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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에센스] 프리드리히 니체의 시 - ‘이 땅’과 ‘생’에 바치는 헌사 

“인간 구원의 최종 목표는 예술이다” 

김재혁 시인·고려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겉치레 행복보다는 진실한 불행을 추구했던 니체…역설적으로 시인은 바보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존재

과거의 수용과 극복이 니체의 가슴속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그의 글은 현대에 들어서도 수없이 반복과 재생, 극복을 거듭하고 있다. 니체의 과거는 우리의 현재와 뒤섞이고, 아직 오지 않은 새로운 미래로 재탄생하고 있다. 궁극의 목적지는 시와 예술이다.


▎니체의 시에는 확인되지 않은 ‘하늘의 왕국’을 향한 ‘저편’에의 그리움이 없다. ‘이 땅’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는 말한다. “스스로 창조자가 되지 않는 한 ‘선과 악’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이를 설파하는 그의 시는 강한 시다. 여기에는 관념과 퇴폐가 없다. 그의 시는 강력한 표현의 시다. 여기에는 말을 위한 여분의 불필요한 장식이 없다. 그의 시는 직선의 시다. 여기에는 뒷걸음질 치는 왜곡의 곡선이 없다. 의지(意志)의 시다. 바람처럼 벽도 뚫고 지나간다. 자유로운 숨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싱그럽고 발랄하다. 홀로 서며 직관적이다. ‘이 땅’의 시다. 그의 시에는 확인되지 않은 ‘하늘의 왕국’을 향한 ‘저편’에의 그리움이 없다. ‘이 땅’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용감하다. 그의 시에는 지루함에서 나오는 하품이 없다. 자신을 사랑하는 시다. 자기를 넘어서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또한 새로움을 향한 실험이다. 스스로를 고인 물에 가두지 않는다. 궁극에 이르러 그의 시는 신선한 창조자의 시가 되고 싶어 한다.

니체라는 이름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세상을 향해 ‘다르게 보기’를 실천한 철학자의 모습일 것이다. 경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그의 교주인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인간의 삶과 세계에 대해 기존 개념과 아주 다른 말을 예언처럼 들려준다. 우리는 이 ‘다름’을 니체를 니체답게 해주는 특징으로 인정하게 된다. 그의 시는 오래된 토템과 터부와 편견의 껍질을 벗겨내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진실의 색깔을 보여주고자 한다. 니체의 사고 중심에는 ‘악’에 대한 믿음이 중력처럼 자리 잡고 있다. 차라투스트라의 말대로 “사악함이야말로 인간이 소유한 최고의 힘”이기 때문이다. 일견 ‘부도덕해 보이는’ 그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은 진실을 추구하려는 치열함이다.

바그너는 왜 자유를 잃었나?


▎사고의 중심에 ‘악’에 대한 믿음을 두었던 니체. 일견 ‘부도덕해 보이는’ 그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은 진실을 추구하려는 치열함이다. / 사진제공·김재혁
나무가 크게 자라기 위해서는 땅속 깊이 뿌리를 박아야 한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 되기 위해서는 악의 심연까지 뿌리를 내리고 끝없이 자기를 넘어서야 한다. 그에겐 위험이 친구다. 그에겐 단체나 집단, 이어져 내려온 미덕 같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는 기성사회의 이데올로기에서 ‘비켜선 자’다. 니체는 오히려 추한 것과 공포스러운 것, 이른바 악에 마음을 열어 놓고 있다. 그는 시 ‘바그너에게’에서 바그너를 정복당한 자로 규정한다. 바그너가 기독교 이데올로기에, 기독교적 연민의 ‘미천함’에 결박당했다는 것이다. 바그너는 이른바 ‘미덕’의 껍질 때문에 모든 자유를 잃었다. 니체는 시 ‘고독하게’에서 ‘까마귀’를 이런 가혹한 삶의 실존을 헤치고 나아갈 존재로 칭송한다.

까마귀들이 울부짖다가
도시 쪽으로 훨훨 날아간다.
머지않아 눈이 오겠지,
고향이 없는 사람은 불행하리라.


