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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량특선] 변호사 작가 도진기의 단편 스릴러 

네가 있는 곳은 

도진기 법무법인 영진 대표변호사
이토록 존재가 선명한 사람은 남녀를 통틀어 처음이다. 경이로운 여자다. (…) 살고 싶다. 간절히. 언제나 날 받아줄 그녀와 함께, 그녀의 세상에서…

그저 흘려보냈던 회색의 하루들. 그런데 그녀가 들어오면서 모든 게 변했다. 세상이 열 배쯤 환해졌다.


▎사진·i22
2월 24일

오늘 소개팅은 실망이다. 그녀가 못생겨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예뻤기 때문이다. 또렷한 콧날, 부드러운 턱선, 오밀조밀한 입술에서 튀어나오는 발랄한 음성, 그리고 무엇보다 생기 가득한 큰 눈. 한눈에 반했다. 하지만 난 잘 알고 있다. 이런 여자가 날 좋아해주는 일은 없단 걸. 거침없는 성격의 그녀가 보기에 말조차 더듬는 나 같은 남자는 얼마나 한심해 보일까.

2월 25일

혹시나 싶어 카톡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그저 예의상 보내는 거야, 이런 뉘앙스. 요 정도면 답장이 안 와도 안 쪽팔릴 거다. ‘넹~~ 잘 들어가셨어요? 어젠 덕분에 즐거웠어요~^^’ 응? 몇 번 더 문자가 오갔고, 난 전화를 걸었다. 통통 튀는 목소리. 정말 반가워하는 듯하다. 그럴 리가. 왜? 아무튼 그녀는 내가 한 마디를 하면 두 마디, 세 마디를 했다. 이건 나와 대화하고 싶다는 뜻 아닌가. 전화기 버튼을 누를 때의 긴장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 이야기를 시작한 지 고작 몇 분 후에 그녀가 말을 놓았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귀여워 죽을 지경이다. 여덟 살이나 어린 여자에게 다짜고짜 반말을 듣는 일이 이렇게 기분 좋을 줄이야. 내일 오후에 나오겠다고 한다. 설마. 내가 데이트를 하게 되는 건가? 이렇게 예쁜 여자와? 하지만 그게 믿기지 않는 만큼 그녀의 의도가 궁금해진다. 혹시 어수룩한 남자를 벗겨 먹으려는 건 아닐까.

2월 26일

“오늘 뭐 좋은 일 있어요?” 집 앞 슈퍼의 주인아주머니가 인사를 건넨다. 내 표정이 좋은가 보다. 그럴 수밖에. 데이트 약속이 있으니까. 자그마치 굉장한 미녀와 말이다. 작년에 300만원을 주고 샀던 모닝 중고차에 올랐다. 내 애마였는데, 처음으로 차가 꼴 보기 싫어진다.

그녀를 만나기까지는 일이 조금 꼬였다. 50분 걸려 약속장소인 신촌으로 갔다. 거의 다 도착했을 때 전화가 왔다. “거기 말고 내가 있는 쪽으로 와.” “어디?” “청담역” “청담역? 아, 아. 지금 갈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맘대로 약속을 바꿔버리는 태도에 조금 불만스러웠다. 역시 이 여자도 아닌가? 하지만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녀를 본 순간 막힌 도로를 뚫고 달려온 피로를 싹 잊었다. 그녀가 무심한 얼굴로 조수석에 올라탔을 때 난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밥 먹으러 갈까?” 내가 물었다. “응, 내가 잘 아는 데가 있어. 그리로 가.” 그녀가 말했다. ‘엄청 비싼 데 가려는 거 아냐? 청담동으로 오란 것도 그렇고….’ 하지만 그녀가 안내한 곳은 8000원짜리 쌈밥집이었다. 세상에. 쌈을 입안에 넣고 오물오물 거리는 모습이 귀여워 미칠 것 같다.

2월 27일

또 만났다. 그녀가 말하는 것, 웃는 것, 먹는 것만 봐도 좋다. 신상에 관해 조금은 알게 되었다. 여동생과 둘이 잠실에 방을 얻어 살고 있다 한다. 온라인 쇼핑몰을 해보려 한다는데, 옷을 잘 입고 신발과 가방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무척 어울리는 일이다. 방배동 연립주택 지하에서 혼자 사는 내 생활에 관해서도 이야기해주었다. 이런저런 글을 써서 먹고 산다는 것도. 큰 관심은 없어 보인다.

