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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럴 아츠의 심연을 찾아서] 뉴욕 맨해튼 아마존 북스 현장에서 만난 인류의 내일 

종이책은 사라져도 기록은 영원하다 

글·사진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고령자 내세운 ‘디지털 실험실’에서 500년 책 역사의 최후를 실감… 후세에 전하고 뭔가 알려는 본능이 있는 한 인류의 문화·문명은 전진할 것

▎뉴욕 아마존 북스는 다른 지역으로도 확산될 전망이다. 디지털 출판이 증가할수록 아마존 북스의 존재 가치도 한층 더해질 것이다.
“안빵맨(アンパンマン)이 영웅입니다. 요즘 대세입니다. 21세기 젊은이들의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하면 강의가 안 됩니다. 주목을 끌기 위해서는 이해하고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국제저널리즘 전공의 일본인 교수로부터 들은 얘기다. 안빵맨은 야나세 다카시(柳瀬嵩)가 만든 만화영화 <달려라 안빵맨>의 주인공이다. 한국에서도 ‘날아라 호빵맨’이란 타이틀로 19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텔레비전을 통해 만날 수 있다. 30대 이하 한국인이라면 “용감한 어린이의 친구 우리 우리 호빵맨”이라는 노래에 익숙할 듯하다. 팥(あんこ)으로 만들어진 빵이 바이킹맨, 세균맨과 같은 악에 맞서 이긴다는 것이 주된 스토리다. 일본 만화의 특징이지만, 감동적인 스토리텔링이 곳곳에 배어 있다. 엽기형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가끔씩 자신의 신체의 일부도 뜯어서 약자에게 먹이는, 희생형 캐릭터이기도 하다.

교수의 얘기는 강의 중 학생들에게 “자신의 영웅이 누구인가?”에 대한 답에서 비롯됐다. 40여 명 가운데 50% 정도가 안빵맨을 넘버원으로 손꼽았다고 한다. 어머니, 아버지 같은 혈육은 물론, 영웅 리스트에 자주 등장하는 알렉산더, 나폴레옹 같은 지도자가 아니다. 거짓말을 안 하는 링컨, 신문팔이 발명왕 에디슨도 무관하다. 공기로 간단히 물을 만들어낸 과학자, 아프가니스탄에서 천수답 퇴치 농사지도에 나선 70대 퇴직 샐러리맨, 핑계꾼을 위한 만능해결사 도라에몽이 안빵맨과 더불어 대학생들이 언급한 영웅들이다.

교수는 안빵맨을 영웅시하는 대학생들의 공통점에 대한 설명도 빼놓지 않았다. “모두 하루에 수십 번씩 손을 씻습니다. 악의 대명사인 바이킹맨이 퍼트려놓은 세균을 막기 위한 예방책으로, 만화 속에서 안빵맨이 보여주는 모범적 행동이기도 합니다. 영웅은 아류를 만들지요? 영웅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흉내 냅니다.”

일본 대학생의 영웅 리스트는 필자의 어제를 떠올리도록 만드는 좋은 소재다. 언제부턴가 하나씩 사라지고 있지만, 30여 년 전 필자의 마음속에도 이런저런 영웅이 존재했다. 개발도상국 대부분이 그러하듯, 혈연·민족·국가에 기초한 집단 속의 영웅이 대부분이다. 영웅에 대한 개념을 정확히 잡아야겠지만, 롤모델이란 부분이 공통점 중 하나일 것이다. 영웅의 행동과 이상에 감동하면서 뭔가 체득하려고 애썼다. 위인전은 아예 수십 권짜리 세트로 구입해서 읽었다. 이순신 장군은 필자와 같은 장년세대의 영웅 리스트 상위 어디쯤에 들어서 있다.

안빵맨이 2017년 영웅으로 복귀한 이유는?


