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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 ‘유배의 섬’ 제주도 정신사 탐구 

핍박을 문화로 꽃 피우다 

글·사진 양진건(제주대 교수·스토리텔링연구개발센터장)
유배와 조선 지식인의 정치적 수난과는 깊은 상응관계 이뤄…휴식과 회복, 나아가 창조의 동력으로 되살아나

유배문화는 유배인 일방의 시혜적 문화가 아니라 원주민들과의 교호적인 상생문화다. 어둡고 무거운 형벌의 개념에서 벗어나 휴식과 회복, 창조 등 발전적이고 긍정적인 개념으로 변모하고 있다. 제주 유배문화에 깃든 민족사의 정신을 재조명했다.


▎제주추사관은 추사 김정희의 유배 시절을 기리고자 2010년 개관했다. 추사 김정희와 관련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유배문화(流配文化)는 유배인과 그 유배지 주민이 상호교류하면서 만들어진 독특한 문화다. 유배는 무거운 죄를 저지른 자를 먼 곳으로 보내 격리시키는 벌로, 사형 다음 가는 무거운 형벌이었다. 동양에서도 특히 중국은 오래 유배의 역사를 갖고 있다. BC 2070년 경의 하(夏) 왕조로 부터 유배가 시작되었으니 중국의 역사 자체가 유배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의 유배형이 기록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은나라 때부터다. 진나라와 한나라 때부터는 사형(死刑), 도형(徒刑), 장형(杖刑), 태형(笞刑)과 함께 소위 오형(五刑)의 하나로 정착됐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유배형이 존재했다. BC 487년경부터 위험인물을 시민의 비밀투표로 10년간 국외로 추방하던 도편추방제(陶片追放制, ostracism)가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의 기록에 유배의 역사가 엿보인다. 이후 고려시대에도 계속 시행됐고, 본격적으로 실시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다. 15~16세기에는 조선의 벼슬아치 네 명 가운데 한 명꼴로 유배를 당했다. 그 시대의 이름난 벼슬아치치고 유배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당쟁(黨爭)이 격화됐던 조선 중기 이후, 유배의 정도가 심해졌다.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후미진 곳으로 정적을 내몰았다. 점차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제주도 같은 절해고도로 유배를 보내 아예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내몰았다. 이런 환경에서 ‘섬의 유배문화’가 탄생했다. 한반도의 많은 섬 가운데 제주도는 정치적 추방 및 격리를 위한 최적의 유배지로 인정받았다. 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유교 입국의 정책을 강하게 밀고 나갔다. 그 결과 학설의 대립, 학문적 파벌이 잉태됐다. 끝내는 피비린내 나는 사화(士禍)나 당쟁(黨爭) 등의 당옥(黨獄)을 초래하게 됨에 따라 유배가 남발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의 유배는 주로 정치적 생존경쟁인 당쟁에서 기인했다. 당쟁을 통해 정권 장악에 성공한 자들이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반대 세력들에 취했던 행형(行刑)의 산물이었다. 그래서 유배와 조선 지식인의 정치적 수난과는 깊은 상응관계를 이뤘다.

한편으로는 웃고 한편으로는 한탄


▎김정희가 유배 시절에 살았던 강도순의 집을 복원해 놓은 추사유배지.
조선 초기 유배는 통상 함경도나 평안도 등 변방으로 보내는 원배(遠配)에 그쳤다. 한양에서 비교적 가까운 강화도 같은 곳은 왕족들의 유배지였으며, 그 밖에는 내륙 지역의 그런대로 괜찮은 선지(善地)로의 유배가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조선 중기 이후 당쟁이 격화되면서 섬으로 보내는 도배(島配)가 격증했다. 당연히 다도해의 여러 섬이 일급의 유배지가 됐고, 그 수에서 제주도는 단연 압도적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유배와 관련된 기사 5860건을 분석해본 결과 빈도수가 많은 유배지가 40여 개 나온다. 이들 가운데 1위에서 5위까지가 모두 섬이며 1위가 바로 제주도다. 조선시대 유배지 가운데 가장 많이 이용됐던 곳이 바로 제주도였던 것이다. 제주도가 유배지로 각광받았던 것은 무엇보다 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인데다 관방(關防)이 설치돼 있어 죄인에 대한 관의 통제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여건이 유배인의 생활을 책임질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느냐도 중요했다. 유배인의 의식주를 해결해줘야 했기 때문이다.

