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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풍기의 선물의 文化史(7)] 은근한 情의 표시, 마음 평온해져 

길다란 것이라면 무엇이든 지팡이로 사용 가능… 사회적 지위 표시이자 내 몸을 부축해주는 친구 

김풍기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단원 김홍도의 작품 <지팡이를 든 두 맹인>. 단원이 60세 전후의 말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수묵담채화로 호방하고 원숙한 필치가 돋보인다.
지팡이는 필요한 사람의 체형이나 수요에 따라 적당한 것을 주변에서 구해 사용하면 된다. 길옆에 삐쭉 튀어나와 있는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서 사용해도 되고 버려진 작대기를 사용해도 된다. 어떤 물건이든 길쭉하게 생긴 것이라면 무엇이든 지팡이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지팡이는 단순히 실용적 목적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어떤 물건이든 비슷하겠지만, 지팡이도 처음에는 실생활에서의 쓰임 때문에 이용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적 맥락과 문화적 의미가 착색돼 다양한 해석을 담지(擔持)하게 됐다. 지팡이 해석의 프리즘은 워낙 광범위하게 형성돼 있어서 어떤 맥락에서 어떤 사람과 함께 등장하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제목도 잘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 봤던 무협영화이지만 지금까지도 생생한 장면들이 더러 있다. 높은 담장을 손쉽게 ‘휘리릭’ 넘어간다든지, 죽음 직전까지 몰렸던 주인공이 단 한 방으로 강력한 적을 물리치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짜릿하다.

지팡이를 들고 산길을 가던 주인공은 갑자기 나타난 적들을 여유롭게 상대하다가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고 생각되는 순간 갑자기 지팡이에서 칼을 뽑아 드는 장면은 참 신기했다. 지팡이 속에 칼을 넣어서 다닌다면 아마 어두운 산길이라 해도 마음이 든든하지 않았을까 싶다.

오랫동안 칼이 든 지팡이는 깜찍한 아이디어를 가진 영화의 소품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그런 지팡이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보물 제930호로 지정된 이경석(李景奭, 1595~1671) 궤장(几杖) 중에 그런 지팡이가 있었던 것이다.

도장(刀杖)으로 불리는 이 지팡이는 총 길이 80.4㎝ 안에 60㎝ 길이의 칼날이 내장돼 있다. 이 지팡이는 1668년(현종 9) 11월, 왕이 원로대신이었던 이경석에게 예우하는 의미에서 하사한 것이다. 도장을 포함해 총 4점의 지팡이와 접이식 의자인 궤(几), 이들 물건을 하사하는 장면을 그림으로 그린 화첩 등이 함께 전승되고 있다.

궤장이라는 단어에서처럼 두 물건이 일반적으로 병칭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노인을 공경하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흔히 노인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조선에서도 왕은 원로대신 중에서 70세가 넘는 사람에게 궤장이나 가마 등을 하사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경석도 이런 관례에 따라 왕에게 하사받았다. 이 지팡이 안에는 도장 외에도 오리로 추정되는 새를 장식품으로 붙여놓은 조두장(鳥頭杖) 1점과 특별한 장식이 없는 지팡이 2점이 남아 있다.

이경석이 하사받았던 지팡이는 대체로 나무와 쇠를 이용해서 몸통과 장식을 만들었다. 그렇지만 지팡이를 만들 수 있는 재료는 매우 다양해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물건 중에 길쭉하고 가벼운 것은 모두 활용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지팡이 재료로 사용되는 물건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지팡이는 가벼워야 하므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나무 재질로 된 것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죽장(竹杖), 등장(藤杖), 척촉장(躑躅杖)…


▎지팡이는 사회적 지위의 표시이자 자신의 몸을 부축해주는 친구였다. 지팡이를 벗삼아 팔도를 주유(周遊)했던 김삿갓의 동상.
가장 널리 선호된 재질은 역시 대나무다. 곧은 성질에다 내부가 비어 있고 탄력까지 있어서 지팡이로 사용하기에는 제격이다. 죽장(竹杖)으로 불리는 대나무 지팡이는 그 색깔과 나무 종류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외형이 약간 각이 진 것처럼 보이는 방죽(方竹)으로 만들면 방죽장, 공죽(筇竹)으로 만들면 공죽장 혹은 수공장(瘦筇杖), 공장(筇杖), 푸른색 대나무로 만들면 청죽장(靑竹杖), 아홉 개의 마디를 가지고 있는 촉(蜀) 지방의 특산 구절장(九節杖), 반죽으로 만든 반죽장(斑竹杖, 斑杖이라고도 함) 등 많은 종류가 있다.

