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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행] 남도 고택에 깃든 선비정신 

“흉년에는 땅을 사들이지 말라” 

글·사진 이대흠 시인
‘누구든 퍼 가시오’ 새겨진 뒤주 구멍…‘살이’보다 ‘살림’ 앞세워 존경을 얻다

고택의 흑기와는 색이 바랬다. 그러나 짱짱한 버티고 선 기둥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정좌한 선비를 떠오르게 한다. 대문에서 안채에 이르는 구불구불한 길, 풍토에 맞게 꾸려진 정원에서 ‘살림살이’에 대한 선조들의 철학을 엿볼 수 있었다.


▎전남 나주에 위치한 남파고택 전경. 대문에서부터 구불구불한 길을 거쳐 마주한 안채는 색 바랜 기와와 짙어지는 기둥이 대조되면서 멋스러움을 더한다.
우리는 ‘살림살이’를 줄여서 쓸 때 ‘살림’이라 한다. ‘살림’을 차렸다고 하지, ‘살이’를 차렸다고 하지는 않는다. ‘서울살이가 시작됐다’는 말처럼, ‘살이’는 개인의 생활이 시작됐다는 의미로 쓰인다. ‘살림’이 관계성을 중요시한 말이라면, ‘살이’는 단독성에 방점을 찍은 말이다.

살림살이라는 말이 ‘살이살림’이 아니라, ‘살림’을 앞세웠다는 점에 주목한다. 살아야 살릴 수 있는 게 아니라, 살려야 살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단어 하나에도 우리네 조상들의 철학이 담겨 있다.

‘살림살이’라는 말이 가장 잘 실현된 곳을 찾는다면, 경북 경주의 최부자집이나 전남 구례의 운조루(雲鳥褸)를 꼽을 수 있다. 운조루에는 특별한 뒤주가 있다. 통나무 원목을 파서 만든 뒤주인데, 거기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누구든지 쌀을 퍼가도 된다는 뜻이다. 운조루의 품 넓은 집 모양과 어울리는 말이다. 그런 뜻을 품고 살았기에 수많은 재난을 겪으면서도 운조루 사람들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잘 살리고, 잘 살아서 오래 살 수 있었을 종가집 몇 군데를 둘러보는 게 이번 여행의 목적이다. 나주의 남파고택(南坡古宅)과 강진의 명발당(明發堂), 장흥의 오헌고택(梧軒古宅)을 목적지로 정했다. 운조루나 전남 해남의 녹우당(綠雨當)에 비해 덜 알려져 있고, 세 곳의 종가가 저마다의 특색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오래된 전통을 지닌 집을 보노라면 그 집에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아니 그 집에 살았던 사람들의 정신까지 들여다보인다고 해야겠다. 그것도 대를 이어온 지가 오래된 종가의 경우에는 그 집만의 특별한 음식이나,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성격까지도 드러나 보인다.

남파고택(국가민속문화재 263호)에서는 남방의 식물들이 흔하게 보인다. 정원에는 파초나 선인장, 종려나무가 심어져 있고, 연못에는 연꽃과 부레옥잠이 자라고 있다. 남쪽의 온후한 기후와 풍토에 덕에 독특한 정원이 꾸며졌다. 이 집은 종려나무가 파수꾼이다. 백 년은 됐음직한 크기다. 너른 손을 내밀어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는 것 같다. 중문을 지나 정원과 담장 사이로 휘어진 길이 있다.