많은 유배인이 제주도에 오다 보니 주민들은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었다. 1757년(영조 33년) 전라도 감사 이창수(李昌壽)는 “유배인들이 제주목에 집중되어 있어 그들을 제주 3읍에 분배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배인들이 계속 늘어나자 제주 사람들이 매우 곤혹스러워 한다”는 상소를 비변사에 전했다. 조선 말기의 거물 정객으로 제주도에 유배왔던 김윤식(金允植)은 유배일기 <속음청사(續陰晴史)>에서 “제주목의 유배인들이 나날이 늘어나 마치 섬 전체에 가득 찬 것 같아 제주 사람들이 한편으로는 웃고 한편으로는 한탄한다”고 썼다.

분명히 제주 3읍에는 죄명이 특히 중한 자 이외에는 유배시켜서 안 된다고 법률로 못박고 있었다. 그러나 당쟁으로 유배가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어떤 의미에서 유배 체험이 없는 조선 지식인은 지식인으로서의 경력이나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 관습’처럼 유배를 체험하는 일도 있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그들의 정치인생의 한 부분으로 유배를 받아들이곤 했다. 그들에게 유배는 그들이 지향하는 삶의 가치나 규범과도 맞물려 있었다. 한편으로 염치와 명분의 징표가 되기도 했다. 유배에 직면한 당대 지식인들의 태도나 역할은 훗날 한국 근현대사의 항일, 민주화 등 다양한 운동사의 전통과도 연결된다.

성대하고 화려했던 윤선도의 유배 행


▎추사유배지 입구의 고졸한 모습. 추사는 이곳에서 유배 생활을 견디며 제주 사람들을 만나고, 추사체를 연마했다.
선비들의 유소(儒疏), 성균관생들의 권당(捲堂), 공관(空館)에서부터 언관과 사관들의 간언(諫言)과 직필(直筆) 등이 유배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세속적 명리나 일신의 평안을 결연히 버릴 수 있었던 태도의 연장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유배인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낯설어 하거나 개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상황 속에서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활동을 전개했던 유배인도 많았다. 김정희도 제주유배가 아니었다면 추사체를 완성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그런 맥락이다.

원래 조선의 유배는 사형완화법으로 이용되었다. 사형완화라고 해서 죽음을 면하게 돼 다행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유배인은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절망, 고독, 빈궁을 맛보았다. 사회로부터 고립되는 충격이었다. 언제라도 처형될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실감했다.

특히 제주도로 유배되는 경우는 거의 종신형이나 다를 바 없었다. 유배형은 일정한 기한이 정해져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정치 정세의 변화에 따라 사면돼 석방되기도 하지만 사약(賜藥)이 내려와 죽을 수도 있었다. 타지로 옮겨지기도 했고 유배지에서 병사(病死)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제주도에서의 유배생활은 죽음보다 더 괴로운, 미래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정치 정세는 늘 요동을 쳤다. 오늘은 유배인이지만 내일은 아닐 수 있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의 태도는 매우 민감했다. 유배지까지 가는 동안 유배인은 인근의 지방관으로부터 대접을 받곤 했다. 유배인에게 규정 외의 물품을 제공하거나 접대의 정도가 지나쳐 폐단이 되기도 했다.

헌종 때 윤선도(尹善道)의 유배가 그런 경우다. 과도한 접대 때문에 죄인의 행차라기보다 중앙관원이 지방에 출장 가는 것처럼 성대하고 화려했다. 오늘은 정치적 이유로 유배를 떠나지만 내일은 정치적 이유로 풀려나 다시 등용될 가능성이 있었다. 지방관은 그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보험을 들 수밖에 없었다.

