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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셀프테라피(10) (마지막 회)] 방어기제, 나를 지키는 ‘양날의 검’ 

‘번아웃’ 도시인들 위한 마음 챙김의 기술 

정여울 문학평론가
이상과 현실 멀어질수록 상실 공포 커져…성취와 상관없이 ‘나는 언제나 나’ 마음가짐 필요

▎방어기제는 ‘네가 나를 공격할 것 같다’는 의심에서 출발한다. 의심해야 할 대상은 늘어나고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방어기제가 ‘양날의 검’인 이유다. / 사진:아이클릭아트
괴로움이 엄습할 때 당신은 어떻게 대처하는가. 일단 고통의 원인으로 보이는 자극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이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회피나 부정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자주 쓰는, 방어기제다. ‘이런 끔찍한 일이 내게 일어났을 리가 없어’ ‘이건 분명 꿈일 거야’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우리 자신을 불안의 폭풍우로부터 지키려는 방어기제다.

문제는 방어기제가 늘 효율적이지는 않다는 점이다. 회피는 순간의 공포나 불안을 줄여주지만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습관으로 굳어지면 ‘나의 진짜 문제는 무엇인가’를 찾는 능력마저 마비된다. 방어기제는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대신 스스로 고통의 원인을 느끼고 진단할 자율적인 힘을 빼앗아갈 수 있다.

방어기제는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미묘하고 복잡하게 작동한다. 예를 들어, 흔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라는 하소연이 저절로 나오는 상황을 만날 때가 그렇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먼저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 지레 겁을 먹고 ‘네 의견은 다 틀렸다’는 식이다. 이런 사람들은 ‘공격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선수를 친다. ‘나의 부족함을 저 사람에게 들키기 전에, 미리 선제공격을 해야겠다’는 무의식적 판단이다.

난데없이 화를 폭발시키는 적반하장식 공격은 주로 상대방의 우월함에 대한 열등감이나 ‘나는 결코 공격받아서는 안 된다’는 방어기제의 합작품이다. 그러나 과도한 방어기제는 오히려 더 큰 화를 불러들이는 딜레마를 초래한다. ‘나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과도하게 자신을 방어하다가, 나를 이미 지켜주고 있었던 소중한 관계까지 파괴할 수 있다.

“나는 집 초인종을 맹렬하게 울려 대는 습관이 있었던 한 소년을 기억한다. 문이 열리자마자 소년은 왜 종소리를 듣지 못했냐고 하녀를 소리 높여 비난하곤 했다. 초인종을 누르고 화를 내는 그 사이에 소년은 사려 깊지 못하게 종을 크게 울려댄다고 비난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꼈다. 그래서 자신의 행동을 비난할 틈을 주지 않고 하녀를 꾸짖었던 것이다. 꾸짖음-이는 일종의 예방 수단이었다-의 맹렬함은 그가 느꼈던 불안의 강도를 보여준다. 이때 공격성은 자신을 공격할지도 모르는 바로 그 사람을 향했다.” _안나 프로이트, <방어기제>(김건종 옮김, 열린책들, 2015) 중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딸 안나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속 방어기제가 ‘공격자와 자기 자신의 동일시’까지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어둠을 무서워하는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어두운 거실에서 유령이 튀어나올까 두려워했다. 소녀는 마침내 자기만의 해법을 찾아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불안으로부터 해방됐다. 소녀는 미친 사람처럼 기괴한 몸짓을 하면서 거실을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유령을 보게 될까 두려웠던 소녀는 마침내 자신이 ‘유령처럼’ 됨으로써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두려움의 주체가 된 것이다.

소녀는 동생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어. 내가 혹시 마주칠지도 모르는 유령인 척하면 되는 거야.” 소녀가 만들어낸 기괴한 몸짓은 바로 그녀가 상상했던 유령의 이미지였던 것이다.

안나 프로이트는 방어기제가 원시사회에서도 발견되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분석한다. 원시사회에서도 유령이나 괴물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 유령이나 괴물의 형상을 하고 음악과 춤을 의식에 곁들인 제의가 치러졌다. 가면이나 놀이를 통해 오히려 자신이 불안의 원인을 제공하는 자가 됨으로써 마침내 불안을 떨쳐버리는 것이다. 인간은 기발한 방어기제를 통해 항시적 불안이나 공포를 오히려 놀이나 제의의 쾌락으로 바꿨다.

