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기업

Home>월간중앙>경제.기업

[삶과 추억] 고 강진구 삼성전자·삼성전기 회장 

오늘의 삼성전자 터 다진 한국 전자산업계의 ‘큰 별’ 지다 

나권일 월간중앙 기자 na.kwonil@joongang.co.kr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 삼성전자를 일궈낸 ‘반도체 1세대’…삼성 ‘명예의 전당’에 유일하게 헌액된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

강진구 전 삼성전자·삼성전기 회장이 지난 8월 19일 졸수(卒壽, 90세)에 타계했다. 그의 부음 소식에 재계·금융계·학계·정계·종교계 주요 인사들이 달려와 조문했다. 고인과 친분이 깊었던 손경식 CJ그룹 회장을 비롯해 이홍구 전 총리, 금진호 전 상공부 장관, 사공일 중앙일보 고문은 여러 차례 장례식장을 찾아 유족을 위로했다. 별세한 강진구 회장은 누구인가? 그의 인생과 발자취를 돌아보았다.


▎강진구 전 회장은 ‘삼성전자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정도로 한국 반도체산업의 신화를 일군 전문경영인이다.
경기도 용인에 있는 삼성인력개발원엔 ‘명예의 전당’이 있다. 삼성그룹이 임직원들에게 ‘최고 예우’를 해주기 위해 22년 전에 만들었다. 전문경영인으로서 회사 발전에 큰 공을 세웠거나, 삼성이 매년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수여하는 ‘자랑스러운 삼성인상’을 재직 중 2회 수상하면 명예의 전당에 오를 수 있다. 헌액되면 퇴직 당시 급여의 70%를 받고, 사망한 후에는 배우자에게 급여의 50%가 지급된다. 삼성의 샐러리맨이 꿈꿀 수 있는 최고의 영예다. 삼성 창립 이래 그동안 200명이 넘는 전문경영인이 삼성을 거쳐 갔지만 이곳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명뿐이다. 1995년 6월 설립과 동시에 첫 번째로 헌액된 강진구(姜晉求) 전 삼성전자 회장이다. 강 전 회장은 오너(그룹 총수) 일가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삼성전자에서 회장직(1990~98년)에 오른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이다. 삼성에서 CEO로 무려 25년 동안 장수했다. 그가 삼성전자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삼성전자가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발돋움하도록 그 기반을 구축한 공로에서부터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총체적 발전에 기여한 공로에 이르기까지 강 회장의 헌신은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뚜렷하게 각인돼 있다”는 이건희 회장의 발언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강 전 회장은 대한민국 전자산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시킨 개척자적 경영인이었다.

동양방송(TBC)의 개국(開局) 공신


▎강진구 회장의 진두지휘로 삼성전자가 개발해 1975년 시판한 이코노 컬러TV 신문광고.
강진구 전 회장은 1927년 경북 영주 태생이다. 대구사범학교를 나와 교편을 잡다가 1948년 서울대 공대에 입학해 전자공학을 전공한다. 한국전쟁 때 자원 입대한 그는 포병부대 통역장교로 5년 동안 복무하면서 미군 장교들과의 교류를 통해 영어에 능통하게 된다. 이후 외국의 공업기술과 관련된 신문과 학술잡지 등 정기간행물을 꾸준히 읽었다. 이것이 삼성전자 재임 시절 석사·박사 학위자도 어려워하는 전자·반도체 관련 서적을 원서로 접하며 기술 개발에 몰두할 수 있는 바탕이 됐다. 그의 영어 실력은 나중에 이병철(1910~1987) 선대 회장의 눈에도 띄게 되는데, 우연히 이 선대 회장의 미국 출장에 동행했다가 한국인 통역보다 의사소통 능력이 뛰어나 눈에 들게 됐다고 한다.

