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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럴 아츠의 심연을 찾아서] 21세기의 히피 ‘힙스터’의 요람, 브루클린 

세계의 중심은 다시 아날로그로 수렴 중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개인의 삶에 주목하는 탈(脫)디지털 문화운동이 태동한다는 예감…페이스북에 시큰둥하고, 집·자동차·결혼에서 자유로운 밀레니얼 세대가 온다

▎밀레니얼 세대에 인종 간의 차별, 편견은 과거의 역사에 불과하다. 정치·사회·문화 모든 방면에서 인종 간 융합은 기본이다.
스포츠센터로 향하는 동안 즐겨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하나 있다. 흑인 전용채널로, 힙합을 중심으로 한 랩송이 주류다. 운동에 앞서 분위기도 띄우고, 흑인들의 일상에 관한 얘기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 덕분에 ‘꼰대’로 들어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유행하는 힙합의 계보 정도는 확실히 챙기고 있다.

두 달 전쯤으로 기억된다. 영어 힙합이 아닌 히스패닉의 스페인 노래가 들렸다. 가끔 흑인풍 백인 노래는 들었지만, 스페인어 힙합을 흑인 채널에서 들은 것은 처음이다. 자메이카 레게 리듬을 힙합으로 변용한 노래로, 도중에 터져 나오는 랩송도 스페인어로 부른다. 나중에 알았지만 21세기 초 푸에르토리코에서 탄생된, 이른바 ‘레게톤(Reggaeton)’이란 분야의 음악이다. 스페인어에 관한 한 일자무식이지만, 듣는 순간 곧바로 음정과 리듬을 기억할 정도로 인상적이다.

2017년 봄부터 여름 내내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강타하고 있는 히트곡, ‘데스파시토(Despacito)’란 노래다. 출시 97일 만인 4월 20일을 기점으로 유튜브 10억 명을 돌파한 글로벌 뮤직이기도 하다. 푸에르토리코 출신 가수 두 명이 번갈아 가면서 부르는 노래로, 성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관능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데스파시토는 영어로 ‘천천히(slowly)’를 의미한다. 듣는 사람들은 ‘천천히 그리고 느린 섹스’라는 의미로 해석한다고 한다.


▎중고 음판을 판매하는 베드퍼드 블록 파티의 노점상.
히스패닉 노래가 흑인 전용채널 라디오에 등장한다는 것은 베르디 오페라가 판소리 전용채널에 흘러나오는 것에 비견될 수 있다. 보통 흑인 음악은 영어로 된 흑인 전용 라디오, 히스패닉 음악은 스페인어 전용 라디오를 통해 전해진다. 언어가 다르다는 점과 더불어 관심사는 물론 역사도 서로 무관하다.

미국인이 공개하지 않는 터부 중 하나지만, 사실 흑인과 히스패닉 사이의 인종적 반감이나 차별은 유별나다. 흑인-히스패닉에 대한 백인의 인종적 편견보다 흑인-히스패닉 사이의 알력과 갈등이 한층 더 강하다. 서로를 잘 모른다는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 흑인 일자리를 히스패닉이 점유하면서 생긴 ‘밥그릇 싸움’의 결과라 볼 수도 있다.

지난해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 중 도널드 트럼프 후보는 히스패닉을 적으로 했을 뿐, 흑인에 대한 차별이나 편견은 없었다. 히스패닉을 적으로 할 경우 거꾸로 흑인의 표를 모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흑인은 있지만 히스패닉 각료 제로가 트럼프 행정부다. 그 같은 배경을 고려한다면, ‘데스파시토’가 흑인 라디오에 등장한 것이 얼마나 놀라운 상황인지 충분히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초(超)국경 음악의 최대 후원자들


▎자동차 공유 회원을 모집하는 캠페인 현장. 밀레니얼 세대는 자동차를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받아들인다.
“한국어로 부르는 강남 스타일이 대히트를 쳤다는 점에서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옆집 50대 백인에게 ‘데스파시토’의 흑인 채널 출현 소식을 전하자 던져진 반응이다. 폭스텔레비전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일하기 때문에 미국 대중문화에 정통하다.

