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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8)] 메이지 일본의 끝없는 야욕 

“조선이 안 된다면 대만을 치게 해달라”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정한론 여의치 않자 딴 나라로 눈 돌려… 전쟁 완승 후 淸에서 총 50만 냥 받아내

▎대만인과 홍콩인으로 이뤄진 반일 시위대가 1996년 9월 23일 영토분쟁을 빚고 있는 댜오위다오(釣魚島) 인근 해역에서 일본 경비선들에 둘러싸여 있다. 이들은 대만 국기와 함께 ‘댜오위다오는 중국 영토’라는 깃발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파벌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정한론은 사쓰마번(薩摩藩) 출신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조슈번(長州藩) 출신의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사이의 논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1868년의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핵심 세력은 물론 사쓰마번과 조슈번이었고, 사이고와 기도가 양 번의 중심인물이긴 했다. 그렇다고 두 번 이외에 다른 번의 역할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도사번(土佐藩)과 히젠번(肥前藩) 역시 크나큰 기여를 했다.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동맹을 성사시킨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를 비롯해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郞)는 도사번 출신이었다. 반면 메이지 유신 초기 경제 문제를 주도하던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를 비롯해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宗臣), 에토 신페이(江藤新平)는 히젠번 출신이었다.

이들 중에서 사카모토는 유신 직전에 암살당했지만 나머지 인물은 유신 정부에 참여해 중책을 맡았다. 예컨대 이타가키와 고토는 도사번을 대표해 참의(參議)가 됐고, 소에지마와 에토는 히젠번을 대표해 참의가 됐다.

그렇지만 그들은 비류주였다. 주류는 어디까지나 사쓰마번과 조슈번 출신이었다. 당연히 도사번과 히젠번 출신들은 이런 구도를 바꾸고 싶어 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권력 구조 개편 요구로 표출됐다.

메이지 유신 직후 사쓰마번과 조슈번 출신들은 태정관의 참의와 각 성의 경(卿)을 다수 장악함으로써 주도권을 잡았다. 이런 권력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사쓰마번과 조슈번 출신의 주도권을 빼앗기는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1873년 5월, 동래 왜관에 메이지 정부를 멸시하는 듯한 벽보가 게시되자 도사번 출신의 이타가키는 즉각적인 전쟁을 주장하고 나섰다. 여기에 더해 같은 번 출신의 고토는 물론 히젠번 출신의 소에지마와 에토까지도 조선과의 전쟁을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에 사쓰마번 출신의 사이고가 동의함으로써 정한론이 큰 쟁점으로 부각됐다.

당시 이타가키·고토·소에지마·에토 등이 조선과의 전쟁을 주장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쓰마번과 조슈번 중심의 권력 구조를 바꿔보고 싶은 욕망이었다.

주도 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1873년은 아직도 유신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불안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과의 전쟁이란 당치 않은 일이었다. 당연히 전쟁에 반대였다. 그래서 당시 핵심 실세였던 이와쿠라·기도·오쿠보 등은 모두 정한론에 반대했다.

반면 이타가키·고토·소에지마·에토의 입장에선 사쓰마번 출신의 사이고만 설득하면 논쟁에서 이길 가능성이 있었다. 승리한다면 이와쿠라·기도·오쿠보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정한 논쟁은 메이지 천황의 결단으로 이와쿠라·기도·오쿠보의 승리로 돌아갔다. 사이고·이타가키·고토·소에지마·에토는 사직하고 낙향했다. 이들의 낙향은 거꾸로 이와쿠라·기도·오쿠보의 권력을 강화시켰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사쓰마번과 조슈번 출신들의 주도권을 더욱 탄탄하게 만들었다. 정부 안에서 야당 역할을 하며 견제하던 세력이 일시에 사라진 효과였다.