▎쟁쟁한 글로벌 명사들을 제치고 일본의 인기 캐릭터로 장수하는 안빵맨.
그러나 한 세대를 뛰어넘어 안빵맨이 2017년 청년들의 영웅으로 등장했다. 일본 상황이라 거리를 둘지 모르겠지만, 필자는 달리 본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일정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일본과 거리를 좁혀온 것이 한국의 근현대사의 흔적이다. 인터넷에 들어가 안빵맨, 즉 호빵맨을 키워드로 한 검색에 들어가보자. 무려 116만 건에 달한다. 원조 일본의 3200만 건에는 못 미치지만, 영어를 제외할 경우 한국의 관심도가 가장 높다. 안빵맨을 영웅으로 대하는 세계관은 한국에도 곧, 아니 이미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안빵맨을 둘러싼 필자의 생각을 황당하다, 심지어 친일적이라고 비난할지 모르겠다. 안빵맨 드라마를 한 번도 안 본 사람들의 생각일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안빵맨을 본 어린이들의 생각을 못 읽는 ‘꼰대의 편견’이다. 지하철이 어두운 굴속에 들어갔다. 창측 좌석에 앉아있던 서너 살짜리 어린이가 곧바로 손가락으로 창을 민다. 손가락으로 밀면 화면이 밝아지는, 아이폰을 통한 경험 때문일 것이다. 화상을 손가락 하나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기술은 10년 전 애플 아이폰이 등장하면서 나타난 21세기 상식이다. 앞으로는 모든 영역이 손가락 하나, 아니 목소리·눈동자만으로도 움직일 것이다. 세상 변화의 흐름을 무시하면 사성(四星) 장군, 국제영화제 수상 감독, 기업 대표라도 예외 없이 시대의 흐름에 뒤쳐진다.


▎아마존 서점은 공간의 4분의 1 정도를 디지털 분야에 할애하고 있다.
나름대로 할 말이야 있겠지만, 변한 세상에서 귀를 기울여줄 사람은 없다.

만화영화에 대한 관심은 의식이 형성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공상의 세계에 대한 관심은 아직 어리다는 증거이다. 텔레비전만이 아니다. 고성능 모바일이 장난감 가격대로 떨어진 지 오래다. 소프트웨어의 경우 공짜가 주류다. 안빵맨의 스토리는 너무도 단순하다. 유치원 유아용으로 적격이다. 태어나면서 처음으로 접하는, 뭔가 의롭고 강하고 믿음직스런 캐릭터가 바로 안빵맨이다. 이순신, 세종대왕, 나아가 슈퍼맨, 배트맨과 같은 미국용 캐릭터는 20세기 영웅으로 전락해가고 있다. 뭔가 근엄한 세종대왕보다, 먹음직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친근하고도 다정스런 팥빵 캐릭터가 21세기 영웅이다.

뉴욕 맨해튼 아마존닷컴 서점은 안빵맨 영웅론의 정반대편에 선 얘기로 느껴진다. ‘맨해튼+아마존 닷컴+서점’이란 기묘한 조합에 관한 뉴스가 지난 3월 말에 들려왔다. 아마존닷컴이 맨해튼 콜럼버스 서클의 워너센터(Warner Center)에 아날로그 서점을 오픈했다는 것이다. ‘아마존 북스(Books)’란 이름이 서점의 정식 타이틀이다. 콜럼버스 서클은 맨해튼 웨스트 59번가, 센트럴파크 서쪽 입구에 해당된다. 워너센터는 CNN이 들어선 건물로, 트럼프 호텔을 마주 보고 있다. 주변은 뉴욕에서 가장 많은 사람으로 붐비는 곳이다. 아마존 북스는 워너센터의 3층에 들어서 있다.

사실 아마존 북스는 올해 봄이 아닌, 2년 전인 2015년 11월 처음으로 등장했다. 서부 워싱턴주 시애틀에서다. 이후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서부에서 확장해가던 중 마침내 뉴욕에 문을 연 것이다. 2017년 7월 현재 전부 8군데 아마존 북스가 오픈한 상태다. 1년 내로 뉴욕 34번가를 비롯해 미국 전역에 5군데나 더 생겨날 예정이다.

