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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정신의 미학(17)] 문무를 겸한 가사 시인, 노계(蘆溪) 박인로 

서민 애환을 노래한 영원한 자유인 

송의호 기자 yeeho@joongang.co.kr / 사진 공정식 프리랜서
귀천과 법도에 거리낌 없이 전쟁의 참혹함 고발… 반백 나이에 무인 생활 접고 도학의 길로 들어서

▎도계서원의 중심은 구인당(九仞堂)이다. 도(道)에 이룸에 조금도 소홀히 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다. 노계박인로기념사업회 박영환 사무국장이 서원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1970년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됐다. 이제 47년이 지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7년 대선 공약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처음 발표했다. 당시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선 철도는 12시간이 걸렸다.

경부고속도로는 429억원을 들여 2년5개월 만에 완공됐다. 소요 시간은 5시간으로 단축됐다. 2010년 한 해 자동차 3억4000만대가 이 도로를 이용했다. 경부고속도로가 한국 교통의 대동맥이 된 것이다.

그 뒤에는 희생이 있었다. 고속도로 노선은 둘러가기보다 지름길을 선호한다. 효율을 따지느라 어느 구간은 지맥을 끊었다. 또 어떤 곳은 도로가 누대로 내려온 마을을 관통해 두 동강 내기도 했다. 이런 마을의 불편은 국가 발전이라는 명분 앞에 묻힌다. 그 과정에 인문적 가치는 더러 토막이 났다.

이제 고속도로가 지나면서 소란해지고 삭막해진 우리 가사문학을 꽃피운 터전을 돌아본다.

6월 27일 경북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로 떠났다. 영천 도심을 벗어나 경주 방면 도로를 따라가면 북안면이 나온다. 여기서 고지리 지하도를 지나 언덕을 오르면 2차로 왼쪽으로 자동차의 요란한 질주음과 함께 쭉 뻗은 길이 펼쳐진다. 경부고속도로다. 2차로는 고속도로를 따라 이어지다가 이윽고 한적한 들녘으로 들어선다.

들이 끝나는 곳에 연못과 함께 야트막한 산속 도계서원(道溪書院)이 나온다. 조선 중기의 무신이자 가사문학의 새 경지를 연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 1561∼1642) 선생을 기리는 공간이다. 사단법인 노계박인로기념사업회 박영환(70) 사무국장이 안내를 맡았다. 노계의 13대손인 박 국장은 삼성그룹 비서실에서 퇴직한 뒤 조상 현창 일에 뛰어들었다.

자동차 매연에 검게 덮인 시비 ‘조홍시가’


서원 앞에 ‘노계시비’라 새긴 큰 바윗돌이 서 있다. 뒷면에 친숙한 시조 한 편이 보인다.

盤中(반중) 早紅(조홍)감이 고아도 보이나다
柚子(유자) 안이라도 품엄 즉도 하다마는
품어 가 반기리 업슬 새글노 설워 하나이다


교과서에서도 나오는 박인로의 ‘조홍시가(早紅歌)’다. 1601년 41세 노계가 한음 이덕형이 내 놓은 홍시를 보고 지은 시조다.

소반 위에 홍시가 곱게도 보이는구나
유자는 아니지만 가슴속에 품고 돌아갈 만도 하다마는
품어 가도 반길 이 없으니 그를 서러워하노라.


감칠맛 나는 언어 구사다. 시가 새겨진 바윗돌이 유난히 검게 덮여 있다. 박 국장이 그 연유를 설명했다. 시비는 1984년 6월 도천리 경부고속도로 서울 방향 쪽에 처음 세워졌다고 한다. 그때부터 자동차 매연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2003년 봄 시비는 그을음을 고스란히 덮어쓴 채 이곳으로 옮겨졌다.

조홍시가를 접하면 노계를 문장이 빼어난 효심 가득한 서생으로 떠올릴지 모른다. 그러나 실상 노계는 이때까지 문사(文士)와는 거리가 있었다. 칼을 차고 활을 쏘는 무인이었다.

앞서 1598년 38세 노계가 지은 ‘태평사(太平詞)’를 읽으면 당시 그의 신분이 더 분명해진다. 임진왜란에 이은 정유재란이 일어난 이듬해다. 그해 늦겨울 부산에 주둔해 있던 왜적들이 밤을 틈타 도망을 쳤다. 경상좌병사 성윤문은 이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인솔해 부산으로 달려간다. 그는 현장에서 열흘을 머문 뒤 본영(本營)으로 돌아온다.

