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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셀프테라피(8)] 내 안의 작은 괴물, 콤플렉스 

건드리면 펑! 터진다 

정여울 문학평론가
유난히 복잡하게 꼬여 있는 부분, 누구에게나 있는 잠재된 무의식··· 되레 탐험 가능성 가득한 ‘전인미답’의 영역이기도

▎사진·아이클릭아트
우리 마음속에는 거기만 건드리면 펑 터지는 지점이 있다. 우리의 상처가 유독 빽빽하게 모여 있는 곳, 우리의 아픈 기억이 뭉친 근육처럼 잔뜩 긴장하고 있는 곳, 바로 콤플렉스가 자리하는 곳이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다가 어떤 주제나 단어만 나오면 극도로 긴장한다. 그 단어를 듣기만 해도 피가 거꾸로 쏟는 듯한 분노를 느끼기도 하고, 정서적으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며 싫은 표정을 감추지 못하기도 한다.

“너는 왜 그 이야기만 나오면 그렇게 예민하게 구는 거니?” 이런 반응을 들어본 적이 있다면, 그 부분은 당신의 콤플렉스일 가능성이 높다. 콤플렉스는 일상 속에서 누구나 자주 쓰는 심리학 용어가 됐다. “나는 영어에 콤플렉스가 있어.” “저 사람은 완전히 콤플렉스 덩어리야.” “그는 학벌 콤플렉스가 심해.” “성격이 배배 꼬인 걸 보니 콤플렉스가 심한 사람이야.”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콤플렉스라는 단어를 매우 자연스럽게 쓴다.


▎인간이 나고 자라면서 자기의 심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 중 하나가 열등감이다. 현대인은 이 열등감을 자신의 ‘못난 동생’이라고도 표현한다. / 일러스트·강일구
이렇듯 콤플렉스의 일상적인 의미는 ‘그 부분이 유난히 복잡하게 꼬여 있는 부분, 정신적 에너지가 유독 모여 있는 곳’을 가리킨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콤플렉스는 조금 더 복잡하다. 콤플렉스는 단지 심리적 약점이 아니라 온갖 탐험의 가능성으로 가득 찬 전인미답의 영역이며, 잠재된 무의식의 무한한 가능성이기도 하다. 콤플렉스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콤플렉스를 탐구하고 분석하여 인간 무의식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콤플렉스야말로 심리학으로 깊숙이 들어가기 위한 출입구가 된다. 내가 내 인생을 주도할 수 있다는 믿음을 위협하는 것, 나의 나다움을 앗아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콤플렉스인 것이다.

억압될수록 강력한 화약고 역할 해


▎<콤플렉스 카페>에서는 내계의 탐색을 통해 자신의 ‘고귀한’ 티끌을 찾으라고 조언한다. / 사진제공·파피 에
베레나 카스트의 <콤플렉스의 탄생, 어머니 콤플렉스 아버지 콤플렉스>(푸르메, 2010)에서는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말들 중에 많은 문장이 실은 부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고 증언한다. “엄마처럼 살지는 않을 거야.” “엄마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요.” “나는 누가 뭐래도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될 거예요.” “남자들과 함께 있으면 나도 모르게 저절로 어리석게 변하고 순응하게 돼요.” “저는 항상 나이 든 남자들을 좋아했어요.” “먼저 아빠한테 물어보면 아빠가 제대로 해주실 거야.” “나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느끼도록 모든 것을 다했어요.” “나와 아버지는 하나였어. 우리는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우리만의 세계가 있었지.” 이런 말들은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집착과 증오, 원망과 분노, 자긍심과 질투심, 슬픔과 후회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콤플렉스의 증거들이다.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말들, 그 속에 콤플렉스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콤플렉스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쓴 사람은 요셉 브로이어다. 그는 강한 정서적 반응을 일으키는 관념이나 기억의 모임을 콤플렉스라고 생각했다. 카를 융은 이 개념을 더욱 확장하고 심화시켜 심리학의 핵심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융은 환자들과의 상담 과정에서 그들이 어떤 특정 단어 앞에서 갑자기 머뭇거리거나 괴로워하는 모습을 자주 발견했다. 이 현상에 착안하여 그는 언어 연상시험을 개발했는데, 특정한 단어에 대한 반응이 지연되거나 연상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 또는 부자연스러운 연상 내용 등이 ‘잠재된 감정의 복합체’, 즉 콤플렉스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이디푸스는 왕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되리라는 신탁 때문에 산속에 버려진다. 아들이 동성인 아버지에게는 적대적이지만 이성인 어머니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한다.
융은 환자들에게 강한 거부반응이나 반응지연을 나타내는 빈도가 높은 단어들을 따로 분류했는데 예컨대 죽음, 이별, 상처 같은 단어 앞에서 머뭇거리거나 반응이 늦어지는 환자들의 마음속에는 그것과 연관된 아픈 상처가 도사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죽음’이나 ‘아버지’라는 단어에 강한 거부반응을 불러일으키는 환자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이 너무 강해 아버지의 죽음까지 바라는 공격적인 욕망이 숨어 있을 수 있다. 이런 것이 바로 콤플렉스다.