니체는 그의 작품 곳곳에 산재해서 주인공의 목소리로 노래하거나 읊조리게 하여 그의 생각을 한 단계 더 깊게 잠언조로 전달한다. “고향이 없는 사람은 불행하리라”는 말 속에는 ‘까마귀’ 같은 실존을 살아야 하는 시인을 향한 강한 메시지가 들어 있다. 니체의 시 속에는 그만의 고유한 사유가 담겨 있다. 그의 시는 형식의 표현이자 사유의 표현이다. 어떤 시보다도 비유와 이미지가 강하다. 그는 나름의 확실한 문체를 갖고 있다. 니체는 “이 세상의 모든 글 중 내가 사랑하는 건 피로 쓴 것이다. 피로 써라!”고 강변한다. 프랑스 작가 뷔퐁의 말대로 ‘문체란 바로 그 사람’이다. 우리는 니체의 시에서 살아 있는 니체의 말투와 그의 체험 강도와 사고 깊이를 경험한다. 니체는 실제로 생전에도 재치 있는 어투로 경쾌하게 말했다고 한다. 그는 편지글에서 “나의 문체는 춤이다”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춤은 곧 정신의 자유와 생동감이다. 시 ‘미스트랄 에게’에서 니체는 노래한다.


▎니체는 당대 최고의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가 기독교적 연민의 ‘미천함’에 결박당했다고 보았다. 니체는 한때 바그너 음악을 숭배했지만 끝내 결별했다.
여기 매끈한 바윗길들을 따라
나는 춤추며 네게 달려간다,
너의 휘파람과 노래에 맞춰 춤추며,
너는 배도 노도 없이
자유의 가장 자유로운 형제로서
거친 바다들을 건너뛴다.


남프랑스에서 지중해 쪽으로 부는 차고 건조한 지방풍 미스트랄처럼 니체의 정신은 ‘춤’이자 ‘바람’과 같다. 바뀌고 변하는 것을 지향한다. 독수리·사자·낙타·뱀 같은 강한 자연의 동물들을 그리워하고 산악을 오른다. 눈길은 길들여진 것을 증오하고 새로운 시각을 원한다. 비유의 무게는 수시로 바뀐다. 니체의 글에 자주 나오는 비유는 나무의 비유이고 절벽의 비유이고 땅과 하늘의 비유이다. 복종을 거부하기에 그는 스스로 위험 속에 처한다. 성장을 위해 행복을 뿌리치고 불행 속으로 뛰어든다. 그의 이런 시험은 깨달음을 위한 것이다. 그의 정신은 겉치레 행복보다는 진실한 불행 쪽으로 쏠린다. 차라투스트라가 제일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는 게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다.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고통이 표면적인 행복을 넘어선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축복하지 못하는 자는 저주하는 법을 배우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삶의 지반을 무르지 않게,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악’을 택하여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이 ‘초인’이 추구해야 할 길이다.

사악함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초인이다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 삽화. 북유럽 전설을 바탕으로 마법의 반지를 두고 벌이는 이야기로 니체를 열광케 한 작품이다.
소위 말하는 ‘미덕’이라는 것들을 모두 떨치고 새의 영을 가지고 자유롭게 날기를 원하는 차라투스트라에겐 ‘중력의 영’은 적이다. 중력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유가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어떤 이데올로기에 묶어두는 데 근본적인 이미지를 심어주는 최초의 인자가 바로 ‘사람은 중력의 영향을 받는다’는 이 물리적인 사실이다. 그런데 실제 이 중력은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만들어져 우리 자신에게 작용하는 부정적인 힘인 것이다. 이것을 과감히 떨쳐버리자고 니체는 주장한다. 중력은 매 순간 평범한 인간들에게 작용하는 부정적 이미지의 힘이자 편견의 장력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절벽과 정상이 하나로 나 있는 길을 걸어간다. 그는 산 위에서 살고 싶어 한다. 그는 위험을 밟고 고난을 넘어가는 방랑자다. 이미 길이 나 있는 편한 것을 택하지 않는다. 정말 높은 산들은 깊은 바다로부터 솟은 것이며,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에 영혼이 쏠리는 사람들이야말로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다. 느끼지 못하지만 실제 인간은 늘 아찔한 절벽 앞에 서 있다. 이 절벽은 인간의 약점을 드러내 보이게 하는 것들이다. 절벽 깊은 곳은 위험하다. 눈은 위를 향하지만 손은 안전하게 아래쪽을 잡고 싶어 한다. 그의 눈길은 ‘초인’ 쪽을 향한다.