권력 구조 바꾸기 위한 소수파의 ‘승부수’


▎일본 근대화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사카모토 료마. 자객들에게 암살당하기 직전인 1867년, 료마가 하숙집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낙향 후 새로운 돌파구를 찾던 이타가키·고토 등은 1874년 1월에 ‘애국공당(愛國公黨)’이라는 정치결사를 조직하고, 신문 발행도 시작했다. 정당과 언론을 통해 사쓰마번과 조슈번 출신의 주도권을 저지하겠다는 의도에서였다. 처음 의도는 그랬지만, 결과적으로 애국공당 조직은 일본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일본 역사상 최초의 정당인 애국공당은 훗날 일본 보수당의 대표 정당인 자유당의 뿌리가 됐다.

사이고와 에토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사이고는 고향 가고시마(鹿兒島)에서 기회를 엿보다 1877년 사무라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보다 3년 앞선 1874년 2월에 에토는 고향인 사가(佐賀)에서 사무라이 반란을 일으켰다. 사가의 사무라이들은 에토가 정한론에서 패배하고 사직하자 크게 분개했다. 그들은 정한(征韓)을 주장하며 아예 ‘정한당(征韓黨)’을 조직하기까지 했다. 전쟁이 벌어지면 선봉이 되겠다고 큰소리치며 무리들을 모았는데 그 수가 2000여 명에 이르렀다. 자신감이 붙은 정한당 무리들은 에토에게 사람을 보내 수령으로 추대하겠다고 했다.

실의에 빠져 있던 에토는 승낙하고 사가로 내려갔다. 에토는 “조선의 거만과 무례함을 책망하지 않음으로써 국권이 심하게 실추됐다. 국가가 이렇게 심한 일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다면 해외 각국이 경멸하고 무시해 드디어는 그 끝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로 무력 봉기를 선동했다.

당시 에토는 무력 봉기가 꼭 성공할 것으로 판단한 듯하다. 자신이 먼저 봉기하면 정한 논쟁 때의 동지들이 모두 동조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에토가 사가에서 봉기한 후 고치(高知)의 이타가키와 가고시마의 사이고 등이 동조한다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메이지 유신 때도 처음은 사쓰마와 조슈 그리고 도사와 히젠의 힘만으로 성공하지 않았던가?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미야코지마 사건


▎2000년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된 류큐왕국의 슈리성.
이런 기대를 안고 에토는 1874년 2월 16일 새벽, 사가 현청을 급습해 이틀 만에 점령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곧이어 정부군의 반격이 시작됐다. 그러나 이타가키나 사이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2월 23일, 사가를 탈출한 에토는 사이고와 이타가키를 찾아 가고시마와 고치를 전전했지만 냉대만 받았다. 결국 에토는 3월 28일 체포됐고, 4월 13일에 참수됐다.

에토의 무력 봉기는 쉽게 진압됐지만 그 충격은 컸다. 무엇보다 메이지 정부의 중책을 맡았던 실력자가 무력 봉기를 일으켰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다. 더구나 에토와 마찬가지로 무력 봉기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예컨대 에토와 함께 정한 논쟁에서 패배하고 사직한 사이고를 위시해 이타가키·고토·소에지마 역시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정한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배후는 궁극적으로 실직한 사무라이들이었다. 어떻게든 그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일자리를 만들어야 했고, 실직 사무라이들이 잘할 수 있는 일은 전쟁이었다.

실직 사무라이들은 조선과의 전쟁이 안 된다면 그보다 약한 곳과 전쟁을 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대만 침공을 요구했다. 만약 정부에서 대만 침공까지 반대한다면 실직 사무라이들은 사이고 또는 이타가키·고토·소에지마 등과 연계해 무력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농후했다.

실직 사무라이들이 대만 침공을 주장한 이유는 1871년 11월에 일어난 사건 때문이었다. 그때 류큐(琉球)왕국에 소속된 미야코지마(宮古島)의 조공선 1척이 류큐의 수도에 갔다가 대만 동남부에서 표류했다.

미야코지마는 대만과 류큐 수도 중간쯤에 위치한 섬으로, 예로부터 대만에 표류하는 일이 잦았다. 표류한 배에는 69명의 선원이 타고 있었는데, 3명이 익사하고 나머지 66명이 생존한 상태였다. 생존자들은 대만 원주민인 고산족(高山族)과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자 도주했다.

