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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섬 문명사(9)] 인도양 향료의 메카 잔지바르(Zanzibar) 

 

글·사진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 아시아퍼시픽 해양문화연구원장 asiabada@daum.net
아프리카 동부에 떠 있는 ‘황금의 배’ … 향료노예로 전락한 토착민에겐 ‘저승의 배’로 불리기도

마르코 폴로는 잔지바르를 두고 “수많은 상아와 향로가 거래되는 곳”이라고 기술했다. 아프리카 주변 열강이 이 섬에 눈독 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스톤타운의 고색창연한 스카이라인과 그 밑의 노예수용소는 섬의 우여곡절을 대변하고 있었다.


▎탄자니아의 잔지바르 섬은 스와힐리와 아랍, 인도, 그리고 유럽 문명까지 교차하면서 경제적·문화적으로 융성했다. 해안가에서 이슬람 전통 모자인 ‘쿠피’를 착용한 아이들이 뛰놀고 있다.
우리에게 태평양의 섬은 어느 정도 익숙한데 인도양은 상대적으로 낯설다. 한국인은 인도양에 대해 무지하거나 관심 자체가 없다. 전 세계 바다 표면의 5분의 1을 덮고 있는, 광활하지만 어찌 보면 ‘작은 바다’. 모서리가 둥글게 된 M자 모양으로 테두리가 돼 있다. 서쪽은 아프리카, 북쪽은 유라시아 대륙, 동쪽은 호주와 동남아시아의 여러 섬과 군도로 둘러싸여 있다. 인도대륙이 지주대로서 인도양을 크게 아라비아해와 벵골만으로 나누기에 ‘인도양’이란 이름이 붙었다.


인도양은 가장 인구가 많은 대륙과 문명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테두리에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거주한다. 테두리를 빙 둘러 다양한 공동체 간에 소통을 원활하게 했고 수백 년에 걸쳐 상당한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결속력을 형성해 왔다. 반론의 여지없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하나의’ 문화적 공간이다. 아프리카, 중동, 인도가 하나로 만나는 특이한 대양이다. 그리스 지리학자 프톨레미(Ptolemy)는 남아프리카 해안을 동아시아와 연결해 인도양을 사방이 막힌 바다로 바꾸었는데, 이는 수 세기 동안 무슬림 지리학자들이 해오던 전통이었다.

문명의 용광로 인도양


▎스톤타운은 16세기 포르투갈의 침략 이후부터 동부 아프리카의 최대 무역도시로 성장해 갔다. 다양한 높이의 건축물 사이로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나 있다.
그 지중해적 지리관념 안에 두 개의 가장 대표적인 큰 섬이 있다. 인도대륙에 딸린 스리랑카, 아프리카에 딸린 잔지바르다. 잔지바르는 서양인에게 ‘찬기바르(Canghibar)’라 불리던 인도양의 신비로운 섬이다. 찬기바르는 오늘날의 잔지바르. 인도양의 대표적인 섬답게 인도 문명, 아라비아 문명, 아프리카 문명 등이 만나는 ‘문명의 용광로’였다.

인도양 가운데서도 잔지바르는 아주 독특하다. 아라비아반도 남쪽에 위치하고, 동부아프리카의 튀어나온 ‘뿔’에 위치해 서쪽으로 아프리카, 북쪽으로 아라비아, 동쪽으로 페르시아만과 인도 서부해안을 상대로 하는 뛰어난 지정학적 교통로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코 폴로도 <동방견문록>에서 잔지바르를 언급했다.

“고유 언어를 사용하고 어느 누구에게도 조공을 바치지 않는다. 체격이 크고 다부진데 힘이 얼마나 센지, 혼자 네 사람 분(分)을 질 수 있을 정도다. 피부는 검고 국부만 가렸을 뿐 거의 알몸으로 다닌다. 머리카락은 어찌나 꼬불거리는지 물에 적셔도 똑바로 펼 수 없을 정도다. 많은 코끼리가 살고 있고 상아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진다. 포도로 빚은 술은 없고, 쌀과 사탕과 향료로 빚은 술이 있는데 마시기에 매우 좋다. 교역이 활발하며 수많은 상인이 배에 물건을 싣고 그곳에 와서 판매한 뒤, 이 섬에서 산출되는 여러 물건, 특히 엄청나게 많은 양의 상아를 싣고 나간다. 용연향도 풍부한데 그것은 고래가 많이 잡히기 때문이다.”


