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Home>월간중앙>사람과 사람

[스포츠 화제] 대표팀 전임 감독으로 코트 복귀한 허재 

“무리 속으로 들어가 끌고 나오는 게 진짜 카리스마” 

글 정영재 중앙일보 스포츠 선임기자 jerry@joongang.co.kr 사진 임현동 중앙일보 기자 lim.hyungdong@joongang.co.kr
남자농구 대표팀 맡아 4년 만에 아시아컵 3위 ‘쾌거’…11월 월드컵 亞-오세아니아 지역예선 통과에 전력투구

▎허재 감독이 이끄는 한국 남자농구 대표팀은 8월 레바논에서 열린 아시아컵에서 3위에 오르며 부활 가능성을 비쳤다. 한국 남자농구가 이 대회에서 3위에 오른 것은 4년 만이다.
‘농구 대통령’ 허재(52)는 역시 승부사였다. 아시아에서조차 힘을 못 쓰고 존재감도 미미하던 남자농구 대표팀 전임 감독을 맡은 지 1년 만에 팀을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허재 감독이 이끄는 한국은 지난 8월 21일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끝난 아시아컵 남자농구대회에서 4년 만에 3위에 올랐다.

한 경기 한 경기가 드라마틱했다. 광복절에 맞붙은 일본을 81대 68로 완파했고, 8강에서는 난적 필리핀을 118대 86,32점 차로 대파했다. 이 경기에서 3점슛을 21차례 시도해 무려 16개나 성공했다. 준결승에서 ‘아시아 최강’ 이란을 만나 27점 차 열세를 한때 뒤집었지만 결국 81대 87로 분패했다. 3~4위전에서는 우리보다 세계 랭킹이 높은 뉴질랜드를 80대 71로 눌렀다.

한국시간으로 새벽에 벌어진 경기를 뜬눈으로 지켜본 팬들은 “오랜만에 화끈한 농구를 봤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투혼! 역시 허재가 이끌면 다르다”며 환호했다. 허 감독의 장남 허웅(24·상무)은 고비마다 정확한 3점슛과 몸을 사리지 않는 수비로 한국의 3위 입상에 큰 공을 세웠다. ‘금수저 논란’도 쑥 들어가게 만들었다.

허 감독은 2015년 2월 프로농구 전주 KCC 감독에서 물러난 뒤 14개월의 공백 끝에 대한민국 농구 대표팀 전임감독으로 현장에 복귀해 달라진 리더십을 선보였다. 농구 대표팀은 오는 11월 홈앤드어웨이 방식으로 국제농구연맹(FIBA)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예선을 치른다.

월간중앙은 8월 31일 중앙일보 인터뷰실에서 허 감독을 만났다. 그는 “1년 야인으로 있으면서 솔직히 힘들고 괴로웠다. 이번 대회에서 선수들과 함께하면서 많이 치유됐다. 한국 농구가 팬들의 사랑을 다시 회복하는 데 작은 역할이라도 할 수 있으면 기쁘겠다”고 했다.

‘일본전 졌으면 어땠을까’ 등골이 오싹


▎허재는 선수로서 전성기를 기아자동차(현 모비스)에서 보냈다. 골밑슛을 노리는 허재를 삼성 선수들이 앞뒤로 달라붙어 막으려 하고 있다. 허재 뒤로 ‘람보 슈터’ 문경은(현 SK 감독)이 보인다.
아시아컵에서 3위에 올랐다. 가장 큰 소득은?

“사실 4강을 목표로 하고 갔다. 감독이라면 우승을 목표로 하는 게 맞지만 현실적으로 힘든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선수들이 너무 잘해줘서 3위까지 했다. 한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주장 오세근(30·KGC)을 중심으로 팀워크를 만들고 자신감 있게 한 게 성과로 나타난 것 같다. 나도 선수들 덕분에 자신감을 얻은 것이 큰 수확이다.”

일본전이 광복절에 열렸다. 부담되지는 않았나?