육군 대위로 전역한 강 전 회장의 첫 직장은 흥미롭게도 방송국이었다. 한국 최초의 TV방송국이었던 HLKZ에서 방송기술을 익혔다. 미8군 방송국인 AFKN 기술담당을 거쳐 1962년 KBS 기술과에서 일했다. 1963년 37세 때 지금의 JTBC 전신인 동양방송(TBC)의 기술부장으로 입사한다. 강 전 회장이 한국 방송계의 한 역사를 장식하고 있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당시 강진구 기술부장은 “우리 전자산업의 뿌리를 내려 보겠다”며 모든 TV방송 장비를 자체 기술로 제작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그러고는 청계천 상가를 샅샅이 훑어 방송 장비 부품을 모으고 조립하는 각고의 노력 끝에 1964년 12월, 완전 국산화 기술로 TV 전파를 쏘아 올리는데 성공한다. TBC의 개국(開局) 공신인 셈이다.

김광호(78·전 삼성전자 부회장) 전자사랑모임 회장은 강진구 전 회장이 TBC 기술부장으로 일하던 시절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나중에 삼성전자 재직 때까지 함께하며 가족보다 많은 시간을 보낸 삼성전자 후배다. 당시 강진구 기술부장의 활동에 대한 그의 회고다. “TBC 개국을 준비하는데, 전파를 쏘아 올리는 송출기술을 얻을 데가 없으니까 당시 KBS의 낡은 송출장비를 몰래 구해서 부품을 해체하고 조립했다가 실패하기를 수없이 했어요. 당시엔 세운상가와 이어진 청계천 일대에 전자부품 가게들이 밀집돼 있었는데, ‘주문하면 로켓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이 돌 정도로 못 만드는 게 없었어요. 그래서 강 선배와 제가 부품을 구하느라 그런 점포를 수없이 들락거렸지요. 그런데 갈 때마다 부품을 대량 구입하니까 점포 주인이 이상하게 여겨 신고를 했나 봐요. 중앙정보부가 이적 행위에 부품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간첩으로 의심해 강 선배가 붙잡혀 간 적도 있었어요.(웃음)”

강 전 회장은 1996년 고희를 맞아 펴낸 <삼성전자 신화와 그 비결>이라는 회고록에서 이때의 경험을 이렇게 적었다. “동양방송 TV국 개국을 위해 그동안 익혀온 기술과 지식을 마음껏 펼쳐 우리 힘으로 TV방송용 기자재를 만들어냈다.” ‘인재경영’을 강조하는 이병철 선대 회장이 이런 능력자를 그냥 놔둘 리 없다. 1973년 강진구 TBC 기술이사는 삼성전자 상무로 전배된다. TBC에서 기술자립의 활약상을 눈여겨본 선대 회장의 뜻이었다. 당시 강 이사도 뜻밖의 발탁에 무척 놀랐던 모양이다.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TBC는 중앙일보의 7~9층을 차지하고 있었고, 이병철 회장실은 3층에 있었다. 그 전에도 이 선대 회장이 ‘점심이나 같이 하자’며 동양방송 평이사였던 자신을 부르는 경우가 몇 번 있어서 별 생각 없이 3층으로 찾아갔다고 한다

그때가 7월 중순께였다. 강 이사를 부른 이 선대 회장은 대뜸 “강군! 삼성전자의 사장을 해보게”라고 했다. 너무나 뜻밖이라 어리둥절해 “제가 지금 이사에 지나지 않는데, 어떻게 사장이 되겠습니까?”고 말하자 이 선대 회장은 “다 하면 되는 거야. 뭐 특별한 사람만 사장 하는 건가. 열심히 하면 다 되는 거지. 특별히 어려운 것 아니니 뒷일은 걱정 말고 한번 해보게”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강진구 전 회장은 회고록에서 당시를 술회하며 “서비스업(방송계)에서 본격적인 제조업 경영자로 일대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나의 전자 인생은 이렇게 시작됐다”고 적었다.