애플 매장의 정반대 편에 자리한 아마존 북스


▎아마존 에코는 아마존 디지털 인공지능(AI) 사업의 핵심이다.
뉴욕 오픈 소식을 들었을 때 주목한 부분은 아마존 북스의 위치다. 남녀노소 모두가 모이는 센트럴파크 서문 앞이란 점도 있지만, 또 다른 ‘상징적 의미’도 발견해낼 수 있다. 애플을 의식한 공간이다. 뉴욕의 최대 애플 매장은 이스트 59번가, 센트럴 파크 동문 입구에 들어서 있다. 애플 신자들의 컬트사원에 해당되는 곳으로, 신제품이 등장할 때마다 글로벌 뉴스로 타진됐던 ‘얼리어댑터(Early Adapter)’의 중계 현장이다. 현재 애플은 재단장 중이다. 뉴욕 매장의 상징인 ‘애플 유리’를 깨고 내년에 새 모습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아마존 북스 뉴욕 매장은 애플의 정반대편에 위치해 있다.

아마존닷컴의 CEO 제프 베조스는 7월말 한때 IBM의 빌 게이츠를 누르고 세계 최고 갑부 자리에 올랐다. 돈만이 아니라, 지적인 면에서도 꿀릴 것이 없다. 21세기 레오나르도 다빈치라 할 스티브 잡스를 누를 유망주가 제프 베조스다. 애플·구글·페이스북·아마존은 인류의 미래를 짊어질 IT 4대천왕에 속한다. 필자의 주관적 판단이지만, TI 4대천왕 가운데 지구 최후의 날까지 존속할 곳은 아마존닷컴이다. 다른 IT 사업 영역과 달리 아날로그에 기초한 소비자와의 관계가 아마존의 장점이자 특징이기 때문이다. 한번 아마존에서 상품을 구입한다면, 영원한 소비자로 정착된다. 구글이나 페이스북은 실소비자와 무관한 디지털에 기초한 기업이다.


▎아날로그 서점에서 볼 수 있는 평가도 디지털 독자들의 피드백을 기초한 것이 대부분이다.
맨해튼의 아마존 북스에 들른 것은 아마존닷컴의 ‘홀푸드(Whole Food)’ 매입 소식이 전해진 7월 초다.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거리이기에 주차가 가능한 일요일을 택해 들렀다. 일요일 맨해튼의 노상주차는 무료다. 워너센터 내부는 인산인해인 바깥쪽과 달리 지극히 조용하다. 엄청나게 비싼 공간이란 점이 이유일 듯하다. 하루에 1000달러에 육박하는 맨더린 오리엔탈 호텔, 미슐랭 스리스타로 저녁 한 끼에 500달러는 가볍게 넘어가는 일식 마사(雅)와 프랑스 요리점인 페르세(Per Se)가 들어선, 세계 자본주의의 첨병이 바로 워너센터다. 뉴욕 문화 이벤트의 상징인 링컨센터의 공연도 워너센터 최고층에서 열린다.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3층으로 올라서자, 아마존 북스가 눈에 들어온다. 규모는 생각했던 것보다 크지 않다. 대략 100평, 즉 가로세로 20m 길이의 공간이다. 내부에 전시된 책에서 특이한 점이 눈에 띈다. 책에 대한 리뷰, 즉 독자들의 평가다. 별 다섯을 만점으로 하면서 독자들의 몇 퍼센트가 별 몇 개로 평가했다는 식의 설명이 들어서 있다. 헤리포터의 경우 1857명의 독자가 평균 4.9스타로 평가했다고 한다. 나중에 알았지만, 헤리포터를 원하는 사람은 책 바로 밑 설명서에 붙은 바코드를 모바일로 체크한 뒤 계산대에서 찾을 수 있다. 바코드에 클릭하는 순간, 계산대에서 기다리는 식이다. 물론 아마존 북스 멤버는 15% 정도 싸게 구입할 수 있다.

고령자, 연소자 동시에 사로잡는 오프라인 아마존


▎베니스에서 만난 캄포 서점. 책을 통해 사람들과의 접촉이 이뤄지는 소통 공간으로 활용된다.
안으로 들어가 책 전시대를 훑어봤다. 헤밍웨이나 톨스토이의 책 같은 고전은 아예 없다. 현재를 읽을 수 있는 트렌드 중심의 책이 전부다. 아마존이 선정한 인기 소설 50선, 인기 논픽션 10선, 인기 자서전 30선 같은 것들이 일렬로 전시돼 있다. 요리나 여행 관련 서적도 볼 수 있다. 모든 책은 독자들의 반응에 기초해 얼마나 많은 별을 갖고 있는지로 평가된다. 물론 아마존닷컴 사이트의 디지털 평가를 통해 수집된 정보다. 아날로그 서점이기는 하지만, 정통성과 권위는 디지털에서 차용하는 식이다. 그렇지만 종이책 서점으로서의 특징도 접할 수 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에 대한 배려다. 곳곳에 푹신한 의자가 들어서 있다. 스타벅스 같은 분위기라고나 할까?

