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대한독립운동 중국 현지 답사기(9)(마지막 회)] 안중근의 애국혼이 살아 있는 만주(2) 

100년의 얽힌 사슬, 푸는 데도 100년 걸릴라! 

글·사진 윤태옥 다큐멘터리 제작자, 작가
이육사와 한 핏줄이자 시 ‘광야’의 실제 모델인 허형식… 일제에 맞서 승전보 전하며 만주의 희망 불꽃으로 활활 타올라

▎허형식의 전승지인 삼조평원의 전경.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는 말처럼 그날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필자가 중국에서 독립운동 역사의 현장과 흔적을 찾아 다닌 것은 메마른 황토고원 옌안(延安)에서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의 조선혁명군정학교 표지를 마주하면서 마음속에 씨가 뿌려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육사가 그의 시 ‘광야’에서 노래한 초인(超人)의 실제 모델이라고도 하는 ‘만주의 마지막 파르티잔(빨치산) 허형식’이란 대목에서 본격적인 답사여행이 시작됐다. 허형식은 이육사의 어머니인 허길의 사촌동생이다. 이렇게 2015년 9월 시작된 일련의 답사여행은 일단 2016년 8월 만주지역 답사여행으로 마감했다.

마지막 답사지는 허형식이 죽은 그곳이었다. 쑤이화시 칭안현 다뤄진(绥化市 庆安县 大罗镇)이라는 것만 알고 지인 5명과 함께 하얼빈에서 아침 9시에 길을 나섰다. 1111번 고속도로를 타고 북으로 올라가 쑤이화를 지나 칭안진에서 일반도로로 내려왔다. 내비게이션에 따라 016번 현도를 찾은 다음, 그 길을 따라 남으로 한참이나 달려 다뤄진에 도착했다. 끝도 없는 옥수수 바닷속의 시골이었다.


▎펑러진 시내의 모습.
다뤄진에서 차를 세우고 현지인들에게 허형식 기념비의 위치를 물었다. 주저 없이 이 길로 더 가라는 답을 들었다. 약 5㎞를 더 들어가니 뭔가 보였다. 차를 세웠다. 높이 5~6m의 비가 하나 있었다. ‘항련(동북항일연구의 약칭) 제3로군 총참모장 허형식 희생지’라는 글씨가 만주의 뜨거운 햇살을 받아 홀로 빛나고 있었다. 기념비 앞의 향로에는 꺼진 향 몇 개가 꽂혀 있었다. 자료사진과 비교해보니 새로 세운 것이었다. 뒷면의 비명을 읽어 내려갔다.

“허형식·이희산이라고도 한다. 남, 조선족, 중국 공산당원. 중공 북만성위원회 위원, 동북항일연군 제9군 정치부 주임과 제3로군 총참모장 등을 역임했다. 1936년부터 1942년까지 동북항일연군을 이끌고 칭청(庆城) 바옌(巴彦) 일대에서 일제 침략군과 전투를 벌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42년 8월 2일 밤 세 명의 전사를 대동하고 연군 예하부대를 시찰하다가 청봉령 일대에서 만주국 토벌대와 조우하여 격렬한 전투를 벌이던 중 불행히도 총에 맞아 33세로 사망했다.”

만주 평원에 길게 늘어진 시골길 옆에 세워진 키 큰 기념비. 기념비에서 시선을 떼면 달리 시선을 줄 곳도 마땅히 없었다. 지인들과 함께 묵념을 했지만 조금 긴 침묵이었을 뿐이었다. 허전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9일간의 예정된 답사를 모두 끝냈으니 이제 하얼빈으로,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하늘을 덮은 것 같던 장구한 역사는 금세 사라지고 당장의 시장기가 걸음을 더디게 했다.

칭안현으로 나와 식당을 찾아 늦은 점심을 때우고는 하얼빈을 향해 휑하니 돌아섰다. 차 안의 공기가 무거웠다. 동반자 한 사람이 차창 밖으로 무심히 사진을 찍다가 휴대폰을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뜨리는 사고도 났다. 하얼빈에 가까워지자 정체도 심했다. 모두들 피로감이 역력했다.