“이겨서 다행이지만, 게임이란 게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이길 것 같다는 거지, 이긴다는 건 없으니까. 처음엔 광복절에 하는 줄도 몰랐다. 현지시간으로는 8월 14일 밤이었으니까. 한국에서도 한·일전부터 관심을 갖고 TV 중계도 해 줬다고 하던데. 경기 다음 날에 일어나 생각해 보니 등골이 오싹하더라. 졌으면 어떻게 됐을까 싶어서….”

필리핀전에 3점슛 쇼를 펼쳐 미국프로농구(NBA)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빗대 ‘KOR’든스테이트, 김치 워리어스란 말까지 나왔는데.

“KCC 감독과 국가대표 감독을 하면서 난 슛 쏘는 걸 갖고 뭐라고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안 쏘면 뭐라고 했지. 찬스 났는데 머뭇머뭇 하다가 에러 해서 볼 뺏기면 왜 그런 플레이를 하냐고 야단을 쳤지. 이번 대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상대 수비보다 키가 작은 편인데 찬스 나면 자신 있게 던지라고 했다. 그날은 다들 컨디션이 좋았는지 생각 외로 너무 잘 들어갔다. ‘그분’이 오신 날이지. 허허.”

경기마다 다른 라인업을 선보였다. 12명을 그때그때 잘 기용하고 상대에 따라 맞춤형 전략을 펼친 게 잘 먹혔다.

“국제대회에서 신장과 웨이트(체중)의 열세는 항상 있는 거다. 오세근(2m)이나 이승현(상무·1m97㎝)이 센터로는 작은 편이다. 김종규(LG·2m6㎝)나 이종현(모비스·2m3㎝) 정도의 신장은 상대 팀에 5~6명씩 있다. 그래서 최준용(SK·2m)을 1번(포인트가드)에 세워 봤다. 최준용이 고등학교 시절 가드를 해봤으니 그 플레이를 해주면 팀에 에너지가 되지 않겠나 생각했다. 최준용이 대학교 4년 내내 3번(스몰 포워드)과 4번(빅 포워드)을 했다. 대표팀에 데려와서 갑자기 1번을 시키는 게 무리다. 그런데 그 키에 센스와 스피드가 있고 패스도 좀 할 줄 아니까 윙사이드에 슈터를 기용하면 효과가 날 걸로 계산했다. 좌우에 전준범(모비스)·임동섭(상무)·이정현(KCC)·허웅을 놓으면 좌우도 살고 포워드가 좋아지지 않겠나 생각했다. 리바운드 등 디펜스 부문도 강화하고.”

이란과의 4강전에서는 비록 졌지만 27점 차 열세를 딛고 한때 역전하기도 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선수들한테 6점이든, 8점이든 이기고 있으면 유지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또 7~8점 지고 있더라도 포기하지 마라, 끝까지 게임하는 모습이 나와야 한다고 했다. 여기까지 워낙 잘해왔는데 한 경기로 인해 물거품이 되게 하지 말고 승패를 떠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1쿼터 5분 만에 작전타임 2개를 다 썼다. 잘해야 되겠다는 생각에 의욕이 너무 앞선 것 같다. 감독으로서 잘했다고 생각한 게임도 이란전이지만, 아쉬웠던 게임도 이란전이었다.”

‘이란에 진 건 나 때문이었다’고 했는데.

“NBA 출신 센터 하메디 하다디(2m18㎝)를 상대로 그렇게 플레이하면 안 되는데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의욕이 앞섰던 것 같다. 초반에 어이없는 실책을 하고, 또 시작하자마자 오세근의 정상적인 플레이가 스크린 파울로 지적당하면서 게임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하다디를 어떻게 이용해서 공격할 건지를 좀 더 세세하게 짚어줬어야 하는데 ‘하다디 데리고 플레이 하자’ 정도로 끝내는 바람에 문제가 생겼다. 내 책임이다.”

“뭐든 확실하게, 할 땐 하고 쉴 땐 쉬어라”


▎허재 감독이 8월 15일(한국시간)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열린 아시아컵 일본과의 경기에서 승리가 확정되자 선수들과 함께 기뻐하고 있다. / 사진:대한농구협회
이란과 리턴매치를 한다면

“하다디가 있는 한 버거운 팀이다. 하다디가 없으면 나머지 4명이 50을 할 걸 하다디가 있으면 60을 발휘한다. 다음에 붙으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겠지만 우리도 자신감을 얻었으니 이길 확률이 높아지지 않겠나.”

