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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論의 역사(10)(마지막 회)] 원래 ‘한 핏줄’인 고려와 몽골제국 

칭기즈칸과 누르하치, 그들은 한민족의 후예! 

글·사진 전원철 미국 변호사, 법학박사
중원에 존재했던 명·청나라는 서조선과 본토조선 … 잭 웨더퍼드 “칭기즈칸은 새로운 세계 질서 창시자”

▎칭기즈칸과 몽골인들은 13세기 세계를 정복했다. 몽골인들의 말발굽이 닿는 곳은 모두 그들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지난 호(號)들에서 우리는 발해 제2왕가 시조 대야발, 금나라 시조인 금행, 칭기즈칸(成吉思汗)의 10대 선조 알란 고와 등이 모두 한 가문의 선조와 후예인 점을 봤다. 또 칭기즈칸이 부족들을 통일하고, 이를 몽골(몰골·말갈, 말 키우는 나라)이라고 한 것도 봤다. 그 뒤에 서방 원정을 가서 3대에 걸친 세계 정복의 길을 시작한 것도 봤다.

1162년에 태어난 위대한 칸 ‘진국왕(震國王)’ 칭기즈칸은 <몽골비사>에 따르면 재위 22년인 1227년 8월 하늘로 돌아갔다. 이 해는 개봉(開封)을 중심으로 중원의 절반을 통치하던 금나라 애종 4년인 때다. 또 금나라 왕가의 고향이던 고려에서는 고종 재위 14년이 되던 해였다.

그로부터 12년 전 칭기즈칸과 그의 선조의 고향 고려는 처음으로 외교 관계를 맺었다. 고려와 몽골의 관계는 다른 나라와 많이 달랐다. 고려와 몽골은 칭기즈칸의 ‘세계 정복전의 길’ 위에서 형제국이 된 유일한 두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 계기는 몽골과 고려 사이에 자리 잡은, 거란 왕조의 남은 씨앗 금산(金山) 태자 일당의 도발이었다. 만주에 대요수국(大遼收國)의 왕(王)이라 칭한 그들은 1215년 몽골에 쫓겨 고려의 강동성(평안남도)으로 쳐들어왔다. 거란 잔당은 이내 충북 제천까지 쳐들어와 고려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그들을 추격하던 몽골은 고려에 지원병을 요청했다. 안마당에 불이 붙은 고려는 당연히 협조했다. 그 결과 <고려사>에서 보듯이 양국 군대는 금산태자 일당 수십만 명을 격퇴시켰다. 몽골 원수 합진(哈眞)과 고려 장군 김취려를 비롯해 양국은 ‘골세(만년)에 이르는 영원한 형제국’이 되기로 맹세한다. 칭기즈칸의 역사상 ‘형제국’을 논의한 경우는 이것이 유일한 예다.


▎몽골인들은 체구는 크지 않았지만 용맹과 담력이 남달랐다.
형제국이 된 지 8년 후 몽골 사신 착고여(着古歟)가 살해됐다. 우리 국사책에서는 몽골이 이 사건을 단순히 고려 침략의 명분으로 활용했다고 기술한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명초 송렴의 <원사(元史)> ‘외이열전(外夷列傳)’과 조선시대 한치윤이 엮은 <해동역사(海東繹史)> ‘제14권’에 따르면 고려는 형제국이 되자고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몽골 장군 ‘찰라’를 살해했다. 이어 몇 년 뒤에는 착고여를 압록강에서 암살했다.

그 후 고려는 이런 행위를 책망하러 온 몽골 칙사에게 활을 겨눠 쫓아내는 등 다섯 차례 도발 행위를 했다. 그 결과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유럽의 상당 부분을 정복한 세계 최강국 몽골은 고려 정벌에 나선다.

어찌된 일일까? 칭기즈칸은 자신의 증조부들을 죽인 금나라에 대해서는 1206년 칸이 되자마자 즉각 행동을 개시했다. 그런데 칭기즈칸은 고려를 치라고 하지는 않았다. 1227년 하늘로 돌아간 칸의 뒤를 이은 셋째 아들 어거데이칸 재위 3년인 1231년에 이르기까지 몽골은 고려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사죄만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고려가 누차 말을 듣지 않자 어거데이칸은 그해 군사를 보내 고려 정벌을 시작했다. 몽골 측이 먼저 고려에 대해 적대 행위를 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몽골 입장에서 고려 침략은 징벌이 아닌 응징일 뿐이다.

