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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시대… 시인에게 사랑을 묻다] 이문재 - 속도지상주의에 저항하는 도시생태론자의 초상 

“삶과 죽음을 연결하는 길을 찾고 싶다” 

글 한경심 자유기고가 icecreamhan@empal.com / 사진 전민규 기자 jun.minkyu@joins.com
시는 반인간적 문명과 맞서는 전망 좋은 관측소 … 공감능력과 몸의 감수성을 복원하는 것이 시인의 예지

황해도 실향민의 아들로 태어난 이문재는 고향을 잃고 땅과 흙을 잃고 도시에서 모래알갱이처럼 사는 우리들에게 온 우주는 연결되어 있다고 외친다. 자본주의와 디지털 세계에서 도로 대신 흙길을 만들고, 사유지 대신 공터와 마을을 만들어 낯선 이를 환대하고 공감하자고 한다. 그의 공감대는 비단 사람에 국한되지 않고 자연과 환경, 사물에까지 나아간다.


“내 안에 무수한 ‘나’가 있다.” 사람은 천하의 바보 같다가도 어느 순간 거룩해진다며 이문재(李文宰)가 던진 말이다. 그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무릇 인간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그에게는 특별히 많은 ‘페르소나’가 있는 듯하다. 근엄한 교수의 표정으로(실제로 그는 경희대 교수다) 현 시대의 자본주의와 소비문명을 비판하다가 도시의 고가도로에 흙을 부어 나무와 농작물을 키우는 청사진을 펼쳐 보이며 슬며시 이상주의자로 변모한다. 그럴 땐 그의 눈빛마저 순해져 꼭 꿈꾸고 있는 소년 같다.

그가 <시사저널> 기자로 일하던 시절 정동의 술집에서 혼자 술 마시는 모습을 본 이가 많다고 하자 자신은 본래 술이 안 받는 체질로 30대에도 마시면 곧 토했다며 이젠 맥주 서너 잔밖에 못 마신다는 예상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그런데 후배 시인들이 쓴 글에 나오는 이문재는 곧잘 전날의 숙취를 하소연하곤 한다.) 잠시 후 커피 잔이 비자 그는 “맥주 드실래요?”라고 묻는다. 또 그의 시와 산문에 자주 등장하는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느냐고 물으면 “평범한 농부였다”는 짤막한 대답. 그러다 다른 이야기 중에 아버지가 나오면 이번엔 아버지에게 한두 번 맞았다는 이야기까지 털어놓는다. 자연의 회복과 순환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다 그의 ‘생태주의’ 시를 언급하면, 처음엔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정색하며 “본래 시란 다 생태주의적인 겁니다”며 결론짓듯 선언하여 방금까지 열성적으로 펼쳤던 그의 철학과 시의 특성을 한순간에 무화시켜 버리고 만다.

오랫동안 <시사저널> 기자로 일하고, 한때 <문학동네> 편집위원과 주간으로도 활동했던 그는 각각의 입사와 퇴사 일을 날짜까지 정확히 알려주고, 1984년 여성지 기자로 처음 직장을 잡은 이래 2005년 <시사저널>에서 퇴직하기까지 247개월 쉼 없이 월급을 받아왔노라고 정확한 정보를 내놓았다. 그 엄밀한 기억력에 감탄하면 그는 또 기억력이 하도 떨어져 부러 외워둔 거란다. 늘 긴장하고 바쁘게 살아야 하는 기자 생활과 문필활동, 그리고 창간부터 깊은 인연을 맺어온 <문학동네>를 중심으로 한 이러저러한 활동에다 뒤늦게 석사·박사 학위까지 따고 모교 교수가 된 그는 보직까지 맡아 지금도 바쁘게 사는 모습이다. 그의 어마어마한 활동량과 일에 놀라워하면 그는 극구 부인하며 일을 전혀 많이 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그러다 나중에는 사실 일중독자라고 고백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이러한 말은, 그러나 그가 하면 모두 진실이라고 믿게 된다. 일을 많이 안 했다고 느끼는 것도 사실이고, 일중독자라고 느끼는 것도 다 사실이라고. 요컨대 한쪽으로 의견이 기우려고 할 때마다 “이의 있습니다!”라고 외치는 것 같다. 개방적인 사람은 아닐지 모르나 그가 정직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겠다. 이쯤 되면 일관되게 한두 가지 얼굴만 보여주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고, 사람은 모름지기 여러 가지 얼굴(상반된 모습까지 포함하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실향민 2세대가 갖는 ‘고아의식’과 ‘난민의식’


김포에서 태어난 그는 고향조차 세 곳이거나 아예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황해도 출신인 그의 부모는 1·4후퇴 때 내려와 연평도와 흑산도, 목포를 거쳐 강진 월출산 아래에서 7년 살았다고 한다.

