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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화제] 한국 야구대표팀 첫 전임 감독 선동열 

“위기의 한국 야구 되살린 지도자로 기억되고 싶다” 

글 정영재 스포츠 선임기자 jerry@joongang.co.kr / 사진 조문규 기자 chomg@joongang.co.kr
재야에서 절치부심 2년 반, 명예회복 기회 얻어…11월 데뷔전, 최종 목표는 2020년 도쿄올림픽 메달 획득

▎선동열 야구대표팀 전임 감독이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대표팀 운영 밑그림과 선수 선발 계획 등을 설명하고 있다.
1982년은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한 해다. 프로야구 두산 베어스와 LG 트윈스의 홈구장인 잠실야구장이 건립된 해이기도 하다. 잠실야구장은 82년 9월 서울에서 열린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메인 경기장으로 쓰기 위해 지었다.

그해 9월 24일 잠실야구장에서 한국과 일본이 맞붙었다.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팀을 가리는 경기였다. 한국은 8회 말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로 2대 2 동점을 만든 뒤 한대화가 왼쪽 담장 폴을 맞히는 스리런 홈런을 터뜨려 5대 2 역전승을 거뒀다.

한국 야구 최고의 명승부로 불리는 이 경기를 통해 김재박과 한대화는 엄청난 유명세를 치렀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완투승을 거둔 투수가 선동열(당시 고려대2)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선동열은 대회 2차전 미국과의 경기에서 무려 15개의 삼진을 빼앗으며 2대 1 완투승을 거뒀다. 대만전에서도 8탈삼진 완봉승으로 기염을 토했다. 당시 미국 메이저리그 진출설이 나돌던 최동원(작고)을 보러 왔던 메이저리거 스카우트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를 당장 데려가겠다는 팀이 있었다.

선동열도 이 대회가 끝난 뒤 메이저리그 진출의 꿈을 안고 고려대에 휴학계를 냈다. 그런데 쿠데타로 집권한 당시 5공화국 정부는 프로야구 붐업에 필요한 선수의 해외 진출을 막았다. 최동원과 선동열이 메이저리거가 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35년의 세월이 흘렀다. 대표팀 막내였던 선동열은 한국 야구대표팀 감독이 됐다. 지난 7월 24일 선임된 선 감독은 한국 야구 사상 최초의 ‘국가대표팀 전임 감독’이라는 명예와 부담을 동시에 안았다.

8월 8일 서울 양재동 한국야구위원회(KBO) 빌딩에서 월간중앙이 선동열 감독을 단독으로 만났다. 선 감독은 “35년 전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임호균·최동원·김시진 선배의 모습을 보면서 ‘난 왜 저렇게 못 던질까’ 자책하고 더 열심히 했다. 그 덕에 우승을 했고, 나 자신도 마운드에서 자신감이 생겼고 기량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떨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대표팀 유니폼을 처음 입은 지 35년 만에 대표팀 수장을 맡았다. 한국 야구 상황이 좋지 않고 성적에 대한 부담도 크지만 침체된 한국 야구를 살린 지도자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요즘 선수들 태극마크 사명감 부족


▎선동열 감독은 2012~14년 3년 동안 KIA 감독을 지냈다. 선수들의 경기 장면을 지켜보는 선 감독과 친구인 이순철 수석코치.
첫 전임 감독이라는 타이틀이 꽤 부담스러운가 봅니다.

“아무래도 그렇죠. 김인식 감독님이 ‘국민감독’이라는 칭호를 들을 만큼 대표팀을 잘 이끌고 좋은 성적도 거뒀으니까요. 제가 김 감독님을 도와 코치로 일했는데,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모습이 감명 깊었어요. 제가 그분의 뒤를 이어야 하고 성적도 잘 내야 하니 부담이 큽니다.”

