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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정신의 미학(18)] 대구 ‘부인동 동약(洞約)’ 창시자 백불암(百弗庵) 최흥원 

측은지심으로 어루만진 효제의 실천 

글 송의호 객원기자 yeeho1219@naver.com / 사진 공정식 프리랜서
부를 축적한 뒤 교육을 실시하는 선부후교(先富後敎)의 실천…정조의 부름도 마다하고 123명 제자 배출한 처사(處士)의 길로

▎최진돈 백불암 9대 종손(왼쪽)이 옻골 종택을 설명하고 있다. 그 옆은 최언돈 백불암연구소장.
2013년 ‘새마을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국제연합(UN)이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 개발도상국에 적용되고 있는 한국식 발전 모델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세계가 인정한 새마을운동은 그 아이디어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불쑥 튀어나온 것은 아니다. 1970년 4월 22일 박 전 대통령은 지방장관회의에서 새마을운동을 제창하면서 “한민족은 오래전부터 자발적인 협동체를 운영해왔다”고 상기시킨다. 조선시대 발달한 지방자치의 싹인 ‘향약(鄕約)’이 대표적으로 언급됐다. 새마을운동의 근거를 향약에서 찾은 것이다.

향약은 어떤 점이 전승할 만한 가치가 있을까? 이제 조선 후기 한 향약을 통해 실체에 다가가본다.

“부모를 섬김에 정성과 효도를 다한다/ 자제(子弟)를 가르침에 반드시 의방(義方, 의를 지키는 것)으로 한다/ 장상(長上)을 존경한다/ 이웃 마을과 화목하게 지낸다….”


1739년 대구 지역의 한 마을에서 시행된 향약 중 첫째 규약인 ‘덕업상권(德業相勸, 덕업을 서로 권장하자)’ 항목이다. 행동강령이 이어진다. 젊은이가 마을에서 늙은이와 어른을 만나면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는 것을 반드시 대신하라는 것 등이다. 잘 지키는 향민은 관청이 상(賞)을 내리도록 추천하라는 권유도 있다.

둘째 규약인 ‘과실상규(過失相規, 잘못을 서로 바로잡자)’는 엄정하다. ‘형제간 다툼’이 과실 중 하나다. 이때 형이 그릇되고 아우가 바르면 균등한 벌을 준다. 잘못이 서로 반이면 아우에게 무겁게 벌을 준다. 또 마을 어른을 능욕하면 동적에서 빼버린다. 그 밖에도 수십 가지 항목이 있다.

조선 영조 15년에 시작돼 6·25전쟁 전까지 200년 가까이 유지됐다는 대구 ‘부인동(夫仁洞) 네 마을 동약(洞約)’이다. 부인동은 공산댐 안쪽인 현재 대구 동구 공산동·용수동·신무동 일대다. 부인동 동약은 조선에서 가장 오랫동안 시행된 향약 중 하나로 꼽힌다.

향약은 유학자의 관심사항이었다. 퇴계 이황이 한국적 향약의 시초인 예안향약을, 율곡 이이가 서원향약을 만든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향촌을 인(仁)·의(義)가 흐르고 상호 협조하는 유교적 이상공동체로 건설하는 일이다. 이른바 ‘낙토(樂土)’의 실현이다.

‘부인동 동약’을 만들고 운영한 사람은 대구 칠계(漆溪, 옻골)에 살던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1705∼86) 선생이다. 부인동과 옻골은 모두 팔공산 자락에 있다. 서로 12㎞쯤(30리) 떨어진 마을이다.

7월 26일 대구공항을 지나 북쪽 팔공산 길로 들어섰다. 자동차로 10분이 덜 돼 대구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에 다다랐다. 마을 어귀에 수령 350년 된 아름드리 회화나무 두 그루가 서 있었다. 마을을 안내한 백불암연구소 최언돈(73·문학박사) 소장은 “회화나무는 선비가 사는 마을이니 여기서부터 조용히 해달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소개했다. 20여 호 한옥이 보존된 옻골마을은 전체가 대구시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돼 있다.