하다디 같은 선수가 하루아침에 나올 순 없고, 국내에서 오래 뛴 리카르도 라틀리프(28·미국)의 귀화 추진은 어떻게 되고 있나?

“한국농구연맹(KBL)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결국 대우를 어떻게 해주느냐에 달린 것 같다. 라틀리프가 있으면 선수들의 믿음과 자신감이 커질 거다. 라틀리프가 골밑에 받치고 있으면 중장거리슛 실패에 대한 부담이 줄어 외곽이 살아날 수 있고, 수비에서 더블팀 같은 다양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 그 선수가 들어와서 이긴다는 건 아니고 들어와서 팀이 강해지지 않을까.”

허재 감독은 프로 경기 중에 마음에 안 드는 플레이가 나오면 벤치에서 ‘레이저’를 쏘는 것으로 유명했다. 선수들도 그를 매우 어려워했다. 그런데 이번 대표팀에서는 선수들끼리 의논해 훈련 일정을 조절하도록 하는가 하면 선수들을 감독 방으로 불러서 고기를 먹이기도 했다. “허재가 ‘부드러운 남자’로 바뀌고 있다”는 얘기가 나왔다.

선수들을 감독 방으로 불러서 고기를 먹였다던데.

“음식도 우리 선수들 입맛에 안 맞는 게 많았다. 그래서 매니저와 트레이너들이 돼지고기를 사 와서 양념장 발라 제육복음처럼 만들었다. 안남미를 쪄서 밥을 하고 김치랑 마른반찬에 먹으니 좋아하더라. 남정수 매니저가 요리를 준비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분위기를 살려 보려고 장포(하프라인에서 장거리슛) 내기도 했다.”

장포 내기에 감독 사비로 400달러를 걸었다던데. 그런 건 대한 농구협회에서 지원해주면 안 되나?

“내가 제3자 입장이라면 농구협회에 대한 불만 등을 얘기할 수 있겠지만 어쨌거나 같은 식구 아닌가. 회사원은 회사에 불만 없나? 휴가를 더 달라든가 등등. 불만이 있어도 내 입으로 말 못 하는 거 아닌가. 현실이 그러면 그렇게 받아들여야지.”

키 2m가 넘는 선수들이 항공편으로 이동하면서 장시간 이코노미석에서 시달린 게 논란이 됐는데.

“언론에서 그런 얘기가 많이 나오니까 농구협회가 달리 생각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내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지만 편하게 가면 좋다. 그런데 한 명당 1000만원씩만 따져도 항공료만 1억원이 드는데 쉬운 문제는 아니다. 내가 대표선수 시절에는 다 이코노미로 다녔지 비즈니스는 생각도 못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뀐 만큼 선수들에게 어느 정도 대우를 해주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허재 리더십’이 바뀌고 있는 것 같은데.

“난 별로 바뀐 게 없는 것 같은데 성적이 잘 나오니까 별 얘기가 다 나온다. 최근에 읽은 책에 이런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카리스마란 게 그냥 ‘따라와’ 해서 따라오게 만드는 게 아니다. 그 무리 속으로 들어가서 끌고 나오는 게 진정한 카리스마라는 거다. 지금까지도 혼자가 아니라 선수들과 잘 어울렸다. 난 혼낼 땐 혼내더라도 공과 사를 구별한다. 놀 땐 놀고, 쉴 땐 쉬고. 할 때만은 확실히 하자는 거다.”

“아들들아 승부욕을 더 키워라”


▎‘농구 대통령’ 허재 감독 삼부자.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허재·허웅(상무)· 허훈(연세대). / 사진:박종근
필리핀전에서 상대가 거칠게 나오자 작전타임을 불러 ‘쟤네 원래 저런 애들이야’라며 진정시켰는데.

“진짜 필리핀 선수들은 그렇다. 그 친구들이 그렇게 나오면 아예 다부지게 ‘너 죽어라’ 하고 한 방 때리든지. 그러지 않을 바엔 싸울 일이 없다. 경기를 크게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 페이스에 말리는 짓을 왜 하나.”