“언젠가 할렘의 영어 힙합이 서울의 K팝 차트 1위에 올라설 날이 있을 것이다. 미국은 이미 그 같은 상황이 20세기 말 시작됐다. 스페인어가 주류지만 독일어·불어 히트곡도 있다. ‘마카레나(Macarena)’라는 노래를 기억할지 모르겠다. 반복되는 음악에 맞춰 집단으로 춤을 추던, 세계 현상으로까지 떠올랐던 스페인 노래다. 그렇지만 20세기 말과 21세기에서 다른 점이 하나 있다. 굳이 잘 만들어진 노래가 아니더라도 21세기부터는 현지어를 통한 유행가가 미국 인기 차트 곳곳에 등장한다. 짐작컨대 현재 빌보드 차트 100위 곡 중에는 외국어 노래가 20%는 될 것이다.


▎베드퍼드 거리에 마련된 야외 콘서트장. 20세기 유물인 메탈, 하드록을 오랜만에 들을 수 있었다.
전 세계 노래가 미국을 무대로 경쟁을 벌이는 셈이다. 밀레니얼 세대는 탈(脫)국가 초(超)국경 음악의 최대 후원자다. 글로벌 시대의 당연한 현상이겠지만, 패션·음식만이 아니라 음악도 국경선을 넘어 밀어닥치고 있다. 아랍어로 부르는 중동발 노래가 미국 음악 시장을 석권할 날도 머지않았다. 트럼프가 아무리 높은 벽을 쌓는다고 해도 ‘데스파시토’ 같은 노래는 더더욱 양산될 것이다.”

대화 도중 필자가 주목한 부분은 밀레니얼 세대에 관한 부분이다. 1980년부터 1995년 사이에 출생한 청년 세대로, 현재 2030세대로 Y세대라 불리기도 한다. 이들의 부모는 클린턴·힐러리 부부로 대표되는 베이비붐 세대다. 밀레니얼의 미국 내 총인구는 약 9200만 명이다. 3억 인구의 30% 정도에 해당된다. 양적인 규모로 본다면 1945년 이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보다도 많다. 참고로 밀레니얼을 잇는 차기 세대는 1996년부터 이후 2010년까지 태어난 Z세대다. 현재의 10대나 초등학생들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모바일을 당연시한 세대다.

데스파시토가 스페인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미 미국 인구 3억 명의 10%를 넘어선 히스패닉의 ‘양적 지지’가 배경이라 분석했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히스패닉 인구도 중요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밀레니얼의 개방적 자세에 있다는 것이다. 데스파시토가 히스패닉 채널을 넘어 흑인 라디오 방송에까지 등장한 이유도 바로 흑인 밀레니얼의 개방적 세계관에 따른 것이라는 설명이다. 사실 흑인 채널의 진행자는 밀레니얼 세대에 해당하는 30대 남성이다.

필자의 주관적 판단이지만, 21세기 뉴욕 브루클린은 19세 기말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에 비견될 수 있을 듯하다. 미술·패션·음악 심지어 요가나 음식에 이르기까지 세계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떠오른 곳이다. 파리나 로마, 나아가 맨해튼의 소호(Soho)를 21세기 문화의 아이콘으로 생각한다면 이미 세상 흐름에서 벗어나 있다는 증거다. 프랑스·이탈리아·영국·일본의 2030세대가 꿈꾸는 이상적 도시는, 유서 깊은 유럽이나 신비한 아시아의 도시가 아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전 세계 뉴스 메이커로 등장하는 뉴욕의 브루클린이다. 대도시 자본주의 진수를 즐기면서 문화·예술 분야의 글로벌 스타 자리를 노리는 청년들이 전 세계에서 몰려 들고 있다. 밀레니얼의, 밀레니얼에 의한, 밀레니얼을 위한 21세기 엘도라도 같은 곳이 바로 브루클린이다. 20세기 초 피카소 모딜리아니나 모네, 르느와르가 ‘돈과 명예’를 찾아 몽마르트르를 전전한 것과 똑같다.