죽장은 죽책(竹策), 간수(竿殳) 등으로도 불렸다. 조선 후기 문인 김창협(金昌協)의 글에는 승잠(勝岑) 스님에게서 자죽(紫竹)으로 만든 자죽장을 선물로 받은 기록이 남아 있다.

사실 대나무라고 해서 모두 지팡이로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대나무의 특성상 나무가 마르고 나면 끝부분이 작은 충격에도 쉽게 갈라지고, 그것은 지팡이 전체로 뻗어가면서 쪼개진다. 쪼개진 작은 조각들은 날카로워서 손에 상처를 내기도 한다.

이 때문에 대나무를 그냥 잘라서 지팡이로 만들지는 않는다. 끝부분에 약간의 처리를 해서 쉽게 갈라지지 않게 만든다. 대나무가 자생하는 지역에서는 대나무가 주변에 널려 있어서 재료를 구하기가 용이하다.

그러다 보니 대나무 지팡이는 은거하는 빈사(貧士)들의 벗으로 여겨졌다. 또한 죽장망혜(竹杖芒鞋)라는 말처럼, 천하를 유랑하며 살아가는 지식인들에게 대나무 지팡이는 외로운 세상에 자신을 지탱해주는 일상용품이었다.

죽장은 상가에서도 요긴하게 쓰였다. 상례를 주관하는 사람들, 특히 상주의 경우에는 거친 베옷과 함께 대나무 지팡이를 늘 가지고 있었다. 부친이 돌아가시면 저장(苴杖)을 짚고 모친이 돌아가시면 삭장(削杖)을 짚는다.

<예기(禮記)>에 의하면 대나무로 만들면 저장이라 하고 오동나무로 만들면 삭장이라고 했다. 특히 저장은 아주 조악하고 나쁜 색깔로 된 대나무 지팡이를 지칭하는 것으로, 부친의 죽음 앞에 어떤 장식이나 좋은 느낌의 빛깔로 된 물건이라도 사용하지 않는 것을 도리라고 여겼던 옛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대나무 지팡이는 아니지만 이와 비슷한 것으로 도죽장(桃竹杖)이 있다. 두보의 시 ‘도죽장’ 때문에 우리나라 선비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 지팡이는, 도죽이라는 대나무의 한 종류로 제작된 것이다. 도지죽(桃枝竹), 종죽(椶竹) 또는 도사죽(桃絲竹)이라고도 불렸다고 돼 있다.

또한 대나무와 비슷하게 마디가 있는 영수목(靈壽木) 역시 지팡이를 만들기에 적당했다. 영수장이 바로 그 나무로 만든 것인데, 한나라 때 공자의 후손 공광(孔光)에게 하사해 널리 알려진 지팡이다.

이 외에도 옛 기록을 살펴보면 선비들이 즐겨 들고 다녔던 지팡이 중에 청려장(靑藜杖)과 등장(藤杖)이 있다. 청려장은 여장(藜杖), 환장(環杖)이라고도 하는데 대체로 지팡이를 쥐는 윗부분이 굽어져 있다.

산 속에서 만난 신비한 노승이나 도사가 들고 있는 지팡이 중에 그런 이미지로 형상화되는 경우가 많다. 등장은 등나무로 만드는 것인데, 색깔에 따라 몇 가지가 있다.

당나라 백낙천(白樂天)의 시에 소재로 쓰여서 이름이 나게 된 주등장(朱藤杖)은 붉은 빛의 등나무로 만들었다. 주등은 홍등(紅藤)이라고도 하는데 중국 남방 지역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그 즙을 내서 마시기도 하고 벌레를 쫓는 데 사용하기도 한다. 이것으로 만든 지팡이는 아주 부드러우면서도 탄력이 있어서 사용하기에 좋다고 한다.

이에 비해 검은 빛이 도는 오등장(烏藤杖)이 있는데 널리 사용된 것 같지는 않다. 등나무는 주로 바짝 마른 것이 가볍고 단단하기 때문에, 이를 활용해 만든 지팡이를 고등장(枯藤杖)이라고 한다.