내 마음을 이렇게 허전하게 만든 허형식은 누구인가. 동북항일연군이 일제의 혹독한 토벌에 밀려 1940년 가을부터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피신했지만, 허형식은 끝까지 북만주에 남아 유격전을 벌이며 저항했다. 소련으로 넘어가 혁명역량을 보존하라는 중국 공산당의 지시를 사실상 거부한 것이다.

끝까지 북만주에 남아 유격전 전개


▎허위로 대표되는 허형식의 가문은 숱한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했다. 허위 기념관에 있는 그의 무덤과 묘비.
그런 와중에서 펑러진(丰乐镇) 전투를 비롯해 삼조(三肇)평원에서 빛나는 승리도 거뒀다. 그의 승전보는 일제의 강력한 군사력에 숨죽이고 있던 만주의 중국인과 조선인들에게 투쟁의 희망을 이어가는 소중한 불꽃이었다.

1942년 8월 2일 허형식은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으로 칭안현 현지 지도를 나갔다. 임무를 마치고 경호원 셋과 함께 이동하다가 청송령 부근에서 일제의 앞잡이 만주국군에 발각됐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중과부적 속에서 그는 희생됐다. 경호원 하나가 살아남아 그의 죽음을 동지들에게 전했으나, 그 다음날 허형식의 수급(首級)은 칭안현 경찰서 앞마당의 긴 장대 끝에 매달렸다. 장대에는 이런 글귀가 붙어 있었다.

“공비 대두목 이희산”

이희산은 당시 허형식이 사용하던 가명이고, 공비 대두목은 일본 제국주의가 규정한 허형식의 정체였다. 그는 일제가 1만 위안의 현상금과 1계급 특진을 걸었던 만주 항일 파르티잔의 거물이었다. 동지들이 허형식의 시신을 찾아 나섰다. 산짐승들이 훼손했는지 뼛조각 몇 개만 겨우 발견할 수 있었다. 동지들은 약간의 뼈를 추려 평장(平葬)으로 수습했다. 사흘 뒤에는 가족들이 찾아와 무덤에 참배했다.

2016년 8월 두 해에 걸친 일련의 답사여행을 마치고 전체 답사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꼭지가 허형식이었다. 그러나 차례대로 써나가던 글이 허형식에 가까워질수록 알 수 없는 허전함에 눌리고 있었다. 두어 달이나 허우적대다가 그 이유를 찾아냈다. 하나는 허형식 희생지라는 기념비 하나로는 그의 삶과 투쟁을 실감하지 못하는 나의 둔감함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우리 20세기 현대사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김일성과 박정희란 두 거물이었다. 김일성은 허형식과 같은 만주라는 항일 전장에서 허형식이 속해 있던 동북항일연군의 간부로 활동했었다. 그는 허형식과 달리 끝까지 살아남아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됐다. 그는 전쟁과 분단의 주역이 됐고, 북에서는 신으로, 남에서는 용서할 수 없는 남침의 원수가 됐다.

박정희는 허형식이 태어난 구미시 임은동의 경부선 철도 건너편인 상모동에서 태어났다. 사범학교 졸업 후에 교사가 됐으나 출세의 꿈을 안고 만주로 건너갔다. 1939년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갔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했다. 그는 훗날 쿠데타로 권력을 쥐었다.

허형식을 이야기하면서 그와 연관된 두 거물을 거론하지 않고 마무리를 지으려다 보니 허전했던 것이다. 답사기를 잠시 중단하고 2017년 5월 초 구미를 찾아갔다. 허형식의 출생지인 임은동의 왕산허위기념관과 생가 터 등을 둘러보고, 임은동과 가까운 상모동의 박정희 생가도 둘러봤다.

그리고 5월 말에는 허형식이 성장기를 보낸 하얼빈시 빈안진이란 마을과 삼조평원 전투가 있었던 곳의 하나인 펑러진, 박정희가 졸업한 만주군관학교, 김일성이 다녔던 지린시의 육문중학(毓文中學) 등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자 하얼빈행 비행기에 다시 몸을 실어야 했다.