유배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정온(鄭蘊)은 유배인 신분임에도 제주목사로부터 최고급 술과 안주를 대접받았다. 추로주(秋露酒)라는 고급술과 전복이었다. 전복의 맛이 기가 막혔던 모양이다. 정온은 “초나라의 충신, 굴원(屈原)도 그 맛을 보았다면 세상과 타협하며 살았을 것”이라 감탄했다. 제주목사 장인식(張寅植)도 9개월 동안 유배인 김정희에게 매달 물품을 보내주며 대접했다. 김정희는 이런 물품을 ‘월혜(月惠)라고 하며 고마워했다. 이런 예는 비일비재했다. 목사만이 아니라 토호들의 대접도 각별했다. 오죽했으면 김윤식이 “번화한 한양의 재미와 다를 게 없어 유배인이라는 신분을 돌아볼 때 너무 분에 넘친다”고 했겠는가. 유배인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제주도 유배인은 현실의 집착을 거세당하고 그 어떤 종류의 희망도 갖지 못한 채 절망의 나락에 빠져들었다. 이제 그들의 미래는 죽음뿐이라는 처절한 자기 상실을 실감했다. 그 절망감은 어떤 것으로도 위안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유배인은 누구보다도 절절하게 군왕에 대한 충성심을 표현했다. 유배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제주도의 관문이었던 조천포구에 세워져 있는 정자 ‘연북정(戀北亭)’은 유배인들이 왕궁을 향해 표현하던 변함없는 충성의 흔적이다.

유배, 체념과 희망이 교차하다


▎유배인들이 남긴 음식에 대한 기록을 기반으로 재현한 소박한 유배밥상의 모습.
이 같은 충성의 표현 속에는 군왕이나 정치적 동료로부터 다시 추천되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충성의 표시는 특별한 뜻이 담겼다기보다 유배인의 관례적 감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들의 충성심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충성의 표시가 결국은 자신들의 처지를 달래기 위한 관례적인 메커니즘이라는 의미다.

그런 충성을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유배인은 그 자신의 억울한 처지, 비분강개 없이는 지탱할 수 없는 현실을 과장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역설적으로 철저하게 소외당한 자신을 달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김춘택(金春澤)이 제주도에서 집필한 <별사미인곡(別思美人曲)>에서도 그런 마음이 드러난다. 그가 표현한 우시(憂時)와 연군(戀君)은 다시 총애를 받고 싶은 심정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다.

충성의 표현을 아무리 열심히 한들 다시 추천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점을 유배인들 스스로가 잘 깨닫고 있었다. 그들은 한양에 대한 귀속(歸屬) 지향성보다 일단 유배지의 현실을 받아들임으로써 체념과 동시에 현지 적응의 희망을 만들어낸다.

특히 제주도 유배인은 자신이 더 이상 조정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무거운 형벌을 받고 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럴 경우 현지 목사나 향리의 배려로 유폐되는 일은 모면할 수 있어서 현지 주민들과의 접촉이 가능했다. 그들은 주민과 권위적으로 관계하기보다 현지와 화합함으로써 독특한 유배문화를 형성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추사 유배지에 조성된 서당 공부 상상조형물. 유배인은 현지인과 교류하며 학문을 전수하는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다.
우선 유배인은 제주도의 성씨를 다양하게 하는 기능을 했다. 제주도 유배는 가족을 동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유배인들은 고위 정객들일수록 대부분 장기 체류로 인한 의식주 해결의 필요성 때문에 배수첩(配修妾)이라 할 수 있는 현지처를 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덕에 유배생활을 비교적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제주도 토착세력은 고위 정객과의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여식이 유배인의 현지처가 되는데 대하여 대체로 찬성, 불간섭, 묵인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런 경향은 육지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예다. 원악의 환경에 고립되어 있는 제주도 토착세력이 사회적 상승이동을 위한 통로를 어떻게 확보하였는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소실을 제주도에서는 ‘조근 각시’ 혹은 ‘조근 어멍’이라고 부른다. 제주도의 첩은 처·첩 간에 신분차이가 심한 양반가의 첩처럼 남자와 본처에 대하여 종속적인 지위에 있지 않다. 또한 옥내노동에만 종사하는 소비자도 아니다. 제주도의 첩은 초혼이나 재취(再娶)를 한 다른 여자들이나 거의 다를 바 없는 지위를 누렸다. 옥외노동에 종사해 자기의 생활을 하고 있어 전통적인 양반가의 첩과는 판이한 삶을 살았다. 유배인의 소실은 제주도 본래의 첩과 양반가의 첩 형태가 혼합된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제주시 조천읍에 있는 연북정(戀北亭). 유배인이 “북쪽을 그리워한다”는 뜻이니 곧 임금에 대한 충정의 마음을 표현한 곳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유배인 가운데 유배가 풀려 돌아갈 때 제주도의 현지처와 그로부터 생겨난 자식을 데려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데려가지 않았다기보다는 제주도의 현지처와 그 자식들이 적극적으로 가지 않았다는 편이 옳다. 유배가 풀려 돌아가는 남자를 따라간다 한들 천첩(賤妾) 이상의 대접은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주도에서는 본래부터 처와 첩 간에 신분차이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다 고위정객이었던 유배인의 위치는 다분히 특권의 상징이 되고도 남았기 때문에 얻는 것이 훨씬 많았다. 제주도의 문벌을 이루는 대표적인 가계들이 그 후손이라는 사실만을 보아도 그렇다.