콤플렉스는 특정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있다. 의식적인 콤플렉스도 있지만 무의식적인 콤플렉스도 있다. 본인이 콤플렉스라고 생각하지 않는 부분에 뜻하지 않은 무의식적인 콤플렉스가 숨어 있는 경우가 더욱 문제적이다. 콤플렉스가 무의식의 밑바닥에 깊이 억압돼 있을수록 그것은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우리의 의식을 조종하게 될 수도 있다. 요컨대 콤플렉스, 즉 ‘마음 깊은 곳의 응어리’는 언제든 분노의 화약고로 돌변하여 폭발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결핍 감정이 열등감 심화시켜


▎영화 <킹스 스피치>의 한 장면. 이 영화는 어린 시절부터 말더듬이 증상을 가졌던 영국 왕 조지 6세의 콤플렉스 극복기를 그린 영화다.
“어쩌면 현대인은 외계 탐험에 마음을 너무 빼앗겨 내계의 탐색을 게을리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콤플렉스는 우리가 배제해야만 하는 티끌 따위가 아닙니다. 혹시 티끌이라 해도 ‘가장 낮은 것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 태어난다’는 역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지요.”_가와이 하야오, <콤플렉스 카페>(파피에, 2014)

콤플렉스의 종류는 워낙 다양할 뿐 아니라 현대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콤플렉스의 모습 또한 함께 복잡해지고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엘렉트라 콤플렉스, 피터팬 콤플렉스, 레드 콤플렉스, 신데렐라 콤플렉스, 착한 여자 콤플렉스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양한 콤플렉스가 있지만, 현대인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들러가 이야기한 ‘열등감 콤플렉스’가 아닐까. ‘열등함’과 ‘열등감 콤플렉스’는 다르다. 예컨대 ‘나는 수영을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그것에 대해 별다른 부정적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순한 ‘부족함’이지 콤플렉스는 아니다. 하지만 수영을 못하는 것과 물에 대한 트라우마가 얽혀 물놀이 자체에 대한 심한 거부감과 공포를 느끼는 사람은 열등감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즉 ‘결핍’ 자체가 콤플렉스를 초래하지는 않는다. 결핍에 대한 ‘감정’이 콤플렉스를 심화시키는 것이다.

심리학자 가와이 하야오는 <콤플렉스 카페>(파피에, 2011)에서 이렇게 말한다. 콤플렉스는 넓은 의미에서 일종의 열등성이기는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으로 하여금 “위대한 노력을 자극하는 것”이며, 나아가 콤플렉스로 인해 우리는 “새로운 일을 해낼 가능성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도 있다고. 즉 콤플렉스는 우리 안의 미운 오리새끼처럼 언제 백조가 되어 날아오를지 모르는 무의식의 가능성인 셈이다. 가와이 하야오는 콤플렉스를 무조건 숨기고 억누르는 것보다는 무의식 깊이 잠재된 콤플렉스를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의식과 무의식의 평등한 대결을 지향하는 것이 내적 성장의 지름길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콤플렉스 없는 자아실현은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자기의 결핍과 매번 싸우는 험난한 투쟁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자아 실현, 즉 가장 자기다운 자기가 돼가는 심리적 변신의 과정을 버텨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콤플렉스 덩어리였다. 이를 극복해 자기분석의 결과로 탄생한 첫 번째 책이 <꿈의 해석>이다.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인 알프레트 아들러는 개인심리학(individual psychology)의 주요 문제로서 열등감 콤플렉스를 지적했다. 인간은 자기 안의 결핍과 열등한 요소를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 그런데 자신의 신체적/정신적 열등감을 보충하기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노력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비로소 내적인 성숙을 이루게 되고 타인과의 조화로운 관계 맺음도 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콤플렉스에 대한 보상심리가 지나치면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너무 많은 희생을 감수한다든지, 콤플렉스를 가리느라 급급히 지극히 타인 지향적인 인간이 될 수도 있다. 콤플렉스에 대한 보상심리는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 보상심리를 어떻게 건강하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콤플렉스에 짓눌릴 것인지, 콤플렉스와 공존하면서도 그것을 극복할 것인지, 그 갈림길에 서게 된다.

심리학자 제임스 홀리스는 <인생 2막을 위한 심리학>(부글북스, 2015)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모두는 너무 작은 신발을 신고 다닌다. 인생에 대해 지나치게 좁은 관점을 가진 채 옛날의 방어 전략을 그대로 고수하면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과거 역사에 얽매인 선택을 되풀이함으로써 자신의 성장을, 말하자면 영혼의 확장을 가로막고 있다.”

