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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풍기의 선물의 文化史(8)] 문사(文士)들의 품격 있는 벗 

오래전부터 한반도에서 종이 제작, 태종 때 조지서(造紙署) 설치… 새로운 ‘지식의 세계’ 항해 떠나려는 순간의 긴장과 기대 담겨 

김풍기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2014년 10월 경희궁에서 열린 ‘제21회 조선시대 과거제’ 재현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답안지에 정성껏 글을 작성하고 있다.
도시와 농촌 지역의 차이가 있기는 하겠지만, 불과 40~50년 전만 하더라도 이 땅의 시골에서는 종이가 귀한 대접을 받았다. 중·고등학교의 시험지나 교육 자료는 철필로 긁어서 만드는 등사본이었는데, 그것을 인쇄하는 종이는 조악하기 이를 데 없는 수준이었다.

한쪽 면만 조금 반들거려서 그곳을 이용하라는 뜻인지는 알겠지만, 쌓여 있는 종이 뭉치를 들춰 보면 너무 얇은 나머지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기까지 했다. 학생 입장에서 그나마 이런 종이라도 몇 장 우연히 얻게 되면 두툼한 공책 한 권이라도 되는 양 기분이 좋았다. 문방구라는 개념도 별로 없던 시골의 풍경은 아마도 대부분 이러했으리라.

지금도 기억나는 것 중의 하나는 어른들의 종이 사용 능력이다. 좋은 종이를 구하기 어려웠으므로 담뱃갑에 들어 있던 은박지는 요긴하게 사용됐다. 아마도 습기를 차단하는 방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주의 한 공방에서 전통 방식으로 제작된 한지(韓紙)가 건조 과정을 거치고 있다.
용도야 어찌 됐든 이 은박지의 표면은 반짝이는 은빛 재질이어서 글씨를 애초에 쓸 수 없는 매끈매끈한 알루미늄 포일 같은 상태였다. 그렇지만 그 이면은 연필과 볼펜으로 뭔가를 쓰고 그릴 수 있는 재질이었으므로 훌륭한 메모지 역할을 했다.

애연가였던 가친(家親)께서는 늘 은박지를 모아 네모 반듯하게 자른 뒤 깔끔하게 정돈해두곤 하셨다. 그 용도는 온갖 종류의 메모를 하는 것이었는데, 아주 작고 가는 글씨로 빼곡하게 종이를 채웠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 글자를 읽어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작았다.

어떤 메모는 어디서부터 읽어야 하는지, 어느 쪽으로 읽어야 하는지 요령부득일 정도로 복잡했다. 그러나 가친께서는 그 메모를 누추한 사랑방 한쪽 구석에 고이 두고 수시로 확인하거나 메모를 하셨다. 훗날 이중섭이 담뱃갑 속 은박지 종이에 그린 그림을 보면서 새삼 어린 시절을 떠올렸던 적이 있다.

종이를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을 이야기하면 요즘 청년들이야 “이게 무슨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냐”고 할지 모르겠다. 눈만 돌리면 종이는 쉽게 구할 수 있고, 궁상을 떨지 않아도 다양한 스타일의 메모지나 공책을 구할 수 있다. 엄청난 양의 종이가 매일 소비되고, 그 소비를 충당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나무들이 잘려 나가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지만 잘려 나가는 나무는 내 눈에 보이지 않고 풍족한 양의 종이는 내 눈에 보이니, 소비의 규모가 커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고려시대 이후 꾸준히 수요 증가


▎이탈리아 밀라노 과학박물관 종이관에 기증된 ‘파브리아노’의 종이 제작 기계.
시대를 거슬러 근대 이전으로 가보면 종이는 더욱 귀한 물건일 수밖에 없었다. 종이 만드는 방식을 생각해보면 많은 양을 생산하는 것이 불가능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이를 사용하는 것은 신중하게 따져야 했고, 종이를 소유하는 것 자체가 문자를 소유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가졌으며, 그것은 동시에 권력을 소유하는 것에 필적하는 것이었다.

