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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보고] 黨대회 앞두고 중국 ‘권력 핵’이 바뀐다 

시자쥔(시진핑 사단) ‘전진 앞으로 

베이징=예영준 중앙일보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비서실장 격’ 리잔수와 충칭 서기 천민얼이 가장 유력…정치국 상무위원 대변혁, 정치국원에는 신세대 포진시켜 장기집권 포석

중국공산당의 정점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다. 7명으로 구성돼 ‘칠룡치수(七龍治水)’라고도 부른다. 11월 제19차 당대회를 앞두고 시진핑 측근집단인 ‘시자쥔(習家軍)’에서 적어도 세 마리 용이 나올 거란 관측이 유력하다.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7명은 중국 권력의 정점이다. 2014년 10월 26일 열린 중앙위원회 4중 전회에서 상무위원들이 거수투표를 하고 있다.
진정한 시진핑(習近平) 시대의 개막이 임박했다. 10월 18일 개막되는 제19차 중국 공산당 당대회를 계기로 시작되는 ‘시진핑 집권 2기’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진핑의 시대’란 의미다.

지난 5년간의 시진핑 1기 동안에도 시진핑 주석은 반(反) 부패 드라이브를 무기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왔다. 하지만 2012년 18차 당대회에서 임명된 현재 7명의 정치국 상무위원 진용은 후진타오(胡錦濤) 당시 국가주석과 그 무렵까지 영향력이 컸던 장쩌민(江澤民) 세력간의 타협과 조정의 산물이었다.

그 가운데 왕치산(王岐山)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의 유임 여부가 아직 관심거리로 남아 있지만 은퇴 연령에 이른 나머지 4명의 상무위원은 이번 당대회를 끝으로 물러날 예정이다. 모두 다 시진핑 주석보다는 장쩌민 전 주석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시 주석은 물러나는 이들을 대신해 상무위원 자리에 자신의 사람을 한 명이라도 더 많이 앉혀 확고한 친정체제 구축에 나설 전망이다.

차기 상무위원 명단을 정확하게 맞히기는 어렵지만 후보군을 압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현재까지의 경력에 나이를 감안하면 상무위원에 오를 수 있는 인적 자원은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베이징 관측통 사이에서 몇 가지 버전의 예상 명단이 나돌고 있지만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대체로 시진핑 주석과 리커창(李克强) 총리 이외에 리잔수(栗戰書) 당 중앙판공청 주임, 왕양(汪洋) 부총리, 후춘화(胡春華) 광둥성 서기, 한정(韓正) 상하이 서기, 천민얼(陳敏爾) 충칭 서기 등이 예상 명단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이름들이다.

이 밖에 자오러지(趙樂際) 당 조직부장이나 왕후닝(王滬寧) 당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이 거명되기도 한다. 여기에 왕치산의 유임 여부와 상무위원 숫자 축소 여부(현행 7명에서 5명으로 줄일 것이란 예측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등이 변수로 남아 있다. 물론 역대 사례로 볼 때 한두 명의 깜짝 인사가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

예상 명단에 오른 사람들 중에 특히 눈여겨봐야 할 사람들이 있다. 시진핑 주석의 측근 그룹, 즉 시자쥔(習家軍)이다. 시 주석은 2007년 상무위원에 발탁되기 전까지 줄곧 지방 근무를 하느라 당 중앙에서 이렇다 할 인맥을 쌓지 못했다. 그는 집권 5년 동안 지방에서 인연을 맺은 자신의 옛 부하들을 잇달아 중요 요직에 등용하기 시작했고 이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새로운 파벌이 형성되고 있다. 초기에는 이들을 ‘즈장신쥔(之江新軍)’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보다 폭넓게 시자쥔이라 불린다. 우리식 표현으로는 시진핑 사단쯤 되는 용어다.

