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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섬 문명사(8)] 중세가 살아 있는 바이킹의 섬 고틀란드(Gotland) 

발트해 한복판에서 유럽과 슬라브 잇던 문명의 결절지…폐허조차 끌어안으며 짙은 문화적 질감 뽐내는 곳 

글·사진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 아시아퍼시픽 해양문화연구원장 asiabada@daum.net
우리는 사라지는 것을 추모하는 데 서툴다. 낡은 건물의 빛바랜 시멘트는 도시의 부끄러운 속살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빛바랜 석조교회와 석회돌담, 옛 바이킹의 거석이 모여 독특한 빛깔을 가지게 된 섬이 이곳, 고틀란드다. 과거와 현재, 상처와 영광이 공존하는 풍경은 섬 문명이 빚어낸 독특한 빛깔이라 할 만하다.

▎붉은 살림집 지붕과 앙상한 흔적이 남은 중세 교회, 그리고 회색빛 석회돌벽이 어우러져 비스뷔 시내 전경은 소담한 느낌을 준다.
여름 휴가철, 바이킹의 섬 고틀란드의 크루르 부두는 스톡홀름에서 떠나온 인파로 북적인다. 스웨덴이나 여타 유럽인에게 최고의 여름 휴양지로 알려진 고틀란드지만 우리에게는 제대로 알려진 것이 드물다. 유럽 본토보다 비싼 물가, 직항이 없어 경유를 하거나 페리를 타고 들어가야 하기에 쉽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북유럽 지도는 반드시 고틀란드를 발트해 복판에 큼직하게 그려 넣는다. ‘발트해의 보석’이라는 세간의 칭송이 과하지 않다.

떠남과 도착, 그리고 노마드적 사고의 출발과 종착을 생각하게 하는 여행의 백미는 비행기보다는 뱃길일 것이다. 뱃길에는 인류가 잃어버린 선사 이래의 노마드 유전인자가 잘 각인돼 있으니, 배를 타고 꾸역꾸역 고틀란드로 들어오는가 보다. 배를 싫어하는 한국인과 달리 이들에게는 대항해를 거듭하던 바이킹의 피가 지금도 흐르는 것으로 간주해도 될까. 실제로 바이킹은 오늘의 스웨덴, 노르웨이, 독일, 덴마크, 영국, 아이슬란드, 나아가서 동유럽과 지중해, 슬라브 권역까지 거침없이 바다와 강을 타고 이동했다. 고틀란드는 그 이동 통로의 중간 거점이니, ‘문명의 교차로’란 표현을 써도 될 것이다.

본 섬 이외에 카를쇠, 훼로 같은 작은 섬도 딸려 있다. 총면적 3183㎢. 제주도 총면적이 1849㎢이므로 제주보다 1.7배 정도의 크기다. 해발 100m를 넘지 않는 평평한 대지다. 광활한 벌판에 숲과 농경지가 형성돼 가용 토지가 거의 100%에 가깝다. 그래서 막상 차로 달려보면 제주도 서너 배는 되는 느낌이다.

행정중심인 비스뷔에서 훼로를 가기 위해 한 시간여를 달렸다. 페리에 차를 실었다. 요금을 받지 않는다.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답게 이런 오지의 뱃길은 무료다. 차를 끌고 온 사람은 소수고, 대부분 비스뷔에서 고틀란드로 직항하는 아침 배를 타고 훼로로 들어간다.


훼로는 황량한 섬이다. 발트해의 겨울은 혹독하다. 날카로운 대륙풍과 휘몰아치는 파도 속에서 북구신화가 탄생했다. 훼로 북쪽 해안의 향나무는 남쪽으로 바닥을 기는 방향목이다. 흡사 제주의 방향목을 연상시킨다. 한때 적도였다는 증거를 강력하게 들이미는 산호초의 파편이 모래둔덕을 형성하고 파도에 닳은 석회암이 거친 자갈 해변을 만들어냈다. 희고 긴 해안에 북구 특유의 차가운 수온과 빛깔의 발트해가 싸늘하면서도 정갈한 풍경을 연출하는 중이다.

