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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천수답 정치’ 자유한국당 소멸론 

해답 알아도 행하지 않은 지 오래! 

박성현 기자 park.sunghyun@joongang.co.kr
오랜 권위주의적·이기적 습성이 보수 궤멸 자초… 소속 의원들, 정치인 아닌 영혼 없는 관료 같다는 비판 직면해

▎7월 12일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등 당 지도부가 참석한 가운데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 초선 의원 연석회의. / 사진:연합뉴스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국내 한 로펌에서는 사내 최고위 관계자들이 참석하는 내부 회의가 열렸다.

9년 만의 보수에서 진보로의 정권 이동에 즈음한 정세를 가늠해보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날 한 참석자가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좌중은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이 참석자는 “여기 계신 분들은 앞으로 현업에서 은퇴할 때까지 보수정권을 경험할 일은 없을 것”이라며 이렇게 언급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7~8년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진보정권이 계속될 것 같다. 여러분들의 재임 기간 동안에는 보수정권이 들어서긴 어렵지 않을까. 이제는 진보정권을 일상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평생을 보수적 관점에서 세상을 조망해왔을 이들 법조인에게 ‘진보를 일상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 얘기에 크게 공감했던 모양이다. 변호사로서 현업에 종사할 기간은 진보정권의 치세와 겹칠 공산이 크고, 진보적 가치, 양식을 생활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과 자주 직면하게 될 것으로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단편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이처럼 진보는 한국 사회 기득권의 상층부 의식 영역에서부터 그 존재감을 키워가고 있다. 그에 반비례해 보수는 점점 오그라들게 마련이다. 이런 추세는 더 가속화할 가능성이 크다. 19대 대선에서 간발의 차이로 정권의 향배가 결정된 게 아니라 한쪽(보수진영)의 일방적인 붕괴로 다른 쪽(진보진영)이 줍다시피 가져간 권력이라서 그렇다. 대통령의 탄핵과 국정농단, 어처구니없는 총선 공천 파동 등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보수진영은 지리멸렬한 상태에서 대선을 치러야 했고, 사상 최대 표차(557만 표)로 패배를 맛봐야 했다. 자유한국당을 압도적으로 제압한 더불어민주당조차 자신들의 성공을 놀라워했다. “이게 선거냐”는 푸념이 보수 정치권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것도 예정된 수순이었다.

과거 권력의 메카, 보수의 심장이라던 대구·경북(TK)에서도 보수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다. 한국갤럽이 7월 11~13일 실시한 여론조사(95% 신뢰수준, 표본오차 ±3.1% 포인트)에서 자유한국당, 바른정당의 TK 지지율은 각각 17%로 더불어민주당 33%의 절반 수준에 머물렀다. 같은 조사에서 TK의 문재인 대통령 국정지지율은 73%에 달했으며, 전국적으로는 80%를 웃돈다. 이와 관련해 자유한국당의 한 관계자는 “만약 보수가 정상이라면 80%의 국정지지율 유지가 가능하겠느냐”며 “보수정당은 자생력을 잃은 데다 요즘은 천박하기까지 하다”고 자책했다.

외부 환경은 보수에 싸늘히 식어가는데 정작 보수 내부는 무덤덤하다. 한국 보수진영의 현실 대응 태세는 미국 보수진영의 그것과 비교해볼 때보다 선명해진다.

“진보를 일상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때”


▎보수당은 촛불집회 참가자들의 지지를 회복하는 게 당면 과제다.
미국의 보수진영은 사상 최대의 위기에 직면해선 미래를 준비했다. 1972년 6월 워터게이트 사건이 그랬다. 당시 공화당 출신 닉슨 대통령의 재선을 노린 비밀공작반이 워싱턴 워터게이트 빌딩의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잠입해 도청설비를 심으려다 들통난 사건이다. 결국 닉슨 대통령은 선거방해, 정치자금의 부정 수뢰, 탈세 혐의가 드러나면서 1974년 사임하기에 이른다. 임기 중 미국 대통령이 중도하차하는 최초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연구한 한 학자는 “당시 보수진영은 워터게이트와 현직 대통령 사임이라는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기게 된 여러 동기 중의 하나로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담론 싸움에서 진보진영에 밀렸다는 점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고 전했다. 그 반성의 토대 위에 보수주의의 핵심 싱크탱크라 할 에드윈 퓰너의 헤리티지재단이 1973년 출범했다. 자유 기업, 개인의 자유, 미국 전통 가치, 강한 국방을 기치로 내건 헤리티지재단은 이후 보수진영의 철학과 정책 아이디어의 산실로 기능했다. 미국의 싱크탱크의 역사가 공화당 대통령 사임에서 촉발된 점은 아이러니하다고 하겠다.