감정이 아닌 마음을 챙겨야 한다


▎인간사회는 공포스러운 것을 축제의 소재로 다루면서 공포를 쾌락으로 전도시키곤 한다. 할로윈의 상징으로 꼽히는 ‘잭 오 랜턴’ 모습.
“여러분은 어떤 수준(level)의 신을 믿는가? 먹을 것이 여러분의 궁극적인 관심인가? 그렇다면 어떤 음식인가? 물질적인 음식, 정서적인 음식, 정신적인 음식, 자아초월적인 음식. 이 가운데 어떤 것인가? 한 마디로 말해, 여러분은 무엇을 숭배하는가? 이것은 진정 의미 있는 질문이다.” _켄 윌버, <켄 윌버의 통합 비전>(정창영 옮김, 김영사, 2014) 중에서

방어기제는 고통을 피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고통의 원인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한다. 자기 안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최초의 발걸음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두려워하는 것의 관계는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것이다. 시험에 꼭 합격하고 싶은 수험생은 ‘혹시나 시험을 잘 치러내지 못하면 어떡할까’라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행운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모든 잠재적 자극에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시험이 닥쳐올 때는 평소보다 방어기제가 극도로 예민해지고 강력해지는 것이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진 이들은 아주 평범하고 사소한 자극에도 심각한 공포 반응을 보인다. 모든 곳에서 ‘버려짐의 징후’를 보는 것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속담이 바로 이런 과잉된 방어기제를 가리키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도 깜짝 놀라고, 사소한 자극에도 ‘공격 받았다’고 느끼는 감정 배후에는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을 아무런 준비 없이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은 아무 곳에서나 방어기제를 작동시키지는 않으며, 공포는 ‘내가 원하는 안전’과 ‘내가 빼앗길지도 모르는 안전’ 사이의 거리감을 지나치게 예민하게 인식했을 때 발생한다. 불합리한 공포가 커질수록 방어기제는 더욱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게 작동한다.

방어기제가 한껏 예민해진 상태, 그러나 정말 내 마음을 지킨다기보다는 ‘내가 감정을 느끼지 않도록’ 나 자신을 통제하는 데 힘을 기울이는 이런 상태는 ‘마음챙김(mindfulness)’의 반대, 즉 ‘마음놓침(mindlessness)’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 사람을 잃는 것이 두렵다 해도 그를 더욱 후회 없이, 아무런 조건 없이 그저 사랑하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 사람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빠져든다. 그 공포에 내 마음의 핸들을 내주는 것이다.

“연구대상자는 하루 종일 힘든 육체노동을 하는 호텔 객실 청소원들이었다. 우리가 처음에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느냐’고 묻자 그들은 ‘운동을 안 한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절반의 피험자들에게 그들이 하는 일을 마치 헬스클럽에서 운동하는 것처럼 생각하라고 지시했다. (…) 그 한 가지 외에 다른 것들은 변화시키지 않았다. 오로지 마인드세트(mindset) 하나를 바꾼 결과, 실험집단은 체중·허리-엉덩이 비율·체질량지수·혈압이 줄었다. 반면 통제집단에서는 이런 신체적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_엘렌 랭어, <마음챙김>(이양원 옮김, 더퀘스트, 2015) 중에서

자신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조용히 음악을 즐기는 운동선수들처럼, 우리는 마인드세트를 바꿈으로써 일상을 ‘나를 위한 특별한 시간’으로 바꿀 수 있다. ‘난 정말 이 일이 하기 싫어, 어떻게 하면 노동시간을 조금이라도 단축할 수 있을까’라는 익숙한 방어기제보다도 훨씬 효과적으로 ‘마음놓침’ 상태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이다.