▎백불암이 부인동에서 공전을 마련해 세금과 부역을 충당한 강령을 적은 ‘선공고절목’.
선비가 사는 마을이니 여기서부터 ‘조용히’


▎1789년(정조13) 나라에서 백불암의 효행을 기려 내린 정려각이 옻골에 세워져 있다.
담장 사이 굽은 길을 따라가자 마을 가장 안쪽에 ‘백불고택(百弗古宅)’이 있었다. 백불암 종택이다. 폭염은 섭씨 37도를 오르내리며 기승을 부렸지만 팔공산은 도심보다 기온이 2∼3도 낮았다. 종택의 대청마루에 올랐다. 마루는 팔공산으로 열려 있어 시원한 바람이 지나갔다. 최진돈(71) 백불암 9대 종손을 만났다. 이야기는 향약으로 시작됐다.

1738년 34세 백불암은 아버지 3년상을 마친 뒤 부인동을 방문한다. 부인동은 5대조이자 옻골 입향조인 최동집이 만년에 은둔한 곳이다. 최흥원은 선대 정자가 있던 이곳 농연(聾淵)을 드나들며 향민의 궁핍한 생활을 지켜봤다.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한 백불암은 이듬해 마을 사람들과 함께 향약을 만든다. 덕업상권·과실상규·예속상교·환난상휼 4강령이다.

최진돈 종손은 “그러나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향촌의 곤궁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찾았다”고 강조했다. 가난을 해결하지 않고 풍속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단안을 내린다.

백불암은 물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동전(洞田) 일부를 팔았다. 그리고 그 기금으로 주자(朱子)의 사창(社倉)제도를 본받아 기근 때 빈민을 구제하는 쌀 창고를 운영한다. 풍년에는 이자를 많이 받고 흉년에는 덜 받는 방식이다. 향민의 마음이 모아져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나자 밭과 곡식을 사들일 수 있게 됐다. 밭은 100여 두락으로 늘어나고 곡물은 수백 석이 쌓였다. 쌀 창고가 부(富)를 창출한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백불암은 공전(公田)을 마련해 여기서 나오는 소출로 향약에 참여한 동민의 세금과 부역을 충당했다. 이른바 ‘선공고(先公庫)’를 설치한 것이다.

이와 함께 농사지을 논밭이 없는 향민에게 전답을 주고 흉년에 구휼하는 ‘휼빈고(恤貧庫)’도 설립했다. 백불암은 이렇게 혁신적으로 부인동의 가난을 구제한다.

향촌에 먹고 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자 1745년 백불암은 교화와 교육을 위해 부인동에 강당(講堂)을 세운다. 그리고 동약(洞約) 모임을 연다. 향약이 낭독되고, 백불암은 “넉넉해지면 가르치는 것이 옛날의 도였다”며 향민들에게 효제충신과 밭 갈고 집 다스리는 업을 강조했다. 백불암 문집의 해제(解題)를 쓴 고 서수생 경북대 교수는 “부를 축적한 뒤 교육을 실시하는 선부후교(先富後敎)의 실천이었다”고 정리했다.

타계 보름 전까지 목욕재계하고 제사


▎‘부인동동약공전비’. 백불암 향약이 실린 이 비는 대구 용수동 농연정사 앞에 서 있다.
부인동의 이후 모습은 백불암 연보에 이렇게 나온다.

“마을이 외진 곳에 자리 잡아 풍속이 어리석었다. 선생이 예양(禮讓)으로 인도하고 상벌로 규제하면서 몇 년 만에 교화되고 풍속이 순화됐다. 남녀가 길을 달리하며, 노인들이 짐을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다니지 않게 됐다.”

백불암은 40여 년간 500여 호(2000∼3000명) 향민과 함께 부인동을 더불어 사는 대동사회로 이끌었다. 이후 7대를 내려가며 후손이 향약의 대표인 약존을 맡는다. 대를 이어 지도층의 책무를 다한 것이다.

