이와쿠라 도모미.
유신 주역으로 구성된 참의들이 중요 국정을 합의해 결정하는 시스템에는 일장일단이 있었다. 제일 큰 장점은 합의결정을 통해 유신 주역들이 강력한 단합을 이룰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아직 미숙한 메이지 천황을 대신해 혼란한 정국을 주도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반면 합의결정이 되지 않을 경우, 유신 주역들은 쉽게 분열될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도 힘들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될 수 있었다.

만약 참의 사이에서 끝내 합의결정이 이뤄지지 않으면 궁극적으로 메이지 천황의 최종 결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참의들은 가능하면 자신들의 합의결정으로 문제를 풀고 그렇게 함으로써 정국 주도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직 미숙한 메이지 천황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조선 파병 문제를 놓고 참의들은 의견이 갈린 채 합의안을 도출하지 못했다. 태정대신 산조 역시 타협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산조는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여 결정하는 추진력도 없었고 그렇다고 갈라진 의견을 조정해내는 정치력도 없었다.

1876년(고종 13) 조선과 일본 사이에 수호조약이 체결된 후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의 기록에 의하면 산조는 여자처럼 곱상한 외모를 가진 인물이라고 한다. 아마도 산조는 부드럽고 원만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던 듯하다.

당시에 사절 파견을 앞장서서 주장한 사람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였다. 그는 메이지 유신의 세 거두 중 한 명으로서 1873년 당시 참의는 물론 육군대장과 근위도독까지 겸임한 실력자 중의 실력자였다. 그런 사이고가 사절 파견을 주장하자 많은 참의도 동조했다. 문제는 사절 파견을 주장하는 사이고의 속셈이었다.

겉으로만 보면 군대 파병보다는 사절 파견이 훨씬 온건한 의견으로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원래 메이지 천황은 만약 파병한다면 소규모로 파병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파병 시 초량 왜관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육해군 약간만 파병했다가 유사시에 규슈의 군대를 파병하자는 구상이었던 것이다. 메이지 천황은 이 같은 파병과 함께 사절 파견 안을 참의들에게 제시하고 그중에서 하나를 고르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메이지 천황의 제안대로만 한다면 군대를 보낸다고 해도 형식적으로 초량 왜관에 보내는 것일 뿐이고, 사절을 보낸다고 해도 예전과 같은 사절을 보내는 것일 뿐이었다. 어느 쪽이 되든지 전쟁 발발의 가능성은 적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당시에 메이지 천황은 조선과의 전쟁을 바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이고는 바로 그 점이 불만이었다. 그는 조선과의 전쟁을 원했다. 그것도 대규모 전쟁을 원했다. 대규모 전쟁을 일으키려면 그에 합당한 큰 명분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규모 파병보다는 사절 파견이 유리하다는 것이 사이고의 판단이었다. 조선에 먼저 파병하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파병에 앞서 사절을 파견해 협상을 하는 것이 좋은지 내각에서 논의해 보고하라는 칙명에 따라 개최된 회의에서 사이고는 이렇게 주장했다.

“지금 급하게 육해군을 파견한다면 조선의 관리와 백성들은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을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키려 도모하더니 그 단서를 열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은 조선에 대한 우리 조정의 당초 의지와는 반대입니다. 그러므로 군대 파견의 논의를 정지해야 합니다. 먼저 전권사절을 파견해 공리공도(公理公道)로서 저들을 효유(曉喩)해서 스스로 뉘우치고 깨닫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도 저들이 오히려 응하지 않고 전권사절에 대해 망령된 짓을 가한다면, 그 죄를 천하에 알리고 토벌해야 합니다.”[메이지천황기 1873년(고종 10, 메이지 6) 8월 17일]

사절 파견은 대규모 전쟁으로 가는 ‘지름길’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 걸려 있는 메이지 유신 주역들의 사진. 맨 윗줄 가운데가 요시다 쇼인, 둘째 줄 오른쪽에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맨 윗줄 오른쪽이 기도 다카요시다.
위의 내용을 언뜻 보면 사이고의 주장은 매우 온건하게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예컨대 사이고는 ‘급하게 육해군을 파견한다면 조선의 관리와 백성들은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조선에 대한 우리 조정의 의지와는 반대’라고 했다. 여기에 사이고의 속마음이 들어 있다.