‘초인’이라면 오히려 사악함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초인은 자신을 뛰어넘어 위쪽으로 올라가 자신이 추구하던 별들마저도 발 밑에 두는 사람을 뜻한다. 사자 같은 위엄과 거침없음이 그의 특징이다. 인간의 가치로 노래되는 연민도 인간을 절벽 앞에 세운다. 인간은 연민을 넘어서야 한다. 절벽 같은 생각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넘어서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선과 악까지도, 나아가 연민과 스스로를 경멸하는 것까지도 넘어서야 한다. 그때 진실함에서 오는 축복이 있다. 니체는 그것을 시로 노래하고 포고한다.

2015년 10월 15일부터 18일까지 독일 잘레의 나움부르크에서는 세계니체학회가 주관하는 국제학술대회가 ‘니체와 서정시’라는 주제로 열렸다. 당시 학술대회 프로그램 표지는 아래와 같다.

광대 모자를 쓰고 테이블에 앉아 있는 니체의 왼손에는 ‘바보여, 시인이여’라는 글귀가 적힌 종이가 들려 있다. 테이블 위와 방바닥에는 쓰다 버린 파지가 널려 있고 그의 앞에는 고풍스러운 타자기가 보인다. 낙마 사고를 겪은 후 눈도 거의 안 보일 지경이 되어 손글씨를 쓰기가 힘들어지자 니체는 타자기를 사용했다. 이 타자기는 덴마크 코펜하겐의 발명가 몰링 한센이 만들었던 모습 그대로다. 그 특유의 수염과 비슷하게 생긴 광대의 모자가 보여주듯 그의 모습에서 두드러진 것은 광대로서의 시인이다.

세계니체학회에서 니체의 시에 대해 전격적인 조명을 한 것은 니체의 세계에서 시가 갖는 의미를 그만큼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실제 니체가 처음 쓴 글도 시였고, 마지막으로 완성한 작품도 시였다. 니체의 인생과 창작 매 시기마다 시는 빠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니체의 시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학술서는 발간된 적이 없었다. 학술대회에서 중점을 둔 것은 개별 시들의 발생사와 맥락 관계를 정치한 읽기를 통해 밝혀내는 일이었다. 니체의 시에는 그만의 특별한 사고방식이 내재해 있다는 가설에서 출발한 것이다. 시에서 철학적 사유를 찾고, 철학적 사유에서 시의 흔적을 찾는 교차 연구방식이다. 그의 철학적 사유 자체가 하나의 시적 성찰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시인이다. 글쓰기의 영감을 시에서 얻고 있다. 시 쓰기와 사유가 거의 한 호흡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디오니소스 송가>에서 절정에 달한다. 시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극단적으로 잘 표현할 수 있다고 니체는 생각했다. 니체의 시를 읽으면 그가 사용하는 이미지와 표현에서 강력한 힘을 느낀다. 어떻게 보면 후세의 가르시아 로르카라든가 페르난두 페소아 같은 라틴계 시인이 쓴 시의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안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시적 열기가 그를 그런 글쓰기로 이끈 듯하다. 촉감의 언어로 써진 그의 시는 우리 감각에 그대로 묻어난다. 물론 젊은 시절의 시에는 주관적 감정과 그 시절 특유의 고통이 담겨 있다. 그에게 시는 독이다. 그는 극단적 통찰을 즐기기 때문이다. 그는 ‘공작’처럼 외관만 뽐내는 단순한 시인이 되고자 하지 않는다. 시를 감정을 위한 장식적 도구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시인은 물소 앞에서도 허영을 과시한다


▎니체는 그의 교주인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인간의 삶과 세계에 대해 기존 개념과 아주 다른 말을 예언처럼 들려준다. 우리는 이 ‘다름’을 니체를 니체답게 해주는 특징으로 인정하게 된다
니체는 기왕의 시인들은 어떻게 생각했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시인들은 바다에게서 허영도 배웠다. 바다야말로 공작들 중 공작 아닌가?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물소 앞에서도 바다는 꼬리를 돌돌 말지, 바다는 은과 비단으로 된 자기 깃털에 싫증을 내는 법이 없어.

물소는 뻔뻔스레 바라보지, 물소의 영혼은 모래 같아, 아니 덤불에 더 가까워, 그보다 늪하고 가장 비슷해.

물소한테 아름다움이니 바다니 공작의 장식이 무슨 상관이야? 이 비유를 시인들에게 말해주고 싶어.

참말이지, 시인들의 정신 자체는 공작들 중의 공작이요 허영의 바다야!”

