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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의 어드벤처(4)] 눈물 흘리는 낙타 이야기 

센트럴파크보다 텅 빈 자연이 위대하다 

김미루 사진작가
낙타의 실존적 의미는 내가 예술에서 추구하는 평화를 상징…포식자를 피해 사막으로 도망친 쌍봉낙타의 고향을 찾아서

오직 새파란 하늘만 안계를 지배했다. 그것은 진실로 너무도 이색적이고 경탄스러운 광경이었다. 미술학도들이 배우는, 직선들로 이루어진 원포인트 퍼스펙티브가 살아있는 광경으로서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광활한 허(虛)를 묵언 속에 노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위대한 참선의 경지를 맛보는 것 같았다.


▎고비사막에서 만난 박트리안 쌍봉낙타. 박트리안 낙타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아프리카·중동지역의 단봉낙타보다 훨씬 더 원조 격의 낙타다.
2012년 1월 말리 팀북투에로의 여행 이후로, 나는 낙타라는 동물에 관한 정보와 책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새로운 또 하나의 사막으로 여정을 시작하려고 할 즈음에는 나의 사진작업에 필요한 정보와는 별도로, 그 동물에 관해서 엄청난 지식을 획득할 수 있었다. 낙타의 진화에 관해서는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 그 동물의 프로토타입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원조동물은 4000만 년 내지 5000만 년 전에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발생했다. 지금도 알래스카에 베링 랜드 브릿지(Bering Land Bridge)라는 지명이 있지만 베링해협은 육로로 연결돼 있어 알래스카와 북동아시아 대륙은 소통돼 있었다.(가장 좁은 구간은 지금도 82㎞ 정도다.)


▎필자가 다섯 살 때 그린 <루어투어시앙쯔> 표지 그림. 어김없이 단봉이 아니라 쌍봉낙타를 그려놓았다.
지금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에 살고 있는 단봉낙타는 이동 경로로 볼 때에도 당연히 아시아대륙의 낙타보다 후대에 정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낙타등의 육봉이 쌍봉이 아니고 단봉으로 진화된 것을 드로메다리(Dromedary: 그리스·라틴어원으로 ‘뛴다’의 뜻이 있다)라고 하는데, 이 드르메다리의 해부학적 구조는 수분을 상실하지 않고 오래 담지할 수 있어 덥고 마른 지역에 더 잘 적응할 수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상세한 전문지식은 여기 논의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단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박트리안 낙타(Bactrian camels)라고 부르는 좀 키가 낮은 쌍봉낙타는 중앙아시아에서만 살고 있는데, 이 박트리안 낙타야말로 진화론적 관점에서 볼 때 아프리카· 중동지역의 단봉낙타보다 훨씬 더 원조격의 낙타라는 것이다. ‘박트리안’이라는 이름 자체가 역사적으로 유명한 박트리아(Bactria: 힌두쿠시 산맥과 아무다랴강 사이에 위치)라는 나라 이름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진짜 야생의 낙타, 멸절의 위기에 놓여 있으며, 유전학적으로도 가축화된 박트리안 낙타와는 계통이 다른 야생낙타가, 고비사막과 타크라마칸 사막의 편벽한 지역에 살고 있는데, 이 야생낙타가 바로 쌍봉낙타라는 사실은 쌍봉낙타야 말로 단봉낙타보다 유전적으로 더 조형의 낙타에 가깝다는 추론을 확고하게 만든다.