초가 시절을 잊지 않은 팔작기와집


▎(왼쪽) 남파는 멍석 만한 돌그릇을 만들어 가택신의 기세를 눌렀다. 길한 일도 급하게 들어오면 흉이 될 수 있음을 남파는 알고 있었다. / (오른쪽) 만석지기였던 남파지만, 묫자리에 쓰일 번듯한 월대조차 사치스럽게 여겼다. 나주 영천사 뒷편에 자리 잡은 남파의 묘.
안과 바깥을 잇는 문은 기가 흐르는 통로라고 여기는 게 우리네 풍수사상이다. 대문이나 중문을 엇갈리게 놓는 것이나, 중문을 지나서 안채가 정면으로 보이지 않게 하는 것 등은 바깥 기운이 한꺼번에 닥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대문은 동향이고 중문과 안채는 남향이지만, 중문을 지나면 담장이 바로 보이고, 동향길 끝에 남향의 안채가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대문을 들어선 이는 세 번 방향을 틀어야 안채와 마주할 수 있다.

길은 풍수상 수기(水氣)를 뜻하고, 수기는 돈과 직결된다. 하지만 한꺼번에 들어오는 물은 수해가 되듯이, 한꺼번에 들어오는 재물도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 지게로 기차를 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큰 강을 집안으로 흐르게 할 수는 없어도 작은 도랑은 집안으로 흐르게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논에 물 대듯이 조금씩 흐르는 물을 모아 온 논을 적시게 해야 하는 게 재물을 보는 조상들의 눈이었다.

남파고택의 안채는 한눈에 보기에도 대단히 큰 집이다. 보기에도 굵은 기둥이 들보를 받치고 있다. 구조를 보니 정면 7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처마는 모두 겹처마다. 모두 4칸 규모로 부엌, 안방, 대청을 배치하고, 동쪽 끝엔 앞뒤로 방을 1칸씩 들였다. 동쪽 방은 생기가 일어나는 곳이기에, 갓 결혼한 아들며느리에게 내어줬다는 방이다.

하지만 단순히 칸수만 세어서는 큰 의미가 없다. 여염집의 칸과는 크기가 다르다. 평수로 따졌을 때 48평이 나온다니, 단일 한옥 건축물로는 보기 드문 크기다. 장흥군수를 지냈던 남파(南坡) 박재규(1857-1931)가 1910년에 장흥 관아의 모습을 본 따서 지었기에 ‘박장흥댁’이나 ‘박군수댁’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비로소 이 집이 지닌 웅장함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것 같다.

안채 뒤편에는 아담한 초가가 한 채 있다. 남파가 처음 이곳에 터를 잡을 때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대개 새집을 지을 때 이전 건물을 허무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이 집안사람들은 처음의 그 집을 허물지 않고 아직도 짚단을 씌워 보존하고 있다. 이전의 것을 쉽게 버리고 새것을 빨리 취하는 것이 한국인 습성의 문제점이라는데, 남파고택의 이런 정신은 되새겨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초가집 섬돌 위에 고무신 두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깨끗이 닦인 마루에 앉아 있자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처음 이곳에 터를 잡았던 이는 어떤 꿈을 꿨을까. 남파 박재규가 1884년에 처음 지었다는 집이 이 초가집이다. 그는 이곳에 터를 잡고 살다가 재산이 늘자 1910년에는 안채와 사랑채를 지었고, 1934년에는 문간채와 바깥사랑채를 지었다. 시대에 따라서 양식을 조금씩 달라졌으니, 남파고택에서 우리나라 근대 건축의 변천사를 읽을 수가 있다.

이 집에 있는 물건 중 가장 특이한 것은 안채 뒤쪽에 놓인 커다란 돌그릇이다. 주인인 박경중 선생은 ‘돌확’이라고 부른다. 돌로 만든 것이니 이름에 ‘돌’이 들어가는 그렇다 하겠지만, ‘확’이라는 말이 따라 붙는 건 왜인지를 모른다. 그렇다고 어디에도 비슷한 물건이 없으니, 어디에서 이름을 갖다 붙이기도 어렵다.