토착세력, 유배인과 결합을 시도


▎추사 김정희가 유배 시절에 그린 <세한도>. 제자 이상적이 청나라에서 구한 책들을 제주에 보내준 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그린 그림이다.
인목대비 폐모를 반대하다 제주도에 유배된 이익(李瀷)은 남명학파의 전통을 계승하는 고위정객이다.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제주의 헌마공신 김만일(金萬鎰)의 딸을 현지처로 두고 아들을 낳고 살다가 5년 후 홀로 떠난다. 그래서 그는 경주 이 씨 국당공파(菊堂公派) 입도조가 된다.

김만일은 마축 개량번식에 남다른 기술이 있었던 사람이다. 임진왜란 여파로 마필이 절대적으로 고갈돼 있던 조정에 양마 500필을 헌상했다. 그는 이 공헌으로 일약 상신 계열의 종1품에 해당하는 벼슬을 제수받았던 제주도 최고의 토호가 됐다. 제주도 토착세력이 자기 딸을 유배인의 현지처로 보내는 전략은 일종의 정략결혼과도 같이 매우 적극적인 선택이었다. 그것은 곧 양가(良家)의 전통과 위세를 구축하기 위한 제주도 나름의 방법이었다.

유배인 입장에서는 제주도 토착세력과의 관계맺음을 통해 어려운 유배생활을 견뎌낼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결국 양자의 이해가 맞아떨어짐으로써 가능한 조치였다. 그러나 유배가 풀려 조정으로 복귀할 때는 소실과 슬하의 자식들이 동행을 하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들에 의해 제주도의 문벌 형성이 가능하게 됐다.

유배인은 종종 교육자 또는 자기 완성자로서 현지 주민들에게 삶의 모범이 됐다. 결과적으로 현지의 학문 향상과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원래 조선조의 선비들은 개인의 인격과 학문적 소양을 닦은 후에 남을 다스린다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정신을 마음에 새겼다. 그들은 기본적으로는 학자이면서 정치인이었고 정치인이면서 또한 학자였다. 유배됐다는 것은 정치인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했지만 학자적 기능은 여전히 보유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유배생활을 서재생활로 전환해 치열한 학문적 연구를 전개한 유배인도 많다. 현지 주민들과 접촉하면서 유교적 교양을 바탕으로 많은 양의 지적 유산을 유배지에 남기게 되는 것이다. 현지 주민들과 동화하면서 죄수라기보다 교육자 또는 자기 완성자로서 여러 성과를 남겼다.

교학활동과 더불어 유배인에게 가장 왕성한 활동은 당연히 독서였다. 독서활동은 비단 개인의 인격만이 아니라 당대의 시대정신과 지적 풍토 형성에도 적극적으로 기여하고, 관여했다. 그런 점에서 유배지에서의 독서활동은 이미 사회적인 활동이었다. 정온이 제주도에 유배를 오자 현감은 서실 두 칸을 만들어줬다. 주춧돌도 없이 땅 위에 바로 기둥을 세우고 띠풀로 지붕을 이은 집이었다. 그럼에도 정온은 경서와 사서 수백 권을 서가에 정돈해 독서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제주도에서 김정희가 가장 열심히 했던 활동도 바로 독서였다. 독서에 대한 그의 열정은 상상을 불허했다. 김정희의 왕성한 독서는 실사구시의 한 방법일 뿐만 아니라, 경전을 폭넓게 연구하기 위해 추구하는 박학다식의 실천이었다. 이러한 독서활동은 송시열(宋時烈), 최익현(崔益鉉) 등 여러 제주 유배인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들의 독서는 그 자체로 일종의 문화적 메신저로 기능했다.