루어투어시앙쯔의 낙타 그림 추억


▎남아메리카 대륙의 라마는 얼굴만 보고 있으면 꼭 낙타와 같은 모습이다. 페루 마추피추에서 촬영했다.
사실 동방인들의 일반적인 낙타 관념은 쌍봉낙타의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내가 어릴 때 엄마가 20세기 중국문학의 한 대표적인 소설작품을 우리말로 옮겨 출판했는데, 그 소설은 한 순박한 인력거꾼이 군벌의 병영에 끌려갔다가 억울하게 인력거를 찬탈당하고 낙타 세 마리를 끌고 돌아와 인력거를 다시 장만하려는데, 모든 것이 다 뜻대로 되지 않아 결코 좌절하고 마는 리얼리즘의 섬세한 스토리를 그리고 있다. 소설가는 노벨문학상 후보로까지 올랐다가 홍위병에게 비참한 최후를 당하는 기인(旗人) 라오서(老舍, 1899~1966)이고, 그 작품은 <루어투어시앙쯔(駱駝祥子)>이다. 그때 나는 다섯 살이었는데 그림을 잘 그린다고 칭찬받아 그 책의 표지를 그렸다. 그때는 나도 잘 몰랐는데 어김없이 쌍봉의 낙타를 그려놓았다. 내가 그린 것이 박트리안 카멜이었던 것이다. 서울 동숭동의 낙산(駱山)의 모양새도 쌍봉의 이미지와 관련 있다.

야생의 낙타는 지금 1400마리 정도가 현존한다고 하고, 또 200만 정도의 가축화된 박트리안 낙타가 있다고 하는데, 단봉의 드로메다리는 그에 비해 3000만 마리나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단봉낙타가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데 아프리카·중동·아시아대륙의 서쪽, 그리고 오스트랄리아에 분포돼 있다(전체 낙타 개체수의 94%를 차지한다).

중동의 어떤 사람들은 내게 자기 나라에도 쌍봉낙타가 있다고 우기곤 하는데, 그들의 말은 다 거짓말일 뿐이다. 쌍봉의 박트리안 낙타는 그 지역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날 나는 요르단 페트라에서 한 칠칠치 못한 기념품 상인과 다툰 적이 있다. 그 가게주인은 쌍봉의 낙타인형을 요르단의 수제품이라고 우기면서 팔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분명 싸구려 중국제품이었다. 내가 그것은 중국에서 만든 것이라고 말하자, 그 가게주인이 발끈 성을 내면서 자기 비즈니스를 망치려 한다고, 경찰을 부르겠다고 막 협박하는 것이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반응을 쳐다보면서 나는 웃으며 말했다. “불러! 빨리 불러! 경찰이 온다고 중국제가 요르단제로 둔갑하겠어?”


▎요르단에서 찍은 단봉낙타 드로메다리. 낙타등의 육봉이 쌍봉이 아니고 단봉으로 진화된 것을 드로메다리라고 한다.
나에게 있어서 낙타의 실존적 의미는 내가 나의 예술 속에서 추구하는 평화라는 테마와 관련이 있다. 낙타는 포유류 소목(偶蹄目, 牛目) 낙타과의 순결한 초식동물로서 자신을 방비하거나 타 포식동물을 공격할 수 있는 아무런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캣과의 동물들처럼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을 가지고 있지 않을뿐더러 남하고 싸울 생각이 전혀 없다. 평화만을 원해 전쟁을 싫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도망가는 것 밖에 없었는데, 도망을 가도 또 다른 포식자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면 말짱 헛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포식자들이 살 수 없는 곳, 환경의 조건이 최악이래서 포식자들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도망가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이 평화로운 동물은 자신의 몸을 그러한 최악의 환경에 적응시키는 방향으로 진화시켰다. 이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생겨난 낙타의 원조 중 한 부류는 남으로 이동했는데 이들은 고원지대로 올라가면서 라마(Lama)와 알파카(Alpaca)가 됐다. 북미대륙의 원조는 1만~1만2000년 전의 빙하기 최종시기에 멸절됐다. 그리고 베링육교를 건너 서로서로 이동한 부류가 낙타가 됐다. 사막에는 그들처럼 거대한 포유류가 살 길이 없다. 그들은 마침내 최상의 생존방식을 선택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들은 평화의 승리자가 됐다. 사막에는 그들을 괴롭히는 사자 같은 포식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인간이 등장했다. 인간이라는 포유류는 지능이 발달하면서 이 지구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자 했다. 그러나 뜨겁고 건조한 사막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인간은 자기와는 달리 그 환경에 몸을 적응시킨 이 평화의 동물을 길들임으로써 그들의 삶의 영역을 사막의 정적에까지 확대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작전은 성공을 거뒀다. 인간은 무리를 지어 가축화된 낙타가 필요로 하는 물과 초목지대를 찾으며 유랑했고, 이 낙타는 우리 인간에게 영양과 교통과 거처를 제공했다. 아마도 낙타가 그들의 동반자로서 우리 인간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배우기를 지금도 갈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버려진 사막에서 평화를 찾는 그 놀라운 지혜를! 지금은 사막의 커뮤니티가 종교, 권력, 정치, 자원 이권 등등의 문명의 요소로 인하여 오염된 측면이 있지만, 낙타와 인간이 사막에서 공생하는 최초의 순결한 삶의 방식은 평화 그 자체였을 것이다.

