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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 ‘창조의 본고장’ 바우하우스를 가다(17)] 도대체 ‘표현주의’는 무엇을 ‘표현’하려 했던 걸까? 

전쟁이 몰고 온 내면적 공포를 그리다 

사진 윤광준
제1차 세계대전은 삶의 무게에 지친 이들에게 탈출구처럼 보였다. 하지만 전쟁 후 황폐한 도시에 살아남은 이들은 겪어보지 못했던 내면적 ‘공포’를 경험했다. 표현주의 예술가들은 이런 현실을 외면한 예술을 더 이상 고집할 수만은 없었다.
#1. 우리는 언제부터 남의 등에 칼을 꽂았을까?

양 100마리는 부산까지 몰고 갈 수 있어도, 교수 3명을 데리고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학의 보직 맡은 이들은 교수사회의 어려움을 자주 양떼 100마리와 비교하며 하소연한다. 교수는 자기 연구실에 틀어박히면 그곳의 왕이 되기에 도무지 남의 이야기를 안 듣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교수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이상한 교수’와 ‘아주 이상한 교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교수가 자신의 학문적 자부심을 상실하면 더 이상 교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학문적 자부심은 학문 영역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사소한 행동과 일상의 말투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게 돼어 있다.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교수들은 만나면 반드시 부딪치게 되어 있다.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특성은 예술가들에게도 해당된다. 그래서 예술가들의 모임이 잘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교수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뒤지지 않는다. 예술가이면서 교수이면 정말 최악이다. 그래서 그로피우스가 대단한거다. 그 엄청난 예술가들, 나름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하는 인물들을 죄다 바우하우스의 선생으로 초빙하여 좌충우돌하며 끌고 나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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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호 (2017.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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