자유한국당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과 대선 패배로 인해 모든 것을 ‘리셋’해야 하는 처지에 내몰렸다. 7월 3일 전당대회를 통해 홍준표 대표를 비롯한 지도부를 전면 개편하고 새 출발을 다짐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듯 홍 대표는 당직을 개편했다. 자유한국당의 싱크탱크 격인 여의도연구원 원장에 자신의 측근이자 대선후보 시절 수행단장을 지낸 김대식 동서대 교수를 지명했다. 이에 친박계로 분류되는 이재만 최고위원은 “김대식 여의도연구원장 지명을 철회해야 한다”면서 “당의 주요 당직을 측근 인사, 자기 식구 꽂아 넣기식으로 한다면 문재인 정부의 코드 인사와 무엇이 다르냐”고 반발했다. 여의도연구원은 대선 패배 후 보수 가치 재정립을 위한 연속토론회를 진행 중이다. 6월 23일 1차 토론회(‘보수의 미래를 디자인하다’)에 이어 7월 18일 2차 토론회(‘보수는 무엇을 지키고 개혁할 것인가’)를 열었다. 토론회를 주도하던 여의도연구원장인 추경호 의원(대구 달성)이 취임 4개월 만에 중도하차하고, 홍 대표의 측근 인사가 후임에 지명되면서 사달이 난 것이다.

미국과 한국의 정치 현실은 엄연히 다르다지만 위기의 본질은 같다. 미국 보수는 위기의 순간에 보수주의 이념의 초석을 다질 싱크탱크를 만들었고, 한국 보수는 위기의 순간에 싱크탱크 인선을 놓고 반목을 낳았다. 정신을 반쯤 판 상태에서 하는 개혁은 소기의 성과를 내기 어렵다. 이익을 눈앞에 두면 변화와 반성에 대한 주의력도 심각하게 쪼개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자유한국당이 말로는 혁신을 외치지만 내부적으로는 내년 지방선거 공천을 희망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줄 세우기 풍조마저 감지된다”고 서성교 바른정책연구원장이 비판했다. 지방선거에서 한국당 간판을 달고 나가면 당선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을 가진 선량들이 홍 대표와 측근 주변으로 몰리고, 일부에선 그걸 즐긴다는 것이다. 서 원장은 “혁신은 자기 살과 뼈를 깎는 자기희생과 헌신이 필요한 법인데 최근 홍 대표와 측근 그룹의 행보를 보면서 쇄신 의지가 불투명하다는 의문을 품는 인사가 많다”고 지적했다.

홍 대표, 선출직 불출마 선언해야


▎류석춘 자유한국당 혁신위원장은 당의 환골탈태를 주도하겠다고 다짐했다.
보수의 생사, 재건을 다투는 시점에서 집중력을 떨어뜨리게 하는 언행이 자유한국당 지도부에서 나오는 것만 해도 그렇다. 홍 대표는 전당대회 과정에서 대구를 방문해 “남은 정치 인생은 대구에서 하고자 한다”고 말해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예컨대 지방선거에 출마하는 대구 국회의원 지역구에서 치러질 보궐선거에 홍 대표가 출마한다는 뜬소문이 TK 정치권에서 나돌았다. 이 와중에 홍 대표는 7월 12일 당 최고위원, 초선 의원 연석회의에서 “대구에서 비어 있는 지역위원장을 맡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당 대표가 대구지역위원장을 맡으면 자유한국당 중심이 대구가 된다”는 명분을 댔지만당 안팎에서는 조원진 의원의 탈당으로 석 달째 공석인 대구 달서병 당협위원장을 염두에 뒀다는 관측을 불러왔다. 더불어 원외의 홍 대표가 3년 뒤 총선에서 대구 달서병 출마 의사를 내비쳤다는 해석도 뒤따랐다.