징기스칸 국제공항에서 처음 만나 고철상 선생


▎소박하고 초라한 칭기즈칸 국제공항을 나와 처음 대면한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거리.
나는 낙타의 원조, 내가 이전에 보지 못했던 매혹적인 박트리안 낙타를 만나고 싶어, 또 하나의 여행을 계획했다. 나의 선택은 몽골, 중국의 사막지역, 그리고 이웃하는 ‘~스탄’(‘stan’은 인도·이란계열의 언어에서 ‘나라’를 뜻하여 “굳건하게 서다”라는 의미도 있다) 나라들이었다. 먼저 내가 가고자 한 나라는 몽골리아였다. 그러한 갈망은 <우는 낙타 이야기(The Story of the Weeping Camel)>라는 독일에서 만든 다큐드라마를 보고 난 후 더욱 명백해졌다. 2003년에 출시됐으며 감독은 비암바수렌 다바아(Byambasuren Davaa)와 루이기 파로르니(Luigi Falorni)로 되어 있는데, 비암바수렌은 1971년 울란바토르에서 태어난 몽골 여성이다. 국제영화제의 다양한 상을 받았고 오스카상에도 노미네이트됐다.

이 다큐드라마는 고비사막의 낙타들과 한 유목 가정의 애환과 사랑과 환희를 다루고 있다. 이 영화의 동화 속 요정들의 무대와도 같은 장면들은 매우 매지컬했으며, 그것은 내가 사하라사막에서 체험한 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직접 그곳에 가서 내가 겪어봐야만 할 문화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말리 팀북투로부터 돌아온 지 몇 주 지나지 않아서였다. 때마침 2012년 3월에 서울의 트렁크 갤러리에서, 최근 봉준호 감독이 만든 영화 <옥자>의 주제를 훨씬 앞서 표현한, 나의 돼지와의 교감, 대규모 동물사육의 문제점에 관한 솔로 쇼가 열리게 됐다. 나는 그 쇼가 끝난 후에 곧바로 몽골을 가기로 결정했다.

내가 울란바토르에 도착한 것은 2012년 4월 14일이었다. 서울을 출발하여 북경에서 사흘을 묵은 후에 울란바토르로 간 것이다. 나 혼자 직접 가지 않고 서울에서 출발하게 됨으로써 나의 원래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다. 나의 아버지는 막내딸이 다시 눈앞에 어른거리며 뭘 하겠다고 하니깐 금방 걱정이 되어, 몽고 가겠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곧바로 울란바토르에 사는 한국인 사업가 한 사람을 수배해 막내딸의 여행을 관리하도록 해놓았다. 나는 내 스스로의 접선과 계획이 있었지만 아버지의 안배를 환영했다. 내 접선은 빈털터리들이지만 아버지라인에서는 작은 경제적 도움이라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구소련의 도시를 연상케 하는 울란바토르의 시내 메인 광장. 울란바토르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가로등이 없다는 것이었다.
내 접선은 20대의 몽골여성인데 이름이 티제이(TJ)라고 했다. 티제이는 그 여성의 풀 네임인 ‘체체크자르갈(Tsetsegjargal)’의 약자인데, 풀네임은 내가 정확히 발음할 수가 없었다. 뉴욕에 있는 나의 친구가 그녀를 소개해줬던 것이다. 티제이는 울란바토르에서 달란자드가드(Dalanzadgad)로 가는 비행기표를 구입해 놓았고, 달란자드가드에서 사막 한가운데 살고 있는 유목민 가족에게 데려다주는 운전수를 한 명 수배해 놓았다.