1년 동안 야인으로 있으며 많이 부드러워졌다는 평가가 있는데.

“1년 떠나 있었다고 변할 게 뭐가 있겠나. 솔직히 더 바빴던 것 같다. 프로농구 경기는 다 본 것 같다. 체육관에 가면 특정 팀 감독으로 간다는 얘기가 나올까 봐 경기장은 잘 안 가고 주로 TV로 봤다. 아무런 부담 없이 ‘내가 저 감독이라면 이렇게 하겠다, 타임을 지금 부르겠다, 왜 저 선수를 안 쓰지’ 이렇게 시뮬레이션을 많이 해봤다.”

허재 감독을 따라다니는 수식어 중 하나가 ‘웅이 아빠’다. 허 감독의 장남 허웅은 대표팀에 발탁돼도, 탈락해도 늘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실력 외의 ‘금수저 논란’에 시달리는 아들이 허 감독은 안쓰러웠다고 했다. 이번 대회를 계기로 그런 잡음은 상당히 사그라졌다.

허웅이 아시아컵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잘해줬다.

“허재 아들이란 것 때문에 본의 아니게 고생이 많았다. 대학을 나온 사회인이지만 어쨌든 어린 나이에 버티고 이겨내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게 대견하다. 주눅 들고 힘든 부분이 많았을 텐데. 대표팀에 뽑을 때는 내 아들 허웅이 아니라 농구선수 허웅이다. 1분을 뛰든, 10분을 뛰든, 20분을 뛰든 필요할 때 해줘야 하는 선수로 보는 거지. 혜택을 주는 건 전혀 없다. 오히려 욕을 먹으면 더 먹었지.”

허웅이 감독님이 자기한테 더 혼을 자주 낸다고 한다던데?

“욕 먹을 땐 욕 먹어야지. 바보 같은 짓 할 땐.”

차남 허훈(22·연세대)은 이번에 대표팀 발탁을 안 했다.

“허리가 안 좋다. 부상도 있고 상황상 안 될 것 같았다. 그럴 땐 잠깐 쉬는 거고.”

두 선수를 보면서 ‘역시 허재 아들이다’ 싶었던 적이 있나?

“그런 생각은 안 들었고 이제 어느 정도 하는구나, 저런 건 자신 있게 하는구나 싶은 때는 있다. 내 아들이라서 그렇다고 한 번도 생각 안 해봤다.”

두 아들이 아버지의 이런 점은 좀 빼앗아갔으면 좋겠다 싶은 것이 있나?

“욕심이랄까 승부욕 같은 걸 좀 더 가졌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승부욕이 없다는 건 아니고. 무리해서 공격하고 이런 게 아니라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더 적극적으로 해줬으면 단다.”

허 감독은 1998년 LG와의 프로농구 플레이오프에서 오른 손등 뼈가 골절된 상황에서 붕대를 감고 뛰었고, 챔피언결정전 7차전까지 소화했다. 그 얘기를 하자 허 감독은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지금 손가락이 다 바보 됐잖아. 승부욕도 승부욕이고, 어차피 몇 경기만 더하면 되는데 부러졌다고 죽겠어?”라며 웃었다.

허 감독은 “국가대표팀으로 인해 농구 인기가 살아났다는 게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인데 농구인으로서 뿌듯하다. KBL 리그도 곧 시작하고, 11월엔 축구 A매치처럼 홈앤드어웨이로 경기가 열리는데 많은 관심 가져주시면 선수들이 지금보다 더 자신감 갖고 하지 않겠나”고 말했다.

‘프로농구 시청률이 프로배구의 반도 안 된다’고 지적하자 그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모든 농구인이 반성해야 한다. 언론에서도 ‘프로농구 재미없다’는 기사만 쓰지 말고 라이벌을 부각시켜 주고, 기대감을 갖도록 써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 글 정영재 중앙일보 스포츠 선임기자 jerry@joongang.co.kr 사진 임현동 중앙일보 기자 lim.hyungdong@joongang.co.kr

201710호 (2017.09.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