▎생선을 잡는 잔지바르 주민들 뒤로 인도양이 이채롭게 빛난다.
마르코 폴로는 비교적 정확하게 잔지바르를 묘사했다. 고유 언어를 사용하고 조공을 바치지 않는 독립적 나라라고 기술했다. 오늘날 잔지바르는 동부 아프리카 탄자니아에 속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육지의 탕카니카와 잔지바르가 합쳐져 ‘탄자니아 합중국’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탄자니아의 옛 수도 다르에스살람(Dar es Salaam)에서 페리로 잔지바르에 당도하는 외국인은 같은 나라인데도 ‘입국’ 스탬프를 한 번 더 찍어야 한다. 역사적·현대적 자기 정체성을 독립적으로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페리 부두에 내릴 적부터 ‘문명의 용광로’가 실감된다. 잔지바르가 스와힐리 문명의 발상지기 때문이다. 문명사적 융합은 육지보다는 바다에서 더 확실하게 이루어진다. 생각에 따라서는 육지의 맞붙은 경계에서 융합이 더 많이 벌어질 것 같지만, 잔지바르를 보면 섬이 문명사적 융합의 메카임을 알게 한다. 아프리카, 아라비아, 인도, 유럽에서 배를 타고 넘나들어 융합문명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잔지바르에서 만난 이들은 검은 얼굴부터 백인, 황인에 이르기까지 피부색이 다양하다. 역사적으로 원주민은 아프리카계다. ‘피부는 모두 검고 머리카락은 꼬불거렸다’는 마르코 폴로의 기술은 외국세력이 본격 개입하기 이전의 잔지바르의 아프리카적 원형을 암시한다. 오늘날 21세기와 마르코폴로 시대의 인종적 풍경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잔지바르의 중심은 아프리카를 마주보는 중서부에 모아진다. 유서 깊은 스톤타운도 서쪽 해안에 위치한다. 서부해안을 따라 북상하다 보면 향료농장, 쌀농사지대, 잡목이 자라는 황량한 들판과 구릉이 계속 나타난다. 북쪽 끝 넝위(Nungwi)에는 산호초 해안의 화사한 모래밭이 펼쳐져 있다. 호텔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주로 백인 관광객이 즐겨 찾는 명소다. 야생이 살아있는 바다를 찾는 백인이 이런 아프리카의 해안으로 찾아 들어온다. 다양한 리조트가 줄지어 있는데 그 해안에서 건너편 북쪽으로 펨바 섬이 위치한다. 비행기에서 잔지바르와 펨바 사이의 해협을 굽어보자면 완연한 산호초 지대임을 알 수 있다.

본디 잔지바르 지명은 ‘검은 해안’을 뜻하는 페르시아어에서 주어졌다. 페르시아 영향이 고대부터 있었음을 암시한다. 페르시아 상인은 잔지바르를 아라비아반도, 인도, 아프리카 사이를 오가는 항해의 중간 거점으로 활용했다. 덕분에 가장 일찍 무슬림 모스크가 들어섰다. 서서히 잔지바르가 토착 아프리카에서 이질적 융합을 거쳐 변화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스와힐리 문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그리 복잡하게 학술적으로 설명할 필요까지는 없다. 다양한 국제 정치세력의 격돌과 포섭을 통하여 오랜 세월을 두고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하나의 독특한 문명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스와힐리 문명은 오늘 이 순간에도 계속 만들어지는 중이다.

스와힐리 문명의 정점인 스톤타운


▎근대 이전 아랍세력에 의해 식민화됐던 잔지바르에는 오늘날에도 아랍 문명의 흔적이 짙게 남아있다. 인도양의 범용 무역선인 다우선의 모습.
잔지바르의 어제와 오늘을 압축 설명하는 공간은 두말할 나위 없이 ‘천년 전통’을 지닌 스톤타운. 어떻게 섬에 이러한 도시가 있을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장중하고 고전적이면서도 파격적인 거리, 빈티지 풍과 정교한 건축술과 토착적 건축술이 묘하게 어우러져 역사의 결과물을 빚어냈다.

