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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풍기의 선물의 文化史(9) 청심환] 이역만리 사절단 고행길도 이 ‘만병통치약’ 한 알이면… 

 

김풍기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조선 후기 청나라를 오가던 연행사 일행의 필수품… 선비들이 새 문물과 만나게 해주는 마법의 ‘열쇠’ 역할도

▎단원 김홍도가 도화서(圖畵署) 화원 자격으로 연행에 참가한 1789년 이후 그린 <연행도>. 조선 사절이 청 황제의 행차를 맞이하는 모습으로 추정된다. / 사진제공·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뜻하지 않게 열하를 다녀오게 된 내력을 자신의 명저 <열하일기> 안에 상세히 기록했다.

열하에서의 꿈같은 며칠을 보낸 뒤 다시 연경(燕京)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 행로에서의 일을 기록한 부분이 <환연도중록(還燕途中錄)>이다. 1780년 8월 17일자 기록에 의하면 박지원은 한낮의 고북구(古北口)를 둘러본 뒤 인근의 한 절에 들르게 됐다. 그 마당에 오미자를 말리느라 펼쳐놓았기에 무심코 두어 알을 집어서 입에 넣고 씹어봤다.

순간 한 승려가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치면서 거칠게 뭐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박지원은 놀라서 난간 옆으로 비켜섰다. 마침 마두(馬頭) 춘택(春宅)이 담뱃불을 붙이러 들어섰다가 이 광경을 목격한다. 그는 즉시 승려에게 쫓아가서 박지원을 위해 싸움을 한다. 너무 더운 날씨라 찬물 생각이 나서 그저 오미자 몇 알 집어 먹었기로서니 어찌 무례하게 어른의 체면을 깎느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승려 역시 입에 흰 거품을 물면서 말대꾸를 했다. 춘택은 즉시 그 승려의 뺨을 후려갈기면서 조선말로 엄청나게 욕을 퍼붓는다. 그제야 그 승려는 손으로 뺨을 가리고 비틀거리면서 안쪽으로 들어간다. 박지원이 춘택에게 그만하라고 이야기해도 춘택은 여전히 분을 삭히지 못하고 난리를 친다.

마침 부엌문 옆에 한 승려가 있었는데 그는 이 다툼에 끼어들지 않고 옆에서 빙긋이 웃으며 구경을 하고 있었다. 춘택은 그를 한 주먹에 두들겨서 엎어 메치고는 “우리 어르신께서 황제 폐하께 이 일을 아뢴다면, 아마도 네놈의 대가리를 쪼개버리든지 이 절을 밀어서 평지를 만들 것”이라면서 호통을 친다.

엉뚱하게 얻어터진 승려가 항의했지만, 춘택이 더욱 기세를 올리면서 청나라 황제를 운운하면서 폭언하자 그 역시 기세가 죽는다. 내친김에 춘택이 벽돌 하나를 뽑아서 던지는 시늉을 하자 두 승려는 별안간 웃으면서 도망쳤다가 잠시 뒤 산사(山楂) 열매 두 개를 가지고 와서 웃는 얼굴로 박지원에게 바치면서 청심환을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다.

<열하일기>를 읽다 보면 참 다양한 언어와 말투가 스며 있는 것을 느낀다. 그중에서도 박지원의 유머는 참 대단하다. 약간 지루해진다 싶으면 슬며시 끼어 있던 유머가 머리를 내밀고, 문득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앞서 소개한 일화도 내가 좋아하는 대목이다. 처음 이 부분을 읽었을 때 나는 춘택의 캐릭터가 흥미로웠다. 자신이 모시는 어른을 위해 과감하게 나선 것도 그러하지만, 화를 주체하지 못해서 승려를 때리면서 알아듣지도 못한 조선말로 욕을 마구 퍼붓는 대목은 생각만 해도 웃음이 번졌다.

