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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풍기의 선물의 문화사(10) 귤(橘)] 감사의 마음, 세 ‘알’에 담아서 

황귤·유감·당유자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름… 종묘의 제수, 임금 하사품 등 조정에서도 귀히 씌여 

김풍기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지금은 흔한 과일 중 하나이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귤은 조정 진상품 등 귀한 대접을 받았다.
한강변에 있던 희우정(喜雨亭)은 원래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의 별서(別墅)로 건립됐다. 1425년(세종7) 5월 14일 세종은 농사 상황을 살피기 위해 궁궐 밖으로 나왔다가 이곳을 찾아와서 술·음식·말·토지 등을 하사했다.

마침 파종을 하던 시기였는데 비가 내리지 않아 모두 걱정하고 있었다. 세종이 한창 연회를 베풀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온종일 쏟아지는 바람에 파종에 문제가 없을 정도로 충분한 수량이 확보됐다. 왕은 기쁜 비가 내렸다는 의미를 담아서 ‘희우(喜雨)’라는 이름을 하사했고, 당시 부제학 신장(申檣, 1382~1433)에게 현판 글씨를 쓰게 해서 희우정이 탄생했다.

효령대군은 당시 최고 문장가 변계량(卞季良, 1369~1430)에게 부탁했고, 이 정자가 만들어지게 된 내력을 담은 글인 <희우정기(喜雨亭記)>가 지어졌다. 이 일이 있은 후에도 세종은 매년 여러 차례 희우정을 찾아 농사의 상황을 살피기도 하고 한강에 전함(戰艦)을 띄워서 수군의 훈련을 살폈다. 또 신하들이나 왕자 및 공주·종친들과 함께 연회를 열기도 했다.

이 정자는 훗날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1488)의 소유가 되면서 망원정(望遠亭)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한강변의 많은 정자를 대표하는 명소로 조선 전기 지식인들 사이에서 명성을 누렸다.

세종 때 다시 왕이 이곳을 찾아 여러 왕자 및 신하와 연회를 즐기게 됐다. 한낮에 시작된 연회는 밤까지 이어져서 많은 문신이 한강변의 희우정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훗날 문종으로 등극하게 되는 동궁도 이 자리에 참석했는데 동궁이 직접 쟁반에 동정귤(洞庭橘)을 담아서 신하들에게 내린다. 귤을 하나씩 집어 들어 쟁반 바닥이 나타났는데 거기에는 동궁이 직접 짓고 쓴 한시 한 편이 적혀 있었다. 그 작품은 이러했다.

“전단의 향기는 유독 코에만 맞고, 기름진 고기는 유독 입에만 맞을 뿐. 동정귤이 가장 사랑스럽나니, 코에도 향기롭고 입에도 감미롭기 때문이로세.”(檀栴偏宜於鼻 脂膏偏宜於口 最愛洞庭橘 香鼻又甘口)

그 자리에 있던 신하들이 모두 놀라면서도 감격해서 이날 밤의 일을 <희우정야연도(喜雨亭夜宴圖)>라는 그림으로 기록한 뒤 여러 사람이 한시 작품을 남긴다. 그때 지은 작품이 서거정의 문집에 남아 있고, 당시의 일화가 <필원잡기>에 남아서 전한다. 이 사건은 조선시대 전반에 널리 알려져서 아름다운 고사로 인식됐다.

<국조보감(國朝寶鑑)>에는 1750년(영조 26) 1~2월께 영조가 승정원 신하들에게 귤을 한 쟁반 하사한 기사가 나온다. 신하들이 귤을 모두 먹자 왕은 시 한 편을 내리고 당시 근무하고 있던 신하들에게 화답시를 올리도록 명했다. 이는 바로 문종의 고사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기록돼 있다. 그만큼 희우정에서 귤을 하사했던 일화는 조선을 통틀어 널리 알려져 있었고, 왕과 신하 혹은 동궁과 여러 문신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공물(貢物)로도 높은 가치


▎서울 마포구 망원들의 망원정. 효령대군의 별장으로 지어져 희우정으로 불렸으나, 훗날 성종의 친형 월산군의 별장이 되면서 망원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귤을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에는 귤 선물이 아주 귀한 사람을 위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물건의 희소성은 선물의 가치를 높여주는 중요한 조건이 아니던가. 남쪽 이역만리 먼 곳에서 온 과일은 희소성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을 것이다.