그저 밥이나 먹으러 나온 건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다. 저녁 한 끼 해결하러 날 만난다 해도 어떤가. 그녀가 내 눈앞에 있는데. 그녀가 딱히 하는 일이 없다는 게 이렇게 큰 장점일 줄이야. 그녀는 백수가 아니다. 백조다.

3월 16일

처음엔 예뻐서 좋았지만, 성격이 더 매력 있었다. 제 멋대로 살고, 남의 눈치를 보지 않으며, 뒤끝이 없다. 쿨하려 애쓰는 게 아니라 정말 쿨했다. 이토록 존재가 선명한 사람은 남녀를 통틀어 처음이다. 경이로운 여자다. 굳이 불만이 있다면, 그녀와 만나면 난 주로 듣기만 하게 된다는 거다. 내게 한 번도 질문하지 않았고, 말주변 없는 난 얘기를 꺼낼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내겐 궁금한 게 조금도 없는 걸까? 내 얘기를 너무 못해 답답하기도 하지만 뭐 어떠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그녀의 입술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좋다.

때로는 로맨틱한 분위기가 필요하다. 지난번엔 TV에 나오는 셰프가 직영하는 초밥 가게에 갔다. 오늘은 청담동의 레스토랑에서 이름 모를 와인과 두툼한 스테이크를 먹었다. 한 달치 식대지만 상관없다. “와! 너무 맛있어!” 탄성을 올리며 행복해하는 그녀의 웃음을 보았으니까. 조 말론 향수를 선물했을 때의 그 기뻐하던 표정을 잊지 못하겠다. 다음 주말에는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천천히 진행된다. 그게 더 좋다. 이런 설렘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더구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분명 그녀도 어느 정도는 그런 것 같다. 대체 큰 관심 없는 남자와 일주일에 두 번 만나고, 영화를 보러 갈 여자가 있겠는가.

3월 18일

영화를 보았다. 로맨틱 코미디물이다. 다행이다. 영화가 재미있어서. 그래서였을까. 그녀가 팔걸이에 얹은 내 손을 슬쩍 잡았다. 심장이 얼마나 뛰던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우리의 손은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 신기한 여자다. 누구보다 직선적이고 강한 여자지만, 힘을 휘두르지 않는다. “오빤 참 착해 보여.” “짱짱맨!” 이런 말을 해준다. 내가 뭘 하자고 했을 때 한 번도 싫어, 라고 말하지 않았다.

늘 내가 먼저 연락한다. 우리 관계를 내가 주도하는 것도 같다. 하지만 묘하게도 전부 그녀의 의지대로 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녀가 날 밀어내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준다. 나한테 뭘 바라서가 아니라(얻어낼 것도 없다) 그냥 내가 맘에 들어서 만나는 거라는 믿음을 준다. 취향이 바닷가 모래만큼 다양한 세상이다. 당당한 그녀는 오히려 어눌한 나한테서 푸근함을 느낀 거겠지.

집에 바래다주기 전 석촌호수 주변에 차를 댔다. 호숫가 수풀이 오붓한 벤치에 앉았다. 드리운 그림자 안에서 키스를 했다. 그녀는 들었을까. 방망이질 치던 내 심장 소리를. 그녀는 보았을까. 붉어지다 못해 홍당무가 되어버린 내 얼굴을. 아, 내가 이런 십대 같은 표현을 쓰게 되다니.

3월 19일

우리 사이는 많이 달라졌다. 개방적인 세태를 감안한다 해도, 키스를 하는 사이는 더 이상 그냥 친구가 아니다. 꿈만 같다. 한편으론 울적하다. 요즘 따라 거울에 비친 지쳐 보이는 낯빛, 후줄근한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여덟 살 어린 그녀가 생동하는 잉어라면, 난 가물가물하는 가물치다. 왜 나는 이 나이인가.

3월 22일

그녀와 밤을 보냈다. 아아. 꿈만 같다. “야아, 이런 기분이네. 그동안 만났던 남자애들하곤 완전히 달라!” 그녀가 해준 말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진다.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다. 그랬다간 이 기분이 깨질지 모른다.