허형식은 1909년 의병장 왕산 허위의 사촌인 허필의 아들로 태어났다. 지금 왕산 허위 기념관의 바로 아랫동네다. 허형식은 태생 자체가 독립운동이었다. 허위로 대표되는 허형식의 가문은 시대가 변할 때마다 그 시대를 웅변하는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했다. 허위를 비롯해 많은 친족이 1890년대 1900년대 의병투쟁에 목숨과 재산과 열정을 바쳤다.

허형식은 1915년 여섯 살에 가문의 망명길에 얹혀 압록강 건너 퉁화현으로 이주했다. 1920년대에는 헤이룽장성 우창현(五常县)으로 이사했고, 1929년에는 하얼빈시 빈현 빈안진[당시에는 가판참(枷板站)]으로 이사했다.

빈안진 항일투쟁의 선봉으로 우뚝


▎의병장 허위 기념관에 있는 허형식의 사진.
빈안진은 하얼빈시 빈안현에 속하지만 도심에서 동쪽으로 100㎞ 정도 떨어진 농촌이다. 하둥고속(哈东高速)이라고도 부르는 1011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빈현에서 201번 국도로 갈아타고 간다. 빈안진을 찾아간 날은 비가 촉촉하게 내렸다. 허형식에 관해서는 작은 표지 하나도 없었지만, 나는 그 거리를 내 발로 걸어보고 싶었다.

마을 초입에는 작은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현지 경찰에게 물으니 자반하(枷板河)라 한다. 허형식과 관련된 자료에 종종 등장하는 지명이다. 빈안진의 중심은 1㎞ 정도의 상가가 전부였다. 상가 앞에는 노점상들이 어지럽게 자리 잡고 있었다. 거리를 걸어봤으나 막막할 뿐이었다. 상상력이 부족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허형식 연구 - 동북항일연군내 주요 한인 지도자의 항일투쟁 사례검토>라는 장세윤 박사(동북아역사재단 한일관계연구소장)의 논문과 <허형식 장군>이란 박도의 실록소설을 꺼내 보는 게 고작이었다.

이곳 빈안진에서 허형식은 항일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당시 하얼빈 일대에는 조선의 중남부 출신들이 소작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식민지 출신의 망국노(亡國奴)인 동시에 중국인 지주 하의 소작농들이었다. 자연스럽게 진보적 농민운동이 일찍부터 시작됐다. 이 지역 농민운동을 선도한 한 인물이 바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군사부장인 최용건(훗날 북한 부주석 역임)이었다.

허형식은 빈안진으로 이주한 다음 최용건과 만났고 1930년 초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당시는 코민테른이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중국 내의 조선공산당은 스스로 조직을 해체하고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던 시기였다.

허형식은 1930년 5월 1일 노동절 투쟁의 일환으로 하얼빈의 일본 총영사관을 맨손으로 습격하는데 앞장을 섰다. 허형식으로서는 데뷔 무대였던 셈이다. 당시의 일본 총영사관은 하얼빈역 근처의 훙쥔가(红军街) 188호다. 그러나 2017년 초 하얼빈역사의 재건축을 위해 하얼빈역과 그 주변을 통째로 철거하는 바람에 지금 당장은 대강의 위치도 알기 힘든 상태가 됐다.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는 없었다.

허형식은 일본 총영사관 습격 현장에서 만주 경찰에 체포됐으나 얼마 후에 풀려났다. 이후 계속해서 대중적인 투쟁에 나서다가 1930년 가을 중국 공안당국에 공산분자라는 혐의로 체포돼 선양 감옥에 투옥됐다. 이때 감옥에서 평생 동지를 만났으니 그가 바로 김책이었다.

1931년 일본 제국주의가 만주를 침략하자 동북군벌의 일부 부대는 곳곳에서 유격대·자위군·자위대 등의 이름으로 항일 무장투쟁에 나섰다. 이 시기의 조선인 항일투쟁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있었다. 민족주의 계열의 양세봉과 이청천은 앞의 글에서 찾아봤었다.

