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미루의 어드벤처(3)] 초월 아닌 초탈의 여로 

평화의 감각을 얻다 

글·사진 김미루 예술작가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서 이뤄진 누드 작업의 어려움…팀북투를 떠나며 소박한 삶에 대한 경외감 되찾아

맨해튼에서 상실했던 삶의 요소들을 이곳에서 되찾은 듯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단순함, 소박함? 사막에서 내 뺨을 스치는 다양한 공기의 감촉이었을까? 동물들의 여운 있는 울음소리였을까? 맨발로 걸어갈 때 느끼는 모래의 감촉이었을까? 나를 둘러싼 사람들도 그렇게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내가 이 지구상에서 만난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인간적이었다.


▎사하라 패션 지붕에서 바라본 팀북투. 지역인들의 삶의 편린이 한없이 정겨웠고, 잊을 수 없는 내 삶의 한 지평이 됐다.
이 공허한 사막의 고도 팀북투에서 내가 겪어야만 하는 불편으로부터 초래된 긴장감과 피로는 내가 우리의 본거지로 지정한 한 작은 스낵 텐트에서 세계적인 음악가와 페스티벌 참석자들과 둘러앉아 노닥거릴 때는 깨끗이 사라졌다. 고맙게도 거기에는 항상 캠프 파이어가 타오르고 있었고 나는 그곳에서 마담 노릇을 했다. 그 원두막 주인은 카스텔(Castel)이라는 이름의 맥주도 팔았다. 아마도 페스티벌 조직팀이 어떻게 반입한 것 같은데, 원칙적으로 이 지역에서 알코올은 종교적 이유로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사막에서 캠프파이어 앞에 앉는다는 사실은 나의 생애에서 첫 경험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매우 마술에 가까운 매혹이었고 그 열기는 너무도 인간적이었다.

내가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또 홀로 페스티벌 주변을 여기저기 맴도는 시간 내내 나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감시의 눈을 잠시도 떼지 않는 한 뚜아렉 소년이 있었다. 이 22세의 뚜아렉 소년의 이름은 아바(Aba)였는데, 신둑이 이 소년에게 나의 보디가드 역할을 하도록 부탁한 모양이었다. 페스티벌에서 나를 감시케 하고 밤에는 사하라 패션까지 데려다주는 임무를 맡겼다. 아바는 이 의무를 잘 수행했다. 그 소년은 밤늦게까지 나를 기다렸다가 한밤중에 끊임없이 중첩된 모래언덕 위로 별이 쏟아지는 사막길을 동행해주었다.

모든 인간관계를 평등으로 몰아가는 사막에서의 삶


▎시험촬영을 위해 삼각대 위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있다. 이 사진들을 찍기 위해 낡은 뚜아렉 복장을 빌렸다. 나의 새 복장이 사진작품에는 영 어색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여정은 20분 거리였다. 나의 트라이포드를 내 텐트 속에 놓아주면 나는 그의 손에 20달러를 쥐어주었다. 그리고 굿나잇 인사를 했다. 그것은 진실로 오묘한 시나리오였다. 얼굴을 터번으로 가린 시동이 나를 따른다는 것 자체가 나를 어색하게도 식민지 귀족으로 만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그것은 분별 있는 신둑의 배려였다. 나는 그곳 실제 정황에 관해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하여튼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아바는 내가 믿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친구가 되어갔다. 사막은 결국 모든 인간관계를, 각자의 배경이나 경제적 지위와 무관하게 평등으로 몰고 간다. 순간순간 닥치는 허무의 느낌은 운명공동체라는 의식 속으로 모두를 휘몰아간다. 서양문화에 깔려 있는 평등의식은 이러한 사막 문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초월자 의식도 강렬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페스티벌의 마지막 밤, 나는 아바에 대해 매우 의구심을 가지게 되는 공포의 순간을 경험했다. 1월 15일 새벽 4시쯤이었다. 티나리원 밴드가 그들의 피날레 공연을 마쳤을 때, 나는 페스티벌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모두 작별인사를 했다. 그중에는 인도계 캐나다 국적의 여가수인 키란과 뉴욕에서 온 그녀의 기타리스트 친구 데이비드도 있었다. 아바는 그때까지 내가 활동하고 있었던 그 스낵 원두막 주변에서 잠자고 있었다. 나는 이제 이곳을 떠날 준비가 되었을 때, 아바를 깨웠다. 그랬더니 한 낡은 짐칸 트럭이 왔다. 아바는 그 트럭운전사에게 가더니 한참 뭐라고 속삭였다. 그러더니 아바는 나에게 급한 듯 빨리 오라고 손짓하는 것이다. 나는 당황하여 카메라를 급히 챙겨서 달려갔다. 그랬더니 두 청년이 나를 붙잡아 트럭 뒤쪽으로 올려주었다. 그들은 나보고 트럭 난간을 꽉 잡고 얼굴을 숨기라고 말했다.