돌확은 목욕탕처럼 사각으로 잘 깎인 모양이다. 높이는 70~80㎝쯤 되고, 각 면의 길이는 2m쯤 돼 보인다. 물을 받아쓰는 그릇인데, 단순히 물만 받기 위해 만든 것은 아닌 듯하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머슴들이 새벽 약수를 길어다 담았던 통일까 싶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남파고택에는 멍석 크기만 한 돌확이 있다


▎해남 윤씨 일가는 귀양 온 정약용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만덕산 기슭에 자리잡은 다산초당에 오르면 강진만이 한눈에 보인다.
내력이 있다. 남파 박재규가 안채를 짓고 나서 집안에 우환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손자 둘이 연이어 죽었다. 갑자기 젊은 과부 둘이 집안에 생겨나자, 비방(祕方)이 필요했다. 풍수가가 말했다. 집터의 기가 너무 세서 그런 것이니, 그 기운을 눌러 줘야 한다고.

방법은 두 가지였다. 그 중 하나는 안채의 상량문을 고쳐 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안채의 뒤에 이 돌덩이를 놓는 것이었다. 안채의 뒷자리는 집터신인 ‘철륭’의 자리이다. 일어서려는 기운을 죽이지 않고, 지그시 눌러 그 기운을 조금씩 쓰는 방법이다. 남파는 막대한 돈을 투자해서 이 ‘돌확’를 만들었다. 몇 마지기의 논을 팔고, 두어 달 동안 장인들에게 밥 먹여가며 만들었다. 나주의 진산인 금성산에서 돌을 구해 이 커다란 석물을 만들었는데, 옮겨오는 것도 쉽게 할 수 없었다. 집밖에서 집안으로 들이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이걸 들이기 위해 안채로 통하는 협문 자리를 헐고 나서야 돌확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풍수라는 게 의미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 돌덩이가 누른 것이 어디 지기(地氣)뿐이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1884년 400~500석지기였던 남파가 1910년대에는 만석지기를 이루었으니. 날뛰는 마음을 붙잡아둔 것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은가, 짧은 기간에 20배가 넘는 부를 이루었으니, 잘될 때는 조심하고, 안될 때는 시기를 기다리는 게 현명한 자들의 마음 다스리는 방법일 것이다.

함께 온 오성인 시인은 대청마루 문틀에 기대 밖을 보고 있고, 최연규 선생은 박경종 선생과 오래된 인연이 있는지라 시간을 눅이며 차를 들고 있다. 저들의 마음속에도 몇 근 돌멩이가 들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남파고택을 나와 나주 시내에서 영산강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곳이 있다는 최연규 선생을 따라 가야산 영천사로 향했다.

영천사는 작은 절이다. 비구니 스님 두 분이 수도하고 있는 곳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걸어 올라가니, 아직 단청을 하지 않은 대웅전이 보인다. 대웅전을 등지고 서니, 과연 영산강의 흘러드는 모양이 예사롭지 않다. 강을 좌우에 두고 서릿발처럼 틔어 나온 아파트와 빌딩과 낮은 건물들. 나주가 한 아름에 안겨온다. 맑은 날이면 무등산 천황봉도 보인다고 하나, 날이 흐려서 천황봉은 심연으로 들어왔다.

물이 나오지 않는 영천사 약수터에서 고개를 드니, 언덕 위에 무덤 하나가 있다. 오래된 비문이 있기에 읽어보니, 이런! 바로 남파의 무덤이 아닌가. 무슨 인연이란 말인가. 조금 전 남파고택을 보고 왔는데, 뜻밖에 남파묘를 만난 것이다. 무덤은 그의 생가에 비하면 초라해 보인다. 문득 그의 온 생을 단 하루 만에 내가 걸었다는 느낌이다. 여하튼 하루 만에 그의 집 두 채를 다 보았다. 남파의 살림집과 뗏장집의 다 보았으니, 남파의 집을 다 본 셈이다. 남파의 고택과 남파의 현택(玄宅) 사이로 강이 흐른다.