어쩌면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은 ‘내가 원하는 바로 그 능력이 없으면, 내 인생은 계속 풀리지 않을 거야’라는 자기 속박이 아닐까. 우리 안에는 이미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지혜가 있다. 우리는 다만 그 힘과 지혜를 아직 다 꺼내 쓰지 못했을 뿐이다. 때로는 ‘자존심’이라는 작은 신발을 신음으로써 자신의 콤플렉스와 마주할 기회를 놓쳐버리고, 때로는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라는 작은 신발을 신음으로써 콤플렉스를 극복하기보다는 콤플렉스를 숨기는데 급급해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콤플렉스는 숨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진심으로 마주해야 할 대상이다. 콤플렉스는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생이 끝날 때까지 함께 인생의 험로를 함께 헤쳐 나가야 할 반려자다.

극복과 공존의 이중주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말은 결국 어머니에 대한 집착과 증오, 원망 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콤플렉스의 증거다.
“‘긴장되는 순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떨리지 않는 척 외면하느냐’에서 이렇게 큰 차이가 난다. 누구나 떨리는 순간에는 실수할 수 있다. 이처럼 결정적인 상황에서 효과적인 기술을 선보이는 데 실패하고 평정심을 잃는 것을 ‘초크(choke)’라고 한다. 운동선수들과 상담을 하다 보면 초크를 슬럼프와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흔히 사람들은 위기의 순간이나 아주 극적인 순간에 선수들이 최고 기량을 발휘해 골을 넣거나 안타를 쳐주길 바란다. 하지만 이때 골을 넣지 못하더라도 슬럼프가 아니라 초크일 뿐이다. 다시 말해 선수의 실력이 저조한 것이 아니라 상대 팀이 강력한 집중력을 발휘해 수비하고 골을 방해했기 때문에 골을 넣지 못한 것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순간에 골을 넣지 못한 것을 자신의 부족한 실력 탓으로 돌리며 부담감을 키우고 스스로를 슬럼프 상태로 몰고 가는 선수들이 있다. 그들은 초크와 슬럼프를 구분하지 못해 어이없게 슬럼프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_한덕현, <마음 속에는 괴물이 산다>(청림출판, 2013)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발견해낸 프로이트야말로 콤플렉스 덩어리였다. 프로이트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고자 엄청난 노력을 했고, 오랫동안 아버지를 존경해왔지만 막상 아버지가 중병에 걸리자 무려 두 달간이나 휴가를 떠나고 말았다. 1896년 프로이트가 마흔 살이 되던 해 그의 아버지는 사망했고, 프로이트는 커다란 정신적 위기를 겪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프로이트의 행동이 이상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이발소에 다녀오느라고 장례식에 너무 늦게 참석했다. 프로이트도 자신의 그런 행동에 놀라워했고, 그것은 그를 자신에 대한 분석으로 이끌었다. 프로이트 자신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환자가 아니었을까. 이러한 자기분석의 결과로 탄생한 첫 번째 책이 바로 <꿈의 해석>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그의 아킬레스건이었지만, 그는 이 분석을 통해 역사에 길이 남을 전무후무한 정신분석의 업적을 세운 것이다.

콤플렉스를 극복하려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자기 안의 깊은 상처를 만난다. 예컨대 나는 ‘협동’이라는 단어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협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거의 반사적으로 고통을 느낀다. 오래전에 다쳤던 상처가 이제 흉터만을 남기고 다 아물어버린 줄 알았는데, 또다시 ‘협동’ ‘협업’ 이런 단어를 들을 때마다 흠칫흠칫 놀라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협동이라는 단어에 대한 내 콤플렉스의 기원은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문제는 생활기록부였다. 다른 성적이 잘 나올 때도 유독 협동심만은 낮은 평가를 받았다. 물론 협동심을 ‘수우미양가’로 평가할 순 없었지만 생활기록부에는 분명히 ‘가나다’로 평가하는 항목이 있었다.

담임선생님을 무척 무서워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협동심에 대한 평가는 더 낮게 나왔다. 혼자 몽상에 잠기기 좋아하는 버릇, 혼자 있는 것을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더 좋아하는 모습 때문이었던 것 같다. 더 깊이 내 마음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진심으로 혼자 있고 싶다기보다는 어떻게 해야 친구들과 재미있고 조화롭게 지낼 수 있는지 전혀 방법을 몰랐다. 지금도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려 보면, 어떻게 친구를 사귀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던 어린 아이의 한없이 당혹스러운 표정이 보인다. 그게 나였다.