그러자 대만 원주민들은 그들을 추적해 54명을 살해했다. 나머지 12명이 탈출해 청나라 관청에 가서 구조를 요청했다. 이들은 청나라의 도움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류큐왕국은 이 사건을 가고시마현에 보고했고, 다시 가고시마현에서 중앙정부에 보고함으로써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을 알게 됐다.

이 사건은 일본이나 청나라 입장에서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사안이었다. 왜냐하면 류큐왕국과 대만 원주민의 성격이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류큐왕국은 청나라와 일본 사쓰마번 양쪽에 조공을 바치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청나라 입장에서 보면 류큐왕국은 청나라 속국이었고, 일본 입장에서 보면 일본 속국이었다.

또한 대만 원주민의 경우 비록 청나라가 대만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고산족으로 알려진 일부 원주민은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 상태에 있었다. 이에 따라 청나라의 지배에 복속한 대만 원주민을 숙번(熟蕃)이라고 한 것에 대비해 지배에서 벗어난 대만 원주민을 생번(生蕃)이라고 했다. 숙번은 명실상부 청나라 백성이었지만 생번은 반드시 그렇다고 간주하기에는 애매한 점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야코지마 주민을 살해한 대만 원주민이 생번이었기에 문제는 아주 복잡해졌다. 류큐왕국 소속의 미야코지마 주민의 국적뿐만 아니라 가해자인 대만 원주민의 국적도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류큐왕국이 청나라 속국이고 대만 생번 역시 청나라 백성이라면 미야코지마 주민 54명이 살해된 사건은 청나라 내부의 문제가 된다.

반면 류큐왕국이 청나라 속국이고 대만 생번이 외국인이라면 이 사건은 청나라와 생번의 문제였다. 반대로 류큐왕국이 일본 속국이고 생번이 청나라 백성이라면 이는 일본과 청나라의 문제가 되며, 생번이 청나라 백성이 아니라면 일본과 생번과의 문제가 됐다.

이처럼 미야코지마 주민 살해 사건이 복잡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류큐왕국과 생번의 소속 문제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실직 사무라이들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해 대만을 침공하고자 했다. 즉 실직 사무라이들은 류큐왕국이 일본 속국이고 생번 역시 청나라 백성이 아니라는 점을 부각시켜 류큐왕국과 대만을 점령하고 이를 빌미로 청나라와 전면전쟁을 도발하려 했던 것이다.

‘해결사’ 자청한 소에지마 다네오미


▎구한말 주한 영국대사관에서 열린 외교사절들의 가장무도회. 오른쪽 상단 셋째(화살표)가 휴 개럿 포스터배럼이다.
당시 실직 사무라이와 더불어 대만 침공을 강력하게 주장한 인물은 정한론에서 패배한 소에지마 다네오미였다. 그는 이번 사건을 기회로 외국인이 대만을 넘보지 못하게 하고, 청나라로 하여금 대만을 일본에 할양(割讓)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청나라에 가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자청했다.

이에 메이지 천황은 소에지마를 특명전권대사로 청나라에 파견했다. 소에지마가 도발적으로 책임을 추궁하자 청나라에서는 “대만 생번은 화외(化外)의 백성”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책임 없음을 강조했다. “대만 생번은 화외의 백성”이란 뜻은 청나라 백성이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소에지마가 기다린 대답이 바로 이것이었다. 대만 생번이 청나라 백성이 아니라면 일본이 대만 생번을 공격해도 청나라는 간여할 명분이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873년 7월 말 소에지마가 귀국한 직후 일본에서는 정한론이 큰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대만 침공 문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1873년 10월 정한론이 수그러들면서 역설적으로 대만 침공이 큰 쟁점으로 부각됐다. 특히 정한론을 좌절시킨 이와쿠라를 암살하려 한 사건이 일어나면서 대만 침공이 큰 쟁점으로 부각됐다.