베드퍼드 블록 파티와 ‘100m 마이크로 산책(Micro Walks)’


▎브루클린은 전 세계에서 몰려든 예술가의 경연장이기도 하다.
파리에 비해 뉴욕의 성공 결과는 단위가 다르다. 노년이나 사후(死後)에 보상받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한 번 뜨는 순간 글로벌 아이콘이 될 수 있다. 브루클린 인기의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이점에 있다. 뉴욕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맨해튼에 비해 비교적 싸게 생활할 수 있다. 자동차와 관광객으로 들끓는 맨해튼 풍경과 달리 조용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많다는 것도 장점이다. 출세의 무대는 맨해튼, 생활 터전은 브루클린이다. 브루클린이야말로 밀레니얼을 이해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인 셈이다. 데스파시토 인기의 배경이기도 한, 2030세대의 세계관을 관찰할 수 있는 라이브 현장이다. 물론 브루클린 밀레니얼은 미국의 청년 문화만이 아닌, 한국의 상황을 이해하고 전망하는 나침반이 될 수도 있다.

항상 그렇듯, 청년은 변화의 최첨단에 서 있다.

보통 미국에서 브루클린의 이미지는 ‘힙스터(Hipster)’의 집산지로 통한다. 아편을 의미하는 힙(Hip)에서 진화한 21세기 히피와 같은 존재로 1990년대부터 나타난 문화운동이다. 현재 밀레니얼 세대가 바로 힙스터의 중심이다. 이들은 재개발이 진행 중인 저렴한 주거지역에 몰려 살면서 자신들의 독특한 세계를 공유한다. 리버럴·환경·커피·자전거·인디음악(Indi Music)·문신·아날로그·동물·요리·채식주의·자가 맥주 같은 것들이 힙스터들의 주된 관심 사항이다. 수염을 기르고, 유명 브랜드와 무관한 옷차림에다 뿔테 안경을 즐긴다는 점도 힙스터의 특징 중 하나다.

일본의 오타쿠(オタク)처럼 세분화된 영역에 관심을 갖고 아주 세밀하게 공부한다. 크고 넓은 주제보다 작고 부분적인 분야에 특화한다. 미국에서는 브루클린과 더불어 서부의 샌프란시스코 미션 지구, 중부 시카고의 워커 파크가 힙스터의 중심지로 통용된다. 뉴욕이 갖는 프리미엄 때문이겠지만, 세 지역 가운데 브루클린이 가장 유명하다.

브루클린 베드퍼드(Bedford) 거리는 힙스터 문화의 하이라이트에 해당된다. 뉴욕 밀레니얼의 중심지인 셈이다. 16㎞에 걸친 일직선 거리로, 윌리엄스버그(Williamsburg), 크라운 하이츠(Crown Heights), 미드우드(Midwood) 거리로 연결되는 브루클린의 얼굴이다. 힙스터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가게·레스토랑·카페·문화시설 같은 것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다.

‘베드퍼드 블록 파티(Block Party)’는 매년 초여름 이뤄지는 브루클린 최대의 이벤트 중 하나다. 자동차를 막고, 베드포드 도로 위에서 벌어지는 거리 파티다. 10개 블록 정도를 보행자 천국용 공간으로 만든 뒤 갖가지 이벤트를 벌인다. 올해 일정은 6월 7일부터 5일간이다. 주말을 이용해 블록 파티 현장으로 나섰다. 제한된 좁은 공간이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1년 동안 벌이는 ‘100m 마이크로 산책(Micro Walks)’이라는 개념으로 대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마이크로 산책이란 공간의 구석구석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문자 그대로 현미경 탐험이다. 100m 공간에서 펼쳐지는 아주 작은 변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면서 1년 365일 카메라에 담는 식이다. 모래알로 쌓은 듯한 개미집, 하룻밤 만에 잎을 두 개 창조해 낸 클로버, 새 둥지 위에 드리워진 얇은 진흙더미, 바닥에 뒹구는 해바라기 씨앗, 하루 만에 무려 세 배 영역으로 확장된 버섯군(群) 등등. 힙스터는 아니지만 넓고 크고 긴 것이 전부는 아니다. 좁고 작고 가늘지만, 마이크로 산책과 같은 자세로 대할 경우 각론, 총론 모두 정확히 도출해 낼 수 있다. 필자의 힙스터 지역 방문을 축하하듯, 현장으로 가는 도중 ‘데스파시토’ 노래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왔다.