중국 하북(河北) 지방에서 맺은 인연


▎전문가들은 제19차 당대회에서 후진타오와 장쩌민 측근들이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대거 낙마할 것으로 예측한다. 2012년 개최됐던 제18차 당대회에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들 시자쥔 가운데 가장 서열이 앞서는 사람은 리잔수 중앙판공청 주임이다. 25명으로 구성되는 정치국원에 올라 있는 그는 이변이 없는 한 10월 당대회에서 ‘입상(立常)’, 즉 상무위원으로 승진할 전망이다. 시 주석이 절대 신임하고 24시간 그를 보필하는 측근 중의 측근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지난 7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선 리잔수 주임이 시 주석의 왼쪽 자리를 지켰다. 오른쪽엔 왕후닝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이 앉고 한 자리씩 건너 왕이(王毅) 외교부장, 중산(鐘山) 상무부장 등이 배석했다. 이런 배치는 시 주석이 참석하는 거의 모든 정상회담에서 고정된 것이다. 어느 누구든 국가 정상은 가장 신뢰할 수 있고 만족스러운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을 정상회담 석상 좌우에 앉히는 법이다. 상대방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시 주석을 그림자처럼 쫓는 리의 밀착 수행은 외교 무대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시 주석의 동정 보도를 면밀히 관찰하면 국내에서의 중요 일정에도 꼭 동행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방 시찰뿐 아니라 베이징에서 열리는 공산당의 중요 회의나 시 주석의 요인 접견 등에도 배석한다. 리는 시 주석이 새로 만들고 직접 챙기는 국가안전위원회 판공실 주임도 겸임하고 있다. 한국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와 유사한 국가안전위원회는 국가 안보 및 공안과 관련된 사항을 총괄하는 조직인데, 리에게 상임 사무국장 격인 판공실 주임을 맡긴 것이다.

리잔수는 어떻게 해서 이런 요직에 중용될 수 있었을까? 리는 공산당 예비당원 조직인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을 거쳐 지방 말단 조직인 현(縣) 서기에서 시작해 시(市)서기, 성장(省長), 성 서기 등의 단계를 모두 밟았다. 시 주석과의 공통점이다. 지금 공산당 최상층인 정치국원 25명 가운데 농촌지역 현 서기를 거친 지도자는 시 주석과 리 주임 두 사람밖에 없다.

리 주임은 베이징 중앙 무대와는 거리가 먼, 이른바 ‘삼북(三北) 간부’의 전형이었다. 삼북이란 화베이(華北)·시베이(西北)·둥베이(東北) 지방을 말하는 것으로 상하이·광둥 등 동남 연안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됐다. 그는 화베이 지역인 허베이(河北)성의 말단 간부에서 시작해 시베이 지역의 산시(陝西)성을 거쳐 둥베이의 헤이룽장(黑龍江) 성장으로 근무할 때까지 40년 동안 줄곧 삼북 간부였다.

그가 삼북을 벗어난 건 2010년 구이저우(貴州)성 서기로 발탁되면서다. 구이저우는 지역총생산(GRDP)가 31개 성·직할시·자치구 가운데 꼴찌를 맴도는 낙후 지방이지만 구이저우 서기는 중국 최고지도자 단련 코스로 유명하다.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주석은 80년대 구이저우 서기로 근무하며 지금도 회자되는 빈곤퇴치 모델인 ‘구이저우 경험’을 만들어 능력을 인정받았다.

2012년 7월 중국의 차기 지도자 등극을 4개월 앞둔 시진핑 당시 국가부주석은 구이저우 서기로 있던 리잔수를 당 중앙판공청 부주임으로 발탁해 베이징으로 끌어올렸다. 이는 누가 봐도 판공청 주임으로의 승진을 염두에 둔 인사였다. 중앙판공청 주임은 주석의 일정을 관리하고 서류를 미리 챙기고 하위 당·정부 조직과의 연락 업무를 담당하는 비서실장 격이다. 경호를 담당하는 중앙경위국도 거느린다.

그래서 새로 중난하이(중국 공산당 중앙과 국무원 소재지)의 주인이 되는 권력자는 반드시 중앙판공청 주임을 자신의 사람으로 앉혀 왔다. 황제가 바뀌면 신하도 바뀐다는 ‘일조천자일조신(一朝天子一朝臣)’이란 말대로다. 양상쿤(楊尙昆)·차오스(喬石)·원자바오(溫家寶)·쩡칭훙(曾慶紅) 등 쟁쟁한 역대 권력자들이 이 자리를 거쳤다.

리잔수의 전임자는 후진타오의 복심(復心)인 링지화(令計劃)였다. 링은 2012년 봄 아들 링구(令谷)가 심야에 여대생 2명을 페라리 승용차에 태우고 베이징 시내를 질주하다 교통사고로 숨진 사건을 무리하게 무마시키려다 일가족의 부정 축재가 드러나면서 몰락의 길을 걷던 중이었다. 시 부주석은 리를 불러 올린 지 2개월 만에 링을 좌천시키고 리잔수를 후임으로 앉혔다. 퇴임 직전의 ‘저무는 해’ 후 주석도 이를 막지 못했다.