당시 박인로는 좌병사의 막하(幕下)에 있었다. 병서(兵書)를 탐독했던 그가 적의 정황을 분석하면 좌병사는 무릎을 치곤했다. 성윤문은 이튿날 박인로에게 사졸을 위로하는 노래를 짓게 한다. 그게 ‘나라히 偏小(편소) 야 海東(해동)애 려셔도…’로 시작하는 태평사다.

도계서원은 임진왜란에 의병으로 종군하고 무과에 급제한 뒤 52세까지 인생 전반을 무인으로 지낸 문사를 기리는 공간이다. 종가에는 실제로 무인 박인로가 생전에 쓰던 칼이 전했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말기 종가가 그 칼을 녹여 낫을 만든 게 두고두고 아쉽다는 게 기념사업회 측의 이야기다.

도계서원은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65년 만인 1707년(숙종 33) 도계사(道溪祠)로 출발했다. 하지만 사당은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됐다. 도계사가 세워진 곳은 노계가 태어나고 자란 괴화마을 동북쪽 풍덕산 자락이었다. 1970년 건립된 지금의 도계서원은 여기서 1.5㎞ 떨어져 있다.

39세 늦은 나이에 무과 급제하고 수군으로


▎<노계집> 권3의 4쪽 목판. 노계가 한음(이덕형)이 머물던 용진강을 찾아가 지은 가사 ‘사제곡(莎堤曲)’을 새겼다.
노계의 성장기는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1704년 정규양이 쓴 노계의 일대기인 행장(行狀)에 “명달여신(明達如神)하여 가르치지 않아도 자능통해(自能通解)했다”는 부분이 나온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났다는 것이다.

32세(1592) 청년기에 난세를 만난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다. 행장은 당시를 이렇게 정리했다. “임진년에 의분을 느껴 붓을 던지고 융마(戎馬) 사이를 출입했다. 사람들이 이르길 ‘이 사람은 무략(武略)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공은 빈손에 병사도 없었다….” 융마란 군대에서 쓰는 말과 수레를 뜻한다. 전쟁 통에 한가히 붓만 들고 있을 수 없어 의병이 된 것이다. 박인로는 영천지역 의병장 정세아의 별시위(別侍衛)로 활약한다.

후손인 박영환 국장은 “여러 기록으로 보아 노계 선조는 체구는 작았지만 몸이 날렵하고 무예를 익혀 칼을 잘 쓴 것으로 보인다”며 “당시 영천성을 탈환하는데 앞장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전장에서도 늘 붓과 먹을 차고 다니며 그때부터 문(文)을 겸했다고 한다.

태평사를 지은 이듬해인 1599년 박인로는 아예 무과(武科)에 급제한다. 39세 늦은 나이에 군문(軍門)에 들어 수문장, 선전관 등을 거쳐 조라포(거제도) 만호로 도탄에 빠진 백성을 달래고 구휼했다.

1605년 박인로는 45세에 부산을 방어하는 통주사(統舟師)로 임명된다. 그는 전투함인 판옥선으로 남쪽 변방에 다다라 대마도를 바라보며 ‘선상탄(船上歎)’이란 가사를 짓는다.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쫓고 손빈이 다리 베이는 형을 당하고도 방연을 사로잡았는데 왜놈을 어찌 두려워하겠는가 하는 결의이자 탄식의 노래다.

1612년 52세 노계는 인생을 대반전시킨다. 그는 종6품 만호 직에서 물러난다. 무인의 길을 마감한 것이다. 전란이 끝나면서 나라 위해 큰싸움 할 일은 이제 줄어들었다. 그러면서 나라에서는 무신을 업신여기는 풍조까지 생겨났다.

노계는 미관말직을 던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홀연히 후회하며 말한다. “남아의 사업은 지극히 큰 것이어서 문장이 오히려 나머지의 일이 되거늘 하물며 궁마(弓馬)에 있어서랴?” 활 쏘고 말 타는 무(武) 대신 더 중요한 도학(道學)의 길을 가기로 다짐한 것이다. 노계는 이어 “부자(夫子,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는데 어찌 나이가 많다고 스스로 한계 지을 것이냐”며 공자, 맹자의 언행을 기록한 책과 주자가 주석한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안동 도산서원을 찾아가 이황의 유풍을 흠모하기도 한다. 선비이자 문사로서 인생 후반을 연 것이다.