그런데 섬 동쪽의 우거진 숲에 들어서면 고사리가 번성한다. 섬 동부와 서부의 식생이 다른데, 동부가 대륙풍 영향을 강력하게 받는다면 서부는 해양성 난류 영향권 덕분에 상대적으로 온화하다. 북반부이지만 겨울에 영하를 오르내릴 정도의 기후대다. 사람 살기에 적당한 섬. 환경조건이 유리한 만큼 섬의 주도권을 빼앗기 위한 각축전이 역사적인 계기가 있을 때마다 치열하게 벌어졌다.

죽어서도 배를 몰고 떠났던 바이킹


▎중세가 살아 있는 바이킹의 섬 고틀란드(Gotland) 고틀란드 동부는 유라시아 대륙에서 불어오는 대륙풍을 정면으로 받는다. 날카로운 대륙풍에 풍화된 석주와 짙푸른 발트해가 창백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이 섬에 언제 누가 태초에 들어와 살게 됐는지를 알려주는 정확한 자료는 당연히 없다. 그러나 고고학적 물증은 적어도 청동기시대부터 인간의 궤적이 엿보인다. 고틀란드의 남쪽을 찾아갔다. 기원전 7000년께 최초의 고틀란드 사람으로 알려진 젤바르가 섬에 당도한 곳. 기원전 5500~2500년에는 젤바르의 후손이 고틀란드 해안가와 남동쪽 해안에 위치한 스트라 칼쇠에서 인구를 불려나갔다. 서기 200년께에는 최초로 그림을 각인한 금석 비석이 만들어진다.

서기 600~1000년께 고틀란드에서 출발하거나 밖에서 섬으로 들어오는 무역루트가 만들어진다. 이 시대의 이야기는 모두 중세 무역의 시대가 열리기 훨씬 전의 일. 바이킹의 시대였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50여 개소의 항구와 무역거점이 섬 전역에서 확인된다. 배를 들이대기 안전한 곳곳마다 바이킹의 거주 흔적과 무역 및 침략, 항해 흔적이 남아 있다. 그래서 고틀란드의 박물관은 중세유물을 제외하고는 가히 ‘바이킹 박물관’이다. 거친 쇠사슬과 은제 목걸이, 팔찌, 청동제 방패와 철기 창날, 가죽옷과 장화는 오늘의 노르딕 사람의 패션과 장신구에 그대로 전해온다.


▎1361년 덴마크 군대가 비스뷔 항구로 들이닥쳐 저항하는 농민 1800여 명을 학살했다.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비스뷔 성에 세워진 돌십자가.
섬의 문명사적 궤적을 찾기 위해 유럽 최대의 시멘트 공장과 석회암 채석장으로 유명한 슬리테로 갔다. 슬리테는 오늘날 남동부의 아담한 산업도시. 1999년 슬리테 북서쪽 스필링 농장에서 세계에서 가장 큰 바이킹 보물이 발굴됐다. 100㎏이 넘는 은, 외국에서 들여온 1만4000개의 동전, 유리구슬, 공구, 도자기, 철제 밴드 같은 일상품도 다량 발굴됐다. 고틀란드에서 기후 조건이 가장 온화한 남쪽에 최대의 집단주거지가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섬세한 기술의 은팔찌, 목걸이를 걸치고 살벌할 정도로 강력한 창을 든 무리가 선사시대의 험난한 생존환경을 극복하면서 이 섬을 지배했을 것이다.

슬리테에서 147번 도로로 남쪽으로 30여㎞를 달려 중세 교회가 서 있는 고뎀에 당도한다. 다시 오른쪽으로 6㎞를 더 가면 숲속에 거대한 돌무더기가 누워 있다. 청동기시대 것으로 비정되는 젤바르 배 무덤이다. 울창한 소나무 숲의 돌 배 두 척. 큰 바위를 줄 세워 이물과 고물을 상징한다. 실제 배 모양이다.