공작은 허영의 대명사이고, 물소는 우매한 것의 총체다. 이런 물소 앞에서조차 자신의 허영을 과시하려는 존재가 시인이다. 니체는 시인들 중 자신을 참회하는 자가 나와야 한다고 믿는다. 인간이 한 사회에서 중시하는 미덕이나 명예는 모두 허영심에 불과하다. 그것은 자신이 직접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눈빛이나 입이 채워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허영심에 들뜬 사람은 상대방이 강아지에게 주듯이 내미는 칭찬을 핥으며 꼬리를 흔들고 고마움의 눈물을 흘린다.

허영심에 들뜬 자들은 멋진 옷을 입고 그것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르고스가 죽은 뒤 헤라는 아르고스의 눈 백 개를 자신이 아끼던 공작의 깃털에 붙여 놓았다. 실제로 보지 못하는 눈은 그냥 장식일 뿐이다. 공작의 눈은 깃털에 달려 있다. 공작은 앞을 못 본다. 공작은 마음의 눈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물을 인식 못하고 그냥 따라 할 뿐이다.

시 ‘시인의 소명’에서 시인을 ‘바보’라 비웃는 새의 목소리는 시가 자칫 빠질 수 있는 허황된 이데올로기에 대한 경고로 들린다. “‘맞아요 나리, 당신은 시인이죠.’/ 딱따구리는 어깨를 으쓱한다.” 니체의 시 쓰기를 보면 당시 19세기에 만연했던 문학을 향한 열광적 분위기와는 사뭇 다름을 알 수 있다. 분위기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태도가 아니라 그만의 전략이 있다는 말이다. 허영과 작은 에고에 의해 움직이는 진부한 시인이 그는 싫다. 거품에 불과한 것이 작은 에고이다.

우리의 낙원에서 모두 꺼져라!


▎사진·아이클릭아트
차라투스트라는 시인들이 가짜 포도주를 만드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한다. 상상과 궤변은 땅이 아니고 실체도 아니다. 허세와 위세를 멀리하는 사람이 진정한 인간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가르침을 인류에게 퍼뜨리려 한다. 신은 죽었으므로 신의 위치를 향하여 스스로를 드높이는 것이 인간의 사명이다. 니체는 땅의 육체성을 진실로 믿으며 이른바 ‘순수한 깨달음 같은 물거품’을 걷어내려 한다. 배가 고프면 창자가 가장 정확하고 진솔하게 반응한다. 그는 종교의 위선을 비판한다. 사랑하는 것은 자유와 신선한 흙냄새다. 니체에겐 혁명도 아니고 기존 미덕도 아닌, 새로운 가치가 제일 중요하다. 그것은 드넓은 전인미답의 세계다.

소크라테스적인 합리성보다는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충동을 높이 사기 때문에 니체의 시에는 생명력이 넘친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고통은 오히려 긍정적 에너지를 갖는다. 그러나 예수가 만들어낸 ‘복음’을 믿고 미래와 천국을 믿는 것은 우매한 짓이다. 자기 힘으로 만들어낸 고통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니체의 생명력을 향한 노래는 시 ‘미스트랄에게’에서 잘 드러난다. 니체는 지저분한 인간들을 휩쓰는 바람, 즉 의지가 되고 싶어 한다.

바람과 함께 춤추지 못하는 자,
끈으로 묶여 마땅한 자,
묶인 자, 불구의 노인,
위선에 찬 멍청이들, 명예만 중시하는
바보들, 덕을 칭송하는 등신들,
우리의 낙원에서 모두 꺼져라!


자유를 원하는 니체의 글은 형식 면에서도 자유롭다. 서정시와 잠언과 산문의 경계를 넘나들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에게서 영향을 받은 잠언적 글쓰기는 서양의 논증적 이성을 해체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니체가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형식이 ‘잠언’이다. 잠언 형식은 말하고자 하는 것에 거리를 두며 냉소적으로 자신을 표현하기에 아주 적합하다. 이런 장르 넘나들기는 그의 글쓰기 방식에서 연유한다. 니체는 어디를 가나 공책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글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이성과 논리로 풀 수 없는 철학적 난제를 니체는 시 형태로 돌파하려 한다. 여기에는 직관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을 논리가 아닌 직관으로 넘어설 수 있는 데가 이곳, 즉 서정시의 영역이다. 새 시대에 상응하는 새로운 진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추구해야 한다.