아쉬운 것은 스승이 없는 점이었다. 가난 때문에 노계는 배움을 아예 마음에 두지 못한 것 같다. 대신 오직 서책에 빠져들어 먹고 잠자는 걸 잊었다. 거기다 한밤중 성현의 기상을 묵상하며 향을 사르고 꿈속에서 ‘성(誠)·경(敬)·충(忠)·효(孝)’ 네 글자를 얻어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는다.

노계는 스승은 없었지만 그래도 뜻을 나눈 거유(巨儒)들은 있었다. 한음 이덕형,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 지산 조호익 등을 만나며 성리학의 세계로 깊숙이 빠져들었다.

노계는 특히 동갑인 한음과 지위고하를 뛰어넘어 각별했다. 한음은 노계의 문재(文才)를 일찌감치 알아보고 국사(國士)로 예우했다. 여기서 가사가 나온다. 1611년 영의정을 그만둔 한음은 용진강(지금의 북한강 양수리) 동쪽에 은거하며 노계와 회포를 풀었다. 노계는 한음을 대신해 민심을 노래한다. 그게 ‘사제곡(莎堤曲)’이다. 또 한음은 노계에게 산촌 생활의 형편을 묻는다. 그 화답이 ‘누항사(陋巷詞)’란 가사다.

영의정과 종6품 신분 뛰어넘는 문학적 교유


▎밖에서 본 도계서원. 1707년 도계사(道溪祠)로 처음 설립된 뒤 대원군 때 훼철됐다가 1970년 현재 모습이 됐다.
교유는 손자대로 이어진다. 한음의 손자 이윤문은 1690년 노계의 고향 영천군수로 임명된다. 여기서 잊힌 사제곡을 노계의 손자 박진선을 통해 다시 듣는다. 이윤문은 가사를 오래도록 전하고 싶어 사제곡·누항사와 단가 4장을 목판으로 새긴다.

또 여헌과는 입암에 노닐면서 시조 입암 29곡을 읊고 76세에는 경주 산내의 자연을 사랑해 노계곡에 머물며 ‘노계가(蘆溪歌)’를 짓는다. 노계는 최근까지 67수의 시조와 11편의 가사가 확인됐다. <국역노계집>을 펴낸 김문기(67) 경북대 명예교수는 “시조와 가사가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사대부 풍을 벗어나 사실적인 묘사에 바탕을 둔 서민문학을 꽃 피워 정철·윤선도와 함께 3대 시가 작자로 평가 받는다”고 말했다.

도계서원 앞 연못을 지나 왼쪽 대랑산 자락에는 노계의 묘소가 있었다. 여름이라 풀이 무성했다. 비석은 앞면에 ‘노계박선생지묘’ 뒷면에 부인이 숙부인 이씨라고 새겨져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노계의 장인이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설 때문이다. 그의 행장에는 “이순신(李舜臣)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1녀를 낳았다”고 적혀 있다. 본관도 덕수 이씨로 나온다. 충무공은 노계보다 16년 연장(年長)이며 실제 두 딸이 있었다. 나이나 무신 이력 등을 감안하면 더욱 그럴싸하다. 동행한 박 국장은 “어렸을 때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었지만 아직 확인된 건 없다”고 말했다. 앞으로 고증이 필요한 수수께끼다.

노계는 스승이 없었지만 이렇다 할 제자도 없었다. 도계서원을 나오면서 박 국장이 덧붙였다. 서원이 들어선 자리 등 도천리 일대에는 노계를 기리는 용도의 땅(위토)이 곳곳에 있다고 했다. 토지대장을 보면 이들 땅이 대부분 서너 명, 많게는 10여 명 이름으로 기부돼 있다는 것이다. 모두 노계를 추앙하는 후배들이라고 한다. 당대에는 그의 글을 챙기는 제자조차 없었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그를 따르는 후학이 많아졌다는 방증이다.