13세기의 문헌 <구타사간>에 의하면 고틀란드는 워낙 마술적인 섬이라 배가 낮에는 침몰하고 밤에 떠올랐다고 한다. 이 섬에 최초로 당도한 젤바르가 불을 가져온 뒤로 배가 가라앉는 마술이 사라졌다. 이는 섬의 최초 입도주와 불을 가진 세력의 등장을 뜻할 것이다. 젤바르는 ‘고틀란드의 프로메테우스’인 셈이다.

섬의 발굴 결과, 가장 오래된 인골은 대략 8000년 전 것이다. 그런데 이 배의 주인공은 그렇게 멀리 소급될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청동기 후기(기원전 1100~500년)의 장례예법이 돌배 형식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젤바르를 청동기시대 유구로 보는 것이 이 같은 장례예법의 변화다. 돌배는 무려 18m 길이에 폭 5m다. 실제 배 모양을 실사해 돌로 묘사했다. 자신의 타고 다니던 배를 돌로 만들어 영원히 기념했다.

바위에 새긴 묘비명에도 배가 등장한다. 한국인이 서천서 역으로 가는 반야용선을 망자 천도의례에서 호출하듯이, 바이킹도 망자를 위해 배를 호출했다. 그들은 바이킹이 살아가던 숲속에 바위를 설치해 배 모양을 연출하고 죽음의 의미를 장엄하게 표현했다. 돌배 무덤은 선사인의 첨단적 야외 전시물이었던 셈이다. 젤바르의 전설과 유적은 이 섬의 초창기를 장식하던 이름 모를 바이킹의 바다로 나아가던 거친 삶과 응전, 현실극복과 죽은 뒤의 세계까지 잘 웅변해준다.

물산교통의 천국이자 지정학의 지옥


▎바이킹이 고틀란드에 첫발을 내디딘 시기는 청동기시대로 추정된다. 원주민들이 모여 살던 섬 남동부 지역에서 발견된 그림돌.
이제 바이킹의 시대를 넘어서 ‘중세의 시간’으로 넘어갈 시간이다. 육지에서 오는 크루즈선이 당도하는 부두에서 성벽으로 들어설 때 돌로 잘 다듬은 십자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배경엔 붉은 페인트를 칠했다. 붉은 바탕과 회색 돌의 질감이 묘한 느낌을 준다.

이 짧은 거리는 일명 ‘피의 거리’다. 1361년 덴마크의 군대가 비스뷔 항구로 몰려 들어와 저항군 1800여 명을 학살했다. 길거리는 피로 흘러 넘쳤고 시신은 산처럼 쌓였다. 우리로 치면 고려 말쯤 되는데, 이 피의 역사를 고틀란드 사람들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성의 위쪽 능선에 위치한 코르스베닝겐 잔디밭에도 원형 돌십자 하나가 서 있다. 농민군이 학살된 지 29년 만인 1380년에 세워진 묘비다.

스톡홀름의 국립역사박물관 전시실 하나도 고틀란드의 참혹한 고통의 역사로 채워져 있다. 유골이 다량 발굴됐다. 어떤 유골에는 날카로운 쇠창이 여러 개 박혀 있다. 대량학살의 결과다. 고틀란드의 역사에서 이런 비극은 심심치 않게 벌어졌을 것이다. 지정학적으로 교통로에 위치해 누구나 탐낼 수밖에 없는 섬의 운명일 수도 있다. 고틀란드에서 대를 이어 살며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던 원주민의 처지에서 본다면, 외부인의 시선과 달리 평화롭게 안정적이지만은 않았을 법하다.

1361년 덴마크 군대가 침입해 대량학살이 벌어질 때, 독일인이 중심이 됐던 상인 집단은 저항하지 않았다. 세금을 바치는 대신 덴마크에게서 무역할 권리를 얻는 데 급급했다. 이는 섬의 비극이었다. 고틀란드의 역사에서 들어온 지배층과 원주민 농어민 간의 균열이 감지되는 순간이다. 전쟁과 죽음의 역사는 이 섬의 역사가 바로 외부세력과 원주민의 이중적 공존과 갈등을 기반으로 전개됐음을 뜻한다.