흥미로운 것은 아마존 북스 내부 공간에 흘러나오는 음악들이다.


▎아마존이 만든 <게임 오브 드론(Game of Thrones)>은 드라마로도 인기를 구가한다. 책만이 아니라 드라마도 파는 곳이 아마존 북스다.
대략 1970~80년대 히트곡들이다. 필자가 주말에 아침 운동을 하러 가서 듣는 YMCA 내 선곡과 비슷하다. 주말 YMCA에 들르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60대 이상 은퇴자다. 그들의 청춘을 되새겨주는 아바, 사이먼 앤 가펑클, 비지스, 올리비아 뉴튼 존과 같은 70년대 가수가 대세다. 맨해튼 콜럼버스 서클에서 듣는 아마존 북스의 음악도 한 세대 전의 히트곡이다. 미국 내 비즈니스 센터에서의 음악 선정은 결코 ‘대충’하지 않는다. 좀 과장하자면 빅데이터에 근거해 손님들의 연령을 고려해 틀어준다. 아마존 북스를 찾는 사람들이 어떤 연령층인지 알 수 있는 증거다.

아마존 북스가 은퇴자를 주축으로 한 고령자용 공간이란 점이 다소 의아스럽게 느껴질 듯하다. 물론 아날로그 종이책에 익숙한 사람들이 고령자라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유도 있다. 보통 어린이와 함께 들르는 손님이 고령자라는 점을 고려하면 미래의 소비자를 위한 투자라는 식의 해석도 가능하다. 실제로 아마존 북스 내 전시대에는 어린이용 책이 많다. 주변을 둘러봐도 어린이와 함께 온 사람들이 많다.


▎여행용 가방과 조깅용 물통을 파는 아마존 북스. 백화점으로서의 기능이 21세기 서점의 당연한 모습이다.
필자는 해마다 겨울이면 베니스에서 시간을 보낸다. 어린이를 상대로 한 책방은 필자가 가장 눈여겨보는 베니스 문화공간 중 하나다. 베니스 구석 어디에 가도 쉽게 만날 수 있다. 베니스는 인구 30만에, 전부 118개 섬으로 이뤄진 도시다. 가장 큰 섬인 산마르코 광장의 베니스 인구는 10만 명 정도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필자가 확인한 어린이 책방은 30개 정도다. 대략 3300명 당 어린이 책방 하나 꼴이다. 왜 베니스에는 어린이 책방이 그토록 많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고령화가 배경 중 하나일 듯하다. 어린이 책방에 들른 사람은 어린이를 데리고 온 할아버지, 할머니 즉 고령자들이다. 손자, 손녀를 위해 책을 사고, 스스로의 어릴 때 기억을 되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곳곳에서 성업(盛業) 중이다. 단순히 책을 파는 곳이 아니다. 고령자의 어릴 때 기억을 되살려 후손에게 물려주는 추억의 무대다.

사실 베니스 어린이 서점은 책만이 아닌 잡화 판매점에 가깝다. 음료나 케이크에서부터 장난감·의류·장식물 같은 것도 판다. 어린이용 동화와 베니스 역사 관련 화보도 있지만, 조립형 로봇이나 인형도 있다. 책을 주제로 한, 어린이용 ‘테마파크’로 느껴진다. 어린이의 흥미를 끌 만한 모든 것이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공간 배치가 책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이다. 뉴욕의 아마존 북스는 어린이를 대신해 고령자를 내세운 ‘장년용 공간’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베니스와 유럽에서 볼 수 있는 어린이 전용서점처럼, 결과는 똑같다. 닭과 달걀의 문제일 뿐이다. 아직 안 보이지만, 추정컨대 가까운 시일 내 맨해튼 서점도 어린이용 장남감이나 의류로 뒤덮일 것이다. 보는 각도를 달리하면, ‘70년대 히트곡=초등학생 동요’로 볼 수도 있다.