도계서원 아래에는 영천시가 건설 중인 가사문학관(484.74㎡)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기념사업회는 문학관 조성을 앞두고 노계와 동시대를 살았던 셰익스피어 생가 등을 벤치마킹했다. 최근 영국 현지를 둘러본 박재열(68) 경북대 명예교수는 “옛것을 그대로 둔 게 인상적이었다”며 “여기도 옛것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노계의 문학정신을 되살리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학관 주변에 선상탄 등 작품을 형상화하는 공원을 꾸미고 올레길 정도를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스승도 제자도 불명한 노계와 셰익스피어


▎영천지역 유림들이 노계 선생을 기리고자 도계서원에 모였다. 위패는 서원 안 입덕묘(入德廟)에 모셔져 있다.
노계와 셰익스피어는 닮은 점이 있었다. 나이는 노계가 세 살 위다. 박 교수는 “두 사람 모두 학벌이 뚜렷하지 않고 자기 작품을 정리하지 않았다”고 했다. 스승과 제자가 불명한 것도 유사하다는 것이다.

어리고 迂濶(우활) 할산 이내 우해더니 업다
吉凶禍福(길흉화복)을 하날긔 부쳐 두고
陋巷(누항) 깁푼 곳의 草幕(초막)을 지어 두고
風朝雨夕(풍조우석)에 석은 딥히 셥히 되야
셔홉 밥 닷홉 粥(죽)에 烟氣(연기)도 하도 할샤
설데인 熟冷(숙냉)에 뷘배쇅일 뿐이로다
生涯(생애) 이러 하다 丈夫(장부) 을 옴길넌가
安貧一念(안빈일념)을 을망졍 품고 이셔
隨宜(수의)로 살려 하니 날로조차 齟齬(저어) 하다


가사 누항사의 시작이다. 누항은 누추한 마을을 뜻한다. 현대어로 풀면 뜻이 분명해진다.

“어리석고 세상 물정 어둡기는 나보다 더한 이가 없도다/ 길흉화복을 하늘에 맡겨두고/ 누추하고 깊은 곳에 초가를 지어놓고/ 바람 부는 아침과 비 내리는 저녁에 썩은 짚이 땔감이 되어/ 세 홉 밥과 다섯 홉 죽을 만드는데 연기가 많기도 하구나/ 덜 데운 숭늉으로 고픈 배를 속일 뿐이로다/ 살림살이가 이렇다 한들 대장부의 뜻을 바꿀 수 있겠는가/ 안빈낙도 한 가지 생각을 적을망정 품고 있어/ 옳은 일을 좇아 살려 하니 갈수록 뜻대로 되지 않는다.”

노계는 이렇게 당대의 어떤 문사보다 가난했다. 정철·윤선도가 사대부 금수저였다면 박인로는 궁벽한 산골에서 소를 빌려 밭을 갈아야 하는 흙수저였다. 그러면서도 가난과 이웃을 원망하지 않고 안빈낙도(安貧樂道)했다. 삶 속에서 성·경·충·효를 실천궁행할 줄 알았다. 그게 가사가 되고 시조가 됐다.괴화마을에는 노계의 종가가 있었다. 서원에서 종가까지 가는 길에는 영천시가 감나무를 심고 있었다. 노계의 대표작 ‘조홍시가’를 조경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종가는 전통 한옥이 아닌 평범한 현대식 건물이다. 노계의 13대 종손 박정환(72) 씨는 종가 옆 토담으로 둘러쳐진 옛 모습을 간직한 사당으로 안내했다. 거미줄이 쳐진 사당에는 노계의 위패만이 남아 있었다.

종가를 나와 이번에는 노계가 태어나 살았다는 생가를 찾았다. 가사 누항사가 탄생한 바로 그 무대다. 자동차는 경부고속도로 밑으로 뚫린 길을 지나 건너편 마을로 들어섰다. “본래는 종가도 생가도 같은 마을이었습니다. 고속도로가 나면서 두 동강이 났어요. 조금만 노선을 물렸더라면 가사문학의 터전이 그대로 남았을 텐데….”