그렇게 협동심이 부족하다면 과연 어떻게 그 콤플렉스를 극복해야 하는지, 알려주지도 조언해주지도 않은 채 행동발달사항에 낮은 점수를 매기기만 했던 담임선생님에 대한 섭섭함도 남아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선생님의 평가점수를 그대로 받아들여, 내가 나 자신을 ‘협동심이 부족한 아이’라고 낙인 찍어버렸던 것이 가장 큰 상처라는 것을. 어린아이에겐 어른들의 평가에 저항할 능력이 없다. 그저 어른들이 야단을 치거나 악평을 내리면 그 내용에 따라 자기 이미지를 차곡차곡 형성하는 경우가 많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에게 협동이라는 단어는 난공불락의 성처럼 느껴졌다. 도저히 뛰어넘지 못할 마음의 벽이었다. 협동이 필요할 때마다 나는 내 안의 저주에 시달렸다. 넌 협동심이 부족하잖아. 넌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지 못하잖아, 사교성이 부족하잖아, 친구도 별로 잘 사귀지 못하잖아, 이런 식으로 연쇄적인 자기비판을 확대 재생산했다. 단지 초등학교 시절 생활기록부에 찍힌 작은 스탬프 몇 개가 내 인생을 이토록 좌지우지할지는 몰랐다. 콤플렉스는 바로 이렇게 강력한 파괴력을 지녔다. 콤플렉스를 느끼는 한 부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정서적 영역까지 자기부정의 목소리로 물들어버린다.

하지만 이토록 복잡하고 힘겨운 콤플렉스 때문에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뜻밖의 자기실현의 열매를 거두기도 한다. 나는 책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내가 협동에 결코 문외한이 아님을 깨달았다. 협동의 소중함도 깨달았다. 출판기획으로부터 집필과 디자인, 홍보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과정이 수많은 사람과의 협동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나는 글쓰기가 단지 고독한 내면의 몸부림이 아니라 소중한 친구를 얻기 위한 간절한 몸짓임을 알게 되었다.

나를 재창조하는 정신적 에너지 될 수도


▎콤플렉스는 숨은 자신의 가능성을 일깨워줄 수도 있다. 자신의 콤플렉스를 ‘적’이 아닌 ‘반려자’로 받아들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 사진·아이클릭아트
나이나 취향, 살아온 과정이나 생각의 방향이 전혀 다를지라도, 한 권의 책을 함께 만드는 일을 통해 우리는 뜻하지 않은 친밀감과 일체감을 느끼곤 했다. 내가 글을 쓸 때는 그저 한 사람의 작가이지만 책을 출간할 때는 ‘책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것이 참 좋다. 책을 만드는 기간 동안 매번 엄청난 우여곡절이 있고, 그때마다 견고하게 쌓아올린 내 자아의 일부가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람직한 협동의 과정에서 일어난 갈등과 균열은 ‘좋은 부서짐’이다.

내가 ‘협동’이라는 단어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자아의 분열은 보다 많은 사람이 더 나은 길을 걸어가기 위한, 기쁜 무너짐이다. 나의 경계를 확장하는 무너짐, 나의 나다움을 뛰어넘는 부서짐이기에. 마침내 나라는 견고한 장벽을 뛰어넘는 무너짐과 부서짐이기에. 나는 이제 협동이 진심으로 좋아지기 시작했다. 콤플렉스 또한 마찬가지다. 콤플렉스를 흔적 없이 말끔하게 치유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콤플렉스를 의식하면서도 그것에 짓눌리지 않는 것. 나아가 정말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는 콤플렉스의 존재를 자신도 모르게 잊어버리고 자신이 넘어야 할 그 인생의 장애물을 훌쩍 뛰어넘는 용기. 그런 용기를 가질 수 있다면 더 이상 콤플렉스가 우리 정신을 짓누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콤플렉스가 당신을 짓누르고 짓밟아도 절대로 기죽거나 절망하지 말기를. 어쩌면 콤플렉스가 나를 완전히 새롭게 재창조할 수도 있으니까. 어쩌면 콤플렉스가 내 삶의 숨은 가능성을 일깨워줄 수도 있으니까. 콤플렉스를 ‘적’이 아니라 ‘반려자’로 받아들일 때, 콤플렉스는 당신의 장애물이기를 멈추고 당신의 강력한 정신적 에너지의 원천이 되어줄 것이다. 콤플렉스를 받아들이고 극복하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기 정신의 진짜 주인공이 된다.

정여울 - 작가, 문학평론가. 1976년생. 서울대 독문과 졸업 후 같은 대학에서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2004년 <문학동네>를 통해 등단했다. 저서로 <공부할 권리> <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마음의 서재> <헤세로 가는 길> <그때, 나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 등이 있다. 제3회 ‘전숙희문학상’을 수상했다.

201708호 (2017.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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