시 주석이 리 주임을 신임하는 배경에는 30대 청년 시절부터 쌓은 인연이 작용하고 있다. 시 주석이 1983년 허베이성 정딩(正定)현 서기로 일하던 당시 리 주임은 인접한 우지(無極)현 서기였다. 지방 근무가 처음인 시 주석은 나이가 세 살 위인 데다 행정 경험이 풍부한 리에게 많은 조언을 구했다. 나중에 리가 시 주석 일가의 고향인 산시성으로 옮겨 간 것도 시 주석과의 인연을 더 깊게 하면서 집안끼리의 친분도 두터워졌다. 30여 년전 허베이성 시골에서 맺은 인연이 지금 중국의 권부인 중난하이로 이어진 것이다.

사실 상무위원 진입이 확실시되는 리잔수보다 더 뜨거운 주목을 받는 이는 천민얼 충칭(重慶) 서기다. 올해 67세의 리잔수는 5년후엔 은퇴해야 할 나이지만, 그보다 10년 젊은 천 서기는 차기 대권을 기약할 수 있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18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원으로 발탁해 차기 지도자 예비 후보군에 올라섰던, 그와 비슷한 나이의 후춘화와 쑨정차이(孫政才) 가운데 쑨은 이미 실각했고 후만 남았다. 리틀 후진타오로 불리던 공청단 대표주자 후춘화의 정치적 운명은 아직 불투명하다. 과거 후진타오와 장쩌민이 합의해 후춘화를 발탁한 것을 시진핑 주석이 그대로 인정할지 여부가 불분명한 상태기 때문이다.

시진핑 ‘입 속의 혀’ 역할로 측근좌장 떠오르다


▎리잔수 공산당 중앙판공청 주임(오른쪽 둘째)는 시 주석을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며 보좌한다. 2015년 9월 22일 미국 시애틀을 방문한 시 주석(가운데)이 연설하고 있다.
시 주석은 지난 7월 낙마한 쑨정차이의 후임 충칭 서기로 천민얼을 임명했다. 충칭을 비롯한 중국 4대 직할시와 광둥, 신장 등 정치적 비중이 큰 곳의 서기는 통상 정치국원이 맡는 게 관례다. 따라서 아직 중앙위원 직급인 천은 쑨의 후임에 임명됨으로써 정치국원 자리는 예약해 놨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천민얼이 정치국원을 건너뛰어 상무위원으로 바로 직행하고 시 주석의 후계자로 낙점될 것이란 예상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시 주석이 비슷한 전례를 밟았다. 저장(浙江)성 서기로 있던 시 주석은 2007년 실각한 천량위(陳良玉)의 후임으로 상하이 서기에 임명됐다. 그리고 나서 7개월만에 상무위원으로 발탁되면서 후진타오의 뒤를 이을 차기 지도자로 내정됐다. 천이 시진핑의 후계자로 내정될 것이란 예상은 바로 이런 전례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천민얼의 경력이 아직 일천하고 능력도 아직 완전하게 검증되지 않았다는 관측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도 시 주석이 집권연장을 꿈꾼다면 후계자 내정은 시기 상조일 수 있다. 당대회 3개월을 남겨놓고 차세대 선두주자로 인정받던 쑨정차이를 전격 실각시킨 뒤 천민얼을 후임으로 임명한 시 주석의 의중이 과연 무엇인지는 시 주석 본인만 알 뿐이다. 아무튼 이번 당대회 인사의 최대 관심사가 천민얼에 쏠리고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천 서기의 정치적 위상을 설명해주는 키워드는 ‘즈장신군’이란 용어다. 저장성을 관통하는 강인 ‘즈장(之江)’에서 따온 이 용어는 시 주석이 과거 저장성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부하들 가운데 눈여겨봐 둔 사람들을 발탁해 요직에 배치한 인맥을 뜻한다. 범위를 넓혀 푸젠(福建), 상하이 등 시 주석이 근무했던 다른 지방 출신까지 포함시키기도 한다. 어쨌든 천 서기야말로 즈장신군의 대표주자일 뿐 아니라 이런 용어가 생겨난 것 자체가 그와 깊은 관련이 있다.

2002년 10월 시 주석은 17년 동안 젊음을 바쳐 근무했던 푸젠성을 떠나 저장성 대리성장으로 옮겨 갔고 다시 한 달 만에 당 서기가 됐다. 천민얼은 당시 저장성 선전부장이었다. 그는 현지에 기반이 없던 시 주석을 위해 ‘즈장신위(之江新語)’란 이름의 고정 칼럼 연재를 구상했다. 그가 사장을 지냈던 성 기관지 저장일보에 매주 한 편씩 칼럼을 연재해 신임 서기의 철학을 전파한다는 계획이었다. 시 주석은 2003년 2월부터 4년여 동안 저장혁신(浙江革新)을 의미하는 ‘저신’이란 필명으로 매주 한 편씩 칼럼을 연재했다. 시 주석의 정치 신념과 사상이 담긴 글들이지만 초고는 선전부장 천민얼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칼럼 232편을 묶은 단행본은 시 주석 집권 이후 재출판돼 중국 당 간부들의 필독서가 됐다.