유배인들은 교학활동이나 독서활동 외에 다양한 글쓰기 활동도 겸했다. 주류를 이루는 것은 한시(漢詩)였다. 유배인 대부분이 바로 사대부였기 때문이다. 사대부는 한문학을 문학적 표현의 중심으로 여겼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과거를 통해 관직에 등용됐고 과거는 한시가 중심이었다. 그래서 유배당한 사대부는 그들이 직면한 정신적 상황과 그리고 유배지에서 겪은 체험과 그 감정적 내용을 한시를 빌어 익숙하게 표출할 수 있었다.

한시 외에도 많은 서간(書簡)을 썼다. 서간은 선비의 존재 양식 중의 하나였다. 격리의 유배형을 받은 선비의 경우는 외부와의 거의 유일한 의사전달 방법이 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정약용(丁若鏞)은 유배지에서 수백여 통의 서간 보내는 일을 잊지 않았다. 제주 유배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탐라국 멸망 이래 제주도의 정신사 속에는 탐라 독립을 갈망하는 주민의 성향이 내재돼 있다. 그런 성향은 유배인의 비판적 의식과 묘한 조화를 보이면서 제주도 유배문화의 독특한 특징을 이루게 된다. 그 특징은 제주도 내외에서 가해졌던 여러 수탈과 탄압, 그리고 박해와 혼란에서 연유된 일종의 저항정신이었다. 유배인의 반체제적 실질(實質)을 이어받은 이러한 비판정신은 유배인의 후손에 의해 계승된다.

유배인과 제주 반체제 정신의 만남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에 있는 대정향교. 제주 유배문화와 선비문화의 잔향이 비교적 잘 보존된 명소다.
제주도 유배인의 후손과 연계된 비판정신은 근대까지도 면면히 계승됐다. 1904년 한일의정서가 강제로 체결되자 제주의 유림 12인이 의거를 결의하는 ‘집의계(集義契)’를 결성한다. 12명 가운데 이응호(李膺鎬)는 광해군을 비판해 유배를 왔던 이익의 후손으로서 위정척사파의 거목인 기정진(奇正鎭)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인물이다. 이응호의 부친인 이기온(李基溫)은 유배인 최익현과 사제관계를 맺은 사람이기도 했다.

1901년 신축민란(辛丑民亂)의 장두였던 이재수(李在守)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축민란은 구한말 봉세관의 조세 수탈과 프랑스 선교사를 앞세운 천주교회의 폐단에 맞서 일어선 봉기다. 이재수는 조광조(趙光祖)의 개혁정치가 기묘사화로 좌절되면서 1522년 제주도에 유배됐던 이세번(李世蕃)의 후손이다. 당시 이 사건을 목격한 유배인 김윤식은 <속음청사(續陰晴史)>에서 “이재수는 인물이 영웅답고 대사를 결단할 만한 능력이 있다. 한라산의 정기를 품부받아 보통사람과는 다르다고 여겼다”고 기술했다.

이런 관계는 이재수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남로당 제주도 당책임자 및 군사부 책임자로 1948년 제주 4·3사건을 주도했던 김달삼(金達三)은 본명이 이승진(李承晉)으로 그 역시 이재수와 마찬가지 이세번의 후손이었다. 김달삼이란 이름은 그의 장인 강문석(姜文錫)이 일제강점기에 상해에서 항일운동 당시 쓰던 가명이었다. 일본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상해로 건너가 중국공산당 활동도 했고,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했던 강문석은 김정희 유배지의 집주인으로 9년간 깊은 교류를 나누었던 강도순(姜道淳)의 후손이다.

이렇듯 유배는 제주도 주민들의 삶과 의식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고 현재에도 미치고 있다. 유배인에 대한 제주도 주민의 기본적인 생각은 그들이 소위 육지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육지사람’이라는 표현 속에는 제주도 원주민의 피해의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조선시대 제주도 주민들은 육지인로부터 줄곧 핍박과 착취를 당해왔다. 대부분이 탐관오리(貪官汚吏)였던 목민관의 핍박, 조정 진상품을 마련을 위한 오래된 착취 등이 바로 그것이었고 유배인도 예외가 아니라는 인식이다. 특히 4·3사건 때 서북청년단의 만행은 그 역사적인 피해의식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유배는 제주도 주민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그런 이유에서 유배문화는 제주도의 가장 중요한 문화의 한 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과장된 유배지 주민의 무지와 몽매