“저는 1959년 시월 말 김포에서 났지만, 저의 회임지는 강진입니다. 월출산의 정기를 받고….”

그래서인지 그는 전라도에 자연스럽게 이끌린다고 한다. 논산 아래로 가면 달라진다는 흙빛, 그 황토의 붉은색과 남도의 장단과 가락, 음식을 하나씩 손꼽으며 그는 잠시 먼 곳에 다녀온 표정을 지었다. 남도의 젓갈을 좋아하고 해산물이라면 환장한다는 그가 태어난 검단은 김포읍과 바닷가가 양쪽으로 5㎞씩 떨어진 곳인데, 지금은 인천시로 들어갔지만 그의 부모가 처음 왔을 때는 아예 마을이 없었다.

“아버지가 신문에 광고를 내어 황해도 사람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렇게 마을을 이루어 전후의 가난한 시절을 함께 지내온 거지요.”

그의 아버지는 마을의 지도자였다. 그래서 그의 집은 늘 동네사람들로 북적였다. 여름밤이면 마당에 자리를 깔고 사람들은 피란 온 이야기를 저마다 풀어내고 그는 그 이야기 속에서 잠들었다.

“잠결에 그런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어 각인됐는지 얼마전까지도 전쟁과 피란 가는 꿈을 꿀 정도였습니다. 나는 전후 세대지만 정신적으로는 전쟁세대이기도 합니다.”

1909년생인 그의 아버지는 식민지 세대이니, 그도 식민지 시대의 흔적을 한 자락 갖고 있다. 조금 확장해 본다면 그도 아버지처럼 식민지 시대와 전쟁, 전후 근대화 시기를 관통해온 셈이다. 아버지가 만 쉰 살에 태어난 그는 ‘쉰둥이’로, 세 형과 누이동생이 있지만 워낙 터울이 많이 져서인지 늘 혼자라는 ‘막내고아’ 의식을 갖고 자랐다. 그가 어른이 되고 기자가 되어서도 그렇게 숫기가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봉건시대 사람답게 개인보다는 역할에 충실했던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을 중재하는 마을의 우두머리였고, 바깥에서는 유머도 있고 노래도 했다지만 집 안에서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

“딱딱했지요. 근엄하고. 아버지와 나눈 대화를 마일리지로 치면 10분도 채 안 될 걸요?” 열 살에 겨우 전기가 들어왔다는 그곳에서 고등학교 때까지 유대감이 강한 농경공동체 문화에 젖어 살았지만 그는 ‘실향민의 아들’이라는 의식을 갖게 된다. 이 실향민 의식은 뒷날 도시로 나가면서 ‘국내 디아스포라’라는 ‘난민의식’으로 발전한다.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잘 몰랐는데, 후반이 되자 나는 뿌리가 없구나, 하는 마음이 안에서 스미듯 올라오더군요. 명절이면 남들은 귀성하느라 힘들었다고 하소연하지만 저는 부러웠습니다. 부모님 돌아가시고는 김포에도 갈 일이 없어졌고요.”

2005년 7월 남북작가회의가 열리기 전 예비회담이 개성을 오가며 열렸는데, 그 무렵 그는 술김에 분통을 터뜨린 적이 있다.

“개성에 가야 할 사람은 황해도 실향민 2세대인 나 아니냐고 하소연한 것이지요. 제 또래 남자 시인 가운데 저 말고 실향민 2세대가 없습니다. 실향민 아들로서 문학을 전공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도 물론 본 회의에는 참가하여 북한 땅을 밟았다. 평양 고려호텔에서 내려다본 시내는 온통 깜깜했는데, 슬프고 화도 났다고 한다.

“행복하게 잘살았으면 하는 마음이었지요. 그래도 작가들과는 공감대랄까, 잘 통하는 면이 있었어요.”

그의 삶에는 김포와 강진, 그리고 황해도가 고루 들어와 있지만 한편으론 뿌리 없는 삶이라는 난민의식을 갖고 있고, 마을공동체에서 형제들과 같이 자랐으면서도 고아의식을 갖고 있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김포를 떠나온 이후 끝내 돌아가지 못한 그가 뒷날 도시에서 마을공동체와 흙을 꿈꾸게 된 것도, 또 그처럼 순하게 선배와 동료의 인연에 감사하며 따르는 것도 풍성했던 과거의 추억 때문인지, 아니면 결핍감 때문인지 알 수 없다.