공녀를 통한 ‘겹사돈’ 관계


▎13세기 세계를 정복했을 당시 몽골 기병의 재현 모습.
몽골과 고려는 결국 전쟁에 휘말렸다. 이 전쟁은 양국 모두 고구려-발해를 계승한 나라란 점에서 ‘고려 반도의 본토고려와 세계 정복자 몽골 고려 형제간의 다툼’이라고 표현해도 큰 무리가 아니다. 비록 전쟁의 원인은 다르지만, 지난 세기 남북한 간 일어난 싸움에 비유할 수 있다.

1231년 12월 몽골군이 고려로 쳐들어와 수도 개성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고려의 제23대 왕 고종(1192~1259, 재위 1213~1259년)은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고, 이후 공식적으로 29년 동안 항쟁한다. 그 기간 두 나라는 지루한 전쟁과 짧기만 한 강화(講和)를 되풀이했다.

전쟁 도중 두 나라의 관계는 특이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약소국의 설움이라며 개탄하는 ‘고려공녀’도 사실은 몽골 황가(皇家)가 먼저 내준 ‘몽골공녀’가 근간이다.

전쟁 발발 10년째인 1241년 4월, 고종은 강화를 위해 왕의 조카인 영녕공 왕준을 왕자라고 속여 몽골로 보냈다. 이때 칭기즈칸의 손자이자, 그 막내아들 툴루이의 맏아들인 몽케칸(재위 1251~1259년)이 몽골제국의 제4대 칸으로 재위하고 있었다. 칸은 왕준에게 처음으로 몽골 황족 여인을 아내로 내려주고, 왕준으로 하여금 몽골에 눌러앉아 살게 한다. <고려사>의 ‘권130-열전43-반역4’ 기록에는 왕준의 아내가 “나는 황족이다. 황제는 공(公)이 고려 왕족이므로 이 첩을 시집 보냈다”고 했다.

몽골은 1231·1232·1254년 세 차례 침입했고, 제4차 침공 후인 1270년 고려는 몽골에 항복했다. 왕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나와 몽골 사신을 맞았다. 이에 앞서 영녕공 왕준은 두 나라의 화해를 위해 중재를 시작했다. 몽골 측이 먼저 두 나라 군주 가문 사이에 혼인을 제안하고 실행해 양국은 전쟁 중에 사돈 국가가 된 것이다.

그 후 원종의 아들 왕심이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칸(세조) 때인 1271년 강화를 위해 원나라로 갔다. 그는 후일의 고려 제25대 국왕 충렬왕(재위 1274~1298년, 복위 1299~1308년)이다. 그가 강화를 위해 갔을 때 쿠빌라이칸의 부마가 된다.

<익제난고(益齋亂稿)> ‘권제9상세가(卷第九上世家)’에는 “세조 쿠빌라이가 놀라고 기뻐서 말하기를 ‘고려는 만 리나 떨어진 나라다. 당 태종이 몸소 쳤지만 따르게 할 수가 없었다. 이제 세자가 스스로 와서 내게 귀부(歸附)했다. 이는 하늘의 뜻이다. 크게 상을 내려라”라고 기록돼 있다. 그 후 쿠빌라이칸은 왕심이 요구한 대로 자신의 딸 후투룩겔마스(忽都魯揭里迷失)를 그에게 시집 보낸다. 쿠빌라이칸은 그녀에게서 난 외손자 왕장, 곧 충선왕을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

이후 원제국의 황실과 통혼해 훈신(勳臣)·세족(世族) 등 군주로 대우받은 고려 왕실의 인물들로는 심왕 왕고 등 모두 6명이다. 그들과 혼인한 몽골 여인은 기록상 최소 황녀 1명, 공주(왕의 딸, 곧 황제의 손녀) 7명, 평민 1명을 포함해 모두 9명이다.