스톤타운은 근대의 맨해튼이라고 할까, 이 동떨어진 섬에 거대한 건축군이 몰려있는 것만으로도 맨해튼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 4~5층의 일정한 높이의 건축군 사이로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얽혀져서 섬은 전체가 고밀도 단지다. 대체로 1층은 상가로 이용돼 왔으니 이 섬의 생계가 장사 혹은 무역 등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남아있는 유적과 건축물은 19세기의 소산으로 보이지만 그 역사적 연원은 중세로 소급된다. 스톤타운은 12세기 무렵에는 샹가니(shangani) 반도의 어촌에서 소박하게 출발했다. 12세기 이후, 전형적인 스와힐리 타운 즉 로컬 공예와 장거리 무역 등에 종사하는 타운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16세기 초부터 인도양으로 포르투갈의 침략이 본격화된다. 1615~30년경에는 북쪽 아라비아반도 남쪽 해안의 오만이 섬으로 들어온다. 유럽의 식민화와 아랍의 식민화가 출동하는 미묘한 갈등이 인도양의 섬에서 벌어진 것이다.


▎스톤타운 외곽의 다라자니 시장은 수산물부터 농산물, 수공예품까지 온갖 생필품이 거래되는 거대한 시장이다.
유럽과 아라비아라는 두 개의 수퍼파워 사이에서 작은 스와힐리는 버벅거렸다. 잔지바르는 포르투갈과 오만, 양 세력에 의해 적어도 두 번은 확실하게 파괴됐다. 잔지바르는 1571년경에 포르투갈 서부 지역의 일부가 됐으며 스와힐리 해변 남쪽에 위치한 모잠비크에서 관리됐다. 그러나 포르투갈인은 잔지바르를 밀접하게 관리하지는 않았다. 자신들의 식민지 모잠비크로의 선적을 위해 구입하고 수거한 물품의 무역 저장소였다. 당시 만해도 수에즈운하가 없었기에 인도양과 동방의 물품은 희망봉을 돌아서 유럽으로 가지고 가야 했다.

포르투갈은 느슨한 상태에서나마 16세기 끝까지 헤게모니를 장악했으며, 그들 손에 놓인 지방 왕권 수준의 잔지바르 왕국이 온존했다. 그러나 17세기 중반부터 포르투갈의 힘은 쇠락하기 시작했고, 오만은 지역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1688년에는 마침내 포르투갈이 밀려난다. 유럽 열강의 식민화 과정에서 절대적인 힘을 보여줬지만, 스와힐리에서는 아랍 세력에 의해 포르투갈이 밀려나는 세계사의 독특한 모습을 보여줬다.

잔지바르 시내에서 약간 북서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알 아자이브(Beit al-Ajaib) 궁전이 무너졌지만 그런대로 형태를 유지하고 보존돼 있다. 거대한 성벽과 해자, 긴 회랑과 아름다운 아랍식 문이 흡사 영화 세트장 같다. 성에 올라서면 인도양이 무한하게 펼쳐진다. 파투마(Fatuma) 여왕의 성이었다.

여왕은 알라위(Alawi) 가문의 아랍인과 결혼하고, 섬의 북쪽을 지배했다. 그녀는 포르투갈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아 그 대가로 오만에 망명했던 적이 있다. 오만은 잔지바르를 접수하자 포르투갈의 성당과 상인의 집을 파괴했다. 오만은 1710년 당시에 ‘괴상하게 작은 성’으로 기술된, 오늘날에도 존재하는 스톤타운의 성곽을 만든다. 3개의 문 가운데 1개는 여왕의 궁으로 통했다. 이 성은 나중에 확장돼 5개의 문이 됐다. 파투마의 왕권이 아들 하산에게 1728년에 이양됐고, 하산은 오늘날의 오만 스타일의 도시를 만들어낸다.