땅의 마지막 아들이 도시의 첫 아버지가 되어


▎경희대 국문과 78학번 이문재 시인과 동기생으로 하재봉, 박덕규 시인과 함께 <시운동>을 주도한 류시화 시인. 이문재는 1982년 <시운동> 4집에 처음으로 자신의 시를 실었다.
고등학교 때 더러 백일장에서 상도 탔다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문학에 뜻을 두게 된 것은 경희대 국문과에 진학하고서다. 처음엔 영문과를 원했는데 성적이 안 되어 국문과에 가게 됐다고 하니, 사람에겐 운명이 예정돼 있는 것도 같다.

“78학번 동기로 류시화, 박덕규, 김형경, 이혜경 등이 있었고 하재봉, 박남철 등이 선배였지요. 창작하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신입생 시절 경희문학회에 가입하면서 네 줄짜리 짧은 시를 써냈는데 이를 읽어본 류시화가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며 “우리 같이 해보자”고 건네는 한마디에 자연스럽게 문학회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유난히 숫기가 없어 사람 눈도 마주 보지 못하는 탓에 합평하는 자리에서는 입도 열지 못하자 하재봉이 그에게 연극부를 권했다. 그리고 연극부가 그에겐 잘 맞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연극과 시에 발을 들여놓게 됐지요. 저는 운이 참 좋은 사람입니다. 저를 도와주고 이끌어주는 인연을 만나니까요. 류시화의 악수는 저를 시로 끌고 들어가는 환영인사 같은 거였어요. 지금도 생생합니다. 또 하재봉 형은 졸업을 앞두고 어디에 취직을 해야 하나, 국어 교사를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주부생활>을 내는 학원사가 글 쓰는 이를 우대해준다며 함께 입사했고요.”

하재봉과 류시화는 그가 시인으로 등단하는 데도 한몫했다. 1982년 군대를 제대할 무렵 처음 시를 발표한 지면이 동인지 <시운동> 4집이었는데, 이 동인지는 하재봉과 류시화, 박덕규가 주축이 되어 만든 거였다. <시운동>은 <창비>와 <문학과지성>이 폐간된 당시 문단에서 젊은이들에게 소중한 지면이 되었다.

“그게 등단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죠. 실제로 그 뒤 신춘문예에 네 군데나 응모했고, 시 전문지 <심상>의 신인 공모에도 응했지만 한번도 결선에 오르지 못했어요. 그다음부터 응모전은 돌아보지도 않았지요.”

착실한 이문재는 대신 <시운동>에 꾸준히 시를 발표했다. 중학교 때 황순원의 단편 ‘소나기’를 다 외우는 벌을 받고 유일하게 그 벌을 완수한 학생이 그였다. 그는 언제나 끝까지 출석하고 과제를 다해내는 학생이고 할 일을 미루는 것을 못 견뎌 할 사람이다. 젊은 이문재에게 문학적 야심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이 유별난 착실함과, 또 한편으로는 자신만의 묵묵한 걸음걸이로(숫기는 없을지라도 자기주관성은 대단한 사람답게) 자신의 길을 간 것이다. 그러자 다른 문예지에서 청탁도 해오고 어느덧 시인으로 불리게 됐다. 처음 시인으로 불렸을 때는 실감이 안 나 ‘나를 놀리나’ 싶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주부생활>을 거쳐 <레이디경향>, 그리고 <시사저널>로 자리를 옮겨 기자 생활을 계속하면서도 그는 언제나 시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기자 생활 초기 ‘낮에는 기자, 해 지면 시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정체성의 순결성을 지킬 자신도 있었고요. 그래서 퇴근 때는 일부러 모자를 쓰고 문단 선배와 친구들이 기다리는 인사동 술집 ‘평화만들기’ 같은 델 드나들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밤에도 기사 걱정을 하는 저를 발견하게 됐어요. 내가 도시에 졌다는 걸 깨달았지요.”