산책 나온 개들의 주인은 왜 하나같이 젊을까


▎중고 가전제품을 파는 거리 판매상. 1970년대 빈티지 제품이 주류다.
주차가 간편하다는 점은 브루클린의 장점 중 하나다. 노상 주차가 그리 어렵지 않다. 도로도 보통 왕복 2차선로가 전부다. 베드퍼드 근처에 차를 세우는 순간, 브루클린 특유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개들이다. 개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이 엄청 많다. 미국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지만, 브루클린의 ‘개판’은 조금 다르다. 개가 자신의 젊은 주인과 함께 직접 산책을 한다는 점이 특별하다.

미국에서 개 몇 마리와 함께 거리를 걷는 사람의 90%는 개 산책 아르바이트생이다. 개 산책은 시간당 최저 20달러를 보장하는 고소득 아르바이트다. 보통 3, 4마리를 몰고 다니며 2시간 이상 이뤄지는 유료 산책이다. 개를 자식 삼아 기르는 노년층이 주된 고객이다. 사람을 시켜 개의 산책을 도와주는 것이 미국 노년층의 상식이다.

젊은 도시 브루클린은 ‘인상 깊게도’ 주인인 밀레니얼 힙스터들이 직접 개를 데리고 나간다. 영화 속에서도 볼 수 있지만, 개나 애완동물을 통한 만남은 밀레니얼의 기본적인 사교법이다. 자세히 보니까, 베드퍼드 공원 내 한 부분이 아예 개 전용 운동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높이 1m 정도의 휘장으로 둘러싸인 반밀폐형 공간으로, 대략 30마리의 개가 뛰논다. 개주인인 밀레니얼은 바깥쪽에 모여 대화를 즐긴다. 어린이 놀이공원 밖에서 자식을 지켜보는 젊은 부모들의 모습과 비슷하다.

밀레니얼의 결혼관, 자식관은 부모 세대와 크게 다르다. 간단히 말해 만혼에다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한국 청년들도 비슷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자식보다 개나 고양이가 먼저다. 부모와 함께 살면서 독립하기를 꺼리는 것도 밀레니얼의 특징이다. 25세부터 35세를 기준으로 할 때, 1975년 당시 주택 보유자는 52%에 달했다. 2015년 인구조사결과에 따르면 28.8%의 밀레니얼만이 자신의 집을 소유하고 있다. 밀레니얼은 주택을 직접 구입하기보다 부모에게 얹혀사는 데 익숙하다. 미국의 주택 시장은 아메리칸 드림을 믿는 마이너리티 출신자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밀레니얼은 주택 구입을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본다. 최소한 부모의 집을 유산으로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별로 관심이 없다. 현재 한국에서 볼 수 있는 2030세대의 가치관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도 있다. 밀레니얼 세대는 경제력 유무와 무관하게 주택 소유 자체에 대한 관심이 없다. 한국 청년은 경제력이 허락된다면, 주택 구입에 적극적이다.

아스팔트 도로 위의 자연산 잔디


▎베드퍼드 블록 파티에 등장한 이동형 잔디 카펫.
개판 공원을 뒤로하고 베드퍼드 거리로 들어섰다. 중고 악기와 전자제품을 파는 노점상이 눈에 띈다. 전축과 진공관스피커도 보인다. 하이라이트는 카세트테이프 두 개를 넣을 수 있는 일제 스테레오 전자제품이다. 필자가 중학교 때 신주 모시 듯한 샤프(Sharp)사의 은빛 스테레오다. 5인치 크기의 흑백텔레비전도 있다. 낡아 빠진 중고인데도 가격이 최하 100달러에서 출발한다.

브루클린의 골동품은 자기 가구만이 아닌, 1970년대 전자제품도 포함된다. 사실 밀레니얼은 샤프 스테레오 기기와 같은 ‘디스코텍’ 시대의 유물과 무관하다. 본인이 아닌, 부모가 즐겼던 문명의 기기다. 부모의 추억에 빠진다는 것은 스스로의 어제에 대한 선명도가 약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부모를 기리는 ‘효자’쯤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베이비붐 세대 부모가 밀레니얼의 앞가림을 전부 해주는 과정에서 생긴 ‘수동적 추억’으로 해석해볼 수도 있다.