이병철 선대 회장의 사람 보는 눈은 정확했다. 강진구 사장은 삼성전자의 기술자립을 진두지휘하며 1969년 창립 이후 5년간 적자이던 삼성전자를 1년 만에 흑자로 전환시켰다. 보상도 뒤따랐다. 삼성전자 상무로 부임한 지 3개월 만에 대표이사 전무로, 전무가 된 지 다시 9개월 만인 1974년 대표이사 사장으로 초고속 승진한다. 강 전 회장의 ‘기술경영’이 성과를 내기까지는 초인적인 노력이 뒤따랐다. 삼성전자의 초창기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지금의 삼성전자 수원 사업장은 170만㎡ 부지에 160동의 고층 건물이 들어선 대단위 사업장이다. 하지만 44년 전인 1973년만 해도 수원시 매탄동 일대는 벌건 흙이 다 드러난 허허벌판 한가운데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가건물 4개 동과 식당, 500평 남짓한 단층 공장이 전부였다. 그 건물에서 일주일에 5~6일은 예사로 야근했다.

1970년대 초까지도 가전업계는 금성사(현 LG전자)·대한전선(나중에 대우그룹에 매각)·삼성전자 등 ‘가전 3사’가 주도했다. 삼성전자는 그중 가장 후발주자로서 선풍기와 흑백 TV를 제조하는 수준이었다. “경쟁 업체들의 견제로 외국에서 기술을 도입하기가 어려워 자체 개발 능력을 키우느라 날마다 밤을 새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엔지니어들이 참 많이 고생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삼성전자로 간다고 하면 다 말렸어요. 거기는 ‘아오지’다. 가면 죽어야 나온다고 했어요.(웃음)” 당시 강 전 회장을 따라 삼성전자로 옮겼던 김광호 전자사랑모임 회장의 아픈 회고다.

당시 삼성전자 엔지니어들은 직접 외국산 TV부품을 뜯어보고 조립해가면서 독자적으로 기술을 익혀야 했다. 강진구 사장도 거의 독학으로 익힌 전자공학 지식을 바탕으로 원서를 읽어가며 엔지니어들을 독려했다. 삼성전자는 이런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1975년, 이코노 컬러TV를 출시하는 데 성공한다. 국내 기술로 만든 첫 컬러TV는 획기적인 기술을 담고 있었다. 당시의 TV는 전원을 켜도 20~30초간 예열한 뒤에야 화면이 서서히 나타나는 형태였는데, 이코노 TV는 전원을 공급하면 예열 없이 5초 이내에 바로 화면이 안정되었다. 이처럼 순간수상(瞬間受像) 방식 브라운관을 장착한 이코노 TV 개발로 삼성전자의 수출은 급신장하게 된다. 삼성전자는 이후 독자기술로 전자레인지·VTR을 국내 최초로 개발해 수출까지 했다.

글로벌 가전업계가 두려워한 인물


▎1984년 삼성반도체통신사장 시절의 강진구 회장. 그에게 ‘기술자립’은 자신의 ‘전자인생’의 소명과도 같았다.
이 같은 성과에 힘입어 강진구 사장 재임 시절 삼성전자는 금성사를 제치고 가전업계 1위로 올라선다. 강 사장은 이때부터 세계 가전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 전자업계 인사들에게도 연구 대상이자 엔지니어들이 경계해야 할 인물이 됐다. 강진구 사장을 발탁한 이병철 선대 회장도 “글로벌 가전업계에서 가장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사람이 됐다”며 강 전 회장을 칭찬했다.

강 사장은 그럴수록 일에 더 매달렸다. 가족 얘기에 따르면 여름 휴가지에서도 일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글쎄 휴가를 가서도 가게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사 먹어 가면서 냉장이 잘되고 있는지 기술 문제를 점검하더라고요. 늘 휴가지 인근의 종합가전 대리점을 찾아가 영업상황을 점검하곤 해서 가족과의 사생활은 아예 없었어요.” 유족의 증언이다.