1874년 1월 14일 오후 5시에 입궁했던 이와쿠라는 오후 8시쯤 궁에서 나왔다. 이와쿠라가 아카사카(赤坂)를 지나던 순간 몇몇 암살자가 어둠 속에서 나타나 칼을 휘둘렀다. 이마에 칼을 맞은 채 마차에서 도망치던 이와쿠라는 언덕 아래로 몸을 던졌다. 마침 궁성 문 쪽에서 사람들 소리가 들리자 이와쿠라 뒤를 따르던 암살자들은 달아났다. 언덕을 타고 올라온 이와쿠라는 궁성 순라군들에게 구조됐다.

조사 결과 이와쿠라를 암살하려 한 사람들은 정한론을 주장하던, 사이고를 지지하는 사무라이들이었다. 비록 메이지 천황에 의해 정한론이 제지됐다고 해도 실직 사무라이들의 불만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서는 뭔가 대책을 세워야 했다.

1874년 1월 말, 태정대신 산조는 이와쿠라와 함께 대만 문제를 논의했다. 실직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였다. 산조와 이와쿠라는 참의 오쿠보, 오쿠마로 하여금 대만 문제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라고 명령했다.

2월 6일, 산조는 이와쿠라의 집에 가서 오쿠보·오쿠마가 제시한 대책을 검토했다. 그들이 제시한 대책은 “대만 생번은 화외의 백성”이라고 한 청나라의 입장을 언질로 해 일본이 대만을 침공해 죄를 묻는 한편 청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외교 교섭을 벌인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산조와 이와쿠라는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 즉 대만을 침공하기로 합의했던 것인데, 이는 실직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대만을 침공하기로 한 것이었다.

메이지 일본의 대만 침공은 사가에서 일어난 에토의 반란으로 잠시 연기됐지만 반란 진압 후 적극적으로 추진됐다. 당시 일본 군부 내에서 대만 침공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인물은 육군 대보(大輔) 사이고 쓰구미치(西鄕從道)였다. 그는 정한론을 앞장서서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생으로 유럽에서 군사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육군 고위직에 오른 인물이었다. 쓰구미치는 형 사이고와 마찬가지로 실직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대외 침공을 적극 주장했다.

1874년 4월 4일, 쓰구미치는 대만번지(臺灣蕃地) 사무총독(事務總督)에 임명됐다. 이 자리는 대만 침공군의 최고 사령관으로서 쓰구미치가 직접 요구했다. 이런 사실에서 쓰구미치가 대만번지 사무총독에 임명된 것은 사이고 다카모리로 대표되는 정한론자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조치였음을 이해할 수 있다. 대만번지 사무총독에 더해 도쿄에는 대만 번지 사무국이 설치됐는데 사무국은 대만 침공에 따른 업무를 총괄하는 기구였다. 사무국의 장관에는 참의 겸 대장경 오쿠마가 임명됐다.

쓰구미치를 최고 사령관으로 하는 대만 침공군은 구마모토(熊本) 진대 보병 1대대, 포병 1소대, 해군 보병 1소대, 해군 포병 2문 등 총 5000여 병력이었다. 이들 침공군과 함께 일진함(日進艦), 맹춘함(孟春艦), 명광함(明光艦), 삼방함(三邦艦), 용양함(龍驤艦) 등 다섯 척의 군함이 동원됐다.

당시 일본 정규군의 총 병력은 대략 5만 내외였고, 근대 군함은 10척 내외였다. 그중에서 대만 침공을 위해 5000여 병력과 다섯 척의 군함을 동원한다는 것은 정규 병력의 10%, 군함의 50% 정도를 투입하는 셈이었다. 대만 침공은 메이지유신 이후 최초의 대외 전쟁이었고, 그 대상이 궁극적으로 청나라이기에 이 정도 군사력을 동원했던 것이다.