베드퍼드 거리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터져 나간다. 딱 붙는 짧은 바지에서 헐렁한 상의에서 보듯 첫눈에 힙스터 아지트로 느껴진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도로 한가운데가 대화의 무대다. 도로 양쪽에 노점상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자세히 보니까 도로는 아스팔트가 아니라 푸른 잔디 카펫으로 메워져 있다. 가로·세로 약 1m 크기의 잔디로, 수백여 개가 엮어져서 도로 위를 덮고 있다. 이벤트장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이동형 잔디 카펫이다.

그러나 밀레니얼 행사장 재료는 결코 플라스틱 가짜 잔디가 아니다. 순수한 자연산, 진짜 잔디다. 흙이 바닥에 달라붙어 있는, 물기가 밴 평평한 잔디다. 대충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자연의 정취를 연출한다. 행사가 끝나면 이동형 잔디는 병풍처럼 둘둘 말아 차곡차곡 포갠 상태에서 큰 트럭으로 옮겨진다.

잘 알려져 있듯이 기후변화, 그린(Green) 같은 환경 이슈는 밀레니얼의 신앙이자 종교라 볼 수 있다. 구호로서가 아니라 삶의 가치이자 의미로서의 기후변화 그린이다. 정치·경제적 불평등, 기아·압제 같은 어두운 세계는 밀레니얼 이전 세대의 관심사일 뿐이다. 모든 것이 풍족한 상태에서 “좋은 사람이 되거라(Be a good person)”는 말만 듣고 자란다. 베이비붐 세대 부모가 밀레니얼에게 전하는 가장 일반적인 조언이다. 공부 잘하라, 출세하라, 돈을 많이 벌라는 경쟁형 세계관과 무관한 평화 세대다. 기후변화, 환경에 대한 감각은 그 같은 상황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벤트장에서의 소품 하나에도 글로벌 환경에 관한 가치와 의미가 배어 있다.

밀레니얼 이벤트 노점상의 공통점 중 하나로 ‘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의 부재를 빼놓을 수 없다. 맨해튼 블록 파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많은 종류의 중국산 제품 판매상이 극히 드물다. 네팔산 양털로 짠 의류, 캐나다산 어린이 목재 장난감, 칠레산 돌로 만든 자연석 액세서리 같은 것이 주류다. ‘메이드 인 차이나’에 대한 밀레니얼의 이미지는 저질의 싸구려 상품에 그치지 않는다. 대량 생산과 환경 파괴, 노동력 착취에 대한 반감으로서의 ‘반(反)메이드 인 차이나’다. 일당 독재, 언론탄압, 인권부재와 같은 20세기형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세계의 공장 중국에서 나타나는 글로벌 차원의 산업형 이슈에 주목하는 식이다. 밀레니얼에게 20세기 냉전은 이미 ‘꼰대’들의 머릿속에서나 저장된 까마득한 과거사에 불과하다.

디지털 퍼티그와 아날로그 복귀운동


▎손편지 쓰고 읽기 전시장. 아날로그로 회귀하는 것이 21세기 미국 청년들이다
베드퍼드 거리 중간 정도로 나아가자, 여기저기 앉아서 뭔가 글을 쓰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A4 종이 위에 자신의 스토리를 써서 모두에게 전한다. 보여주기 위한 글도 있지만 스스로에게 보내는 편지도 있다. 글만이 아니라 그림편지도 있다. 천막 사방에 긴 줄을 설치해 빨래집게로 ‘투고된’ 편지를 걸어 두고 있다. 모두가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읽고 있다. 내용을 훑어보니까, 사소한 일상사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얼음 물 속에 소금을 넣어 함께 보관하는 것이 맥주를 식히는 최적의 방법이다’, ‘자동차나 자전거 벨소리를 새소리, 물소리와 같은 자연 친화적인 음향으로 바꿔야 한다’ ‘음식을 만들 때는 동영상이나 음악도 듣지 말고 오직 요리에만 주목해야 한다’ ‘문신용 캐릭터로 용 같은 동양의 신비한 동물을 넣는 사람이 있지만 너무도 촌스럽게 느껴진다’ 등이다.

편지 쓰기는 디지털 시대에 정면으로 맞서는 아날로그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언제부턴가 한국에서는 아날로그 편지를 손편지라 부른다. ‘디지털 퍼티그(Digital Fatigue)’, 즉 인터넷이나 모바일에 대한 무관심은 아이폰 탄생 10주년에 즈음한 새로운 사회현상이다. 이미 수십억 유저를 가진 페이스북이지만, 초기의 열풍과 달리 페이스북에 글을 남기거나 정보를 전하는 사람들이 현격히 줄어들고 있다. 디지털에 직접 참가하는 적극적 유저가 아니라 가만히 있어도 연결되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다.