강진구 사장의 성실함은 선대 회장 부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1979년 이병철 선대 회장이 이건희 회장에게 그룹을 물려주는 단계에서 각 계열사 간 책임경영제가 실시됐다. 이 무렵 이건희 삼성그룹 부회장 임명과 더불어 강진구 사장은 삼성전자의 최고경영자를 맡게 된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강 전 회장의 회고록 <삼성전자 신화와 그 비결> 추천사에서 이렇게 적었다. “선친(이병철 회장)께서 (강 회장의) 성실성과 근면성을 인정하셔서 삼성전자 사장으로 발탁 임명하셨다. (강 회장은) 삼성전자에 부임하자마자 적자였던 회사를 단숨에 흑자로 전환시켰으며, 종합 전자회사로 육성하겠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사업을 계속 확대해 나갔다.”

경영자로서 강진구는 1982년 또 한 번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지시로 삼성반도체통신 사장을 맡아 메모리 반도체 개발과 생산을 책임지게 된 것이다. 당시만 해도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당시를 술회한 강 전 회장의 생전 육성을 들어보자.

“선대 회장께선 매년 12월 20일을 전후에 일본으로 건너가 신년을 보낸 다음 1월 중순께 귀국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일본 방송 매체의 신년 특별프로그램 등을 유심히 보고 경제담당 기자, 학자, 재계 인사들로부터 경제 전망을 들어본 다음 신년 사업계획을 가다듬었지요, 이른바 동경 구상이 바로 그것이지요. 그러던 1983년 2월 초 동경에 머물던 선대 회장이 전화로 반도체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일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래서 메모리 반도체 중 비록 가격 경쟁이 치열하고 공급 과잉이 예상되더라도 시장 규모가 큰 D램을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당시엔 우리의 취약한 기술력과 자본력 등을 이유로 정부조차 비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해냈습니다.”

강진구 사장은 가장 널리 쓰이는 64K D램을 개발하기로 하고 150명의 엘리트 사원으로 신규사업팀을 꾸려 기술인력 확보에 주력했다. 그가 무엇보다 강조했던 것은 자체 기술력이었다. 강 전 회장에게 ‘기술자립’은 자신의 ‘전자 인생’의 소명과도 같았다. 강 전 회장은 삼성의 반도체 사업을 위해 허허벌판이었던 기흥의 반도체 단지를 수시로 찾았다. 장마철에는 직접 장화를 신고 현장을 돌아보며 작업자들을 격려했다. 이처럼 강진구 회장이 진두지휘하면서 삼성전자 내부에 기술자립 풍조가 만들어졌다. 이는 삼성전자가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발전하는 토대가 됐다. 삼성의 반도체 개발 신화는 이처럼 야전용 침대에서 잠시 자고 눈만 뜨면 연구에 몰두하는 젊은 한국 기술자들의 정열에 의해 이뤄졌다.

“며칠 밤을 새워가며 기술 개발을 하다가 정말 힘들어서 ‘더 이상 못하겠습니다. 여기서 포기하겠습니다’ 그러면 강 선배가 우리를 불러놓고 몇 시간 동안이나 설득해서 마음을 돌리셨지요.” 김광호 전자사랑모임 회장의 회고다. “일밖에 모르던 분이었어요. 유일한 운동이자 취미가 일요일에 골프하는 것이었는데, 끝나면 오후에 꼭 공장을 방문했어요. 그러니 일요일에도 직원들이 긴장할 수밖에 없었죠.” 당시 강진구 사장은 재미 한국인 과학자 등 전문 인력을 스카우트하고 국내 엘리트들을 미국에 연수를 보내 선진 기술을 배우게 하는 등 백방으로 뛰었다. 이런 노력 끝에 삼성전자는 1983년 12월 1일, 드디어 64K D램 개발에 성공한다. 한국 최초의 메모리 반도체 개발이라는 역사를 쓴 것이다. “삼성반도체통신이 64K D램을 개발했습니다. 미국·일본에 비해 10년 이상 뒤졌던 한국의 반도체 기술 수준을 4년 정도 좁히는 데 성공했습니다.” 당시 강진구 사장의 기자회견 발언을 듣고 전 세계가 깜짝 놀란 것은 물론이다.