죽장이나 청려장, 등장 등은 그 모양과 색깔에 따라 다양한 것들이 있지만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널리 사용됐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사용된 독특한 지팡이가 있다. 바로 척촉장(躑躅杖)이다. 철쭉나무를 이용해 만든 이 지팡이는 우리나라에서도 키가 큰 철쭉이 자라는 곳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허목(許穆, 1595~1682)의 <기언(記言)>에 보면 구정봉(九井峰) 아래에서 쉬다가 희극(熙克) 스님에게서 철쭉 지팡이를 선물로 받고 지어준 시가 수록돼 있다. 그는 선물로 받은 철쭉 지팡이가 고마워서 북으로 태백산을 유람하게 되면 아마도 이 지팡이 덕분에 신선이 될 것이라면서 시를 마무리한다.

이 철쭉은 오랜 세월 동안 바위 틈새에 위치해 있어서 뿌리가 밖으로 드러났고 이 때문에 제대로 자라지 못해 구불구불한 모습이 됐다. 흰 마디는 바닷가 서리에 노출됐고 말라비틀어진 잎사귀는 겨울바람에 스산한 소리를 낸다. 희극 스님이 그 나뭇가지를 잘라 지팡이를 만들어 선물을 한 것이다.

구장(鳩杖), 원로대신의 자랑거리


▎성철 스님의 생전 모습. 지팡이는 그에게 둘도 없는 친구였다.
허목은 작품에서 이렇게 말한다. “노승이 (철쭉 나뭇가지를) 뽑아서 지팡이 만들어줘 푸른 바다에 짚고 다니니 안개와 놀 일어난다. 나를 만나 은근한 마음으로 선물을 주니, 험한 곳 밟고 다녀도 마음 더욱 평안하다.(老僧拔取以爲杖, 拄過碧海烟霞生. 遇我慇懃持贈我, 使我履險心愈平)” 허목, <기언> 권63)

나무로 만든 지팡이 외에 옥으로 만든 옥장(玉杖)이 있다. 지팡이 전체를 옥으로 만들어서 옥장이 아니라 나무 재질의 몸체에 옥으로 장식한 것을 대체로 옥장이라 부른다. 고대 사회에서 옥은 귀족들을 위한 것이므로 평민들이 함부로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교황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가 예식 때 사용하는 지팡이를 목장이라고 한다.
그러한 상황을 반영하듯 옥장은 원래 한나라 때 천자가 신하에게 하사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조선에서도 국왕이 원로대신에게 구장(鳩杖)을 하사하는데 나무로 만든 몸체에 비둘기 모양으로 조각한 옥을 지팡이 머리 부분으로 장식했다. 그래서 구장을 옥구장(玉鳩杖)으로 부르기도 한다.

<태평어람(太平御覽>(권92)에는 구장과 관련된 당시의 속설을 소개하고 있다.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와 천하를 두고 다투다가 전투에서 패해 우거진 덤불 속에 숨었다. 항우가 유방이 숨어 있는 곳까지 거의 추격했는데 때마침 비둘기 한 마리가 그 위에서 울었다. 추격군들은 새가 있는 것을 보고 사람이 없다고 판단해 다른 곳으로 갔고, 유방은 그 덕분에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후에 그가 황제로 즉위한 뒤 이 새를 기이하게 여겨서 비둘기 장식을 한 구장을 만들어서 연로한 사람들에게 하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비둘기는 원래 목이 메지 않는 새라서 노인들 역시 목이 메지 말고 숨을 잘 쉬라는 뜻에서 비둘기 장식을 했다는 <자치통감(資治通鑑)>의 기록도 있다. 어느 설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황제가 연로한 대신들에게 옥구장을 하사했다는 사실이다.

국왕이 신하에게 지팡이를 선물로 내렸다는 것은 그만큼 지팡이의 문화적 의미가 상당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저 늙은 몸을 지탱하라는 의미보다는 국왕의 은혜를 드러내는 여러 방식 중의 하나로 기능했다는 점이다.