페이스북의 텍스트 영상 투고는 개발도상국일수록 한층 더 열심이다. 브루클린 밀레니얼치고 아이폰을 갖지 않은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러나 적극적인 참여가 아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대세다. 완전히 디지털을 버리고 아날로그로 회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편지 쓰기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이해한다면 언젠가 탈(脫)디지털 문화운동이 본격화될 것이란 예측도 가능해진다. 물론 브루클린은 그 같은 원시 회귀 운동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각종 이벤트를 보면서 주의해야 할 점은 개다. 맹견주의가 아니라 복잡한 길을 걷는 동안 잘못하면 바닥을 스치는 개를 차거나 밟을 수 있다. 큰 개야 금방 알 수 있지만 밀레니얼의 대세는 작은 개다. 브루클린의 집은 크지 않다. 청년들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월세도 올라가고 있다. 작은 집을 오밀조밀 현명하게 사용하는 과정에서 작은 개가 선택된다.

흥미롭게도 브루클린은 개를 위한 주차장, 또는 아파트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사람들에게 밟힐지도 모를 개를 위한 휴식처다. 베드퍼드 거리를 걷는 곳곳에서 받은 팸플릿 중 하나가 개 휴식처 관련 홍보물이다. ‘도그파커(DogParker)’란 이름의 신종 비즈니스다. 가로·세로 1m 정도의 개 전용 작은 집으로, 브루클린 거주자에게 유료로 제공한다. 한 달에 일정 금액을 내고 회원으로 가입한 뒤 이용하는 식이다. 개를 잠시 맡기고 다른 곳에 볼일을 보러 가는 사람들에게 유용하다. ‘함께’가 모토인 밀레니얼은 친구도 많다. 그러나 정작 개를 한두 시간 맡길 만한 친구는 없다. 맡기려는 생각도 안 하지만, 부탁한다고 해도 여러 상황을 고려해 거부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강아지 주차장, 강아지 하우스 산업의 번창


▎베드퍼드 거리 중심가에 들어선 잔디밭 광장. 태양빛 아래 아스팔트지만 바닷가 모래사장에 온 기분으로 축제를 즐긴다.
개 휴식처는 무한정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대낮에 단기간 활용할 수 있다. 무인 유아 탁아소와 같은 개념이다. 모든 과정은 인터넷으로 연결된 IoT(Internet of things) 시스템을 통해 이뤄진다. 베드퍼드 거리 외곽에 들어선 도그파커 회원 모집소에는 개들을 위한 체험관도 있다. 말을 못하는 개지만, 휴식처 안에서 벌벌 떠는 모습이 보인다. 난생처음 보는 좁은 공간은 공포 그 자체일 것이다. 청결하게 유지한다고 하지만 다른 개들이 사용한 공간이란 점에서 병에 걸릴 가능성도 있다. 동물 애호가라는 점은 알지만, 과연 도그파커에 가입하면서까지 개를 기르는 것이 옳은 처사인지? 개 전용 IoT 주차장에 이어 다음에는 어떤 식의 기상천외한 이기적 발상이 견공들에게 적용될 지가 궁금하다.

필자의 집 근처에는 공립 고등학교가 하나 있다. 미국에서는 고등학생들도 부모의 동의 아래 운전을 할 수 있다. 좀 거리가 먼 학생은 부모의 차를 몰고 학교에 등교한다. 학교 주차장에 세워진 차를 보면 벤츠·캐딜락을 비롯한 최고급 자동차가 즐비하다. 10대부터 5만 달러 이상의 자동차를 몰고 다닐 경우 그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자동차에 환상이나 동경이 거의 없어진다고 볼 수 있다. 밀레니얼의 자동차에 대한 무관심은 결과적으로 기어가 없는 수동 자전거 마니아로 진화한다. 당연히 밀레니얼의 자동차 구입 양은 해가 갈수록 추락하고 있다.