조선의 관리와 백성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는다면 당연히 전쟁 준비를 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조선을 침략하기가 훨씬 어려워질 것 또한 당연했다. 따라서 ‘조선에 대한 우리 조정의 의지와는 반대’라는 사이고의 발언은 조선과 일본 사이에 선린우호 관계를 유지하자는 뜻이 아니라 조선이 일본에 대해 경계의식을 가지지 않게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렇게 돼야 조선을 집어삼키기가 쉽기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소규모 군대 파병은 괜히 조선으로 하여금 전쟁 준비만 하게 되는 결과만 가져오리라는 것이 사이고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사이고는 소규모 파병 대신 사절 파견을 주장했다. 당시 상황으로는 사절 파견이 대규모 전쟁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기념해 조선 총독부에서 발행한 사진엽서. 일본 메이지 천황의 초상이 국화, 봉황 무늬로 화려하게 장식돼 있다. 밑에 배치된 조선 순종의 초상은 상대적으로 초라하다.
유신 이후 메이지 정부는 이미 몇 차례나 조선에 사절을 파견했다. 그 사절들이 소지한 국서에는 당연히 ‘천황’, ‘황실’ 등의 용어가 있었다. 조선은 이런 국서가 예전 관행에 어긋난다고 해서 접수하지 않았다. 이번에 특별히 사절을 파견한다고 해도 조선이 국서를 접수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이고였다. 그는 자신이 직접 사절로 가서 극단적인 분쟁을 일으킬 생각이었다. 예컨대 조선이 국서를 접수하지 않을 경우 사이고는 자기를 죽이도록 조선 측을 자극할 수도 있었고, 아니면 천황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명분으로 할복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일본 전역이 전쟁 여론으로 들끓을 것 또한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사이고는 사적으로 산조를 만난 자리에서 “사절이 조선에 도착하면 그들은 분명히 사절을 살해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죄를 묻는 군대를 일으키면 됩니다”는 말을 했는데 바로 이 말 속에 사절 파견을 주장하는 그의 본심이 들어 있었다.

또한 사이고는 자신이 왜 조선과 전쟁을 하려 하는지에 대해서도 산조에게 밝혔다. 즉 “지금 국내의 정세를 보니 내란의 징후가 없지 않습니다. 마땅히 그 기운을 밖으로 돌려야 합니다”고 했던 것이다. 국내의 내란을 방지하기 위해 조선과 전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사이고가 언급한 내란의 징후란 불평 사무라이들의 동향을 지칭했다. 메이지 유신 당시 사무라이는 대략 200만 명 내외로 추산됐다. 에도 막부시대에 지배층의 특권을 누리던 사무라이였지만 메이지 유신을 겪으면서 특권을 잃었다. 그 와중에 수십만의 사무라이가 실업자 신세가 됐다. 그들은 당연히 메이지 정부에 적대적이었다. 그들의 불평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조선과의 전쟁이 필요하다는 것이 사이고의 주장이었다.

사이고가 조선과의 대규모 전쟁을 각오하고 사절 파견을 주장하자 산조는 곤란에 빠졌다. 산조는 조선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 메이지 천황의 속마음을 눈치재고 있었다. 산조 스스로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산조가 메이지 천황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는 사이고를 제지해야 했지만 그럴 배짱도 정치력도 없었다.

오쿠보 “국가부강의 기초 다지는 것이 시급”


▎1872년 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촬영된 이와쿠라 사절단. 왼쪽부터 기도 다카요시, (한 사람 건너) 이와쿠라 도모미,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치.
산조는 우선 시간을 끌기로 했다. 당시에 외무경 소에지마는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었다. 산조는 조선 문제는 외무경 소관이니 그가 돌아온 후 결정해야 한다는 명분을 들었다. 하지만 산조가 정말로 기다린 사람은 따로 있었다.