▎사막의 캠프파이어에는 참여한 사람들의 혼을 한 곳에 모으는 독특한 마력이 있다.
차가 출발하자, 스낵 원두막의 주인이 내가 트럭에 올라탄 것을 알아차리고 그의 손을 공중에 흔들면서 나에게 달려오면서 외쳤다. “노, 노, 노! 지금 차 타고 가는 것은 위험해요!” 그의 부정적 손짓과 무관하게 차는 멀어져 갔고, 나는 너무도 피곤에 지쳐 있었기 때문에 곯아떨어질 지경이었다. 달리는 트럭은 몹시 흔들렸다. 그래서 내가 잡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단단히 잡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나는 짐칸 뒤쪽에 아바와 함께 타고 있었고, 옆에 젊은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그리고 나이 든 두 사람이 앞쪽에 있었다. 달리는 차에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원두막 주인이 달려오면서 외쳤던 소리가 뇌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순간 겁에 질리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이 나를 납치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들을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아바는 어떨까? 아바가 날 납치하지는 않겠지. 설마! 그가 돈이 궁할 수도 있잖아? 아까 왜 그토록 오래 쑥덕거렸지? 왜 그렇게 모두 비밀스럽게 굴지? 왜 내 얼굴을 가리고 파묻으라고 했지? 그 순간 나는 팀북투에서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여기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된 사람들처럼 붙잡혀 몇 년을 썩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무시무시한 생각들이 나의 뇌리를 스칠 때, 갑자기 나는 아바가 내 등쪽으로 심하게 기대고 있다고 느꼈다. 분명 중력의 방향이 내 쪽으로 쏠리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래도 아바의 몸짓이나마 겁에 질린 나에게 잠시 딴 생각을 하게 했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나는 정말 알 수가 없었다. 혼미스러운 가운데 나는 어떤 행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내가 아바를 밀쳐내기 전에, 혹은 무슨 짓을 꾸미고 있냐고 야단치기 전에 트럭이 멈췄고, 우리는 내렸다. 그러곤 오래된 관습을 반복하듯이 아바는 나를 완벽한 침묵 속에 나의 텐트까지 데려다주었다.

페스티벌이 끝나고 다음날 아침, 나는 매우 늦게 일어났다. 그래서 오찬에나 참석할 수 있었다. 지금거리는 모래는 이제 더 이상 나에게 문제 되지 않았다. 그 오찬은 정말 성찬이었다. 진짜 가지 요리와 토마토소스까지 있었으니까. 신둑의 친척이 고기를 쭉쭉 찢어 나에게 건네주었을 때 나는 주저 없이 그것을 오른손으로 받아 직접 입안으로 쑤셔 넣었다. 이때에 나는 이미 그들의 음식을 그들의 방식으로 먹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배가 고픈 상태로 살았기 때문이다. 오찬이 끝나자, 아바는 나를 그가 빌린 오토바이에 싣고 시내 구경을 시켜주었다. 1327년에 완공된 학문의 전당이며 사원인 징게레베르 모스크(Djinguereber Mosque)를 보았다. 그 장엄한 설계는 아부 에스 하크 에스 사헬리(Abu Es Haq es Saheli)라는 건축가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말리제국의 무사 황제 1세(Musa Ⅰ of Mali)는 그에게 황금 200㎏ 을 설계비로 주었다고 한다.