용어에 따라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밀감·감귤·귤 등으로 불리던 이 과일은 오랜 옛날부터 제주도 지역에서 재배돼 한반도 지역에 알려졌다. 고려 문종 때 이미 귤은 진상용으로 기록에 나타나지만, 조선시대가 돼서야 지방에서 궁궐로 올리는 공물 중 귀하고 중요한 품목으로 자리 잡는다.

근대 이전의 기록에 귤의 명칭이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각각의 품목이 어떻게 같고 다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생물학이나 원예학 등 관련 학문에서 귤의 범주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자세히 밝히는 일은 내 능력 밖의 일이기도 하고, 이 글의 목표를 벗어나는 일이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여러 종류의 귤을 그저 ‘귤’이라는 단어로 범칭할 수밖에 없다.


▎진달랫과의 상록 소관목으로 초여름에 빨간 꽃이 핀 뒤 열매는 맺는 월귤(越橘). 관상용으로 주로 고산에서 자라며, 한국의 금강산 이북, 중국, 일본 등 한대(寒帶)에 분포한다.
허균(許筠)은 자신의 저서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 예전에 먹어봤던 과일의 종류를 언급하면서 네 종류를 기록했다. 자세한 설명을 붙이지는 않았지만, 각각의 품목 뒤에 적어놓은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금귤(金橘)은 ‘제주(濟州)에서 나는데 맛이 시다’고 돼 있다. 감귤(甘橘)은 ‘제주에서 나는데 금귤보다는 조금 크고 달다’, 청귤(靑橘)은 ‘제주에서 나는데 껍질이 푸르고 달다’, 유감(柚柑)은 ‘제주에서 나는데 감자(柑子: 귤의 일종)보다는 작지만 매우 달다’고 돼 있다. 이 중에서 ‘감자’ 역시 귤을 지칭하는 단어로 보인다.

허균보다 약간 뒤에 살았던 이건(李健, 1614~1662) 역시 제주도에서 8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라는 저술을 남긴 바 있다.

거기에서 이건은 귤의 다양한 이름을 소개하고 있다. 해당 항목의 내용은 이렇다. “감자(柑子)라는 종류의 이름은 아주 많다. 감자·유자·(柚子)·동정귤(洞庭橘)·금귤(金橘)·당금귤(唐金橘)·황귤(黃橘)·산귤(山橘)·유감(柚柑)·당유자(唐柚子)·청귤(靑橘) 등 모두 알 수가 없을 정도다.”

그리고는 가을이 돼 열매가 맺기 시작하면 관아에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과일의 개수를 세어서 장부를 만들고 그것이 익으면 진상하는 용도로 공급한다고 하며, 과일의 수가 줄면 즉시 주인을 징벌하므로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게 한다는 내용도 덧붙여 기록하고 있다. 그 정도로 귤은 공물로서의 높은 가치를 지녔기 때문에 아이러니컬하게도 귤을 재배하는 제주도의 농민들을 옥죄는 족쇄처럼 돼버렸다.

정약용(丁若鏞)의 기록에는 제주도의 귤과 관련해 흥미로운 내용이 보인다. 조선의 제도로 봐 제주도의 공물로는 귤과 말이 중심 품목이어서 해마다 한겨울이 되면 공물을 운반하는 사람이 한양에 도착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해 공물이 도착하지 않는 일이 생겼다. 음력 11월이면 도착해야 할 공물이 도착하지 않으니 기다리다가 결국 12월이 됐고,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문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2월이 거의 끝나갈 무렵 공물이 도착했다. 사정을 알아보니 감귤 꽃이 한창 피었을 때 태풍이 불어 닥쳐서 꽃이 모두 떨어졌다는 것이다. 흉작을 넘어 귤을 수확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에 제주도 백성들이 모두 귤나무를 부둥켜안고 “공물을 바치지 않으면 임금의 은택을 져버리는 일입니다. 차라리 우리가 죽을지언정 귤만은 달리게 해주십시오” 하면서 울부짖었다.

