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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길이 쓰는 ‘생명의 비밀’] 선사시대 이래 인류의 배를 채우다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
다슬기는 간(肝)에 좋고 해장에도 좋은 단백질 공급원… 강가, 해변의 조개더미(패총)는 다슬기, 조개를 주식으로 해온 역사의 산물

▎유리판을 박은 도구를 활용해 다슬기를 잡는 주민들.
올해 강원도 홍천강(洪川江) 지류에서 다슬기를 잡다 익사한 노인이 벌써 둘이나 된다니 분명 전국적으로 많은 이가 다슬기를 줍다가 변을 당하고 있을 터다. 다슬기가 주식(主食)으로 핥아 먹는 돌멩이에 낀 물이끼가 무척 미끄러워 사고를 부른다.

알고 보면 선사시대부터 우리와 함께 해온 다슬기다. 그들은 주로 강가나 해변에 삶터를 잡고, 물에서 조개(껍데기가 두 장임)나 다슬기 같은 고둥(껍데기가 배배 꼬임)을 잡아먹었다. 속살은 빼먹고 버린 조개더미(패총, 貝塚)가 그걸 말한다.

필자도 소싯적에 동네 앞 강에서 단백질 공급원으로 다슬기를 엄청시리 잡았다. 녀석들은 햇볕을 꺼리는 탓에 훼방꾼 해가 쨍쨍 쬐는 날이면 돌 밑으로 슬금슬금 숨어버리기에 그럴 때는 돌을 일일이 들어 잡아야 한다. 그러나 찌뿌듯 구름 낀 흐린 날에는 돌 밖으로 새까맣게 기어 나오니 한 마리씩 대소쿠리에 주워 담는다. .

그런데 녀석들이 발걸음 소리나 사람 기척에, 무당벌레가 풀 잎사귀에서 땅바닥으로 또르르 굴러버리듯, 돌덩이에서 기우뚱 죽은 척 누워버린다. 시샘이나 하듯 바람이 이는 날에는 물살에 강바닥을 꿰뚫어 볼 수 없다. 문명은 필요의 산물이라 했던가. 여기에 새로 개발한 신무기(?)가 등장했으니 둥그런 플라스틱 테 안에 맑은 유리판을 박은 도구다. 그것을 물 위에 살짝 올려놓으면 물결과 상관없이 바닥이 환히 들여 다보이니 녀석들을 싹쓸이한다.

다슬기는 연체동물(軟體動物), 다슬깃과의 민물고둥인데 우리나라에 8종이 좀 더러운 물에서도 산다. 다슬기는 크게 보아 껍데기(패각, 貝殼)가 기름한 것과 염주구슬처럼 둥근 것 두 무리가 있으니, 똥글똥글한 녀석들은 물살이 센 곳에 사는 종들로 여울물발에 씻겨 내려가지 않게 적응한 것이다.

그리고 다슬기란 표준 우리말이름(국명, 國名)이고, 지방마다 부르는 향어(鄕語)가 다 다르다. 내가 사는 봄내(春川)에서는 다슬기국을 ‘달팽이해장국’, 충청도 등지에서는 ‘올갱이해장국’으로 부르지 않는가. 다슬기 방언에는 소래고동·갈고동·민물고동·고딩이·대사리·물비틀·소라·배드리·물골뱅이 등이 있다.

그렇다. 국명(다슬기)이 없다면 이 고을과 저 마을 사람들끼리 말이 통하지 않을 뻔했다. 그리고 만일 세계 공통으로 쓰는 Semisulcospira gottschei(곳체다슬기)와 같은 학명(學名)이 없었다면 여러 나라 사람이 서로 소통하지 못할 것이고.

여기 가까운 예를 들어본다. 선배 조류학자 원병오(元炳旿) 교수께서 북한을 가서 그곳 학자와 어느 새(鳥) 한 마리를 놓고 대화를 나누는데, 그 새 이름이 서로 달라 도통 불통이었다. 그런데 학명을 들이대자 말이 통했다고 한다. 그리고 고등학교 생물교사를 오래하다가 말년에 김일성대학 교수가 된 원 교수의 부친 원홍구(元洪九) 박사도 북한에서 역시 조류를 연구한 분이었다. 남북 교류가 아주 캄캄하던 때 북의 아버지와 남의 아들이 새 다리에 매단 고리(bird ringing, bird banding)로 서로 살아 있음을 확인했고, 소식을 전했던 부자 이야기는 분단의 뼈아픔을 상징하는 유명한 일화(逸話)다.