3월 24일

선물을 샀다. 만난 지 한 달이 되기도 했지만 그녀와 밤을 보낸 벅찬 마음이 더 컸다. 물론 그녀에겐 한 달 기념이라고 말했다. 티파니 목걸이는 환하게 웃는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그래서 더 기분이 좋다. 집에 가는 길에 슈퍼에 들렀다. 주인아주머니가 오늘따라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요즘은 모든 사람들이 내게 호의를 베풀고 있다. 그나저나 적금을 깨버렸으니 어떡하나. 슬그머니 현실로 돌아온다. 이런 순간이 싫다.

4월 16일

세상이 이렇게나 좋은 곳이었던가.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유죄’라고 하지만, 난 사랑을 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바보멍청이라고 하고 싶다. 왜 안 해? 글을 끄적이며 마지못해 살았던 나. 그저 흘려보냈던 회색의 하루들. 그런데 그녀가 들어오면서 모든 게 변했다. 세상이 열 배쯤 환해졌다. 꼴도 보기 싫던 모니터에 사랑의 찬가를 휘갈기고 싶다. 그녀와 함께라면 일, 휴가, 술, 친구, 돈 다 필요 없다. 아니 다 필요하다. 그녀와 함께여야 하니까.


▎사진·i22
4월 22일

요즘 그녀가 조금은 달라진 것 같다. 원래 내 얘기엔 관심없었지만 유독 더 딴청을 핀다. 같이 길을 가다가 옷 가게로 휙 달려들어서는, 한참 창문을 들여다본다. 커피숍 안 여자들의 가방을 유심히 보며 ‘어머, 피코탄 백이야’, ‘샤넬 그랜드샤핑이네’ 한마디씩 한다. 사달라는 걸까. 혹시 남자친구를 물주로 생각하는 여자인 걸까? 그렇지 않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날 만났을 리 없다. 그래도, 왠지 그녀에게 뭔가를 해주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계속 모른 척하면 날 싫어하지 않을까?

아무래도 기우인 것 같다. 조금의 그늘도 없는 낭랑한 목소리, 어떤 말을 해도 “그러지 뭐” 하는 쿨한 태도는 여전하다. 마음에 서운한 게 있으면 그럴 리 없잖은가. 그녀를 만나면 여전히 행복하다. 만나지 않아도 행복하다. 오늘밤엔 문득 불길한 예감과도 같은, 어떤 생각이 든다. 지금껏 내 인생에서, 이렇게 좋은 건 오래 간 적이 없었는데….

5월 21일

마음먹길 잘했다. 적금을 깬 돈 나머지로 프랑스제 명품 가방을 샀다. 그녀가 카톡 사진으로 보여줬고, 몇 번 말한 물건이었다. 가격은… 관두자. 내 중고차 값보다 더 나가니 어쩌니 하는 따위로 계산하면 도저히 살 수 없다.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은 처음이다. 내가 내민 쇼핑백을 보면서부터 환하게 웃고 있다. 가방을 어깨에 메고서 몇 번이나 거울에 비쳐 본다. 남아 있던 약간의 후회가 날아가 버렸다. 그래. 그녀가 기뻐하기만 한다면.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그깟 적금이, 돈이 무언가. 이런 데 쓸 게 아니라면 대체 무얼 위해 돈을 모으느냐 말이다.

6월 11일

그녀가 요즘 내게 너무 잘해준다. 그녀의 웃는 얼굴은 마약이다. 곧 그녀의 생일이다. 돈이 필요했다. 내게 남은 건 하나밖에 없다. 차를 팔았다. 빌어먹을 중고차! 어떻게 1년 만에 200만원이 떨어질 수 있나. 고민하다가 향수를 샀다. 지난번에도 향수를 선물했었지만, 브랜드가 다르니 괜찮을 거야. 생일에 좋은 데서 밥 먹고 하려면 지금 당장은 이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이다. “와아. 멋져! 고마워!” 역시 그녀다. 선물을 받고는 활짝 웃었다. 조금의 꺼림칙함도 없다. 소박한 선물에도 기뻐해준다. 그래, 우리 이렇게 계속 만나자.

6월 19일

마음이 괜히 불안하고 답답하다. 요즘 들어 그녀에게 연락이 잘 되지 않는다. 전화를 하면 빨리 끊기 일쑤고, 카톡을 보내도 1이 잘 없어지지 않는다. 며칠째 만나지 못했다. 시간이 잘 나지 않는 모양이다. 쇼핑몰 준비를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뭐가 이리 바쁜 건지. 하긴 친구가 워낙 많은 그녀니 이럴 때도 있겠지. 그런데 묘하게도 울화통 같은 것이 아랫배에서 뭉게뭉게 올라온다. 내가 왜 이러지. 화를 낼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녀가 바쁘다는데.