1988년 나온 첫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에는 “농경공동체인 시골 출신이 거대 도시에 적응하는 성년식 과정”이 담겨 있다. 그의 등단 작품이기도 한 ‘우리 살던 옛집 지붕’은 이렇게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떠나오면서부터 그 집은 빈집이 되었지만
강이 그리울 때 바다가 보고 싶을 때마다
강이나 바다의 높이로 그 옛집 푸른 지붕은 반짝여주곤 했다
가령 내가 어떤 힘으로 버림받고
버림받음으로 해서 아니다 아니다
이러는 게 아니었다 울고 있을 때
나는 빈집을 흘러나오는 음악 같은
기억을 기억하고 있다


“도시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 자각하는 과정이라고 할까요? 저의 아버지는 집에서 태어나 집에서 죽고, 저는 집에서 태어나 병원에서 죽을 것이고, 제 자식 세대는 병원에서 태어나 병원에서 죽겠지요. 땅의 아들로 태어나 도시에 나와 최초의 아스팔트의 아버지가 되는 여정이 담겨 있습니다.”

‘속도 패권주의’에 저항하는 산책, 느림, 부사


▎2009년 3월 KBS 1TV <낭독의 발견> 녹화장에서 시인 기형도를 추억하는 낭송이 이어졌다. 특별 게스트로 출연한 소리꾼 이자람(왼쪽) 씨가 기형도의 시 ‘빈집’에 곡을 붙여 노래하고 이문재(오른쪽) 시인이 고인의 시집을 읽었다.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나로서 살 수 없다는 것’임을 깨달은 이문재는 1994년 낸 두 번째 시집 <산책시편>에서 비판과 저항의 목소리를 낸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힘 있는 체언(주어)이나 강력한 용언(동사, 형용사)이 아니라 2차적이고 부수적인 부사(副詞)를 말한다. 그리고 산책과 느림을 앞장세운다.

“도시에 지고 나니 속도지상주의에 저항해야겠다는 자각이 일어났지요. 도시의 속도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산책과 느림, 부사를 생각한 것입니다.”

이와 함께 그가 고개를 돌린 곳은 ‘생태’다. <산책시편>에는 ‘산책로 밖의 산책’ ‘황혼병’ 같은 산책 시와 함께 ‘오존 묵시록’ ‘산성눈 내리네’ 같은 환경문제를 다룬 시도 많다.

산성눈 내린다
12월의 썩은 구름들 아래
병실 밖의 아이들은 놀다 간다
성가의 후렴들이 지워지고
산성눈 하얗게 온 세상 덮고 있다
하마터면 아름답다고 말할 뻔했다
캄캄하고 고요하다


이때쯤인 것 같다. 그에게 ‘생태주의 시인’ ‘도보고행승’ ‘순례자’ 등의 별호가 붙기 시작한 것이. 그는 그런 별칭이 탐탁지 않을지 모르나 1991년 창간된 <녹색평론>에 깊이 동감하여 녹색평론의 편집자문위원까지 되었다.

“생태주의 문학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중반에 반짝 유행했으니 저는 늦은 편이었지요. 원래 시는 언제나 생태주의였습니다. 모든 사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고 숭배하는 것이 비이성적인 게 아닌데, 이런 마음을 내버려서 삶이 곤고해졌습니다. 더위나 미세먼지는 우리가 버린 자연의 역습입니다.”

두 번째 시집은 그의 의도와 메시지가 분명한 편인데, 애초부터 ‘기획’하고 쓴 것이어서 그렇단다. 그래서인지 그 자신은 시가 건조하고 딱딱해져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첫 번째 시집을 낼 때 저는 시인이 아니었습니다. 시를 쓴다기보다 ‘받아 적는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겁니다. 다른 시인들은 공들여 시를 쓰고 고치고 하는데, 왜 나는 생각 없이 느닷없이 쓰게 되고, 한번 쓴 것은 다시 고칠 수도 없게 되는지 알 수 없었지요.”

젊은 시인들이 그렇듯 그도 하룻밤에 아홉 편을 내리 쓴 적도 있었다. 시가 오는 순간은 열병을 앓는 것처럼 온몸에 미열이 오르기 시작하는데 ‘이러다가 죽겠구나’ 싶어 쓰다가 밖으로 뛰쳐나간 적도 있다. 시마(詩魔)의 공격이랄까, 무당처럼 무엇엔가 ‘들려 있었다’고 한다. 그런 그이기에 자신의 시에 저작권도 주장할 수 없어 두 번째 시집은 ‘설계해서’, 어떤 면에서는 기자적인 시각도 들어간 구상으로 쓰게 됐다는 것이다.