다소 과도한 해석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집집마다 종이를 쌓아놓고 사용하는 집안은 흔치 않았다. 제지법이 발달하게 되는 조선 후기에 와서도 여전히 일반 민가에서 종이를 쌓아놓고 풍족하게 쓰는 집안은 거의 없었다.

조선시대에 작성된 간찰(簡札)을 보면 종이의 활용을 짐작할 수 있다. 내용을 쓰다가 종이가 부족하다 싶으면 행과 행사이의 공간을 이용하기도 하고 편지지의 여백을 활용해 쓰기도 한다. 물론 어떤 차례로 어디부터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우리는 이런 사례에서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종이가 귀한 대접을 받았으리라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물건이 귀한 대접을 받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사회적으로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하면 값이 올라가고 희소성을 인정받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고려시대부터 종이 제작과 관련된 기록들이 자주 나타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이전 시기의 종이도 일부 문서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한반도 지역에서 종이를 제작한 연대는 상당히 위로 올라갈 것이다.

특히 고려 이후 종이의 수요는 꾸준히 증가 추세에 있었고, 문사를 자처하는 유학자들의 시대인 조선으로 접어들면 그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종이의 수요는 국가적인 문제로 대두됐다. 태종은 1415년(태종 15) 조지서(造紙署)를 설치한다. 원래 이곳에서는 관청에 필요한 종이를 생산했었다.

조지서는 1882년(고종 19)에 폐지될 때까지 467년간 존속하면서 조선의 종이 문제를 총괄했다. 그 세월 동안 조지서가 늘 하나의 목표로 활동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창경 교수에 따르면 이 관청은 초기에는 제지공인(製紙工人)들을 배속시켜 종이를 생산하는 일을 주로 하다가 17세기 접어들면서 종이 생산량이 급격하게 늘어나자 지전(紙廛) 상인들과 결합해 종이의 유통에 깊이 간여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 들어 종이의 수요가 급증하고 그에 따라 민간에서도 종이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므로 조지서의 역할이 조선 전기보다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종이 생산 기술의 발달로 생산량이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조선시대 지식인들에게 종이는 쉽게 구해서 풍족하게 사용할 수 있는 물품은 아니었다. 물론 지체 높고 부유한 집안에서야 다량의 종이를 미리 구매해 놓고 마음껏 썼겠지만, 일반 양반가에서는 아끼고 아껴야 할 물건이었다.

17세기에 활동했던 장유(張維, 1587~1638)가 김상헌(金尙憲, 1570~1652)에게 보낸 시를 보면 당시 종이가 얼마나 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청음공이 담황색 종이 40폭을 선물로 보내주셨기에 시를 지어 감사드린다(淸陰公以緗牋四十幅見餉 詩以謝之)’는 제목의 시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그동안 칩거해 곤궁과 근심 속에서 지내며, 밤낮으로 문을 닫고 보잘것없는 글이나 썼습니다. 집안이 가난해 붓과 종이를 댈 수 없어, 해진 천과 낡은 종이도 늘 남아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공께서 선물 보내신 뜻 얼마나 지극한지, 책상에 앉은 제 얼굴에 생기가 돌게 하셨습니다. 붓과 먹도 외롭지 않게 되었으니, 시문도 문득 격조가 높아지겠지요.”(邇來屛居飽窮愁, 日夕閉戶箋虫魚. 家貧不能給筆札, 敗縑故紙恒無餘. 感公此餽意何極 令我几案生顔色. 毛君墨生德不孤, 詩律文心頓增格; 張維.<계곡집(谿谷集)> 卷26)

작품 속에서 보이는 장유의 표현이 그의 현실을 적실(的實)하게 드러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거기에는 선물을 보내준 김상헌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 때문에 자신의 처지를 한껏 낮추려는 태도가 전제돼 있기 때문이다. 전쟁과 흉년의 여파로 사회적 삶의 질이 낮아지기는 했겠지만 장유의 살림살이가 종이를 대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표현에서 우리는 당시의 사대부들이 종이를 구하기가 녹록지 않았으리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종이 선물이 선비의 얼굴에 생기를 돌게 만든다는 표현은 ‘문사(文士)’로서의 자부심이 종이라는 물품과 함께 어울려 선물의 가치를 드높이고 있다.