그런데 춘택에게 얻어맞으면서도 시금털털한 산사 열매 두 개를 손에 들고 박지원에게 와서 “청심환 좀 얻을 수 있겠느냐”면서 웃는 중국 승려의 모습도 머릿속에 떠오른다. 박지원이 이 글에서 쓴 것처럼 아마도 이들이 오미자 몇 알을 집어먹는 박지원에게 시비를 걸었던 것은 분명 청심환을 얻을 요량이었을 것이다. 청심환 한 알을 얻은 중국 승려는 고맙다면서 머리를 조아렸지만, 박지원 자신은 이 일에서 오미자 몇 알이 가져온 사건을 돌아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청심환 때문에 벌어진 이 사건은 당시 중국에서 조선의 청심환이 얼마나 이름난 약이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열하일기>를 보면 박지원이 청나라로 가는 연행사(燕行使)의 일원이 된 뒤 준비했던 물건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연행사를 따라가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중국과 조선 사이에 교역을 할 만한 물건을 일정량 가지고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선의 인삼과 같이 청나라에서 고가(高價)에 팔릴 만한 물건을 가지고 가서 그것을 팔아 다시 조선에서 인기가 있는 품목을 사서 가지고 오면 상당한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지원은 가난한 살림에 조선의 물건을 대량 구매할 수 없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애초에 그럴 마음도 없었다. 중국에 가서 훌륭한 선비를 만나 학문적 토론을 하고 진리를 구하며 좋은 벗을 사귀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다. 그러니 좋은 벗을 만나기 위해 필요한 약간의 선물을 준비하기만 하면 됐다. 그가 준비한 선물 중의 하나가 청심환이었다.

조선 후기 많은 지식인이 청나라를 다녀와서 기록을 남겼다. <연행기(燕行記)> <연행록(燕行錄)> <연기(燕記)> 등으로 불리는 이들 기록은 조선 후기 이 땅의 지식인들이 중국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중국을 통해서 어떤 지식을 습득하고 수입했는지, 그리하여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나아가 조선의 지식을 어떤 방식으로 변화시켰는지를 추정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사절단 구성의 비밀


▎연암 박지원의 영정. 우람한 체격과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이다.
이 기록들을 읽노라면 조선의 지식인들이 중국에 갔을 때 여러 종류의 선물을 주고받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은 조선의 특산품을 다량 준비하는데 행장을 꾸리기에 편리한 물건들이 대종을 이룬다.

작지만 조선을 드러내기에 적합한 것들, 예컨대 합죽선·종이·청심환 등이 인기 품목이었다. 이들 품목 중에서 내 관심을 끈 것은 바로 청심환이었다. 청심환 선물은 많은 <연행록> 대부분에서 건네진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청심환의 인기는 청나라의 관료들 사이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조선 사신단들이 오가는 연도의 이름 없는 백성들이나 산속 사찰의 스님, 도관의 도사들에게까지 퍼져 있었다. 홍대용(洪大容, 1731~1783) 역시 산해관에 오르고 싶었는데 문을 열어주지 않자 청심환을 많이 주겠다는 말로 그 문을 열게 만든다.

인기가 많은 물품에는 언제나 돈이 따르고, 돈을 벌고 싶은 사람들은 그 물건을 어떻게든 확보하고 거래를 해서 판매로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조선의 양반들에게는 체면이 중한 법, 그들은 청심환이 아무리 인기가 높다 한들 노골적으로 장사를 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가지고 가는 청심환은 대부분 선물로 사용됐다.

그런데 이 청심환을 이용해서 경제적 이익을 도모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하인들이었다. 그 사정을 알려면 청나라로 가는 연행사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박지원이 1780년 중국에 다녀온 뒤 4년에 걸쳐 집필해 펴낸 <열하일기>의 표지.
연사(燕使)라고도 하는 연행사는 청나라 수도인 연경(燕京, 지금의 베이징)으로 사신의 임무를 띠고 다녀오는 관료 또는 그 일행을 지칭한다. 연행사는 사신단의 총책임자인 정사(正使)를 비롯해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이 상층부를 형성하고, 이들을 보좌하는 여러 직임으로 구성된다.