메이지 유신은 에도 막부에 반대하던 구게(公家)와 부게(武家)의 합작으로 성공했다. 산조와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가 대표적인 구게였다. 반면 이른바 유신삼걸로 불리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오쿠보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대표적인 부게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이들 5명은 태정관의 삼직을 차지하고 정국을 주도했다.

그런데 메이지 정부는 1871년(고종 8, 메이지 4) 겨울에 이른바 ‘이와쿠라 사절단’을 구미에 파견했다. 기왕에 구미와 맺은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기 위해서였다. 이 사절단은 이와쿠라 도모미가 대표였기에 ‘이와쿠라 사절단’이라고 불렸다. 부대표는 기도, 오쿠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3명이었다.

이와쿠라 사절단에는 수행관료 48명, 유학생 60명이 포함돼 있었다. 1873년 5월 당시에 이와쿠라, 기도, 오쿠보, 이토 등은 미국과 유럽을 돌며 불평등 조약 개정을 협상하는 동시에 근대 서구문물을 배우는 중이었다.

산조가 기다린 사람은 바로 이와쿠라, 기도, 오쿠보, 이토였다. 그들이라면 사이고를 충분히 제지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와쿠라, 기도, 오쿠보는 정치적으로도 사이고 못지않은 거물일 뿐만 아니라 1년 넘게 구미지역을 본터라 섣부른 전쟁을 반대할 것이 분명했다. 산조는 이와쿠라 등의 귀국을 메이지 천황에게 요청해 허락받았다.

유럽에 머물던 이와쿠라, 기도, 오쿠보, 이토 등이 귀국전보를 받은 시점은 7월 초였다. 기도와 오쿠보가 7월 말에 먼저 귀국했다. 그 즈음 외무경 소에지마 역시 귀국했다. 그런데 이와쿠라는 8월이 돼도 귀국하지 않았다. 산조는 이와쿠라가 귀국할 때까지 기다리려 했다.

그러나 사이고 역시 산조의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 사이고는 이와쿠라가 귀국하기 전에 사절 파견을 확정지으려 했다. 8월 3일, 사이고는 산조에게 서신을 보내 사절 파견을 확정하라 촉구했다. 특별한 답을 받지 못한 사이고는 16일에 직접 산조를 방문해 또다시 촉구했다. 궁지에 몰린 산조는 17일에 각의(閣議)를 소집했다.

산조는 17일의 각의에 기도와 오쿠보가 참석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그날 기도와 오쿠보는 참석하지 못했다. 기도는 갑자기 병이 들었고 오쿠보는 아직 귀국 보고도 하지 못한 상태라 참석할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사이고를 제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날 각의에서는 사이고를 조선에 사절로 파견한다는 합의 결정을 내렸고, 산조는 이 결정을 메이지 천황에게 보고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메이지 천황이 각의의 합의 결정을 거부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아주 이례적으로 메이지 천황은 “사이고를 조선에 사절로 파견하는 일은 이와쿠라가 귀국하기를 기다려 숙의한 후 다시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메이지 천황 스스로 전쟁을 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산조나 기도, 오쿠보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17일의 각의에 병으로 참석하지 못했던 기도는 사이고의 조선 파견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메이지 천황에게 올렸으며, 오쿠보 역시 전쟁보다는 국가부강의 기초를 다지는 것이 시급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9월 13일 6시에 이와쿠라는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포대와 군함에서는 축포를 쏘아 이와쿠라의 귀국을 환영했다. 메이지 천황은 이와쿠라를 환영하기 위해 측근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궁중 마차까지 보내 맞이했다. 다음날 오전에 이와쿠라는 이토와 함께 입궁해 메이지 천황에게 귀국 보고를 했다.