그러자 열흘쯤 지나서 세 그루의 나무에서 다시 꽃이 피어났고, 백성들은 놀라고 기뻐하면서 잘 보살폈다. 그 나무에 달린 귤을 수확해서 가져오느라 예년에 비해 늦었다는 것이었다. 이 일을 들은 정약용은 그 사정을 기록한 뒤 송(頌)을 한 편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탁라공귤송(乇羅貢橘頌)>(<다산시문집> 권12)이다.

백성들의 눈물겨운 사연에 많은 사람이 감탄했겠지만, 나는 그들의 절박함이 새삼스러웠다. 임금의 은택을 갚는 것도 갚는 것이지만, 자신들에게 닥칠 엄청난 징벌과 불이익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싶었다. 어떻든 제주도의 귤은 이래저래 많은 사연을 남긴 품목임에 분명하다.

‘감동’ 이규보, 시 세 수로 화답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성균관의 유생들에게 황감을 하사하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과거시험을 치렀다.
이렇게 진상돼온 귤은 종묘에 제수로 사용되기도 했고, 왕실 음식으로 활용되기도 했으며, 신하들에게 선물로 사용되기도 했다. 특히 황감제(黃柑製) 혹은 감제(柑製)라는 이름으로 성균관의 유생들에게 왕이 황감을 하사하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과거시험을 치렀던 것은 귤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1536년(중종 31) 처음 시행된 이래 조선 후기가 되면 <속대전(續大典)>에 규정이 올라갈 정도로 관례화돼 치러졌다.

우리나라 문인들의 글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귤 관련 고사는 귤 속에서 신선이 앉아서 장기를 두더라는 ‘귤중희(橘中戱)’ 이야기라든지, 중국 오나라의 육적(陸績)이 부모님을 위해 귤 세 알을 품에 품고 가려다가 인사를 하느라고 땅에 떨어뜨렸다든지,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면서 주변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귤화위지(橘化爲枳)’ 같은 성어가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이런 고사를 어설프게 활용하면 작품의 긴장도를 떨어뜨리기도 하기 때문에 조심스럽다. 역시 귤 선물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먼 지방에서 어렵게 구해온 귀한 물건이라는 점이었다.

고려 후기의 문인 이규보(李奎報)는 제주태수 최안(崔安)이 동정귤을 보내오자 고마운 마음에 세수의 시로 화답한다. 거기에서 이규보는 귤이 제주도에서만 생산되는 귀한 것이어서 귀인이나 문벌가에서도 얻기 어렵다고 했다. 그만큼 희귀한 것인데 먼 바닷길을 건너 자신에게까지 선물로 보내온 것에 감격해 고마운 마음을 시에 담았다. 그렇지만 고려 문인들의 글에서 귤에 대한 기록을 찾기는 쉽지 않다. 아무래도 조선시대에 와서야 기록에 자주 등장한다.

조선의 유학자 윤선거(尹宣擧, 1610~1669)는 집안에 전해오는 오래된 수첩에서 우연히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이 성혼(成渾, 1535~1598)에게 보낸 편지가 필사돼 있는 것을 발견한다.

“삼가 내리신 소식을 받자오니 사의(詞意)가 정중해 감사와 위안을 이길 수 없습니다. 보내주신 <대학>은 제가 직접 베껴 적은 뒤 즉시 돌려보내 드렸습니다. 이공(李公) 학문의 정묘(精妙)함은 탄복한 지 오래됐습니다. 이 중에 황귤은 남쪽 지방에서 온 곳인데 세 개를 올리오니, 이 또한 환서일치(還書一瓻)의 뜻입니다.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아룁니다.”