달란자드가드는 고비사막에서 공항이 있는 유일한 도시였으며 그 사막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실상 나는 이들 외로 더 이상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지인을 만나게 되면 아무래도 사막에 가기 전과 후에 잠시라도 안락과 사치를 엔조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없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내가 처음 바라본 징기스칸 국제공항은 생각보다 매우 초라했다. 아니, 인간적이라 해야겠지! 나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의 접선인 고 선생님의 영접을 받을 수 있었다. 고 선생님은 그의 조수와 함께 나왔다. 바이갈마(Baigalmaa)라 이름하는 몽골여성이었는데, 놀랍게도 한국어를 유창하게 했다. 첫 인사를 나누자마자 고 선생님은 내게 옛날 애니콜 같은 접히는 핸드폰을 건네주면서, 빨리 아버지에게 안전하게 도착했다고 전화를 드리라고 했다.

고 선생님의 이름은 고철상(高哲相)이라고 하는데, 옛날에 한국에는 고철을 모아 파는 가게가 많았기 때문에 놀림을 받았다고 했다. 그분은 아버지와 직접 안면이 있는 분은 아니고, 아버지의 사상적 반려인 오동희라는 사람이 소개한 사람이었다. 고 선생님은 60대의 연령에 매우 인자한 웃음을 띄운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가혹했던 과거 인생살이에 관한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늘어놓는 성향이 있는 사람이었다. 20년 전에 그는 자기 돈을 몽땅 사기 쳐서 가지고 도망간 사기꾼을 잡기 위해 몽골에 왔다. 그러나 포획에 성공할 리가 없었다. 주머니에 다시 고국에 돌아갈 여비도 없었다. 주머니에 남은 20달러를 가지고 이국 땅에서 나 홀로의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영하 30도는 보통 내려가는 울란바토르의 혹독한 겨울날들을 고국에 두고 온 가족들과 이야기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싸늘한 지하실에서 웅크리고 지내야만 했다. 그는 그 역경을 이겨내고 자작나무에 기생하는 차가버섯을 활용하여 머리털을 나게 만드는 비누를 비롯해 다양한 건강식품·화장품을 만드는 회사를 일궈냈다. 참고로 말하자면 전통적으로 몽골사람들은 대머리가 없다는 것이다.

가로등이 없는 도시 울란바토르


▎울란바토르 동쪽 투울강(Tuul River)변에 자리 잡고 있는 칭기즈칸 승마상. 40m 높이에 소재는 스테인리스 스틸이다. 왼쪽이 고철상 선생.
하여튼 고 선생이 재기했을 때, 그의 부인은 이미 그를 떠난 후였다. 그리고 그의 사랑하는 딸들의 교육을 지원할 수 있는 시기도 다 지나버렸다. 고 선생님은 자기 딸들의 나이가 나와 비슷하다고 했다. 그런데 최근 3년 동안은 딸들을 만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인생의 가장 참혹한 시련의 시기에 가장 보고 싶었던 대상은 막내딸이었다고 했다. 고 선생님은 나의 아버지의 나에 대한 걱정이 공감이 된다고 말하고 또 말했다. 나는 가장 어리고, 가장 연약하고, 가장 예쁘기 때문이라 했다. 고 선생님은 나에게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아버지가 어떻게 느끼시는지, 그걸 자네가 꼭 이해해야 돼! 아버지에게 틈틈이 전화해서 네가 잘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게 중요해!”라고 선생님은 틈틈이 나에게 당신의 셀룰러폰을 주시면서 아버님께 보고 드리라고 했다. 나는 물론 순순히 응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니까 나의 아버지는 내가 전화를 자주 거는 것에 대해 경이로운 느낌을 받으시는 것 같았다. 이게 한국인의 정감이라는 것일까?