6월 24일

한두 번 선약이 있어 안 된다고 했을 때는 이해를 했다. 그런데 세 번, 네 번을 넘어가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 다음부터는 거절을 한 번씩 당할 때마다 머리끝이 쭈뼛쭈뼛 선다. 이래선 안 되지만 솔직히 화가 난다. 또 우울해진다. 마음이 괴롭다. 할 일이 있다는데 억지로 만나자고 할 수도 없고, 자꾸 조르는 건 자존심도 상한다.

여섯 번째 퇴짜를 맞은 오늘, 배회하다가 열대어 가게에 무심코 들렀다. 구피 한 마리가 눈길을 끌었다. 몸은 은빛이고, 머리와 배, 꼬리는 핑크빛으로 물들어 있다. 멍하니 물속 어딘가에 시선을 보내는 모습이 날 닮았다. “큰 게 암컷이에요.” 주인이 구피를 가리키며 말했다. 수조라도 불러도 좋을 만큼 커다란 어항을 같이 샀다. 큰 어항 속을 홀로 유영하는 구피의 모습이 마치 나 같다. ‘주엘’이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6월 26일

드디어 그녀와 약속을 했다! 오랜 만에 얼굴 보는 거라 기대에 부풀었다. 머리를 깎고, 사우나를 다녀왔다. 전철을 타고 약속장소인 삼성동에 거의 이르렀는데, 전화가 왔다. “갑자기 친구가 오기로 했어. 막 우는데 안 좋은 일이 있나 봐. 술이라도 같이 마셔줘야 할 것 같아. 우린 담에 만나.” 순간 화가 턱 아래까지 치밀었다. 하지만 좀스런 모습을 보여선 안 돼. 그 생각만이 앞섰다. “응, 알았어.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마음 넓고 자상한 남자친구 역할을 연기하고는 끊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연기였다. 하릴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 기분이 너무나 안 좋다. 내가 속이 좁은 걸까.

늦게까지 마음이 풀리지 않는다. 몇 번을 곱씹고 생각해봐도 이건 너무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밤늦게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무한 거 아니야? 오랜 만에 얼굴 보려고 했는데.” “그럼 어떡해? 친구가 우는데? 그냥 가, 그래? 오빤 왜 그래?” 그녀가 화를 냈다. 처음 있는 일이다. “아니, 그게 아니구….” 톤을 죽였다. “아깐 알겠다고 그랬잖아? 근데 지금 와서 왜 그래?” 그녀는 참지 않았다. 그날 우린 처음으로 다퉜다. 아니, 다퉜다기보다 고양이가 쥐 잡듯 그녀가 일방적으로 화를 냈고, 나는 쩔쩔맬 뿐이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스무 번쯤 하고서야 통화를 끊을 수 있었다.

밤에 잠을 자지 못했다. 목구멍 아래가 콱 막힌 느낌이다. 겨우겨우 정한 만날 약속이었는데. 보고 싶었는데. 이런 게 혹 화병이란 걸까? 수조 안을 유유히 떠다니는 주엘을 보며 마음을 삭였다. 주엘은 날 측은하다는 듯이 보고 있다. 그래, 차라리 혼자인 네가 낫네. 별 즐거움이 없어 보이지만 이런 괴로움도 없으니.

7월 2일

난 그녀에게 연락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 문자도 통화도 하지 않음으로써 내가 서운하다는 걸 표현하려 했다. 매일 연락하던 내가 뜸하면, 그녀도 너무했다고 느끼고 미안해하지 않을까. 슬그머니 기분을 풀어주는 문자라도 보내주지 않을까.

그런데 이틀간 그녀로부터 감감무소식이었다. 혹시 그녀는 나의 일 따위는 까맣게 잊고 지내는 걸까? 연락을 않은 이틀간 난 죽을 힘을 다해 참아야 했는데. 결국 그녀에게 카톡 문자를 보냈다. 반나절이 넘도록 1이 없어지지 않는다. 더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는다. 갑자기 마음이 미칠 것 같다. 괜히 전화했어! 난 등신이다! 안절부절, 우왕좌왕.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밤늦게 답 문자가 왔다. ‘전화했었네. 아웅~ 오늘 좀 바빴어.’ 예전과 다름없다. 역시 성격 하난 정말 쿨하다. 안달하던 맘이 눈 녹듯 풀린다. 겨우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다.