한국 야구가 위기라는 말이 많은데요.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4강→2008년 베이징올림픽 우승→2009년 제2회 WBC 준우승으로 이어지던 좋은 흐름이 2010년 이후 끊겼어요. 2013년(3회)과 올해(4회) WBC에서 잇따라 예선 탈락했죠. 1, 2회 WBC 때는 선수들이 반드시 이기겠다며 눈에 불을 켰어요. 그런데 요즘 선수들은 태극마크에 대한 사명감이나 투지가 예전만 못한 것 같습니다. 제가 국가대표팀 코치로 오래 일하면서 보니 실력이 좀 떨어지더라도 투지와 헝그리 정신으로 부딪치는 선수가 많은 팀이 이기더라고요.”

선수들에게 태극마크에 대한 사명감을 ‘세뇌교육’시키겠다고 하셨는데.

“태극마크는 돈으로도,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겁니다. 비교적 젊은 코칭스태프를 구성하려는 것도 선수들과 소통하면서 이런 점을 교육시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 야구가 침체된 상황에서 너희가 좋은 성적을 거두면 개인적인 명예도 있고, 평생 자산으로 남을 거라고 강조할 겁니다.”

선수 선발에 대한 전권을 받았는데 어떤 기준으로 선수를 뽑을 겁니까?

“대표팀 감독이 된 후로 매일 밤 채널 5개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프로야구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을 봅니다. 프로야구 경기는 물론 틈나는 대로 2군 경기장도 가서 좋은 선수가 있는지 둘러봅니다. 11월 16일 도쿄돔에서 열리는 일본과의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 경기가 제 데뷔전인데, 이 대회는 24세 이하 출전을 원칙으로 하고 25세 이상 와일드카드 3명을 뽑을 수 있습니다. 제 최종 목표는 2020년 도쿄올림픽 메달입니다. 이번 대회는 가능성 있는 어린 선수를 발탁하고, 그 선수들이 잘하면 2018년 아시안게임에도 뛸 수 있도록 배려하겠습니다. 그리고 베테랑 선수들과 조화를 이뤄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야 합니다.”

가장 뽑기 힘든 포지션은?

“24세 이하에 좋은 포수가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와일드카드로 뽑아야 할 것 같습니다. 10년 가까이 포수에서 좋은 자원이 안 나오고 있어요. 요즘엔 힘들고 빛 안 나는 포수를 원하지 않고, 부모도 하나 아니면 둘뿐인 아이를 가둬놓고 키우니까 헝그리 정신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류현진(30·LA 다저스) 이후 대형 투수도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2년 반 동안 프로야구 현장을 떠나 바깥에서 아마추어 경기도 많이 봤는데요. 요즘 유소년 선수들은 기초가 부실합니다. 집 지을 때도 기초공사가 탄탄히 잘 돼야 높은 빌딩을 지을 수 있잖아요. 체력이 바탕 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술적인 부분에만 집중하다 보니 기본 체력이 떨어지고 부상이 잦습니다. 특히 투수는 러닝을 많이 해 하체를 단단하게 만들어야 부상 없이 오래 던지고 제구력도 좋아질 수 있어요. 하반신 안 쓰고 상체로만, 요령으로만 던지니까 팔꿈치나 어깨에 부상이 오고 시속 150㎞ 이상 강속구를 던지던 선수들도 프로에 와서 난타를 당하는 거죠.”

프로야구 감독은 피 말리는 자리


▎1980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이 확정되자 환호하는 대회 최우수선수(MVP) 선동열. 광주일고는 결승전에서 이순철이 이끄는 광주상고를 8대 2로 꺾고 정상에 올랐다.
선 감독은 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얘기를 또 꺼냈다. “당시 최동원·김시진·임호균 등 제구력 좋은 선배가 많았어요. 특히 호균형 컨트롤은 대단했죠. 홈플레이트에 세워 놓은 야구공을 마운드에서 정확히 맞혔어요. 포수가 아웃코스 던지라고 미트를 바깥쪽으로 내밀면 10개 중 9개는 포수가 팔을 전혀 안 움직이고 받는 공을 던졌죠.”