쿠빌라이칸은 1287년에야 비로소 고려 여인을 후궁으로 받기 위해 처음으로 공녀제도를 만든다. 이를 통해 고려와 몽골은 겹사돈 국가가 된다. 그렇다면 몽골공녀가 고려공녀보다 먼저 고려 왕족에게 주어진 셈이다.

어떤 학자에 따르면 고려 여인은 44회에 걸쳐 총 170명이 원나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 학자는 고려 공녀들을 ‘양공주’인 양 묘사한다. 그러나 이는 고려공녀의 역할이나 성격을 완전히 잘못 이해한 오류다. 그녀들은 사실은 원나라 황제의 후궁들이었고, 그들 중 황후가 된 여인도 4명이나 된다. 우리가 잘 아는 원 말의 기황후(奇皇后) 하나만이 아니다. 기황후보다 훨씬 먼저 고려 왕족 출신인 왕황후(王皇后)를 비롯해 다르마시리 김씨(金氏) 황후 등 2명이 원나라 황후가 됐고, 곽비(郭妃)도 사실상 황후급이었다. 그 외 다른 후비를 포함해 북원(北元) 시대의 후비까지 치면 10여 명에 이른다.

고려공녀는 원나라 황후 후보들


▎주베이니의 <세계정복사>에 나오는 몽케칸의 조회 그림. 그는 제3대 황제 구유크칸의 사촌 동생이자 원나라를 연 쿠빌라이칸과 이란 등지에 일칸국을 세운 훌라구칸의 형이기도 하다.
원말 도종의가 ‘몽고 78종’이라고 기록했듯이 당시 몽골씨족은 많았다. 그러나 이들 중 오직 콩그라트 씨와 예키라스씨 두 씨족만이 황제의 후궁과 황후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다른 나머지 76종의 몽골씨족을 제치고 고려 여인만이 두 씨족과 같은 반열에 들어섰다.

그렇다면 고려 여인들만이 여타의 몽골씨족 여인들과는 다른 특별대우를 받았다는 이야기다. 고려 공녀는 달리 말하자면 황제의 자손을 잇기 위해 고려에서 뽑혀온 고관대작의 딸들이었다.


▎원 세조 쿠빌라이칸의 초상화.
1247년에는 국왕의 아우가, 1254년에는 몸소 몽골까지 온 적 있는 아르메니아의 왕 헤툼 1세 이래 헤툼 2세가 공주를 몽골 황실과 혼인했다. 이 일을 포함해 원래 고구려계 인물로 카자흐스탄 킵차크 지방에서 왕가를 이었던 바야우드씨 등 정통 몽골이 아닌 여인이 몽골 왕족과 혼인한 예가 있다.

그러나 몽골과의 혼인 관계는 고려를 제외하면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일부 사학자는 이런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몽골의 ‘황후종족제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몽골 황가가 고려에 먼저 황녀·왕녀를 시집 보낸 사실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지 힘이 약한 고려 측에서 여인을 보냈다는 한 가지 측면밖에 몰랐기 때문에 잘못된 평가가 나온 것이다. 만일 고려 여인들이 고려공녀라면 몽골 황실이 고종의 조카 왕준과 원종의 왕자 충렬왕 등 고려 왕족에게 시집 보낸 황녀·왕녀들은 몽골공녀란 말이 아닌가?

고려 원종의 왕자가 원 세조 쿠빌라이칸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양국은 사돈의 나라가 됐다. 두 나라는 각각 중원과 고려의 다른 황제국과 왕국에서 공동 통치자가 됐다. 두 나라 간에 이처럼 특별한 관계가 생긴 이유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쿠빌라이칸의 말처럼 고려의 국력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했기 때문이다. 원나라는 공식적으로는 29년간, 비공식적으로는 39년간 고려와 싸웠지만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이나 중원의 금나라·서하·송나라처럼 쉽게 정복할 수 없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이 다시 생각해봐야 할 중요한 역사·정치적 교훈이다.

둘째로는 고려 여인들의 덕성이다. <경신외사(庚申外史)> ‘권상(卷上) 1’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기황후는 고려 미인을 많이 데리고 있어서 대신에게는 그 여인들을 보냈다. (…) 고려 여인들은 아름답고 교태가 있고 사람을 잘 섬기므로 결국은 총애를 얻었다.”