7월 3일

통화가 되었다. 여전히 발랄한 음성이다. 나한테 불같이 화를 냈던 그녀가 아닌 거 같다. 화해도 할 겸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했다. 하지만 일이 있어 나올 수 없다 했다. 왠지 거절당하리라 싶었지만, 또 숨이 턱 막힌다.

7월 5일

통화해도, 문자를 해도 답이 잘 오지 않는다. 답하는 간격, 빈도수가 점점 줄다가 이젠 연결되는 경우가 드물다. 가뭄에 콩 나듯 한다. 그녀가 그런 만큼 내 통화와 문자는 비례해서 늘어갔다. 난 나름대로 원칙이 있다. 한 번 전화해서 안 받으면 그만둔다. 마지막 자존심이다. 구질구질하게 여러 번 전화를 걸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녀를 상대론 그게 잘 안 된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도무지 자제할 수가 없다. 내 손가락이 제 멋대로 그녀의 번호를 누르고 있다. 하루에 두세 통 정도로 그치기까진 초인적인 인내가 필요했다. 차라리 전화를 받아주고 내게 화를 내는 게 낫다. 이건 수렁이다. 기다림의 지옥이다. TV를 봐도 재미가 없고, 뉴스를 읽어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 정치, 이념, 물가…. 이딴 게 다 무어란 말인가.

7월 6일

내 평생 가장 구질구질한 짓을 한 날이었다. 그녀에게 말도 없이 그녀 집 근처까지 갔다. 차마 전화를 걸거나 초인종을 누를 용기까진 생기지 않았다. 비록 그러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난 결국 그녀 집 앞 골목 편의점 파라솔 가에 앉아 혼자 소주를 마셨다. 그녀가 우연히라도 지나가기를 간절히 기다렸던 것 같다. 그런 마음이 있었다는 걸 나에게까지 속일 필욘 없겠지. 아. 나는 얼마나 머저리였던가. 깨어나 보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주변이 캄캄했다. 석촌호숫가였다. 소주를 퍼먹다가 취해 정신을 잃고서 혼자 이쪽으로 걸어온 모양이다. 이곳에서 그녀와 나누었던 첫 키스의 추억이 내 발길을 이끌었을까. 부끄러워서, 너무나 부끄러워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게끔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 나왔다.

7월 7일

아예 연락이 안 된다. 문자에 통 답이 없다. 통화가 되지 않는다. 오늘부턴 전화를 걸자마자 ‘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하는 기계음만 들린다. 마음이 한없이 무겁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녀 생각만이 머리를 차지하고 있다. 일부러 연락을 피하는 걸까. 그럴 리 없잖아. 무슨 일이 생긴 걸 거야. 난 말 안 해도 알아서 이해해주는 남자거든. 다시 한 번 찾아가볼까? 아니. 한 번으로 족해. 그런 짓은 정말 최악이다. 아무래도 일부러 안 받는 거 같다. 다르게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7월 8일

벌써 새벽. 아무래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그녀의 마음이 떠난 것 같다. 받아들여야 한다. 머리론 분명 아는데, 마음이 이상하다. 불안하고 초조하다. 불에 바싹바싹 구워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한 채 혼자 정리할 순 없다. 이래선 살 수가 없다. 이유까지 알려고 들지는 않을 거다. 그녀가 구차하게 그런 말을 할 리도 없다. 확실한 말만이라도 듣자. 정말 힘들겠지만 분명한 이별 선언을 듣고 나면 어떻게든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날 찼다는 걸, 우린 끝났단 걸 알기라도 하자. 패닉에서 고통으로 바뀌겠지만 그쪽이 백배 낫다. 카톡을 보냈다. ‘내가 싫어졌다면 말해줘. 통화가 힘들면 문자라도 좋아. 다신 귀찮게 하지 않을게.’ 1이 오후 늦게까지 없어지지 않았다. 저녁을 막 먹으려던 무렵, 1이 사라졌다. 이제 곧 답장을 보내겠지? ‘미안, 이제 우리 헤어져.’ 아마도 이런 거겠지만, 혹시라도 ‘무슨 소리야? 좀 바빴던 것 뿐야~’ 이런 답장이 오진 않을까. 후자가 아닌 걸 알면서도 기대하는 내 맘이 비참하다. 밤을 새우며 휴대전화 화면을 뚫어져라 보았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7월 9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다시 만나달라고 한 게 아닌데. 질척대며 달라붙은 것도 아닌데. 헛된 기다림의 이 고통을 끝내고 싶어서, 말 한마디만, 문자 한 통만 해달랬는데. ‘싫어.’ 한마디면 깨끗이 사라져줄 텐데. 애가 타서 죽을 것 같다. 질퍽대긴 싫지만, 결국 참지 못했다.