두 사람은 2007년 시 주석이 상하이 서기로 옮겨가면서 헤어졌다. 하지만 시 주석은 옛 부하를 잊지 않고 계속 챙겼다. 공직에 들어선 이래 한 번도 저장성을 떠나지 않았던 천민얼은 2012년 1월 구이저우 성장에 임명됐다. 그때부터 약 반년 동안 구이저우는 리잔수 서기-천민얼 성장 체제였다.

시 주석과 천 서기 두 사람의 교분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시 주석은 2014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때 구이저우성 대표단 회의장을 찾아가 천 성장의 발언 도중 네 차례나 끼어들며 힘을 실어줬다.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 연출되자 중국 언론들도 이를 놓치지 않고 기사화했다. 시 주석은 2015년 7월 그를 구이저우 당 서기로 승진시켰다. 저우번순(周本順) 허베이(河北) 서기가 부패 혐의로 낙마하면서 생긴 연쇄 인사의 기회를 활용한 것이다. 시 주석이 천 서기의 승승장구를 끌어주고 있다는 건 누가 봐도 명백한 사실이다. 누구보다도 천의 능력, 특히 문재(文才)를 젊은 시절부터 눈여겨봐 왔기 때문이다.

‘문재(文才)’ 편견 무색케 하는 단호함도 갖춰


▎(왼쪽)2014년 12월 항저우 저장미술관에서 열린 ‘란팅서법사 서예전’에 걸린 천민얼의 작품 <萬紫千紅(만자천홍)>./ (오른쪽) 2016년 4월 22일 충남 내포신도시 충남도청을 방문한 천민얼 중국 구이저우성 서기(오른쪽에서 셋째)
60년 저장성 사오싱(紹興)에서 태어난 천 서기는 이름부터 글과 인연이 깊다. 사오싱은 중국 문호 루쉰(魯迅)의 고향이기도 하다. 천 서기의 부친은 ‘영민하면서도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음(敏而好學 不恥下問)’을 ‘문(文)’의 기본이라 풀이한 논어 문장의 첫 두 글자(敏而)를 같은 발음(敏爾)으로 바꿔 이름을 지었다. 처음부터 문인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는 이름에 걸맞게 교사가 되겠다며 사오싱사범대 중문과에 진학했지만 결국 졸업 후 공직의 길을 걸었다.

천은 31세의 나이로 사오싱 현장(縣長)에 취임하는 등 출셋길도 빨랐다. 6년 간 사오싱현을 이끌면서 이곳을 중국 최고의 방직도시로 탈바꿈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닝보 부시장, 저장일보 사장, 성 선전부장, 부성장 등의 승진 가도를 순탄하게 밟아 올라갔다. 부성장 재직 시절인 2010년에는 중국 지방정부로선 최초로 저장성의 부채 규모를 공개했다. 당시 저장성 지방 부채는 규정상 허용된 기준(10%)을 넘는 20.15%였다. 이와 동시에 지방정부의 채무 관리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중앙에 건의함으로써 지방채무 실태에 대해 전국적인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구이저우로 옮겨 간 이후 천 서기는 빈곤퇴치 업무에 주력했다. 빈곤퇴치는 반부패 캠페인과 함께 시 주석이 가장 강조하는 역점 사항이다. 그는 2015년 전인대에서 “지난 5년 동안 구이저우에서 656만 명의 빈곤인구를 줄였다”고 성과를 과시하기도 했다.