어떤 목적으로 가는지에 따라 구성되는 인원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만기요람(萬機要覽)>에 의하면 대체로 300명을 상회하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여기에는 아마도 비공식 사절단이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공식 사절단 중에는 흔히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참여했던 조선 후기의 수많은 양반을 비롯해 장사치에 이르기까지 그 구성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공식사절단 역시 앞서 언급한 관료층을 비롯해 역관·의원 등과 같은 중인들, 군관을 비롯한 군사들, 잡일을 담당하던 하인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이 참여했다. 이들의 목적은 사신단이 꾸려질 때의 상황에 따라 규정됐지만, 공식적인 목적 외에도 중국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수집해 외교와 국제 정세 분석에 사용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모든 행동과 만난 사람들은 서장관의 기록에 남았다.

사신들이 왕래하는 과정에서 국가 간의 공식적인 무역이 이뤄지기도 했지만, 사신단에 끼어서 가는 사람들 사이에 엄청난 규모의 사무역이 이뤄진 것도 사실이다. 관료를 비롯한 양반들이야 노골적으로 사무역에 뛰어들지 못했겠지만 중인 이하 계층 사람들 입장에서는 사무역을 통해서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중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조선 물건을 구매해서 중국에 판매한 뒤 거기서 얻은 수익금으로 조선 사람들이 좋아하는 중국 물건을 사서 귀국했던 것이다.

인기가 많다는 것은 그 이면에 상당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을 숨기고 있다. 특히 종이나 부채와는 달리 청심환의 경우에는 중국 사람들에게 꾸준히 인기를 끌었다.

중국에서 3000배가량 비싸게 팔리기도


▎조선 사신들이 중국에 들어갈 때 반드시 통과해야 했던 산해관 남쪽 10리 지점에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노룡두(老龍頭)가 있다. 중국의 북방에 대한 경계가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보여준다.
중국에서도 청심환은 당연히 조제되는 약이지만 조선에서 만든 청심환의 약효에 비하면 비교 불능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청심환은 검지 손톱보다도 작은 환약이어서 소지하기가 편리한데다 조선에서의 청심환 가격은 매우 낮아서 경제적인 부담도 적었다.

사신단의 구성인원 중에서 신분이 낮은 사람들, 특히 일부 중인을 포함해서 하인이라 칭할 만한 사람들을 통틀어 하례(下隷)라고 한다. <만기요람>에 의하면 하례들의 직임은 15종가량 됐다. 하례 중에서 우두머리 격에 해당하는 상판사마두(上判事馬頭)를 비롯해 서자(書者), 좌견(左牽), 일산(日傘), 건량고직(乾糧庫直), 방료군관(放料軍官), 군뢰(軍牢) 등 그 역할에 따라 직임이 세분화돼 있었다. 이들 모두가 그런 것을 아니지만 연행사로 참여하는 관료들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구성하다 보니 연행사로 참여하는 양반들은 하례들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해야만 했다.


▎조선 사신들이 연경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랴오양(遼陽)에는 금나라 때 세워진 백탑(白塔)이 서 있다. 8각으로 쌓아 올린 13층의 벽돌탑으로 높이가 71m에 이른다.
하례들이 경제적 이익을 도모할 때 가장 인기리에 매매됐던 품목이 바로 청심환이었다. 1860년(철종11) 부사 자격으로 연경에 다녀온 박제인(朴齊寅, 1818~1884)이 남긴 <연행일기(燕行日記)> 부록에 청심환과 관련된 흥미로운 기록이 보인다. 그는 하례들이 청나라에서 얼마나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지 여러 사례를 들어서 기록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청심환과 관련된 기사 하나가 들어 있다.

하례들은 압록강을 건너기 전인 의주(義州)에서 청심환을 대량으로 싼값에 구매를 한다. 이 약품들이 정상적으로 만들어졌을 리 없다. 설령 처방전대로 만들었다 해도 그 양이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구매한 청심환을 중국에 가져가서 2000~3000배의 가격으로 팔아치운다.

그들이 비싼 값에 팔 수 있었던 것은 중국 사람들에게 조선의 청심환은 거의 만병통치약이나 다름없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중반에 연경을 다녀온 홍대용의 기록에서도 이미 조선의 청심환에는 가짜가 많다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중국 사람들 사이에서도 가짜가 많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을 것이다.