한국 반도체산업의 초석을 놓다


▎1. 1989년 강진구 삼성전자 부회장이 ‘신산업 경영대상’ 시상식장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그해 16M D램을 개발한다. / 2.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가운데)과 강진구 회장. 이건희 회장은 강 전 회장을 “오늘의 삼성전자를 있게 한 최대의 공로자”라고 말했다.
그래도 삼성반도체는 경영 수치상으로는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워낙 초기 투자비가 많이 들어가는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유족에 따르면 당시 강 전 회장의 마음고생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늘 일등주의를 강조하고 부실과 부채가 없는 ‘무패(無敗)경영’을 신조로 삼았던 이병철 선대 회장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병철 선대 회장이 기흥공장의 3라인 기공식을 마치고 타계한 1년 뒤인 1988년에야 삼성전자는 그때까지의 누적적자를 모두 청산하고 흑자로 전환했다. 당시 강 전 회장의 감회와 기쁨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고 한다.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재임하던 1984년부터 강진구 전 회장을 여러 차례 만났다는 사공일 중앙일보 고문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삼성전자가 82년 반도체 공장에 투자를 시작했는데, 반도체 조립라인 한 개를 갖추는 데 당시 돈으로 200억원이 투자돼야 할 정도의 엄청난 사업이었어요. 그래서 ‘반도체 사업은 시기상조다. 삼성전자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을 더는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는 반대 여론도 있었지요. 그 무렵 강진구 사장이 여러 번 저를 찾았습니다.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이 넘쳤어요. ‘제조업이 우리 국부(國富)의 원천이다. 반도체는 기술 한 가지 제대로 없는 척박한 우리나라 환경에 딱 맞는 사업이다. 요즘 삼성반도체의 메모리 수율(收率) 올라가는 것이 일본보다 속도가 빠르다’며 저를 설득하던 그때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사공일 고문의 증언은 계속된다. “당시 외국계 은행들의 힘이 셀 때였는데, 한번은 체이스맨해튼은행과 씨티은행 지점장 등으로 구성된 외국 은행 점장들이 저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이 반도체산업에 대한 투자가 과도하다. 정부가 왜 개입해서 조정하지 않느냐?’고 불만을 토로하더군요. 그 정도로 삼성의 반도체 투자가 과도하다고 봤던 것이죠. 하지만 저는 그 사람들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요. ‘사공 수석, 우리나라는 반도체를 해야 살 수 있어요. 자연자원이 없는 우리나라가 할 수 있고, 부가가치가 높고 우수한 인력이 있으니 충분히 가능합니다’고 진지하게 저를 설득하던 이병철 회장의 얼굴이 떠올랐어요. 결과적으로 그때의 제 판단이 옳았습니다. 그만큼 당시 삼성전자의 반도체 투자는 어려움 속에서 진행된 결단이었습니다. 그 어려움을 뚫고 삼성이 반도체에 투자한 것이 지금의 반도체 강국을 이룬 초석이 된 것입니다.”

삼성반도체는 64K D램 개발에 성공한 여세를 몰아 1년 뒤인 1984년 256K D램 개발에 성공한다. 이후 1986년 1M D램, 1988년 4M D램, 1989년 16M D램을 잇따라 개발한다. 1992년에는 세계 최초로 64M D램을 개발, 선진국과의 기술격차를 단번에 역전시키는 데 성공한다. 오늘의 삼성전자가 있기까지는 이렇듯 이병철·이건희 부자(父子)의 과감한 투자와 기업가정신, 강진구 회장의 기술자립에 대한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병철 회장은 타고난 기업가정신의 소유자였고, 강진구 사장은 그 뜻을 성공시킨 탁월한 경영자였습니다. 외유내강형의 강진구 사장은 조용히 사람을 설득시키는 능력이 뛰어났어요. 요즘 같은 어려운 시기에 더더욱 생각나는 분들입니다.” 사공일 고문은 강진구 전 회장의 타계를 못내 아쉬워했다.