명발당은 강진군 도암면 향촌리에 있는 해남 윤씨 향촌파의 종가다. 해남 윤씨는 다산과 인연이 깊다. 한때 녹우당의 주인이었던 윤두서가 다산의 외증조부이며, 유배 온 다산을 물심양면으로 도와 준 사람들도 해남 윤씨 일가다. 그중 윤광택(1732~1804), 윤서유(1764~1821), 윤영희(윤창모, 1795~1856) 3대는 특히 인연이 깊었다. 윤광택은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과 친분이 깊었다.

노을빛 치마에 편지를 쓰다


▎비죽비죽 솟아오른 기암괴석이 천자의 면류관 같다고 해 천관산(天冠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오헌고택을 감싸고 있는 천관산 전경.
다산(1762~1836)보다 두 살 아래였던 윤서유는 유배지에 있던 다산의 뒤를 봐주다가 서로 사돈 관계를 맺었다. 다산은 윤서유의 아들 윤영희에게 외동딸을 시집 보낸 것이다. 아홉 자식을 두었지만, 여섯을 먼저 여의었던 다산으로서는 어지간한 상대가 아니었으면 결정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유배를 온 처지라 하여도 한때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하였던 다산이었으니, 유배지의 향반 집안으로 딸을 보내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명발당은 다산의 사돈집이고, 사윗집이고, 외동딸의 시댁이다. 하지만 뿌리 깊은 종가에 뼈대 있다는 가문의 집 치고는 조금 쇠락한 느낌이 든다. 이유가 있다. 다산의 사위인 윤영희가 1813년에 경기도로 이주하면서 이 집을 팔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다산의 외손자 사랑은 끔찍해서, 외손자인 윤정기(1814~1879)를 10대 때에 청나라 연경으로 유학을 보낸다. 윤정기는 외할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학문에 정진해, 청나라에도 이름을 떨칠 정도가 되었다. 특히 그의 시는 연경(燕京)의 학자 주당(周棠)이 평하기를 “백홍(白虹)의 기상이 있다”고까지 극찬하였고 ‘방산’이라는 호까지 지어 보낼 정도였다.

국내에 돌아온 윤정기에게 국내의 내로라하는 학자나 벼슬아치들이 교분 쌓기를 원하였다. 그런데 윤정기는 슬하에 아들을 두지 못했다. 그 정도 명성에, 그 시대적 사고방식이라면, 다른 여자를 얻어 자식 얻을 궁리를 할 수도 있으련만, 윤정기는 그런 길을 택하지 않았다. 윤정기의 관심은 오로지 학문이었다. 벼슬을 주어도 나가지 않았다. 그만큼 윤정기의 학자로서의 명성은 높아갔겠지만, 집안 살림은 시나브로 줄었을 것이다.

윤정기가 어느 정도 이름을 떨쳤을까.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그러자 현재 이 집에 살고 있는 윤정현 시인이 말했다. “말하자면 이 시대의 백낙청 선생쯤 되었다고 보면 될 거야.” 그럴 듯한 비교라고 여겨졌다.

다산의 사위가 팔고 간 이 집을 그 집안에서 다시 사들인 것은 근래의 일이다. 때문에 일찍부터 문화재로 지정받아 수리 보수를 할 시기를 상당히 놓쳐버렸다. 하지만 원래의 뼈대가 짱짱해서인지 아직도 굳건함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남파고택이나 오헌고택이 국가지정 문화재인 반면 명발당은 군지정문화재다. 본채는 살림집으로는 손색이 없고, 소대정(小坮亭) 기와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 본채에 향촌파의 방계 후손인 윤 시인이 살고 있는 덕분에 집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 사랑채도 보수 계획이 잡혀 있다니 다행이다 싶다.

마주보이는 산은 덕룡산이다. 해남 윤씨 집안은 ‘덕(德)’을 숭상하는 집안이다. 그래서 이 집 앞의 산이 덕룡산(德龍山)이고, 덕음산(德蔭山)인 것만 보아도, 이 집안이 무엇으로 바탕으로 살았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자기를 지키고, 남을 살리는 자세가 아니고서 무언가를 이루기는 어렵다.