당시 대표팀 주전 포수는 심재원(작고)이었다. 심재원은 좀 별난 구석이 있었다. 바깥쪽 던지라고 했는데 공이 가운데나 몸 쪽에 오면 아예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 공이 50m 정도 뒤로 빠져나갔다. 심재원은 고개만 까딱하며 그 공을 주워 오라고 한 뒤 후배 투수가 헐레벌떡 뛰어가 주어 온 공으로 그의 머리를 톡 때렸다고 한다.

“공 주우러 안 가려고 볼 하나하나 집중해서 던졌죠. 그러다 보니 제구력이 점점 좋아졌어요. 세계선수권을 앞두고 8월 한 달간 합숙을 하면서 그 땡볕에 하루 150∼200개 공을 던졌어요. 힘들다고 팔로만 던져서는 견뎌낼 수가 없었어요. 자연스럽게 하체를 활용한 투구 동작이 몸에 뱄죠.”


▎주니치 시절 선동열과 그의 광주일고-해태 8년 후배인 이종범.
11월에 맞붙을 일본 대표팀의 이나바 아쓰노리(45) 감독도 대표팀 데뷔전이라고 하던데요.

“이나바는 일본 프로야구 센트럴리그에서 맞붙은 적이 있어요. 신인으로 야쿠르트에 입단했는데 공·수·주에 모두 능하고 내 공도 잘 쳤던 기억이 납니다. 전력이야 일본 대표팀이 낫겠지만 우리도 다부지게 붙어서 꼭 이겨야죠. 우리가 언제 전력이 좋아서 일본을 이겼나요?”

요즘 국내 프로야구는 KIA 타이거즈 위세가 엄청난데요.

“함평 2군 구장에서 좋은 선수들이 계속 나오고 있는 것 같고요. 외국인 선수들이 자기 몫을 해 주고, 국내 선수들도 이기는 법을 알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감독님 선수 시절이던 해태 타이거즈 왕조와 비교하는 분들도 있던데.

“그때와 거의 비슷한 것 같아요. 우리 때는 투수층이 워낙 두텁고 좋았어요. 해태를 흔히 타격의 팀이라고 알고 있는데 찬스 때 몰아치기가 나와서 그렇지 투수력에 비해 타력이 막강한 편은 아니었어요. 다만 기동력은 그때가 좋았죠. 김일권 선배, 이순철·이종범 등 대도(大盜)들이 있었잖아요.”

반면 감독님이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사령탑에 계셨던 삼성은 ‘왕조 몰락’의 위기에 몰렸는데요.

“2004년 삼성 수석코치 할 때 투수 쪽에 재목이 많았어요. 정현욱·권오준·안지만·권혁·배영수에다 나중에 오승환까지 들어왔죠. 이들은 조금만 다듬어주면 확 올라올 단계였어요. 러닝을 엄청나게 시켰죠. 나중에는 그만 좀 뛰게 해달라고 애원할 정도였어요. 그 투수들 덕으로 삼성이 왕조를 구축할 수 있었고, 삼성을 떠난 선수들도 지금까지 하체를 쓰면서 오래 던지고 있잖아요.”

‘야신’ 김성근 감독도 성적 부진에 불명예 퇴진했고, NC 김경문 감독도 입원했는데요.

“프로야구 감독은 남자라면 도전해볼 만한 자리지만 책임감과 스트레스가 어머어마해요.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매일매일 피 말리는 경기에 시달리고, 바로바로 나오는 결과에 스트레스받고…. 시즌 중에는 매일 새벽 3∼4시까지 오더(출전 선수 명단) 짜고 경기 준비를 해야 합니다. 저도 2005년 삼성 감독과 WBC 대표팀 코치를 겸할 때 일본에서 미국 가는 비행기 안에서 심장 통증으로 죽을 뻔했어요.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당장 술·담배 끊지 않으면 당신은 1년 안에 죽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담배를 끊고 운동을 했죠.”

선 감독은 삼성과 KIA 시절 선수들의 어처구니없는 플레이를 보면 더그아웃에서 허탈한 웃음을 짓는 게 카메라에 자주 잡혔다. 그걸 비웃음으로 생각하고 “모멸감 때문에 야구 못하겠다”고 한 선수도 있었다. 팬들도 그런 모습을 지적한 적이 많았다.