유희춘의 편지 내용은 성혼에게 보낸 답장으로, 성혼이 보내준 <대학(大學)>을 직접 옮겨서 필사를 한 후 즉시 돌려보냈다는 것이었다. 문맥으로 봐 <대학>은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해설을 했든 메모를 했든 그의 학문적 숨결이 스며 있는 책으로 성혼이 가지고 있던 것이었으리라. 그 책을 본 유희춘은 이이의 학문에 감탄하면서 책을 빌려준 성혼에게 감사하는 답장을 보낸 편지였다. 이 편지의 뒤에 붙어 있는 윤선거의 기록에 의하면 유희춘의 학문적 성취는 재주로만 이룩한 것이 아니라 노년에 이르도록 학문에 열심히 힘을 쓴 덕분이라고 했다.

그런데 유희춘은 성혼에게 답장을 보내면서 감사의 선물로 귤 세 알을 보낸다. ‘환서일치(還書一瓻)’의 뜻이라고 했다. 이 말은 송나라 이후에 널리 쓰인 말인데 빌린 책을 돌려주면서 감사의 표시로 주는 선물을 지칭한다. 송나라 문인 장세남(張世南)의 <유환기문(遊宦紀聞)>에 “선배들은 책을 빌렸다가 돌려주면 모두 술 한 병으로 갚는다”고 했다. 유희춘은 성혼에게 책을 돌려주면서 귤 세 알로 갚으면서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만큼 이 시대에 귤은 귀한 선물 품목으로 꼽혔던 것이다.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선물


▎국내 밀감의 70%가 제주 서귀포시 일원에서 생산된다. 노란 밀감이 달린 귤나무 밭은 서귀포의 겨울을 상징하는 풍경이기도 하다.
이 편지를 통해서 윤선거는 선현들의 공부를 새삼 돌아보면서 공부의 도를 마음에 새기는 계기로 삼고, 그 마음을 담아 한시를 한 편 쓴다. “황귤 세 개로 술 한 병을 대신하니, 옛 선현들의 풍모가 이와 같았네. 유학으로 세상을 빛내고 어진 분과 친했으니, 우리 두 가문 사람들 감히 모를 수 있으랴.”(黃橘三枚代一瓻, 昔賢風範有如斯. 斯文赫世親仁契, 吾兩家人敢不知)

유희춘의 편지에 덧붙인 윤선거의 글은 1630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유희춘·이이·성혼 등 당대 최고의 유학자들 사이에 있었던 일을 읽으면서 20대에 막 들어선 젊은 유학자 윤선거의 마음은 학문에 정진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의 눈에 귤을 보낸 사실이 얼마나 들어왔을지 모를 일이지만, 귤의 아름다운 향기만큼이나 학문의 향기가 가득한 서찰에서 젊은 한 유학자의 학구열이 불타올랐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제는 구하기가 수월해졌다고는 하지만, 제주도에서 보내온 귤을 선물로 받으면 귀한 과일을 받는 것처럼 반갑다. 먼 곳에서 물건을 준비한 뒤 내게 보내기까지의 과정이 다른 물건과는 차이가 난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귤이 우리에게 줬던 다양한 이미지와 사연들이 축적돼 하나의 문화 상징으로 굳어진 탓이 아닐까.

주변에 물건이 넘쳐나는 소비 과잉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 물건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이나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을 사유하지 않는 우리의 삶이 고마움의 감정을 잊고 살게 만드는 듯하다.

귤 몇 알에도 고마움을 가득 담아 보내고, 받는 사람 역시 그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시대는 이제 경험할 수 없는 것일까. 어릴 적부터 물신주의적 세계관으로 교육 받아온 탓에 우리는 자본의 크기로 고마움을 계량화하는 버릇을 체화(體化)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옛사람들의 선물을 보면서, 새삼 내가 지금 살아가는 모습을 돌아보게 되는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너무도 거대한 자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풍기 -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책과 노니는 것을 인생 최대의 즐거움으로 삼는 고전문학자. 매년 전국 대학교수들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올해의 사자성어’[2011년 엄이도종(掩耳盜鐘)]에 선정되는 등 현실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는다. 저서로 <옛 시에 매혹되다> <조선 지식인의 서가를 탐하다> <삼라만상을 열치다> 등이 있다.

201710호 (2017.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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