다산의 강진 유배 시절에 부인 홍씨는 시집올 때 입고 왔던 낡은 치마 여섯 폭을 보내온다. 시집올 때 입었던 홍의였는데, 오래돼 그 색이 바래 자색치마가 되어 있었다. 다산은 낡은 그 치마를 오려 종이를 붙여 첩을 만든다. 그게 얼마 전 경매 시장에서 7억5000만원에 국립민속박물관이 사들였다던 하피첩(霞帔帖)이다. 우리말로 하면 ‘노을빛 치마에 쓴 편지’ 정도일 것이다. 이렇게 네 권의 하피첩을 엮고 나서 남은 천으로 다산은 윤씨 가문으로 시집가는 딸에게 매화쌍조도(梅花雙鳥圖) 그려주고는 거기에 시를 한편 얹는다.

翩翩飛鳥(편편비조) 펄럭펄럭 날던 새들
息我庭梅(식아정매) 매화 가지에 쉬는구나
有烈其芳(유열기방) 매화 향 짙게 풍기니
惠然其來(혜연기래) 거기 따른 것이겠지
爰止爰棲(원지원루) 이제 여기 머물러 사니
樂爾家室(낙이가실) 너도 이처럼 즐겁게 살렴
華之旣榮(화지기영) 꽃은 이미 넘쳤으니
有蕡其實(유분기실) 줄래줄래 열매도 맺히리


하나 남은 딸을 보내는 그 마음이야 오로지 행복하고, 딸의 그 입에서 봄날의 새처럼 즐거이 노래 부르는 소리만 나오기를 바라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대학자도, 아무리 비천한 직업을 가진 자도 자식에게 향하는 마음은 하나일 것이다.

대(代) 이어 10대가 시인인 집안도 있다


▎(왼쪽) 뽐낼 것 없는 체구와 백의(白衣) 가운데서도 눈빛만은 형형하다. 오헌은 조선 말 호남의병을 이끌었던 의병장 가운데 한 명이기도 했다. / (오른쪽) 남도 가옥은 추위에 느슨하고 더위에 냉정하다. 탁 트여 널따란 대청마루가 이색적이다.
시인 한 사람이 나온 집은 3대가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란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만큼 시인 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한 종갓집에서 10대가 연이어 시를 쓰고 문집을 남겼다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장흥 위씨의 오헌고택(중요민속문화재 270호)이 그렇다. 오헌(梧軒) 위계룡(1870~1948)를 중심에 두고 위로는 안항공 위덕후(1556~1605)로부터, 아래로는 현재 이 집에 살고 있는 상산 위성탁(1927~)까지 10대가 시인이다. 여기에 수능시험에 출제된 적이 있는 ‘농가’의 주인공 존재(存齋) 위백규 등을 포함한다면 그 수는 실로 엄청날 것이다. <구세유고> <십세유고>를 넘어 <십이세유고> 등을 꿈꿀 수 있는 것도 이러한 학문적 바탕이 있으니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고택 입구 연못이 바라다 보이는 팽나무 아래에 의자 하나가 놓여 있다. 집주인이 이따금 와서 앉아 연못을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오랫동안 교직에서 몸담고 있다가, 퇴직한 이후에도 학문의 길을 계속 걷고 있는 위성탁 옹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위성탁 옹은 붓글씨도 수준급인데, 특히 예서체에 능하다. 시조창은 국보급이어서, 전국 단위의 시조창 모임을 이끌기도 했다. 지금도 수시로 심사위원으로 불려 다닌다. 그의 막냇동생인 향토사학자 위성 선생은 방촌유물관의 명예관장을 거의 붙박이로 맡고 있기도 하다.

솟을대문이 있지만, 몇 년 전부터는 사랑채로 바로 들어갈 수 있게 한쪽 담장을 뚫어 차가 드나들 수 있게 했다. 고택은 고택대로 두더라도 생활의 편의를 반영한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주인은 밖에 나가 있고, 함께 한 이는 주인의 막냇동생인 위성(방촌유물관장) 선생이다. 그도 이 집에서 나고 자랐으니, 그도 주인이라 할 만하다.