“너는 길을 잃었으니 네가 의지할 것은 위험 뿐”


▎에드바르트 뭉크가 그린 프리드리히 니체. 1906년에 완성된 유화다 / 사진제공·김재혁
시 ‘바보여, 시인이여’에서처럼 니체는 시인을 ‘바보’로 본다. 역설적으로 시인은 바보여서 자유롭다. 그가 꿈꾸는 것은 개인의 절대적 자유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은 그의 내면에서 나오는 자유 욕구의 대변인들이다. 이 세상에 불변의 것은 없다는 게 그의 확신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들도 순간적인 인식일 때가 많다. ‘Werde!’ 즉 ‘되어라!’ ‘변해라!’ 이것이 니체 철학의 핵심어다. 그에겐 확고부동하게 고착되어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표현이든 신념이든 가없는 변화를 꿈꾼다. 미리 주어진 모든 규정을 거부한다. 그에겐 역설 또는 아이러니가 세상의 관습으로 물든 사태를 올바르게 보는 번갯불과 같다. 그것을 우리는 시 ‘방랑자’에서 발견한다.

플라톤은 초월의 세계로 올라가려는 헛된 꿈을 꾸고 있다. 그래서 니체는 그를 ‘지하실에서 짖어대는 사나운 개’로 폄하한다. 선과 악을 나눈 것은 누구인가? 절대적인 선과 악은 있는가? 니체의 목표는 길을 잃고도 스스로의 위험에 의지하여 새로운 진리를 만드는 것이다. 니체는 신의 죽음 이후 이승의 시에서 진리를 찾으려 노력한다. 그것이 이 세상, 시간과 삶에 지친 플라톤과 다른 면이다. 니체의 진리는 인간의 이데올로기적 판단을 넘어서는 순수 예술에 있다. 무엇을 위해, 어떤 효용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그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처럼 도자기처럼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예술,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진리의 표상이다. 이곳에서 비로소 순수한 자유가 춤출 수 있다. 니체가 인간 구원의 최종 목표로 삼은 건 예술이다.

니체의 시를 읽다 보면 그 선대의 시인 횔덜린과 하이네가 떠오르고 또 그의 후대 시인 릴케와 철학자 하이데거가 생각난다. 더불어 시와 철학을 하나로 묶어서 보여주었던 그보다 선배 시인 괴테와 실러도 그의 곁에 보인다. 니체의 ‘bermensch’ 즉 ‘초인’이 끝없이 자신을 넘어서려는 사람이라면, 독일 낭만주의에서 말하는 아이러니 개념도 이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낭만적 아이러니는 자아의 끝없는 탈바꿈을 위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릴케가 초기의 <기도시집>에서 말한 ‘생성되어 가는 신’ 역시 니체의 ‘초인’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고귀한 것의 우화를 말할 때면/ 나는 늘 춤으로 말하는 법밖에 알지 못한다.”

릴케는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에서 언어적 표현의 한계에 부딪혔을 때 이렇게 말한다. “소녀들아, 다정한 소녀들아, 너희 말없는 소녀들아,/ 너희들이 맛본 과일의 그 맛을 춤추어라!/ 오렌지를 춤추어라.” 또한 헤세의 구도소설 <싯다르타> 역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계열 속에 있다고 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릴케의 <말테의 수기>는 공히 ‘나’에게 바치는 헌정의 글이기 때문이다.

니체가 읽은 책의 내용은 그의 글에 많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니체는 그 스스로가 하나의 ‘팔림프세스트’ 즉 ‘재록양피지’다. 재록양피지는 양피지가 귀하던 중세에 앞사람이 쓴 글을 지우고 다시 자신의 생각을 겹쳐 적곤 하던 종이다. 그러면서도 니체는 자기만의 색깔로 빛나는 시인이자 철학자다. 그의 글 속에는 선대로부터 받은 영향과 함께 오롯이 반짝이는 무언가가 있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독일의 전통적 복음신학의 흔적과 고대 그리스 고전문헌학의 흔적이 동시에 발견된다. 니체 대 니체의 대결이 여기서 펼쳐진다. 하나는 게르만적인 것이요, 다른 하나는 고대 그리스적인 것이다. 이것은 전기적으로 그의 마음속에서 병치되면서 전개된다. 과거

의 수용과 극복이 그의 가슴속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렀던 것이다. 그의 글들은 현대에 들어서도 수없이 반복과 재생, 극복을 거듭하고 있다. 니체의 과거는 우리 시대에 들어와서 우리의 현재와 뒤섞이고 아직 오지 않은 새로운 미래로 재탄생하고 있다.