‘디지털 시대=종이책의 무덤’이란 상식을 확인


▎파리 서점에서 판매하는 1960년대 전후의 비디오테이프. 책만이 아니라 기억을 파는 곳이 아날로그 서점이다.
아마존 북스에서의 하이라이트는 디지털 전시관이다. 아마존닷컴이 자랑하는 모든 디지털 하드와 소프트가 전시돼 있다. 전시 공간은 전체 매장의 4분의 1 정도다. 아마존닷컴의 전자북 디바이스인 킨들(Kindle), 애플 TV에 해당되는 아마존 파이어(Fire), 인공지능(AI)에 해당되는 아마존 에코(Echo), 아마존 파이어에 선보이는 아마존 독자 프로그램 등이 디지털 전시관의 내용이다. 올여름을 뜨겁게 달군 아마존 제작 최고 인기 드라마인, <게임 오브 드론(Game of Thrones)>의 예고편도 초대형 텔레비전을 통해 볼 수 있다.

디지털 전시관은 아마존 북스가 어떤 목적 아래 설립됐는지를 알게 해주는 현장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종이책을 통한 디지털 실험실이 아마존 북스가 탄생된 이유다. 종이책은 추억과 기억을 되살리는 촉매제일 뿐 진짜 주역은 역시 디지털이다. 킨들·파이어·에코로 모든 정보가 통합되는 것을 직접 목격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아마존 북스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디지털 시대=종이책 무덤’이란 평범한 상식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아마존 북스다. 디지털은 대세다. 아놀로그에 향수를 가지면서 LP레코드 수집에 아무리 열을 올린다고 해도 후대로 가면 끝이다. 아버지의 ‘고상한 취미’를 이어받아 전축용 진공관을 구입하러 땀 흘리는 자식은 극히 드물다. 아무리 종이책에 기댄다 해도 이미 저물어가는 태양이다. 이순신·세종대왕·슈퍼맨·배트맨을 외쳐도 탄생 후 처음 눈앞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안빵맨이다. 부정하고 싶겠지만, 아마존 북스는 무덤으로 변해갈 종이책의 오늘과 내일에 대한 기록 현장으로 와 닿는다.

아놀로그 예찬론자들은 종이책이 갖는 장점과 매력에 주목할 것이다. 결코 디지털에 밀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반은 옳고 반은 틀릴 듯하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때문이다. 종이책도 마찬가지다. 인류 역사를 보면 대중적 차원의 책의 역사는 그렇게 길지 않다. 크게 볼 때 활판 인쇄를 창조해낸, 15세기 말 독일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가 기점이다. 고려시대 금속활자를 원조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구텐베르크가 효시(嚆矢)다. 활자 자체보다 활자를 통해 찍어낸 책의 문명, 문화적 영향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구텐베르크는 일부 성직자들이 독차지하던 성경을 대량으로 찍어내 유럽 전역에 보급한다. 성직자들의 자의적 성경 해석이 끝나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난다. 1000년 이상 끌어온 중세의 어둠이 마침내 걷히게 된다.


▎세계적 붐을 타고 있는 일본 코스프레의 원조는 진보초 바로 옆에 붙은 아키하바라다.
구텐베르크의 성경이 나오기 전까지의 서적은 특권층을 위한 소유물에 불과했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도 드물었고, 생존 자체에 매달리던 시대였기에 대부분의 삶은 책과 무관했다. 책도 종이가 아닌 파피루·양가죽·돌에 새겨서 보관했다. 엄밀히 말해 책이 아니라 기록 보관물인 셈이다. 책 하나 만들기 위해 필요한 돈과 시간도 엄청났다. 성경을 통해 본격화된 책의 역사는 이후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등장 이후 가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교육 의무화가 정착되면서 대중적 차원의 책 보급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아놀로그의 대표 주자에 해당되는 책의 역사는 길어야 500년에 불과하다. 아마존 북스는 500년 역사의 최후를 느낄 수 있는 무대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틈은 있다. 종이책 나아가 아날로그 서점의 종언(終焉)은 무차별 백화점식 대형서점에 해당되는 사항이다. 나름대로의 향이나 컬러와 더불어 특화할 경우 생존해 나갈 수 있다.