사회주의 계열은 상당수가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중국 공산당에 합류해 항일투쟁을 벌였다. 이 시기의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 무장투쟁은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931년부터 유격대가 곳곳에서 만들어져 산발적으로 투쟁을 벌였던 것이 첫 단계다.

두 번째 단계는 1933~35년으로 동북인민혁명군으로 통합돼 투쟁했다. 이 단계에서 중국 공산당과 조선인의 영웅이었던 인물의 하나가 앞의 글에서 찾아보았던 이홍광(1910~35)이다. 세 번째 단계는 1936년부터 동북항일연군(1~11군)으로 개편돼 활동했던 시기다. 동북항일연군에서 유력한 조선인 지도자를 꼽는다면 허형식·김책·최용건·김일성 등이다.

동북항일연군 등 지휘하며 연전연승


▎육문중학 시절 김일성의 사진.
허형식은 1932년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산하의 빈현 지부에서 선전과 조직 활동을 하다가 1933년부터는 탕위안현(湯原县)으로 가서 중공 항일유격대 창설을 지원하고, 곧이어 주하반일유격대 창설도 지원했다. 1934년 6월에는 동북반일유격대 합동(哈東, 하얼빈의 동쪽지역)지대 제3대대의 정치지도원이 됐다. 1935년에는 허형식에게도 동북인민혁명군 직책이 이어졌다.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 1독립사 2단장(지금의 중대장급), 제3단 정치주임을 역임했다. 줄곧 무장투쟁의 현장이었다.

그 다음은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되면서 자연스레 연군의 직책이 이어진다. 1936년 9월에는 중국 공산당 북만임시성위원회 위원 겸 동북항일연군 제3군 1사 정치부 주임이 되고, 이후 동북항일연군 이동판사처 주임, 제9군 정치부 주임, 제3군 1사장….

1939년에는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겸 3군장, 다음해에는 총참모장 겸 12지대 정치위원으로 북만주 항일 무장투쟁을 주도했다. 1940년 가을 겨울에 동북항일연군은 국경으로 넘어 소련으로 피신했으나 허형식은 그대로 자기 위치를 고수했다. 1941년 초에는 일제의 살벌한 토벌에도 살아남은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의 200여 전사들을 총괄해서 지휘했다. 이 시기에 벌였던 허형식의 항전 가운데 펑러진의 승전이 있었다.

2017년 5월 말 빈안진 다음에 자오저우의 펑러진을 찾아갔다. 하얼빈시 중심에서 직선거리로 서쪽 90㎞ 거리다. 실제로는 서북방향으로 다칭(大庆)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자오둥(肇东) 출구에서 내려와 다시 동남방향으로 50㎞ 정도를 가야 한다.

가는 길은 내내 평원이다. 이 지역은 자오둥 자오 저우(肇州) 자오위안(肇源)으로 이어지는데 이 세 지역을 묶어 삼조라고 한다. 야트막한 구릉도 하나 없다. 펑러진 중심으로 들어섰다. 이곳 역시 허형식과 관련해서는 표지 하나 설치된 것이 없다. 넓지만 지저분한 사거리에 허접한 점포들이 늘어서 있을 뿐 특별한 것은 없다. 배후지가 농촌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1939년 9월 허형식 부대는 펑러진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진장을 체포하고 나머지 경찰도 무장을 해제시켰다. 은행과 창고를 털어 현금 16만 위안과 금 60여 냥, 양곡 수백 부대를 노획했다. 이 가운데 현금 10만 위안과 군량미를 제외하고는 주민들에게 나눠줬다.

펑러진을 철수하면서는 경찰서와 성문의 포루에 불을 질렀다. 그 다음 자오위안도 공격했다. 자오위안에서 철수하면서 하얼빈으로 가는 철도를 파괴하고 일본군 군용열차도 전복시켰다. 일본 제국주의는 허형식을 잡으려고 혈안이 됐으나 번번이 놓쳤다. 이 시기에는 만주의 항일 무장투쟁 대오가 괴멸된 상태였으니 허형식은 그 출현 자체만으로도 항일투쟁의 희망인 셈이었다.

