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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셰프의 물건] 미쉐린 스타 셰프 진진(津津) 왕육성의 ‘칼의 노래’ 

“칼을 무서워할수록 칼에 베인다” 

전수진 월간중앙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사진 전민규 기자 jun.minkyu@joins.com
칼은 요리의 기본 중의 기본, ‘工欲善其事 必先利其器(장인이 되려면 도구부터 잘 다듬어라)’ 모토로 삼고 마음에 항상 새겨

주방은 전쟁터다. 불이 타오르고, 칼이 춤춘다. 셰프는 주방의 총지휘관이다. 불을 다루고, 칼을 놀린다. 셰프가 쓰는 도구가 곧 그의 무기다. 월간중앙이 셰프의 도구, 셰프의 물건에 주목하는 이유다. 셰프는 일용할 양식을 작품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예술가다. 이들의 오늘을 빚어낸 ‘물건’에 대한 얘기를 전하는 ‘셰프의 물건’ 시리즈를 시작한다.


▎한국 중식계의 대부로 통하는 왕육성 사부가 아끼는 중식도. 같은 칼이라도 어떤 금속을 섞어 만들었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등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
첫 주인공은 중식계에서 모르면 간첩이라는 왕육성(63) 사부다. 지난 7월 말왕 사부는 서울 서교동에 있는 자신의 레스토랑 진진(津津)에서 기자를 맞았다. 그의 옆엔 요리 인생과 함께해 온 크고 작은 칼 예닐곱 자루가 가지런히 올려져 있었다.

까다롭기로 이름난 미식 평가지 <미쉐린(Michelin·미슐랭) 가이드>는 지난해 진진에 별 한 개를 부여하며 이런 평을 내놨다. “합리적인 가격에 수준 높은 중식을 제공한다. 문전성시를 이루니 예약은 필수.”

시작은 미약했다. 중국 허베이(河北)성 톈진(天津) 출신의 주물기술자였던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면서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벌어야 했다. 고향인 경북 안동에서 짜장면 배달로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양복점·편물가게부터 라면 판매대리점까지 여러 업계를 돌았지만 결국 요리로 돌아왔다. “창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컸기 때문이다.

“요리가 좋다기보다는, 글쎄요. 싫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아요. 무엇보다 가장 큰 매력은 비교적 적은 금액으로 나만의 가게를 낼 수 있다는 거였습니다. 창업을 하기 위한 기술로써 요리를 배운 셈이죠.”

그 기술의 정점은 ‘칼’이었다. 주방 칼 중에서도 유독 무뚝뚝하고 무거운 네모진 중식도(中食刀)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기술이 핵심이다. 주방에서 칼은 권력이다. 아무에게나 칼을 잡을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다. 중식 주방은 세 축으로 이뤄진다. 칼을 쓰는 칼판, 면을 뽑는 면판, 그리고 음식을 볶고 지지고 찌는 불판. “칼판에 서는 건 사부들만 할 수 있어요. 헬퍼(조수)들에겐 사부들이 다 써서 무뎌진, 버리기 직전의 칼만 주어졌어요. 그나마도 수가 모자라서 머리 회전이 빠른 이들은 칼을 몰래 숨겨두고 자기만 쓰곤 했었죠.” 사부들의 칼에 손을 대는 게 허락되는 유일한 때가 있다. 칼을 갈 때다. 주방 보조로서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다.

11개월 만에 칼판에 서다


▎왕육성 사부는 호텔 중식당을 오랜 기간 경영했다. 보다 많은 이에게 호텔식 중국 요리를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하고 싶어 2015년에 중식 레스토랑 ‘진진’을 열었다. 미쉐린 가이드의 별로 인정을 받은 진진은 매일 밤 문전성시를 이룬다.
칼 가는 데도 왕 사부는 나름의 ‘철학’이 있다고 했다. “앞면을 10번 갈았으면 뒷면도 꼭 10번을 동일하게 갈아야 해요. 반드시 일정한 각도로 갈아야 하고요. 칼을 갈 때 마음이 번잡하면 칼날이 날렵하지 않고 갈아낸 단면이 둥글어집니다. 이걸 ‘배가 나온다’고 표현해요.”

자기만의 칼을 갖는 데는 보통 5년이 걸리지만 왕 사부는 11개월 만에 ‘막내 사부’로 인정받고 칼판에 섰다. 이후 26개월 만에 부주방장이 됐다. 초고속 승진이다. 하지만 진정한 고생은 칼판에서 시작됐다. 칼판에 선 뒤부터 칼에 베이는 게 일상다반사가 됐다.

“칼질에 능숙해지려면 칼을 무서워하면 안 됩니다. 칼을 무서워하지 않으려면 칼에 많이 베어 봐야 해요. 검지를 베면 중지로, 중지를 다치면 약지로, 약지까지 다치면 새끼손가락을 썼죠. 새끼손가락마저 다친 적도 있는데 그땐 손톱으로 칼날을 고정해 가며 칼질을 했습니다.” 베인 상처엔 담배의 연초를 붙이고 잊어버렸다고 했다. “자꾸 아프다고 생각하면 더 아프던데요”라며 파안대소. “칼을 무서워할수록 칼은 나를 벱니다”는 말을 스윽 덧붙인다.

그의 초고속 승진은 특유의 철학과 성실성이 있기에 가능했다. 남들보다 두 시간 먼저 출근해 칼을 갈고 새우 껍질을 벗기고 조개를 해감하는 등 밑손질을 도맡아 했다. “일이 즐거우니 아침에 저절로 눈이 떠지더라고요. 요즘 친구들 증에선 ‘저는 셰프가 돼 텔레비전에도 나가고 싶은데 아침엔 못 일어나요’라고 하는 이들도 있던데… 안타깝죠.”

칼을 보여주던 왕 사부가 갑자기 메모지를 꺼냈다. 메모지엔 그의 근검절약 정신이 배어난다. 공짜로 받은 일수 광고지를, 그것도 아까워 반으로 잘라 만들었다. 거기에 그가 쓱쓱 써 내려간 글은 이랬다. ‘工欲善其事 必先利其器.’ 즉 ‘장인이 일을 잘하려면 먼저 도구를 잘 다듬어야 한다’는 뜻으로, 기초가 중요함을 강조한 말이다.

중식도라고 다 같은 칼이 아니다. 왕 사부는 칼에도 문무(文武)가 있다고 했다. 날이 얇고 날렵해 재료의 편을 뜨거나 채를 썰 때 적합한 칼을 ‘문도(文刀)’라고 한다. 반면 날이 두껍고 묵직해서 고기를 뼈째 자르거나 생선을 토막 낼 때 쓰는 칼은 ‘무도(武刀)’다. 칼마다 각각 다른 성질과 쓰임새를 갖는다.

그가 특히 아끼는 칼 중에선 강철 100%로만 만든 중식도가 있다. 무겁지만 견고해 좋아하는 칼이다. 하지만 자주 쓰지는 않는다고 했다. 다른 주방 도구와 부딪치면 소리가 쨍 하니 요란한 데다 깨지기가 쉽기 때문이다. “사람도 같은 이치예요. 너무 순수한 사람, 너무 강한 사람은 부서지기 쉬워요. 강철 100%보다는 다른 금속과 잘 섞이면서 융통성 있게, 살아가는 게 칼에서 제가 배운 지혜입니다.”

- 전수진 월간중앙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사진 전민규 기자 jun.minkyu@joins.com

201709호 (2017.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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