낙타 타고 간 두 시간, 가장 위대했던 여행


▎중세 이슬람학자들의 소중한 원고가 소장돼 있는 박물관이 있는 징게레베르 모스크. 그 건물의 담을 따라 나 있는 길이 정겹다.
거기에는 소중한 원고 박물관이 있었는데, 내가 떠난 후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로 사라졌다. 인류의 문화유산은 어려운 가운데도 그 귀중한 것들이 어떻게든지 살아남았는데 최근의 야만은 기존 어떠한 야만보다도 더 악랄하다. 이념화 된 문명의 야만이 최악인 것이다. 아바는 유럽의 탐험가들 이름이 새겨진 흙벽돌집도 몇 개 보여주었다. 팀북투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도시이고, 인류의 르네상스에 기여한 그 소중한 원고들도 기억에 남는 추억이었지만 나에게 가장 아슬아슬했던 체험은, 아바가 모는 낡은 오토바이 뒤에 타고 작은 모래 골목길들을 쏜살같이 달리는데 팀북투의 꼬마들이 소리치며 깔깔대며 환희 속에 길을 피하는 모습을 목도하는 것이었다. 한물간 구식 오토바이는 덜덜거렸다. 나는 아바의 허리를 껴안지 않고 안장 뒤에 앉은 채 내 몸의 밸런스를 맞추어야 했던 것이다.

우리가 사하라 패션으로 돌아왔을 때 낙타 몇 마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신둑은 나에게 내가 스스로 몰 수 있도록 매우 훈련이 잘 됐고 유순한 흰 낙타 한 마리를 제공했다. 지두(Jidou)라는 이름의 낙타조련사는 고삐를 잡는 법과 뚜아렉 안장에 앉는 바른 자세를 가르쳐주었다. 뚜아렉 안장은 아라비아 안장과 그 방식이 매우 달랐다. 지두는 매우 친절하고 온화한 사람이었다. 키가 매우 컸다. 그리고 나를 언제나 오묘한 액센트의 불어로 “위대한 뚜아렉(le graan’ Tuareg)”이라 불렀다. 신둑은 나에게 굿바이를 하면서 내가 사막의 지두네 집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다행스러운 일은 아바가 따라온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아바만 옆에 있으면 그래도 안심이 되었다. 아바는 나에게 딴 소년들이 그러하듯 보석을 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해가 떨어지고 나서야 여행을 시작했다. 내 얼굴은 항상 터번으로 가려져 있어야 했다. 테러리스트 때문만은 아니었다. 경비대 사람들이 지두와 아바가 나를 납치해 간다고 오인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낙타를 타고 나는 서쪽으로 두 시간가량 갔다.


▎내 보디가드 아바가 원고 박물관의 문을 열고 있다.
이 두 시간이야말로 내 인생에서 가장 나의 존재의 상식적 시공을 뒤바꾸어 놓은 위대한 여행이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야말로 광대한 허공, 동방인들이 태허(太虛)라고 부른 우주의 기운, 내가 일찍이 체험해본 적이 없는 황홀한 은하의 빛줄기 속을 나는 끊임없이 헤매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외부적 공간이 아닌 참다운 자기와의 만남의 황홀경이라는 각성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한없이 펼쳐지는 광활한 내면 속으로 나는 낙타와 함께 들어가고 있었다. 도시의 삶에서 망각된 참된 내면의 자아가 그 광활한 허공 속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캠프에 왔을 때, 지두는 그의 거실에서 나와 아바를 접대했다. 그의 거실이라 해야 나뭇가지와 지푸라기 매트로 모래 위에 둘러친 반원형의 가림막일 뿐이었다. 우리는 그곳 불 주변으로 동네사람들과 같이 앉았다. 네 명의 아이들이 주변에서 뛰놀았다. 어른들은 타마쉑(Tamasheq)이라는 베르베르어족(Berber al nguages)에 속하는 뚜아렉 토착어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 언어는 고대 페니키아 문자에 영향을 준 상당히 태고의 보수적 발음체계를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자물쇠가 닫힌 여행가방을 돌려가면서 누가 이것을 열 수 있는지 상담하고 있었다. 다이얼로 된 자물쇠 번호를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또 한 사람은 아주 구식의 노키아 핸드폰을 물에 빠뜨려 작동이 안 된다고 투덜거리자, 옆에 있던 사람이 그것을 뜯어서 불에 말리고 있었다. 지두의 부인이 기름과 토마토소스에 볶은 짧게 자른 스파게티 한 쟁반을 내왔다. 그것을 요리하는 데 사용한 물의 냄새가 쾌적하지 못했지만 스파게티는 따끈했고 나의 입맛을 당겼다. 나는 가차없이 쟁반에 손을 담갔다. 배불리 먹고 난 후에 나는 기름기 있는 손을 비누 없이 씻었다. 뚜아렉 사람들은 식사 전과 후에 반드시 손을 씻는다. 주전자를 쏟아 손을 씻는데 필터가 있는 특별한 용기 위에 붓는다. 그 물은 반드시 다시 사용된다.