유럽에서 볼 수 있는 작고 특화된 서점이 좋은 예다. 유럽의 특화된 소규모 책방은 교외나 중소도시에 들어선 독립형 매장에 적용된다. 유럽 서점의 특화 영역은 보통 문학과 아트로 이분화된다. 소설이나 순수문학 중심의 책방과 컬러판 대형화보나 예술서적에 주목하는 아트 전문점이다. 이들 유럽 서점들은 독자의 평가에 대해 무심하다. 문학·예술 전문가들의 평론에는 귀를 기울이지만, 인터넷을 통해 수집되는 엄청난 수의 반응에 대해서는 별로다. 대중의 평가가 아니라, 서점을 직접 찾는 사람들의 판단에 방점을 두는 식이다. 작지만 세상에 하나뿐인 레스토랑과 통일되고 규격화된 맥도날드 햄버거의 차이가 유럽 서점과 아마존 북스의 캐릭터일 듯하다. 미국 전역 8군데에 문을 연 아마존 북스는 100% 똑같은 모습으로 손님을 맞이한다. 개성과 무관한, 잡식성 트렌드 백화점이 아마존 북스다.

더불어 책의 영역을 확산하는 것도 종이책의 생존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아마존 북스 매장에서 볼 수 있는 여행용 가방이나 물통 판매 같은 것들이다. 이른바 라이프스타일 서점이다. 책을 일상생활에 필요한 여러 도구 중 하나로 해석하는 공간이다. 책이 주인공이기는 하지만 전부는 아니라는 발상이다. 세계적으로 볼 때 라이프스타일로서의 공간에 가장 먼저 주목한 곳은 서구의 서점들이다. 독일의 게스탈텐 (www.gestalten.com), 프랑스의 알타자트(www.artazart.com), 영국의 마그마샵(www.magma-shop.com) 같은 서점이 대표적이다. 모바일 기기에서부터 티셔츠, 와인잔, 등산 칼, 심지어 스포츠 도구와 스포츠 음료도 판다. 물론, 가방·볼펜·노트와 같은 고급 문방구도 라이프스타일 서점의 메뉴 중 하나다. 라이프스타일 서점은 유럽은 물론 전 세계로 파급돼 대세가 될 것이다. 서울의 대형서점처럼 책과 라이프스타일 코너를 분리·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합쳐서 제공하는 식이다.

책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도구다!


▎일본 도쿄 진보초 고서점은 흑백영화처럼 느껴지는 아날로그 서점이지만, 오감을 통째로 느낄 수 있는 살아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라이프 스타일 서점은 나름대로의 이벤트를 통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낸다. 책 소개나 저자와의 만남만이 아닌, 예술·음악·취미 관련 이벤트다. 프랑스 파리에서 봤지만, 보자기를 이용한 일본식 장식인 후로시키(風呂敷)를 테마로 한 라이프 스타일 서점도 등장했다. 라이프스타일에 관한 특별한 센스를 통해 손님을 끌어 모은다. 뜨개질과 종이접기(折り紙)에 특화한 놀이공방으로서의 서점도 일상화되고 있다. 이벤트가 끝난 뒤에는 관련 서적을 선보인다. 아마존 북스에서는 아직 라이프스타일 이벤트가 없다. 가까운 시일 내에 등장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책방이 아니라 문화를 팔고 전하는 공간이다.

일본 서점은 유럽과 다른 차원의 생존에 강한 곳이다. 서구의 마니아(Mania)에 해당되는, 이른바 오타쿠(オタク)들의 놀이터로서의 서점이다. 규모 면에서, 일본 서점만큼 작은 곳도 드물다. 그러나 서점 내에 배치된 책이나 내용물을 보면 질적으로 양적으로 결코 지지 않는다. 좁은 공간을 능률적으로 활용하면서 정리·정돈에 철저하다. 책의 재고 정리나 품질관리도 철저하다. 유럽처럼 문학 아트로 이분화된 것이 아닌, 오타쿠들의 취향에 맞춰 각자 백인백색(百人百色)이다. 1970년대 10대 소녀의 수영복 사진 전문서점, 만주 괴뢰국에서 제작된 농업 관련 서점, 인도 페르시아 지역의 괴담(怪談) 관련 그림 전문서점 등의 공간이 곳곳에 있다. 책값도 합리적이다. 필자의 판단이지만, 전 세계의 종이책과 서점이 사라진다 해도 일본은 지구 종말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책과 서점의 개념을 전혀 다르게 확장·확산해서 보급 활용하는 곳이 일본이다.