셋째, 고려 여인들의 뛰어난 외모의 아름다움이다. 원대가 지나 명초부터 명말 만력(萬歷) 때까지의 사실을 적은 심덕부(沈德符, 1578~1642) <만력야획편(萬歷野)>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려양-고려식 ‘코리안 웨이브’ 바람


▎고려인들이 즐겼던 상추쌈이 원나라로 전파됐으며 그곳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다.
“또 문황제(文皇帝, 영락황제)는 고려가 바친 여인 몇 명을 받아들였는데 그중 하나가 현비 권씨다. 북으로 정벌을 가는데도 데려갔고, (…) 그 아비는 고려에서 여전히 살았다. 이때는 여전히 원나라 때의 풍속을 숭상했기 때문인데 (…) 나중 정덕[正德, 명 11대 황제 무종(武宗)의 연호] 연간에 회회인(回回人) 우영이 황제에게 말씀을 올려 말했다. ‘고려 여인들은 그 살결이 희고 부드러우며(白) 아름다워(美) 중국(中國) 여인들보다 크게 낫습니다(大勝)’.”

<경신외사>는 또 “고려 여인들의 뛰어난 덕성과 외모 때문에 경사(京師, 서울)의 높은 관리와 귀족들은 반드시 고려 여인을 얻은 후에야 명가(名家)가 될 수 있었다”고 적었다.

고려 여인들은 문화 면에서 몽골 귀족 사이에서 고려양(高麗樣)을 크게 전파했다. <경신외사>는 “이 때문에 원 순제의 지정(至正) 연간 이래 황궁 안의 급사·사령 등 여관(女官)은 대부분이 고려인이었고 사방의 옷·신·모자·기물 모두 고려 것의 모양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원나라 황궁 여인들의 복장. 한복과 유사한 점이 많이 보인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원나라 황가와 귀족들은 고려의 상추쌈과 불고기 등을 먹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여인·의복·신발·모자·음식 등 일종의 원대 궁정 속에 퍼진 ‘고려류(高麗流)’다. 곧 오늘날의 ‘한류(Korean waves)’다.

이처럼 두 나라의 왕실이 하나의 혈통으로 묶인 또 다른 이유는 원나라의 몽골 귀족들이 자신들의 지위 유지를 위해 고려인과의 결혼동맹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고려도 나라를 보존하기 위해 원나라와 혼인동맹이 필요하긴 했지만 몽골 여인을 선호하지는 않았다.

예컨대 북원 때를 보자. 북원의 오왕·회왕·쌍합달 왕이 모두 사신을 보내 답례하고 말을 바쳤다. 이때 오왕 등이 고려에 먼저 예물을 가지고 왔는데 고려에서 사신으로 우제를 보내 답례했다. 오왕은 고려 사람과 혼인하기를 간청하고, 회왕은 우제를 매우 후히 대접했으며 그 딸을 고려에 시집 보내고자 했다. 이에 우제가 사양하며 아뢰기를 “신은 명을 받아 교빙(交聘)할 뿐이오니 청혼하는 일은 신이 알 바가 아닙니다”고 했다. 이로 보아 원나라의 귀족층은 자기들이 먼저 고려 귀족과 혼인 관계 맺기를 원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몽골제국이 건재한 동안 한족(漢族) 여인은 물론 한인과 남인(南人)들도 몽골인과 고려인들의 공동 통치하에서 스스로 정부나 나라 없는 속민의 삶을 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경신외사> ‘권상’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원 순제 자신도 이 사실을 인정해 ‘사람들은 국가가 한인을 가벼이 여긴다고들 한다. 이와 같으니 과연 한인을 가벼이 여기는 도다’고 한 바 있다.”

1368년 오늘날 남경에서 일어난 주원장은 명국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대규모로 북방 정벌을 개시해 원나라의 수도 대도, 오늘날 북경에 육박했다. 그러자 고려 기황후의 남편인 원 순제는 대도를 버리고 북쪽의 내몽골로 물러났다.