성인 남자들은 동물의 뼈로 만든 파이프로 담배를 피웠다. 한 시간가량 그렇게 빈둥거리다가 아바와 나만 남고 모든 사람이 사라졌다. 지두 거실의 한켠에 놓여 있는 매트 위에서 나는 잠을 청했다. 아바가 건네준 때에 절어 딱딱해진 낡은 모포 한 장을 덮었다. 군불이 죽자 공기는 얼음장으로 변했다. 낮과 밤의 온도 차이가 그토록 극심했다. 나는 추워 벌벌 떨면서 나의 시각을 매몰시킨 황홀한 별들을 경이롭게 바라보고 있는데, 아바가 그의 작은 휴대전화에서 울리는 한 노래를 듣고 있었다. 아바는 그 노래만 들으면 최근에 자기를 버리고 간 여자 친구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팀북투의 젊은이들이 우리가 경험하는 똑같은 식의 연애에 상심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새삼 느껴보았다. 아바가 좋아하는 노래는 레바논의 유명한 남자가수 노래였는데 가사는 이런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내 마음을 뭐라 말해야 좋을까? 그걸 치료할 약은 없어. 네가 내 가슴속에 있었지. 가슴에서 사라진 그 공허를 뭐로 치료할 수 있을까? 그대를 부르다 부르다 지쳐 내 목소리만 허공에 사라져간다.”


▎원고 박물관 소속의 가이드가 우리에게 소장된 원고들을 친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소장품은 모두 진품이었으나 박물관이 이슬람 극단주의자 반군들에 의해 파괴돼 원고 대부분이 파손됐다.
완벽한 뚜아렉 차를 만드는 과정은 하나의 제의(祭儀)


▎투어리스트 맵 상에 제6번 장소로 표시된 독일 탐험가 하인리히 바르트(Dr. Heinrich Barth, 1821~65)의 집 앞에서 아이들이 놀이를 즐기고 있다. 바르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프리카 탐험가로 기억된다.
다음날 아침 일찍 지두가 와서 다시 불을 만들어주었다. 아바와 나는 머리 꼭대기로부터 발끝까지 모포로 감싸고 있었다. 서서히 잠이 깨면서 나는 다양한 신비로운 문양이 모래 위에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뒷다리가 긴 저빌쥐(gerbils), 도마뱀, 딱정벌레들이 지나간 자취였다. 태양이 올라오자마자 대지는 다시 달아올랐다. 아침은 내가 가져온 비스킷과 인스턴트 커피로 때웠다. 그러자 다시 이웃들이 왔다. 지두는 숯불 위에 전형적인 청색 차 주전자를 놓았다. 차는 뚜아렉 문화의 핵심 중의 하나다. 사회생활이 대부분 차 마시기를 공유하면서 이루어진다. 아주 강렬하고 쓴, 그렇지만 끈적끈적할 정도로 짙고 단, 그리고 소주잔 같은 유리컵에 공중 높이 긴 주전자 주둥이로부터 솜씨 있게 쏟아 부을 때 거품이 올라오는, 완벽한 뚜아렉 차를 만드는 공력은 하나의 제식적 과정이었다. 한자리에서 그들은 보통 세 잔을 마신다. 그리고 하루에 3번이나 4번 차를 마신다. 그 짙은 카페인과 설탕이 사막에서의 하루를 견디게 만들고, 또 배고픔을 완화시킨다. 그 찻잎은 모두 홍차 계열인데 중국산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것 대부분이 다 중국산이다.