울란바토르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가로등이 없다는 것이다. 어둑한 도시의 거리는 현란한 서울에 비해 극심한 콘트라스트를 이룬다. 울퉁불퉁한 길을 어둠 속에 달리는 느낌, 여기저기 간혹 키릴문자의 알파벳으로 그려진 네온사인의 형광을 스칠 때,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느낌은 구 소련시대로 되돌아온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내가 묵게 된 호텔은 화이트하우스 호텔(White House Hotel)이라 했는데 울란바토르에서는 좋은 호텔에 속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낡아빠진 구식 가구들, 때투성이의 카페트, 그리고 얼룩진 시트 등 어설픈 느낌이 기대에 부응하지는 못했지만, 말리를 겪은 나의 체험 속에서는 이 모든 것이 그저 감사하기만 했다. 나는 고 선생님과 바이갈마에게 그렇게 좋은 호텔을 제공해준 데 대해 감사를 표시했다. 나는 그들이 떠난 후에 호텔에 부속돼 있는 나이트클럽을 체크해보기 위해 지하로 내려가 보았다.

클럽은 흐리게 조명돼 있었고, 몇 개의 색깔이 드리운 스포트라이트와 천장에 매달린 작은 디스코볼이 돌아가고 있었다. 작은 무대에는 라이브의 커버밴드가 하나 있었는데, 러시안 팝송과 같은 노래들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리드 싱어가 목소리를 뽑아내는데 마치 셀린 디온의 시원한 목소리보다도 더 시원하게 고음을 뽑아내는 것이었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주머니에서 아이폰을 뽑아내어 그 장면을 기록하려고 했다. 그랬더니 상스럽게 보이는, 작은 눈에 높은 복상뼈에 군인 스타일의 머리를 한 꺽다리 두 명이 나를 손가락질하면서 머리를 흔드는 것이다. 분명히 사진을 찍지 말라고 자기들 딴에 임무를 수행하는 줄 알았지만, 나에게 사진 찍히는 것이 영광인 줄 알아라 하고 계속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순간 주변을 둘러보니 레슬러 같이 생긴 여러 명의 남자가 주변에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나는 위협을 느꼈다. 얼른 되돌아서 빨리 침실로 올라갔다. 누구의 눈과도 마주치지 않은 채.


▎조용하고 소박한 울란바토르 교외의 모습. 시내에도 게르가 섞여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다음날, 고 선생님은 나에게 관광안내를 해주셨는데, 도심에서 30분 정도 걸리는 동쪽의 투울강(Tuul River)변에 자리잡고 있는 칭기즈칸 승마상을 보러 갔다. 소재가 스테인레스 스틸이고 40m 높이의 이 조각상은 둥근 승마상 콤플렉스 건물 위에 자리 잡고 있는데 사람들이 자유의 여신상처럼 말목을 통과하여 말머리 부분에까지 올라가 파노라믹한 경관을 즐길 수 있다. 조각가 에르데네빌레크(D. Erdenebileg)와 건축가 엔크자르갈(J. Enkhjargal)에 의해 2008년에 완성됐다. 칭기즈칸은 알고 보면 너무나 잔인하고 지구상 가장 큰 면적에서 집단학살을 감행한 지도자이지만 그의 과감성과 진취성 때문에, 또 그만이 갖는 특이한 덕성 때문에 그는 몽골 아이덴티티의 창립자로서 존경되고 찬미되고 있다. 그의 이미지는 도시 어디에든지 나타난다. 공적인 소상(塑像)들이나 통화로부터, 술병, 담배곽에 이르기까지 없는 곳이 없다.