천 서기는 지난해 4월 한국을 방문하는 등 중국 차기 지도자 중에는 상대적으로 한국과의 인연이 깊은 편에 속한다. 구이저우와 자매 관계에 있는 충청남도의 안희정 지사와는 상호 방문을 통해 여러 차례 만난 사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한중 양국 ‘잠룡’의 만남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필자도 서너 차례 베이징에서 천민얼이 주재한 회의를 취재하거나 구이저우 성에서 열린 교류 행사에 참석해 그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낯선 외국 기자와의 대화도 거절하지 않을 정도로 소탈하고 활달한 성품이었다. 반면 회의에서의 발언은 명쾌하고 자신에 넘쳤다. 몇 차례 그를 관찰한 가운데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지난해 3월 전인대 기간 중 구이저우성 대표단 회의가 취재진에 공개된 가운데 진행됐다. 회의 후반부에 천 서기가 직접 내외신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사전에 짜인 순서에 따라 중국 관영 매체나 구이저우 현지 매체 기자들에게 질문 기회가 주어졌는데 천은 마지막 질문 순서에서 “외지 기자에게도 기회를 주세요”라고 외치며 손을 흔들던 한 기자를 지목했다. 그가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 포스트 소속이라고 신분을 밝히며 천의 정치적 장래에 관한 질문을 꺼내려 하자 천 서기는 갑자기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끝내겠다”고 말하고는 자리를 떴다. 민감한 질문에 애매한 답변을 했다가 원치 않는 구설에 휘말릴 여지를 아예 차단해 버린 것이다. 장내를 가득 메운 내외신 기자들을 일순간 당황하게 만든 이날의 일화는 신중함과 단호함을 동시에 갖춘 천 서기의 성품을 말해주는 대목이었다.

리잔수와 천민얼 이외에도 이번 당대회를 통해 약진이 예상되는 시자쥔은 한두 명이 아니다. 우선 중앙위원과 그 아래 후보위원에도 들지 못한 평당원 신분으로 일약 베이징 서기로 발탁된 차이치(蔡奇·61)를 눈여겨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20여 년 간 푸젠성에서 근무하다 1999년 저장성으로 옮겨 항저우 시장, 성 조직부장을 지냈다. 1985년부터 푸젠에서 근무하다 2002년 저장성으로 옮겨간 시 주석의 동선과 거의 일치한다. 두 살 차이의 시 주석과는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알려져 있다. 그는 시 주석 집권 이후 4년여 만에 일개 지방 간부에서 베이징의 1인자로 벼락출세를 했다. 올 가을 당대회에서 정치국원은 따놓은 당상이고 나이로 볼 때 앞으로 상무위원도 넘볼 수 있다.

요직마다 측근 배치해 공청단·상하이방 견제


▎구이저우성 서기는 중국 최고지도자의 단련 코스로 이름 높다. 내륙에 소수민족 자치구와 붙어 있어 경제가 낙후된 탓이다. 시진핑 측근 리잔수와 천민얼이 구이저우성 서기를 지냈다.
천지닝(陳吉寧·53) 베이징 시장도 나이를 감안하면 향후 대 발탁을 점쳐 볼 수 있는 인물이다. 칭화(淸華)대 총장을 지낸 학자 출신인 그는 2014년 환경부장을 거친 뒤 지난 5월 베이징 시장으로 발탁됐다. 시진핑 주석의 모교인 칭화대 인맥으로 분류되는 천을 시장에 기용함으로써 베이징은 차이치-천지닝 체제가 됐다. 그 전까지 공청단 출신의 터전이었던 수도 베이징이 시자쥔의 거점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평당원을 요직에 발탁한 파격 인사로 따지자면 잉용(應勇·60) 상하이 시장도 빼놓을 수 없다. 잉 시장은 시 주석의 저장·상하이 시절을 함께 했다. 말단 파출소 공안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그는 시 주석이 저장성에 있던 2003∼2007년 성 기율위원회 부서기와 감찰청장, 고급인민법원 원장 등을 맡으며 신임을 얻었다. 그는 시 주석이 2007년 상하이 서기로 이동하자 그를 따라 상하이로 옮겨가 고등인민법원장과 당 조직부장, 부서기를 차례로 거쳤고 올 1월 상하이 시장이 됐다. 한정 상하이 서기가 상무위원으로 승진해 중앙으로 올라갈 경우 잉 시장은 후임 상하이 서기가 될 게 유력하다. 그렇게 되면 장쩌민을 비롯한 상하이방의 아성을 시자쥔이 접수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 밖에 지면의 제약으로 일일이 열거할 순 없지만 선전부·조직부 등 공산당 기구들과 국가발전계획위원회나 상무부 등 경제부처를 포함한 국무원 요직, 군과 지방 곳곳에 이르기까지 시진핑 주석의 핵심 측근들이 포진해 있다. 대체로 시자쥔 인맥들은 상무위원 급보다는 정치국원 급으로 발탁될 인물들이 많다. 5년 후, 10년 후까지 내다볼 수 있는 상대적으로 젊은 연령대의 인물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약진을 거듭하면서 ‘시진핑의 시대’를 계속 연장해나갈 수 있다는 의미다.

- 베이징=예영준 중앙일보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201710호 (2017.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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