무스카트에 본거지를 둔 오만은 세력을 확장해 아예 술탄의 본거지를 잔지바르로 옮겼다. 오늘날 고색창연한 스톤타운의 비좁은 골목에 아랍식 건축물이 빼곡하다. 무려 50개가 넘는 이슬람 모스크가 번성했으며, 인도인이 찾는 시바신전도 하나 남아 있다. 페르시아 목욕탕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아 페르시아 상인의 흔적도 확인된다. 이렇게 온갖 언어와 피부색과 관습이 혼합돼 스와힐리 문명을 탄생시켰다.

아프리카로 떠나는 교두보


▎아프리카 내륙에서 끌려온 노예들은 잔지바르의 정향농장에서 나무를 타며 열매를 따야 했다. 주민이 정향나무에 올라 열매를 따고 있다.
포르투갈 서양식 건축양식도 그 흔적을 남겼고, 오만 아라비아식 건축양식이 이러한 정치적 세력 개편을 거치면서 융합돼 갔다. 1515~1530년에는 프랑스 노예무역상인이 뛰어든다. 인도양 코만도 제도 등의 플랜테이션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해 시작된 프랑스 노예무역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더이상 성장하지 못한다. 기록에 따르면 1799년까지 돌집 몇 개가 있었을 뿐, 많은 살림집은 스와힐리 원주민의 토박이 건축으로 존재했다.

1811년까지 타운이 점차 성장했으며, 이 시기의 무역 급상승이 주원인이었다. 잔지바르의 무역량이 증가하자 타운도 급성장했고, 이러한 추세는 1830년대 중반까지 지속됐다. 인구가 1만여 명을 넘었고 술탄은 바닷가에 새 궁전(Beit al-Sahel)을 지었다. 스톤타운의 그 궁전은 오늘날 관광객들에게 술탄의 삶을 보여주는 박물관으로 기능하고 있다.

19세기 중반, 잔지바르는 동아프리카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돼 있었고, 아프리카의 어두운 내륙으로 향하는 탐험의 중심으로 부각됐다. 대담한 여행자들은 이곳에서 짐꾼을 고용해 아프리카 본토로 향하는 보급물자를 정리했다. 전 세계에서 몰려온 선박이 동방의 보물을 실어 나르기 위해 잔지바르 항구로 몰려들었다.

보물 중에는 상아와 정향이 있었고, 마차에 광택을 내는데 사용한 코펄, 마가린 재료인 코프라, 그리고 야생동물 가죽이 있었다. 야생동물 가죽 중에서도 표범 가죽이 선두주자가 됐다. 지금은 사라진 잔지바르 표범은 진귀한 가죽으로 유럽과 아랍시장에서 인기를 끌었다.

오늘날 상아 무역의 흔적은 사진이나 그림 정도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프리카 내륙에서 사냥된 코끼리 상아는 동부해안에서 작은 배에 실려 잔지바르로 집결했다. 인도양을 건너 말라바르까지 당도했고, 거기서 다시 중국 배에 실려서 중국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오늘날 박물관에서 구경할 수 있는 다수의 상아공예품이 ‘아프리카 동부-잔지바르-인도 말라바르-중국’이라는 궤적을 밟아온 것이다.

오늘날도 스톤타운 외곽에는 전통 조선소가 존재한다. 인도양을 누비는 다우선을 만들던 조선 전통이 끊어지지 않았다. 섬 주변에서는 떠다니는 다우선을 흔히 목격할 수 있다. 조선 전통, 무역 전통 등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중이다.

스톤타운 외곽의 다라자니(Darajani) 시장은 전통시장으로 명성이 높다. 수산물부터 농산물, 수공예품까지 온갖 생필품이 거래되는 거대한 시장이다. 그 시장 복판에 향료만을 취급하는 전문상점이 여럿 있다. 정향·육두구·계피·바닐라·카다몬·생강 등 다양한 향료를 팔고 있다. 정향을 씹어보니 향의 품질이 뛰어나다. 또한 스톤타운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곳곳에 향료농장이 남아있다. 북쪽의 펨바 섬은 말할 것도 없다. 방대한 규모의 향료 농장이 지금도 운영되는 중이다.