홍 대표가 보수정당을 살리고 대의를 세우자면 스스로 선출직 불출마를 선언하는 게 우선이라는 반응이 나오는 배경이다. 서성교 원장은 “공천을 앞둔 정당은 난장판과도 같다”면서 “홍 대표가 살신성인의 자세로 선출직 불출마를 선언하고 공명정대한 당 운영을 약속할 때 보수의 활로가 뚫릴 것”이라고 직격했다. 홍 대표가 강력한 자기혁신과 희생 의지를 보여야 대여 투쟁의 도덕적 기반도 갖추고,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신진기예들의 영입도 활기를 띨 것이라는 말이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2016년 3월 펴낸 저서 <누구를 위한 나라인가>에서 정치지도자의 덕목과 관련해 “자기를 던지고 버릴 때 진정한 승리를 얻는다”고 했다. 김 전 의장은 1980년대 3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정치 승부수를 돌이켰다. 1노(노태우)3김이 출마한 1987년 12월 대선에서 김대중(DJ) 후보는 노태우·김영삼(YS) 후보에게 밀려 3위에 그쳤다. 몇 달 뒤 치러진 13대 총선에서는 YS는 자신의 지역구인 부산 서구에, DJ는 정치생명을 걸듯 전국구 거의 끝 번호를 달았다. DJ의 평민당이 YS의 통일민주당을 제치고 2당으로 국회에 진출했다. DJ가 배수의 진을 쳤기에 가능한 결과였다고 김 전 의장은 풀이했다. 김 전 의장은 “자기희생을 솔선수범하는 지도자에게 국민이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내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정치의 진리”라고 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여의도 정치권에선 대선 막바지에 더불어민주당 공동선대위원장인 이해찬 의원이 제기했던 보수의 소멸론, 궤멸론이 더 현실적으로 와 닿는다는 이들이 늘었다. 당시 이 의원은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되고 그다음에는 안희정, 이재명, 박원순 같은 사람들이 쭉 집권해야 한다”면서 “그렇게 해서 보수세력을 완전 궤멸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대선 패배 이후 보수의 위기를 부른 원인 진단은 이미 신물이 날 정도로 넘친다. 반성과 성찰, 정체성 재확립, 도덕성 회복, 미래 가치를 가진 인재 육성 등등. 나와야 할 해답은 다 나왔다고 할 것이다. 문제는 구성원들, 특히 기득권을 가진 국회의원들의 실행 의지가 박약하다는 점이다.

물론 자유한국당도 뭘 해야 하는지를 잘 안다. 류석춘 자유한국당 혁신위원장은 7월 11일 취임과 동시에 자유한국당의 병폐와 과제를 예리하게 분석했다. “지난 10년간 집권해온 자유한국당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스스로 확신하지 못했다. 가치의 추구와 실현보다는 권력 자체의 획득과 유지에만 몰두해왔다”고 성토했다. 이에 더해 “자유한국당은 집권여당으로서의 책임보다는 권력을 이용한 개인과 집단의 이익과 영달에 함몰돼 유권자를 외면한 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가치가 무엇이며 그 가치의 실현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망각하고 말았다”는 채찍질도 했다. 자유한국당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도 ‘대한민국이 힘들게 지키며 발전시켜온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법치주의를 기반으로 정치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고, 자유통일을 이룩해 미래세대가 위대한 대한민국을 물려받았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도 명시했다. 혁신위원장의 임무와 관련해선 “이런 가치를 실현하는 조직으로 자유한국당을 환골탈태시키는 작업”이라고 못 박는 등 의지를 불태웠다.

자유한국당은 전체가 아닌 개인의 이익이 우선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가 지난 5월 법원종합청사 대법정에 나란히 앉아 재판을 받았다.
그의 말대로 자유한국당의 전면적 개조가 가능할까?