‘제2의 칭기즈칸’ 아미르 티무르


▎감옥에 갇힌 바야지드와 그를 잡은 아미르 티무르.
북으로 쫓겨간 원 왕조를 북원이라고 한다. 순제는 오늘날 내몽골의 한 지방인 당시의 응창부에서 1370년에 죽었다. 그러자 그의 두 아들 아유르시리다라와 그 아우 턱스 티무르가 차례로 황위를 이었다.

그 뒤 북원은 원 순제의 황후인 기황후의 아들과 손자가 북원을 이어나갔는데, 이들도 고려·조선과 우호 관계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오히려 북원 측의 이런 바람을 거부한 것은 고려였다. 곧 이성계가 고려를 대신해 조선을 세웠기 때문이다.

한편 서방에서는 4칸국 중 하나인 우즈베키스탄 서부의 서(西)차가타이칸국 지역에서 1370년에 아미르 티무르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칭기즈칸의 직계 후손은 명목상의 칸으로만 앉히고 자신이 실질적인 통치자가 됐다.

그는 칭기즈칸의 직계 후손은 아니다. 그러나 그 자신 역시 칭기즈칸 가문에서 3대 선조 때 칭기즈칸의 작은 증조부에 해당하는 인물의 8대손이다. 칭기즈칸 세대에서 본다면 종(從) 5대 후손이다.


▎아미르 티무르의 두상(頭像).
학자들은 티무르왕조가 세워진 1370년에 차가타이칸국은 사실상 멸망했다고 본다. 그러나 차가타이칸국의 칸은 티무르왕조가 설립된 이후에도 명목상 존재했고, 또 티무르의 모든 정령(政令)은 오직 차가다이칸의 이름으로 나갔다.

1395년 티무르는 킵차크칸국을 공격해 테레크에서 격파했다. 티무르는 수도 사라이 베르케를 약탈했고, 킵차크칸국을 속주로 만들었으며, 칭기즈칸 직계 자손을 꼭두각시 군주로 왕좌에 세웠다. 차가타이칸국이 기울어지는 이 시점에 아미르 티무르는 우즈베키스탄과 이란 지방에서 칭기즈칸의 한 직계 후손인 차가타이칸국의 황제인 카잔칸의 공주 사라이 물크 하늠을 아내로 맞아 칭기즈칸 가문의 쿠라곤(부마)이라는 칭호를 썼다.

<승자의 책(Zafarnama)>에 따르면 그는 ‘칭기즈칸의 제국의 재건을 위하여’라는 구호 아래 러시아 지역을 포함한 킵차크칸국·오스만제국·인도 등을 정복하기 위해 말 안장에서 내리지 않고 끊임없이 원정했다. 제2의 칭기즈칸이다.

이를 통해 그는 오스만터키의 일디림 바야지드칸을 사로잡아 죽게 했고, 러시아의 일부와 이란·호라즘·모굴리스탄과 위구리아, 인도 북서부에서 카자흐스탄 동남부까지 광대한 제국을 세웠다. 유럽과 러시아는 그의 이름 아래 떨었고, 그는 이집트의 노예 왕조인 마믈룩조와도 교통했다.

이 무렵 동방에서는 주원장이 원나라 마지막 황제인 순제를 내몽골로 몰아냈다. 그러자 이에 분개한 아미르 티무르는 북원에서 파견된 한 왕자와 함께 1404년에 72세 넘는 나이의 몸으로 말에 올라타고, 동방의 명나라 원정에도 나섰다.

그러나 명나라 국경에 가까웠던 오늘날 카자흐스탄의 오트라르에까지 이르렀다가 열병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명나라 원정은 중단됐다. 그는 72세가 되도록 한 번도 전쟁을 멈춘 적이 없는 인물로 그야말로 제2의 칭기즈칸이라고 할 정복자였다.

티무르제국이 쇠퇴하자 칭기즈칸의 후손으로 러시아 지역에서 남하한 킵차크 몽골계(후에 우즈벡칸이라 불린다)가 북쪽에서 쳐 내려와 모바라운나흐르 지역을 장악했다. 그러자 당시 분열돼 있던 티무르제국의 한 왕자로 티무르의 5대손인 보부르칸은 자기 영지 파르가나를 출발해 사마르칸드를 두 차례나 회복했다.