향료의 힘, 노예의 힘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건너 인도네시아의 향료를 얻으려면 계절풍을 기다려야 했다. 유럽 무역상들에게 잔지바르의 향료는 그래서 매력적이었다.
잔지바르는 세계 최대의 정향 생산국이었고, 날이 지날수록 더 많은 아랍과 스와힐리, 인도의 거주민을 매혹시켰다. 매력적인 아랍풍 석조 가옥이 해안 지구에 세워졌다. 1910년 당시 8200명이던 인도인은 1963년에 이르러 2만 명에 달했다. 이들은 도시의 상점 대부분을 소유했고, 자본을 제공함으로써 잔지바르와 잔지바르의 자매 섬인 펨바의 상업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들은 또한 도매업을 조종했다. 인도인 수공예품은 많은 구매자를 끌어들였다. 동아프리카에는 인도 장인이 만든 황금과 보석, 상아조각과 가구에 대한 수요가 존재했다. 대부분의 아프리카인은 코코넛과 정향 플랜테이션으로 생계를 꾸려나갔고, 이런 플랜테이션 다수는 아랍인이 소유했다. 그러나 일부 아프리카인은 자신들의 소규모 농장에서 쌀과 카사바를 재배했다.

잔지바르 시내에서 북서쪽 해변으로 올라가다 보면 묘한 산호동굴 하나를 만난다. 아프리카 본토에서 잡아온 노예를 임시로 이 동굴에 가둬두었다가 배로 실어서 오만, 코만도 제도 등으로 빼돌렸다. 산호동굴을 들어가자면 날카로운 바윗길을 걸어가야 한다. 노예들이 발목에 쇠사슬을 차고 맨발로 발바닥에 피를 흘리며 강제로 이끌려서 동굴로 왔다. 다수는 고행을 견디지 못해 죽었고, 일부는 팔려가는 배에서 병으로 죽어갔다.

산호동굴을 지나 바닷가 언덕에는 콘크리트 감옥을 만들었다. 산호모래를 응고시켜 거대한 지하창고를 만들고 지붕에만 일부 숨구멍을 만들었다. 남녀 노예와 어린이를 ‘보관’했다가 수출하던 ‘노예 저장소’다.

이들 노예는 아프리카 내륙 깊숙이 들어가서 ‘채집’ 및 ‘사냥’해온 전리품이었다. 노예는 동부아프리카의 스와힐리 해변에서 그대로 수출되기도 했지만, 큰 무역선이 있는 잔지바르로 실려왔다. 잔지바르가 노예수출의 중계무역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노예가 수출된 것은 아니다. 향료농장의 출현으로 많은 노예들이 잔지바르 자체에서 ‘소비’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치하의 인도네시아 몰루카 제도가 세계 향료의 본산이었다면, 새로운 세력들은 새로운 원산지를 찾아나섰다. 그 결과 채택된 것이 잔지바르 향료다. 잔지바르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여 거리의 펨바 섬에 내리면 온통 향료밭이다. 잔지바르 본 섬도 곳곳이 향료농장이다. 이로써 몰루카 중심의 오래고도 긴 항해의 향료무역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잔지바르가 급부상한다. 계절풍을 기다리며 무역선을 띄우던 전통적 실크로드의 시대가 쇠락하고 유럽과 아프리카까지 가는 새로운 무역로가 만들어진 것이다.

잔지바르에서 향료 플랜테이션이 만들어진 시점은 대략 1830년대다. 향료농장은 대토지 소유주의 출현을 뜻했고, 대규모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노동력은 노예로 충당했다. 더 많은 노예가 아프리카 내륙에서 잔지바르로 ‘사냥’돼온 이유는 바로 향료 플랜테이션 때문이었다.

노예들은 거대한 정향나무에 올라가 열매를 땄다. 1830년대부터 정향, 코코넛이 잔지바르 항구에 쌓였다. 그런데 1860년까지 기록을 보면, 잔지바르 수출품의 총 가치평가에서 기실 향료는 22%선이었다. 그 대신에 노예주인을 위한 고급 제품, 노예를 위한 일상품과 천이 다수를 차지했다. 향료 플랜테이션을 위해 노예제도를 운영하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향료보다도 노예로 인한 거래량이 더 커졌다.