이 시기 종이의 가격은 어느 정도였을까?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어서 지금의 물가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만기요람(萬機要覽)>(1808년 편찬)에 따르면 각 관청이 공물을 받아들이면서 종이 값을 기록한 것이 있다. 아마도 18세기 후반의 물가를 반영하는 것이리라.

값도 종이의 종류나 지질, 사용처, 납품하는 상인이나 지역 등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몇 가지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봉상시(奉上寺)에서 삼남 지역과 강원도 지역에서 공납을 받는 종이는 저상지(楮常紙) 1권당 백미 2말5되를 지불했고, 관상감(觀象監)에서는 같은 지역에서 받아들이는 일과지(日課紙)에 대해 1권당 7말5되에서 7말가량을 지불했다.

지금이야 쌀값이 한껏 떨어져서 귀한 줄을 모르지만, 조선시대 쌀값은 훨씬 높았다. 일반 민가에서 2말5되에서 7말 이상의 백미를 지급하고 종이 1권을 구입한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외국에서도 인기 높았던 ‘메이드 인 조선’


▎새 학기를 맞은 초등학생들이 문방구에서 공책을 고르고 있다.
종이 1권이 20장을 묶은 것이니, 장당 가격을 따져봐도 높은 가격이었다. 이 정도의 가격을 지불하고 종이를 쌓아놓고 쓸 수 있는 집이 꽤 있기는 했겠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조선의 사대부들 사이에 종이를 선물하는 것은 물건이 가지는 의미 외에도 현실적 효용 가치를 인정받고 있었다.

조선의 종이는 품질이 우수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특히 중국에서 조선 종이의 성가(聲價)는 높았다. 명나라의 문인 도륭(屠隆, 1543~1605)이 편찬한 것으로 전하는 <고반여사(考槃餘事)>에 따르면 고려의 종이는 “비단처럼 희고 질기며 글씨를 쓰면 발묵(發墨)이 아주 좋으니 이는 중국에서는 없는 것으로 기이한 물건”이라고 쓴 바 있다.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반환한 <휘경원원소도감의궤>.
또한 <태종실록>에는 명나라의 황제가 조선 종이를 구하는 데 “매우 깨끗하고 빛이 고우며 아주 가늘고 흰 종이”라는 조건을 단 것이었다. 당시 중국이 생각하던 조선 종이의 최고 품질의 조건이 이러했을 것이다. 이 같은 맥락으로 조선의 종이를 우수하다고 품평한 중국의 기록이 다수 존재하는데, 그만큼 조선 종이가 중국 지식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중국은 늘 조선 종이를 공물로 요구했고, 이에 응해 조선은 다량의 종이를 중국으로 보내곤 했다. 처음부터 공물로 보내는 종이의 양이 많았던 것은 아니다. 명나라와의 사신 교류가 본격적으로 이뤄지는 태종 때가 되면 그 수량이 상당한 정도로 많아진다.

1407년(태종 7)에는 중국의 요구에 의해 순백지(純白紙) 8000장을 보냈고, 1408년에는 다시 1만 장을, 세종 1년에는 순백후지(純白厚紙) 1만8000장을 보낸 기록이 있다. 세종 때는 중국에 은을 공물로 보내는 대신 후지(厚紙) 3만5000장을 보내기도 했다. 그만큼 중국에서의 조선 종이의 성가는 나날이 높아졌다.

근대 이전의 기록에서 종이를 선물한 단편적인 기록은 무수히 많다. 간찰이나 일기류의 글에서 특히 많이 보인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조선 후기 연행록(燕行錄)을 보면 종이가 선물로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점이다.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일신수필)에 보면 의무려산 인근 북진묘(北鎭廟)에 들렀다가 우연히 만난 도사에게 선물을 주는데, 부채와 청심환과 종이였다. 그 덕분에 하인들이 뜰의 나무에서 과일을 마구 따 먹어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그는 여러 사람과 많은 필담을 나눴는데, 거기에 쓰려고 가져갔던 종이를 일부 선물로 제공했을 것이다.