4월 6일, 메이지 천황은 대만번지 사무총독 쓰구미치를 만나 대만번지 처분에 관한 전권 위임장을 줬다. 위임장의 핵심 내용은 육군·해군의 사무로부터 상벌 등에 이르기까지 일체를 쓰구미치에게 맡긴다는 것으로 쓰구미치는 대만에 출동해 생번이 일본인을 살해한 죄를 묻고, 그에 상당한 처분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 위임장에서는 대만 생번에게 살해당한 미야코지마 주민을 ‘일본인’이라 명기함으로써 류큐왕국이 일본의 일부임을 기정사실화하는 한편, 대만 생번은 청나라 백성이 아니므로 대만 침공에 대해 청나라는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런 입장에서 메이지 일본은 대만 침공을 청나라에 통고(通告)하지도 않았다.

나가사키에 도착한 쓰구미치와 오쿠마는 대만 침공에 필요한 준비에 착수했다. 그 와중에 일본이 대만을 침공하려 한다는 사실이 영국·미국 등 서구 열강에 알려졌다. 영국·미국 등은 일본의 대만 침공을 반대했다.

그들은 대만을 청나라 영토로 간주했고, 그런 대만을 일본이 침공한다면 장차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들은 서구 열강이 주도하는 현재의 동북아 정세를 메이지 일본이 뒤흔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 영국과 미국은 대화를 통해 대만 문제를 해결하라고 종용했다.

싱거운 승리, 다음 목표는 淸 본토


▎한·일 고대사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왜곡은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와세다대 교수가 출발점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5월 2일, 쓰구미치는 먼저 해군과 육군 1000여 명을 네 척의 군함에 태워 대만으로 출동시켰다. 이어서 쓰구미치 자신도 5월 17일 대만으로 출동했다. 5월 22일, 대만에 상륙한 쓰구미치는 먼저 상륙한 부대와 합류해 본영을 사료항(社寮港)에 설치했다. 뒤이어 주변을 정찰하던 해군과 육군 병력 약 200명이 생번 수십 명과 조우해 총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생번 12명을 참수했는데, 일본군 역시 십수 명이 사상(死傷)당했다.

쓰구미치는 생번의 근거지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군대를 셋으로 나누었다. 좌군·우군 그리고 중군으로 구성된 침공군은 6월 1일부터 공격을 개시해 6월 5일 공격을 끝냈다. 대만 생번은 험준한 산을 근거지로 저항했지만 근대 무기로 무장한 침공군에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생번을 평정한 쓰구미치는 메이지 천황에게 상소해 향후 일본이 시행해야 할 세 가지 대책을 건의했다. 첫째 생번 지역 점령, 둘째 일본인 이민 장려, 셋째 대만 식민사업 개척이었다. 즉 쓰구미치는 생번 지역을 영토화하고 그곳에 실직 사무라이들을 대거 이민시킴으로써 실직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해소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이 같은 쓰구미치의 제안은 궁극적으로 청나라와의 전쟁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쓰구미치의 제안은 류큐왕국을 일본 영토로 기정사실화할 뿐만 아니라 대만 생번 지역에서의 청나라 주권을 무시하는 처사이기 때문이었다.

대만에서 주권을 무시당하고도 청나라가 가만히 있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쓰구미치가 그런 제안을 한 이유는 궁극적으로 청나라와 전쟁하겠다는 속셈 때문이었다. 쓰구미치로 대표되던 당시 일본 군부는 해외 팽창과 해외 전쟁을 통해 실직 사무라이들의 불만 해소뿐 아니라 군부의 발언권을 드높이고자 청나라와의 전쟁을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쓰구미치의 대만 침공을 통해 일본 군부의 발언권은 높아졌고, 군부의 발언권이 높아지는 만큼 메이지 일본은 침략 국가로 변해갔다.

사전 통보도 없이 대만을 공격당한 청나라에서는 당장 항의 사절을 파견했다. 6월 25일 도쿄에 들어온 청나라 사절은 1871년에 체결된 ‘청일수호조규’ 중 ‘소속방토를 침략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들어 엄중 항의했다. 청나라 사절은 대만은 청의 소속방토이고 생번은 ‘화외의 백성’이기는 하지만 청나라 백성이라고 주장하며 즉각적인 철병을 요구했다.