애정에서 책임감이 나온다


▎방어기제를 남용하면 편집증으로 발전한다. 2016년 발생한 강남역 살인사건은 “내가 어려운 건 다 여자 탓”이라는 범인의 편집증에서 비롯됐다.
우리는 흔히 ‘더 많은 책임을 지는 것은 더 많은 스트레스에 노출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가장 흔한 방어기제 중의 하나인 이유도, ‘책임=스트레스’라는 우리 안의 편견 때문이다. 그런데 ‘책임’과 ‘애정’이 결합하면 놀라운 효과가 발생한다. 내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 대상에게 책임감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더욱 강인해지고 행복해진다. 예컨대 반려견에게 사랑을 듬뿍 쏟는 사람들은 우울증의 빈도가 낮아지고 삶의 활력소를 ‘동물과 자신의 유대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원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환경이 열악해도 개의치 않고 자신의 일에 온전히 집중하며 자기 안의 재능을 한껏 펼친다. 애정과 책임감이 결합했을 때, 인간은 ‘나는 이런 일은 못해’라는 익숙한 방어기제를 부숴버리고 ‘나는 이런 일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어’라는 자신감을 갖게 된다. 때로는 자기 안의 익숙한 방어기제를 깨뜨리는 것이 자기발견과 자아성장에 훨씬 큰 도움을 준다.

심리학자 엘렌 랭어는 코네티컷의 요양원에서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노인들에게 실험을 했다. 노인들에게 “키우고 싶은 화초가 무엇인가” 물어보고, 그들에게 화초 하나씩을 나누어주며 “이 화초를 열심히 키워보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이 실험의 참가자들에게는 “요양원의 지시에 따르기만 하지 말고, 자신의 일과는 자신이 책임지고 결정하라”는 조언도 함께 했다.

1년 반 뒤에 그들에게 나타난 변화는 놀라운 것이었다. 자기가 고른 화초를 열심히 키우게 했던 노인들은 그렇지 않은 다른 노인들에 비해 훨씬 활동적이고 명랑하며 건강상태도 좋아졌다. 실험에 참가하지 않은 다른 노인들에 비해 사망률도 현저히 떨어졌다. 모두 똑같은 요양원에서 같은 것을 먹고 같은 의료서비스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화초는 내가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며 살아간 노인들은 훨씬 정신이 맑았고 건강 상태도 월등히 좋아졌던 것이다.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노령은 곧 병약함을 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변의 노인들에게, 그리고 나이가 들면 자기 자신에게도 별 기대를 하지 않는다. 이런 마인드세트는 노인들을 약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다시 마인드세트가 강화되는 악순환을 낳는다. 당연히 자존감도 손상되는데, 노인은 그로 인한 고통을 젊은이들보다 더 크게 느낀다. 왜냐하면 노인들은 상황을 탓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탓하기 때문이다. (…) 그 실험에서 우리는 몸을 ‘속여서’ 20년 전으로 되돌려놓는 데 성공했다.” _엘렌 랭어, <마음챙김> 중에서

감정의 소유물이 되지 않으려면


▎해소되지 못한 고통은 과대망상을 낳는다. 2015년 이준익 감독의 영화 [사도] 과대망상에 시달렸던 사도세자를 그려냈다.
‘마음놓침’ 상태는 위험하다. 감정에 휘둘려 중요한 일을 충동적으로 결정해버리고,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감정의 파도에 휘말려 일을 그르친다. 늘 피곤에 절어 ‘번아웃’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은 항시적으로 ‘마음놓침’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

나는 마음에 대한 문장, 인간의 고통을 다룬 예술 작품을 볼 때마다 내 마음이 아직 깨어 있음을 느낀다. 마음에 대해 발화하고 있는 모든 텍스트가 너무 지쳐버린 내 마음을 ‘깨우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새로운 마음챙김 상태로 ‘리셋’ 되는 느낌을 받는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창의력이 떨어지고 권태감이 밀려들 때마다, 그 마음놓침 상태를 각성시킬 수 있는 새로운 문화적 자극을 찾는 노력이야말로 우리가 일상 속에서도 실천할 수 있는 마음챙김 수련이다.

켄 윌버의 <무경계>는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를 과도하게 분리하는 현대인의 정신세계가 우울과 고통을 더욱 심화시킴을 지적한다. ‘나’와 ‘타인’의 경계,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내가 할 수 없는 일’의 경계, ‘나를 기쁘게 하는 것’과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의 경계를 끊임없이 나누고 선을 그을수록 우리의 자아는 더욱 쪼그라들고 스스로의 세계를 확장할 기회를 잃는다.