사이고 vs 이와쿠라, 둘로 나뉜 유신 세력


▎메이지 유신 당시 사무라이는 200만 명 내외로 추산됐다. 에도 막부시대에 지배층의 특권을 누리던 사무라이 였지만 메이지 유신을 겪으면서 특권을 잃었다.
산조는 사절 파견에 관한 문제를 이와쿠라와 논의한 후 10월 14일에 각의를 개최했다. 이 각의에는 와병 중인 기도를 제외하고 태정대신 산조, 우대신 이와쿠라 및 모든 참의가 참여했다. 사절 파견을 놓고 이와쿠라와 사이고는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이와쿠라는 “사할린에서의 러시아인 폭행 사건, 대만에서의 살인사건, 그리고 조선에 사절을 파견하는 세 가지 사건은 모두 국가의 중대사입니다. 마땅히 사안의 선후와 완급을 고려해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유독 조선에 사절을 파견하는 사안만을 지금의 급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러시아와의 사이에 끼어 있는 사할린 사건을 해결하여 국경을 확정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급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이와쿠라는 사할린 사태를 현안으로 제기함으로써 조선 사절 파견을 뒤로 미루고자 했다.

그러자 사이고는 “사할린과 대만에서의 사건을 어찌 중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까? 반면 조선에 사절을 파견하는 문제는 천황 폐하의 위신을 높이느냐 아니면 추락시키느냐에 관련될 뿐만 아니라 국권을 떨어트리느냐 아니면 신장시키느냐에 관련되므로 잠시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합하(閤下)께서 사할린 사건을 해결한 이후에 조선 사건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먼저 나를 러시아 사절로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사이고는 천황과 국가까지 들먹이며 사절 파견이 시급한 일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아울러 사이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쿠라가 굳이 사할린 문제를 시급하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이 러시아 사절이 돼 해결하겠다고 했는데, 이는 조선 사절 파견은 물론 사할린 문제도 자신이 다 해결하겠다는 의미였다. 이렇게 되면 사절 파견 문제도 사할린 문제도 사이고가 주도하게 되는데 그것은 이와쿠라가 수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와쿠라는 “사할린 사건을 처리하는 것은 외무경 소관입니다. 그 문제는 외무경으로 하여금 러시아 정부와 절충하게 해서 러시아가 조선의 후원이 되려는 생각을 영구히 끊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오히려 다소의 일자가 필요하니 그동안은 마땅히 내치를 정비하고 그로써 밖에 대응하는 힘을 양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했다. 사이고는 사할린 문제에서도 손을 떼고 사절 파견도 단념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사이고는 단념하지 않았다. 그는 사절 파견이 시급할 뿐만 아니라 그것도 자신이 파견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쿠라와 사이고가 주장을 굽히지 않고 논쟁을 이어가자 산조는 다른 참의들의 의견을 물었다. 사이고를 지지하는 참의가 더 많았다. 다수결로 하면 사이고의 승리였다. 산조는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명분으로 다음날 최종 결정을 하기로 했다.

10월 15일 오전 10시에 다시 각의가 개최됐다. 하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문제는 산조의 태도였다.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않고 참의들만의 다수결로 하면 사이고의 주장대로 결정해야 했다.

반면 메이지 천황의 뜻을 생각한다면 자신이 적극적으로 사이고의 주장에 반대하고 이와쿠라의 주장대로 결정해야 했다. 그럴 경우 사이고 뿐만 아니라 다수 의견을 낸 참의들을 무시한 결과가 됐다. 여기에 반발한 사이고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었다. 참의에 더해 육군 대장과 근위도독까지 겸임한 사이고가 반발한다면 다른 참의와 군사 지휘관들 역시 동요할 것이 분명했다. 결국 이날의 각의에서 산조는 사이고의 주장을 수용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이날의 결정에 반발한 이와쿠라는 출근을 거부했고, 기도와 오쿠보는 사직하겠다고 나섰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산조는 각의의 결정을 보고하지 않고 시간을 끌며 사태를 해결하고자 했다.