작은 규모의 노예 소유자는 지방에서 거주했지만, 거대 농장주들은 경제적 이유보다도 사회적 권위 때문에라도 잔지바르 시내에 거주했다. 1~2층에 불과하던 아랍식 건축물이 4층으로 높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1770년대 300여 명, 1819년에 1000여 명, 1840년에는 무려 5000여 명의 아랍인이 무역에 종사했다. 1886년까지 9개의 모스크가 잔지바르 서쪽과 남쪽에 만들어졌다. 오늘날 남아있는 스톤타운의 아름다운 아랍식 건축물에는 어쩌면 노예들의 땀과 피가 스며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성자에게는 과거가 있다


▎스톤타운에 우뚝 솟은 영국 국교회 밑에는 노예무역의 흑역사가 묻혀 있다. 깔끔한 국교회 지붕과 슬레이트 지붕의 대조가 영국의 식민역사를 연상케 한다.
모든 역사에는 영고성쇠가 있기 마련이다. 계절적 요인은 향료 생산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했으며, 1872년에는 허리케인이 섬을 휩쓸고 갔다. 게다가 이듬해인 1837년에는 노예제가 폐지됐다. 세계 향료시장의 가격이 내려가기 시작했고 노예제에 의존하던 농장경영은 더이상 불가능해졌다. 잔지바르의 스톤타운 주택가격이 1903~1909년 사이에 무려 50~70% 폭락했다. 많은 아랍인은 집을 팔고 외곽으로 이사를 가거나 본국인 오만으로 돌아가는 이도 생겨났다. 향료의 힘, 노예의 힘이 만들어낸 번성과 몰락의 순간이다.

스톤타운 복판에 영국 국교회가 웅장하게 버티고 있다. 본디 노예시장이었던 장소다. 노예제를 폐지하고 그 위에 교회를 세웠다. 교회당 중심에 동그랗게 표시된 지점이 하나 있는데, 노예가 상품으로 호출돼 만인에게 구매되기 위해 서있던 포인트다. 앞마당에는 노예기념비가 을씨년스런 날을 기억하고 있다.

기념관 지하에는 당시 노예 수용소가 위치한다. 여성과 아이, 남성으로 양분된 노예창고는 무려 50여 명씩 수용한 곳이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 좁고도 비참한 상황이다. 번화한 옛 거리와 아름다운 건축물에 노예상품으로 축적된 더러운 흑역사가 숨어 있다. 노예시장은 공식적으로는 1873년에 폐지됐다. 그러나 돈이 되는 최고의 장사를 노예상인이 쉽게 포기할 성질은 아니었다. 잔지바르 북서해안에 비밀리에 운영되던 노예창고는 노예제 폐지 이후의 비밀공간이었다.

유의해야 할 것은 그들 노예제도가 일부 프랑스인 이외에 아랍인에 의해 주도적으로 운영됐다는 점이다. 술탄으로서 14년간 통치했던 사이드(ajid bin Said)는 노예무역에 힘을 쏟았다. 잔지바르의 말린디(Malindi)는 중동과의 노예 매매를 위한 스와힐리 해안의 주요 항구였다. 19세기 중반, 항구를 통해 매년 5만 명의 노예가 빠져나갔다.

노예 다수는 악명 높은 아랍 노예상인이자 상아 상인인 티푸 티브(Tippu Tib)의 포로들이었다. 티브는 4000명의 강력한 원정대를 이끌고 아프리카 내부에서 노예를 사냥했다. 추장은 마을주민을 노예로 팔아 넘겼다. 티브는 상아를 노예 캐러밴을 이용하여 잔지바르로 옮기고 큰 이익을 위해 노예 시장에서 사람을 팔아먹는 이중 장사를 해서 부를 축적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티브는 여러 농장과 1만 명의 노예를 소유한 잔지바르의 가장 부유한 남성 중 한 명이 됐다.