그러나 결국은 우즈벡칸의 군대에 밀려 바부르칸은 1504년께 자기 영지에서마저 떠났다. 그러던 중 로디왕조의 내분에 따른 반대파 제거 요청을 기회로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오늘날 파키스탄령(領) 인도로 쳐 들어가 모굴왕국(무갈왕조)의 기초를 놓았다. 모굴·무갈·몽골은 모두 몰골(말갈)이라는 말에서 나온 국명이다.

그가 죽은 뒤 아들 후마윤은 모굴왕조의 기반을 다졌다. 후마윤은 수리왕조를 무너뜨리고 통치구역을 회복했다. 증손자 샤 자한은 그 유명한 타지마할을 지었다.

미국보다도 방대했던 몽골제국


▎도서 <칭기즈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에 실린 삽화.
처음 아프가니스탄과 인도 북부에 자리 잡았던 무갈왕조는 그 뒤 인도 남부의 덱칸 지역으로까지 영토를 확장한 이래 13대의 칸들이 300년 이상 인도를 다스리다가 1875년께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인도-파키스탄 지역은 원래의 칭기즈칸의 몽골제국 시대에는 북부 일부만 빼고 그의 영토가 아니었다. 칭기즈칸이 하늘로 돌아간 지 약 280년이 지나자 다른 지역들에서는 ‘몽골 사칸국’이 갈기갈기 찢겨 소국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그러한 시대에 칭기즈칸의 직계 후손은 아니지만 그의 3대 선조의 8대손으로 난 아미르 티무르 가계의 5대손 바부르 칸이 1504년께 인도 남방으로 새 영토를 개척하고 인도 전체에 모골(무갈)제국으로 불리게 된 나라의 기초를 쌓았다. 그렇다면 이 역시 분명히 ‘말갈제국’, 곧 ‘몽골제국’의 연장선이다. 인도 토착인들에게 ‘무갈제국’은 아직도 이방인들의 인도 지배 역사로 간주되고 있다.

이제 칭기즈칸의 역사를 여기서 마무리하자. 한마디로 칭기즈칸의 선조는 오래전에 망해 역사에서 사라진 고구려와 말갈(발해), 그리고 궁예의 고구려와 왕건의 고려 땅, 바로 이 땅을 떠난 우리 피붙이들이었다. 몽골제국 4칸국의 형님 나라 격인 대원국은 ‘발해의 부흥국’이었다.

칭기즈칸의 아들 주치는 오늘날의 모든 러시아 땅에서 크리미아에 이르기까지 황금 장막의 칸국(Golden Horde)을 지었다. 칭기즈칸의 손자 훌라구는 홍해를 끼고 이집트를 바라보는 오늘날의 바그다드·시리아·사우디아라비아 등 아랍세계는 물론 이란, 터키 동부,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를 합친 일한국을 지었다.

이 땅덩어리를 동으로 이어 칭기즈칸의 둘째 아들 차가타이는 카자흐스탄에서 티베트 고원을 넘어 지나(支那)의 신강에 이르기까지 차가타이 칸국을 지었다. 셋째 아들 오고타이와 넷째 아들 툴루이, 그리고 그 아들 세조 쿠빌라이는 고향 땅 몽골리아는 물론 오늘의 지나 땅 전체를 포괄하는 원나라를 지었다.

이들 사칸국(四汗國)의 일부는 일찍이는 150년이 지나 일칸국이 무너지자 같은 몽골계 잘라이르 왕조와 초판 왕조가 그 자리를 이어 그 명맥을 유지했다. 동시에 전 세계를 하나의 교통로와 교역과 문화의 전달길로 이었다.

그들 일가는 투르크화해 중앙아시아에서 티무르 제국에서 우즈베키스탄의 콩그라트 왕조로 이어져 1923년까지 존속했다. 인도·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등에서는 무갈(몽골)제국을 지어 영국이 이 대륙을 점령할 때까지 이어졌다.