시는 자본주의의 마지막 보루


▎2009년 시인, 소설가 29명이 산문집 <춘천, 마음으로 찍는 풍경>을 펴냈다. 왼쪽부터 필자로 참여한 유안진·오정희·이승훈·한명희·박남철·박찬일·이문재 씨. / 사진:강정현
생태주의 또는 자연과 환경을 생각하는 그의 세계는 세 번째 시집 ‘마음의 오지’에서는 농업과 땅, 흙, 과거와 미래, 몸과 마음으로 확대된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농업박물관’에서 농업이 저 논밭에 있지 못하고 시내 박물관에 들어와 있는 현실을 목도하며 그는 ‘농업박물관 소식’을 전해준다.

‘만일 지금 예수가 오신다면/ 십자가가 아니라 똥짐을 지실 거라는/ 권정생 선생의 글을 읽었다//…(중략)…// 농업박물관 앞뜰/ 나는 쪼그리고 앉아 우리 밀 어린 싹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농업박물관에 전시된 우리 밀/ 우리 밀, 내가 지나온 시절/ 똥짐 지던 그 시절이 미래가 되고 말았다/ 우리 밀, 아 오래된 미래// 나는 울었다’(‘농업박물관 소식-우리 밀 어린 싹’)

표제작인 ‘마음의 오지’에서는 ‘초승달 아래 나 혼자 남아/ 마음을 들여다보는데/ 마음 밖으로 나간 마음들/ 돌아오지 않는다/ 내 안의 또 다른 나였던 마음들/ 아침은 멀리 있고/ 나는 내가 그립다’고 얘기한다.

이렇게 마음을 들여다보더니 ‘봄 밤 원효’에서는 ‘봄 밤 봄 밤이/ 내 목덜미 붙잡아/ 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환장한 내 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중략) …// 봄 밤 왼통 대갈통 속으로/ 들어간다 들어온다/ 연등 하나 화엄/ 화엄으로 화안해진다/ 거기가 여긴가’라고 묻는다. 거기가 여기가 되고,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고, 모든 것이 연결돼 있다는 화엄의 세계로 나아간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렇듯이 자연스럽게 불교에 친화력을 갖고 있습니다. 기자 생활 할 때 스님들을 많이 만나게 되면서 스님들도 좋아하게 됐고요. 제 시가 선적인지 모르겠지만, 시도 선처럼 직관과 통찰의 세계라는 점은 비슷하지요.”

2004년에 나온 세 번째 시집 <제국호텔>에서도 자연, 환경, 지구, 인드라망으로 연결되는 화엄의 세계는 계속된다. 그에게 소월시문학상을 안겨준 ‘지구의 가을’은 실상사 공양간에 붙어있는 공양게송에 보고 영감을 받아 쓴 시다. 불가에서 밥 먹을 때 읊는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로 시작하는 공양게송은 ‘이 음식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두려워 헤아리지 못합니다/…(중략)…// 우주를 먹고 자란 쌀 한 톨이/ 내 몸을 거쳐 다시 우주로 돌아가는/ 커다란 원이 보입니다/ 내 몸과 마음 깨끗해야/ 저 쌀 한 톨 제자리로 돌아갈 터인데/ 저 커다란 원이 내 몸에 들어와 툭툭 끊기고 있습니다’로 변주된다.

그러나 ‘제국호텔’에서 제목만큼 눈길을 확 끄는 것은 새로운 제국에 관한 시편이다.

‘이곳 원주민들은 @에 모여 산다/…(중략)…/ 원주민들은 너도나도 비밀번호를 만들었다/ 저들은 자신의 비밀번호에 갇힐 것이다/ 디지털 정책은 완벽 완전하다/ @에 불이 들어와 있다/ 오늘 달빛은 아무래도 악성 바이러스 같다/ 저런 달무리가 며칠 더 계속되었다간/ 원주민들이 잃어버린 감수성을 회복할 것 같다’

“과거 제국이 영토를 확장하는 제국이었다면 오늘날 제국은 경제논리를 바탕으로 디지털 신기술과 대중문화가 결합된 제국입니다. 이 제국에서는 공감능력과 몸의 감수성을 잃고 전원과 연결된 ‘시각’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그는 속도, 정보, 지식, 접속, 전원과 같은 이 시대의 키워드와 멀리 떨어진 삶을 추구하는 것 같다. 석유를 바탕으로 한 산업문명이 언제까지나 인류를 풍요롭게 해줄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사는 상황을 그는 ‘타이타닉호’에 비유했는데, 그러면 이 위기에서 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시는 막강한 자본주의에서 그나마 연관이 가장 희박한 마지막 보루 아닌가요? 오늘날은 종교와 학문, 예술도 자본주의와 무관하지 못하지만 시가 돈이 된다면 기업들이 시까지 제품으로 만들었겠죠. 이 문명과 그래도 거리를 두는 것은 시와 소규모의 유기농을 지켜가는 농부일 것입니다.”