“삼성전자를 있게 한 최대 공로자”


▎1. 강진구 회장은 1996년 국내 전문경영인 중 처음으로 현직에서 고희를 맞았다. 그해에 펴낸 회고록 <삼성전자 신화와 그 비결> 출판기념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2. 1989년 강진구 삼성전자 부회장은 벨기에 알베르 황태자로부터 한·벨 경제협력 우호 공로로 최고훈장인 그랑그로스왕관훈장 십자상을 수상했다. / 3. 강진구 회장의 퇴임 한 해 전 1999년 삼성그룹 신년 하례회 장면. 오른쪽부터 강진구 삼성전기 회장,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이종기 삼성화재 부회장, 현명관 삼성물산 부회장
1990년대 삼성전자 대표이사 회장 시절, 강진구 회장의 고민은 통신시장을 좌우할 휴대전화 기술 문제였다고 한다. 고인의 외종질인 김영동(55) 동양대 철도전기융합학과 교수는 “디지털 이동통신 기술 방식을 놓고 CDMA(부호분할다중접속)와 미국과 유럽이 장악한 TDMA(시분할다중접속)로 의견이 갈릴 때 기술자립을 도모할 수 있는 CDMA로 방향을 잡아 지금의 삼성 스마트폰 시대를 여는 데 기여했다”고 말했다. 지금 삼성의 스마트폰인 갤럭시 시리즈는 강 전 회장에게 크게 빚을 졌다는 것이다. 강 전 회장은 또 일찍이 글로벌 경영의 중요성을 미리 내다보고 해외 지역에 생산 공장을 일구는 등 삼성전자를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토대를 마련했다. 특히 1992년 한·중 수교 시점에는 중국과 합작으로 현지 생산법인을 설립했고, 뒤이어 멕시코·태국·헝가리 등에 생산거점을 확보해 글로벌 경쟁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었다. 강 전 회장은 그처럼 시대를 앞선 혜안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기도 했다.

1996년에는 국내 전문경영인 중 처음으로 현직에서 고희(古稀·70세)를 맞았다. 그해 이건희 회장의 권유로 펴낸 회고록 <삼성전자 신화와 그 비결>에서 강진구 전 회장은 이렇게 썼다. “나는 삼성전자를 세계적인 종합전자회사로 만들어야겠다는 신념으로 처음부터 사업의 다각화에 힘썼다. 가전사업이 완전히 정착하고 제품의 구색이나 품질과 디자인을 포함한 여러 가지 여건이 성숙될 때까지 기다린 뒤에 다각화를 시작했던 것은 아니다. 이러한 여건이 갖추어지기 전에 통신 사업이나 반도체사업을 시작했다. 무리를 해서라도 다각화를 밀어붙였고, 각 사업의 정착과 발전은 그 책임자에게 전적으로 맡겨 목표를 달성하도록 독려했다. 그들 모두가 최선을 다해 하나하나 결실을 맺어왔기에 오늘의 삼성전자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영광은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평사원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삼성을 메모리 반도체 업체 1위로 성장시킨 강 전 회장은 1988년 삼성전자와 삼성반도체가 통합되면서 삼성전자 부회장으로 승진했고, 1990년 삼성전자 회장으로까지 승진해 삼성그룹의 전자·전기 분야 3사(삼성전자·삼성전기·삼성전관)를 지휘했다. 그가 계획한 사업 다각화 분야를 모두 통할하는 것은 물론 샐러리맨 출신으로서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것이다. 그는 CEO로서 늘 임직원들에게 “가전·반도체· 통신 등 삼성전자 전 분야의 기술 국산화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 외국의 선진 기술을 받아들여 우리 것으로 만들어라!”고 강조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강진구 전 회장의 ‘전자 인생’은 삼성전자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한국전자공업진흥회장, 전자산업진흥회장, 전자부품연구원 이사장 등을 맡아 봉사했다. 2006년에는 서울대와 한국공학한림원이 선정한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 60인’에 오르기도 했다. 금탑산업훈장, 벨기에 그랑그로스 왕관훈장, 포르투갈 산업보국훈장, 정보통신대상, 장영실과 학문화상도 수상했다. 명실공히 한국 전자업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받은 것이다. 이건희 회장이 회고록 추천사에서 강 전 회장을 ‘오늘의 삼성전자를 있게 한 최대의 공로자’라면서 ‘세계 전자업계에서조차 강진구 전 회장을 한국 전자산업의 대표적 전문경영인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보아 이분이 쌓아온 업적의 넓이와 깊이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높이 평가한 것은 이 때문이다. 강 전 회장은 한국 전자산업을 대표하는 큰 바위 얼굴이었다.