<정조실록>에는 “전 영남 도백(우의정 이병모)이 말하기를 ‘최흥원은 재물을 내 빈궁한 사람을 구제했으며, 선공후사의 창고가 있어 이웃이 조세부역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또 향약으로 권장하고 가르친다’고 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때부터 부인동은 향약으로 이름난 마을이 됐다.

최언돈 소장은 “부인동 향약은 근면·자조·협동이라는 지금의 새마을정신과 다를 게 없다”고 말한다. 지금도 옻골의 최씨를 비롯해 부인동의 오씨·구씨·김씨·배씨 등 다섯 성씨는 음력 3월 한데 모여 그 정신을 기린다.

최흥원은 평생 효제(孝悌)를 실천궁행(實踐窮行)한 선비였다. 그는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길이 거창한 형이상학이 아닌 작은 효제 실천이라고 보았다. 백불암은 그래서 부모와 형제자매, 그리고 돌아가신 조상들에게 효성을 다했다.

그는 어버이가 병이 들면 띠를 풀고 잠을 자는 법이 없었다. 병 처방을 위해서는 오장육부를 이해하고 약의 성질을 통달하는 등 의서를 연구했다. 어머니가 오랫동안 설사에 시달릴 때는 방안에 변기를 설치해 나무 통으로 변을 받고 보자기와 걸레 등을 손수 새 것으로 바꾸었다.

효는 부모로 한정되지 않았다. 숙부가 돌아가시고 남은 사촌이 모두 나이가 어리자 최흥원은 3년상 내내 몸소 전을 올리고 곡했다. 형제자매의 우애도 돈독했다. 아우가 천연두에 걸리자 전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병석을 찾았고 시집간 여동생이 형편이 어려워지자 수시로 물건을 보냈다. 그는 “형제의 아들은 모두 부모의 같은 손자이니 어찌 사랑에 차등이 있겠는가”라는 정이(程頤)의 말을 즐겨 썼다.

조상 제사에는 정성이 지극했다. 1786년 8월 7일 어머니 기일에 최흥원은 몸이 편치 않았다. 동생과 조카 등은 제사에 참여하지 말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백불암은 “내가 늙었으니 내년에 다시 이날을 볼지 알 수 없다”며 목욕재계하고 평상시와 다름없이 곡하고 슬픔을 다해 제사를 지낸다. 이후 그는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15일 뒤 세상을 떠난다. 그래서 이광정은 백불암의 행장(行狀)에 “공은 덕이 많지만 한마디로 줄이면 효성일 뿐”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효제는 집안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웃으로 확장된다. 국학진흥원 박경환(53) 수석연구위원은 “백불암이 부인동에서 향약을 시행한 것도 효제의 마음에서 출발했다”고 분석한다. 맹자가 말한 어버이를 섬기는 마음으로 남의 어른을 섬기고,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의 아이를 사랑하는 효제의 사회적 확장이라는 것이다.

옆 사람의 위급함 외면하는 과거시험 등져


▎‘백불암선생문집’의 책판. 문집은 1815년 원집 8권4책과 언행록 7권3책으로 간행됐다.
최흥원은 효제를 이웃으로 넓히면서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노비 등도 예외가 아니다. 백불암 ‘언행록’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하인을 부릴 때도 언제나 가르쳐 타이르기를 먼저하고 좀체 성내거나 매를 대지 않았다. ‘이 또한 남의 자식인데… 마땅히 가엾게 여길 뿐’이라고 했다. 일을 시킬 때는 먼저 배가 고픈지, 추운지를 살피니 모두 기뻐하며 진실로 복종했다.”

백불암은 이렇게 신분이 낮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이 남달랐다. 부인동에 향약을 만들고 선공고·휼빈고를 운영한 것도 측은지심으로 어루만진 효제 실천이었다. 새로운 선비상이다.

옻골에는 붉은 문에 태극이 그려진 정려각이 있다. 1789년(정조13) 나라에서 최흥원의 효행을 인정한 것이다. 최언돈 소장은 “열녀 아닌 효자 정려각은 드물다”며 “집안을 뛰어넘어 향촌과 더불어 산 대효(大孝)를 세상에 드러낸 것”이라고 설명한다.