이와 관련해 한국의 보수당은 “답을 알아도 답이 있는 쪽으로 가지 않는다”고 대선전까지 자유한국당에 몸담았던 바른정당의 한 관계자가 말했다. 보수층이 완전 등을 돌려줘야 정신이라도 차리는데 죽지 않을 만큼의 지지를 받다 보니 몰락하는 현실에 안주하려 든다는 비판으로 이어진다. 자유한국당의 소장파 인사는 “한국당은 보수의 대변인이라기보다는 기득권의 대변인”이라고 규정했다. 당의 상층부를 구성하는 법조인, 기업인, 군 장성들, 특정 학맥 등 한국 사회에서 60년간 누려온 이들의 결집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전체의 이익보다 개인의 이익이 관철되는 구조를 향유하려는 의원들이 자유한국당의 주류를 차지한다고도 했다.

보수당의 파행적 구조는 지난해 총선에 참여해본 이들에겐 피부로 와 닿았던 것 같다. “지금 권력의 실세들에게는 절실함이 사라진 지 오래다.” 지난 20대 총선에서 대구 북을 새누리당 경선에 참여했던 김두우 전 청와대 홍보수석은 당시 친박계의 공천 전횡을 규탄하는 보도자료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대구 북을이 장애인·여성 우선추천 지역으로 분류되면서 경선 기회마저 박탈당한 심경을 토로한 것이다. 김 전 수석은 “야당 10년을 겪으면서 중도층을 끌어안으려고 발버둥 치던 모습도, 천막당사에서 와신상담하던 추억도 이제 찾을 길 없다”면서 “오직 내 사람 챙기기에 급급한 모습에다 권력의 추악한 야욕만 남았다”고 진저리를 냈다.

여전히 자유한국당의 원내 다수파는 친박계 의원들이다. 실질적인 권력이 친박계에 주어진 자유한국당 쇄신이 쉽지 않다는 게 지난 1월 이후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으로 활동해본 김성은 경희대 교수의 평가다. 김 교수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만신창이가 된 보수정당 쇄신과 재건에 힘을 보태고자 비상대책위에 합류했다고 했다. 그는 대선 기간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자진 탈당을 요구하고, 자유한국당이 태극기집회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극기 부대의 눈치를 보는 계파 정치, 특정 지역에 의존하는 지역주의 정치를 탈피하자”던 그는 정치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 취급을 받았다고 돌이켰다. “당시 당 지도부는 박 전 대통령 지지층과 태극기집회 참가자들을 자유한국당이 기댈 언덕쯤으로 간주했다. 친박계 청산은 당을 와해할 것이라며 자제를 요구했다. 자유한국당은 이들로 인해 개혁 작업이 난관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원내 다수파들이 원외의 홍준표 대표를 견제하는 구도로 가면 자유한국당은 정말 답이 없는 지경으로 내몰린다.”

보수 파탄의 전조는 오래전부터 감지됐다. 기득권·부패 이미지 청산, 정체성 재확립은 21세기 한국 보수의 숙명적 과제로 거듭 제시됐다. 2005년 3월 발행된 <한국의 보수를 論한다>(바오)에서 언급한 당대의 보수 존재 형식을 보자.

“보수의 기반이 점차 허물어져 가고 있다는 위기의 경고음이 지속적으로 들리는 데도 불구하고 그 원인을 분석하거나 대안을 모색하는 일에는 소홀한 듯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처럼 한국의 보수세력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는 불감증에 빠져 있다. 한국의 보수세력은 진정한 보수의 가치를 스스로 훼손함으로써 위기를 자초했다.” 이때는 보수진영이 연거푸 두 번(1997년, 2002년)의 대선 패배로 실의에 빠져 있을 즈음이다.

2007년, 2012년 대선에서 보수진영이 2연승을 올렸을 때도 보수는 제자리걸음만 했다. 2013년 7월 발행된 <보수주의와 보수의 정치철학>은 이렇게 당시를 기록했다.