나는 펑러진 사거리를 혼자 걸었다. 과연 지금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때의 총격과 충격,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가졌을 일제의 공포와 항일의 희망을 기억은 하고 있을까. 길가에 널린 쓰레기가 유난히 더 많아 보였다. 평상시에는 역사가 일상에 묻히는 게 백성들의 삶이다. 그들이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고 탓할 일은 아니다.

끝내 뜻 못 이루고 전사, 위축되는 독립군


▎하얼빈에 있는 동북 항일 연군박물관.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펑러진 전투와 같이 간간이 이어지던 무장투쟁의 소식은 중국인이나 조선인 모두에게 가늘지만 질기고 뜨거운 희망이었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1942년 8월 3일 새벽, 허형식은 청송령 어느 산속에서 격렬한 총격전 끝에 전사하고 말았다.

일본 제국주의는 만주를 침략한 이후 갈수록 강력한 토벌작전을 펼쳤다. 최후에는 소련과 일전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이에 대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만주의 반일 무장대오를 토벌해나간 것이다.

특히 1936~38년의 만주치안숙정계획에 의한 토벌작전은 살광(殺光)·소광(燒光)·창광(槍光)의 삼광이란 말로 압축하곤 했다. 무장대오든 비무장 민간인이든 죽여 없애고, 군사적 거점이든 일상의 살림집이든 깡그리 태워 없애고, 모든 물자를 강탈해 씨를 말리는 작전이었다. 일제는 관동군 병력을 40만에서 76만으로 대폭 증강시키고, 괴뢰 만주국 군대와 경찰까지 총동원해 항일의 기운이란 기운은 탈탈 털어낸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강력한 토벌로 인해 1932년 30만 명 정도로 추정되던 만주의 항일 무장투쟁 세력은 1938년 만주치안숙정계획이 끝난 시점에는 3만여 명으로 크게 위축됐고, 1940년 5월에는 1400여 명으로 오그라들었다. 1942년 8월 허형식이 전사하고 1943년 11월 김책이 잔여 부대를 이끌고 소련으로 돌아간 이후 북만주 항일투쟁 전선은 죽음의 고요에 잠겨버렸다.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만들어진 고요 속에 731부대의 마루타와 같은 끔찍한 만행은 계속됐다.

일본 제국주의가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한 것과 마찬가지로 소련에서도 같은 움직임이 있었다. 1937년 소련은 2500여 명의 고려인을 일본 첩자란 이유로 체포해 처형했다. 곧이어 18만여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것이다. 항일은 일제 토벌의 빌미로, 친일은 소련의 강제이주의 핑계로, 민족의 수난사는 그렇게 모질고 처참하게 계속됐다.

2017년 6월 초하루 나는 허형식에 이어 박정희가 출세의 기반으로 삼은 창춘(长春)으로 갔다. 그가 다니던 만주군관학교가 바로 창춘에 있었고, 지금 그 자리에는 기갑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부대의 입구에는 현대적 느낌이 물씬 풍기는, 독특하게 생긴 큼직한 정문만 있었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인 한 사람은 일전에 이곳에서 정문 사진을 찍었다가 총을 든 군인들이 거칠게 쫓아오는 바람에 꽤 황망했었던 경험담을 들려줬다. 어차피 부내 안으로 들어갈 것은 아닌지라 택시를 타고 이동하면서 사진 몇 장만 찍고 지나갔다.

창춘의 만주군관학교 구지를 거쳐 김일성의 흔적을 찾아갔다. 지린시의 육문중학이다. 창춘과 지린 사이에는 고속철도가 있어 오고 가기는 편하다. 육문중학도 누구나 아는 명문중학이라 찾아가기는 쉬었다. 백두산에서 발원해 북류하면서 지린시를 관통하는 쑹화강의 강가(쑹장로 101호, 린장먼대교의 동북단)에 자리 잡고 있다.