차를 마신 후, 나는 지두가 그의 염소들을 먹이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는 도시에서 가져온 골판지 박스를 적신 후 대야에 넣고 잘게 찢었다. 그리고 목화씨 껍질을 첨가해 사료를 만들었다. 염소는 대부분 흰색이었는데 가시나무로 둘러쳐진 울타리 속에서 밤을 지낸다. 지두가 울타리 문을 열자마자 염소들이 쏟아져 나와 그 종이상자라서 인쇄까지 된 도시의 산물을 너무도 맛있게 너무도 열심히 씹어 먹는 것이다. 그리고는 좋아라고 주변을 헤매었다. 골판지도 나무 펄프로 만든 것이고 탄수화물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소중한 생명의 식량이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염소는 비쩍 말랐지만 건강해 보였다. 그 염소가 정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털이 매우 짧았다. 나는 그런 종자는 처음 보았다. 우리가 항상 리어카에 내버리는 골판지가 염소의 귀한 양식이 되고, 젖이 되고, 살이 된다는 것은 경이로웠다. 나는 그늘에 앉아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사뚜아렉의 차문화. 이웃들이 모여 서로 담소하면서 느긋하게 쉰다.
사막에서 시간은 빨리 지나간다. 막상 아무 일도 하지 못했는데…. 때로는 꼬챙이를 들고 다니면서 마른 낙타 똥을 수집했다. 낙타 똥은 나무가 없을 때는 귀한 불쏘시개로 쓰인다. 때로는 지두의 부인이 금속단지를 긁는다든가, 옥외에서 물을 끓이곤 하는 가사잡일을 앉아서 지켜보았다. 물은 큰 플라스틱 황색 항아리에 담겨져 있는데, 물이 없을 때는 아이들이 엎어놓고 드럼으로 쓴다. 어느 샌가, 낙타를 데리고 갈 시간이 됐다. 우리는 나의 사진 작업을 위해 그림과도 같이 펼쳐진 깔끔한 모래언덕으로 가야만 했다. 신둑이 나와 함께 가기 위해 오는지 안 오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무도 나에게 자세한 일정을 말해주지 않았다. 아바는 내가 낙타와 함께 누드로 서서 사진 작업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가 이 어려운 여행을 기획한 주목적이 바로 이 사진을 찍기 위함인데, 신둑이 나의 작업을 원만히 진행시키기 위해 나타나주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나는 걱정에 사로잡혔다. 내가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목격한 아바는 무슨 사정인지 전부 자기에게 얘기해달라고 졸랐다. 주저주저하다가, 나는 나의 작품에 관해 설명했다. 그리고 나의 누드가 자연과 인간이 원초적으로 융화된 모습에 관한 것이지 성적인 감성의 문제가 아니라고 역설했다. 아바는 아무 문제없다고 말하면서 지두에게도 설명했다. 그들의 반응은 지극히 냉정했다. 그들은 단순히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우리를 믿으시오. 아무 문제도 없소. 타인에게는 말하지 않을 것이오.”

“옷 입어! 옷 입어! 빨리! 빨리!”


▎묵묵히 점심을 준비하는 지두의 부인. 정숙한 여인상이다.
모래사막 언덕에서 사진을 찍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다. 내가 사진의 전경으로 쓰는 모래 공간은 아무 자국도 없는 처녀지의 모습이어야만 했다. 그리고 내가 사진 속의 오브젝트가 어느 곳에 있어야 할지를 정확히 지정하는 것도 어려웠다. 사막에서 제한된 시간 내에 완벽한 사진을 얻어내는 데 관한 나의 실제 경험이 턱없이 부족했다. 해는 급속도로 하강하고 있었다. 사진 작업의 예비단계로서 감을 잡기 위해 나는 옷을 입은 채 흰 낙타를 타고 황색 낙타를 탄 아바를 따라가는 나의 모습을 여러 장 찍어보았다. 그러던 중 신둑이 결국 나타났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셔터 버튼을 누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자아, 이제 우리는 주요 작업을 위해 보다 은밀한 공간을 찾아나서야 했다. 신둑은 웬일인지 모두 자리를 비키라고 명령했다. 이때 모두를 데리고 갔더라면 문제가 오히려 단순했을 것이다.