생물에게는 국경이 없다!


▎다슬기는 햇빛을 꺼려 흐린 날에 활동한다.
그런데 춘천중앙시장 큰길가에 한 아주머니가 연중 다슬기를 팔고 있다. 다슬기가 값이 나가다 보니 약삭빠르게 눈을 중국으로 돌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 외래종이 간간이 우리 것과 교잡해 잡종이 생겨나는 것이 문제지만 어쩔 수 없다. 저 생물들에겐 국경이 없으니 어딘가에서 환경만 맞으면 거기에 눌러앉아 마냥 살아가니 말이다.

오늘은 집사람이 1㎏에 1만5000원을 주고 물색 좋은 다슬기를 사왔다. 고딩이를 대야에 쏟아 부어두니 꾸물꾸물 발을 댓 발씩 뻗어 뒤척거리며 헤집고 나온다. 그렇게 한나절이나 하룻밤을 재워 해감을 시킨다. 그러고는 함지박에 들어부어 사정없이 연신 싹싹 문질러 씻는다. 놈들은 화들짝 놀라 목을 몸 안에 집어넣고 입을 꼭 다물어버린다. 입(각구, 殼口) 입구를 갈색의, 흔히 ‘눈’이라 부르는 동그란 딱지(뚜껑, operculum)로 꽉 틀어막는다.

그러고는 물이 내리게 한참 동안 소쿠리에 담아둔다. 녀석들은 짬만 나면 빠끔히 목을 빼고, 꼼지락거리며 배좁은 틈새를 빠져나오려 든다. 제가 살던 강으로 가고 싶은 게지. 옆의 솥에는 물이 펄펄 끓고 있는 것을 모르는 다슬기들! 소쿠리를 가만히 들어 부글부글 끓는 솥에 단박에 확 쏟아 붓는다. 입을 벌린 채 죽어야 속살 까기가 쉽기에 그런다. 소금을 살짝 둘러 푹 삶아 새파랗게 우러난 쌉싸래하고 짭조름한 국물은 따로 따라두고, 다슬기를 까기 시작한다.

그런데 옛날 치아가 성한 어릴 때 이야기로, 쪼끄마한 녀석들은 껍질째로 아작아작 깨물어 바스러뜨려 먹지만 좀 큰 것은 입 반대쪽을 이로 깨부수고는 다슬기 입을 세게 쭉쭉 빨면 속살이 쑥 빠져나와 목구멍을 툭 때린다.

보통은 왼손에 다슬기를 거머쥐고, 오른손에 바늘이나 뾰족한 탱자나무 가시를 잡아 바늘, 가시를 다슬기 목에 콕 찔러 껍질만 뱅그르르 틀어버리면 내장까지 쑤욱 빠져나온다. 이런 솜씨를 능숙하게 부리려면 꽤나 긴 시간이 걸린다. 세상에 어디 쉽사리 거저 되고 호락호락 쉬운 게 있던가. 우리 집사람은 TV를 보면서도 쏙쏙 빼내는 능란한 솜씨를 자랑한다.

이렇게 수북이 모인 오동통한 다슬기 살점을 솥에 들어붓고 우거지와 된장을 풀어 뭉근히 끓이니 이게 간(肝)에 좋고, 해장에 좋다는 다슬기해장국이다. 다슬기를 먹었을 때 입에 씹히는 모래알(?) 같은 것은 다름 아닌 어린 새끼다. 또 먹고 난 그릇 바닥에 널려 있는 까뭇까뭇한 그것 또한 앳된 새끼들이렷다. 암수를 딱히 구별하기 어려우니 껍데기를 깨보아 안에 새끼 다슬기가 들었으면 그것이 암컷이요, 암컷 한 마리가 700여 마리의 새끼를 품는다.

권오길 - 1940년 경남 산청 출생. 진주고, 서울대 생물학과와 동 대학원 졸업. 수도여중고·경기고·서울사대부고 교사를 거쳐 강원대 생물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2005년 정년 퇴임했다. 현재 강원대 명예교수로 있다. 한국간행물윤리상 저작상, 대한민국 과학문화상 등을 받았으며, 주요 저서로는 <꿈꾸는 달팽이> <인체기행> <달과 팽이> <흙에도 뭇 생명이> 등이 있다.

201708호 (2017.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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