아직은 미국 내 자동차 전체 판매량이 늘고 있다. 이유는 마이너리티와 노년층의 구입 열풍에서 비롯된다. 밀레니얼의 자동차에 대한 인식의 정도를 보면 앞으로 한층 더한 급추락이 예상된다. 2016년 <월스트리트저널> 조사 결과에 따르면 16세에서 34세 밀레니얼 100명 가운데 신차를 구입한 사람은 3.5명에 그친다. 2000년의 100명당 5명에 비해 1.5명이 줄어들었다. 2016년 50대 이상 미국인의 경우 100명당 6명이 신차를 구입했다.

돈이 없어 차를 사지 않는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차를 가질만한 이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평소 자전거나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는 데 익숙하다. 브루클린의 경우 차를 주차할 만한 전용 공간도 없지만, 굳이 차가 필요하다면 부모에게 부탁해서 빌리면 된다. 미국은 자동차와 자동차 문화를 창조해 낸 나라다. 자동차가 없고, 자동차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곳도 21세기 미국이다.

‘Car2Go’란 이름의 자동차 렌트 회사는 밀레니얼의 생각을 꿰뚫은 시대정신의 표상이다. 베드퍼드 도로 곳곳에서 Car2Go 가입을 권하는 캠페인이 이뤄지고 있다. 카메라를 10여 대 둥글게 설치해 180도 입체 회원용 사진을 찍어주면서 프로모션 참가를 권한다. 가족과 함께 입체사진을 찍으려는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다. Car2Go는 밀레니얼을 타깃으로 한, 렌털 겸 카셰어링(Car Sharing) 기업이다. 독일에 본사를 둔, 글로벌 IT기업이다. 모바일을 통해 모든 렌털과 카셰어링이 이뤄진다. 일정한 가입비와 월회비를 내면 Car2Go에서 제공되는 2인승 극소형 자동차를 활용할 수 있다. 밀레니얼 세계관에 맞게 가솔린이 아닌 전기로 가는 자동차다.

세상의 젊은이들이 브루클린에 모이는 이유


▎브루클린의 대세는 작은 강아지다. 도그파커 회원 모집소의 풍경.
한국 청년들이 볼 때 브루클린 밀레니얼은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느낄 듯하다. 옷차림·자전거·커피, 최근에는 문신에 이르는 외형만을 본다면 브루클린 서울 간의 차이는 없다. 그러나 개인에 기초한 밀레니얼과 ‘우리’라는 틀 속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한국 청년들의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국가·민족·이념에 대한 밀레니얼의 관심은 그리 크지 않다. 단일민족, 단일 언어, 남북 대치라는 배경 때문이겠지만, 한국은 아직 국가·민족·이념이란 거대담론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글로벌 시대라지만 수동적 차원의 감각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시리아·중국·북한 내 인권 문제에 대한 한국 청년들의 관심도는 지극히 미약하다. 산적한 국내 문제에 묻혀 밖의 사정에 무심하다. 굳이 이분법적으로 나누자면 밀레니얼이 문화 운동으로서의 ‘나의 삶’에 주목하는 데 비해 한국 청년은 국내용 정치운동으로서의 ‘우리의 운명’에 집중하는 듯 느껴진다. 누가 옳을지가 아니라, 상황에 맞게 탄생된 서로 다른 세계관이다.

부정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브루클린 밀레니얼은 글로벌 21세기 청년 문화의 흐름을 제시하는 좌표로 와 닿는다. 촛불시위로 밤을 지새는 애국운동 스타일 정서와 무관한, 나의 가치를 발견하고 내가 똑바로 설 수 있는 세상을 찾기 위한 혼자로서의 몸부림이다.

분명한 것은 밀레니얼의 생각과 행동이 흥미롭다는 사실이다. 뭔가 자극을 준다. 50대 필자조차 뭔가 새롭게 배울 수 있는 미지의 공간이 브루클린이다. 시작 3분만 봐도 과정은 물론 결과까지 점쳐지는 드라마가 대부분이다. 밀레니얼 주연의 브루클린 드라마는 1시간, 아니 마지막 장면에 가서도 결말을 알아내기 어려운 변화무쌍한 스토리다. 돈이나 명예가 전부는 아니다. 시대 변화에 맞춰진 새로운 가치가 한층 더 중요하다. 세상의 젊은이들이 브루클린에 모이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일본직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708호 (2017.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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