그러니까 칭기즈칸의 이미지를 구현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승마상을 미화 410만 달러를 들여 건립했다는 사실도 별로 놀랄 일은 아니다. 아무래도 번질번질한 스테인레스의 질감은 그리 가슴에 와 닿질 않았다.

진실로 “만난다”는 것은 왜 이렇게 어려운가


▎몽고 전통의상 데일을 입고, 부츠를 신은 채 쌍봉낙타를 탄 필자.
승마상을 보러 갔다 오는 길에 고 선생님과 그의 조수 바이갈마, 그리고 몽골인 운전수와 함께 교외에 있는 한국음식점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나는 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나무 없는 언덕들, 완만하게 넘실거리는 그 언덕들의 기복이 자아내는 색다른 광경들을 아직 나의 의식 속에서 처리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 고 선생님은 나 혼자 사막을 가는 솔로 트립에 관한 심각한 걱정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나의 아버지는 고 선생님께 내가 정확하게 왜 몽골을 가는지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다음날 고비사막으로 9일간의 여행을 떠날 것이라고 말하자 충격에 휩싸이는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앉아서 매운탕에 들어있는 낙지를 후루룩 소리 내며 마시고 있는데, 씹히는 질감은 얼었다가 녹은 놈이 분명했다. 그런데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은 내가 사막으로 혼자 가는 것을 말리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운전사와 조수, 두 몽골사람들도 내 플랜에 반대를 표했다. 날씨가 나쁘다, 물이 나쁘다, 사람들이 사기성이 농후하다 등등을 말하면서.

고 선생님은 혼자서 결단을 내린 듯했다. 요번에는 자기와 머무는 것으로 만족해달라는 것이다. 다음에 팀을 데리고 와서 사막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그는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한국 사람들은 더 이상 이 나라에서 호감을 받지 못해. 몇몇 나쁜 놈들이 물을 흐려놓았지. 몽골사람들은 더이상 한국인들을 좋아하지 않아. 미루가 가고자 하는 곳들을 혼자 갈 수 없어.”


▎사막! 사막! 나는 다시 나의 본향으로 되돌아왔다. 고비사막과 낙타를 접하고 의식은 정상수치를 회복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얘기들은 몽골리아에는 도둑놈들과 사기꾼들로 가득 차 있는 듯한 느낌을 내게 준다. 고 선생님이 아버지의 지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나는 말 한마디 없이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고개만 끄덕이다 보니 웬일인지 나는 목이 조이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고독과 불안과 불만이 섞인 강렬한 감정이 나를 엄습했다. 그것은 내가 솔직한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인간이 진실로 “만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참느라고 애를 써야만 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반문했다. “그들이 과연 내가 왜 사막에 가는지를 알 수 있겠는가? 그들이 과연 내가 왜 내 계획을 실천에 옮겨야만 하는지를 알 수 있겠는가?” 나의 감정적 반응은 과도한 것일 수도 있다. 남남이려니 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렇게 내가 우기고 있는 순간에도 나 자신 왜 그토록 어려운 여행을 감내해야만 하는지, 정확히 그 원인을 알지 못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날 오후 늦게 나는 나 자신의 가이드, 티제이를 만났다. 티제이는 도시형 엘리트 여인이었는데 외국인들을 위해 여행을 조직하는 데 능수능란한 면모를 보였다. 그녀는 내가 기대했던 바로 그러한 인간의 전형이었다. 스마트했고 단호했으나, 또한 순정적으로 따뜻했고 주도면밀했다. 티제이와 나는 큰 야외시장으로 갔다. 고 선생님은 이곳에는 소매치기가 우글거리니 절대 가지 말라고 했던 곳이다. 나는 티제이와 함께 몽골의 전통의상을 사려고 했다. 나는 우선 무릎 밑까지 오는 펠트로 라이닝을 댄 가죽장화를 하나 샀다.