개인기록보다 팀 승리가 우선


▎1999년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에서 은퇴한 선동열은 2004년 삼성 수석코치로 국내 프로야구 현장에 복귀했다. 2003년 10월 은사인 김응용 감독과 악수하고 있는 선동열 수석코치.
이에 대해 선 감독은 “경기하다 보면 실수는 당연히 나오는데, 너무 어처구니없는 본헤드 플레이가 나오면 내가 웃었던 것 같아요. 될 수 있으면 무표정으로 있는 게 좋겠지만 표정관리가 잘 안 됐어요. 야구는 특히 단기전에서는 실수를 적게 하는 팀이 이기거든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선수들에게 ‘왜 이렇게 못해. 난 이렇게 했는데’라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넌 왜 이렇게 못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도자로서 자격이 없다고 봐요. 대신 저는 ‘너희가 던지는 것과 내가 가르쳐준 걸 비교해봐라. 그중에서 편한 걸 택하라’고 말하죠”라고 설명했다.

선 감독은 대표팀 코치 시절 투수 교체만은 전권을 위임받았다. 그 정도로 투수 교체 타이밍에 대한 감이 빠르고 정확했다. 2006년 WBC 대회에선 20여 차례 투수 교체를 했는데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고 뿌듯해 할 정도였다.

선 감독은 “선발 투수의 한계 투구를 100개라고 하는데 사람마다 상황마다 좀 다르죠. 저는 ‘타자가 속지 않는 공이 연속으로 들어오거나 볼이 높아지면’ 선발 투수를 교체할 타이밍이라고 봅니다. 중간계투도 타자가 스트라이크와 볼을 구분하지 못해야 하는데 공을 보고 꿈쩍도 안 한다면 바꿀 때라고 봅니다. 투수 교체 타이밍에 정답은 없어요. 제 경험으로는 한 박자 빠른 게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어요”라고 말했다.

선 감독은 “투수를 바꾸려고 마운드에 올라가면 열이면 열 ‘더 던질 수 있습니다’고 말해요. 그럴 때 감독은 냉정해야 합니다. 한 타자만 잡으면 승리투수가 된다 하더라도 그것보다 팀 승리가 우선이죠. 이 과정에서 정말 중요한 게 서로에 대한 신뢰입니다. 선수가 ‘감독이 왜 나를 못 믿지’라고 생각하면 불만이 생기고 팀 분위기는 무너지게 됩니다”고 했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누가 인터뷰룸 문을 열고 불쑥 들어왔다. 구본능 KBO 총재였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구 총재가 기자에게 “좀 잘 써주이소. 우리 국보 아입니까”라고 농담했다.

선동열은 말 그대로 ‘국보 투수’였다. 해태 타이거즈 시절엔 ‘무등산 폭격기’로서 호남 사람들의 한을 야구장에서 속시원히 풀어줬다.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곤스로 이적해서는 ‘나고야의 태양’으로 일본 야구팬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았다. 일본 진출 첫 시즌에 스트라이크를 잘 안 잡아주면서 ‘간을 보던’ 일본 심판들도 선동열의 실력을 인정한 뒤에는 콜(call)이 후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지도자 선동열’은 현역 시절만큼의 위용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SK에 4전 연패로 진 뒤 삼성 감독직을 불명예 퇴진했다. 2011년 10월 고향 팬들의 전폭적인 성원을 업고 KIA 감독이 됐지만 뚜렷한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3년 만에 물러났다.

2년 반 동안 재야에서 절치부심한 선동열 감독은 침체 조짐을 보이는 한국 야구를 구원하고 자신의 명예도 회복할 기회를 얻었다. 어떤 지도자로 기억되고 싶은지 묻자 그는 “위기의 한국 야구를 살린 지도자로 이름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

- 글 정영재 스포츠 선임기자 jerry@joongang.co.kr / 사진 조문규 기자 chom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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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호 (2017.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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