여하튼 많은 노예가 잔지바르 도시국가의 번성에 기여했다.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잔지바르의 우아한 도시경영을 떠받친 것도 노예노동이었다. 아프리카 내륙에서는 코끼리 사냥에 동원돼 상아를 잔지바르로 날랐다. 잔지바르 항구에서 상아는 비싼 값에 세계로 팔려나갔다. 코끼리가 죽어가며 남긴 희생물에 인간들은 높은 품격을 부여하고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조각공예를 선보였다. 상아가 배로 수출됐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인도양을 건너온 인도인


▎1964년 잠깐의 독립왕국을 거쳐 잔지바르는 탄자니아 공화국의 일부가 됐다. 이제는 탄자니아 국민인 청소년들이 항구에서 물장난을 치고 있다.
잔지바르 시내에는 자그마한 힌두사원이 있다. 사원을 이리저리 물어서 간신히 찾았다. 사원 규모는 자그마했다. 마당에는 비둘기떼가 가득한 전형적인 시바사원. 잔지바르는 인도 서부 말라바르 해안과 북서부의 구자라트에서 온 상인들이 뿌리를 내렸다.

인도의 서쪽 해안 지역은 두 지역에 의해 지배됐다. 하나는 말라바르 해안을 따라 내려가는 향신료의 주요 산지, 다른 하나는 인도양 무역에서 윤활유와도 같은 구자라트의 면직물 주요 산지였다. 말라바르 해안은 전략적 요충지로서, 중국과 서남아시아 간의 무역에서 중요 화물 환적 지점이었다. 중국배가 인도 남서부 퀼론까지 가서 무역을 했는데, 퀼론에서 더 작은 무슬림 배로 물건이 환적돼 서쪽 잔지바르에 당도했다.

강한 남서 계절풍이 부는 우기에는 말라바르 해안의 해상 통신이 5월부터 8월까지 4개월간 모두 정지됐다. 위대한 항해가인 이븐 바투타에 따르면, 말라바르 해안 전체를 따라 육상 무역로가 있었는데 그가 본 루트 중 가장 안전하다고 했다. 바투타는 이 연안 지역의 지도자와 거주민이 직접적으로 인도양 무역에 종사하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호나부르(Honavur)의 술탄이던 자말 알 딘(Jamal al-Din)은 칸나노르(Cannanor)의 선주이자 통치자의 아들이었으며, 주르파탄(Jurfattan)의 왕자는 오만과 페르시아, 예멘으로 항해하는 거대한 배를 여러 척 소유하고 있었다. 바투타는 캘리컷에서 델리의 술탄의 소유인 배를 발견했는데 그 배를 통해 술탄은 중개상을 보내 호르무즈와 페르시아 만의 카티프에서 아랍인을 징병하도록 했다.

바투타는 스리랑카 통치자의 소유인 100척의 대형 선박을 보았는데 이 배들은 코로만델 해안을 따라 무역을 했다. 바투타가 스리랑카에 방문했을 때 예멘으로 막 출항하려는 한 통치자의 배 8척이 코르만델 해안에 있는 곳을 보았다. 퀼론의 상인은 어마어마하게 부자였다고 전해지며, 한 상인은 대형 선박을 소유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캘리컷은 유명한 선주인 미스깔(Mithqal)의 고향인데, 그에게는 인도·중국·예멘·페르시아와 무역을 하는 배가 많았다. 그는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메카에 있는 거대한 모스크에 대대적으로 기부했다. 자신들의 부와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상인들은 말라바르 해안 지역에서 정치적으로 지배계급이 아니었다.

구자라트는 인도양 경제 지역에서 고급품과 원재료의 생산지로서뿐만 아니라 인도양 전체에서 사용된 면직물의 생산지로서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15세기에 구자라트는 서쪽으로는 소말리아에서 홍해와 말라카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서남아시아의 향신료를 생산하는 섬들을 포함해 인도양 전체에 물건을 대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잔지바르에 이들 말라바르와 구자라트의 상인 후예들이 살고 있음은 두말 할 것 없다.