이 장화는 강력한 고무바닥으로 돼 있었는데, 정말 나중에 알았지만 끝없이 날카로운 돌이 펼쳐진 고비사막의 지면에서는 이 장화가 없었으면 기동성이 전혀 없을 뻔 했다. 전통 의상에 관해서는 결국 나는 티제이의 겨울 데일(deel)을 빌려 입기로 했다. 데일은 몽골의 전통의상인데 모포 느낌의 둘러싸는 가운 같은 것이다. 티제이는 이 데일의 허리를 어떻게 실크천으로 감아 매는지를 가르쳐줬고, 내 머리를 양 옆으로 땋아 늘어뜨렸다. 그리고 티제이는 나를 한 몽골식당으로 데려갔는데, 그 식당에서는 양의 머리 하나 전체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먹을 것이 정말 많았지만 나는 양고기를 냄새 때문에 그렇게 즐기지 않는 편이다.

인간이란 얼마나 허약한 동물인가!


▎직선들로 이루어진 ‘원포인트 퍼스펙티브’가 살아있는 광경으로서 내 눈앞에 펼쳐졌다.
이 심상치 않은 저녁을 먹은 후에, 나는 내가 사막에서 만날 유목민들에게 전할 나의 메시지를 몽골말로 번역해달라고 티제이에게 요구했다. 나는 내 여행의 목적을 설명하는 메시지들을 나열했다. 그랬더니 티제이는 그 위에다가 자기 나름대로 그 사람들을 감동시킬 언어들을 첨가했다. 이 사진작가 여인은 자연환경의 아름다움을 깊게 사랑하는 사람이며, 몽골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는 휴머니스트임을 천명해놓았다. 그녀는 사막의 유목민들이야말로 선량하고 진실한 사람들이라고 나에게 친절하게 설명하고 확신을 주었다. 티제이의 확신은 고 선생의 경고들을 다 잊어버리게 만들었고, 나는 나의 견고한 신념들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인간이란 얼마나 허약한 동물인가!

2012년 4월 16일 오후, 바이갈마는 나를 울란바토르 공항에 떨어뜨려 놓았다. 특수한 날씨 조건 때문에 입은 나의 밝은 빨강 하이킹 재킷은 내가 탄 작은 비행기 속에서 나를 유별나게 이질적인 외국인처럼 만들었다. 주머니 속에는 고 선생이 나에게 준 설사약이 들어 있었다. 스튜어디스가 웃으면서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나는 타인과 정담을 나눌 분위기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황급히 ‘코리아’라고만 말하고 에어플레인 매거진에 머리를 파묻었다. 매거진에 실린 사진들이 고비사막의 정취를 담고 있어서 내가 원주민들과 소통할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나는 그 매거진을 가지고 가기로 했다.

내가 비행기로부터 내렸을 때, 매우 거대한 몸집의 중년 몽골남자가 4륜구동 렉서스 중형차를 가지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거대하다’고 말한 것은, 그가 정말 내가 인터넷에서 보곤 했던 일본에서 매우 유명한 몽골 출신의 스모꾼 역사(力士)와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었다.

차에 많은 생수병과 세 병의 징기스 보드카를 운전수의 추천대로 유목민에게 줄 선물로서 비축해 놓았다. 그리고 또 다른 선물로서 캔디, 치약, 쌀, 간장, 식물성 식용유를 차에 싣고 우리는 달란자드가드를 떠났다. 달란자드가드는 고비사막 지역의 지역수도라 말할 수 있는데 인구가 2만 명도 채 되지 않는다.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벌써 운전수와 소통하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내가 ‘잉글리시’ 하고 물을 때마다 그는 머리를 휘저었다. 나는 계속해서 그와 소통해보려고 노력해봤지만 결국 소통의 방편이 없었다. 대화를 시도할 때마다 그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낄낄거리며 웃고 그 장면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나의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은 운전사의 셀룰러폰밖에 없었다. 그 셀폰을 통해 티제이에게 전화를 걸고 통역을 요구했다. 그것도 전화가 터질 때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수신이 안될 때가 태반이었다.