신둑은 내가 원하는 지점으로 낙타 두 마리를 끌고 가 낙타를 꿇어앉게 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안장을 벗겨달라는 나의 청을 거절했을 때, 나는 공포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안장이 있으면 사진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안장은 혼자서 쉽게 벗길 수 있는 그런 작업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가고 없었다. 신둑은 안장 없이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고 투덜대기만 했다. 도대체 내가 왜 왔는데? 돈을 얼마를 주었는데? 사람들은 왜 쫓아 보내놓고 내 작업만 망치려 드는가? 허파가 터지도록 욕지거리가 쏟아져 나올 지경인데, 나는 부드럽게 몇 마디 더듬거렸을 뿐이다. “으음, 음, 저 말이죠, 안장 안 벗기면 모든 게 나무아미타불이거든요.” 결국 그는 투덜거리며 버겁게 안장과 고삐를 다 벗겼다. 이때다 하고 나는 잽싸게 옷을 벗어버리고, 낙타 옆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낙타 곁에서 다양한 포즈를 취하면서 셔터를 누르게 했다. 낙타들은 유순하기 그지없는 탁월한 모델이었다. 그들은 나와는 정반대로 옷을 벗는 것이 너무도 행복했던 것이다. 나는 또 몇 개의 좋은 구도를 셀프타이머를 활용하여 찍었다. 그런데 모래언덕 꼭대기에서 망보고 있었던 신둑이 갑자기 소리치는 것이다: “옷 입어! 옷 입어! 빨리! 빨리!” 나는 황급히 달려가 옷을 입어야 했다. 이때 오토바이 부대가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속옷과 바지를 후다닥 입는 나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들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 모든 겉옷을 뒤집어 쓰기에 여념이 없었다. 내 머리카락은 헝클어졌고 정신은 혼미했다. 모터바이크를 타고 현대식 점퍼를 입은 몇몇의 건장한 사람이 내가 있었던 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신둑은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뭔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이 누구인지, 신둑이 그들에게 뭘 말했는지 일절 알 수가 없었다. 왜 그토록 고적한 사막 한가운데 오토바이를 탄 사내들이 갑자기 나타났는지를 나는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란 흰 낙타 등에 올라타 얼굴을 다시 파묻고 아무 말 없이 신둑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신둑은 그곳 사막으로부터 팀북투로 직행했다. 그는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을 그의 옛 성자 친구집에서 머물 것이라고 한 약속이 취소됐다는 이야기조차 해주지 않았다.


▎지두의 이웃사람이 동물뼈로 만든 파이프로 담배를 피우고 있다.
팀북투에서의 마지막 날은 우울과 정적과 애착과 후회가 교차하는 씁쓸한 느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늦은 아침, 나는 아바에게 그의 오토바이를 타고 시내를 더 둘러보고 싶다고 청원했다. 그랬더니 아바의 사촌이라는 아이가 나에게 보석을 비싼 가격에 사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나는 무시해버렸다. 찬물로 샤워를 한 후에 나는 휴대용 컴퓨터에 어제 찍은 사진을 옮기느라, 옷 입느라 좀 시간이 걸렸다. 내가 시내를 둘러보고자 했을 때 아바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결국 사하라 패션의 울타리 속에 갇히고 말았다. 신둑이 이 울타리를 절대 넘어가지 말라고 나에게 명령했다. 그에게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아프리카 역사에서는 유명한 뚜아렉 내전(Tuareg Rebellion of 2012)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염소들이 골판지 아침식사를 즐기고 있는 모습을 지두가 지켜보고 있다.
뚜아렉 반란 족속들은 흑인 이슬람 정권인 말리 정권에 대해 아자와드(Azawad)라 불리는 말리 북부 지역의 정치적 독립을 원하고 있었다. 반란군이 이미 가오(Gao) 지역의 메나카(Menaka)를 점령했다는 라디오 소식이 들려왔다. 사헬리안 말리(Sahelian Mali, 사헬은 사하라와 수단 사바나 사이의 특수 기후지대를 일컫는 생태지리학적 개념)의 동부 지역은 오랫동안 뚜아렉 반군들의 거점이 되어왔다. 정체 불명의 반란군이 소동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뚜아렉의 전체 민간인구가 다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사실 뚜아렉 민간인 대부분은 반란과는 관계가 없었지만, 인종 정체성 때문에 반군으로 쉽게 휘몰릴 수가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정체 불명의 반란군은 아자와드해방민족전선(MNLA, the National Movement of the Liberation of Azawad)의 멤버였다. 이들은 리비아 카다피의 용병으로 훈련받은 뚜아렉 전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이 당신의 예술을 이해할 리 있겠소?”