“한국의 보수 집단은 정신적 태도와 지적 역량의 빈곤함에서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보수 집단은 존재했으면서도 보수주의로 규정될 정도의 체계적인 이념은 부재했다. 이런 사실 자체가 단순히 특정 정치·사회 세력의 정신적 태도 및 지적 역량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한국 현대사 및 지성사의 주요한 성격을 반영한다.”

‘집단 이기의 덫에 빠져 개혁을 부르짖는 이들’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문재인 정부가 현실주의 노선을 취할 것으로 내다봤다.
어떤 조직이든 실적에 미치는 영향을 분명히 드러내는 정보가 없다면 지금 가장 쉬운 행동을 하는 경향이 있다. 숱한 변화의 요구를 건성으로 받아들이다 보면 일순간 개혁은 부질없다는 타성에 젖게 된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예전에 한국 정치가 가진 병폐의 하나로 ‘정작 자기가 기득권에 안주하고 집단 이기의 덫에 빠진 줄도 모른 채 변화와 개혁을 부르짖는 이들’을 꼽기도 했다.

보수 몰락을 참담한 심경으로 지켜보는 이들 중에는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도 있다. 전두환·박정희 정권 시절 독재에 결연히 맞섰던 그는 1980년대 후반 일본에서의 연구를 통해 ‘중진자본주의화론’의 단초를 열었다. 이후 노무현 정부시절 뉴라이트운동을 펼쳐 이명박 정부 출범의 길을 닦았다. 그를 최근 경기도 의왕시 자택 인근에서 만났다. 보수의 과제와 미래를 짚어달라는 요청에 많은 얘기를 해주면서도 실명 인터뷰는 고사했다. “여든 넘은 나이에 언론에 나서는 건 온당치 않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의 절절한 현실 진단을 익명으로 세상에 내보내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거듭된 요청 끝에 승낙을 받았다.

안 교수는 자유한국당에 아주 엄했다. 지도자에게 절대복종하는 그들의 과거로 볼 때 미래의 비전을 갖는 게 불가능한 정당이라고 규정했다. “보수 정치권의 이런 습성이 치명적인 걸림돌이 될 것”이라며 “그건 바로 ‘권위주의’라는 아주 오래된 과거”라고도 했다. “보수의 유력 정치인들, 보수 정부의 중추적 역할을 한 인사들 대부분이 권위주의적 사고의 소유자들이라 지도자 앞에서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뿐 바른 소리를 못했다. 그들이 능력이 없거나 나쁜 사람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권위주의적 습성이 뿌리 깊은 탓에 마땅히 할 얘기를 못하고 눈만 껌벅거린다. 정치인이라기보다 차라리 관료에 가깝다.”

“자유한국당은 자유주의 독재의 상징”


▎7월 12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찾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는 바른정당 지도부. 바른정당은 보수의 대안을 자처한다. / 사진:연합뉴스
자유한국당(이전의 새누리당, 한나라당)의 아주 뛰어난 인재들조차 그랬다고 그는 돌이켰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과 탄핵도 보수 정치권의 권위주의 습성과 맞물린 비극으로 해석했다.

“대한민국이 건국과 산업화를 기반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이행은 했지만 그 과정은 권위주의 정권에서 이뤄졌다. 다시 말해 권위주의 토대에서 민주주의가 자랐다. 권위주의를 극복하면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게 한국 정치에 주어진 과제였는데, 보수진영은 그 권위주의를 벗어던지지 못했다.”

이 권위주의의 문제점은 과거의 성과에 도취해 미래를 열 수 있는 기회를 막아버리는 데 있다고 했다. “자유민주주의는 다양한 사상이 꽃 필 때 비로소 스스로 꽃 필 수 있는 사상이다. 권위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가 공존할 수 있어야 자유민주주의라는 꽃이 필 수 있다. 그런데 권위주의자들의 자유주의는 다른 사상을 배척한다. 오랜 반공주의의 병폐인 셈이다. 자유주의 독재와 같다. 자유한국당은 자유주의 독재의 상징물이다.”