육문중학은 예전의 교사(校舍)를 기념관으로 남겨두고, 번듯한 새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기념관으로 남겨둔 육문중학 구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일반인에게 개방하지 않는다. 중국의 바이두 지도를 보면 육문중학 안에 <김일성 동지 독서 기념실>이 있다. 우리말로 하면 ‘재학기념 교실’ 정도다. 들어가 보고 싶지만 나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정문이 아닌 측면의 철제문 너머 육문중학 구지라는 표지석을 사진으로 담는 게 고작이었다.

위대한 죽음으로 우리 앞에 부활


▎하얼빈 동북항일 열사기념관에 걸린 허형식(오른쪽에서 둘째)의 초상화. 이곳에는 그의 생몰연대와 주요 활동 등이 소개돼 있다.
다시 허형식으로 돌아가자. 2015~17년까지 중국 대륙에서 펼쳐진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찾아다니던 10여 차례의 답사여행를 끝내고, 이제 여행 이야기의 마지막 단원을 정리하고 있다. 내가 설정한 마지막 단원은 허형식이 주인공이고 김일성과 박정희가 조연이다.

허형식은 구미시 임은동에서 허위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의 손을 잡고 만주로 건너가 타국 땅에서 망국노의 아들로 성장했고, 1942년 8월 만주의 마지막 파르티잔으로 일제에 대항해 무장투쟁을 벌이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허형식이 태어난 마을의 경부선 철도 건너편에서 박정희가 태어났다. 허형식이 북만주에서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 남만주에는 김일성이 있었다. 김일성은 일제 토벌에 밀리자 상부에 보고도 하지 않고 소련으로 피신했다. 그리하여 끝까지 살아남았다.

김일성은 항일투쟁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자로서, 일제 패망 이후에 시작된 ‘살아남은 자들의 리그’에서 승리했다.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됐으나 그는 분단과 전쟁의 장본인이 됐다. 그는 북한에서는 승리자였으나 남한에서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수많은 피해자의 가해자다. 그는 훗날 아들을 후계자로 만든 후 자연사했다. 박정희는 일제가 패망한 뒤 분단과 전쟁의 소용돌이를 영특하게 헤쳐나갔다. 그는 남한의 최고 권력자가 됐다.

그에 비해 허형식은 일제 패망 얼마 전에 전사한, 아쉽고 안타까운 항일투사의 한 명에 지나지 않았다. 조국은 아니지만 동지였던 중국이 그가 전사한 곳에 기념비를 세워줬을 뿐, 남한에서건 북한에서 건 외면하고 배제하고 잊어버린 존재였을 뿐이다. 허형식은 오늘날에 와서야 한 사람 한 사람 기억에 되살리고 있다. 그의 처참한 죽음은 위대한 죽음으로 전화(轉化)돼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 졸렬한 글의 마지막 단원에서나마 허형식을 주연으로 세우고 김일성과 박정희를 조연으로 놓는다. 내가 50줄 넘어 조금씩 읽고, 혼자서 또는 친구들과 함께 답사여행을 하고, 그러면서 둔한 머리로 많은 시간 곱씹으면서 독해한 역사다. 역사는 이긴 자의 기록이다.

과거는 잊을 수도 용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에서 오늘로 견고하게 결박돼 있는 역사의 체인을 한순간에 삭제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 후손을 위해 지금부터라도 차분하게 풀기 시작해야 한다. 100년 동안 얽혀왔으니 그것을 풀자면 또 다른 100년이 걸릴지 모를 일이지만.

윤태옥 - 중국 인문 다큐멘터리 전문 제작자. 2006년 <다큐멘터리 인문기행 중국(7부작)>(MBC플러스)을 기획, 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매년 6개월 정도 중국을 여행하면서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거나 중국 문화와 역사에 관한 글을 쓴다. 저서 <개혁군주 조조 난세의 능신 제갈량> <중국식객> <중국민가기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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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호 (2017.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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