▎배 모양으로 조성된 젤바르의 무덤은 발트해를 누볐던 바이킹의 삶을 은유한다. 고틀란드 북부 고뎀 인근에 위치한 젤바르의 돌 무덤 모습.
역사를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서 한자동맹의 결성시대로 소급해볼 필요가 있다. 고틀란드의 발전과 쇠락, 전쟁과 번영 등이 모두 한자동맹과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중세와 근세가 시작되던 초기까지 한자동맹의 도시는 그 어떤 다른 국제적 현상보다도 사회와 경제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자를 통해 시민과 상인은 동쪽의 노보고로드로부터 서쪽 런던까지, 북부 독일과 남부 네덜란드와 벨기에까지 연결됐다.

중세 번성기 기술 발전의 상징인 코지(koggy) 배는 한자 동맹의 상징이었다. 이들 배는 발트해로부터 그 어떤 인간도 상상하지 못한 곳까지 항구와 항구의 물류 이동을 촉진시켰다. 물류 이동은 고틀란드의 부를 축적시켰고, 차곡차곡 돌이 쌓이듯이 이 섬의 문명사를 만들어나갔다.

발트해 문명은 엘베, 에데르 강을 타고 로마 문명과 간헐적으로 접촉했다. 발트해 권역에서 발견되는 고고학적 물질자료는 로마와의 다양한 접촉을 방증한다. 그러나 여전히 유럽 문명에서 발트해 권역은 ‘표피적’이었고 ‘주변부적’이었다. 시대가 흘러가면서 로마와의 교섭은 로마령 영국과 유럽대륙 서부 해안을 따라서 루트가 확장됐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의 전개과정을 지중해 로마제국 중심의 관점이 아닌 통시적 시각으로 열어놓고 본다면, 발트해는 주변부가 아닌 유럽 문명과 슬라브 문명이 교차하는 문명의 번화한 교차로였다.

5~6세기 이주의 시대에 게르만의 해상활동은 전 유럽을 석권했다. 여전히 유럽 북부에 남은 본류는 발트해와 노르웨이, 영국을 잇는 루트를 중심으로 주 근거지를 삼았다. 자연스럽게 바다를 통한 발트해 해상교류가 활발하게 시작됐다. 고틀란드는 예나 지금이나 동서, 남북교류의 중심, 혹은 교두보 같은 징검다리 섬이었다. 동쪽으로 오늘날 모스크바 근처인 노보고로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틀란드는 일찍이 러시아 자연자원의 무한 가치를 알아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바이킹 시절부터 발트해를 관통해 러시아의 강을 따라 깊숙이 들어갔다. 노보고로드에 그들 자신의 무역 전진기지를 마련했다. 발트해 연안을 따라가면서 유라시아에 축적돼 있던 모피와 왁스, 타르와 목재에 놀랐다. 그들은 영국 왕에게 직접 모피와 왁스를 팔았다. 이러한 무역은 12~13세기의 고틀란드를 극도로 번성시켰다. ‘돈이 되는 장사’에 몰두한 것이다.

유럽과 슬라브가 거쳐 간 문명의 교차로


▎비스뷔 항구에 내려 성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중세가 펼쳐진다. 중세 때 포장된 석회벽돌 도로가 비를 맞고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다.
노보고로드는 일찍이 850년 무렵에 슬라브인에 의해 통치 중심지로 조성됐다. 묄라르 호수 지역과 고틀란드에서 온 사람들이 바이킹 시대에 슬라브와 접촉을 시작했다. 고틀란드인은 자신들만의 오로프(olof) 교회와 구텐호프 무역센터를 세운다. 12세기 한자동맹이 시작되기 훨씬 전에 고틀란드인은 노보고로드 무역의 전문가가 돼 있었다. 섬의 지정학적 위치가 이상적인 무역기지로 만들었다. 고틀란드는 슬라브 권역에서 사들인 물건을 서방에 팔고, 서방에서 다시 슬라브 권역으로 물건을 팔아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마침 섬의 무진장 쌓인 석회암을 이용해 곳곳에 고딕 양식 교회를 세웠다.