정치는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보수세력이 방황하는 사이 진보진영은 업그레이드를 거듭한다. 한국의 진보진영이 실용주의 노선으로 돌아설 조짐마저 보여 안 교수에게는 보수의 미래가 한층 더 어둡게만 느껴진다. 대선 전의 문재인 후보와 방미 후 문 대통령의 태도 변화를 보면 한층 분명해진다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보수의 눈에 약간은 반미적이고 북한에 온정적으로 비치던 문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과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거치면서 미국, 일본과의 협력을 중시하는 쪽으로 돌아서고 있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하면서 넘어서기 힘든 대화의 장애물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한국이 처한 외교안보적 여건과 한계를 절감한 문 대통령과 여권은 북핵과 미사일과 관련해 한·미·일 협력 쪽으로 돌아설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의 진보진영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본 체제로 받아들이는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정립하게 될 것이다.” 합리주의와 실용주의를 추구하는 더 세련된 진보정권의 등장으로 보수의 영토는 더 줄어든다는 진단이다.

안 교수는 “자유한국당이 해제돼야 새 프레임이 나온다”면서 “그들 스스로 그 일을 해낼 능력이 없다”고 단언했다. 그래서 “미래의 자유한국당은 몇 번의 선거에서 유권자에게 외면을 받아 소멸되는 운명으로 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심지어 “자유한국당을 어쭙잖게 회생시키려 하거나 연명시키려는 시도는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그는 경고했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도 자유한국당의 자생력, 복원력에 별다른 기대를 걸지 않는 편이다. 그에게 한국의 보수당은 보수의 철학을 제대로 추구하거나 논쟁한 적이 없다. 비록 말의 성찬일지언정 평등과 유토피아를 설파하며 가치 논쟁을 벌이던 진보진영보다 못하다. 그는 “비정상적으로 끝난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이 어떤 잘못을 했기에 허망하게 무너졌는가에 대한 처절한 반성이 없는 게 지금의 보수정당”이라고 질타였다. “친박계가 버티는 자유한국당은 어느 칼에 죽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허망하게 무너지고도 과거의 잘못을 진솔하게 평가, 반성하기 어려울 것이다. 국정 농단의 공동정범 관계에 있는 인사들이 자신을 역사의 죄인으로 낙인찍는 상황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새 지도부도 그런 역풍을 감내할 의욕과 철학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한국의 보수당은 ‘천수답 정치 심리’에 사로잡힌 듯하다고 황 평론가는 우려했다. “소속 의원들은 상당수 손을 놓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실책을 하면 보수에도 기회가 오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는다. ‘가물면 언젠가는 비가 오겠지’라는 식의 천수답 정치 심리가 자유한국당을 병들게 한다.”

그래서 “지금의 보수정치권이 소멸 과정을 거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고 평했다. 1830년대 영국의 보수당과 함께 양당정치를 이끌던 자유당이 20세기 들어 노동당에 밀려 지금은 소수정당으로 전락한 예를 들었다. “대한민국 절반의 보수층은 국정농단과 탄핵이라는 죄의식으로 인해 고개도 제대로 못 들고 할 말은 삼킨다.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용기를 줘야 할 자유한국당이 기득권 유지에 급급하다 보면 사라지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보수 지지층, 현 정부 등져도 자유한국당으로 오지 않아


▎6월 2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자유한국당 여의도연구원 주최 ‘보수 가치 재정립 토론회’. / 사진:연합뉴스
얼마 전까지 여의도연구원장으로 보수 가치 재정립 토론회를 주관했던 추경호 자유한국당 의원은 이런 점에서 한국당의 미래가 걱정이다. 진보진영으로 갔던 보수층이 자유한국당으로 자동적으로 회귀한다는 보장이 없음을 잘 알기에 그렇다. “한국당은 과거보다 더 반듯한 보수의 그릇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변화와 혁신이 없다면 진보진영에서 이탈한 보수층이 우리가 아닌 다른 정치 집단으로 갈 수 있다. 자칫하다간 한국당이 과거에 집착하는 수구정당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에 대한 근본적인 답을 찾아야 한다.” 앞서 봤듯 보수당은 이에 대한 질문도, 해답도 안다. 실행 여부가 관건으로 남아 있다.

- 박성현 기자 park.sunghyun@joongang.co.kr

201708호 (2017.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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