티제이는 그녀가 소개한 그 운전사를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전화상으로 전 여정을 그와 같이 해야 할 텐데 그 운전사가 괜찮겠냐고 계속 물었다. 나는 명확하게 대답할 수가 없었지만, 이제는 별다른 옵션이 없었다. 조금 지나다 보니, 그는 대체적으로 성격이 좋은 사람 같았다. 내가 불쑥 카메라를 꺼내 창 밖의 무엇인가를 찍으려고 하면, 속도를 늦추든가 스톱을 해주든가 하는 것이었다. 이것만 해도 나로서는 큰 위안이었다. 보통의 경우 달리는 차에 불쑥 서라고 하면 신경질을 팍팍 내는 것이 운전수의 생리다. 그러나 사진을 찍어야 할 상황은 불현듯 닥친다. 사진은 타이밍의 예술이다. 그러나 차는 연속적으로 달리기를 좋아한다. 달리는 차에 매번 스톱하라고 외치는 것처럼 괴로운 일도 없다.

의식의 정상수치를 회복하다


▎달란자드가드 공항. 달란자드가드는 고비사막 지역의 지역수도라 말할 수 있는데 인구가 2만 명도 채 되지 않는다.
도시를 빠져나가자마자, 광활한 대평원 위에 일정한 타이어 트랙, 즉 옛 마찻길처럼 생긴 다져진 트랙의 길이 아스팔트길을 대신했다. 나는 여태까지 나의 비전이 그렇게 거대한 공간을 끝없이 달리는 그러한 랜드스케이프를 체험해본 적이 없다. 대지는 그렇게 완벽하게 평평하고 오픈돼 있을 수가 없었다. 아~ 그 반듯하게 뻗은 두 선의 타이어 트랙이 사라지는 단 한 점으로 수렴되는 그곳이 지평선상이었고, 그 위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새파란 하늘만 안계를 지배했다. 그것은 진실로 너무도 이색적이고 경탄스러운 광경이었다. 미술학도들이 배우는, 직선들로 이루어진 원포인트 퍼스펙티브(one-point perspective: 한 점으로 모든 것이 집중되는 원근화법)가 종이 위에서가 아닌, 살아있는 광경으로서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광경을 스치는 것만으로도 나의 의식 세계는 비움의 경지로 승화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움직이는 차 속에서 그 광활한 허(虛)를 묵언 속에 노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몇 주간 용맹정진을 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참선의 경지를 맛보는 것 같았다. 사막! 사막! 나는 다시 나의 본향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나의 의식은 정상 수치를 회복한 것이다.

사하라 사막으로부터 맨해튼으로 되돌아온 나는 멜랑콜리아에 계속 빠져들어 갔다. 정서적 불안이나 짜증이 날 괴롭혔다. 번잡한 도시의 광경은 결국은 지루할 뿐이다. 아름다운 옛 건물이나 흉측한 회색의 마천루나 모두 위압적일 뿐이다. 인간은 결국 자연을 떠나 행복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연도 센트럴파크와 같이 만들어진 자연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자연, 가장 좋은 것은 역시 빈 자연이다. 도시가 왜 존재해야만 하는지, 왜 인간이 도시에서 살아야만 하는지, 왜 그러한 삶의 방식을 문명이라고 예찬해야만 하는지, 나는 계속 물었다. 사랑하던 남자와 헤어진 뒤탈 때문일까? 내가 일종의 성장통을 겪고 있는 것일까? 그게 무엇이든 좋다! 고비사막 한가운데로 들어가자마자, 도시 삶의 번쇄한 잡념, 그리고 근심들이 일시에 해체돼버렸다.

김미루 -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2006년 졸업, 미술학 석사 MFA). 이스트 리버 미디아에서 2년 동안 그래픽 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뉴욕타임스>와 <에스콰이어> 매거진에서 ‘베스트 앤 브라이티스트(Best and Brightest)’ 예술인으로 뽑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포토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201709호 (2017.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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