노보고로드의 전략적 위치는 네바강을 통해 발트해에 직결되는 점, 그리고 유라시아 동쪽 무역루트의 종착지라는 점, 한자동맹으로 하여금 러시아의 자원인 모피, 왁스, 가죽, 꿀, 타르, 목재 등을 활용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지정학적 의미를 지닌다. 1259년에 이미 고틀란드에 들어와 있던 독일 상인이 노브고로드의 콘토르(Kontors, 일종의 은행)로 특별한 순례를 시작했다. 그들은 세인트 페테르 성당과 창고, 사무실, 거주지 등 다양한 건물을 축조했다. 한자동맹이 점거하던 시절, 콘토르는 고틀란드 비스뷔 법률의 통제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비스뷔가 덴마크 발데마르 왕에 의해 점거된 이후 북유럽 한자도시의 맹주인 뤼베크가 노보고로드 콘토르를 통치했다.

1430년대에 구텐호프는 고틀란드인에게서 독일인에게 넘겨졌다. 1478년에는 이반 3세가 도시를 점령하고 교회와 수도원, 공공건물을 압수했다. 1494년에 이반 3세는 한자 상인을 투옥했다. 독일 상인은 콘토르로부터 추방당했다. 그러나 여전히 고틀란드 상인은 오랜 전통의 러시아와의 무역을 지속시켰다.

고틀란드 중심인 비스뷔를 걷다 보면 ‘어떻게 이런 천년 도시가 고스란히 살아 있을까’하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붉은 살림집 지붕, 검은 교회 지붕, 회색빛 석회암의 묘한 여운을 주는 건물들. 그러나 비스뷔의 건축군은 한 면만 보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 큰 건물도 4층을 넘지 않는다. 작은 건물은 우리식으로 따지면 20평 될까 말까 한 집이다. 건물마다 개성이 강하되 전체적으로는 묘한 통일을 이룬다. 그 통일은 중세만이 연출해낼 수 있는, 현대인의 감각과 정신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어떤 아우라에서 빚어지는 중세적 소박미와 안정감일 것이다.

건물은 예쁘게 다듬어져 있다. 집마다 작은 정원을 키우거나 집 앞에 장미를 심었다. 그래서 혹자는 고틀란드를 ‘장미의 섬’이라 부른다. 꽃이 지천인 동네. 아마도 중세시대에도 이렇게 살았을 것이다. 골목을 누비면서 수많은 집을 관찰했지만 꽃이 없는 집이 없었으며, 하다 못해 창틀 아래나 층계도 화분을 두었다.

섬이 잘나갈 때 엄청 벌어들인 돈으로 석회암 채석장을 거대하게 만들었다. 자잘하게 돌벽돌을 만들어 도로를 깔았다.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도시 전체에 돌벽돌 포장이 이루어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과 마차와 차가 다니면서 석회암은 반질반질 윤기를 얻었다. 1000년을 뛰어넘은 그 도로가 아직도 중세시대 그대로다. 비라도 내리면 닳고 닳은 석회암은 보석처럼 빛난다. 안개가 낮게 깔리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거리에서 1000년의 도로는 도시의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내며 거미줄처럼 성 안으로 골목마다 이어지고 있다.

한자동맹 무역도시의 중심인 비스뷔는 고틀란드 서쪽 해안에 이렇게 1000년 넘게 아름답게 서 있다. 중세 초기의 문헌에는 비스뷔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고틀란드와 고틀란드 해안’만 언급되는 정도였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고틀란드의 비스뷔와 여러 곳에 무려 50여 개의 항구와 무역거점이 있었다. 비스뷔는 바이킹 시대에도 존속했다. 북부 독일인들이 12세기에 전진기지를 비스뷔에 마련한 이후, 독점 무역거점으로 거듭났고 항구도 커졌다. 비스뷔는 마침내 발트해 한자동맹의 거점이 됐다. 대신 비스뷔를 제외한 항구들은 힘을 잃었다.