▎추사 김정희는 셀 수 없을 만큼 호가 많았다. 그의 낙관을 모아 놓은 책이 <완당인보>다. 대정향교 인근에는 <완당인보>의 여러 낙관이 돌에 새겨져 있다.
유배문화를 거론할 때 자칫 유배인의 활동이나 업적을 무슨 은혜처럼 강조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수록 유배지 주민의 무지와 몽매가 과장되기도 한다. 그것은 마치 대니얼 데포(D.Defo)가 쓴 소설의 문명인 로빈슨 크루소와 무지한 원주민 프라이데이의 위상과도 같다. 그러나 이 관계를 원주민 입장에서 뒤집어서 쓴 미셀 투르니에(M.Tournier)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Vendredi ou les Limbes du Pacifique)>은 유배문화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 유배문화는 유배인 일방의 시혜적 문화가 아니라 원주민과의 교호적인 상생문화라는 사실이다.

유배문화는 1992년 ‘러시아의 솔로베츠키 제도 문화역사 유적군’을 시작으로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 시작하면서 그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1999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로벤 섬’이, 1999년 그리스의 ‘성 요한 수도원과 파트모스 섬 요한계시록 동굴’이, 2008년 모리셔스의 ‘르몬 문화경관’이, 2010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교도소 유적’이 각각 등재됐다.

2010년 오스트레일리아 교도소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사례도 주목할 가치가 있다. 등재를 위해 2000년부터 ‘노퍽 섬’ 지방정부는 다양한 노력을 전개했다. 매년 ‘유배의 섬 콘퍼런스(Isles of Exile Conference)’를 개최했다. 콘퍼런스에서는 유배지로서의 섬들이 갖는 중요한 역사와 유산을 치열하게 탐구했다. 각 유배지의 유산을 보존하고 다음 세대가 지속적으로 찾을 수 있는 장소로 만들기 위한 관련 이슈들이 제기됐다. 이런 노력의 결과 2010년 오스트레일리아 교도소 유적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결과를 얻게 됐다.


▎제주도의 바다는 유배인을 가두는 울타리였고, 중앙의 착취와 침탈이 이뤄지는 통로의 구실을 했다.
유배는 우리나라 경우 한일합방 이후에는 없어진 과거의 제도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유배지 문화는 관광이나 문화산업적 측면에서 가장 주목받는 주제 중의 하나가 됐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노력이 계속되고 있고, 유배를 스토리텔링해 그것을 기반으로 영화, 드라마, 뮤지컬은 물론 와인과 커피 등 다양한 유배상품이 개발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면에서 생애 두 차례 유배를 당했던 나폴레옹은 매력적인 주제로 활용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강원도 영월에서 이루어지는 단종문화제가 대표적이며 제주도에서도 ‘추사유배길’을 조성해 유배체험 프로그램이 성공적으로 정착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셀프유배’니 ‘자발적 유배’ 등의 표현에서 보듯이 이제 유배는 어둡고, 무거운 형벌의 개념에서 벗어나 휴식과 회복, 나아가 창조 등의 발전적이고 긍정적인 개념으로 변모하고 있다. 또한 최근의 유배에 대한 연구도 난민이나 추방, 망명 등 정치적인 것은 물론 혼밥, 혼술 등 개인의 심리적 문제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주제로 발전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유배, 유배문화, 제주 유배문화는 여전히 관심을 가져야 할 우리들의 매력적이고 현실적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절실하다.

양진건 - 1957년 제주에서 태어나 현재 제주대 스토리텔링연구개발센터의 센터장을 맡아 제주유배문화의 스토리텔링 작업을 하고 있다. 그동안 제주유배길 개발, 유배 영화제, 추사밥상전시회, 유배꽃차전시회, 유배음악제, 창작음악극 <광해, 빛의 바다로 가다> 제작공연 등 다양한 작업을 해왔다. 제주유배 관련 저서로 <제주유배길에서 만난 사람들> 등이 있고, 그 밖에 다수의 유배관련 논문이 있다. 2012년 제주 유배문화 콘텐츠 개발사업의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상을 받았다.

201709호 (2017.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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