사랑채에는 수많은 현판이 걸려 있다. 이 집을 거쳐 간 주인들의 당호(堂號)가 적힌 것들이다. 사랑채 마루에 앉으면 천관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천관산은 보는 방향에 따라 여러 성질을 보여 주는데 마주한 천관산은 순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순하다고 낮은 것은 아니다. 이미 높기에 순한 것이다. 사랑채 정원에는 키가 2m쯤 돼 보이는 선인장과 파초 등속들이 자리하고 있다.

흐트러짐 없는 남도 선비의 살림살이

중문을 거치면 아래채의 옆구리이고, 본채는 또 몇 단의 돌계단 위에 있다. 마당 가운데 빨랫줄이 걸려 있다. 빨래가 하나도 없어서인지 바지랑대는 비스듬히 누워있다. 일꾼이 지게를 등지고 누워 풀이파리 하나 물고 있는 모습 같다. 아래채 한쪽에 목욕실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만들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관산읍내 목욕탕 생기기 전에는 명절 때면 동네 여자들이 전부 여기 와서 목욕하고 갔어.”

위성 관장의 말이다.

구석구석을 살펴보는데, 흐트러짐을 발견할 수가 없다. 지방에 있기에 오히려 깐깐한 향반들의 자세가 이러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단정하고, 정갈하다.

본채는 6칸접집이다. 일자형의 집인데, 어깨를 숙이지 않고 쫙 펴고 있다. 그렇다고 정도 이상으로 처마가 솟아 있지도 않다. 대대로 큰 벼슬을 하지는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꿇리지 않을 정도는 준비돼 있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원래의 대문을 통해 들어가 보면, 이 집도 안채를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외부의 기운은 긍정의 것이건 부정의 것이건 쉬 들이지 않겠다는 자세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조금씩 받고, 나쁜 것도 들어오는 것도 다 막지는 못하겠지만, 걸러서 들이겠다는 것이다.

사랑채는 본채와 아래채 너머에 서로 등을 맞대고 있다. 산 사람의 집이 모두 다섯 채이고, 본채의 왼쪽 어깨 뒤로 사당이 있다. 이것이 전형적인 남도 양반집의 형태이다. 하지만 집들이 처마를 맞대고 있지는 않다. 처마와 처마 사이는 여유롭게 떨어져 있다. 날씨와 관련된 것이다. 아무래도 따뜻한 지방일수록 처마와 처마 사이가 떨어져 있다.

마루가 많은 것도 남도 전통 가옥의 특징이다. 그만큼 추위에는 느슨하고, 더위에는 냉정한 것이다. 선인장이 키 높이 이상으로 자라고 파초가 자라고, 연못이나 정원에 있는 아열대성 식물들이 아무 탈 없이 성장하는 곳이니, 그럴 만도 하다.

오헌고택이 자랑할 만한 것은 이미 문집으로 묶인 <구세유고>에 더해 지금도 시를 쓰고 있는 후손이 있다는 데에만 있지 않다. 오헌고택에는 채영신이 그린 오헌 위계룡의 초상화가 있다. 채영신은 고종의 어진을 그린 화가로도 유명하다. 그런 화가가 그린 시골 선비의 초상화이니, 값을 논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는 향반들의 자세를 그의 초상화를 통해 본다. 오헌고택이 남도선비의 살림살이이고, 오헌 초상이 남도 선비의 얼굴이다.

이대흠 - 서울예대 문창과 졸업. 1994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 시집으로 <귀가 서럽다> <물속의 불> 등을 펴냈다. 1999년 <작가세계> 소설부문 신인상, 2010년 제7회 육사시문학상 젊은시인상을 받았다. 안도현 등과 함께 결성한 ‘시힘’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201710호 (2017.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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