강진구 전 회장은 1998년 이건희 회장이 직접 삼성전자 회장을 맡으면서 삼성전기 대표이사 회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하지만 평생을 건강하게 탱크처럼 일에 매진해온 강진구 회장도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지는 못했다. 2000년 12월 31일 건강 문제와 후진 양성을 이유로 삼성전기 회장직을 마지막으로 37년간 몸담았던 삼성을 떠났다.

한국 전자업계의 큰 바위 얼굴

고 강진구 회장은 1남2녀를 두었다. 맏아들 강병창 박사(서강대 교수)와 맏딸 강선미 박사(서경대 교수)도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친인척들도 강 회장의 영향을 받아 전자공학이나 전기 분야를 전공한 이가 많다. 외종질인 김영동 교수는 “외삼촌은 엄하셨지만 소탈하고 검소하셨다”며 “조밥과 어릴 적 고향 음식인 팥잎국, 조선멸치 이 세 가지만 있으면 행복했던 분이셨다”고 회고했다.

유족에 따르면 강 회장은 평생 청교도정신을 강조했다. 개신교 신자였던 강진구 장로는 부인 김경예(85) 권사와 함께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한국전쟁 때 몇 번이나 생사의 고비를 넘기면서 신의 존재를 체험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겸손함은 강 전 회장의 트레이드마크였다. 반도체에서 성공을 거두었을 때 “기술개발에 매진해줄 좋은 인재들을 만났고, 이를 뒷받침해줄 좋은 기업이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며 자신을 낮췄다. 회고록에서는 한국 전자산업과 삼성전자의 발전은 ‘내 능력보다도 때가 맞아떨어져 이루어진 성과’라는 점을 강조했다. “남한테 의존하려 하지 마라. 어떻게든 궁리해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며 도전정신과 창의력을 강조했다.

고 강진구 회장의 그러한 기업가정신이 후배들에게 이어지면서 지금의 삼성전자를 만들어낸 바탕이 됐다. 사공일 중앙일보 고문은 “무에서 유를 창조했던 강진구 회장의 기업가정신과 경영마인드가 지금 이 시대에 절실하다”고 말했다. 한국 전자업계는 ‘한국 반도체의 역사’인 거목을 떠나보냈다. 그 거목의 인생을 시대의 귀감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실천하는 것이 후진의 몫으로 남았다.

※ 강진구 회장의 ‘전자 인생’ - 1927년 경북 영주 출생. 서울대 공대 전자공학과 졸업, 1963년 동양방송(TBC) 기술부장, 1973년 삼성전자 대표이사 사장, 1975년 삼성전관 사장, 1982년 삼성반도체통신 사장, 1988년 삼성전자 총괄 대표이사 부회장, 1990년 삼성전자 총괄대표이사 회장, 1995년 ‘삼성 명예의 전당’ 제1호 헌액, 1998년 삼성전기 대표이사 회장. 2000년 삼성그룹 고문. 2017년 8월 별세.

- 나권일 월간중앙 기자 na.kwonil@joongang.co.kr

201710호 (2017.09.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