광장의 왁자함이 공존하는 폐허의 미학


▎스웨덴의 유명한 과학자 폴햄의 동상이 무너진 드로텐 교회 앞에 서 있다. 폐허 앞에 짙은 보랏빛 바이올렛이 만발했다.
대부분 북부독일 뤼베크에서 온 독일 상인은 1150년대에 왔다. 뤼베크 상인들은 고틀란드로부터 노보고로드로 이어지는 러시아의 번영하던 무역루트를 따라 왔다. 그리고 비스뷔에 자신들의 세인트 마리아 교회를 세웠다. 신성한 공간이자, 다양한 세속적 목적을 겸하던 공간이었다. 한자동맹의 우두머리인 비스뷔, 뤼베크, 도르트문트, 소에스트의 대표들이 돈과 서류기록, 그 밖의 귀중품을 교회의 거대한 저장소에 보관했다. 번영을 구가하던 13세기 동안 비스뷔의 작은 목재 집은 석회암으로 튼튼하게 다시 지어졌으며, 17개의 교회가 세워졌다. 마침내 비스뷔는 북부유럽의 가장 현대적인 타운으로 거듭났다.

12세기에 고틀란드 전체적으로 거의 100여 개의 석조교회가 축조됐으며, 그 이후로도 물경 250여 년간 건축이 이루어진다. 교회는 세월이 흐르면서 전쟁과 화재로 다수가 파괴됐다. 비스뷔에만 17개의 교회가 만들어졌으나 13개의 무너진 교회가 있으며, 성 밖에는 92개의 교회와 3개의 무너진 교회가 남아 있다. 무너진 성전은 우리로 치면 폐사지다. 폐사지만이 던져주는 폐허의 미학이 도시를 감싼다. 단단한 석회암 덕분에 지붕과 문은 사라졌어도 골벽은 그대로 남아 있다.

무너진 교회에서 음악회를 열기도 하고 전통축제를 벌이기도 한다. 1227년 축성된 세인트 니콜라이 성당은 지붕도 없는 상태에서 약간의 보수를 거쳐 일부를 음악회나 미팅홀로 쓰기에 ‘문화성당(Cultudral)’으로 불린다. 1250년대에 만들어진 카타리나 성당은 상업시설이 밀집한 광장에 폐허로 남아 있다. 말쑥하게 정비돼 손님을 받아들이는 카페로 성업 중인 광장의 번잡스러움 바로 곁에 천년의 묵직한 무게가 폐허처럼 다가온다.

역사의 증거물에 함부로 손대지 말 일이다. 고틀란드 사람들은 무너진 성소를 그대로 둔다. 복원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파괴를 멈춘다. 폐사지의 고즈넉한 미학이 있다면, 도시의 무너진 성소(聖所)가 부여하는 또 다른 미학이 있기 때문이다. 그냥 할일없이 한 달쯤 살아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도시…. 움베르토 에코가 그려낸 중세의 시간이 질감을 가지게 되는 공간이다.

1150년에 한자동맹이 만들어지며, 비스뷔는 오늘날의 노르웨이 베르겐, 에스토니아 탈린과 더불어 북유럽의 무역거점이 된다. 1288년에 비스뷔의 한자동맹 무역상인과 농민 사이에 내전이 벌어진다. 비스뷔의 부르주아 상인은 무역을 독점했을뿐더러 농민과 주변 섬에서 이 도시로 들어오는 데 대해 입장세를 부과했다. 독일에서 넘어온 상인과 농민 사이의 내전은 불 보듯 뻔한 일. 다부진 성벽이 만들어진 것은 이때다. 토착 농민과 이입 상인의 갈등은 오랜 역사를 지닌다.

역사의 질곡을 굽이굽이 뛰어넘어


▎여름 휴가철이면 많은 스웨덴 사람이 ‘알메달렌 정치 주간’을 즐기기 위해 고틀란드를 방문한다. 노르딕 저항운동 깃발을 든 사람들이 축제장 뒤편에 줄을 서 있다.
14세기에 비스뷔는 한자동맹 도시의 맹주 지위를 잃는다. 많은 재앙이 비스뷔와 고틀란드를 습격한다. 1350년 페스트가 창궐했다. 1361년에 섬은 덴마크 군대에 점령된다. 앞에서 언급한, 대규모 양민 학살이 이루어진 계기다. 상인집단은 농민이 1800명씩이나 무자비하게 학살당하는 것을 못 본 체했다. 새롭게 들어선 왕은 권좌를 치장할 요량으로 상인에게 금은보화를 요구했다. 섬의 몰락을 짐작케 하는 장면들이다.