나는 <무경계>를 읽으며 이런 문장에 커다란 위로를 받았다. “오직 부분만이 고통받을 뿐, 전체는 고통받지 않는다.” 그러니까 고통이 내 온몸을 사로잡을 때조차도, 그 고통은 ‘내 전체’가 아닌 ‘내 부분’을 괴롭히고 있음을 깨달을 때, 고통은 경감되고 ‘내가 고통을 느끼고 있는 바로 그 부분’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게 된다. 내가 과연 무엇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것인지 정확히 인식하면, 고통 앞에 용감히 직면할 용기도 생긴다.

“부분은 환상이라는 진실, 즉 고통받는 ‘분리된 나’란 없다는 진실을 깨달을 때 그대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대는 언제나 전체로서 오직 자유, 해방, 광명만을 알고 있는 존재이다. 오직 전체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고뇌, 고통, 죽음뿐인 부분의 운명을 벗어나는 길이다.” 내가 슬퍼하는 것, 내가 아파하는 것, 그 모든 것은 나의 ‘부분’임을 이해할 때, 우리는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더 커다란 전체’의 힘을 자기치유의 동력으로 전환할 수 있다.

고통이 나를 침식하지 않도록


▎애정이 생기면 책임도 즐겁다.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로 유명한 이희아(33) 씨는 “좌절한 나를 일으켜준 것은 피아노”라고 이야기한다.
“부분이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전체로 하강하게 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자신의 진정한 정체는 언제나 지고의 본성임을 알게 된다. 언제나 현존하고 있는 무경계 자각의 빛 속에서는 한때 ‘내면의 고립된 나’라고 상상했던 그것이 저 밖의 우주와 하나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당신이다. 어디를 둘러보든 그 모든 곳에 당신의 본래 면목만이 있을 뿐이다. (…) 무지와 열정에 취했을 땐 역겹게만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나 자신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나온 밝고, 투명하고, 진실한 무엇으로 보였다. 힌두교에선 ‘탓 트밤 아시(Tat tvam asi)’, 즉 ‘그대가 그것이다. 진정한 그대는 궁극의 에너지 그것이며, 우주 속의 모든 것은 그 궁극의 에너지의 현시다’라고 말한다.” _켄 윌버, <무경계>(김철수 옮김, 정신세계사, 2012) 중에서

어떤 괴로움도 진정한 나 자신이 아니다. 그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나 자신도 아니다. 어떤 괴로움도 ‘진정한 나’를 이루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했을 때,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고통은 나를 공격할 수 있지만, 그 고통이 나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고통이 우리 마음의 핸들을 제멋대로 조정하는 참사를 막을 수 있다. 괴로움이 우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을 향한 우리의 집착이 우리를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슬픔은 더 이상 우리를 파괴하지 못한다.

우리의 에고(Ego)는 우리 자신만이 스스로 쌓아 올릴 수 있는 성벽이다. 누구도 내가 먼저 에고의 성문을 열어주지 않는 한 제멋대로 이 에고의 성벽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우리의 에고가 약해질 때 우리의 자존을 무너뜨리는 온갖 감정의 화살과 대포가 에고의 성벽 안으로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당신의 자부심을 찢어발기고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짓밟는 모든 외부의 힘들을 직시해야 한다. 무섭고 두려워서 피하고 싶겠지만 계속 도망치기만 한다면 그 에고의 적들은 당신의 에고라는 성벽뿐 아니라 당신의 진정한 자기(Self)의 영역까지 침식해 들어올 것이다.

당신의 에고를 무너뜨려도 좋은 것은 오직 당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들이다. 사랑으로 인해 당신의 자아가 무장해제된다면 그것은 기쁜 깨어짐이다. 진실한 우정으로 인해 당신의 자아가 흔들린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방황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을 지키고, 사랑하고, 치유할 모든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그 에너지를 발굴하고, 활성화시키고, 마침내 자기극복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지혜야말로 자기치유의 심리학이다.

그 무엇도 당신을 작아지게 하도록 내버려두지 말라. 세상 무엇도 당신의 자아를 움츠러들게, 짓누르게, 빛 바래게 하지 못하도록 온 힘을 다해 저항하라.

정여울 - 작가, 문학평론가. 1976년생. 서울대 독문과 졸업 후 같은 대학에서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2004년 <문학동네>를 통해 등단했다. 저서로 <공부할 권리> <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마음의 서재> <헤세로 가는 길> <그때, 나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 등이 있다. 제3회 ‘전숙희문학상’을 수상했다.

201710호 (2017.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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