알코올과 기독교는 정신을 마비시키는 최면제


▎스위스 실스 마리아의 집. 1881년에서 1888년의 여름 동안 니체는 이 집에 방 하나를 얻어 기거했다. 차라투스트라를 비롯한 니체의 중요한 저술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 사진제공·김재혁
35세가 끝나는 시점에서 쓴 한 편지에서 말한 것처럼 니체는 “좋은 올리브기름 한 방울이 나(그)로부터 뿌려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부제는 ‘자유로운 정신을 위한 책’이다. 그에게 전통적인 이념은 썩은 것이며 그의 가슴을 옥죄는 사슬일 뿐이다. 니체에겐 실체가 없는 이데올로기는 비판의 대상이다. 그에겐 아주 조그만 사슬도 엄청나게 크고 묵직한 덫처럼 느껴졌다. 독일을 두고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말한다. “알코올과 기독교라는 유럽의 두 가지 대단한 마약이 이토록 부도덕하게 오용된 곳은 없었다.” 알코올의 대명사로 니체는 독일 맥주를 비난한다. 젊은이들이 맥주에 빠져 정신의 새로움을 갖지 못하고 알코올 중독에 걸려 있으며 그것이 퇴락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알코올이나 기독교나 정신을 마비시키는 최면제다. 니체의 철학은 건강성을 지향한다. 인간은 낯선 것을 두려워한다. 그것은 위대한 것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건강을 위해 정말로 좋은 햇살이라도 뜨겁다고 도망치는 경우가 그렇다.

니체가 본 인류 진보의 가시적 표현은 예술에 있다. 그의 이런 생각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인물은 디오니소스다. 디오니소스가 그에겐 예술적인 것의 척도다. 그의 시들 중에서 ‘디오니소스에게 바치는 송가’ 즉 ‘Dithyramben’이 압도적인 의미를 갖는 이유다. 그의 과도한 자기주장은 디오니소스라는 인물 속으로 차분하고 맑게 침전된다. 디오니소스는 자유 분방함과 ‘비켜서 보기’를 위한 장치인 것이다. 그가 사용하는 도취적인 문체는 우리의 영혼을 잡아끈다. 그가 시를 쓰면서 모델로 삼았던 것은 젊은 괴테와 횔덜린·아이헨도르프·하이네 등이었다. 그러나 그의 중점은 열광과 도취 그리고 정신적 민첩성에 있다.

횔덜린은 그의 서간체 소설 <히페리온>에서 인간 존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오, 가련한 자들아, 너희는 느낄 것이다. 너희는 인간의 숙명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 위에서 섭리하는 무(無)에 의해 철저히 사로잡힌 너희는 그만큼 철저히 알고 있다. 우리가 무를 위해 태어났으며, 무를 사랑하며, 무를 믿고, 무를 위해 뼈 빠지게 일하다가 결국엔 서서히 무로 스러진다는 것을. 너희가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하여 털썩 무릎을 꿇는다면 난들 어쩌겠는가? 나 역시 이런 생각에 벌써 몇 번씩이나 잠겼고, 또 이렇게 소리 질렀다. 왜 내 뿌리에 도끼질을 하는가, 잔인한 정신아? 그리고 나는 아직 이렇게 살아 있다.”

니체는 어린 시절부터 횔덜린을 자신의 영웅으로 생각했다. 횔덜린은 이 지상의 삶이 결국엔 무로 돌아간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무’에 대한 생각에 빠져 좌절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그는 삶에 대해 무한히 긍정하고자 한다. 또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으면서 무수히 만나는 낱말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 땅’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생’이라는 낱말이다. ‘이 땅’과 ‘생’은 초월적 세계와는 다른 오로지 이곳의 삶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의 삶에 근거한 글을 쓰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오로지 사랑과 증오 속에서 인생의 진리를 찾으려는 것이 그의 의도이다. 니체는 심리적 고도를 오르내리며 자신의 생각을 설파한다. 그의 글은 ‘이 땅과 생에 바치는 헌사’인 것이다.

김재혁 - 현재 고려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시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복면을 한 운명] [릴케와 한국의 시인들] 같은 저서와 [딴생각] [아버지의 도장] [내 사는 아름다운 동굴에 달이 진다] 등의 시집을 펴냈다. [딴생각]을 [Gedankenspiele]라는 제목으로 직접 번역하여 독일에서 출판했다. 독일에서 [Rilkes Welt](공저)를 출간했으며, 오규원의 시집 [사랑의 감옥]을 독일어로 옮겼다.

201709호 (2017.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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