반면 일본 정부는 ‘화외의 백성’인 생번은 청나라 백성이 아니고, 그래서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 역시 청나라의 소속방토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결국 생번이 청나라 백성인지, 또 생번 지역이 청나라의 소속방토인지를 놓고 청나라와 일본은 전혀 반대의 입장을 표출한 셈이었다. 이 입장 차는 말로 해결되기 어려웠다.

7월 8일, 태정대신 산조와 이와쿠라 그리고 참의들은 대만에서의 철병 및 청나라와의 전쟁 여부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결론은 우선 청나라와 외교적으로 협상하되 협상 결렬에 대비해 전쟁을 준비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메이지 천황은 육군과 해군에 “청나라와는 화친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만약 청나라가 전쟁을 도발하면 교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육군과 해군은 대책을 세우라”는 내유(內諭)를 하달했다.

요컨대 일본 군부는 청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하라는 명령이었다. 이 명령에 따라 일본 전역은 전쟁 열기로 들끓어 올랐으며 전쟁물자 헌납과 자원 입대자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당시 40만 명에서 50만 명으로 추산되는 실직 사무라이가 청나라와의 전쟁을 요구하며 군으로 몰려든 결과였다.

이 같은 전쟁 열기 속에서 메이지 천황은 청나라와의 외교 담판을 위해 오쿠보를 ‘전권변리대신’으로 임명해 파견했다.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화전(和戰)을 알아서 판단하라”는 위임장을 받은 오쿠보는 9월 10일 베이징에 도착해 공친왕과 협상을 벌였다.

오쿠보와 공친왕의 입장은 기존의 일본과 청나라 입장과 다를 것이 없었다. 오쿠보는 대만 생번은 청나라 백성이 아니고 생번 지역도 청나라 방토가 아니라 주장했고, 공친왕은 생번은 청나라 백성이고 생번 지역 역시 청나라 방토라고 주장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주장이 이어지면서 오쿠보와 공친왕의 협상은 수차례에 걸쳐 결렬됐다. 10월 5일, 오쿠보는 협상 결렬을 선언하고 귀국하겠다는 최후의 카드를 꺼내기까지 했다. 오쿠보가 그대로 귀국하면 남는 것은 전쟁뿐이었다.

극적으로 피한 전쟁 그러나 뇌관은 커지고


▎임진년(1592년) 가을에 조선을 정벌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아 구키 요시타카가 가신 24명과 함께 조선 땅을 그린 지도. 일본은 이 지도를 보존하기 위해 메이지 5년(1871년) 4월 중순에 다시 모사(模寫)했다.
그런데 당시 청나라 지도자들은 일본과 전쟁할 경우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근대 군함이 부족했다. 그래서 겉으로는 큰소리쳤지만, 막상 오쿠보가 귀국하겠다고 협박하자 굴욕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공친왕은 일본군이 철수한다면 대만 생번에 피살당한 유족들에게 무휼(撫恤) 명목으로 배상할 뿐만 아니라 대만 침공을 문제삼지 않겠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은 류큐왕국을 일본 영토로 인정한다는 뜻과 더불어 군사적으로 일본이 우위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었기에 청나라에는 매우 치욕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친왕이 이런 제안을 한 이유는 그 정도로 청나라의 군사력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대만을 점령한 쓰구미치의 일본군은 생번이 아니라 풍토병으로 고전했다. 쓰구미치 자신을 포함해 거의 모든 일본군이 풍토병에 걸렸고 600명 가까운 병력이 사망했다. 쓰구미치는 이런 사정을 오쿠보에게 알리고 속히 철군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10월 31일 오쿠보와 공친왕 사이에 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약서가 교환됐다. 핵심은 일본군의 즉시 철병과 더불어 그 대가로 청나라는 무휼금 10만 냥과 전쟁비용 40만 냥 합 50만 냥을 일본에 지불한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의 대만 침공이 이렇게 종결되면서 일본에서 군부의 발언권은 더욱 높아졌다. 또한 군사력의 열세를 확인한 청나라는 군비 확장에 돌입했다. 일본과 청나라가 임시로 전쟁을 모면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오래가지 못하리라는 것은 이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계속)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708호 (2017.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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