사교클럽의 유희공간으로 전락하다

잔지바르를 문명이 용광로로 만드는 데 빠질 수 없는 마지막 존재는 유럽인이다. 1890년경까지 잔지바르 술탄은 몸바사와 다르에스살람을 포함한 잔지(Zanj)라고 알려진 스와힐리 해안의 상당 부분을 장악했다. 그러나 1886년, 영국과 독일은 잔지바르의 일부를 자신들의 제국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잔지바르는 결국 대영제국의 손에 들어갔다.

모두들 앞다퉈 아프리카로 몰려드는 상황에서 독일과 프랑스, 영국은 아프리카 통제권을 두고 대립했고, 잔지바르는 패배할 운명에 처했다. 독일은 탕가니카, 그리고 영국은 케냐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잔지바르 술탄은 10마일에 불과한 본토의 해안 지역을 명목적으로나 다스리게 됐다. 잔지바르에서 술탄은 영국의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술탄이 영국의 비위를 거스르자 그의 궁전은 1896년 폭격당했다.

19세기말, 잔지바르에는 500명 정도의 유럽인이 거주했다. 그들은 대부분 전문 인력이었지만, 적게나마 관리직에서 일하거나 이미 은퇴한 경우도 있었다. 특히 이들은 좋은 기후와 쾌적한 지형, 고요한 분위기와 스포츠를 즐기는 삶(심지어 나인홀 코스 골프도 있었다), 적절한 문화생활을 누렸다.

이들의 문화생활을 위한 영화관과 박물관이 있었으며, 아랍이나 스와힐리, 그리고 인도 식당도 많아 동방의 요리를 만끽할 수도 있었다. 이들은 또한 유명한 영국식 클럽 모임을 소개했고, 그 결과 힌두교도, 이스말리파, 고아인, 보호라파, 시아파, 메몬파 등 모든 종류의 공동체에서도 영국식과 유사한 사교 클럽을 형성했다.

아랍과 아프리카의 클럽 역시 스포츠 위주였다. 아랍인은 모여서 섬의 야생지대에 사는 돼지와 새들을 사냥했고, 아프리카인은 모여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축구를 즐겼다. 클럽은 잔지바르에 사는 다양한 공동체의 사회적 융합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오히려 클럽 형성의 결과로 실생활에서 인종주의가 만연해졌다.

정부는 여전히 민중의 헌법이 아닌 술탄의 칙령으로 운영됐다. 아프리카인의 교육을 위해서 충분한 돈이 투자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다만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독립 이전의 케냐나 탕가니카와 같은 이웃들보다는 잔지바르에 사는 아프리카인의 교육수준과 삶의 질이 더 높았다.

1963년 12월 10일, 잔지바르 영국보호령이 종식되기까지 무려 9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영국은 잔지바르 독립을 즉각 허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국의 잔지바르 법(1963년)에 의해 영국은 보호령을 종료하고, 잔지바르에서 영연방 내의 독립 국가로서 완전한 자치를 제공할 조항을 마련했다. 보호령이 폐지되면서 잔지바르는 술탄 하에서 헌법 군주국이 됐다.

그러나 불과 1개월 후에 술탄 자 쉬드 빈 압둘라는 혁명으로 면직됐다. 술탄은 유배 생활로 도망갔고 술탄국은 잔지바르와 펨바 인민공화국으로 바뀌었다. 1964년 4월, 공화국은 탕가니카 본토와 합병돼 탄자니아 유나이티드(United Republic of Tanzania)라는 이름으로 개명됐다. 우리가 문명의 용광로를 다룰 때 인도양의 잔지바르를 빼놓을 수 없는 기구하고도 복잡한 섬의 연대기다.

주강현 - 제주대 석좌교수, 아시아퍼시픽 해양문화연구원장. 해양사·문화사·생활사·생태학·민속학·고고학 등 전방위로 연구해온 우리 시대의 대표적 ‘지식 노마드’이자 비교해양문명사 연구에 몰두하는 해양문명사가. 아시아 바다는 물론 대양의 섬으로 시야를 넓혀가며 비교해양문명사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적도의 침묵> <독도강치 멸종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710호 (2017.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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