1396년 섬은 해적 에릭에게 점령됐으며, 1398년에는 튜톤 기사단 손아귀로 들어간다. 15세기부터 16세기 중반까지 덴마크 지배자는 과도한 세금을 매기는가 하면, 섬을 근거지로 해적질까지 자행했다. 무려 1000%가 넘는 세금을 부과하자 섬의 독립과 번영은 끝났다. 13세기의 번영은 과거의 영광이 됐다.

1525년 뤼베크의 상인은 발트해의 해적을 근절하고자 비스뷔를 공격했다. 마침내 뤼베크와 덴마크, 스웨덴 왕 사이에서 협상이 이루어져 비스뷔와 고틀란드를 덴마크에 복속시킨다. 1645년 고틀란드는 300여 년의 덴마크 통치를 끝내고 스웨덴으로 돌아온다. 한때 스웨덴이 허약해질 때는 러시아가 고틀란드 동해안을 공격하며, 1850년 크리미아 전쟁 때는 영국과 프랑스의 함대가 훼로 섬에 정박지를 마련하기도 했다.

고틀란드의 굽이진 역사는 과연 섬의 독자적 온전한 역사가 가능할까 하는 의문을 남긴다. 고틀란드는 이웃 덴마크와 독일, 스웨덴이라는 북유럽의 해양강국, 나아가 동쪽의 러시아라는 해양강국의 각축이 어떤 식으로든 일상적으로 미친 섬이다. 덴마크의 직접적 통치, 독일 상인의 도시와 무역경영이 원주민의 삶에 긍정과 부정의 영향을 남긴다.

올해 100주년이 되는 볼셰비키 혁명 이후 발트해 패권은 러시아와 나토의 대결이 됐다. 고틀란드는 과거의 무역항으로서의 역할에서 군사적 거점으로 재조망되기에 이른다. 앞으로 고틀란드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 분명한 것은 그들은 오랜 전통을 무기로 자신들의 삶과 문화를 지속적으로 이어갈 것이 확실하다는 점이다. 지난 1000년의 증거가 이를 보증한다.

고틀란드 사람들이 전통과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은 매우 다채롭다. 자연이 획일적일 정도로 단순하게 반복적으로 펼쳐지는 데 반해, 이들은 자못 아기자기한 방식으로 전통과 역사를 이어간다. 이들의 전통과 역사가 쌓이고 쌓여 섬의 문명사를 형성하는 것이리라.

길을 안내하던 기사의 고향집에 들렀다.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집의 노모와 자신이 놀던 동네 풍경을 객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의 동네 안내판을 찍어 한국인에게 자신의 동네를 알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 약속을 지킨다. 동네 이름은 고틀란드 남서쪽의 ‘Eskelhem’. 중세시대쯤에도 쓰였을 우물 곁에 19세기 후반 등장한 펌프가 나란히 놓여 있다. 우물과 펌프 아래로는 수도관이 지나갈 것이다. 우물과 펌프와 수도의 병렬적 존재 이유는 이들의 섬 전통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비스뷔 성문 밖에는 1861년까지 쓰던 처형장이 있다. 세 개의 돌기둥이 서 있다. 돌기둥에 사람을 목매달아 범죄인의 극악성을 시민들에게 교훈으로 전달했다. 비스뷔 사람들은 이 섬뜩한 처형장에서 한여름 밤에 작은 축제도 연다. 역사를 기억하는 나름의 또 다른 방식이다.