미래를 꿈꾸게 했던 공책 선물


▎1980년대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교사가 학생에게 붓글씨를 가르치고 있다. 종이가 귀했던 시절이라 신문지를 활용해 연습을 했다.
그보다 10년가량 늦게 연행을 다녀온 김정중(金正中)의 <연행록>에서는 가게 주인에게 바가지를 쓴 일을 기록했다. 점심을 먹은 뒤 가게 주인이 방값을 내라고 조르기에 백지(白紙) 30속(束), 부채 30자루, 청심환 20알을 내주었지만 가게 주인이 펄펄 뛰면서 한바탕 난리를 쳤다. 그래서 종이 5속, 부채 5자루를 더 주면서 이익이나 탐을 내는 그들의 습속(習俗)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내용이 나온다.

김창업(金昌業)의 <연행일기>에서는 영원성을 지나면서 밤에 자신을 찾아온 노파의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다. 밤이 깊어 잠자리에 들었지만 방에 불을 때는 연기가 자욱한데다 말 울음소리 때문에 잠을 못 이루고 있던 차에, 69세 된 어떤 노파가 찾아와서 자기 부모의 고향이 한양이라고 말한다. 전쟁 때 끌려왔다가 청나라 땅에 눌러 살게 됐는데, 자기는 이곳에서 태어났지만 약간의 조선말을 할 줄 안다고 하는 것이었다.

김창업은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조선말을 듣는 것이 반가워서 노파에게 약과·부채와 함께 종이를 선물로 준다. 이전의 연행사들도 이 노파를 만났다고 하니, 아마도 노파는 연행사절단에 조선의 김치와 장을 만들어 팔았을 것이고 거기서 받은 선물은 팔아서 다른 용처로 사용했을 것이다. 이처럼 조선 후기 사신단의 일행이 돼 청나라를 다녀오면서 남긴 기록인 <연행록>에는 중국 사람들에게 선물로 가장 많이 선택되는 물품이 바로 부채·청심환·종이 등이었다.

프랑스가 병인양요 당시 약탈해 갔던 외규장각 소장 도서의 존재가 우리에게 알려진 뒤, 1993년 9월 처음으로 반환된 책이 <휘경원원소도감의궤(徽慶園園所都鑑儀軌)>(上) 1책이었다. 이 책이 임대 방식을 빌려 우리에게 돌아와 공개됐을 때 많은 사람이 종이의 품질에 대해 감탄했던 것을 기억한다. 종이는 마치 어제 막 생산된 것처럼 희고 매끄럽고 품격이 있었다. 왕실용으로 생산된 것이니 얼마나 좋은 품질의 종이였겠는가마는, 이 책을 통해 우리나라 제지 기술의 높은 수준이 여실히 증명됐던 것이다.

품질 좋은 종이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대량 생산으로 나아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197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새 학년이 시작될 때 가장 흔하면서도 최고의 선물은 공책 선물이었다. 무슨 과목의 공책으로 사용할까를 고민하며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것들을 펼쳐 보곤 했다.

아무것도 없는 순백의 공책에 수많은 꿈을 기록하리라 마음먹었고, 새로운 지식의 세계로 항해를 떠나려는 순간의 긴장과 기대가 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흰 종이에 괘선만 그려진 공책은 그렇게 즐거움을 줬다.

이제는 너무도 흔한 공책이 됐지만, 더 이상 귀한 물건 취급을 받지 못하는 종이 공책과 함께 나의 삶도 세월과 함께 비루(鄙陋)한 처지로 변한 것은 아닐까 돌아본다.

김풍기 -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책과 노니는 것을 인생 최대의 즐거움으로 삼는 고전문학자. 매년 전국 대학교수들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올해의 사자성어’[2011년 엄이도종(掩耳盜鐘)]에 선정되는 등 현실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는다. 저서로 <옛 시에 매혹되다> <조선 지식인의 서가를 탐하다> <삼라만상을 열치다> 등이 있다.

201708호 (2017.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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