그러니 지팡이 혹은 궤장(几杖)을 하사 받은 사람 입장에서는 가문의 영광이요 후세에 자랑할 만한 일이었다. 국왕이 나이 든 신하에게 지팡이를 하사하는 것은 원로대신을 우대하는 의미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나라의 노인에 대한 공경의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맹자>에서도 노인을 잘 봉양하는 것을 태평성대의 조건으로 제시한 바 있고, 천고의 충신으로 칭송 받는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도 나라를 빠져나와 문왕 밑으로 가게 된 것도 문왕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소문을 들었던 탓이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권력자의 배려를 보면 그 나라의 수준과 정치적 지향점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다.

노년의 가장 친근한 벗


▎허난설헌이 그린 <앙간비금도 (仰看飛禽圖)>. 지팡이를 든 아버지와 그의 손을 잡은 채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 담겨 있다.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지팡이를 짚는 데도 나이에 따른 등급을 정했다. 이는 지팡이를 통해서 노인으로서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함이었으리라.

<예기(禮記)> ‘왕제(王制)’편에 이런 말이 있다. “50세에는 집안에서 지팡이를 짚고, 60세에는 고을에서 지팡이를 짚고, 70세에는 도성에서 지팡이를 짚고, 80세에는 조정에서 지팡이를 짚는다. 90세가 된 자는 천자가 문안할 일이 있으면 그 집으로 찾아가되, 진수성찬이 뒤따른다.(五十杖於家 六十杖於鄕 七十杖於國 八十杖於朝 九十者 天子欲有問焉 則就其室 以珍從)”

이를 통해서 중세 사회의 엄정한 계층적 질서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질서를 지금 우리가 부러워할 것은 아니지만, 근대 이전 사회에서 지팡이가 단순히 실용적 물건의 차원으로 받아들여지기만 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몸이 딱히 불편한 것도 아닌데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풍속에서 우리는 지팡이가 하나의 예절 범주 안에서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근대 이전의 문집에서 종종 등나무 지팡이를 선물한 기록을 발견한다. 거기에는 등나무 지팡이를 선물한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내용이 가득 들어 있지만, 그 이면에서 우리는 선물을 받을 사람에 대한 존경과 은근한 정을 발견한다.

그 지팡이로 어디든 걸림 없이 다니라는 의미와 함께 자신에게도 한 번 찾아오면 고맙겠다는 뜻도 담았다. 등나무 굽은 줄기를 잘 말려서 옻칠을 곱게 하고, 머리 부분에는 새 모양을 비롯한 여러 조각을 해서 손잡이를 만든다. 사용하는 사람의 편의를 생각해서 그렇게 발전해 온 것이리라. 그 모습이 마치 고무래와 같아서, 고무래를 뜻하는 한자 ‘丁’을 활용해 별칭을 붙였다. 지팡이를 정공(丁公)이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려의 스님이었던 식영암(息影庵)은 지팡이를 의인화한 가전체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정시자전(丁侍者傳)>(<동문선> 권101)이 바로 그것이다.

인생의 황혼에 가까운 벗으로 지팡이만한 것이 흔치 않다. 고려 말 유학자 이색(李穡)은 금강산에서 자란 나무로 만든 지팡이 선물을 받고 그것이 명마 한 필의 값과 맞먹는다고 했다.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이숭인(李崇仁)은 정련(鄭連)에게 선물로 받은 지팡이로 중국과 고려를 두루 돌아다녔는데 어느 날 그것을 잃어버리고 아쉬운 마음에 시를 지은 적도 있다. 홀연히 사라졌으니 아마도 비장방(費長房)과 같은 신선을 따라 용이 돼 날아갔으리라는 말로 그 아쉬움을 표현했다.

어찌 보면 작은 물건이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을 생각하면 결코 작지 않은 물건이 지팡이다. 내가 왕성하게 활동을 할 때는 나의 사회적 지위와 문화적 계층을 드러내 도와주고, 일어나지 못할 때는 내 몸을 부축해준다. 그러고 보니 지팡이야말로 만년(晩年)에 사귄 가장 아름답고 고마운 벗이었던 셈이다.

김풍기 -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책과 노니는 것을 인생 최대의 즐거움으로 삼는 고전문학자. 매년 전국 대학교수들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올해의 사자성어’[2011년 엄이도종(掩耳盜鐘)]에 선정되는 등 현실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는다. 저서로 <옛 시에 매혹되다> <조선 지식인의 서가를 탐하다> <삼라만상을 열치다> 등이 있다.

201707호 (2017.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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