이들이 전통을 기억하는 방식은 호수에도 부여된다. 도심 가운데 성문 밖의 알메달렌은 본디 석호였다. 자그마한 석호에는 바이킹 시대에 배를 대던 곳이다. 비스뷔가 ‘비스뷔’란 이름을 얻기 훨씬 이전에 바이킹은 이 안전한 석호에 배를 됐을 것이다. 1870년대에 느릅나무(elm)를 심으면서 알메달렌이란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석호 주변의 모래둔덕에 건축물이 들어서고 해변 도로가 생겨났다.

우물과 펌프와 수도가 나란히 존재하는 곳


▎제주 곳곳에 검정색 돌담이 흑룡만리로 흘러간다면 고틀란드에는 백회색의 돌담이 백룡만리로 흘러간다. 돌담을 뒤로한 채 방목된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알메달렌은 지금은 여름철 다양한 정치적 집회가 열리는 곳으로 유명해졌다. 휴가철을 이용해 많은 스웨덴 사람이 고틀란드로 들이닥치는 중요 이유 중 하나가 알메달렌의 호숫가에서 펼쳐지는 정치적 집회, 아니 정치적 축제다. ‘알메달렌 정치박람회’ ‘알메달렌 정치주간’이라고도 부른다. 1968년 올로프 팔메가 픽업트럭에 올라가 즉흥 연설을 한 것이 그 시초였다고 전해온다. 내가 찾아갔을 때도 노르딕 저항운동 깃발을 든 일군의 무리가 정치집회를 축제처럼 하고 있었다. 섬의 새로운 전통 만들기로 다가온다.

고틀란드라는 섬의 문명사를 서술하기 위해 바이킹 시대로부터 한자 시대, 그리고 덴마크 등 외세의 시대, 오늘날의 알메달렌 정치축제에 이르기까지 연대기를 늘어놨다. 이 섬을 개인이 각각 보고 느낀 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그 문명사적 궤적이 심대하고 드넓고 융복합적이기 때문이다.

스웨덴 국립역사박물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바이킹 유물 중에 고틀란드에서 온 것이 많다. 고틀란드 박물관 전시실 첫 방은 각 지역에 산재한 바이킹 돌로 채워져 있다. 금석문, 암각화 등을 모두 합친 개념인데, 그들의 역사·사상·철학·문화를 모두 총화한 기념비적 거석문명이다. 스톡홀름이나 비스뷔 공항에도 그 모조품이 으레 하나쯤 서 있다.

남부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린 니스뵈르드 어촌은 30여 채의 작은 건물이 밀집한 한적한 풍경이다. 집 앞에는 그물을 말리는 건조대가 겨울철 나목처럼 즐비하게 서 있고 나무 방파제가 석호에 의지해 바다로 연결된다. 그런데 이런 한적한 어촌도 사실은 바이킹 시대의 유물이 쏟아져 나온 오랜 항구다. 스웨덴 고고학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지금까지 나온 바이킹 유물은 불과 5%도 안 될 것이라고 한다.

하나의 섬을 다른 하나의 섬과 즉자적으로 비교한다는 것은 사실상 무리다. 그런데도 한국의 제주도는 고틀란드와 몇 가지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제주 곳곳에 검정 돌담이 흑룡만리로 흘러간다면 이곳은 회색이거나 흰색의 석회암 돌담이 백룡만리로 흘러간다. 제주도의 조랑말에 버금가는, 귀여운 포니가 고틀란드에 살고 있다. 스웨덴의 전통 장식품에 포니가 있음을 기억할 일이다.

우리는 이 머나먼 섬에서 우리의 자화상을 살펴볼 수도 있는 것이니, 섬의 문명사는 그 자체 글로벌적 시각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런 섬은 의외로 드문 법인데, 고틀란드가 딱 그런 섬이다.


주강현 - 제주대 석좌교수, 아시아퍼시픽 해양문화연구원장. 해양사·문화사·생활사·생태학·민속학·고고학 등 전방위로 연구해온 우리 시대의 대표적 ‘지식 노마드’이자 비교해양문명사 연구에 몰두하는 해양문명사가. 아시아 바다는 물론 대양의 섬으로 시야를 넓혀가며 비교해양문명사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적도의 침묵> <독도강치 멸종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asiabada@daum.net

201708호 (2017.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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