10월 16일 밤에 산조는 이와쿠라의 집을 방문했다. 산조는 이와쿠라를 설득해 사이고의 주장에 동의하게 하려 했다. 하지만 이와쿠라는 기왕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이와쿠라는 우대신을 사직하겠다고 했다. 유신 주역 세력은 사이고 계열과 이와쿠라 계열로 완벽하게 양분됐다. 산조는 그들을 통합해 낼만한 정치적 역량이 없었다.

사이고의 사직, 그러나 꺼지지 않은 불씨


▎1884년 당시 일본의 군악대. 메이지 시대 일본 국민들의 애창곡은 군가·국가·문부 성창가 등이었다.
그러자 새로운 대안이 제시됐다. 산조 대신 이와쿠라를 태정대신으로 만들어 사태를 해결하자는 대안이었다. 이 대안은 이토 히로부미가 제시했다고 한다. 이 대안이 성사되려면 산조와 이오쿠라의 동의 그리고 메이지 천황의 내락이 필요했다. 10월 17일 밤에 산조는 다시 이와쿠라의 집을 방문했다. 아마도 이 자리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대안이 논의되었던 듯하다.

18일 아침 산조는 갑자기 인사불성에 빠졌다. 20일에는 메이지 천황이 위문차 산조의 집을 방문했다. 이어서 메이지 천황은 곧바로 이와쿠라의 집으로 행차해 그를 태정대신에 임명했다. 이런 사실로 보면 산조의 인사불성과 이와쿠라의 태정대신 임명은 은밀한 궁중 공작으로 메이지 천황의 내락을 받고 난 후 이뤄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사이고 역시 뭔가 수상한 낌새를 느꼈다. 22일에 사이고는 자신을 지지하는 참의들과 함께 이와쿠라를 찾았다. 사이고는 당장 내일, 기왕에 결정된 대로 자신을 조선 사절로 파견할 것을 메이지 천황에게 상주하라 요구했다. 각의에서 합의 결정된 내용만 보고하고 반대의견을 보고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물론 이와쿠라는 거절했다. 사이고와 이와쿠라는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하지만 논쟁은 어느 누구의 양보도 끌어내지 못한 채 끝났다.

23일 이와쿠라는 메이지 천황을 면담했다. 이와쿠라는 사절 파견에 관한 찬반 의견을 보고하면서 최종 판단은 메이지 천황에게 맡긴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메이지 천황은 “이것은 국가의 대사이니 심사숙고해 내일 칙답(勅答)을 주겠다. 오전 9시에 입궁해라”는 답을 줬다. 다음날 메이지 천황은 다음과 같은 칙답을 내렸다.

“짐은 황위를 계승한 처음부터 선제(先帝)의 유지를 몸 받아 보국안민의 책임을 다하겠노라 맹서했다. 여러 신료들이 한마음으로 협력함을 힘입어 점차 온 나라가 하나에 이르게 됐다. 이에 국정을 정비하고 민력을 양성해 힘써 성공할 것을 기약했다. 지금 너 이와쿠라 도모미가 보고한 것을 가납한다. 너는 마땅히 짐의 뜻을 받들라.” [메이지천황기 1873년(고종 10, 메이지 6) 10월 24일]

메이지 천황은 조선 사절 파견 문제를 놓고 극렬하게 대립하던 이와쿠라와 사이고 중에서 분명하게 이와쿠라의 손을 들어줬다. 23일 이와쿠라와 메이지 천황의 면담이 있던 날, 사이고는 이미 그렇게 될 줄 예견했다. 그날 사이고는 모든 관직에서 사직했다. 사이고를 지지하던 참의들 그리고 군사 지휘관들 역시 사직했다. 이와 함께 극렬하게 들끓던 정한론 역시 잦아들었다.

그러나 이와쿠라, 기도, 오쿠보라고 해서 정한론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했을 뿐이었다. 때가 되면 조선에 파병할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은 메이지 천황 역시 다르지 않았다. (계속)

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707호 (2017.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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