첫 라디오 방송이 있었을 때, 신둑은 반란이 아자와드해방민족전선(MNLA)에 의한 것인지, 극단적인 이슬람 마그레브 알카에다(AQIM:Al-Qaeda ni the sI lamic Maghreb, 아프리카 북부의 IS 비슷한 극단적 조직이다. 뚜아렉과는 별개의 반란군인데, 뚜아렉반군들은 이들과 연합함으로써 본래의 뚜아렉민족주의의 아이덴티티를 상실했다)에 의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관할 아래 외국 여행객을 두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걱정했다. 내가 2012년 1월 17일 현재, 팀북투에 남은 단 하나의 여행객이라고 신둑은 말해주었다. “미루! 당신은 이곳 사정을 잘 모르오. 아바조차도 잘 몰라요. 조용히 안에만 있어야 했어요. 당신이 아바하고 지두에게 당신의 사진 작업에 관해 이야기한 것, 그 자체가 잘못이오. 사람들이 말하고 있지 않소? 왜 사람들이 갑자기 황량한 사막에서 작업하고 있는 당신을 보러 왔겠소? 소문이 나는 것이 나에겐 불리하오. 나는 돌봐야 할 가정이 있소. 사람들이 당신의 예술이 자연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할 리가 있겠소? 그들은 스캔들만 지어낼 뿐이오.”

신둑은 추장처럼 근엄하고도 가혹한 매너로 나에게 말했다. 자신이 일찍 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와 충분한 대화를 하고 일정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아바와 지두를 돌려보냈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는 반성이 전혀 없었다. 나는 모든 게 커뮤니케이션 부족에서 생긴 것이라고 불쑥 말해버리고, 자리를 떠버렸다. 나는 홀로 또다시 눈물을 터뜨렸다.

한참을 울고 나서 되돌이켜 보니, 팀북투에서 막판에는 나 스스로 너무도 편안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 견딜 수 없도록 불편하게만 느꼈던 삶의 이질감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와~ 정말 이곳이 좋구나!” 하고 용서와 화해로 변했다. 맨해튼에서 상실했던 삶의 요소들을 이곳에서 되찾은듯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단순함, 소박함? 아마도 사막에서 내 뺨을 스치는 다양한 공기의 감촉이었을까? 동물들의 여운 있는 울음소리였을까? 맨발로 걸어갈 때 느끼는 모래의 감촉이었을까? 질병과 더러움의 공포를 근원적으로 상실했을 때, 나는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평화와 아름다움의 감각을 획득했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도 그렇게 친근하게 느껴졌다. 외모상의 차이나 삶의 방식의 차별을 넘어서서 그들은 같은 동질적 인간일 뿐이었다. 내가 이 지구상에서 만난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인간적이었다.