백불암은 1705년(숙종32) 대구 원북리 외가에서 태어났다. 16세에 <맹자>를 읽고 크게 깨닫는다. 후일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15∼16세에 서당에서 글을 배웠으나 가르치는 것이 모두 과거시험을 보는 속된 말뿐이어서 마음속에 늘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맹자>에 나오는 ‘사람됨이 어질면서 어버이를 버리는 사람은 없고, 의로우면서 임금을 버리는 사람은 없다’는 구절을 읽고 성현이 전한 교훈이 인(仁)과 의(義) 임을 깨달았다.”

그의 효제 정신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1722년 백불암은 생원시에 합격한다. 7년 뒤 다시 향시에 응시한다. 하지만 현풍 향시는 그가 과거시험과 담을 쌓는 계기가 된다. 당시 함께 응시한 동생 최흥점이 시험장에서 병환이 위급해졌다. 백불암은 평소 알고 지내던 친지들에 도움을 청했지만 모두 과문을 짓느라 골몰해 도움을 주지 않았다. 크게 실망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의리를 추구하는 도학과 명리를 쫓는 과거 공부가 병행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후 백불암은 과거시험을 위한 글공부 대신 <심경> <성리대전> <근사록> 등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고 본성을 기르는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몰두했다. 그 정신이 이어진 것일까. 후손들은 “옻골 입향 400년 동안 현직 벼슬은 현감 하나뿐”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백불암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1740년 36세 백불암은 부인 손씨를 잃는다. 부인은 어머니 봉양을 위해 새 장가 들 것을 유언했지만 그는 재혼하지 않고 홀로 40여 년을 보낸다. 첩도 두지 않았다. 그로부터 23년 뒤 또다시 불운이 닥친다. 1763년 이번에는 하나뿐인 아들 주진이 요절한다. 최흥원은 총명하던 외아들을 잃고도 어머니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슬픈 기색을 비치지 않았다. 6년 뒤엔 다시 셋째 아우를 잃는다. 1771년에는 둘째 아우와 촉망받던 조카가 잇따라 세상을 떠난다.

불운이 겸손을 부른 걸까. 최흥원은 회갑을 맞은 1765년 “평생 수양했으나 백 가지 아는 것도 없고 백 가지 능한 것도 없다(百弗知 百弗能)”고 한탄하며 ‘百弗庵(백불암)’이라는 편액을 내건다. 그게 자호가 됐다.

1778년 정조 임금은 경모궁(景慕宮)을 지은 뒤 효성 있는 선비를 찾는다. 경모궁은 정조가 사도세자의 신위를 모시고 홀로 계시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로하기 위해 지은 궁궐이다. 여러 대신이 백불암을 천거하자 정조는 그를 수봉관(守奉官)으로 임명한다. 백불암은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천거가 이어진다. 그는 동몽교관·장악원주부·공조좌랑·익위사익찬 등의 벼슬에 거듭 제수됐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대신 옻골을 지키며 123명의 제자를 배출한다. 처사(處士)의 삶이었다.

개발은 도시의 숙명일까. 조용하던 대구 변두리 옻골 주변도 지금 망치소리가 들리고 있다. 옻골 앞에 하늘 위로 지나가는 듯이 높은 팔공산 순환도로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후손은 그 아래를 지나며 “옻골 사람들이 점잖게 있으니 이지경이 된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보상금 서로 상대 몫으로 양보한 문중과 종택


▎대구시 동구 팔공산 부인사 아래 농연구곡 중 1곡인 분암. 백불암의 증손자 지헌 최효술은 분암으로 시작해 9곡 용문으로 들어가는 농연구곡 시를 지었다.
개발은 생각지 못한 보상으로도 이어졌다. 옻골 인근 문중 땅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것이다. 여기서 백불암의 효제정신이 살아난 것일까. 문중과 종택은 보상금을 서로 상대 몫으로 양보한다. 보상금으로 1996년 문중 장학기금이 마련됐다. 그때부터 문중 자녀들에게 대학 입학부터 박사과정까지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또 65세 이상 200∼300명에게 월 10만원의 ‘경로수당’을 전한다. 최진돈 종손은 “당연히 할 일을 하는 것”이라며 말을 아꼈다. 문중은 또 종손에게 월급을 주며 종택과 마을을 지키는 데 전념할 것을 당부한다.