그는 시가 ‘반인간적 문명과 맞설 수 있는 전망 좋은 관측소’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그 관측소에서 깨어나라고 외치는 나팔수 같다. 대중에게 ‘빛나는 감수성’의 서정 시인으로 인식된 그가 ‘꼰대’로 불리기를 마다하지 않고 계몽에 열을 올리는 것도 나팔수의 역할을 다하고자 함일 것이다. 스스로 ‘메시아 콤플렉스’라고 말할 정도로 이 문명에서 벗어날 대안을 찾는 그는 ‘나를 위한 글쓰기’를 구상해냈다. 현재 경희대의 교양학부인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글짓기와 시 쓰기를 가르치는 그는 ‘무엇을 어디까지 가르칠 수 있을까’ 회의하지만, 그가 구상한 ‘나를 위한 글쓰기’ 프로젝트가 사람을 깨어나게 하는 구실을 한다고 굳게 믿는 눈치다. 그는 이 프로젝트가 학생은 물론이고 시민들에게도 확장되는 데 적극적이다.

사막과 사막 사이에 관계가 있다


▎이문재 시인은 “도시에서의 디아스포라의 삶을 극복하고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제대로 복원하는 것이 시인의 소명이다”고 말했다.
그는 시집을 자주 내는 편은 아니다. <제국호텔> 이후 10년 만에 펴낸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에서 가장 맨 앞에 나오는 시는 ‘사막’이다. ‘사막에/ 모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모래와 모래 사이다’로 시작하는 이 시는 관계와 사이, 연결을 이야기한다.

“혼밥과 혼술, 그리고 혼자 죽어가는 이 시대의 모습은 인류의 마지막 장면일 것입니다. 인류가 탄생한 이래 혼자 밥 먹고 혼자 마시는 일은 없었습니다. 혼술과 혼밥은 모래입니다. 그 모래를 연결하는 ‘사이’를 회복해야지요.”

‘치킨’과 살아 있는 닭, 쿠키와 밀밭을 연결하지 못하는 이 시대에 ‘연결’의 상징으로 그가 떠올린 것은 ‘손’이다. 농부의 논과 밥을 연결하고, 밥과 내 몸을 연결하고, 나와 다른 이를 연결하는 것이 모두 손이라는 것이다. 또 손은 외부세계를 가장 먼저 느끼는 도구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죽음과 삶도 연결해야 삶도 죽음도 온전해진다고 믿는다.

생일 아침/ 미역국 받아놓고 생각느니/ 1959년 이래 쉰세 해/ 쉰세 번째 가을// 그러고 보니 오늘 나와 함께 태어난/ 내 죽음도 쉰세 살/ 내 죽음도 쉰세 번째 가을/ 어서 드시게’(‘생일’의 일부)

마을과 논밭, 땅과 흙을 잃은 사람은 이미 난민이다. 혼술과 혼밥, 혼자 죽는 삶은 극단의 디아스포라의 삶이다. 한때 시골로 돌아갈 것을 꿈꾸었던 그는 막대한 유산이 있거나 엄청난 연금이 없는 한 그 꿈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도시에서 자연을 회복하고 관계를 회복하며 삶과 죽음을 연결하는 대안을 찾아왔다. 어쩌면 대안은 이미 찾은 것도 같다. 사실 마지막 시집에서 던진 그의 물음은 첫 시집에도 이미 다 나와 있다. 맨 끝이 맨 앞이고, 맨 앞이 맨 끝이다. 마치 확대되는 원을 그리듯 그는 걸어간다. 이제 그는 난민의 삶을 내려놓았는지 궁금하다.

한경심 - 이화여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동아일보> 출판국에서 기자로 15년간 일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월간중앙> <이코노미스트> <신동아> <여성동아> 등에 문화와 관련한 글을 썼다. 저서로 전통공예 장인들을 소개한 <우리는 어떻게 옷을 짓고 밥을 짓고 집을 짓는가>, 한식의 철학을 담은 <우리는 왜 쌈 싸먹고 비벼먹고 말아 먹는가> 등이 있고 번역서로 <글렌 굴드, 피아니즘의 황홀경> 등이 있다.

201708호 (2017.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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