한편 그들과 같은 선조에게서 난 다른 지파(支派)인 명나라와 청나라는 지나에서 1945년까지 700년 가까이 그 땅을 통치했다. 그들의 후손들은 지금도 아랍·유럽·러시아·중앙아시아·서남아시아·동아시아 등 세계 도처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몽골제국의 중신이자, 페르시아 사가 주베이니는 자신의 저서 <세계정복사>에서 칭기즈칸을 세계 정복자라고 부른다. 고구려 말갈 왕족의 19대 후손 칭기즈칸이 1227년 8월에 텡게르(하늘)로 되돌아갔다. 올해는 그가 태어난 지 855년이 되는 해다.

그리스의 알렉산더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황제 이래 칭기즈칸만큼 커다란 세계 제국을 지은 사람은 아직까지 아무도 없다. 오늘날 미국의 평화질서(Pax Americana)도 미국이 실제 물리적으로 지배하는 영토의 크기에 있어서는 몽골제국의 크기보다는 훨씬 작다.

마르코 폴로는 “그는 죽었으며, 이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올바른 사람이었고 현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칭기즈칸의 방계 후손 아불가지칸은 “칭기즈칸의 치세 아래 투란(투르크인들의 땅) 사이에 있는 모든 나라는 누구에게든 어떠한 폭행도 당하지 않은 채 황금쟁반을 자기 머리에 이고 해가 뜨는 땅에서 해가 지는 땅까지 여행할 수 있을 만큼 평화를 누렸다”고 기록했다.

오직 하나뿐인 세계 정복자


▎<바부르나마> 삽화 속의 후마윤.
<몽골비사>는 그가 태어났을 무렵에 열국이 갈라지고, 부족들이 끊임없는 약탈과 복수전쟁에 휘말리고 있었다고 한다. 개인과 집단 간에 폭력이 법 대신 난무하고 있었다. 칭기즈칸은 자신의 시대의 어두움을 극복하려고 한 것이었다.

미국의 잭 웨더퍼드는 자신의 저서에서 칭기즈칸을 현대 세계를 창출한 이로 부른다. “칭기즈칸의 제국은 그 자신 주변에 있는 많은 문명을 연결하고 혼합해 하나의 새로운 세계 질서(a new world order)로 만들어냈다. (…) 1227년 그가 죽을 때쯤 그는 이 문명들을 외교와 교역의 길로 연결시켜 내었는데 그것들은 오늘날에도 끊기지 않고 남아 있다. (…) 그는 국제법을 만들어 내었고, 모든 백성 위에 군림하는 영원한 푸른 하늘의 궁극적인 최상의 법을 인정했다. (…) 몽골인들은 정복자로서뿐 아니라 문명의 전례 없는 문화적 전달자로서 전 지구를 휩쓸었다”고 한다.

이제 마치는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을 비롯해 2017년 1월호부터 10월호까지의 주제를 간단히 정리해보자. 고구려-발해 왕가의 피와 DNA를 가진 세계 정복자 칭기즈칸, 영락황제의 명나라 왕조, 백두산 선녀의 아들 포고리 옹순(고구려 영웅)의 6대손 청태조 누르하치 등 이들은 놀랍게도 모두 한민족의 피를 타고난 사람들이다.

중국 대륙은 물론, 거의 전 세계에서 나란히 존재했던 몽골제국과 한반도에 존재한 고려는 세계 제국 몽골 고려와 본토고려 두 나라의 관계다. 지나 대륙에 존재했던 명과 청나라는 서조선과 본토조선라는 이야기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코리아는 중국의 부분이었다(Korea actually used to be part of China)”는 역사적 진실과는 정반대인 것이다. 중국이야말로 코리아의 일부인 것이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된 지금 우리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명확해졌다. 역사의 미래가 그대들 눈앞에 펼쳐지기를 기원하노라.

전원철 - 법학박사이자 중앙아시아 및 북방민족 사학가.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체첸전쟁 때 전장에서 유엔난민기구(UNHCR) 현장주재관으로 일했다. 우리 역사 복원에 매력을 느껴 세계 정복자 칭기즈칸의 뿌리가 한민족에 있음을 밝힌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몽골제국의 기원> 1, 2권을 출간했고, 고구려발해학회·한국몽골학회 회원으로 활약하며 다수의 역사 분야 저서와 글을 썼다.

201710호 (2017.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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