맹자는 제(濟)나라 선왕(宣王)이 정치에 대해 묻자 “백성은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항상 바른 마음을 견지하기 어렵다(若民則無恒産 因無恒心)”며 생업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선비가 아니고선 먹고 사는 게 해결돼야 예의염치를 안다는 것이다.

‘항산이 없으면 항심이 없다.’ 백불암이 평생 실천한 실사구시 정신이자 옻골이 지켜 온 가치일 것이다. 가난 구제에서 정신운동으로 승화되는 새마을정신도 이와 맥을 같이 할 것이다.

[박스기사] 백불암, 류형원의 <반계수록>을 읽다 - 당대 금서 읽고 “근세 학문으로 최고”로 평가… 영조 대에 해금된 <반계수록>의 첫 교정작업 주도


▎백불암은 영조의 명에 따라 보본당에서 <반계수록> 교정 작업에 들어갔다.
옻골마을 백불고택 오른쪽에는 보본당(報本堂)이 있다. 옻골 입향조이자 백불암의 5대조인 최동집 선생의 사당과 함께 재실이 있는 곳이다. 보본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반계수록 최초 교정 장소’라는 안내 간판이 보인다. 내용은 이렇다. “이곳 보본당 서쪽 방은 우리나라 실학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반계(磻溪) 류형원(柳馨遠·1622∼73) 선생이 저술한 <반계수록(磻溪隧錄)>을 1770년 백불암이 영조 임금의 명을 받아 이곳에 교정청을 설치하고 최초의 교정본을 완료하여 나라에 바친 유서 깊은 곳이다.” <반계수록>이라면 교과서에서 나오는 실학을 대표하는 저술이다. 무슨 사연일까.

1748년(영조24) 44세 최흥원은 <반계수록>을 입수해 읽는다. 책이 쓰인 뒤 78년이 지나서다. 그리고는 “근세 학문으로 최고”라는 평가를 내린 뒤 필사했다. <반계수록>은 <경국대전>에 규정된 사회질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며 공전제(公田制) 시행 등 경제개혁을 제시한 당대의 금서(禁書)였다. 백불암이 부인동에서 선공고와 휼빈고를 운영할 때도 참고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류형원은 어려서 서울에서 살았지만 과거시험에 실패한 뒤 벼슬을 단념하고 전라도 부안에 은거하며 독서와 저술에 전념했다. 그는 실학을 처음으로 체계화했으며 뒤를 이어 홍대용·안정복·정약용 등이 배출됐다.

최흥원이 아직 간행되지 않은 <반계수록>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류형원과의 인척 관계로 가능했다. 어머니 함안 조씨 집안은 서울의 소론이던 평창 이씨와 혼인이 잦았고 어머니의 외가인 평창 이씨는 류형원의 문화 류씨와 혼인 관계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최흥원의 아들인 최주진은 서울을 드나들며 이들 집안을 들르곤 했다. 이런 인연으로 최주진이 류형원의 아들로부터 <반계수록>을 빌려온 것이다.

<반계수록>은 1770년 해금된다. 영조가 그 가치를 인정하고 마침내 간행을 지시한 것이다. 간행이 논의되자 대신들은 최흥원이 그 책을 가장 많이 연구했다고 추천한다. 영조는 마침내 경상감사 이공이를 시켜 백불암에게 교정을 의뢰하라고 명한다. 최흥원은 보본당에서 <반계수록>의 교정에 들어갔다. 교정이 언제 끝났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백불암 연보에는 1783년 정조임금이 백불암에게 교정의 노고를 치하하고 <사서대전>과 언해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 글 송의호 객원기자 yeeho1219@naver.com / 사진 공정식 프리랜서

201709호 (2017.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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