‘싫다는 말 한마디가 그렇게 힘들었어? 문자 한 통이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었는데. 너무 실망이다. 왜 이렇게 하는 거야? 이렇게 끔찍하게 미워하면서 끝날 줄 정말 몰랐어.’

저주의 말을 쓸 뻔 했지만 표현을 고르고 골랐다. 혹시라도 그녀에게 다른 사정이 있었을지 모르니까. 1은 몇 시간 뒤에 없어졌다. 휴대전화를 쥐고 기다렸다. 답장은 없었다.


▎사진·i22
7월 10일

어떤 방법을 해도 연락이 닿지 않는다. 찾아가는 일 따윈 이젠 생각도 못하겠다. 그렇다고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한 채 혼자 정리하는 건 너무 쓰라리다. 아니, 불가능하다. 한 마디만 해주었다면. 너 싫어, 가. 라고 한 마디만, 제발….

술을 들이켰다. 온갖 이별노래를 들었다. 술은 다 토했다. 음식은 먹은 게 없으니 나오지 않았다. 노래는 다 틀렸다. 이런 이별은 어떤 노래가사에도 없었다. 어떤 노래로도 치유가 안 된다.

7월 12일

사흘째 집안에만 있다.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심장이 마치 살얼음처럼 얇아져서는 야들야들 떨고 있다. 조그만 충격에도 깨져버릴 듯하다. 걸음도 걸을 수 없을 것 같다. 숨도 깊게는 못 쉬겠다. 거울 속의 모습이 낯설다. 방 안의 거울을 다 뒤집어버렸다. 머릿속이 흐릿하다. 마음이 괴롭다 못해 이젠 위장이 정말 아프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수조 물속으로 손을 뻗어 주엘을 조용히 만져 보았다. 매끄럽고 포근하다. 도망가지 않는다. 늘 그렇듯 무심한 태도. 그게 오히려 위안을 준다.

7월 15일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문자 한 통만 해주면 되었는데. 내게 지옥을 만들어준 이 잔인한 여자가, 보잘것없는 내게 환하게 웃어주던 그 여자가 맞는 걸까? 날 좋아한다던 그 모습은 거짓이었나? 하지만 거짓말할 이유가 없는데. 그렇다면 지금은 또 왜 날 이렇게 대하고 있는 걸까. 풀리지 않는 물음이 쳇바퀴를 돈다. 젠장맞을. 그녀가 아직도 보고 싶다니. 여자의 아름다움은 대체 얼마만큼의 위력이 있는 걸까?

7월 16일

난 등신이다. 무가치하다. 이별의 말 한마디를 들을 값어치조차 없는 놈이다. 부끄러워 미칠 것 같다.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고 싶다. 내가 있든 없든 어차피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모두 날 잊어주었으면 좋겠다. 손발이, 몸이 짜부라들어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 든다. 이대로 방바닥이 푹 꺼져 끝 모를 곳으로 떨어져버렸으면 좋겠다. 그러면 차라리 덜 부끄럽겠지. 머리가 하얘지는가 하면 몽롱해진다. 빛이 뇌 속에서 점멸하는 것 같다.

7월 19일

밖에 나가지 않은지 며칠째더라? 뭐, 궁금하진 않다. 이대로 쭉 시간이 흘렀으면 좋겠다. 죽을 것 같았는데 죽지는 않았다. 먹을 거하고 물을 사가지고 와야겠다. 배가 고픈 건 아니다. 그저 그래야겠단 생각이 든다.