박제인의 기록에 의하면 옛날 어떤 하례 중의 한 사람이 청심환을 대량으로 가져가서 팔려고 했는데 잘 팔리지 않았다. 그러자 교활한 꾀를 냈다. 동료 중에 어떤 사람이 갑자기 쓰러진다. 주변 사람들이 놀라서 당황하는 빛을 보이는 사이에 그 광경을 목도한 중국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꽤 모여들자 조선의 하례들이 쓰러진 사람을 안고 팔다리를 주무르면서 응급처치를 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품에서 환약 하나를 꺼낸다. 바로 청심환이다. 환약을 물에 개어서 쓰러진 사람의 입에 흘려 넣어주자 잠시 뒤에 그 사람이 멀쩡하게 일어난다. 사정을 모르는 청나라 사람들은 청심환 덕분에 죽을 뻔했던 사람이 살아났다고 여겨서, 이때부터 조선의 청심환을 성스러운 신약(神藥)으로 여기게 됐다는 것이다.

닫힌 문도 열었던 ‘신비의 명약’


▎청나라 때 조성된 계림(鷄林)마을의 모습.
청나라 사람들도 가짜인 줄 알면서 구입하고 조선 하례들 역시 뻔뻔하게 가짜 청심환을 판매하니 박제인 입장에서는 국제적인 망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19세기 기록에는 중국에 판매되는 대부분의 청심환이 썩은 풀뿌리 같은 것들을 넣은 뒤 금박을 입힌 가짜였다는 말이 나온다.

시중에 유통되는 청심환이 대부분 가짜라면 진짜 청심환이 필요한 사람들은 어디에서 구했을까. 물론 그 시절에도 나름의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청심환을 가장 확실하게 구할 수 있는 방도가 있다. 바로 조선에서 오는 연행사 중에서 관료나 양반 출신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청심환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장사를 하기 위해 청심환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선물용으로 준비한 것인데다 그들의 사회적 지위라든지 체면을 중시하는 일반적인 성향을 고려하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청심환은 진짜라는 믿음이 간다.

춘택에게 뺨을 얻어맞고 온갖 욕설을 들으면서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박지원에게 청심환 한 알을 얻으려는 중국 승려의 모습이 일견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지만, 이런 사정을 고려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종이나 부채와는 달리 청심환은 인간의 건강에 직결되는 약품이다. 예나 지금이나 약품을 쓰는 사람의 병이나 체질 등에 따라 약효가 달라지기 때문에 선물로 택할 때는 조심에 조심을 거듭한다.

청심환은 중풍으로 쓰러졌을 때 효과가 있는 약으로 알려져 있지만, 갑자기 쓰러지거나 마음이 진정돼야 할 때 사용된다. 병원이나 의사를 접하기 어려웠던 19세기 이전에 진짜 청심환 한 알이 있다는 것은 가족들의 갑작스러운 발병에 대처하는 흐뭇한 상비약이었을 것이다.

머나먼 연경에 가서 새로운 문물을 만날 조선의 선비들에게 청심환은 큰 힘이 됐을 것이다. 중국에서 신성한 약으로 취급 받는 청심환 한 알을 매개로 해서 그들은 새로운 벗을 사귈 수 있었고 출입이 어려운 곳을 들어갈 수 있었으며, 뜻밖에 당하는 황당하고 놀라운 사태에 신속히 대처할 수 있었고 자신의 고마운 마음을 전할 수도 있었다.

중국 사람들에게는 만병통치약이었던 청심환은 조선의 선비들에게는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당당하게 새로운 사람과 문물을 만날 수 있도록 만들어준 마법의 약이었다. 작은 약이었을망정 그 선물 하나에 조선 선비의 한 생애가 아름답게 들어 있었던 것이다.

김풍기 -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책과 노니는 것을 인생 최대의 즐거움으로 삼는 고전문학자. 매년 전국 대학교수들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올해의 사자성어’[2011년 엄이도종(掩耳盜鐘)]에 선정되는 등 현실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는다. 저서로 <옛 시에 매혹되다> <조선 지식인의 서가를 탐하다> <삼라만상을 열치다> 등이 있다.

201709호 (2017.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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