올해 초 터키 아시아 쪽 남부지역에 위치한 에페수스(Ephesus)에 다녀왔다. 고대 그리스시대 유적지로, 이후 로마, 비잔틴 시대에도 살아남은 도시다. 전 세계 관광객이 몰려드는 세계적 명소 중 하나다. 이미 세 번째 방문한 곳이지만, 갈 때마다 새롭다. 에페수스는 거대 건축물들의 보존 상태가 좋다. 신전·극장·시장 등 고대 그리스의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늘어서 있다.

도서관에서 느낀 책과 기록에 대한 인간의 애착


▎터키 에페수스의 셀수스 도서관 입구. 서기 2세기에 세워진, 고대 그리스 문명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증거다.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필자가 가장 하이라이트로 꼽는 곳은 셀수스(Celsus) 도서관이다. 서기 114년부터 3년간에 걸쳐 완공된 건물로, 로마 정치가 셀수스가 자신의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만든 대형 건축물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전통이지만, 대형 건축물 설립은 지역민에 대한 공헌의 척도로 통한다. 셀수스 도서관은 원래 아버지 무덤이 있던 곳에 세워졌다. 무덤 주변에 1만2000건에 달하는 수많은 기록물과 책을 보관하는 과정에서 도서관이 탄생했다. 기원전 2세기를 기준으로 할 때 당시 세계 3대 도서관 중 하나다. 2층으로 구성된 건축물 정면에는 덕의 여신인 아레테(Arete)를 비롯해 대리석 입상이 늘어서 있다. 무덤을 겸한 도서관이란 발상 자체가 특이하지만, 사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보면 너무도 당연한 전통이다. 사자(死者)에 관련된 기록물과 책자는 피라미드 곳곳에서 발견된다.

셀수스 도서관을 보면서 느낀 것은 책과 기록에 대한 인간의 애착이다. 죽은 사람일지라도 글을 통해 후세에 뭔가를 전하려는 애틋한 집념이 느껴진다. 실용적으로 읽고 배우는 도구로서 책이 아니다. 뭔가를 후세에 전하려는 인간적 본능의 산물로서의 책이다. 1만2000건에 달했다는 기록물의 내용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셀수스 아버지에 관한 기록과 더불어 그가 좋아했던 글이나 정보, 나아가 새롭게 창조해낸 부분에 관한 글이 대부분이었을 듯하다. 당시 종이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대부분의 글은 양가죽이나 파피루스에 쓰였을 것이다.

종이책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뭔가를 후세에 전하려는 의지가 있는 한 책 그 자체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그 같은 의지와 염원을 바탕으로 한 증거가 바로 에페수스의 하이라이트인 셀수스 도서관이다. 성경의 요한 계시록(John Revelation)에서 에페수스는 아시아의 7대 교회 중 하나로 통한다. 당시 세계 3대 도서관에 속한 도시였기에 문화만이 아닌, 종교적으로도 세계의 중심이 된 것이다.

안빵맨 영웅론을 보면서 세상사 변화를 절감할 듯하다. 아마존 북스 현장을 보면서 종이책 종언을 확인할 수 있을 듯하다. 세종대왕이 잊혀졌다고, 종이책이 사라진다고 낙담하거나 슬퍼할 필요는 없다. 영웅을 기대하고 그리며 닮으려는 인간의 마음, 뭔가 후세에 전하면서 자신도 알고 싶어 하는 지적 본능이 핵심이다. 인류는 낙관적인 동물이다. 세기말 사상에 찌들려 숨도 못 쉬던 19세기말 총천연색 인상파 화풍이 탄생한다. 언제나 그러하듯 인류 역사는 밝고 맑다. 안빵맨과 아마존 북스는 그 증거다.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일본직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709호 (2017.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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