생가로 추정되는 터는 이제 남의 손으로 넘어가 있었다. 마을 뒷산 자락에는 노계를 기리던 도계사 터가 보였다. 옆으로는 북안천이 흐른다. 북안천을 낀 산 아래에는 노계가 가사를 짓던 조그만 창작 공간이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 ‘노계 박인로 선생 별묘유허지’라는 표석이 세워졌다. 북안천은 최근 하천을 정비하느라 돌망태를 설치하면서 그 많던 갈대들이 사라졌다. 장소가 다르긴 하지만 노계(蘆溪)의 노는 갈대를 뜻한다. 고속도로가 뚫리고 하천이 정비되면서 문화유산은 이렇게 훼손돼버렸다.

노계 박인로는 초야에 묻혀 지낸 문무를 겸비한 가난한 선비였다. 그러면서도 귀천과 법도에 거리낄 게 없이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고 서민의 애환을 노래한 진정한 자유인이었다. 그래서 토막 나고 사라지는 흔적은 그의 얽매이지 않은 시혼(詩魂)을 지우는 것 같아 더욱 애틋하다.

[박스기사] 꿈에서 주공의 ‘誠敬忠孝’를 하사받다 - “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어찌 여기에 뜻을 두지 않으리오”


▎도계서원 앞 대랑산 자락에 자리 잡은 노계의 묘소. 아버지 박석의 묘 아래에 위치해 있다.
노계 박인로는 성리학을 독학하면서 성현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려 애썼다. 그 절절함이 담긴 글이 꿈에 주공(周公)을 만났다는 ‘몽견주공기(夢見周公記)’다. 주공은 주나라(周, BC1111경∼BC255)를 세운 무왕의 아우로, 형이 죽은 뒤 어린 조카 성왕을 극진히 모시며 각종 문물제도와 예악을 정비했다. 공자는 그를 후세 중국 황제와 대신들이 따라야 할 성현으로 꼽았다. 꿈 이야기는 이렇다.

노계는 어느 날 <논어(論語)>를 읽다가 공자가 “내가 주공을 다시 꿈에 보지 못하였다”는 대목에 이른다. 그는 순간 책을 덮고 탄식하며 읊조린다. “평생 동안 주공을 경앙하여, 다만 한 번 꿈에서 얼굴 뵙기 원하네….” 노계도 공자가 흠모한 주공을 뵙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던 것이다. 간절하면 이루어진다던가.

이윽고 노계는 창문에 기대어 슬며시 잠이 든다. 그는 별안간 곤룡포를 입은 이가 단정히 앉아 있는 궁전에 이른다. 노계는 절하며 이름과 거처를 아뢴다. 주공이 기뻐하며 “동국은 본래 예의의 나라라 했는데 은태사(殷太師: 기자 조선을 세운 기자를 가리킨다)의 유풍과 여운이 지금도 상존하는가”하고 물었다.

주공이 말한다. “나는 부덕하나 하늘에 힘입어 나라가 800년 유지하도록 했다…어찌 문왕이 창안하고 무왕이 계승한 공이 아니리오.” 그리고는 묻는다. “꿈속에서 중니(仲尼, 공자의 자)가 항상 나를 찾았는데 이제 볼 수 없으니 어찌 된 일인가?”

노계가 “중니는 주나라 영왕 21년에 태어나 경왕 41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일찍이 중니가 ‘나는 꿈에 다시 주공을 보지 못한다’고 말한 것을 들었고 지금 주공께서 또 말씀하시니 비로소 성현의 마음이 화융 회통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주공이 답한다.

“천 년 뒤에 나를 아는 자는 중니뿐이다.” 그리고는 노계를 향해 “그대가 나를 방문한 것은 부지런함이니 내가 무엇을 줄까?”라고 물었다. 마침내 주공은 붓으로 ‘성경충효(誠敬忠孝)’ 네 글자를 써주면서 “그대가 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어찌 여기에 뜻을 두지 않으리오?”라고 한다.

노계가 글을 받고 사례하기를 “평생 성현의 가르침을 원했지만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요체를 들었으니 실로 행운입니다. 비록 불민하지만 이 말을 일삼고자 합니다.” 주공은 다시 성명(性命)의 뿌리인 <주역(周易)>을 공부할 것도 권했다. 노계는 “후일 다시 와서 배우기를 청한다”며 주공에게 절하고 물러났다. 문득 깨니 곧 꿈이었다.

- 송의호 기자 yeeho@joongang.co.kr / 사진 공정식 프리랜서

201708호 (2017.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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