7월 20일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감각이란 게 사라져버린 것 같다. 내가 나무 같다는 기분도 든다. 내가 지금 막 보내버린 시간이 한 시간일까. 하루일까. 모든 게 차분히 가라앉고 있는 것 같다. 이상하다. 누군가 마치 다른 세상에서 내게 손짓하는 것 같다.

7월 21일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내 곁에 늘 있었다. 날 조용히 지켜봐 주는 그녀가. 처음에 조금 차가웠던 탓에 몰랐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만은 한결 같았다. 호들갑 떨지도 않고, 거짓말하지 않으며, 내게 화내지도 않고, 말없이, 변함없이 날 대하는 그녀. 모두 날 비웃고, 날 잊었지만, 그녀는 남아주었다. 진정한 기적이다.

7월 22일

우윳빛 피부, 영롱한 눈. 한결같은 몸짓과 도도한 자태. 아름답다. 하루 종일 지켜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그래, 그동안 너무 애썼어. 지쳤어. 난 아등바등해봐야 이 세상엔 한참 못 미치는 놈이었어. 이젠 쉬고 싶어. 그녀는 애달프게 하지 않아. 내가 만질 수 있어. 날 거부하지 않았어. 이번에도 분명 날 받아줄 거야. 변하지도 않을 테지. 왜 그런지는 몰라. 하지만 분명하게 알 수 있어. ‘그동안 힘들었지?’ 그녀의 눈이 부드럽게 말하고 있어. 오늘도 내게 웃어주고 있잖아.

7월 23일

살고 싶다. 간절히. 언제나 날 받아줄 그녀와 함께, 그녀의 세상에서. 이제 분명히 알 것 같다. 난 언제부턴가 그곳으로 가고 싶었어. 따뜻하다. 오래전 잠깐 가졌던 느낌 같기도 하고….

반팔 셔츠 차림의 남자 두 사람이 귀동의 집을 찾은 건 7월이 끝나가는 어느 날 저녁 무렵이었다. 두 사람의 이마에는 흥건하게 땀이 번져 있다. 골목 어귀를 들어설 무렵 젊은 남자 쪽이 먼저 말을 걸었다.

“여자가 남자를 피했나 보죠?”

나이든 남자가 대답했다.

“여자 쪽 친구들 말로는 그래. 원래 성격이 밝고 싹싹한 친구라 늘 웃는 낯이었고, 남자가 선물 같은 거 주면 부담스러워도 겉으론 좋아해주었다는군.”

“그런 모습에 남자가 일방적으로 기대하고 집착한 모양이네요.”

“여자는 고민하면서 점차 피했던 것 같아…. 아무튼 여자가 사라졌을 때만 해도 이렇게 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했다는데.”

“그러게요. 실종된 게 7월 6일이니까, 그날 살해당한 거겠죠?”

“그게 분명치 않아. 어제 석촌 호수에서 떠오른 사체에 타살 흔적은 없었거든. 술은 많이 마셨던 것 같아. 아무튼 두 사람만 아는 일이겠지. 그래서 지금 찾아가는 거고. 동생은 지금껏 언니가 잠시 집을 비운 정도로 생각하고 신고도 안하고 있었다는군.”

“그래도 언니가 휴대폰을 놓고 간 게 이상해서 며칠 후에 비번 풀고서 메시지 확인을 했더랬죠.”

“그게 참, 메시지를 보면 남자는 영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형사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귀동의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비밀번호는 그의 모친을 통해 알아두었다. 귀동의 모습은 당장 보이지 않았다. 안방 안을 휘휘 둘러보던 두 남자는 일제히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방 귀퉁이에 커다란 수조 같은 어항이 있었다. 물이 넘쳐 방바닥에 흘러 있었다. 귀동은 수조에 머리를 거꾸로 처박은 채 죽어 있었다. 표정이 평화로웠다. 마치 수조 속 세상으로 들어가기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도진기 - 서울대 법과대학 및 동대학원 졸업. 사법연수원 26기로 서울 북부지법 부장판사를 지냈다. 재직 시 추리소설 쓰는 부장판사로 명성을 얻었다. 현재는 변호사다. 2010년 <선택>으로 추리작가협회 신인상, 2014년 <유다의 별> 한국추리문학 대상, 2015년 <가족의 탄생> 세종나눔도서 선정. 4개의 작품이 중국어로 번역됐고, <유다의 별>과 <백수탐정 진구> 시리즈는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 중이다.

201709호 (2017.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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