예를 들면 아바가 그의 두 살 난 어린 조카를 데리고 있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완전히 인간적 감성의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아바가 애를 껴안고 있는 모습, 그리고 조카의 뺨에 부드럽게 뽀뽀를 해주는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그 솜씨가 아름다웠다. 그것은 도저히 문명세계에서 그의 나이의 남성에게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올 수 있는, 그러한 몸짓이 아니었다. 그 태도는 내가 사귀는 남성의 삶의 자세와 극심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는 돈 많은 집의 순진한 막내둥이이긴 했으나 동물이나 어린애에 대해 경멸감을 표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근원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석양의 해가 떨어지기 전에 신둑은 나보고 보여줄 게 있다고 옥상으로 올라오라고 손짓했다. 낙타 떼의 한 캐러밴이 팀북투를 떠나고 있었다. 그들은 타우덴니 소금광(the Taoudenni salt mines)에서 캐온 암염판과 교환한 수수, 차, 담배, 그리고 기타 생활용품을 가득 싣고 다시 타우덴니로 돌아가는 대열의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소금광까지 돌아가는데 사하라 사막의 모래길을 스무 날은 가야 한다. 이 캐러밴은 사하라 사막에서 아직도 살아남은 거의 유일한 대상전승이다. 타우덴니는 팀북투에서 북쪽으로 700㎞나 떨어져 있는 고대의 사해 유적인데, 아직도 사람들이 손으로 그 호수 바닥에서 대리석판과도 같은 암염을 떠내고 있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건조한 사막 지역의 한복판이 옛날에는 푸른 바다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의 변화는 참으로 무상한 것 같다.

동네의 모든 남자와 소년들이 화톳불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나는 앉아서 물끄러미 신라 금관 문양 같은 화염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중년의 무어(Moor)인이 모래 위에 아랍어로 뭔가를 썼다. 쏭하이(Songhai) 소년이 그 글씨를 흉내 내어 또 썼다(무어인은 베르베르인에 속한다. 베르베르인은 아랍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뚜아렉과는 전혀 다른 아랍 방언을 말한다). 신둑은 염소의 뒷다리 허벅지를 하나 가지고 왔다. 그 허벅지를 타고 있는 숯불 위에 직접 놓았다. 모든 사람이 고기가 익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열심히 풀무질(상하 운동하는 나무와 포대로 만듦)을 해댔다. 뒷다리가 속까지 잘 익었을 때 아바가 무딘 칼로 고기를 잘게 찢었다. 모두 달려들어 한 점씩 잡고 그것을 수북이 쌓인 타우덴니 암염가루에 찍었다. 나도 몇 점 불에 그슬린 고기를 먹었다.

모든 것에 익숙해진 순간에 팀북투를 떠나다


▎요르단에서 찍은 작품.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들과 막내아들을 안고 있는 아버지의 부성애가 잘 나타나 있다.
고기가 다 끝나버리자, 신둑은 뼈를 깨물었고, 그 속의 골수를 빨아내어 먹었다. 나는 불 주변에 앉아 화끈히 달아오른 열기에 젖어 아바가 차를 만드는 것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는 때때로 나를 쳐다보면서 웃었는데, 웃음에는 성인끼가 있었다. 그가 웃을 때 완벽하게 가지런히 자리 잡은 하얀 이빨의 광채가 그의 검은 피부에 대조적으로 빛났다. 화톳불을 바라보는 것은 선승의 좌선과도 같다. 무념의 시간은 너무 빨리 지나간다. 모두가 작별의 인사를 나눌 때가 됐다. 모두 잠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아바도 시내의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

다음날 아침, 신둑과 미란다가 날 공항까지 바래다주었다. 신둑은 ‘영광과 감사의 말’을 건넸다. 다음번에는 반드시 나를 사하라 사막의 가장 신성한 곳으로 데려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은 이제 나에겐 투어리스트가 아니요. 한 가족이지요.” 나도 진심 어린 감사의 말을 전했다.

이제 겨우 팀북투의 삶에 진짜로 익숙해진 순간에 바로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아이러니가 퍽 우울하게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그때 정치 상황이 악화되기 직전에 그곳을 안전하게 탈출한 그 사태는 정말 천우신조의 행운이었다. 긴 여정 끝에 뉴욕에 도착했다. 나는 정말 지쳐있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잊지 않고 실행한 단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나는 나의 남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 그만둬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야!” 나는 그 남자와 꿈꾸었던 모든 인생의 설계를 말끔히 백지화해버렸다.

김미루 -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2006년 졸업, 미술학 석사 MFA). 이스트 리버 미디아에서 2년 동안 그래픽 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뉴욕타임스>와 <에스콰이어> 매거진에서 ‘베스트 앤 브라이티스트(Best and Brightest)’ 예술인으로 뽑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포토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201708호 (2017.07.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